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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1.2009

김대중 선생의 삶과 헤르만 헤세의 기도

"희망과 좌절, 기쁨과 공포, 그리고 해결과 의혹의 갈등과 번민을 매일 되풀이해왔고 지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며, 그분이 나와 같이 계시며,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며, 그 사랑 때문에 지금의 이 고난을 허락하셨으며, 나를 위하여 사소한 일까지 돌보시며, 지금 이 시간에도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시기 위한 역사를 쉬지 않고 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나의 감정이나 지식으로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든 것인가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통감하면서 부족한 믿음에 절망하고 화를 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현재의 환경도 주님이 주신 것이며, 주님이 보실 때 최선이 아니면 이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제가 주님의 뜻과 앞으로의 계획하심을 알 수는 없으나 오직 주님의 사랑만을 믿고 순종하며 찬양하겠습니다."

죽음을 앞둔 감옥에서
후광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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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믿음에 절망하고 화를 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만이 참 믿음이라고 성서와 신앙의 선배들은 늘 강조했다. 예수를 믿는 신앙은 철저한 자기 부정에서 출발한다. 스스로에 대한 절망은 신앙의 자궁이다. 스스로에 대해 절망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선"을 갈망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절대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절망은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죄성은 스스로 살기 위해 나와 이웃의 목숨마져 위태롭게 할 만 큼 뿌리 깊고 강력하다. 그래서 나 스스로에 대한 절망 마저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며 기도가 요구된다. 이런 점에서 "당신 안에서 기꺼이 멸망하고 싶다"고 기도한 헤르만 헤세의 외침도 울림이 크지만, 후광의 기도는 헤세의 기도를 온 삶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헤세보다 더욱 위대하다.

기도

신이여, 저를 절망케 해주소서.
당신에게가 아니라, 제자신에게
절망하게 하소서.
미친 듯 모든 슬픔 맛보게 하시고
온갖 고뇌의 불꽃을 핥게 하소서.
모든 치욕을 맛보게 하소서.
제 자신을 가눌 수 있게 돕지 마시고,
제가 뻗어 나가는 것을 돕지 마소서.
하나 저 자신 모두가 이지러질 때,
그 떼에는 제게 가르쳐 주소서.
당신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당신이 불꽃과 고뇌를 보내셨다는 것을.
기꺼이 멸망하고.
기꺼이 죽어가고 싶습니다만,
저는 오직 당신 속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헤르만 헤세 (Hernman Hesse, 1877-1962)

12.31.2008

고백

주여, 당신의 눈앞에서는 사람의 양심이 그 바닥까지도 "벌거벗은 것같이" (히4:13) 드러나오니, 내 속에 있는 것 가운데 당신께 고백하기 원하지 않는 것이라도 그 무엇이 감춰질 수 있겠습니까? 이는 내가 당신을 보지 않으려 내 눈을 가릴 수는 있어도, 나 자신을 당신에게서 숨길 수는 없음입니다.
이제 나는, 나의 한숨이 증거 하듯, 나 자신이 싫사오니, 당신이 내게 빛을 비추사 당신에게서 만족을 얻게 하시며,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바라보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나 자신에 대해서는 부끄러움을 느껴 나 자신을 버리게 해 주십시오! 대신 당신을 붙들게 하셔서 오직 당신께 의지함으로 당신을 만족케 나며, 나 자신을 만족케 하는 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Augustiuns, Confessio, 497, 10.2.2

주님, 당신으로 인해 만족을 얻게 해 주십시오. 내 자신을 만족시키려는 노력에는 열심이고 부지런했지만 그 결과는 만족이 아닌 허무와 절망과 좌절뿐이었습니다. 내 양심이 그것을 기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족을 얻기 위해 달려간 그 곳에서 양심의 호된 질책과 꾸지람을 듣고 낙망하였으며, 내가 만족을 얻지 못한 것은 아직도 내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다른 강렬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혼돈이요 무질서였습니다. 성난 파도에 휩슬리는 작은 배 처럼 나의 영혼은 그렇게 흔들리었습니다. 달리고 달리면서도 불안하고 고독하였으며 결국은 죄책감에 만신창이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주님. 내 영혼의 만족과 쉼은 그저 당신 뿐이었건만 나는 그것이 싫었고, 내 스스로 나를 만족시키고 쉼을 얻으려 그렇게 당신을 뒤로 하고 달려만 갔습니다.
주님, 이제 내게 당신의 빛을 비추사 당신을 사랑함으로, 당신께 돌아옴으로 만족을 누리고 행복을 맛보게 해 주십시오. 나는 이제 평안하고 싶습니다. 기뻐하고 싶습니다. 내 영혼이 양심으로 함께 자유하고 싶습니다. 도와 주십시오.
BK

12.06.2008

게으름의 정체: 싫증

정해진 삶의 길이 속에서 보다 많은 일을 하며 사는 법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가치가 적은 일보다 가치 있는 일에 집중하여 사는 것,
유능해지는 것,
부지런히 사는 것입니다.

인간 안의 부패성은 자기 중심적인 욕망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는 부지런하게, 선한 의무를 행하는 데 있어서는 게으르게 합니다.
그리고 그런 본성적 게으름은 영적인 변화 없이는 벗어 버릴 수 없습니다.

...거룩한 삶에 대한 그러한 모든 무기력 뒤에는 자기의 마음의 정욕을 따라 살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게으름의 정체입니다.

1. 게으름의 정체: 싫증

게으름은 바로 그렇게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제거되어야 할 대표적인 악이며, 영적인 불결입니다. 따라서 게으름과 싸워 그 뿌리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의 영향력으로 파괴하지 않으면, 성화에 있어서 진전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날마다 부지런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배우는 실천적인 순종함 없이는 어떠한 영적 성장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성품, 그리고 익숙해진 삶의 갈피갈피마다 깊이 배어 있는 게으름색출해 낼 것입니다. 말씀의 빛이 우리 안에 있는 게으름의 정체를 드러낼 때 여러분들은 더 이상 그것들과 친구가 될 수는 없을 것이며, 이제껏 여러분 안에서 하나 된 삶을 살았다는 것에 대하여 소스라치게 놀라게 될 것입니다. 마치 환자가 수술 후 자기 몸에서 떼어 낸 암덩이를 보고 끔찍해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여러분들은 오랫동안 멈췄던 '착하고 충성된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게으름이 들어오면, 신자의 지성에서 건강하고 바람직한 정신적 작용들이 점차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게으르게 사는 사람들 중에서는 투철한 사상을 지닌 사람을 만나 보기 힘듭니다... 뚜렸하고 건강한 사상을 지닌 사람들은 어김없이 부지런한 사람들입니다. 게으른 사람들은 분명하게 정리된 정신 세계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타고난 입담으로 개똥철학을 널리 퍼뜨릴 수 있는지는 몰라도, 많은 백성들이 믿고 따라갈 수 있는 건강한 사상을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게으름은 악입니다.

게으른 사람에게는 기본적으로 자기 속에 있는 무엇을 쏟아 내거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체력을 소진하거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물질을 헌신하거나 해서라도 뭔가를 이루어야 하겠다는 목표가 없습니다... 목표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불태워서 매진하는 실제적 삶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때 비로소 목표가 되는 것이지, 그것을 위한 실제적 삶은 싫고 단지 그 자체만 원할 뿐이라면 그것은 한낱 희망 사항에 불과합니다...목표는 구체적인 실천 계획이 서 있고, 노력하면 성취가 가능한 단계에 있어, 꿈꾸는 이로 하여금 그것을 생각 하면서 자신의 삶을 그 목표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게 하는 것입니다. 망상이나 희망 사항을 가지고 사는 데는 비용이 안 들지만, 구체적 목표를 가지고 사는 데에는 반드시 비용이 듭니다.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꼭 희생하여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환경이 좋게 변할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환경은 영원히 우리편이 아닙니다. 오히려 환경은 우리가 이 땅에서 극복하고 싸우면서 이겨야 할 상대입니다. 잘 점검해 보십시오. 우리의 인생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육체의 게으름입니다.

게으름, (김남준 2003,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