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7.2011
God Isn't Fair!
B: 맞아. 정말 불공평해.
그렇게 세상에 아픈 사람이 많은데도 네가 건강한 것은 불공평해.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80%가 최저 생활비 미만으로 살아가는데도 네가 적지않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불공평해.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는 사람들이 세상에 95% 이상인데 그 나머지 5%에 네가 속해 있다는 것은 정말 불공평해.
이 세상에는 대학근처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 99%인데 네가 대학원까지 공부할 수 있는 행운을 가졌다는 것은 불공평해.
능력있고 정직하며 성실한 수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고도 그 정당한 댓가를 얻지 못하고 묵묵히 이웃과 함게 더불어 살아가려 애쓰는데, 너처럼 이기적이고 자기 배 밖에 채울 줄 모르면서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떠벌이는데 하나님이 너를 벌주시지 않는 다는 건 정말 불공평해.
아니 너 같은 인간멸종을 사랑하신 나머지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희생시키셨다니! 이건 정말 말도 안되는 불공평이야. 하나님은 정말이지 완전 불공평해! 그렇지 않니?
1.08.2011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내 마음에 가득찬 죄의 비열함과 부패의 역겨움
입을 여는 것 조차 두려운 절망
그러나 주님은 찬양을 주셨고, 내 마음을 위로해 주신다.
나의 죄악에 고통하시는 하늘 아빠의 가슴아픔
죄악된 나와 일그러진 세상을 회복하시려는 창조주의 열정
그 말씀하신 바를 결단코 이루시는 전능자의 결심
내 마음은 녹아내렸으며 새로운 책임감과 삶에 대한 의욕이 솟아난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나를 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니
단순한 기쁨이나 만족보다 더 깊은 차원의 갈망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카도쉬!
보소서 주님 나의 마음을 선한 것 하나 없습니다
사랑으로 안으시고 날 새롭게 하소서
그러나 내 모든 것 주께 드립니다
사랑으로 안으시고 날 새롭게 하소서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당신의 마음으로 용서하게 하소서
주의 성령 내게 채우사 주의 길 가게 하소서 주님 당신 마음 주소서
주의 성령 내게 채우사 주의 길 가게 하소서 주님 당신 마음 주소서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님 마음 내게주소서 (x2)
12.14.2010
십자가의 깊이와 폭력
진정으로 사랑하고 섬겼던 사람에게 배신과 경멸과 모욕을 당해 본 일이 없는 사람이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자기 스스로가 하늘 아버지의 형용할 수 없는 은혜와 사랑을 모욕하고 경멸했다는 사실을 깨달으려면, 사랑하는 이로부터 당한 배신때문에 분노와 복수심으로 온 밤을 하얗게 지새는 고통을 경험해야 한다는 점에서 은혜는 고통을 댓가로 지불한 깨달음이라는 말이 성립한다.
복수와 응징의 폭력 액션영화를 즐기는 사이, 우리는 이 히브리서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점점 더 상실해 간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보면, 오히려 인간의 사랑이 가진 한계와 대조된 십자가 사랑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죄와 맞서서 싸우지만, 아직 피를 흘리기까지 대항한 일은 없습니다..." 살이 찣기고 피를 흘리기까지 죄와 맞서 싸우는 일은, 아이러니겠지만 폭력을 통해서는 절대로 배울 수 없다.
bk
5.15.2010
하나님의 사랑
내가 그분을 상대하지 않아도, 무시해도, 퇴짜를 놓아도, 멸시해도, 불순종해도 그분은 변하지 않으신다.
나의 악이 그분의 사랑을 줄어들게 할 수 없다.
나의 선이 그분의 사랑을 더 커지게 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매하다고 잃는 것도 아니요
믿음으로 얻어내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한다고 덜 사랑하시고
성공한다고 더 사랑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는 사랑이다.
맥스 루케도, 예수님처럼, 95
관계와 용서
5.12.2010
영적 유기
때로 신앙의 깊이를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신앙을 상실하는 것, 신앙의 붕괴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상실과 붕괴는 신앙의 크기 혹은 깊이를 경험하게 합니다. 자신의 신앙이 참으로 하찮고 보잘것없음을 체험할 때, 바로 그때 당신은 집요하고도 완강한 그리스도의 결심, 나의 신앙이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이야말로 당신의 영혼과 육체, 온몸과 온 마음을 움츠러들게 하며 소름끼치게 하는, 그럼에도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경험입니다."
유호준, 인간의 죄에 고뇌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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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화란에서 일어났던 제 2의 개혁운동에 큰 역할을 감당했던 기스베르투스 후치우스Gisbertus Voetius(1589-1676)는 이러한 영적 유기의 상태를 "신앙인이 중심으로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감정을 갖지 못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내적 십자가 또는 영적 슬픔과 시련"이라고 정의했다 (Spiritual Desertion 1659, 30). 후치우스는 놀랍게도 (그가 야코보스 알미니우스의 제자라는 점에서 본다면 참 경악스러울 정도이지만, 그가 깔뱅의 후예라는 점에서는 너무도 당연하게) 신자들의 영적 유기의 일차적 원인을 하나님 자신에게서 찾는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과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시지 않는다면 인간편에서는 사실 제 아무리 노력을 기울인다 할 지라도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신앙을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영적 유기의 좀더 직접적이고 주요한 실제 원인은 믿음에 의한 분명한 확신의 결여이다. 즉 영적 유기의 문제는 믿음이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영적 침체와 유기를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단순히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라고 조언하는 것은 마치 먹을 빵이 없어 배고파하는 사람들에게 빵을 먹고 배부르라고 권하는 것과 같다.
어떻게 영적 침체와 유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영적인 붕괴에서 어떻게 탈출 하여 다시금 굳건한 신앙의 반석 위에 설 수 있을 것인가? 신앙의 확신결여로 인한 영적 침체를 경험하는 당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그러나 끊임없는 사랑과 은혜로 신앙을 주시는 분도, 신앙의 침체를 허락하시는 분도, 그리고 신앙을 다시 회복하시는 이도 그리스도이시다. 인간 편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처절하게 경험하는 것은 가혹하리 만큼 고통스러운 경험이지만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집요한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영적 침체 역시 신앙의 더 깊은 지경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 다만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믿음의 공동체 안에 머물면서 버티라"는 것이 가장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 신앙은 개인사가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경험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바로 이 때 절실하고 위력적으로 작용한다. 다윗은 "부르짖어도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찬송"중에 거하시며, 신앙공동체의 모임에서 선포와 증거와 찬양과 부르짖음을 통해 수치를 면하고 "찬송"을 회복할 수 있음을 노래하였다 (시22).
bk
10.10.2009
자기 중심성에 교정을 요구하는 하나님 나라 (2/6)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염원하는 두 번 째 청원은 예수의 가르침의 요체인 산상수훈과 주기도문에서도 그 고갱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예수가 염원한 "당신의 나라(hei basileia sou)가 현실화 됨"이 내포하는 존재적 긴장(tensity)은 우리의 기도속에서 거의 무시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기 예수 공동체에게 있어 "나라"의 문제는 추상적 정치토론이나 스트레스를 푸는 잡담거리의 단골메뉴가 아니었다. 로마 제국의 식민지 통치나 이에 저항하는 유대민족주의자들에게 있어 "예수 공동체"는 공히 '공공의 적'이었기에 예수공동체에게 있어 "나라"의 문제는 하루의 안녕한 삶과 직결된 긴급하며 절박한 문제였다.
로마적 힘의 추구와 유다적 메시아주의 공통적 뿌리가 스스로 주인되려 하는 "자기 중심성"이 라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청원은 이러한 "자기 중심성"의 뿌리를 찍어내는 강력한 도끼이다. 자기 스스로의 판단, 경험, 자원, 지혜, 힘, 인맥을 의존하여 자기의 왕국을 건설하고 안녕을 보장받으며 번영을 추구하려는 자기 중심성은 예수 공동체 안에서도 그 맹위를 떨쳐 부활한 예수에게 조차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를 질문하게 하였다. 그러나 스스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유혹의 정체를 직시하고 거부하며 하나님을 힘입어 그분의 언명대로 살아가기를 선포한 예수의 사람들은 지금 이 세상에 만연한 개인적, 사회적, 민족적, 국가세계적 문제의 근원이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려하는 죄성"임을 비분강개하고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신 둘 째 아담의 못다한 절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를 영혼에 담아 "나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가 내 삶의 구석 구석에 임하시기를 간절히 염원해야 한다. 이 염원을 예수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요약한다.
결국 하나님 나라의 현실화를 위한 청원은 실천적으로 자기 부정을 위한 기도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하지 않는 자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요원하다면, 자신의 자원과 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적대적이고 위협적이다. 스스로 절망하여 자기를 부인할 수 밖에 없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열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에 대한 절망은 하나님 신앙의 자궁이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절망은 자연스럽게 되지 않는다. 인간의 죄성은 스스로 살기 위해 자신과 이웃의 생명을 해할 만큼 뿌리가 깊고 강력하다. 따라서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음 조차 스스로 할 수 없다는 실존앞에 자아가 해체되는 것 (이러한 자기 부정을 자연인중 누가 감히 원한단 말인가?)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나라이 임하옵시며"는 자기 부정을 위해 초월적 은혜를 요청하는 기도로 발전한다.
이 기도를 바탕으로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통치속에 자기 한계를 초월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음습한 지하동굴에 숨어서도 로마의 제국주의와 배타적 유대주의를 뛰어넘어 노예와 주인이, 귀족과 하층민이, 부자와 거지가, 고매한 학자와 불학무식한 자가, 여자와 남자가, 유대인과 헬라인이, 도덕적으로 불량한 자들과 인격적으로 훈련된 자들이, 언어와 인종과 빈부와 학식과 정치적 이념과 삶의 방식과 문화를 뛰어 넘는 우주적 "하나님 나라" 예수 공동체를 경험할 수 있었다.
bk
8.31.2009
하나님의 날에
8.10.2009
위대한 그리스도인
거의 30년에 걸쳐 기독교 사역을 하는 동안 나 역시 그랬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많이 만나 봤지만 위대한 그리스도인은 극소수였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자신의 금쪽같은 시간, 돈, 욕구를 희생하는 그리스도인,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얻기 위해서 어떤 것이든 포기하려는 그리스도인은 별로 없었다.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자신의 직업, 명성, 신분, 우정, 재산, 심지어 생명까지 바치려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향한 열정 어린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앤 그레이엄 로츠, 위기속에 만난 주님
수 많은 그리스도인이 같은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들에게 잔해를 받았던 적이 있었다. 단지 믿음이 다르다는 이유로, 신앙의 모습이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답게 살 권리를 박탈 당해야 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기 원했고 바로 그 점이 문제였다. 그들은 예수를 너무도 사랑했다. 자기 생명보다 예수가 더 귀했다.
위대한 그리스도인은 인간적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로츠"를 잘 못 이해할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잔인하리만치 길고 고된 훈련과 연습"은 그만큼 강한 동기와 열정이 없다면 애시당초 가능하지 않다. 더구나 "자신의 욕구를 포기하고" "생명"까지 희생하는 삶의 모습은 절대로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 오히려 단 한가지 만이 그 위대함을 가능하게 한다. 그건 사랑이다.
따라서, 위대한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사랑"으로 만들어 진다. 예수의 무한한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에 빠져 든 사람은 거부할 수 없는 예수의 사랑으로 자신을 초월 하게 된다. 그래서 예수 때문에 저주를 달게 받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예수의 위대함, 예수의 능력, 예수의 아름다움을 맛본 사람들은 그래서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자기를 초월하여 위대한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 즉 예수의 사람으로 불릴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다.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 물으시는 주님 앞에서, 사랑할 능력조차 없고 사랑받을 가치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신실하게 사랑하시는 주님 발앞에 겸손한 무릎을 조아리는 사람이 될 일이다. 그리고 뜨거운 눈물과 감사와 감격으로 주어진 자리에서 그분을 인정하며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될 일이다. 위대한 그리스도인은 "이뤄 내는"것이 아니라 "은혜로 수용하며 반응하는"것이라는 점에서 랜드리와 로츠는 오해했다.
bk
7.20.2009
인테그리티
5.10.2009
마음이 가난한 자
할아버지께서 환한 얼굴로 대답해 주셨다.
"내가 스물 두살 부터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여기까지 살았어요. 그동안 얼마나 불충성, 불순종을 많이 했는지...진짜 죄인중의 괴수인데 하나님의 자비가 한량이 없어서 붙들어 주시니까 날마다 감사와 기쁨으로 승리합니다."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예수가 누구인지 아직도 잘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절대 자비가 필요하다.
4.13.2009
샬롬
이사야 57:20-21
하나님을 떠나있는 증거는 너무나 분명하여 부인할 수 없다. 양심에게 물으면 된다. "평안이 있는가?" 안식과 쉼, 마음의 여유와 평강, 넉넉함과 푸근함. 웃음과 감사가 넘쳐 나는가? 행복한가?
빛이 없는 곳에 어두움이 지배하듯,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희소할 때 샬롬은 자취를 감춘다. 지금 여기에 하나님의 샬롬이 있는가?
3.31.2009
용서
디트리히 본회퍼, 신도들의 공동생활, 152
1.24.2009
주 없이 살 수 없네
주 없이 살 수 없네 죄인의 구주여
그 귀한 보배 피로 날 구속하소서
구주의 사랑으로 흘리신 보혈이
내 소망 나의 위로 내 영광 됩니다.
주 없이 살 수 없네 나 혼자 못서리
힘없고 부족하며 지혜도 없도다
내 주는 나의 생명 또 나의 힘이라
주님을 의지하여 지혜를 얻으리
주 없이 살 수 없네 내 주는 아신다
내 영의 깊은 간구 마음의 소원을
주 밖에 나의 마음 뉘 알아주리요
내 마음 위로하사 평온케 하시네
주 없이 살 수 없네 세월이 흐르고
이 깊은 고독 속에 내 생명끝나도
사나운 풍랑 일 때 날 지켜 주시니
내 곁에 계신 주님 늘 힘이 됩니다.
아멘 (새찬292/통415)
I could not do without Thee
O Savior of the lost,
Whose precious blood redeemed me
At such tremendous cost.
Thy righteousness, thy pardon
Thy precious blood, must be
My only hope and comfort,
My glory and my plea.
I could not do without Thee,
I cannot stand alone,
I have no strength or goodness,
No wisdom of my own;
But Thou, beloved Savior,
Art all in all to me,
And weakness will be power
If leaning hard on Thee.
I could not do without Thee,
For, oh, the way is long,
And I am often weary,
And sigh replaces song:
How could I do without Thee?
I do not know the way;
Thou knowest, and Thou leadest,
And wilt not let me stray.
I could not do without Thee,
O Jesus, Savior dear;
E’en when my eyes are holden,
I know that Thou art near.
How dreary and how lonely
This changeful life would be,
Without the sweet communion,
The secret rest with Thee!
I could not do without Thee;
No other friend can read
The spirit’s strange deep longings,
Interpreting its need;
No human heart could enter
Each dim recess of mine,
And soothe, and hush, and calm it,
O blessèd Lord, but Thine.
I could not do without Thee,
For years are fleeting fast,
And soon in solemn oneness
The river must be passed;
But Thou wilt never leave me,
And though the waves roll high,
I know Thou wilt be near me,
And whisper, “It is I.”
Frances Ridley Havergal (1836-1879)
12.31.2008
개혁주의
1. 개혁주의자들은 "교리주의자들 the doctrinalist"이다.
교리주의자들은 교리를 영원 불변한 것이라고 고집하여 구체적인 조건과 변화된 상황, 새로운 인식과 실천적 경험을 고려하지 않고 고정된 개념과 문자적 의미에 매여 무비판적이 되는 교조주의dogmatism와는 다르다. 교리주의자들은 성경에 의해 가르쳐지고 신조들에 의해 정리된 기독교의 교리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가 삶에 궁극적인 변화와 영향력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혁주의자들은 (1) 성경을 영감되고inspired, 절대적이며infallable, 권위있는authoritative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2) 개혁주의자들은 창조-타락-구속으로 설명되는 구속사적 성경관을 믿는다. (3) 개혁주의자들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를 철저히 배재하는 하나님의 전적 은혜를 믿는다. (4) 개혁주의자들은 하나님과 그 백성들이 맺으시는 특별한 관계로서의 언약을 믿는다. (5) 개혁주의자들은 죄를 억제하셔서 하나님께서 인류를 보존하시고 구속사역을 완성하기 위해 일반은총을 사용하신다고 믿는다.
2. 개혁주의자들은 "경건주의자들the pietiest"이다.
교리주의자들에 대한 강조는 자연스럽게 삶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함이 삶 속에 어떻게 구현되는가? 어떻게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가?
경건주의자들로서 개혁주의자들은 경건에 있어 (1)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2) 성화로 이끄시는 성령의 역사와 사역을 강조한다. (3) 성화의 과정을 은혜의 조건이 아닌 은혜의 결과로 보며 감사를 강조한다. (4)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강조한다. (5) 말씀과 성례가 가지는 독특성과 중요성을 강조한다.
3. 개혁주의자들은 "변혁주의자들the transfomationalist"이다.
개혁주의자들은 문화와 세계관, 그리고 문화를 변혁하시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진다. 어떻게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것인가?
변혁주의자들로서 개혁주의자들은 (1) 예수 그리스도가 우주의 주되심을 강조한다. (2) 이미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강조한다. (3) 말과 행위의 일치를 강조한다. (4)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창달하는 문화적 명령을 강조한다. (5) 가정과 학교와 교회의 세가지 영역에서의 기독교 교육을 강조한다. (6) 각각의 부르심에 따라 일하는 직업적 소명을 강조한다.
12.24.2008
의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까?
답: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으로만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비록 내 양심이 나를 고소하기를
하나님의 명령에 저항하여 지독히 죄를 지음으로
결코 그 명령들을 지키지 않으며
여전히 모든 죄악으로 향하는 죄성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무가치한 나를 순전한 은혜로써
마치 내가 한번도 죄를 지은 일이 없는 것처럼
마치 내가 완전히 순종한 것 처럼
그리스도의 나를 위한 순종으로
그분의 완전한 보상과 의로움과, 거룩함을
내게 부어주시고 나의 것으로 여겨 주셨습니다.
오직 내가 해야 할 일은
믿는 마음으로 그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The Heidelberg Catechism Q/A 6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