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보통 새로운 해결책보다 익숙한 갈등을 더 선호한다."
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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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2011
1.04.2011
사람에 대한 신뢰와 발달주의의 한계
They talk about the people, but they do not trust them; and trusting the people is the indispensable precondition for revolutionary change. A real humanist can be identified more by his trust in the people, which engages him in their struggle, than by a thousand actions in their favor without that trust."
Paulo Freire, Pedagogy of the Oppressed, 30th Anniversary Edition, p. 60
의식화(Conscientization) 교육의 창시자인 프레리는 주입적 암기와 반복rote memory을 통해 이루어 지는 은행예금식 학습(Banking education)은 학습자들의 주체적이며 비판적 사고를 근본적으로 제한하고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사고와 표현을 구속함으로서 개인의 인격과 독특성을 파괴하고 기득권이 만들어 놓은 사고체계에 순응하는 종속적이며 타율적인 인간을 양성한다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또한 학습의 실천적이며 공동체적인 특성을 현격히 제한하여 다른 사람들과의 함께 하는 대화와 활동를 거부하여 배움을 고립된 개인의 수행으로서의 "공부"로 축소시켰음을 지적하였다. 그에게 있어서의 교육은 학습자 자신이 문제를 제기하고 (Problem-posing education) 비평적 의식을 스스로 일깨우도록 도움으로 환경과 상황의 압제로 부터 스스로를 해방하고 변혁과 갱신의 주체자로 개발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그의 "빨간책"은 독재자들의 금서목록 1호였으며 동시에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사회 운동가들의 사회과학 필독서 1위였다.
거지에게 많은 돈을 적선하기 보다, 왜 거지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가를 묻고 거지생활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비교할 수 없는 용기와 자기희생, 그리고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이타적 자기 희생의 사랑은 의식화 교육이나 주체화 교육으로 절대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을 남미의 사회적 상황과 공산체제의 붕괴는 여실히 가르쳐 준다.
일반적인 발달주의자들이 갖는 한계는 프레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가장 근본적으로는 인간됨의 이해, 더 구체적으로 인간의 죄성에 대한 이해가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순진하다. 인간은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라는 성서의 가르침은 인간의 궁극적인 개발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필요로 할 만큼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발달주의자들이 갖는 또 다른 한계는 목적과 수단의 혼동을 보인다는 것이다. 궁극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적 목적(또는 이차적 목적)이 궁극적 목적(일차적 목적)을 대치하게 되면 마치 외발자전거를 타는 것 같은 멈출 수 없는 순환논리에 빠져들게 된다. 타르타로스의 언덕에서 끝임없이 굴러 떨어지는 돌을 계속해서 올려대야 했던 시지프스처럼, 성취될 수 없기에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면 그것은 허무의 형벌에 해당하는 것이지 결코 진보와 발전일 수 없다. 사회 구조의 변혁과 갱신은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다. 왜냐햐면 인간의 유한성과 죄성으로 인해, 하나의 변혁과 갱신은 반드시 또 다른 변혁과 갱신을 긴급하게 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치와 존엄, 그리고 인간됨의 최고의 발현으로서의 개발은 "인간됨"이라는 유한하고 상대적 가치에 묶여 있을 때 가장 크게 왜곡되고 제한된다. 모든 발달주의자들이 부르짖는 "인간 개발"은 누구에 의한, 어떤 목적을 가진, 어떤 방식의 개발이냐에 대한 질문에 일관된 원칙과 기준을 제시하기 어렵다. 오히려 인간 존재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궁극적인 지향점을 인간에서 옮겨 무한한 초월적 존재에 위치 시킬 때에라야 가변적이고 순환적인 상대적 가치가 영원하고 절대적 가치로 승화 될 수 있으며 비로서 구조와 방향을 갖춘 진정한 의미로서의 개발이 현실화될 수 있다. 따라서 인간 개발에 있어서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됨의 최고의 발현이 아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어야 하며 이 두가지는 분리되어있지 않고 상호적으로 맞물려 있다.
고독과 허무, 존재적 절망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은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식과 한계때문에 인간의 내적 가능성에서도 찾을 수 없고, 사회 구조적인 변혁과 개혁으로 실현될 수도 없다. 오직 인간의 실존을 뚫고 침입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역동적 역사와 이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실천적 신앙을 통해 부분적으로 경험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모든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창조주의 구원의 완성을 통해 실현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프레리가 주장한 인간 신뢰의 필요성은 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교회 안에서는 인도주의자들 만큼의 사람사랑이 이루어 지기는 커녕, 권위주의적이고 폭압적인 맹신과 맹종의 교육이 다반사로 일어난다는 점에서 그의 해방적 교육은 신앙교육을 평가하고 교정하는데 큰 공헌을 한다고 할 수 있겠다.
bk
Paulo Freire, Pedagogy of the Oppressed, 30th Anniversary Edition, p. 60
의식화(Conscientization) 교육의 창시자인 프레리는 주입적 암기와 반복rote memory을 통해 이루어 지는 은행예금식 학습(Banking education)은 학습자들의 주체적이며 비판적 사고를 근본적으로 제한하고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사고와 표현을 구속함으로서 개인의 인격과 독특성을 파괴하고 기득권이 만들어 놓은 사고체계에 순응하는 종속적이며 타율적인 인간을 양성한다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또한 학습의 실천적이며 공동체적인 특성을 현격히 제한하여 다른 사람들과의 함께 하는 대화와 활동를 거부하여 배움을 고립된 개인의 수행으로서의 "공부"로 축소시켰음을 지적하였다. 그에게 있어서의 교육은 학습자 자신이 문제를 제기하고 (Problem-posing education) 비평적 의식을 스스로 일깨우도록 도움으로 환경과 상황의 압제로 부터 스스로를 해방하고 변혁과 갱신의 주체자로 개발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그의 "빨간책"은 독재자들의 금서목록 1호였으며 동시에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사회 운동가들의 사회과학 필독서 1위였다.
거지에게 많은 돈을 적선하기 보다, 왜 거지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가를 묻고 거지생활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비교할 수 없는 용기와 자기희생, 그리고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이타적 자기 희생의 사랑은 의식화 교육이나 주체화 교육으로 절대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을 남미의 사회적 상황과 공산체제의 붕괴는 여실히 가르쳐 준다.
일반적인 발달주의자들이 갖는 한계는 프레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가장 근본적으로는 인간됨의 이해, 더 구체적으로 인간의 죄성에 대한 이해가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순진하다. 인간은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라는 성서의 가르침은 인간의 궁극적인 개발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필요로 할 만큼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발달주의자들이 갖는 또 다른 한계는 목적과 수단의 혼동을 보인다는 것이다. 궁극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적 목적(또는 이차적 목적)이 궁극적 목적(일차적 목적)을 대치하게 되면 마치 외발자전거를 타는 것 같은 멈출 수 없는 순환논리에 빠져들게 된다. 타르타로스의 언덕에서 끝임없이 굴러 떨어지는 돌을 계속해서 올려대야 했던 시지프스처럼, 성취될 수 없기에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면 그것은 허무의 형벌에 해당하는 것이지 결코 진보와 발전일 수 없다. 사회 구조의 변혁과 갱신은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다. 왜냐햐면 인간의 유한성과 죄성으로 인해, 하나의 변혁과 갱신은 반드시 또 다른 변혁과 갱신을 긴급하게 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치와 존엄, 그리고 인간됨의 최고의 발현으로서의 개발은 "인간됨"이라는 유한하고 상대적 가치에 묶여 있을 때 가장 크게 왜곡되고 제한된다. 모든 발달주의자들이 부르짖는 "인간 개발"은 누구에 의한, 어떤 목적을 가진, 어떤 방식의 개발이냐에 대한 질문에 일관된 원칙과 기준을 제시하기 어렵다. 오히려 인간 존재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궁극적인 지향점을 인간에서 옮겨 무한한 초월적 존재에 위치 시킬 때에라야 가변적이고 순환적인 상대적 가치가 영원하고 절대적 가치로 승화 될 수 있으며 비로서 구조와 방향을 갖춘 진정한 의미로서의 개발이 현실화될 수 있다. 따라서 인간 개발에 있어서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됨의 최고의 발현이 아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어야 하며 이 두가지는 분리되어있지 않고 상호적으로 맞물려 있다.
고독과 허무, 존재적 절망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은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식과 한계때문에 인간의 내적 가능성에서도 찾을 수 없고, 사회 구조적인 변혁과 개혁으로 실현될 수도 없다. 오직 인간의 실존을 뚫고 침입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역동적 역사와 이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실천적 신앙을 통해 부분적으로 경험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모든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창조주의 구원의 완성을 통해 실현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프레리가 주장한 인간 신뢰의 필요성은 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교회 안에서는 인도주의자들 만큼의 사람사랑이 이루어 지기는 커녕, 권위주의적이고 폭압적인 맹신과 맹종의 교육이 다반사로 일어난다는 점에서 그의 해방적 교육은 신앙교육을 평가하고 교정하는데 큰 공헌을 한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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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2009
우주적 그리스도
장공 김재준(金在俊, 1901~1987)"크리스챤이 역사에 대하는 태도란 언제든지 구속사적 입장과 성격 안에서 이 현실의 역사를 비판해야 하며, 동시에 그 역사로 하여금 구원의 목표를 지향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 이 비판과 지향에서 크리스찬은 십자가를 각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기독교 사상 제2권 3호-
장공의 사상은 변혁적이며 문화적이고 창조적이다. 무엇보다 역사참여의식이 강한 선지자적 '얼'을 담고 있다. 바르트와 니버의 신정통주의를 수용하는데 있어 민족적 주체성이라는 자기의식을 잃지 않는다. 장공은 주체적 한국 신학을 정립하고 그 정신을 역사속에 구현하려 몸부림쳤던 선지자였다. 그에게 있어 복음의 핵심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였기 때문이다. 초월적 하나님이 강조된 신정통주의를 수용하며 한국의 근대상황에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을 강조함으로 주체적 신학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의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강조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초월성보다 내재적 그리스도를 더욱 강조하는 진보신학의 토대가 되면서 토착화 신학, 민중신학등의 원류를 제공한다.
장공은 시대의 사상적 조류를 꿰뚤어 보는 넓은 안목을 지닌 학자였다. 자신을 공격하는 수구 보수세력의 신학적 정체성과 그 뚜렸한 한계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의 장로교가 19세기 말부터 사멸의 길을 걷는 구프린스턴 중심의 근본주의에 과도히 영향을 받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성경 연구에 과학적 방법을 수용하면서도 사도적 신앙을 타협하지 않는 자율적 신학과 역사참여적 신앙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주체적으로 신학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세상을 변혁하는 창조적인 소수를 양성하고자 애썼다. 강원용, 문익환, 문동환, 안병무, 서남동 등은 그가 배출한 인물들이었다.
그의 선교의식 역시 선지자적이다. 교회의 선교란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전도로 축소될 수 없다. 역사속에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세상의 역사를 변혁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하나님의 뜻인 자유와 사랑과 정의의 평화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도록 하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다.
장공의 신학과 사상은 주체적이면서도 동시에 우주적이었다. 그에게 우주는 "하느님의 집," "아버지의 집"이었고 삶의 목표는 "범세계적, 더 넓게는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실현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카인의 문명과 아벨의 구속사가 하나로 통합이 되는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그것을 실현하는 주체가 교회이며,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선교였다.
함석헌, 김교신, 이용도와 함께 1901년 생인 그는 구한말 "역사의 어둠이 짙었을 때에" 태어나 질곡의 한국 근대사를 걸었다. 그러나 암울하고 폭압적인 역사앞에 좌절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계명성 동쪽에 밝아 이 나라의 여명"이 왔음을 선포했고, 은둔과 자적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인류의 횃불이 될 것"을 노래했다 (새찬582). 20세기를 살며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역사를 변혁하려 했던 그의 정신과 자취는 강렬한 빛이 되어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에게도 여전히 밝고 따습게 비췬다.
bk
12.31.2008
개혁주의
1. 개혁주의자들은 "교리주의자들 the doctrinalist"이다.
교리주의자들은 교리를 영원 불변한 것이라고 고집하여 구체적인 조건과 변화된 상황, 새로운 인식과 실천적 경험을 고려하지 않고 고정된 개념과 문자적 의미에 매여 무비판적이 되는 교조주의dogmatism와는 다르다. 교리주의자들은 성경에 의해 가르쳐지고 신조들에 의해 정리된 기독교의 교리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가 삶에 궁극적인 변화와 영향력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혁주의자들은 (1) 성경을 영감되고inspired, 절대적이며infallable, 권위있는authoritative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2) 개혁주의자들은 창조-타락-구속으로 설명되는 구속사적 성경관을 믿는다. (3) 개혁주의자들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를 철저히 배재하는 하나님의 전적 은혜를 믿는다. (4) 개혁주의자들은 하나님과 그 백성들이 맺으시는 특별한 관계로서의 언약을 믿는다. (5) 개혁주의자들은 죄를 억제하셔서 하나님께서 인류를 보존하시고 구속사역을 완성하기 위해 일반은총을 사용하신다고 믿는다.
2. 개혁주의자들은 "경건주의자들the pietiest"이다.
교리주의자들에 대한 강조는 자연스럽게 삶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함이 삶 속에 어떻게 구현되는가? 어떻게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가?
경건주의자들로서 개혁주의자들은 경건에 있어 (1)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2) 성화로 이끄시는 성령의 역사와 사역을 강조한다. (3) 성화의 과정을 은혜의 조건이 아닌 은혜의 결과로 보며 감사를 강조한다. (4)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강조한다. (5) 말씀과 성례가 가지는 독특성과 중요성을 강조한다.
3. 개혁주의자들은 "변혁주의자들the transfomationalist"이다.
개혁주의자들은 문화와 세계관, 그리고 문화를 변혁하시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진다. 어떻게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것인가?
변혁주의자들로서 개혁주의자들은 (1) 예수 그리스도가 우주의 주되심을 강조한다. (2) 이미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강조한다. (3) 말과 행위의 일치를 강조한다. (4)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창달하는 문화적 명령을 강조한다. (5) 가정과 학교와 교회의 세가지 영역에서의 기독교 교육을 강조한다. (6) 각각의 부르심에 따라 일하는 직업적 소명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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