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영신학의 메카인 수정교회가 파산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연말이면 다시 들춰 보는 책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스티븐 코비의 책이다.
삶의 의미와 보람을 느끼며 영혼 깊은 만족을 느끼는 대신, 쫓기듯 열심히 살지만 늘 공허와 허무를 느끼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삶의 습관이 있단다. 말하자면 허무한 삶에도 일종의 원칙이 지배한다는 것이다.
1. 늘 상황에 끌려 다니면서 자신을 비하하고 상황을 탓하며 이웃을 원망한다.
2. 뚜렷한 목표 없이 그저 해야 하는 일을 해치운다.
3. 중요한 일보다 급한 일을 먼저 한다.
4. 누가 이기냐 지냐, 비교와 경쟁의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5. 상대를 깊이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내 주장을 관철시키기 급급하다.
6. 스스로 잘하고 있다는 생각에 상대를 신뢰하여 상호 협력할 의지와 능력이 없다.
7. 변화를 두려워 하며 자기 개발에 소극적이다.
탁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지는 7가지 습관들을 뒤집어 놓은 것이긴 하지만 생각할 수록 무릎을 치게 만든다. 상황적인 제약을 극복하고 자기 한계를 뛰어 넘으려면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부분에 시선을 고정하고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 바로 내 자신의 마음가짐과 태도만이 내가 의지적으로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근원적인 영역이다 (잠 4:23).
그러나 바로 인간의 마음이 죄로 오염되어 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것이 모든 자기 개발서들이 가지고 있는 전제의 오류이다. 즉 "내가 내 마음을 원하는 대로 컨트롤 할 수 있다"는 가정이다. 그러나 진정한 자기 개발은 영혼 깊이 물들어 있는 죄와 함께 자아가 죽어버리고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창조의 영에 힘입어 다시 살아나는 끊임없는 회개와 회심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 진다. 이러한 회개와 회심은 "긍정의 힘"과 같은 자기능력에 대한 신뢰를 중단하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선취하시고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시혜하시는 긍휼과 자비에 온 존재를 의탁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 성서의 증언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 진정한 자기 개발은 삼위 하나님을 신뢰하고 신앙하는 믿음을 통한 영적인 재탄생에서 출발한다.
믿음을 통한 회심으로 본격적이고 근원적인 수준에서의 자기 개발이 시작되었더라도 인격과 성품, 그리고 능력의 차원에서 "인간개발"에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일반은총의 법칙들이 여전히 적용된다. 인간 존재의 모든 수준에서 발현되는 끊임없는 창조적 발전은 타락 이전에 이미 인간의 본성으로 심겨진 하나님의 형상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코비가 기여하는 바는 바로 이 부분이다.
일반은총의 인간개발과 성령의 변혁하시는 역동적 활동이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에 대한 관찰이 그래서 중요하다. 나는 로더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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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6.2011
1.08.2011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오늘 새벽 답답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갔다.
내 마음에 가득찬 죄의 비열함과 부패의 역겨움
입을 여는 것 조차 두려운 절망
그러나 주님은 찬양을 주셨고, 내 마음을 위로해 주신다.
나의 죄악에 고통하시는 하늘 아빠의 가슴아픔
죄악된 나와 일그러진 세상을 회복하시려는 창조주의 열정
그 말씀하신 바를 결단코 이루시는 전능자의 결심
내 마음은 녹아내렸으며 새로운 책임감과 삶에 대한 의욕이 솟아난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나를 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니
단순한 기쁨이나 만족보다 더 깊은 차원의 갈망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카도쉬!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보소서 주님 나의 마음을 선한 것 하나 없습니다 그러나 내 모든 것 주께 드립니다
사랑으로 안으시고 날 새롭게 하소서 보소서 주님 나의 마음을 선한 것 하나 없습니다
그러나 내 모든 것 주께 드립니다
사랑으로 안으시고 날 새롭게 하소서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내 아버지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내게 사랑을 가르치소서
당신의 마음으로 용서하게 하소서
주의 성령 내게 채우사 주의 길 가게 하소서 주님 당신 마음 주소서
주의 성령 내게 채우사 주의 길 가게 하소서 주님 당신 마음 주소서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내 아버지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님 마음 내게주소서 (x2)
내 마음에 가득찬 죄의 비열함과 부패의 역겨움
입을 여는 것 조차 두려운 절망
그러나 주님은 찬양을 주셨고, 내 마음을 위로해 주신다.
나의 죄악에 고통하시는 하늘 아빠의 가슴아픔
죄악된 나와 일그러진 세상을 회복하시려는 창조주의 열정
그 말씀하신 바를 결단코 이루시는 전능자의 결심
내 마음은 녹아내렸으며 새로운 책임감과 삶에 대한 의욕이 솟아난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나를 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니
단순한 기쁨이나 만족보다 더 깊은 차원의 갈망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카도쉬!
보소서 주님 나의 마음을 선한 것 하나 없습니다
사랑으로 안으시고 날 새롭게 하소서
그러나 내 모든 것 주께 드립니다
사랑으로 안으시고 날 새롭게 하소서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당신의 마음으로 용서하게 하소서
주의 성령 내게 채우사 주의 길 가게 하소서 주님 당신 마음 주소서
주의 성령 내게 채우사 주의 길 가게 하소서 주님 당신 마음 주소서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님 마음 내게주소서 (x2)
5.17.2010
한번도 가지 않은 길
새벽 미명에 기도하러 나섰다.
난데 없이 교회 뒤쪽으로 난 산을 따라 걸으며 기도하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혼자서 한번도 가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내 마음이 "가보자"와 "가지말자"로 나뉘어 분열하기 시작했다.
가지 말자는 쪽이 더 좋은 그리고 더 많은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가보자는 쪽은 시덥지 않은 한두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러나 결정적인 한가지 이유도 또한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소망이었다. 무엇인가 가치있는 것이 있으리라는, 어렵더라도 좋은 경험이 되리라는 소망과 기대 말이다. 소망이 두려움을 이기는 용기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나는 그 때 배웠다 .
아직도 검푸른 여명속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두려운 마음을 흥얼흥얼 찬양으로 잠재우며 걷다가 작은 모퉁이를 돌아가는데 갑자기 큰 개가 미친듯이 짖어대며 나를 향해 덤벼들었다. 너무 놀라 거의 중심을 잃고 나 자빠지려 하는 찬라에 내 몸을 덮칠 그녀석의 거친 앞발과 내 목을 향해 날아오는 날카로운 이빨을 상상했다. 그러나 나는 넘어지지도 물리지 않았다. 개와 나 사이에는 철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장이 터질 정도로 놀랬으나 현실적으로는 아무일도 생기지 않았다. "돌아갈까?"하는 마음이 놓치지 않고 고개를 바짝 들었으나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번연의 주인공 크리스천이 쇠줄에 묶인 사자의 포효에 주춤하며 전진하지 못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계속 짓어대는 개에게 예수님처럼 "잠잠하라"고 영어로 말해 주었다-shut up!
물이 말라버린 얕으막한 계곡에 지저분한 쓰레기들과 버려진 차들이 보였다. 높은 기둥에 마치 피가 흐른듯이 빨간색 페인트로 갱단원들이 한 것 처럼 여겨지는 지저분하고 기괴한 낙서들이 역겨운 냄새와 함께 기분을 상하게 하자 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결코 유쾌한 경험이 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소망이 위협을 당하자 다시 두려움이 업습한다. "돌아가자..."
그러나 여기까지 온 것이 아까웠고 아찍 끝나지 않았다는 새로운 소망거리를 찾아내었다.
한 30분을 더 기도하며 산을 오르자 온 몸에서는 땀이 흐르고 기도는 깊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산의 정상에 섰을 때,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아름다운 절경이 거짓말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인내하지 앟았으면, 두려움을 물리치지 않았으면, 소망을 포기했다면 결코 볼 수 없었던 장관이었다. 하나님의 음성이 마음에 가득 차 올랐다.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그리고 소망은 사랑으로 가득찬 성품을 만들어 낸다는 바울의 고백을 온 몸으로 경험할 수 있음을 감사하며 정상에서 내려 올 때 하나님은 또다른 선물을 준비하고 계셨다. 산을 오를 때 겪었던 장애물들의 실체가 찬란한 아침 햇빛 아래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위협적이었던 모든 것들이 별것 아닌 것이 되어있었다. 오를 때 의심되었던 하나님의 임재가 내려갈 때는 자부심과 성취감, 보람과 삶의 긍정으로 충만하였다. 시내산을 내려가는 모세의 기분이 그랬을까?
한번도 가지 않은 길은 두려운 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믿음과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길이 행복하고 의미있고 보람된 길이 된다는 사실 또한 틀림없다. 왜냐하면 바로 하나님 자신이 행복이며 의미이며 보람이시기 때문이다. 다만 그 길을 끝까지 마쳐본 사람만이 그 하나님을 증언할 수 있으며, 그 길을 걸어본 사람만이 성숙을 노래할 수 있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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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 없이 교회 뒤쪽으로 난 산을 따라 걸으며 기도하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혼자서 한번도 가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내 마음이 "가보자"와 "가지말자"로 나뉘어 분열하기 시작했다.
가지 말자는 쪽이 더 좋은 그리고 더 많은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가보자는 쪽은 시덥지 않은 한두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러나 결정적인 한가지 이유도 또한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소망이었다. 무엇인가 가치있는 것이 있으리라는, 어렵더라도 좋은 경험이 되리라는 소망과 기대 말이다. 소망이 두려움을 이기는 용기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나는 그 때 배웠다 .
아직도 검푸른 여명속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두려운 마음을 흥얼흥얼 찬양으로 잠재우며 걷다가 작은 모퉁이를 돌아가는데 갑자기 큰 개가 미친듯이 짖어대며 나를 향해 덤벼들었다. 너무 놀라 거의 중심을 잃고 나 자빠지려 하는 찬라에 내 몸을 덮칠 그녀석의 거친 앞발과 내 목을 향해 날아오는 날카로운 이빨을 상상했다. 그러나 나는 넘어지지도 물리지 않았다. 개와 나 사이에는 철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장이 터질 정도로 놀랬으나 현실적으로는 아무일도 생기지 않았다. "돌아갈까?"하는 마음이 놓치지 않고 고개를 바짝 들었으나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번연의 주인공 크리스천이 쇠줄에 묶인 사자의 포효에 주춤하며 전진하지 못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계속 짓어대는 개에게 예수님처럼 "잠잠하라"고 영어로 말해 주었다-shut up!
물이 말라버린 얕으막한 계곡에 지저분한 쓰레기들과 버려진 차들이 보였다. 높은 기둥에 마치 피가 흐른듯이 빨간색 페인트로 갱단원들이 한 것 처럼 여겨지는 지저분하고 기괴한 낙서들이 역겨운 냄새와 함께 기분을 상하게 하자 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결코 유쾌한 경험이 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소망이 위협을 당하자 다시 두려움이 업습한다. "돌아가자..."
그러나 여기까지 온 것이 아까웠고 아찍 끝나지 않았다는 새로운 소망거리를 찾아내었다.
한 30분을 더 기도하며 산을 오르자 온 몸에서는 땀이 흐르고 기도는 깊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산의 정상에 섰을 때,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아름다운 절경이 거짓말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인내하지 앟았으면, 두려움을 물리치지 않았으면, 소망을 포기했다면 결코 볼 수 없었던 장관이었다. 하나님의 음성이 마음에 가득 차 올랐다.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그리고 소망은 사랑으로 가득찬 성품을 만들어 낸다는 바울의 고백을 온 몸으로 경험할 수 있음을 감사하며 정상에서 내려 올 때 하나님은 또다른 선물을 준비하고 계셨다. 산을 오를 때 겪었던 장애물들의 실체가 찬란한 아침 햇빛 아래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위협적이었던 모든 것들이 별것 아닌 것이 되어있었다. 오를 때 의심되었던 하나님의 임재가 내려갈 때는 자부심과 성취감, 보람과 삶의 긍정으로 충만하였다. 시내산을 내려가는 모세의 기분이 그랬을까?
한번도 가지 않은 길은 두려운 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믿음과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길이 행복하고 의미있고 보람된 길이 된다는 사실 또한 틀림없다. 왜냐하면 바로 하나님 자신이 행복이며 의미이며 보람이시기 때문이다. 다만 그 길을 끝까지 마쳐본 사람만이 그 하나님을 증언할 수 있으며, 그 길을 걸어본 사람만이 성숙을 노래할 수 있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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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른 사람
마음과 사고와 태도, 그리고 언어에 있어서 깊고 너른 사람이 되고싶다.
상대의 잘못과 실수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너그럽고 오래참지만
자신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서는 솔직하고 엄정한 사람이고 싶다.
상대의 장점과 선한 일에 대해서는 아낌없이 칭찬하고 격려하지만
자신의 성과나 장점에 대해서는 겸손하며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
예수님께서 그런 분이셨고 지금 내게도 그렇게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
그렇게 소원한지 10년이 넘어가건만 여전히 일말의 진보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오호 통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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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의 잘못과 실수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너그럽고 오래참지만
자신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서는 솔직하고 엄정한 사람이고 싶다.
상대의 장점과 선한 일에 대해서는 아낌없이 칭찬하고 격려하지만
자신의 성과나 장점에 대해서는 겸손하며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
예수님께서 그런 분이셨고 지금 내게도 그렇게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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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소원한지 10년이 넘어가건만 여전히 일말의 진보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오호 통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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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의 결과
상처와 아픔은 죄의 결과이지만, 성숙의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상처와 아픔을 통해 어떤이는 미라가 된다.
진정한 자아를 감춘채 이웃과 마음의 담을 쌓고 치유와 회복을 거부한다.
상처와 아픔을 통해 어떤이는 고슴도치가 된다.
수동적인 자기 방어적 태도나 호전적인 공격성은 자신과 다른이의 상처와 아픔을 더 심화시킨다.
그러나 상처와 아픔을 통해 어떤이는 진주가 된다.
시련과 연단은 상처와 아픔이지만 믿음과 소망으로 인내하며 삶을 긍정하고 다른 이들과의 연대를 더욱 공고히 할 때 상처와 아픔은 보석과 같은 인격과 성품이 만들어 지는 과정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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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와 아픔을 통해 어떤이는 미라가 된다.
진정한 자아를 감춘채 이웃과 마음의 담을 쌓고 치유와 회복을 거부한다.
상처와 아픔을 통해 어떤이는 고슴도치가 된다.
수동적인 자기 방어적 태도나 호전적인 공격성은 자신과 다른이의 상처와 아픔을 더 심화시킨다.
그러나 상처와 아픔을 통해 어떤이는 진주가 된다.
시련과 연단은 상처와 아픔이지만 믿음과 소망으로 인내하며 삶을 긍정하고 다른 이들과의 연대를 더욱 공고히 할 때 상처와 아픔은 보석과 같은 인격과 성품이 만들어 지는 과정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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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0.2009
인테그리티
1. 마음을 얻으라
리더십이란 영향력입니다. 결국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 리더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물론 마음을 얻지 못해도 리더를 따르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없이는 최선의 노력도 안하고, 최선의 결과도 얻지 못합니다. 즉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결코 그 사람의 열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훌륭한 리더는 상대방의 마음을 얻음으로, 그의 의지와 열정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것은 좋은 성품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좋은 성품 이상의 것이 필요합니다. 그럼 무엇이 필요할까요?
2. 공감하라
공감이라는 단어는 ‘안’과 ‘감정’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비롯했습니다. 따라서 공감은 상대방의 ‘감정’안에 있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아무리 훌륭한 리더가 객관적으로 좋은 목표를 제시한다고 해도, 그가 자신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낀다면, 사람들은 전심으로 그를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이해 받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리더에게는 다른 사람과 진심으로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이 절대적입니다.그런데 공감을 위해서는 몇 가지 요소들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감정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감정능력이란 자신의 진짜 감정을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모르는 사람이 절대 다른 사람과 공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아는 능력이 필요하며, 이는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정확히 진단하고 파악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경계선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의 감정을 이해할 때는 자신의 감정과 다른 사람의 감정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공감이란 상대방의 감정에 단순히 빠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감정에 빠지면 그가 현재의 경험을 극복하기 위해 희망의 다리를 놓는 일을 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경계의 벽이 너무 높아 자기 감정만 주장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따라서 균형이 필요합니다.
세 번째는 경청하는 능력입니다.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이해한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진심으로 듣고 있는지 아닌지는 상대방이 더 잘 압니다. 리더가 진심으로 듣고 이해하고자 할 때, 상대방 역시 그에게 마음의 문을 열게 될 것입니다.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점은 공감과 견해 차이는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즉 상대방의 경험을 인정하고 공감하는 것이 상대방의 의견에 반드시 동의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공감이 전제되지 않은 설득은 불가능하며, 참된 의사소통은 공감을 전제로 합니다. 하지만 변화를 이룰 수 없는 공감 역시 무익합니다. 상대방과 공감하게 되면 상대방으로부터 배우게 되고 심지어 자신의 생각이 바꿀 수도 있지만, 바른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하는 공감은 무익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3. 은혜를 베풀라
공감과 더불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는데 필요한 것은 마음 주기입니다. 마음 주기는 세 부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피해망상증입니다. 이 증상에 빠진 사람들은 신뢰라는 개념을 생각지도 않고 일만 잘 풀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상대방이 자신을 속일 것임을 전제하고 사람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부류의 리더는 우리 중에 없을 것이라고 믿고 바랍니다.둘째는 조건부 신뢰로, 우리 대부분은 여기에 속할 것입니다. 이들은 신뢰와 좋은 관계를 원합니다. 다만 잘하는 상대에게만 잘해줍니다. 이들의 중요한 가치는 공평입니다. 성과를 올린 사람에게는 그에 합당한 대우를, 그렇지 않으면 동일하게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신뢰를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이고, 이 때 필요한 것은 도움이기 때문입니다.셋째는 무조건적인 신뢰로, 자신보다는 남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는 마음을 가진 리더들입니다. 이런 사람은 우리 중에 흔하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바로 무조건적인 은혜에 기반한 종교임에도 우리의 리더들은 이 은혜와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습니다. 은혜는 기독교적 삶의 태도이자 존재 방식입니다. 이 은혜 속에서 궁극적으로 신뢰가 싹트며, 리더에게 은혜를 맛본 사람들은 리더에게 마음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그렇다고 상대방에 대해 바라는 기준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은혜로운 리더는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높은 기준으로 끌어 올리기 위해 조언이나 훈련, 격려, 자원 등을 제공합니다. 그는 아직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기준점에 도달하도록 섬기고 돕습니다. 반면에 은혜롭지 않은 리더는 요구만 할 뿐 도와주지 않으며 상대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그를 적으로 몰아 붙입니다. 은혜로운 리더만이 사람들이 진심으로 신뢰를 보이고 따르게 됩니다.
삶 속에 사람이 있다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사실이 있다면, 사람의 중요성입니다. 사람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인생을 통해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을 얻는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핸리 클라우드, 인테그리티-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진정한 사랑을 심리학과 리더십이라는 렌즈를 통해 잘 정리하고 분석해 놓았다는 점에서 저자의 노력과 통찰은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나는 저자가 주장했던 "인테그리티"에서 "리더십"과 "영향력"을 위해 사랑이 이용되는 "디스인테그리티"가 느껴졌다면 역설일까? 마음을 얻기 위해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을 얻고 싶은 것일까? 예수님도 제자들의 마음을 얻기위해 사랑하셨을까? 그냥 아무런 댓가와 결과를 바라지 않고 심지어 내자신을 희생해 다른 사람을 세워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 그것을 은혜라고 정의하고 그 은혜가 기독교의 기반이며 존재방식이라고 믿는다면, 리더십과 영향력이라는 결과물을 내려 놓고, 가족이 서로를 사랑하듯 연인이 서로를 사랑하듯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인테그리티가 아닐까? 하나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받은 자로서 내게 허락하신 자들과 그 은혜를 나누는 삶을 살아가려 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즐거이 지는 희생적 사랑만이 "영향력"과 "리더십"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조건적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조정하려는 은밀하고 집요한 자기 사랑의 죄성을 극복하는 길이라 믿는다. 존재목적과 존재방식 사이의 혼동을 분별하고 사랑받았기에 사랑하고, 사랑하기에 사랑으로 살아가는 "목적과 방식사이의 인테그리티"가 있기를 소원해 본다.
bk
12.31.2008
The Purpose of My Life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생명과 자원들(은사/소유/관계/지식/전문성/시간), 그리고 성품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영광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기 위해 존재한다.
Q. 1. What is the chief end of man?
A. Man’s chief end is to glorify God,[1] and to enjoy him forever.[2]
[1] Psalm 86. Isaiah 60:21, Romans 11:36, 1 Corinthians 6:20, 31, Revelation 4:11.
[2] Psalm 16:5-11. Psalm 144:15, Isaiah 12:2, Luke 2:10, Philippians 4:4. Revelation 21:3-4.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12.28.2008
The 7 Habits
내게 진정한 영향력을 미치는 관건은 실제로 보여주는 당신의 행동에 달려 있다. 당신이 보여주는 실제 행동은 당신의 성품, 즉 진정 당신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평판이나 당신이 나로부터 받고 싶은 평판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 영향력은 내가 당신을 실제로 어떻게 경험했는가에 따라 확실히 달라진다.
자랑
What do you boast about?
은연중 내가 자랑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자랑하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을 뽐내고 싶을까?
다른 사람들이 알아 주었으면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왜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
사도바울은 세상 사람들이 자랑하고 싶어한다고 말한다.
세상은 그런 방식으로 사랑 받기를 원한다.
대단한 능력, 많은 경험, 높은 학식, 뛰어난 지혜, 풍부한 소유, 아름다운 외모...
모두 다 자랑거리들이다.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고 관심을 끈다.
사랑받고 존경받고 싶은 욕구, 인정받고 조정하고 싶은 욕구를 채우기 위해
사람들은 모두 왕자이고 싶고, 공주이고 싶다.
사도바울이 말한다:
"If I must boast, I will boast the things that show my weakness."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은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사랑받는 자들이다.
온 우주를 지으신 창조주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들이다.
그분의 인정, 관심, 보호, 인도, 공급을 받고 있는 자들이다.
영원하고 다함없는 그분의 성품을 쫓아
영원하고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는 자들이다.
굳이 자랑을 해야 한다면, 그것을 자랑할 일이다.
얼마나 내가 부족한 사람인지
얼마나 내가 연약한 사람인지
얼마나 내가 미련한 사람인지
얼마나 내가 가난한 사람인지
얼마나 내가 상처난 사람인지
얼마나 내가 잔인한 사람인지
얼마나 내가 이기적인 사람인지
얼마나 내가 교만한 사람인지
얼마나 내가 조급한 사람인지
얼마나 내가 무식한 사람인지
얼마나 내가 고집센 사람인지
얼마나 내가 산만한 사람인지
얼마나 내가 게으른 사람인지
얼마나 내가 정욕적인 사람인지
얼마나 내가 비판적인 사람인지
내 안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추악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나를 당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하신다.
이것이 내가 자랑하며 노래할 유일한 제목이다.
12.06.2008
게으름의 정체: 싫증
정해진 삶의 길이 속에서 보다 많은 일을 하며 사는 법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가치가 적은 일보다 가치 있는 일에 집중하여 사는 것,
유능해지는 것,
부지런히 사는 것입니다.
인간 안의 부패성은 자기 중심적인 욕망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는 부지런하게, 선한 의무를 행하는 데 있어서는 게으르게 합니다.
그리고 그런 본성적 게으름은 영적인 변화 없이는 벗어 버릴 수 없습니다.
...거룩한 삶에 대한 그러한 모든 무기력 뒤에는 자기의 마음의 정욕을 따라 살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게으름의 정체입니다.
1. 게으름의 정체: 싫증
게으름은 바로 그렇게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제거되어야 할 대표적인 악이며, 영적인 불결입니다. 따라서 게으름과 싸워 그 뿌리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의 영향력으로 파괴하지 않으면, 성화에 있어서 진전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날마다 부지런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배우는 실천적인 순종함 없이는 어떠한 영적 성장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성품, 그리고 익숙해진 삶의 갈피갈피마다 깊이 배어 있는 게으름을 색출해 낼 것입니다. 말씀의 빛이 우리 안에 있는 게으름의 정체를 드러낼 때 여러분들은 더 이상 그것들과 친구가 될 수는 없을 것이며, 이제껏 여러분 안에서 하나 된 삶을 살았다는 것에 대하여 소스라치게 놀라게 될 것입니다. 마치 환자가 수술 후 자기 몸에서 떼어 낸 암덩이를 보고 끔찍해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여러분들은 오랫동안 멈췄던 '착하고 충성된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게으름이 들어오면, 신자의 지성에서 건강하고 바람직한 정신적 작용들이 점차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게으르게 사는 사람들 중에서는 투철한 사상을 지닌 사람을 만나 보기 힘듭니다... 뚜렸하고 건강한 사상을 지닌 사람들은 어김없이 부지런한 사람들입니다. 게으른 사람들은 분명하게 정리된 정신 세계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타고난 입담으로 개똥철학을 널리 퍼뜨릴 수 있는지는 몰라도, 많은 백성들이 믿고 따라갈 수 있는 건강한 사상을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게으름은 악입니다.
게으른 사람에게는 기본적으로 자기 속에 있는 무엇을 쏟아 내거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체력을 소진하거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물질을 헌신하거나 해서라도 뭔가를 이루어야 하겠다는 목표가 없습니다... 목표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불태워서 매진하는 실제적 삶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때 비로소 목표가 되는 것이지, 그것을 위한 실제적 삶은 싫고 단지 그 자체만 원할 뿐이라면 그것은 한낱 희망 사항에 불과합니다...목표는 구체적인 실천 계획이 서 있고, 노력하면 성취가 가능한 단계에 있어, 꿈꾸는 이로 하여금 그것을 생각 하면서 자신의 삶을 그 목표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게 하는 것입니다. 망상이나 희망 사항을 가지고 사는 데는 비용이 안 들지만, 구체적 목표를 가지고 사는 데에는 반드시 비용이 듭니다.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꼭 희생하여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환경이 좋게 변할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환경은 영원히 우리편이 아닙니다. 오히려 환경은 우리가 이 땅에서 극복하고 싸우면서 이겨야 할 상대입니다. 잘 점검해 보십시오. 우리의 인생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육체의 게으름입니다.
게으름, (김남준 200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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