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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6.2012

칼 바르트는 그의 책 '복음주의 신학입문에서' 신학의 가장 큰 위협은 하나님으로 부터 온다고 일침을 가했다. 신학적 위협은 교회의 실천과 별개일 수 없다. 개혁파 선배들이 그토록 추구했던 살아 움직이는 역동적 말씀을 근거로한 자기 상대화와 중단없는 자기반성의 변혁적 실천은 점차 희미해 지고 특정 시대의 고루한 도그마와 파편화된 자기 경험, 그리고 세속화된 시대정신에 노예가 되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날 바르트가 살아있다면 '현대 교회의 가장 큰 위협은 하나님'이라고 할 것이다. 두렵다. 오금이 저릴 정도로 두렵다.

bk

12.15.2010

Integrity 인테그리티

"Integrity without knowledge is weak and useless, and knowledge without integrity is dangerous and dreadful." Samuel Johnson

지식이 없는 성실함은 약하거나 쓸모가 없다. 성실함이 없는 지식은 위험하고 위협적이다.
실체에 대한 깊은 이해가 사랑할 줄 아는 인격과 인품이 합쳐졌을 때 거기서 우리는 신의 성품을 맛본다. 헤세드!

bk

10.04.2010

주체적 사고

소크라테스에 있어서 "아이러니irony," 즉 의심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표현 형식으로서의 풍자가 만들어낸 결정적인 성과가 있다면, 그것은 개인이 자신의 신념을 성찰없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natural attitude를 우회적으로 해체시켰다는 것이다. (풍자irony를 통해) 개인은 객관적 지식의 확실성을 상실하는 반면에 자기 자신(또는 주관적 자기해석)을 발견하게 된다. 이때야 비로소 개인은 자신이 지식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닿게 된다. 키에르케고르는 지식이 '무엇'인가라고 묻기 보다, 개인이 어떻게 지식과 자기 자신을 연결시키면서 자기 주관을 유지하는 가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키에르케고르가 보기에, 소크라테스는 인식하는 사람과 그가 인식하는 내용을 날카롭게 분리시켜버렸다. 어떻게 인식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이 인식하는 내용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Ronald J. Manheimer, Kierkegaard as Educator,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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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2010

인간됨의 결정적 조건

"A defining condition of being human is our urgent need to understand and order the meaning of our experience, to integrate it with what we know to avoid the threat of chaos." Jack Mezirow (2000)

인간됨의 결정적 조건중 하나는 우리의 경험을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과 연결해 이해하며 조직화함으로 혼란과 혼동이 주는 위협을 피하려는 절박한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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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며, 의미를 구성하고, 의미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이다. 의미는 인간에게 생명과 같다. 무의미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투쟁은 죽음의 힘 보다 더 강력하다. 인생의 의미를 구성하지 못할 때 조차, 인간은 죽음으로써 삶의 무의미를 종식시키려 할 만큼 인간에게 있어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며 의미를 구성/재구성하는 행위는 근원적 본능이다. 그렇다면 의미란 무슨 의미인가? 의미를 추구한다는 말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어떻게 의미를 추구하는가? 무슨 의미를 추구하는가? 의미는 발견하는 것인가 아니면 형성되는 것인가? 의미는 어떻게 변형/변화 되는가?

매저로는  구조주의적 인식론을 바탕으로이러한 질문들을 탐구해 나간다. 비판적 사고를 통한 인식구조의 변혁과 확장은 구조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개념이며 이러한 인식구조의 변형을 성인교육의 영역에서 설명하고 통합한 공로로 그는 변형적 학습이론transformative learning theory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그러나 매저로에게 있어 왜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가? 어떤 의미가 의미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의미의 근거는 무엇인가? 에 대한 대답은 대체로 무시되고 있다. 그것은 그가 인간의 의미구성이라는 현상을 이해하는데 있어 구조주의 인식론에 과도하게 의존하면서도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존재론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이 사회과학적 접근이 보변적으로 기반하는 암묵적 가정의 오류이다. 즉 관찰자의 실존적 한계를 간과하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는 스스로 알 수 없으며 나의 나됨을 인식하려면 절대 타자의 거울앞에 서야 한다는 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바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첫머리를 이렇게 기록한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지혜, 즉 참되고 온전한 지혜는 거의 모두가 두 가지 부분으로 구성된다.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다. 이 두 지식은 여러 끊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그 중 어떤 것이 먼저오며, 어떤 것이 그 결과로 파생되는 것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Institute I.i.1).

그렇다면, 인간됨의 결정적인 조건은 "혼란과 혼동을 피하려는 절박한 필요때문에 의미를 구성하려는 습성"이기 보다는, 그러한 갈망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절대의미, 의미의 절대기준, 의미를 추구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신 인간과 우주의 존재적 의미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깨달아 아는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과 내 자신을 알아가기를 통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향방없는 의미추구가 주는 허무와 절망의 긴 터널 통과한 후 증언한 어거스틴의 고백은 이런 점에서 울림이 크다: "당신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찬양하기를 즐거워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당신을 향하여 살도록 당신이 우리를 창조하신 까닭이니 우리 심령은 당신 안에서 쉼을 얻을 때가지 평안할 수 없습니다." (Confessio 1.1.1).

bk

7.14.2009

"믿으시면 아멘하세요!": 학습에 대한 두 관점과 문화, 그리고 하나님 나라

"믿으시면 아멘하세요!": 학습에 대한 두 관점과 문화, 그리고 하나님 나라

한국 뿐 아니라 세상의 많은 나라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어떤 면에서는 현재까지도 지배적인, 학습문화는 "수용"적 학습관에 기초를 두고 있다. 수용적 학습관은 학습learning을 "지식의 수용"으로 이해한다. 이는 "공장의 생산라인"이나 "은행구좌"같은 메타포로 설명될 수 있다. 지식은 전달자(교사)로 부터 수용자(학습자)으로 전달되며 단시간 최대량의 지식을 전달하고 저장하는 것이 학습의 목표가 된다. 학습의 평가는 교사가 전달한 지식과 학생이 획득한 지식이 얼마만큼 일치하는가, 교사가 전달한 지식을 학습자가 얼마나 저장하고 있는지에 중점을 둔다. 따라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지식을 전달하고 수용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오랬동안 수용된 지식을 정확하게 저장할 수 있는가가 최고의 관심이다.

수용적 학습관에 기초한 지식의 획득과 저장을 특징으로 하는 학습문화는 다음과 같은 가정을 담고 있다. (1) 지식은 객관적이며 독립적이다. 이 세상의 실체는 인식자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지식은 실재에 대한 객관적인 표상이다. 지식은 언어를 포함한 매체를 통해 그 순수성을 상실하지 않고 유통될 수 있다. (2) 가르침 또는 교수instruction는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다. 교사는 축척되고 조직된 지식을 효과적으로 학습자들에게 전달하는 전달자transformer이다. (3) 학습learning은 전달된 지식을 획득하고 저장하는 것이다. (4) 저장된 지식은 언제든지 다른 상황에 적용된다. 지식의 적용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보다 기초적이고 일반화된, 추상적 지식이 선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수용적 학습관은 여러가지 면으로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Paulo Freire는 수용적 학습관을 폭압적이라고 비판하였다. 주입적 암기와 반복rote memory을 통해 이루어 지는 은행예금식(banking) 학습은 학습자들의 주체적이며 비판적 사고를 근본적으로 제한하고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사고와 표현을 구속함으로서 개인의 인격과 독특성을 파괴하고 기득권이 만들어 놓은 사고체계에 순응하는 종속적이며 타율적인 인간을 양성한다고 보았다. 또한 학습의 실천적이며 공동체적인 특성을 현격히 제한하여 다른 사람들과의 함께 하는 대화와 활동를 거부하여 배움을 고립된 개인의 수행으로서의 "공부"로 축소시켰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수용적 학습문화는 비판적 사고력, 문제해결력, 창의력, 그리고 상상력같은 고차원적 사고의 발달을 이해하고 지원하는 데 심각한 한계를 드러내었다.

행동주의와 인지발달주의를 거처 1970년대 이후 끊임없이 주목을 받아온 학습에 대한 관점은 구성주의constructionism 관점이다. 구성주의적 관점에서 지식은 인식의 주체인 학습자가 내적 인식과 외적 환경사이에서 끊임없이 구성, 해체, 재구성된다. 학습은 이러한 인식 주체의 능동적 지식 구성의 과정이다. 구성주의 학습관에서는 학습자가 처해 있는 상황과 학습자 사이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과정이 학습이라고 보기 때문에 학습은 본질적으로 상황 의존적이라고 주장한다. 즉 어떤 상황에서 어떤 활동을 하는가가 학습의 내용과 결과를 규정하게 된다. 따라서 학습은 고립된 개인의 활동일 수 없으며 전달자와 수용자의 관계에서 처럼 일방적일 수도 없다. 자신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 그리고 구체적 학습의 상황이나 학습자가 처한 사회문화적 환경등이 학습에 있어 본질적인 요소들이며 따라서 학습은 상황적이고 사회적이다.

이러한 학습에 대한 이해는 자연스럽게 교사와 학습자의 역할에 근본적 변화를 요청한다. 교사는 학습자가 주체적으로 지식을 구성할 수 있도록 돕는 안내자 또는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 학습자가 최대로 자기 자신을 개발 할 수 있도록 상황과 환경을 최적화 해 주어야 한다. 또한 학습자 개개인의 특성과 역사를 이해하며 그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하고 인격적인 신뢰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무엇보다 학습자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학습자를 신뢰하고 인내함으로 "안전하게 실패"할 수 있는 문화와 구조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학습자는 학습의 주체로 자기 주도적이며, 창의적이고 비평적이며 탐구적인 학습행위를 통해 개인과 공동체의 지식구성행위에 능동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스스로의 사고방식과 고정관념을 떠받치고 있는 전제와 가정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날카롭게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과의 사고와 행동에서 대립되는 차이점을 긍정하고 수용하며 상호 발전시키는 자세와 노력이 요구된다. 개인이 아닌 공동체로서 함께 배워가려는 겸허한 마음과 구성된 지식을 구체적인 현장에서 검증하고 확인하는 용기와 도전이 있어야 한다.

학습에 대한 수용적 관점과 구성적 관점의 차이점은 교회 사역에 대해 심각한 시사점들을 제공한다. 설교와 성경공부에서 부터 시작하여 예배와 선교에 이르기 까지 교회 사역 본질중 하나는 칼빈이 지적한 바 대로 어머니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이다. 성도들을 단순한 성경지식의 전달과 문화화된 교회의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도록 강요함으로서 현재도 상당히 진행되어 온 교회의 세속화를 심화시킬 것인지, 아니면 성도들로 하여금 말씀을 준거의 틀로 삼아 개인과 공동체의 성향과 활동에 녹아 있는 세속성을 분별하도록 비판적 성찰의 능력을 함양하게 하고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문화를 창조하여 세상에 대안을 제시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로 양육할지는 교회의 책임있는 리더들이 가지고 있는 "학습"에 대한 이해에 따라 달라지게 될 것이다.

학습에 대한 두 관점을 생각하면서 실제 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사역을 예로 들어 성찰해 보자. 위성을 통한 예배, 인터넷을 통한 신앙강좌, 텔레비전을 통한 복음 전도등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성서신학적인 지식을 가지고서는 현상에 대한 직접적인 해답을 얻기 어려울 것이다. 수용적 관점에서 본다면 인터넷이나 기타 위성과 텔레비전을 통한 신앙행위들은 원하는 정보를 습득하고 주관적 감정을 움직이는 동기부여를 일으키는 데에는 상당한 도움을 주고 또 효과적일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극복하고 학습자/성도들의 필요와 취향에 따라 지식습득(신앙/말씀 강좌)과 신앙적 행위(예배)를 선택하고 향유할 수 있기 대문이다. 따라서 지식의 전달과 수용, 그리고 축적이라는 측면에서 인터넷 예배나 성경공부는 탁월한 학습의 도구로 유용하게 활용해야 한다.

한편, 구성주의적 관점으로 이 문제를 본다면, 학습자 또는 청중의 컨텍스트와 특성이 고려 될 수 없는 일방적 전달의 의사소통과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 속에서의 상호작용이 없는 정보의 수동적 수용은 개인의 비판적 성찰 능력을 개발하고 더 넓은 진리를 이해하며 실천하는 데 주체적 노력을 기울이는 변화와 성숙을 가져 오기에는 제약되는 점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축척된 (수용된) 지식이나 경험이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실질적인 적용성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점에서는 실증적 연구가 필요하다.

설교에 있어서 예를 들어 보자.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 선포"라는 측면에서 접근하여 설교자를 "말씀의 대언자"로 보려는 시각이 있었다. 이러한 접근은 지식의 수용적 관점을 그대로 대변한다. 선포자는 전달하며 청중은 수용하고 축적한다. 성서를 해석하고 전달하는 과정은 전적으로 설교자의 고독한 작업에 의존하며 일체의 질문과 의심을 용납되지 않는다. "믿으시면 아멘하세요!"라는 설교자의 외침이 이를 대변한다.

그러나 토마스 롱을 주축으로 하는 "공동체적 증언"의 관점으로 설교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설교자를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중 하나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사람"으로 여긴다. 역시 지식의 구성주의적 측면이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최근에는 "대화적 설교dialogical preaching"를 통해 설교자가 청중들과 서로 양방향의 의사소통을 추구하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다. 고차원의 학습을 통한 창조적 변화가 일어나려면 학습자의 필요와 동기, 그리고 삶의 현장과 실제 경험을 중심으로 상호간의 의사소통이 일어나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간의 학습을 보는 관점에 따라 이렇듯 실제 삶에서 살아가는 방식, 즉 의사소통의 스타일, 조직의 구조와 문화,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는 많은 차이를 나타낼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 발전하고 있는 사회과학의 발견과 발전을 잘 이해하여 좀 더 신학적이면서도 효과적인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더 왕성하게 구현되어야 할 것이다.


bk

3.05.2009

질문

No man really becomes a fool until he stops asking questions
질문하기를 멈추기 전 까지는 누구도 멍청하지 않다.

-Charles P. Steinmetz-

"Believe those who are seeking the truth. Doubt those who find it."
--Andre Gide
슬라이드 10

1.02.2009

이해하기 위해 믿는 신앙


I do not seek to understand that I may believe, but I believe in order to understand (fides quaerens intellectum). for this I believe-that unless I believe, I should not understand.

Anselm (1033-1109), Proslogium


Anselm is the most important Christian theologian in the West between Augustine and Thomas Aquinas. His two great accomplishments are his Proslogium (in which he undertakes to show that Reason requires that men should believe in God), and his Cur Deus Homo? (in which he undertakes to show that Divine Love responding to human rebelliousness requires that God should become a man).

12.31.2008

The Purpose of My Life

I exist in order to glorify and enjoy God by loving Him and loving people through all of my God-given life, resources, and character.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생명과 자원들(은사/소유/관계/지식/전문성/시간), 그리고 성품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영광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기 위해 존재한다.

Q. 1. What is the chief end of man?
A. Man’s chief end is to glorify God,[1] and to enjoy him forever.[2]

[1] Psalm 86. Isaiah 60:21, Romans 11:36, 1 Corinthians 6:20, 31, Revelation 4:11.

[2] Psalm 16:5-11. Psalm 144:15, Isaiah 12:2, Luke 2:10, Philippians 4:4. Revelation 21:3-4.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