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s

Showing posts with label 철학.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철학. Show all posts

4.11.2009

막스 베버


Max Weber (1864-1920)
독일 에르푸르트에서 출생해 1897년부터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가르쳤다.

베버는 맑스Karl Marx와 동시대 인물이나 맑스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수정하여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였다.
베버가 시도한 사회학적 탐구의 특징은 사회를 구조로 파악하고 사회를 조직하는 여러 구성요소들의 복잡한 인과관계를 탐구하는 기존의 실재론적 접근을 비판하였다는 점이다. 베버는 사회학이라는 학문적 시도가 사회에서 실재로 벌어지고 있는 것을 탐구하는 것이기 보다는 실재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어떻게 사회적 의미가 부여되는 지를 연구하는 "사회적 행위social action "에 대한 연구라고 보았다. 따라서 베버에게는 구조 속에서 움직이면서도 역동적으로 구조를 변화시키는 사회적 행위자들이 사회학에서의 탐구 대상이며, 사회적 행위자들의 행동양식 이면에서 행위자들의 행위에 의미를 구조화시키는 유형들을 사회-역사적 맥락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베버는 사회적 행위자들의 행동을 그 동기에 따라 4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1) Instrumental Social Action: 목적지향적인 행동. 기대하는 결과를 이루기 위해 취하는 행동으로 가장 활발한 사회적 행동이다.
2) Value oriented social actions: 가치지향적인 행동. 그 결과에 상관 없이 가치와 신념 때문에 취하는 행동이다.
3) Affectual Social Action: 가치나 목적을 고려하지 않은 감정적인 행위이다.
4) Traditional Social Action: 전해져 내려온 습관과 전통에 따른 전통적 행위.
From "Ideal Types" from Economy and Society: An Outline of Interpretive Socilogy by Max Weber, 1978
베버는 모든 사회적 행동들은 중첩되고 복합적이라고 보았고, 사람들의 사회적 행동들의 동기는 무엇이며 그 사회적 행동들이 어떻게 종교와 사회를 구성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사회적 행동을 유발하는 동기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무엇이 동기/의미를 만들어 내는지를 파악하고자 했다. 이러한 생각은 나중에 피터 버거와 조지 미드, 그리고 클리포드 기어츠의 구성주의 사회학파 입장의 뿌리가 된다.

3.18.2009

알려는 열망

"Knowing is the responsible human struggle to rely on clues to focus on a coherent pattern and submit to its reality." Esther Meek

Meek은 Michael Polanyi를 연구한 철학자이다.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자동차 수리공을 유비하였다. 깔깔대며 웃는 유쾌한 웃음이 귀엽기까지 한 Meek은 Longing to Know라는 책에서 철학적 인식론을 일상의 언어로 생생하게 그려내는 값진 작업을 하였다.


“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Meek은 결론을 내리기 전에 철저하게 이 질문에 대해 탐구할 것을요 청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알 수 없다”는 명제 자체도 “하나님은 알 수 있다”라는 명제를 증명하는 것 만큼, 아니 보다 더 어려운 작업들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증명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성서가 증언하는 또 다른 난관인 “우리의 앎의 능력은 왜곡되고 상실되었다”는 진리 앞에 서야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어거스틴의 오랜 전통을 따라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망을 외면하고 포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존재적으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고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젖먹이의 옹알이로부터 프로이드의 왜곡된 Id까지 진리를 향한 열망은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아 프라이오리a priori이다.

도대체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어떤 의심할 수 없고 오류도 있을 수 없는 절대적 보편진리를 인식한다는 것인가? 대답은 “아니다.” 안다는 것은 의심이라는 행위와 오류의 실패를 포함하는 더 포괄적인 행위이다. 앎은 끝없는 인식의 과정이다. 결국 인간의 삶은 끝없는 알아감의 여정이며 알아가는 것은 인간됨의 행위이다.

세 상 속에 흩어진 실체의 편린들을 단서로 그리고 보여진 실체 너머에 있는 배후의 관계들을 통해 일관성cohesive있는 의미를 발견해 내는 것은 때로는 고통스럽고 무모하며, 어쩌면 너무나 어려워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정도이다. 그러나 “세상the world”은 여전히 실재하고, 세상을 인식하는 주체이며 동시에 중요한 인식의 대상이기도 한 “나body”도 실재하기에 포기할 수도 없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인식의 대상과 인식의 주체 사이의 관계를 정립해 주는 일종의 “지침/방향direction”이다 (나는 Meek의 direction보다 인식론적 방향성과 인식의 주체와의 관계성을 더 포괄적으로 설명해 주는 Geertz의 “Map” 개념을 선호한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지도의 범례keynote/legend가 되어 인식의 틀을 형성하고 기존의 틀을 계속해서 교정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삶의 복잡다단한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실체들은 정념화되어 경직되지 않고 계속 역동적으로 구성과 해체, 그리고 재구성을 거듭할 수 있도록 유연해야 한다. 진리는 단순히 감각과 인식과 언어 너머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소망과 겸손을 가지고 반응respond할 수 있다. "확실함certainty"도 절대진리를 명확히 "표현할 길"도 없기 때문에 겸손해야 할 것이며, 이러한 겸손함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인식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소망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겸손함과 소망은 세상에 대해 존재를 여는 태도이다 (피녹은 이를 인간의 "세계 개방성"이라고 불렀다. 다만 그는 이를 인간 존재의 자연스러운 본성으로 설명했지만 내가 보건대 이는 죄로 인해 왜곡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많은 중요한 본성들 중 으뜸이 되는 것이다. 자기만의 도그마에 갖혀 진리를 자기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양 법석을 부리는 경직되고 오만한 사람들속에 내가 속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증거는 충분하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세상을 향해 자신의 존재를 여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나는 세상과 연합하고 세상을 이해하며 세상에 섞여 세상을 풀어(해석해)나간다. 서양적 전통의 분석적 사고에 대한 강조는 인간의 의식에 대한 과도한 의존과 확신을전제로 하게 될 때 결국 실체로 부터의 메마른 단절만을 부추겨 결국 인간을 끝없는 고독의 무저갱에 처박아 놓게 된다. 실체와 인식의 주체는 분리될 수 없다.

인식의 행위는 인식자의 적극적이고 책임성 있는 순종과 헌신을 요청한다. 앎yadah이라는 것은 부부가 결혼을 하여 서로 알아가는 것과 같은 그런 종류의 앎이다. 완전히 다 알아 앎이 종료되는 순간은 없다. 다 만 계속해서 알아갈 뿐이다. 그리고 그 앎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필요하다. 용기와 희생과 책임이 뒤따른다. 말씀word를 통해, 세상world를 통해, 그리고 우리자신we-self를 통해 우리를 만나시는 하나님은 그래서 임마누엘이다. 나와 세상을 통해 그리고 말씀을 통해 계시는 하나님 밖에서 어떻게 내가 존재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어거스틴은 고백한다. "그러므로 나의 하나님이여, 당신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할 수가, 결단코 존재할 수가 없나이다. 아니면 이렇게도 말할 수도 있지 않겠나이까? 내가 당신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니이다…. 그러하나이다 주여… 당신은 말씀하셨나이다.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렘23:24). Confessio, I.ii.2


앎은 또한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하는 행위이다. 믿음과 이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지, 정, 의의 모든 인간됨이 총동원 되는 것이다. 보이는 것 너머의 복잡한 관계들을 성경과 성령이 지시하는 대로 민감하게 반추하여 의미를 발견하려는 적극적인 "앎의 행동"이 필요하다.

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진정한 앎은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앎은 존재와 존재의 충돌이기에 변화에 대한 용기를 요구한다. 앎은 알려지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되는 것이다. 그를 알기 전의 나와 그를 알고 난 후의 나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더할 나위 없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변화되는 것이다. 더 많이 알아갈 수록, 더 많이 변화되며, 더 많이 변화될 수록, 더 많이 알고 싶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거룩이 더해 갈 수록 죄에 대한 인식이 더 또렷하고 깊어지며 이는 더 깊은 거룩의 갈망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정말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는 지를 먼저 물을 일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만나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 않고 궁금하지 않은 담에야 "알고 싶을"리 만무하지 않은가? 알고 싶지 않은데 알 수는 없는 노릇이며, 사랑해야만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앎"을 "세상의 실체를 받아들이고 탐구하려는 인간의 책임있는 노력"으로 정의한 에스더 믹의 진술은 좀 메마른 감이 있어 아쉽다.

bk

1.02.2009

진리

진리는 올바른 명제들의 집합이나 주관적 가치가 아니라, 영원불변하며 초월적이며, 나아가 인격적이다.

Dr. JungSuk Rhee

창조, 타락, 구속

"God the Father has reconciled His created but fallen world through the death of His Son, and renews it into a Kingdom of God by His Spirit."


Herman Bavinck


개혁주의 신학의 가장 간단하고 명료한 진술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우주에 대한 포괄적이고 배타적인 주권과 섭리를 선언한다.

창조-타락-구속의 세계관을 통해 철학적 구조와 신학적 방향을 동시에 보여 준다.


12.17.2008

신경과학과 인간 본성


인간이란 무엇인가. 특히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물음은 신앙과 학문 등 모든 사유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철학자 칸트는 이에 대해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를 철학의 근본 물음이라고 규정하면서 이 세 가지 물음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 환원된다고 주장했다. 그가 철학을 ‘인간학’이라고 정의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인간 본성에 관한 철학 이야기/이현복 외 지음/아카넷/1만3000원

5월 들어 나란히 번역 출간된 ‘인간 본성에 관한 철학 이야기’(이현복 지음, 아카넷), ‘의식의 재발견-현대 뇌과학과 철학의 대화’(마르틴 후베르트 지음, 원석영 옮김, 프로네시스), ‘꿈꾸는 기계의 진화-뇌과학으로 보는 철학 명제’(로돌포 R. 이나스 지음, 김미선 옮김, 북센스)는 모두 끝없는 물음의 원천인 ‘인간’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책들이다.

‘인간 본성에 관한 철학 이야기’는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이고, 그 본성은 어떻게 파악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세계 안에서 인간의 위치는 어떠한지 등 인간 본성과 관련해 제기되는 여러 문제를 인류가 축적한 철학적 사유를 총동원해 고찰하고 있다. 한양대 이현복 교수를 비롯해 세종대 이태하, 경북대 손성철, 서강대 김영건 류제동 교수 등 대학에서 철학과 종교학을 강의하는 13명의 필자가 참여했다. 정낙림 경북대 교수는 ‘자기를 긍정하는 디오니소스적 인간’에서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

◆의식의 재발견-현대 뇌과학과 철학의 대화/마르틴 후베르트 지음/원석영 옮김/프로네시스/1만3800원

에 놓인 밧줄이다. 심연 위에 걸쳐진 밧줄이다. 저쪽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줄 가운데 있는 것도 위험하며 뒤돌아보는 것도 벌벌 떨고 있는 것도 멈춰 서는 것도 위험하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는 니체의 사유를 인용하며 인간을 설명했다.

‘인간은 자유의지의 주인인가 신경 회로의 노예인가’라는 화두를 먼저 던지고 출발하는 ‘의식의 재발견’은 “인간의 자유의지는 뇌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단정한다. 망원경이 발명되기 이전인 16세기까지 인간은 우주의 중심은 지구이며 하늘은 한낱 지구를 도는 바퀴로 상상했으나 지금은 지구란 태양 주위를 도는 작은 점에 불과함을 알게 되었듯이, 현재 인간은 자신의 사유기관을 들여다보는 기계들을 만들어 내 뇌 속까지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한다’는 수천 년간 지속하여 온 인간에 대한 견고한 생각은 타격을 입었고, ‘인간은 한 조각 자연에 불과하다’는 자조까지 하게 됐다. 물론, 인간이 느끼는 황혼의 장려함이나 바이올린 현의 미묘한 울림, 사랑에 빠진 순간의 불가해한 심적 상황은 설명하기 어렵지만….

◆꿈꾸는 기계의 진화-뇌과학으로 보는 철학 명제/로돌포 R. 이나스 지음/김미선 옮김/북센스/1만8000원

미국 뉴욕대 의대 생리학 및 신경학과 학과장 로돌포 R 이나스가 쓴 ‘꿈꾸는 기계의 진화’는 인간 뇌의 운동을 단순한 ‘작용’으로 파악하지 않고, 생명의 ‘기억’으로 바라본다. ‘마음은 곧 뇌’라고 정의하는 저자는 뇌의 신비를 단일 신경세포 단위에서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나스 교수는 ▲뇌의 기능과 언어·감정은 하나의 세포에서 시작된다 ▲뇌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예측한다 ▲인지능력의 대부분은 유전적으로 갖추어진 채 태어난다 ▲운동과 언어와 감정은 이미 패턴화되어 있다는 등 네 가지 특징으로 인간의 뇌과학 연구 성과를 정리한다.

‘마음은 생명체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진화의 산물’이라고 결론 내린 이나스 교수는 “인간의 유전자에는 30억 년 동안 진화를 거듭해온 인류의 역사가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이를 ‘생명체의 기억’이라고 표현한 나이스 교수는 “마음의 본성을 완전히 이해하는 날, 우리는 서로를 더욱 존중하고 찬미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이쯤 되니, 인간은 곧 우주이고, 인간은 곧 한울님이라는 종교의 경지가 낯설지 않다.

조정진 기자 jjj@segye.com


Nancy Murphy 교수님을 통해 신경과학과 철학이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을, 대화 해야만 한다는 것을 배웠다. 물질적 환원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동시에 영과 육을 분리시키는 플라톤-데카르트식의 이원론을 극복하는 인간 이해가 절실히 요청된다. Non-reductive monism...


12.15.2008

Paulo Freire


Paulo Freire (1921-1997)
Brazilian educational philosopher and social educator
Christian humanist

"Our pedagogy cannot do without a vision of man and his world. It formulates a scientific humanist conception which finds its expression in a dialogical praxis in which teachers and learners, together, in the act of analyzing a dehumanizing reality, denounce it while announcing its transformation in the name of the liberation of 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