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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4.2010

주체적 사고

소크라테스에 있어서 "아이러니irony," 즉 의심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표현 형식으로서의 풍자가 만들어낸 결정적인 성과가 있다면, 그것은 개인이 자신의 신념을 성찰없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natural attitude를 우회적으로 해체시켰다는 것이다. (풍자irony를 통해) 개인은 객관적 지식의 확실성을 상실하는 반면에 자기 자신(또는 주관적 자기해석)을 발견하게 된다. 이때야 비로소 개인은 자신이 지식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닿게 된다. 키에르케고르는 지식이 '무엇'인가라고 묻기 보다, 개인이 어떻게 지식과 자기 자신을 연결시키면서 자기 주관을 유지하는 가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키에르케고르가 보기에, 소크라테스는 인식하는 사람과 그가 인식하는 내용을 날카롭게 분리시켜버렸다. 어떻게 인식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이 인식하는 내용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Ronald J. Manheimer, Kierkegaard as Educator,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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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2010

성공하는 가르침의 10가지 법칙

1. 가르치려 하지 말라; 대신 가르치려는 대로 살아라.
2. 말로 바뀔것이라는 근거없는 가정을 버려라.
3.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대신 직접 보여 주어라.
4. "벌"로서 다스리려 하지 말아라; 고래조차 벌이 아니라 칭찬과 격려로 변한다.
5. 최고의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아라; 대신 최고의 학습자가 되도록 도우라.
6. 당신이 알고있는 것에 집중하게 말아라; 학습자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주목하도록 하라.
7. 학습자를 과소평가하지 말아라; 대신 그들의 눈높이에서 시작하라.
8. 책에 의존하지 말아라; 책은 필수적이나 삶은 책에 제한되지 않는다.
9.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라: 경청은 배움의 시작이요 끝이다. 반드시 개발되어져야한다.
10. 속해있는 교육기관의 문화를 존중하라.

Dr. Ted W. Ward
Professor Emeritus of Education and International Studies
Michigan State University and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http://www.wardconsultation.org/
http://www2.talbot.edu/ce20/educators/view.cfm?n=ted_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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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종이에 글을 써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다른 이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강한 흔적을 남김으로 지속적인 영향력을 확대해 가는 사람이 있다. 워드 박사의 삶은 후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미시건 주립대(MSU)와 트리니티 신학대학원(TEDS)에서 40년 이상을 가르쳤던 테드 워드박사는 교육자 리더십 개발에 있어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의 제자들이 미국 신학대학원과 선교단체를 식민지화하고 있다는 우스개소리가 나돌 정도이면 그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한 것인지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그의 가르침은 학습자의 역량을 최대한 그리고 지속적으로 개발하도록 돕는 것이 최고의 가르침이라는 그의 확고부동한 교육철학에 기초한다. 이를 위해 워드 박사는 학습자 중심의 가르침, 학습공동체를 통한 협동학습, 그리고 엄격한 질적연구조사방법을 강조하였다.

80에 가까운 노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정신은 날카롭고 균형있으며 그의 마음은 따듯하고 겸손하다. 평생을 교육자 개발에 헌신해 온 그가 이제 막 박사과정에 입문한 교육자들에게 작은 선물처럼 전해 준 "성공적인 교사의 십계명" 생각해 보니 그의 교육철학에 뭍어있는 집요하고도 지혜로우며 깊이있는 사람사랑을 느낄 수 있다.

bk

8.08.2010

이머징 교회 vs 개혁교회

이머징 교회의 정신ethos은 저항protest이다. 근대주의에 함몰된 기독교신앙을 구출하고자 저항하는 이머징 교회의 실천들은 역설적으로 탈근대주의에 과도히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자신의 존재기반인 '저항정신'을 스스로 위협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탈근대화가 그토록 해체하고 싶어하던 근대성의 뿌리는 바로 자기 이성과 합리성을 숭앙하는 자기중심성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으로 대변되는 이시대의 정신은 상대주의, 다원주의, 개인주의로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던 근대성의 전체주의, 획일주의, 집단주의의 숭배대상인 자기중심성에는 조금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면서 오히려 인간에게 부여된 보편자와 도덕률에 대한 인식능력은 부정함으로써 인간이성을 파도에 밀려 표류하는 부유물정도로 전락시켜버렸다. 이러한 탈근대주의에 의존하는 이머징 교회들이 갖는 위험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전통과 경험과 이성과 문화를 재해석하고 교정하는 절대 기준이 아니라, 상징과 경험을 형성하고 촉진시키려는 문화적 도구로 전락할 수 있는 가능성에 과도히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편, 끊임없이 개혁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의 개혁대상은 바로 교회 자신이며 개혁의 근거는 다른 어떤 사상이 아닌 진리의 말씀(sola scriptura) 이어야 한다는 개혁자들의 오래된 기치는 개인과 공동체가 진지하고 겸손한 자기성찰을 추구하는데 초월적 힘을 의존하게 함으로 자기 한계를 뛰어 넘어 계속되는 변혁과 진보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탁월한 사고의 틀(frame of reference)을 제공한다고 하겠다.
bk

7.18.2010

소명, 사명자, 그리고 배신자

내가 내 뜻을 행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한 사람도 잊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요한복음 6: 37-38

소명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소명의 내용에 집중한 나머지 소명을 주신 분을 잊어 버리는 것이다. 소명의 중요성은 소명의 내용에 있지 않고 소명의 원인자인 “부르시는 분”에게 있다.  소명의 원인자이며 조력자이시고 완성자이신 부르신 분의, 부르신 분을 위한, 부르신 분에 의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사명자라고 부른다. 사명자의 문자적 의미는 반드시 완수해야 할 명령을 부여 받은 사람이다. 따라서 사명자는 어디로 부르시든, 무엇으로 부르시든, 언제 부르시든 간에 부르신 분에게 집중하고 그 분을 위해, 그 분을 향해, 그리고 그 분에 의해 살아간다. 아버지의 일을 이루기 위해 오셨다고 선포하고 십자가를 지신 행복했던 예수를 쫓아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려 보냈던" 초대교회의 사명자들을 향해 이교도들은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별칭을 붙여 주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과 일방적인 방식을 통해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의 진실되고 진지한 논의와 공동체적 기도 없이 더 크고 부유한 교회를 "섬기기"위한다는 명목으로, 이미 부르심을 받은 교회 공동체를 일방적으로 헌신짝처럼 내던지는 영적 리더들의 "소명"운운은 아전인수의 극치이다. 예수의 소명은 자신에게 맏겨진 양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양들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허망한 자기의 야망을 비전이라는 허울로 포장하여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한 지체이기를 스스로 거부하면서 맡겨준신 공동체를 자신의 꿈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려는 야심가들을 하나님은 증오하신다고 지적한 본 회퍼의 통찰이 가슴에 칼을 대는 듯 하며, "나는 성공이 아니라 성실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테레사 수녀의 말씀이 머리를 울린다. 

bk

6.20.2010

사랑하는 딸아, 내가 같이 울어줄께

Joanne, my beloved daughter,

When I saw you for the first time,
you were crying because you were so excited to be born
and I was crying too because I was also excited to be a father.

A few minutes later, You were calm and went to sleep,
but I was keep crying because you were so beautiful.

When you woke up and cried again asking me to hold you,
I was crying because I was so happy that you needed me.

Three years later, when you went to a preschool for the first time,
you cried a lot because you were scared, and
I was crying too because I was also scared that you wouldn't be fine without me.

Sometimes when you were crying being spanked by me,
I was crying too because I felt terrible about me.

From now on, I don't know how often you will cry through out your life,
but I am pretty sure that you will cry sometimes for good or ill.



However,  Joanne, I want you to remember that
whenever you cry, I will cry with you
because I am your father and you are my daughter always and forever.


Happy birth day!

June 20, 2010

Your Dad, BK

5.20.2010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라!

오늘은 혼자가 아닌 공동체 안에서 리더십을 향상시키는 방법에 대해 간단히 나누고자 합니다. 리더의 자리에서 개인의 성장을 위해 여러 가지 연구와 공부를 거듭하여 자신의 한계를 넓혀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고 보완해 나가는 것은 더욱 효과적이고 고무적일 수 있습니다.  
존 맥스웰은 리더가 영향력을 더욱 많이 끼치기 위해서는 자신의 활동 범위, 소위 교제의 범위를 넓히라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안정적인 교제의 범위를 넘어 리더로서 영향을 주고받을 것을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연 자신의 영향력을 향상시키고 극대화시키기 위한 노력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한계를 확장하기 위해 맥스웰은 5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1. 당신의 측근 그룹을 넘어서라
우리의 측근 그룹을 벗어나기 위해 어디서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요? 맥스웰은 나의 측근의 친구 중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부터 시작할 것을 추천합니다. 이렇게 안정적인 관계의 범위를 벗어날 때는 아주 파격적인 변화보다는 절친한 사람과의 관계를 쉽게 건널 수 있는 다리 역할로 활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2. 당신의 전문 지식을 넘어서라
리더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문 지식을 활용하여 공동체를 섬깁니다. 이때 리더는 종종 자신의 전문적인 지식의 한계를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관계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전문 지식을 빌리는 것도 이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됩니다.
3. 당신의 강점을 넘어서라
리더는 모든 측면에서 자신의 강점을 살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강점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강점 뒤에는 반드시 약점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때, 리더는 자신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강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면, 더욱 영향력 있는 리더십을 가질 수 있는 시너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4. 당신의 편견을 넘어서라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지드는 편견 없는 생각이 세상에서 가장 보기 드물다 말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말이 사실이라고 동의해야 할지 모릅니다. 리더라면 이러한 생각의 한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신과 너무 다른 공동체를 바라보며 한편으로는 그 공동체를 정죄하고 또 한편으로는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점을 갖고 있는 공동체 속에 뛰어들어 그들의 강점을 발견하고 배우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5. 당신의 일상을 넘어서라
일상의 쳇바퀴를 한번 벗어나자는 것입니다. 매일 반복하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야 우리는 비로소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하루를 사는 데 급급하다 보면 리더는 비효율적인 과정을 경험하게 되어도 그 과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만남과 교제를 위해 자신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난다면, 설상 새로운 만남과 교제를 경험하지 않더라도 유익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리더는 자신의 리더십을 십분 발휘하기 위해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사실은 자신의 리더십을 더욱 향상시키기 위해서 또 다른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공급을 받고 재충전을 받을 수 있는 그러한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공동체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리더는 그 어떤 때보다 자신의 교제의 범위를 뛰어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리더는 분명 홀로서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과 함께 빛날 수 있는 리더들의 공동체를 찾게 된다면 그들과 함께 더욱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빛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 된 교회에서 함께 연합하여 사역하는 것이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생각해 봅니다.
* 이 글은 국제제자훈련원에서 출판된 차세대 리더십 개발을 위한 무크지 <카탈리스트> 2권 5장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리더십 네트웍 527호 (05/10/10)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라
평신도를 깨운다 국제제자훈련원

5.18.2010

죄 죽이기mortification와 영적 성장

"죄를 크게 죽여 본 사례를 가지는 것은 죄의 몸에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이다. 또한, 죄에 강타를 퍼부어서 비틀거리게 하고 주춤거리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죄와 싸울 수 있는 튼튼한 기반과 발판을 얻게 되며, 죄는 쓰러지기 직전이 되고, 다음 번에 우리는 죄와 더 쉽게 싸울 수 있게 된다. 죄는 점점 겁을 먹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쉽게 죄를 굴복시킬 수 있으며 적어도 죄와 싸우는 것이 쉽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마음대로 죄를 죽일 수 있다. 죄를 크게 죽여 본 사례들과 자기를 부인해 본 경험 없이 살아가는 동안에는 옛 사람이 계속해서 자기 자리를 잡고 있다. 옛 사람은 억세고 끈질기기 때문에 작은 타격에는 요동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이 왜 수많은 성도들이 은혜 안에서 민감하게 성장하지 못하는가 하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다. 가장 크게 죄를 죽이고 난 후에 나는 언제나 가장 큰 위로를 체험한다...."

조나단 에드워즈, 1723년 1월 14일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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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한다는 것은 성서와 역사가 증언하는 엄중한 사실이다. 죄된 본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최고의 선 대신 차선을 택하는 선의 결핍, 즉 "악"을 초래하게 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된 본성은 살살 달래야하는 우는 아기가 아니다. 철저히 소멸시켜야 하는 악의 근원이며 생명을 걸고 대적해 싸워야 하는 비열하고 악랄하며 끈질긴 원수이다.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살아나 나를 죽이려 덤벼드는 터미네이터 같다고나 할까.

죄를 다룸에 있어 신앙의 선배들은 성서의 교훈과 명령을 쫓아 "죄 죽이기"를 훈련하였다. 바울은 죄된 본성으로서의 육체적 소욕은 성령의 소욕과 정면으로 충돌하며 성령을 따라 살려는 모든 의지를 무력화시키려한다고 설명하고 그리스도를 주로 모신 사람들은 이러한 육체의 소욕을 성령의 능력으로 계속해서 십자가에 못밖아 죽여버리는 사람들이라고 선언하였다. 칼빈은 바울의 가르침을 수용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신자들의 성화과정이 "항구적 금식"과 같은 죄죽이기mortification의 연속이라고 표현하였다. 청교도였던 존 오웬은 신자들의 영적 성장과 생명력, 그리고 영혼의 참된 위로가 죄죽이기mortification에 달려 있다는 선배들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그 방법을 자세하고 조직적으로 설명하였다. 결국 스스로 높아지려는 교만과 자기만을 사랑하는 이기심, 허탄한 자기 자랑을 추구하는 욕망은 길들일 대상이 아니라 죽여버려야 할 대상이다.

자기 자신을 "크게 죽여본 경험"이 중요하다고 본 에드워즈의 통찰은 참으로 귀하다. 처음이 어려우면 갈수록 쉬워진다. 그러나 처음에 타협하여 쉬운 길을 택한다면 영원히 시작과 포기를 반복하다 말 것이다. 적당한 만족과 합리적인 포기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라고 유혹하는 육체의 소욕은 피가 튀기고 살점이 뜯기는 혈투를 통해서만 장악될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성적이며 상대적인 가치가 존중되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교회의 훈련과 교육 역시 "죄 죽이기"가 강조되고 훈련되어야 한다면 지금의 설교와 가르침이 어떻게 변해야 할까?

bk

5.17.2010

회개

"회개는 목표없는 방황의 발을 찍고 경솔한 교만의 머리를 치는 도끼이다."
캘빌 밀러

한번도 가지 않은 길

새벽 미명에 기도하러 나섰다.
난데 없이 교회 뒤쪽으로 난 산을 따라 걸으며 기도하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혼자서 한번도 가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내 마음이 "가보자"와 "가지말자"로 나뉘어 분열하기 시작했다.
가지 말자는 쪽이 더 좋은 그리고 더 많은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가보자는 쪽은 시덥지 않은 한두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러나 결정적인 한가지 이유도 또한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소망이었다. 무엇인가 가치있는 것이 있으리라는, 어렵더라도 좋은 경험이 되리라는 소망과 기대 말이다. 소망이 두려움을 이기는 용기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나는 그 때 배웠다 .

아직도 검푸른 여명속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두려운 마음을 흥얼흥얼 찬양으로 잠재우며 걷다가 작은 모퉁이를 돌아가는데 갑자기 큰 개가 미친듯이 짖어대며 나를 향해 덤벼들었다. 너무 놀라 거의 중심을 잃고 나 자빠지려 하는 찬라에 내 몸을 덮칠 그녀석의 거친 앞발과 내 목을 향해 날아오는 날카로운 이빨을 상상했다. 그러나 나는 넘어지지도 물리지 않았다. 개와 나 사이에는 철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장이 터질 정도로 놀랬으나 현실적으로는 아무일도 생기지 않았다. "돌아갈까?"하는 마음이 놓치지 않고 고개를 바짝 들었으나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번연의 주인공 크리스천이 쇠줄에 묶인 사자의 포효에 주춤하며 전진하지 못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계속 짓어대는 개에게 예수님처럼 "잠잠하라"고 영어로 말해 주었다-shut up!

물이 말라버린 얕으막한 계곡에 지저분한 쓰레기들과 버려진 차들이 보였다. 높은 기둥에 마치 피가 흐른듯이 빨간색 페인트로 갱단원들이 한 것 처럼 여겨지는 지저분하고 기괴한 낙서들이 역겨운  냄새와 함께 기분을 상하게 하자 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결코 유쾌한 경험이 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소망이 위협을 당하자 다시 두려움이 업습한다. "돌아가자..."

그러나 여기까지 온 것이 아까웠고 아찍 끝나지 않았다는 새로운 소망거리를 찾아내었다.
한 30분을 더 기도하며 산을 오르자 온 몸에서는 땀이 흐르고 기도는 깊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산의 정상에 섰을 때,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아름다운 절경이 거짓말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인내하지 앟았으면, 두려움을 물리치지 않았으면, 소망을 포기했다면 결코 볼 수 없었던 장관이었다. 하나님의 음성이 마음에 가득 차 올랐다.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그리고 소망은 사랑으로 가득찬 성품을 만들어 낸다는 바울의 고백을 온 몸으로 경험할 수 있음을 감사하며 정상에서 내려 올 때 하나님은 또다른 선물을 준비하고 계셨다. 산을 오를 때 겪었던 장애물들의 실체가 찬란한 아침 햇빛 아래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위협적이었던 모든 것들이 별것 아닌 것이 되어있었다. 오를 때 의심되었던 하나님의 임재가 내려갈 때는 자부심과 성취감, 보람과 삶의 긍정으로 충만하였다. 시내산을 내려가는 모세의 기분이 그랬을까?

한번도 가지 않은 길은 두려운 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믿음과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길이 행복하고  의미있고 보람된 길이 된다는 사실 또한 틀림없다. 왜냐하면 바로 하나님 자신이 행복이며 의미이며 보람이시기 때문이다. 다만 그 길을 끝까지 마쳐본 사람만이 그 하나님을 증언할 수 있으며, 그 길을 걸어본 사람만이 성숙을 노래할 수 있을뿐이다. 

bk

너른 사람

마음과 사고와 태도, 그리고 언어에 있어서 깊고 너른 사람이 되고싶다.

상대의 잘못과 실수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너그럽고 오래참지만
자신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서는 솔직하고 엄정한 사람이고 싶다.

상대의 장점과 선한 일에 대해서는 아낌없이 칭찬하고 격려하지만

자신의 성과나 장점에 대해서는 겸손하며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

예수님께서 그런 분이셨고 지금 내게도 그렇게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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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소원한지 10년이 넘어가건만 여전히 일말의 진보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오호 통재라...

bk

상처의 결과

상처와 아픔은 죄의 결과이지만, 성숙의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상처와 아픔을 통해 어떤이는 미라가 된다.
진정한 자아를 감춘채 이웃과 마음의 담을 쌓고 치유와 회복을 거부한다.

상처와 아픔을 통해 어떤이는 고슴도치가 된다.
수동적인 자기 방어적 태도나 호전적인 공격성은 자신과 다른이의 상처와 아픔을 더 심화시킨다.

그러나 상처와 아픔을 통해 어떤이는 진주가 된다.
시련과 연단은 상처와 아픔이지만 믿음과 소망으로 인내하며 삶을 긍정하고 다른 이들과의 연대를 더욱 공고히 할 때 상처와 아픔은 보석과 같은 인격과 성품이 만들어 지는 과정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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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권위

성급함, 산만함, 미룸은 어느정도는 두려움의 결과이기도 하다.
두려움을 이기려면 담대함이 필요하다.
담대하지 못하는 이유는 권위를 잃었기 때문이다.
권위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건강한 자아로 부터 나온다.

bk

몸짓과 표정

"표정과 몸짓에는 보여주고 싶은 자기 뿐 아니라 감추고 싶은 자기까지 숨김없이 나타난다."
최광선, 몸짓을 읽으면 사람이 재미있다

부탁

"부탁하는 사람은 5분동안 바보가 될 수 있지만, 부탁하지 않는 사람은 평생동안 바보가 될 수도 있다."
로번 샤르마

죄의식

"엔진이 깨끗할 수록 달리는 힘은 강해집니다."
주유소 광고

자동차만이 아니다. 사람들의 영혼도 마찬가지.
마음이 깨끗해야 영이 힘을 얻는다. 죄의식은 감정과 영혼을 피로하게 하는 제1의 요소이다.
릭 워렌

전문가의 주관성

"실력과 경험을 갖춘 전문가의 주관성은 보통 사람들의 객관성보다 더 신뢰할 만 하다."
히딩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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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는 보통 사람들의 상식과 합리성을 뛰어 넘는 깊은 안목과 혜안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제 아무리 깊은 통찰과 탁월한 감각을 갖추고 있다 할 지라도 평범한 사람들의 상식과 합리성을 존중하고 그 수준에 맞추어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면, 전문가일지는 모르지만 리더는 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리더는 팔로워들보다 한길은 멀리 보되 반발만 앞서는 사람이어야 한다.
bk

예수의 몸으로서의 교회, 성령의 능력안에 있는 교회

"교회란 결코 함께 살고싶지 않은 사람과 언제나 함께 살아야 하는 곳이다"
헨리 나우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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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르겐 몰트만은 "성령의 능력안에 있는 교회"에서 교회를 예수님의 몸으로 본 바울의 유비를 진지하게 수용하여 의미있는 신학적 해석을 제시하였다. 교회가 예수님의 몸body라면 예수님에 대한 모든 명제statement는 교회에 대한 명제여야 한다. 교회는 단순히 예수님의 사명을 물려받은 그리스도의 모임에 머물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회는 신비한 예수 그리스도의"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셨고 동시에 피조물의 회복을 위해 존재하셨듯이 교회는 삼위의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동시에 피조물의 회복을 위해 존재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 이 양자를 화해하기 위해 중보자로 자신을 버리셨듯이, 교회는 화해의 중보자로 거룩한 산 제사로 철저히 자기를 버려야 한다.
제도와 건물, 전통과 문화에 갇혀 스스로만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에서 자신을 분리시킴으로 스스로가 거룩한 공회에 속하지 않는 교회의 적임을 자증하는 것이다.
bk

5.15.2010

성화의 의미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그러나 절대로 그대로 두지는 않으신다.

맥스 루케도, 예수님 처럼,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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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거룩은 아름다움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완전한 아름다움이시며 모든 아름다움의 제일 원인이시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주변의 상황이나 환경에 영향을 받는 피조물의 아름다움과는 달리 영원하고 무한하며 절대적인 아름다움이다. 또한 창조주 하나님은 존재를 가능하게 하시어 아름다움을 창조하시는 아름다움의 근원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름다움의 절대기준이시며 존재를 아름답게 만드는 아름다움의 시혜자이시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미적 기준에 머무르지 않고 선과 악,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확장되어 거룩(kadosh, holy)로 표현된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모든 피조물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어떤 방식으로든 반영하게 되기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쫓아 하나님을 닮아가는 일은 하나님의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다.

캘빈은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의 과정은 항구적 금식과 같은 고행mortification으로 보았지만, 그것이 완전한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한한 만족과 기쁨의 행복을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성화는 "달콤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본 조나단 에드워즈의 통찰은 참으로 귀하다.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되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정말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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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는 사랑이다.
내가 그분을 상대하지 않아도, 무시해도, 퇴짜를 놓아도, 멸시해도, 불순종해도 그분은 변하지 않으신다.
나의 악이 그분의 사랑을 줄어들게 할 수 없다.
나의 선이 그분의 사랑을 더 커지게 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매하다고 잃는 것도 아니요
믿음으로 얻어내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한다고 덜 사랑하시고
성공한다고 더 사랑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는 사랑이다.

맥스 루케도, 예수님처럼, 95

관계와 용서

"관계가 성공하는 것은 죄있는 쪽이 벌을 받아서가 아니라 죄 없는 쪽이 긍휼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맥스루케도, 예수님처럼, 33

5.12.2010

영적 유기

"주일 아침마다 우리는 신앙을 고백합니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이렇게 고백하는 것을 더 이상 믿지 못하고 멈춰 설 때, 예레미야처럼 신앙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경험할 때, 도대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깊은 회의 에 빠지게 되는 때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 기도한다." 다시 말해서 계속 믿을 수 있도록, 우리의 신앙이 떨어지지 않도록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믿는 일을 계속 할 것입니다. 왜입니까?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믿고'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놀라운 은혜라고 부릅니다.
때로 신앙의 깊이를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신앙을 상실하는 것, 신앙의 붕괴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상실과 붕괴는 신앙의 크기 혹은 깊이를 경험하게 합니다. 자신의 신앙이 참으로 하찮고 보잘것없음을 체험할 때, 바로 그때 당신은 집요하고도 완강한 그리스도의 결심, 나의 신앙이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이야말로 당신의 영혼과 육체, 온몸과 온 마음을 움츠러들게 하며 소름끼치게 하는, 그럼에도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경험입니다."

유호준, 인간의 죄에 고뇌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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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유기spiritual desertion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공통적으로 겪게 되는 신앙여정의 한 부분이다. 주변의 환경이나 인간관계, 또는 신앙공동체에서 경험하는 여러가지 갈등, 고통, 긴장과 스트레스가 지속되거나 또는 자신만이 아는 멈출 수 없는 죄된 습관이 계속되어 불안과 죄책감 수치감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채로 오랜 시간이 지나면 영적 침체를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영적 침체가 계속 되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과 감정에 휩사여 절망의 심연으로 끝도없이 떨어져 버릴 때가 있다.

17세기 화란에서 일어났던 제 2의 개혁운동에 큰 역할을 감당했던 기스베르투스 후치우스Gisbertus Voetius(1589-1676)는 이러한 영적 유기의 상태를 "신앙인이 중심으로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감정을 갖지 못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내적 십자가 또는 영적 슬픔과 시련"이라고 정의했다 (Spiritual Desertion 1659, 30). 후치우스는 놀랍게도 (그가 야코보스 알미니우스의 제자라는 점에서 본다면 참 경악스러울 정도이지만, 그가 깔뱅의 후예라는 점에서는 너무도 당연하게) 신자들의 영적 유기의 일차적 원인을 하나님 자신에게서 찾는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과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시지 않는다면 인간편에서는 사실 제 아무리 노력을 기울인다 할 지라도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신앙을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영적 유기의 좀더 직접적이고 주요한 실제 원인은 믿음에 의한 분명한 확신의 결여이다. 즉 영적 유기의 문제는 믿음이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영적 침체와 유기를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단순히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라고 조언하는 것은 마치 먹을 빵이 없어 배고파하는 사람들에게 빵을 먹고 배부르라고 권하는 것과 같다.

어떻게 영적 침체와 유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영적인 붕괴에서 어떻게 탈출 하여 다시금 굳건한 신앙의 반석 위에 설 수 있을 것인가? 신앙의 확신결여로 인한 영적 침체를 경험하는 당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그러나 끊임없는 사랑과 은혜로 신앙을 주시는 분도, 신앙의 침체를 허락하시는 분도, 그리고  신앙을 다시 회복하시는 이도 그리스도이시다. 인간 편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처절하게 경험하는 것은 가혹하리 만큼 고통스러운 경험이지만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집요한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영적 침체 역시 신앙의 더 깊은 지경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 다만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믿음의 공동체 안에 머물면서 버티라"는 것이 가장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 신앙은 개인사가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경험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바로 이 때 절실하고 위력적으로 작용한다. 다윗은 "부르짖어도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찬송"중에 거하시며, 신앙공동체의 모임에서 선포와 증거와 찬양과 부르짖음을 통해 수치를 면하고 "찬송"을 회복할 수 있음을 노래하였다 (시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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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2010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예쁜이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요. 어떻게 들을 수 있죠?

나: 참 좋은 질문 (얼굴만 예쁜 줄 알았더니 마음도 예쁘군...) 예쁜이들은 어떻게 생각해?

예쁜이들: 말씀, 기도, 환상, 계시, 양심, 조언, 실천....

나: (보통이 아니군...) 다 알면서 왜 물어볼까?

예쁜이들: 그래도 잘 모르겠어요 (갈켜주삼...)

나: 가장 강력하고 분명하며 또렸하고 오래도록 지속되는 방법을 알려줄까.... (말까...)

예쁜이들: (똘망똘망... 초롱초롱...우린 예쁜데...)

나: (가르쳐 줘야겠군) 실수, 실패, 낙망, 좌절,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학.실.히. 말씀하시던데..

예쁜이들: (먹던 감자칩 떨어뜨리며...) 목싸님! 실수 안하려고 음성 들으려는 거잖아요!

나: (미안하구나...) 아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고 음성 듣는 거야. 그럼 하나님이 "너 좀 실수해 줄래..." 그러면 하나님 음성 안듣겠네 (이경우 듣는다는 것은 순종함을 의미하겠지...).  순종하지 않을 거면서 왜 하나님의 뜻을 묻지?

예쁜이들: ... 결국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게 어려운게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과 순종하기위한 결단과 용기를 내는 것이 어려운 거네요.

나: ... (내가 잘 가르친 것일까 예쁜이들이 똑똑한 것일까?)

성령님: 오늘은 거기가지만 진도 나가자...

나: 아차 아이스크림 사주는 것 깜빡 잊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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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가르침을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게 있네." 마법사가 말했다.
"일단 길을 발견하게 되면 두려워해선 안 되네.
실수를 감당할 용기도 필요해. 실망과 패배감,
좌절은 신께서 길을 드러내 보이는 데
사용하는 도구일세."


- 파울로 코엘료의《브리다》중에서 -

3.14.2010

인간됨의 결정적 조건

"A defining condition of being human is our urgent need to understand and order the meaning of our experience, to integrate it with what we know to avoid the threat of chaos." Jack Mezirow (2000)

인간됨의 결정적 조건중 하나는 우리의 경험을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과 연결해 이해하며 조직화함으로 혼란과 혼동이 주는 위협을 피하려는 절박한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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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며, 의미를 구성하고, 의미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이다. 의미는 인간에게 생명과 같다. 무의미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투쟁은 죽음의 힘 보다 더 강력하다. 인생의 의미를 구성하지 못할 때 조차, 인간은 죽음으로써 삶의 무의미를 종식시키려 할 만큼 인간에게 있어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며 의미를 구성/재구성하는 행위는 근원적 본능이다. 그렇다면 의미란 무슨 의미인가? 의미를 추구한다는 말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어떻게 의미를 추구하는가? 무슨 의미를 추구하는가? 의미는 발견하는 것인가 아니면 형성되는 것인가? 의미는 어떻게 변형/변화 되는가?

매저로는  구조주의적 인식론을 바탕으로이러한 질문들을 탐구해 나간다. 비판적 사고를 통한 인식구조의 변혁과 확장은 구조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개념이며 이러한 인식구조의 변형을 성인교육의 영역에서 설명하고 통합한 공로로 그는 변형적 학습이론transformative learning theory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그러나 매저로에게 있어 왜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가? 어떤 의미가 의미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의미의 근거는 무엇인가? 에 대한 대답은 대체로 무시되고 있다. 그것은 그가 인간의 의미구성이라는 현상을 이해하는데 있어 구조주의 인식론에 과도하게 의존하면서도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존재론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이 사회과학적 접근이 보변적으로 기반하는 암묵적 가정의 오류이다. 즉 관찰자의 실존적 한계를 간과하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는 스스로 알 수 없으며 나의 나됨을 인식하려면 절대 타자의 거울앞에 서야 한다는 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바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첫머리를 이렇게 기록한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지혜, 즉 참되고 온전한 지혜는 거의 모두가 두 가지 부분으로 구성된다.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다. 이 두 지식은 여러 끊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그 중 어떤 것이 먼저오며, 어떤 것이 그 결과로 파생되는 것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Institute I.i.1).

그렇다면, 인간됨의 결정적인 조건은 "혼란과 혼동을 피하려는 절박한 필요때문에 의미를 구성하려는 습성"이기 보다는, 그러한 갈망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절대의미, 의미의 절대기준, 의미를 추구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신 인간과 우주의 존재적 의미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깨달아 아는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과 내 자신을 알아가기를 통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향방없는 의미추구가 주는 허무와 절망의 긴 터널 통과한 후 증언한 어거스틴의 고백은 이런 점에서 울림이 크다: "당신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찬양하기를 즐거워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당신을 향하여 살도록 당신이 우리를 창조하신 까닭이니 우리 심령은 당신 안에서 쉼을 얻을 때가지 평안할 수 없습니다." (Confessio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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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2010

지도자의 3대 책무

지도자의 3대 책무

1. 방향설정 (Direction)
2. 동기부여 (Motivation)
3. 전략개발 (Strate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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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미나에서 들었던 내용이다. 일단 단순 명쾌하다. 그리고 단계적인 우선순위를 보여준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독단적이고 상명하복의 권위주로 흐를 가능성이 있는 것 외에도 관계중심이기 보다 일중심의 사고가 강조된다. 군대 지도자의 3대 의무라면 적절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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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지속성+방향성

성장은 지속성과 방향성의 두가지 요소로 구성됩니다. 정체되어 있다면 성장이 아니겠죠. 그러나 무작정 변화되는 것도 성장이 아닙니다. 지속적인 변화가 의도된 방향성대로 일어나야 성장하는 것입니다. 어떤 궁극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는가와 어떻게 그 방향으로 계속 발전할 것인가는 함께 맞물려 있는 톱니와 같습니다. 목표가 없으면 변화의 원동력이 사라집니다. 변화함이 없이는 목표를 이룰 수 없겠죠.

John Dewey, Experience and Education, 1938, 36

1.15.2010

신앙

첫째, 신앙은 인간 존재의 확실성을 준다. 인간이 가지는 존재적 절망은 오직 하나님께서 수여하시는 신앙을 통해서만 극복된다. 따라서 신앙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기반이다. 이런 점에서 신앙은 단순히 의미 구성을 통한 인식론적 확장으로 제한되지 않으며 보다 포괄적이다.

둘째, 신앙은 미래지향적이다. 신앙은 현재의 갈등을 치유하고 회복하여 미래를 현실화시키는 힘이다. 따라서 신앙은 현재속에 미래를 배태하며 지향한다. 이런 점에서 신앙은 현재의 상태를 초월한다.

셋째, 신앙은 역동적이며 초월적인 능력이다. 신앙은 실존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노력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절망을 뚫고 침투하시는 창조주의 초월성에 참여하는 행위이다.

넷째, 신앙은 공동체를 통해 경험된다. 신앙의 본질은 창조주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며 이는 증거와 고백을 필요로 한다. 개인적 인식의 확장은 신앙의 결과일 수 있으나 신앙 그 자체는 아니다.

다섯째, 신앙은 구체적이다. 삶의 구체적인 사건들속에서 신앙은 형성되고 변형된다. 신앙은 인지구조의 확장에 제한될 수 없으며 삶의 행위들이 발생하는 상황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여섯째, 신앙은 구속적이다. 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샬롬회복이다. 신앙은 성취되거나 개발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초월적이며 구속적 은혜로 계속해서 변형되어가는과정이다.

파울러의 신앙이해에 대한 로더의 반박 중, The Logic of the Spirit, 257

1.14.2010

같음과 다름은 하나됨의 다른 이름입니다.

다양한 사고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을때 우리는 혼란과 갈등의 가능성 앞에 노출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흔히 사용되는 두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공통된 경험과 사고를 강조하는 것 입니다. "서로 같아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가치이겠죠.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각기 다른 사고와 경험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린 서로 다르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어느것이 더 좋은 방법일까요?

그렇습니다. 두가지 방법을 다 사용하는 것입니다. 공통된 인식의 기반이 없다면 대화자체가 불가능하겠죠. 그러나 서로 다른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모든 대화는 획일과 강압, 그리고 조정으로 흘러갈 것입니다. 같음을 기반으로 다름을 수용할 때 혼란과 갈등의 위기는 새로운 창조와 진보의 기회로 변할 것입니다. 서로 같은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세요. 그리고 어떻게/왜 다른지 (무엇이 다른지가 아니라..)를 탐구해 보세요. 이전에는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던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하게 될 거에요.  그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당신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멋진 방법에 대해서 말이죠. 종국에는 "무한히 이질적이고 영원히 저급한 나"와 같음을 공유하기 위해 고단한 삶을 사시고는 나무에 달려 돌아가신 삼위 하나님의 무한한 "다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야 같음과 다름은 하나됨의 다른 두 이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겠죠.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때문에 괴로워하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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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2010

계획과 충고

"만약 모든 사람의 충고대로 집을 짓는다면 삐뚤어진 집을 짓게 될 것이다."

마이클 린버그, 너만의 명작을 그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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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들이나 사랑하는 가족들의 충고도 소중하며 가치있다. 그러나 나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내적 확신과 직관들도 역시 중요하다. 그것이 진리의 말씀과 기도의 무릎, 그리고 양심의 비판을 통과하여 정돈된 일관성을 확보하였다면 훨씬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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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소망은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도전이다.
소망은 불가능한 것에 대한 열정이다.
소망은 하나님의 부재에 대한 반박청구이며 언약신학의 선포이다.
소망은 실제로 하나님으로 하여금 간섭하시도록 자극하는 행위이다.

자크 엘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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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죄송해요. 올해는 하나님을 많이 자극하기로 결심했어요. ^^
괜찮으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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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기도란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행하는 일에 대해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이다."
달라스 윌라드, 하나님의 모략 329

기도는 아버지와 나누는 친밀한 대화라고 예수님은 가르쳐 주셨다. 내 생각을 말씀드리면 그분의 생각을 들려 주신다. 내 관점을 말씀드리면 그분의 관점을 말씀해 주신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말씀드리면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말씀해 주신다. 하늘 아버지는 자상하시고 지혜로우셔서 내가 알아 들을 수 있을 만큼만 알려 주신다. 그리고 알아 들을 수 있게 말씀해 주신다. 중요한 것은 기도는 인격적인 대화라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존중하고 그분의 의중을 가치있게 여기며 간절한 마음으로 이해하기를 "열망"할 때 그분은 말씀하신다. 그분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 나의 양심을 통해,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 또렸하고 확실하게 말씀하신다.

"나의 주님. 당신은 아침마다 내 목소리를 들으십니다. 그러니 이 아침에 내가 당신앞에 나아가 기도하며 당신을 소망하고 기다립니다." 시편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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