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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2011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오늘 새벽 답답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갔다.
내 마음에 가득찬 죄의 비열함과 부패의 역겨움
입을 여는 것 조차 두려운 절망  


그러나 주님은 찬양을 주셨고, 내 마음을 위로해 주신다.
나의 죄악에 고통하시는 하늘 아빠의 가슴아픔
죄악된 나와 일그러진 세상을 회복하시려는 창조주의 열정
그 말씀하신 바를 결단코 이루시는 전능자의 결심

내 마음은 녹아내렸으며 새로운 책임감과 삶에 대한 의욕이 솟아난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나를 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니
단순한 기쁨이나 만족보다 더 깊은 차원의 갈망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카도쉬!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보소서 주님 나의 마음을 선한 것 하나 없습니다
그러나 내 모든 것 주께 드립니다

사랑으로 안으시고 날 새롭게 하소서
보소서 주님 나의 마음을 선한 것 하나 없습니다
그러나 내 모든 것 주께 드립니다
사랑으로 안으시고 날 새롭게 하소서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내 아버지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내게 사랑을 가르치소서
당신의 마음으로 용서하게 하소서

주의 성령 내게 채우사 주의 길 가게 하소서 주님 당신 마음 주소서
주의 성령 내게 채우사 주의 길 가게 하소서 주님 당신 마음 주소서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내 아버지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님 마음 내게주소서 (x2)

12.27.2010

아브라함 링컨의 기도

아브라함 링컨의 기도

제일은, 나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예배생활에 힘쓸 것이다.

제이는, 나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실천할 것이다.

제삼은, 나는 도움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날마다 겸손히 기도할 것이다.

제사는, 나는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이다.

제오는, 나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할 것이다.

제육은, 나는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할 것이다.

제칠은, 나는 하나님만을 높여 드리고 그분께만 영광을 돌려 드릴 것이다.

제팔은, 나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 모두는 자유하며 평등하다고 믿는다.

제구는, 나는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실천할 것이다.

제십은, 나는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진리와 공의가 실현되도록 기도할 것이다.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대통령 링컨』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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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링컨이이 기도문을 만들고 기도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특히 그의 유려한 문체와 깊은 사고에 비해 너무 짧고 또 인위적이다. 차라리 한국의 보수교회 지도자들의 형식적 기도문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링컨이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말 의미하는 바가 크다.  첫째로는 기도의 내용에 하나님 사랑과 사람사랑이 담뿍 묻어나는 것 때문이요, 둘째로는 그가 이 기도문대로 살려고 애쓰고 노력했으며 고난과 역경을 뚫고 이 기도를 실현해 내려 몸부림쳤음을 역사가 증언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이 기도문대로 살아가기를 다짐해 보며 이에 나의 중보기도수첩에 적어 놓는다.

적다 보니 십계명을 따라가며 기도문을 만들어 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 사랑, 사람 사랑. 경천애인이라 했던가? 기도의 핵심이며 삶의 확고부동한 원칙이어야 한다. 링컨의 유명한 케티스버그Gettysburg의 연설(사실 수많은 전사자들의 무덤앞에서 유족들에게 행한 연설이다) 가운데 삽입된 그의 기도생활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 노력한 바를 증언한다.

"Well, I will tell you how it was. In the pinch of the campaign up there (at Gettysburg) when everybody seemed panic stricken and nobody could tell what was going to happen, oppressed by the gravity of our affairs, I went to my room one day and locked the door and got down on my knees before Almighty God and prayed to Him mightily for victory at Gettysburg. I told Him that this war was His war, and our cause His cause, but we could not stand another Fredericksburg or Chancellorsville... And after that, I don't know how it was, and I cannot explain it, but soon a sweet comfort crept into my soul. The feeling came that God had taken the whole business into His own hands and that things would go right at Gettysburg and that is why I had no fears about you." [July 5, 1863]

bk

5.12.2010

영적 유기

"주일 아침마다 우리는 신앙을 고백합니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이렇게 고백하는 것을 더 이상 믿지 못하고 멈춰 설 때, 예레미야처럼 신앙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경험할 때, 도대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깊은 회의 에 빠지게 되는 때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 기도한다." 다시 말해서 계속 믿을 수 있도록, 우리의 신앙이 떨어지지 않도록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믿는 일을 계속 할 것입니다. 왜입니까?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믿고'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놀라운 은혜라고 부릅니다.
때로 신앙의 깊이를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신앙을 상실하는 것, 신앙의 붕괴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상실과 붕괴는 신앙의 크기 혹은 깊이를 경험하게 합니다. 자신의 신앙이 참으로 하찮고 보잘것없음을 체험할 때, 바로 그때 당신은 집요하고도 완강한 그리스도의 결심, 나의 신앙이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이야말로 당신의 영혼과 육체, 온몸과 온 마음을 움츠러들게 하며 소름끼치게 하는, 그럼에도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경험입니다."

유호준, 인간의 죄에 고뇌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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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유기spiritual desertion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공통적으로 겪게 되는 신앙여정의 한 부분이다. 주변의 환경이나 인간관계, 또는 신앙공동체에서 경험하는 여러가지 갈등, 고통, 긴장과 스트레스가 지속되거나 또는 자신만이 아는 멈출 수 없는 죄된 습관이 계속되어 불안과 죄책감 수치감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채로 오랜 시간이 지나면 영적 침체를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영적 침체가 계속 되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과 감정에 휩사여 절망의 심연으로 끝도없이 떨어져 버릴 때가 있다.

17세기 화란에서 일어났던 제 2의 개혁운동에 큰 역할을 감당했던 기스베르투스 후치우스Gisbertus Voetius(1589-1676)는 이러한 영적 유기의 상태를 "신앙인이 중심으로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감정을 갖지 못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내적 십자가 또는 영적 슬픔과 시련"이라고 정의했다 (Spiritual Desertion 1659, 30). 후치우스는 놀랍게도 (그가 야코보스 알미니우스의 제자라는 점에서 본다면 참 경악스러울 정도이지만, 그가 깔뱅의 후예라는 점에서는 너무도 당연하게) 신자들의 영적 유기의 일차적 원인을 하나님 자신에게서 찾는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과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시지 않는다면 인간편에서는 사실 제 아무리 노력을 기울인다 할 지라도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신앙을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영적 유기의 좀더 직접적이고 주요한 실제 원인은 믿음에 의한 분명한 확신의 결여이다. 즉 영적 유기의 문제는 믿음이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영적 침체와 유기를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단순히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라고 조언하는 것은 마치 먹을 빵이 없어 배고파하는 사람들에게 빵을 먹고 배부르라고 권하는 것과 같다.

어떻게 영적 침체와 유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영적인 붕괴에서 어떻게 탈출 하여 다시금 굳건한 신앙의 반석 위에 설 수 있을 것인가? 신앙의 확신결여로 인한 영적 침체를 경험하는 당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그러나 끊임없는 사랑과 은혜로 신앙을 주시는 분도, 신앙의 침체를 허락하시는 분도, 그리고  신앙을 다시 회복하시는 이도 그리스도이시다. 인간 편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처절하게 경험하는 것은 가혹하리 만큼 고통스러운 경험이지만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집요한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영적 침체 역시 신앙의 더 깊은 지경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 다만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믿음의 공동체 안에 머물면서 버티라"는 것이 가장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 신앙은 개인사가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경험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바로 이 때 절실하고 위력적으로 작용한다. 다윗은 "부르짖어도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찬송"중에 거하시며, 신앙공동체의 모임에서 선포와 증거와 찬양과 부르짖음을 통해 수치를 면하고 "찬송"을 회복할 수 있음을 노래하였다 (시22).

bk

1.08.2010

계획과 충고

"만약 모든 사람의 충고대로 집을 짓는다면 삐뚤어진 집을 짓게 될 것이다."

마이클 린버그, 너만의 명작을 그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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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들이나 사랑하는 가족들의 충고도 소중하며 가치있다. 그러나 나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내적 확신과 직관들도 역시 중요하다. 그것이 진리의 말씀과 기도의 무릎, 그리고 양심의 비판을 통과하여 정돈된 일관성을 확보하였다면 훨씬 더 중요하다.
bk

기도

"기도란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행하는 일에 대해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이다."
달라스 윌라드, 하나님의 모략 329

기도는 아버지와 나누는 친밀한 대화라고 예수님은 가르쳐 주셨다. 내 생각을 말씀드리면 그분의 생각을 들려 주신다. 내 관점을 말씀드리면 그분의 관점을 말씀해 주신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말씀드리면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말씀해 주신다. 하늘 아버지는 자상하시고 지혜로우셔서 내가 알아 들을 수 있을 만큼만 알려 주신다. 그리고 알아 들을 수 있게 말씀해 주신다. 중요한 것은 기도는 인격적인 대화라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존중하고 그분의 의중을 가치있게 여기며 간절한 마음으로 이해하기를 "열망"할 때 그분은 말씀하신다. 그분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 나의 양심을 통해,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 또렸하고 확실하게 말씀하신다.

"나의 주님. 당신은 아침마다 내 목소리를 들으십니다. 그러니 이 아침에 내가 당신앞에 나아가 기도하며 당신을 소망하고 기다립니다." 시편 5:3

bk

10.10.2009

자기 중심성에 교정을 요구하는 하나님 나라 (2/6)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염원하는 두 번 째 청원은 예수의 가르침의 요체인 산상수훈과 주기도문에서도 그 고갱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예수가 염원한 "당신의 나라(hei basileia sou)가 현실화 됨"이 내포하는 존재적 긴장(tensity)은 우리의 기도속에서 거의 무시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기 예수 공동체에게 있어 "나라"의 문제는 추상적 정치토론이나 스트레스를 푸는 잡담거리의 단골메뉴가 아니었다. 로마 제국의 식민지 통치나 이에 저항하는 유대민족주의자들에게 있어 "예수 공동체"는 공히 '공공의 적'이었기에 예수공동체에게 있어 "나라"의 문제는 하루의 안녕한 삶과 직결된 긴급하며 절박한 문제였다.

예수의 생애를 전후로 로마제국은 치밀한 법률과 강력한 군사력, 그리고 세련된 문화를 바탕으로 여러 민족들을 정복하고 착취하여 로마적 번영과 평화(pax Romanna)를 추구하였다. 반면 유대민족은 유대교의 선민사상과 메시아주의를 근거로 창조주 야훼의 통치가 유대민족의 정치적 해방과 흩어진 디아스포라가 집결됨을 통해 실현될 것을 신앙하고, 제국의 이데올로기와 황제숭배를 기반한 무력적 식민지 통치에 대항하여 격렬하게 투쟁하였다. 이 두 나라의 힘의 충돌 사이에 십자가가 서 있다. 이스라엘의 해방을 염원하던 유대 민족주의자들은 예수가 보여준 놀라운 기적과 이사를 팍스 로마나(pax Romanna)를 전복시키고 이스라엘을 살롬의 중심(Jerusalem)으로 회복하는 메시아적 힘으로 오해하였다. 반면 식민지의 치안을 제국 번영의 기초로 보았던 로마군인들은 스스로 왕임을 주장하는 예수와 골치아픈 유대지도자들 사이의 분쟁이 정치적 소요로 번지지 않도록 사전에 제압하려 하였다. 따라서 로마군인들은 예수에게 시저의 황금 면류관 대신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찌어다"라며 모욕하고 폭행하였고, 유대인들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스스로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소하였다. 자력으로 번영과 구원을 획득하려는 아담적 실존은 자기를 비움으로 생명을 얻는 그리스도의 실존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터였다. 십자가와 부활로 시위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당시 제자들의 "나라"의 이해, 즉 로마적 힘과 번영을 추구함과 이스라엘의 신적 존재에 힘입은 자기 실현, 에 근본적 교정을 요구한 것이었다.

로마적 힘의 추구와 유다적 메시아주의 공통적 뿌리가 스스로 주인되려 하는 "자기 중심성"이 라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청원은 이러한 "자기 중심성"의 뿌리를 찍어내는 강력한 도끼이다. 자기 스스로의 판단, 경험, 자원, 지혜, 힘, 인맥을 의존하여 자기의 왕국을 건설하고 안녕을 보장받으며 번영을 추구하려는 자기 중심성은 예수 공동체 안에서도 그 맹위를 떨쳐 부활한 예수에게 조차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를 질문하게 하였다. 그러나 스스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유혹의 정체를 직시하고 거부하며 하나님을 힘입어 그분의 언명대로 살아가기를 선포한 예수의 사람들은 지금 이 세상에 만연한 개인적, 사회적, 민족적, 국가세계적 문제의 근원이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려하는 죄성"임을 비분강개하고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신 둘 째 아담의 못다한 절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를 영혼에 담아 "나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가 내 삶의 구석 구석에 임하시기를 간절히 염원해야 한다. 이 염원을 예수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요약한다.

결국 하나님 나라의 현실화를 위한 청원은 실천적으로 자기 부정을 위한 기도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하지 않는 자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요원하다면, 자신의 자원과 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적대적이고 위협적이다. 스스로 절망하여 자기를 부인할 수 밖에 없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열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에 대한 절망은 하나님 신앙의 자궁이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절망은 자연스럽게 되지 않는다. 인간의 죄성은 스스로 살기 위해 자신과 이웃의 생명을 해할 만큼 뿌리가 깊고 강력하다. 따라서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음 조차 스스로 할 수 없다는 실존앞에 자아가 해체되는 것 (이러한 자기 부정을 자연인중 누가 감히 원한단 말인가?)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나라이 임하옵시며"는 자기 부정을 위해 초월적 은혜를 요청하는 기도로 발전한다.

이 기도를 바탕으로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통치속에 자기 한계를 초월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음습한 지하동굴에 숨어서도 로마의 제국주의와 배타적 유대주의를 뛰어넘어 노예와 주인이, 귀족과 하층민이, 부자와 거지가, 고매한 학자와 불학무식한 자가, 여자와 남자가, 유대인과 헬라인이, 도덕적으로 불량한 자들과 인격적으로 훈련된 자들이, 언어와 인종과 빈부와 학식과 정치적 이념과 삶의 방식과 문화를 뛰어 넘
는 우주적 "하나님 나라" 예수 공동체를 경험할 수 있었다.

bk

10.03.2009

자기 중심성과 하나님 나라 (1/6)

'하늘에 계신' 이라고 말하지 말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말하지 말라,
너 혼자만을 생각하며 살아 가면서...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
하나님의 아들, 딸로서 살아가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말하지 말라,
실제론, 자기 이름을 빛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하지 말라,
물질 만능의 이 세상을 좋아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라고 하지 말라,
내 뜻대로 되기를 원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라고 말하지 말라,
속으로는 평생토록 먹을 양식을 쌓아두려 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저희를 용서해 주옵시고' 라고 말하지 말라,
누구에겐가 지금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며'라고 말하지 말라,
죄 지을 기회를 은밀히 찾아 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옵시며'라고 말하지 말라,
악을 보고도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으면서...
'아멘'하지 말라,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조금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우루과이의 어느 성당에 써 있다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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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자기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문(엄격하게 말한다면, 주께서 가르치신 또는 명령하신 기도모범)은 그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핵심 메세지를 담지하고 있다. 특히 마태판에서의 주기도문은 산상수훈의 정 가운데 위치함으로 '하나님 나라'공동체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에 절정부분을 차지한다. 여섯 가지의 요청/청원으로 되어 있는 주기도문은 그당시 다양한 유대공동체에서 회람되던 생활 기도문들과 비교하여 볼 때, 문학적 형식과 일상에서의 사용방식을 공유하지만, 그 내용은 현격히 다르다. 특별히 인간의 근원적 죄성인 자기 중심성에 기반한 기도를 우주적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염원으로 교정하고, 실제 삶 속에서의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한 의도적 실천(orthopraxis)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점이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
마태판에서 등장하는 '하늘에 계신'의 수식은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다. 하늘(uranos)은 초월과 궁극을 상징하는 메타포임과 동시에 '늘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전능성과 무소부재의 속성을 내포한다.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 안에 계시고, 만물을 통해 계시는 무한한 창조주가 '우리 아빠'가 되셨다는 선포는 그래서 혁명적이다. 무한한 하나님이 한낱 먼지와 같은 피조물과 생명 세계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친밀하고 깊은 관계를 맺으셨다! '아버지와 자녀들'의 관계는 영원한 신뢰와 사랑, 자비와 긍휼, 용서와 수용, 보호와 공급의 언약관계가 공동체적으로 주어졌음을 천명하며 창조주의 피조물을 향한 기이한 사랑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기도는 비인격적인 주문이나 부적일 수 없고, 왕에게 고하는 신하의 상소도 아니다. 기도는 어린 자녀가 아빠와 갖는 친밀한 관계의 속삭임이며 전 존재의 의지적 의존과 하나됨이다. "아빠"를 부르는 순간은 창조의 영과 인간 영의 교통이 시작되고 왜곡된 자아와 뒤틀린 세계를 강압하는 존재의 허무를 부수고 무한한 생명의 파장으로 침투하시는 성령의 사건이 발생한다.

일인칭 복수 소유격인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창조주와 언약공동체인 자녀들과의 공동체적 관계를 통해 구현됨을 암시한다. '우리 아빠'는 개체적이며 자기 중심적인 수직관계를 형제와 자매된 공동체원들과의 관계 보다 우선시 하려는 시도가 가지는 불합리성을 지적한다. 초월적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만 도달하는 것이며 따라서 실존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우리"가 없이는 "아빠"도 존재할 수 없다는 명제가 가능해 진다. 세종대왕이 예수를 경험적으로 알리 만무하며 이순신 장군이 "하나님 나라"를 상상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다른 이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초월적 하늘 아빠와 피조물이 관계 맺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분의 은혜를 믿음으로 수용하여 아버지와 자녀들의 "공동체적 언약관계"가 성립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 뿐이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한 까닭은 동료가 없을 때 경험하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함이 아니며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었다는 점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존재양식 자체가 세분의 하나님이 한 하나님이 되시는 완전한 공동체이심을 상기한다면 기도는 공동체의 공동체에 의한 공동체를 위한 것임이 자명해 진다. 따라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는 나의 나에의한 나를 위한 기도가 가지는 중요성과 한계를 동시에 인식하게 하고 기도주체는 언약 공동체임을, 하나님의 나라는 언약 공동체에 기초함을 각인시킨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기도하는 이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는 청원의 주체와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실존적 차이와 이를 뛰어 넘는 하늘아버지의 사랑을 인식하며, 깊은 신뢰와 함께 두렵고 떨림의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간구할 것을 요청한다. 따라서 이러한 실존적 차이를 극복하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인식은 자연스럽게 하늘 아버지의 속성들이 찬양되고 인정되기를 바라는 첫번 째 청원으로 연결된다.

거룩의 일차적 개념은 윤리적이기 보다 관계적이다. 영원한 타자로서의 하나님은 유한한 피조물과 극명히 대조되는 초월적 존재이시다. 하나님의 존재선포인 그분의 이름에 외경심을 느끼고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카도쉬)이 돌려지기를 사모하는 마음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아버지와 자녀들이 갖는 '관계의 진실성'을 반증한다. 즉 하나님의 이름에 두려움도, 떨림도, 흠모함도, 깊은 신뢰나 사랑도 느낄 수 없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마땅히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는 간절한 염원이 없다면, 스스로 하늘아빠와 맺고 있는 언약관계를 점검해야 한다.

이러한 초월적 절대 타자와의 특별한 관계맺음에서 거룩의 이차적 개념인 윤리성이 도출된다. 하나님의 거룩은 그와 관계맺는 인간의 속성과 존재가치를 무한히 끌어 올려 상대적이며 주관적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도덕과 윤리를 지고한 보편과 궁극의 굳건한 반석 위에 올려 놓는다. 하나님을 경외함과 성스러움에 대한 갈망은 인간의 충만한 삶을 보장하는 샬롬의 기반이며 자유와 평등, 정의와 인권, 평화와 행복의 가치들을 인간됨, 또는 인간관계의 "기본"조건으로 승격시킨다.

따라서 하나님 이름의 거룩함을 부르짖는 기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에 대한 광대하고 우주적인 선포이며 인간의 거대한 절망과 한계를 미세한 분진으로 축소시키는 강력한 인식의 전환이다. 동시에 거룩에의 청원은 찬양과 경배의 대상에 인간 자신을 위치시키려는 죄의 본질을 근원적으로 부정하게 함으로 지독하게 뿌리깊은 자기 우상화를 경계하고 동료인간과 전 피조세계에 샬롬을 천착시키려는 갈망과 의지를 독려한다. 말과 행동과 의지와 생각과 태도에서 하나님의 성스러움을 힘입어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 드리려는 마음과 결단의 표현은 경배와 예배를 배타적 집단이 갖는 자기 만족의 사적 종교의식에서 벗어나 전 인류의 발전과 피조세계의 중흥을 신의 주권에 맡기고 의탁하는 웅혼한 축제로 승화하게 한다.

bk


9.13.2009

선물

만일 그대가 원한다면
나 그대에게 드리렵니다
아침, 그토록 상쾌한 아침과
당신이 좋아하는
빛나는 내 머리칼과
푸르고 금빛나는 내 눈을.

만일 그대가 원한다면
나 그대에게 드리렵니다
따스한 햇살 비치는 곳에서
눈뜰 때 들려오는 온갖 소리와
분수에서 들리는
흐르는 물줄기의 아름다운 소리를.

마침내 찾아들 석양 노을과
쓸쓸한 내 마음으로 얼룩진 저녁,
조그만 내 손과
당신 가까이에
놓아두고 싶은
나의 마음을.

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
(painting; Muse Inspiring the Poet. Portrait of Apollinaire and Marie Laurencin, by Henri Rousseau,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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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아폴리네르는 이탈리아의 시인이며 예술 평론가였다. 피카소 등과 입체파 미학을 확립하고 20세기 초반의 전위적 예술 활동에 참가하면서 모더니즘을 이끌어 갔다.

"당신 가까이 놓아두고 싶은 마음"보다 더 큰 선물이 있을까? 나를 다 주도록 사랑하는 그 사랑은 계속 되어야 할 일이다. 그렇게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 가까이 놓아두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해준 그 상대가 더 큰 선물이리라. 그건 그렇고 이장희씨는 아폴리네르를 알았을까?

예배와 기도는 마음과 태도의 문제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다시 한번 나의 마음을 그분 가까이 놓아 드리기로 결심한다. 비록 빛나는 머리칼이나 푸르고 금빛나는 눈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 모나고 거친 마음에 실수 투성이인 허물 많은 나라도 목숨을 다해 사랑하시는 그분에게 내 마음과 정성을 모아 드릴 일이다. 애쓰고 힘쓰기 전에, 그분을 향한 그 애틋한 마음이 왜 덤덤해 졌는 가를 점검하고 평가해 볼 일이다. 그분의 깊고도 깊은 사랑에 충만히 졌도록 나를 그 거룩한 지성소 안으로 들일 일이다. 그래서 그분의 신실하신 사랑에 고요히 나를 잠글 일이다.

bk

8.21.2009

김대중 선생의 삶과 헤르만 헤세의 기도

"희망과 좌절, 기쁨과 공포, 그리고 해결과 의혹의 갈등과 번민을 매일 되풀이해왔고 지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며, 그분이 나와 같이 계시며,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며, 그 사랑 때문에 지금의 이 고난을 허락하셨으며, 나를 위하여 사소한 일까지 돌보시며, 지금 이 시간에도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시기 위한 역사를 쉬지 않고 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나의 감정이나 지식으로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든 것인가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통감하면서 부족한 믿음에 절망하고 화를 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현재의 환경도 주님이 주신 것이며, 주님이 보실 때 최선이 아니면 이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제가 주님의 뜻과 앞으로의 계획하심을 알 수는 없으나 오직 주님의 사랑만을 믿고 순종하며 찬양하겠습니다."

죽음을 앞둔 감옥에서
후광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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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믿음에 절망하고 화를 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만이 참 믿음이라고 성서와 신앙의 선배들은 늘 강조했다. 예수를 믿는 신앙은 철저한 자기 부정에서 출발한다. 스스로에 대한 절망은 신앙의 자궁이다. 스스로에 대해 절망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선"을 갈망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절대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절망은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죄성은 스스로 살기 위해 나와 이웃의 목숨마져 위태롭게 할 만 큼 뿌리 깊고 강력하다. 그래서 나 스스로에 대한 절망 마저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며 기도가 요구된다. 이런 점에서 "당신 안에서 기꺼이 멸망하고 싶다"고 기도한 헤르만 헤세의 외침도 울림이 크지만, 후광의 기도는 헤세의 기도를 온 삶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헤세보다 더욱 위대하다.

기도

신이여, 저를 절망케 해주소서.
당신에게가 아니라, 제자신에게
절망하게 하소서.
미친 듯 모든 슬픔 맛보게 하시고
온갖 고뇌의 불꽃을 핥게 하소서.
모든 치욕을 맛보게 하소서.
제 자신을 가눌 수 있게 돕지 마시고,
제가 뻗어 나가는 것을 돕지 마소서.
하나 저 자신 모두가 이지러질 때,
그 떼에는 제게 가르쳐 주소서.
당신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당신이 불꽃과 고뇌를 보내셨다는 것을.
기꺼이 멸망하고.
기꺼이 죽어가고 싶습니다만,
저는 오직 당신 속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헤르만 헤세 (Hernman Hesse, 1877-1962)

7.18.2009

로마서를 읽다가 십자가 앞에 서다

하늘은 맑고 구름은 깊다.
나무는 푸르고 바람은 시원하다.
세상은 아름답고 평온해 보인다.

난 두려워하고 있다.
"두려워말라"
그래도 두렵다고
너무도 떨린다고
두눈을 감는다.

온 세계를 덮어버린 칧흙같은 어두움
폭풍우 속에 성난 산 솟구친 파도
내려 꽃히는 번개 찟을 듯한 천둥사이
삼켜져 버릴듯 요동치는 배 한조각
그 속에 쪼그라든 내가 웅크려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평안하라고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면 증거를 보이라고

벌거벗긴채
침뱃음을 당하는
만왕의 왕

가시로 만든
왕관에 찔려
나무에 매달린
하나님의 아들

아하 아하
하나님의 아들이여
만왕의 왕이여
스스로 구원하고
거기서 내려오라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물처럼 쏟아지는 피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갈증
터처버린 심장
뻣뻣해진 근육
멈추고 싶은 호흡
마비되는 정신

"일로이 일로이 라마 사박다니"
외로운 외침
소망 향한 절규

"나의 주 당신의 손에
다시 또 한번
당신을 위해
나의 영혼을 맡겨 드리니

내가 사는
이세상
죽음까지도
당신의 손에 있는것

내가 살아가는
바로 그 목적
내가 노래하는
바로 그 이유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당신의 품에
그렇게 영원히
나 있기에..."


다윗의 노래를 따라
수백번 수천번
겟세마네에서 드렸던
바로 그 기도

나의 주님 그렇게
기도하시다
마치지도 못한 채
운명하셨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신뢰하는 자
부끄러움 없으리

하나님의 눈물
땅을 뒤덮고
막혀진 죄의 휘장
찟겨 나갔다.

into your hand I commit again
with all I am
for you Lord

you hold my world
in the palm of your hand
and I'm yours forever

Jesus I believe in you
Jesus I belong to you
You're the reason that I live
the reason that I sing
with all I am

I'll walk with you
wherever you go
throguh tears and joy
I'll trust you

and I will live
in all of your ways and
your promises forever

I will worship
I will worship you
forever

Amen

-Hillsong United-
Psalm 22
Mark 15
Romans 10


bk

7.04.2009

배움을 위한 기도

배우게 하소서 -존 베일리-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일을 잘 이용하여
죄의 열매를 거두지 않고
성결의 열매를 거두게 하소서

실망으로 희망을 배우게 하소서
성공으로 감사를 배우게 하소서
불안으로 참음을 배우게 하소서
위험으로 담대함을 배우게 하소서

비난으로 오래 참음을 배우게 하소서
칭찬으로 겸손을 배우게 하소서
기쁨으로 절제를 배우게 하소서
고통으로 인내를 배우게 하소서

6.24.2009

본회퍼와 윤동주

"The disciples are few in number and will always be few."

Dietrich Bonhoeffer in The Cost of Dicipleship. 162.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마다 기도가운데 떠 올리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데 있어 조건 보다는 의미를, 의미 보다는 소명을, 소명 보다는 이타적 희생의 사랑을 더 중요한 우선순위로 두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복음이 상품으로 전락해 버리고 기독교가 이익집단처럼 변질되 버린 오늘의 상황에서, 십자가의 희생적 은혜를 값싼 은혜로 바꿔 시장바닥에 팔아먹는 것이 교회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원수라고 절규하던 본회퍼의 외침이 더욱 힘있고 명징하게 들린다. 오늘날 예수의 제자로서 걸어야 할 그 길은 역사상 그 어느 때 보다 좁고 가는 사람이 적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목회자는 맡겨진 양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 놓는 목자여야 한다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라고 믿는 다면 그렇게 살다가 죽을 일" 이라고 말씀하시는 선배 목사님의 한마디에서 윤동주의 "십자가"를 듣는 행복과 기쁨을 맛 보았다.
. . .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붉은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bk

4.02.2009

순수한 기도

하나님, 내가 무얼 원하는지
다 아시는데왜 기도를 해야 하나요?
그래도 하나님이좋아하신다면 기도할게요.
- 수 -

사랑하는 하나님,오른쪽 뺨을 맞으면왼쪽 뺨을 대라는 건 알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은여동생이 눈을 찌르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 사랑을 담아서 데레사 ㅡ

하나님 하나님왜 밤만 되면 해를 숨기시나요?
가장 필요할 때인데 말이에요.
- 바바라 -

하나님, 하나님은천사들에게 일을 전부 시키시나요?
우리 엄마는우리들이 엄마의 천사래요.
그래서 우리들한테 심부름을 다 시키나봐요.
- 사랑을 담아서 마리아 -

하나님, 지난 주 뉴욕에 갔을 때,성 패트릭 성당을 보았어요.
하나님은 아주 으리으리한 집에서 사시던데요.
- 프랭크로부터 ㅡ

하나님,착한 사람은 빨리 죽는다면서요?
엄마가 말하는 걸 들었어요.
저는요,항상 착하지는 않아요.
-미셸-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주일학교에서 배웠어요.
그런데 쉬는 날엔누가 그 일들을 하나요?
- 제인 ㅡ

책에서 보니까요,
토마스 에디슨이 전깃불을 만들었대요.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알고 있었는데요.
- 도나 ㅡ

나는 조지 워싱턴처럼
절대 거짓말을 하지않으려고 결심했는데,
가끔씩 까먹어요.
- 랄프ㅡ

하나님, 남동생이 태어나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갖고 싶다고기도한 건
강아지예요.
- 죠이스 -

하나님, 사람을 죽게 하고
또 사람을 만드는 대신,
지금 있는 사람을그대로 놔두는 건어떻겠어요?
- 제인 -

3.25.2009

깊은 냄비를 주시는 하나님

늦은 밤, 도서관을 나서 집으로 가는 중 선교사님을 만났다. 사실은 선교사님이 어두운 곳에서 내 이름을 부른 통에 놀라서 섰다. 반가운 목소리로 불러주는 소리가 즐거웠고 한적한 곳에 큼직한 빡스를 어깨에 매고 있는 선교사님이 엉뚱했다. "선교사님, 이 밤에 거기서 뭐하십니까?" 싱글벙글 즐거운 목소리로 대답하신다. "아내가 기도하던 깊은 냄비를 주셨어요!"

"아내가 기도하던 깊은 냄비..." 몇마디 않고 헤어졌지만 "아내가 기도하던 깊은 냄비..."가 계속 마음 속에서 맴돌았다.

모교회에서 후원이 끊겨 기도하는 중이지만 하나님이 더 좋은 후원자들을 만나게 하실것이라며 함께 식당에서 손붙잡고 기도했던 것이 두 주 전이었다.

깊은 냄비가 필요해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하나님 깊은 냄비가 필요한데 마련해 주세요"라고 순수하고 친밀한 기도를 드렸을 사모님의 성스러운 모습이 떠올랐다.

아내의 기도를 유심히 귀담아 듣고 "깊은 냄비의 필요"를 자기 일처럼 묵상했을 선교사님의 따듯하고 책임감있는 마음이 느껴졌다.

누군가 놓아둔 박스를 어둡고 바람부는 밤에 그냥 스쳐 지나가지 않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보물 찾듯 소망의 기대를 놓치지 않는 그의 성실함과 믿음이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깊은 냄비가 거기 그렇게 놓여져 있었던 것이 결코 우연이나 운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자애롭고 치밀한 준비하심이라고 생각하는 영적 민감함과 깨어있음에 내 자신이 부끄러워 졌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그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기 위해 이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예비하시는 하나님, 나로하여금 그 현장에 참여하게 하심으로 "내가 너를 기억하며 내 손바닥에 새겼다"는 아침의 말씀을 컨펌해 주시는 놀랍고도 달콤한 하나님의 사랑에 코끗이 찡하고 가슴이 묵직하게 아려왔다.

"사랑하는 아들아 보았니? 어땠니?" 라고 물으시는 것 같아 반짝이는 별들을 향해 말씀드렸다. "깊은 냄비의 사랑을 보여주신 아버지, 사랑합니다."

3.25.09, bk

12.24.2008

유치한 것을 구함

하나님께 유치한 것들까지 구하는 법을 배우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께 큰 것을 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높은 마음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나는 우리가 장차 하나님의 위대하심보다는 우리 자신의 위대함에 사로잡혀 작은 기도조차 하지 못하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합니다.

C. S. Lewis, Letters to Malcolm: Chiefly on Prayer (NY: Harcourt Brace, 1964), 23.

12.23.2008

노동

기도만 아니라 노동으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쇠망치를 내려치는 일, 톱질하는 일, 벽에 페인트를 칠하는 일, 말 타는 일, 비질하는 일, 세탁하는 일등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당신이 마땅히 할 일로 알고 그 일을 한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합당하게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됩니다. 하지만 손에 쇠스랑을 든 남자나 설거지물에 손을 담그고 있는 여자도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분이셔서 모든 것이 그분에게 영광이 됩니다.

Gerard Manley Hopkins, The Spiritual Exercises of St. Ignatius Loyola

노동이 기도라는 오랜 경구는 전혀 과장이 아니다. 깊은 기도역시 노동에 준한다는 사에 신실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동의할 것이다. 노동이든 기도든,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 앞에 거룩하다. 그분에게는 모든 것이 성스럽고 모든 것이 영광이 된다. 그것이 그분의 위대함이다.

12.22.2008

기도

"전에 우리가 조용히 기도하던 중 우리 주님을 만난 경험이 있다면 우리는 주님을...시장에서, 마을의 광장에서도 만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을 우리 마음 중심에서 만나지 못했다면 일상적인 비즈니스에서 우리가 주님을 만나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Henry Nouwen, Gracias! A Latin American Journal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3), 21.

12.15.2008

기도와 소망

기도는 자신의 본성과 싸우는 전투이다.
기도는 소망의 행위이며 종말론적 행위이다.
기도는 기도하기 싫어하는 본능과의 싸움이다.

소망은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도전이다.
불가능한 것에 대한 열정이다.
소망은 하나님의 부재에 대한 반박 청구이며 언약신학의 표현이다.
소망은 실제로 하나님으로 하여금 간섭하시도록 자극하는 행위이다.
-자크 엘룰-

12.10.2008

예배전 기도


말씀을 선포하기 전 나는 늘 기도한다.
"성령님, 제발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 있는 소리없는 절규를 들어 주십시오.
무엇이 필요한 지, 무엇을 노래하고 있는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조차 분별할 능력이 없으면서도 머리와 마음과 감정의 출렁임을 진리로 확신하는 우리의 우매함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래서 이 모든 연약함, 무지, 고집과 편견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당신의 거룩하고 정확하며 완전한 진리의 말씀에 우리의 영혼이 사로잡히는 영적 사건이 바로 지금 이시간 이 장소에서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끝도 없는 자기사랑과 멈출줄 모르는 욕심,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려는 교만을 꺽으시고 죄로 인해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시어 이 세상에 충만하게 계시는 당신을, 그래서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깊이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우리에게 당신을 닮아가려는 마음과 의지, 지혜와 용기를 주시는 당신의 그 놀라운 사랑과 능력에 즐거워하고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붙잡아 주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리고 설교가 마치면 나의 연약함과 실수, 모자람과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그리고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위해 나의 기도를 들으셨음을 믿고 여전히 송구한 마음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사랑하는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뿌려진 당신의 말씀이 열매를 맺게 될 것을 믿습니다. 말씀대로 살도록 도와 주십시오."

4.28.2008

원래 모습

특별히 잘한 것이 아니라
그게 원래 자매의 모습입니다.

주님과 함께 서로 사랑하면서 사랑을 받고 사랑을 나눌 때,
그리고 서로를 향해 고요한 기도의 무릎을 꿇을 때,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경험하며,
그래서 내 안에 숨겨진 가능성이 최대로 발휘 될 뿐만 아니라,
혹여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분에 대한 소망으로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우리 모두의 원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러한 삶의 성스러움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맙습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인터뷰를 성공스럽게 마친 자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