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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2011

예수의 운명에 합류함

"그러면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의 사업과 운명에 합류하는 것이라 합니다. 예수와 같이 남을 위해 살고 하느님의 사랑과 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뒤를 따르는 것이라 합니다. 새로운 맹약으로 예수의 제자기 되어 예수의 생활양식을 추종하는 삶 말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십자가의 구원의 참 뜻을 알고 자유와 평화와 사랑과 기쁨과 참 인간성을 맛보게 된다 합니다. 이것이 십가가의 구원입니다."

김대중, 옥중서신 중 21신,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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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과 제자도의 핵심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삶의 한 가운데서 실현해 내는 것이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전 존재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함에 녹아 있으며 이러한 삶을 통해 죄에 뿌리박은 세속적 삶의 방식에 저항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조해 내는 것이다. 바로 그 삶의 방식에 천착할 때에야 인류보편의 궁극적 지향인 샬롬을 경험한다. "예수의 사업과 운명에의 합류"라는 표현이 아득하며 새롭다.

bk

11.10.2010

신앙이 능력인 이유

신앙은 실제적 능력(Power)이다. 그것은 인간의 약함으로 하나님의 전능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인간의 잠재력을 연습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철저하고 겸손하게 인정함으로 하나님의 실존적 사랑에 존재를 내어 맏기는 행복한 의존이다.
bk

5.12.2010

영적 유기

"주일 아침마다 우리는 신앙을 고백합니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이렇게 고백하는 것을 더 이상 믿지 못하고 멈춰 설 때, 예레미야처럼 신앙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경험할 때, 도대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깊은 회의 에 빠지게 되는 때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 기도한다." 다시 말해서 계속 믿을 수 있도록, 우리의 신앙이 떨어지지 않도록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믿는 일을 계속 할 것입니다. 왜입니까?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믿고'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놀라운 은혜라고 부릅니다.
때로 신앙의 깊이를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신앙을 상실하는 것, 신앙의 붕괴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상실과 붕괴는 신앙의 크기 혹은 깊이를 경험하게 합니다. 자신의 신앙이 참으로 하찮고 보잘것없음을 체험할 때, 바로 그때 당신은 집요하고도 완강한 그리스도의 결심, 나의 신앙이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이야말로 당신의 영혼과 육체, 온몸과 온 마음을 움츠러들게 하며 소름끼치게 하는, 그럼에도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경험입니다."

유호준, 인간의 죄에 고뇌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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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유기spiritual desertion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공통적으로 겪게 되는 신앙여정의 한 부분이다. 주변의 환경이나 인간관계, 또는 신앙공동체에서 경험하는 여러가지 갈등, 고통, 긴장과 스트레스가 지속되거나 또는 자신만이 아는 멈출 수 없는 죄된 습관이 계속되어 불안과 죄책감 수치감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채로 오랜 시간이 지나면 영적 침체를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영적 침체가 계속 되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과 감정에 휩사여 절망의 심연으로 끝도없이 떨어져 버릴 때가 있다.

17세기 화란에서 일어났던 제 2의 개혁운동에 큰 역할을 감당했던 기스베르투스 후치우스Gisbertus Voetius(1589-1676)는 이러한 영적 유기의 상태를 "신앙인이 중심으로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감정을 갖지 못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내적 십자가 또는 영적 슬픔과 시련"이라고 정의했다 (Spiritual Desertion 1659, 30). 후치우스는 놀랍게도 (그가 야코보스 알미니우스의 제자라는 점에서 본다면 참 경악스러울 정도이지만, 그가 깔뱅의 후예라는 점에서는 너무도 당연하게) 신자들의 영적 유기의 일차적 원인을 하나님 자신에게서 찾는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과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시지 않는다면 인간편에서는 사실 제 아무리 노력을 기울인다 할 지라도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신앙을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영적 유기의 좀더 직접적이고 주요한 실제 원인은 믿음에 의한 분명한 확신의 결여이다. 즉 영적 유기의 문제는 믿음이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영적 침체와 유기를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단순히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라고 조언하는 것은 마치 먹을 빵이 없어 배고파하는 사람들에게 빵을 먹고 배부르라고 권하는 것과 같다.

어떻게 영적 침체와 유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영적인 붕괴에서 어떻게 탈출 하여 다시금 굳건한 신앙의 반석 위에 설 수 있을 것인가? 신앙의 확신결여로 인한 영적 침체를 경험하는 당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그러나 끊임없는 사랑과 은혜로 신앙을 주시는 분도, 신앙의 침체를 허락하시는 분도, 그리고  신앙을 다시 회복하시는 이도 그리스도이시다. 인간 편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처절하게 경험하는 것은 가혹하리 만큼 고통스러운 경험이지만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집요한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영적 침체 역시 신앙의 더 깊은 지경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 다만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믿음의 공동체 안에 머물면서 버티라"는 것이 가장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 신앙은 개인사가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경험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바로 이 때 절실하고 위력적으로 작용한다. 다윗은 "부르짖어도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찬송"중에 거하시며, 신앙공동체의 모임에서 선포와 증거와 찬양과 부르짖음을 통해 수치를 면하고 "찬송"을 회복할 수 있음을 노래하였다 (시22).

bk

1.15.2010

신앙

첫째, 신앙은 인간 존재의 확실성을 준다. 인간이 가지는 존재적 절망은 오직 하나님께서 수여하시는 신앙을 통해서만 극복된다. 따라서 신앙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기반이다. 이런 점에서 신앙은 단순히 의미 구성을 통한 인식론적 확장으로 제한되지 않으며 보다 포괄적이다.

둘째, 신앙은 미래지향적이다. 신앙은 현재의 갈등을 치유하고 회복하여 미래를 현실화시키는 힘이다. 따라서 신앙은 현재속에 미래를 배태하며 지향한다. 이런 점에서 신앙은 현재의 상태를 초월한다.

셋째, 신앙은 역동적이며 초월적인 능력이다. 신앙은 실존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노력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절망을 뚫고 침투하시는 창조주의 초월성에 참여하는 행위이다.

넷째, 신앙은 공동체를 통해 경험된다. 신앙의 본질은 창조주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며 이는 증거와 고백을 필요로 한다. 개인적 인식의 확장은 신앙의 결과일 수 있으나 신앙 그 자체는 아니다.

다섯째, 신앙은 구체적이다. 삶의 구체적인 사건들속에서 신앙은 형성되고 변형된다. 신앙은 인지구조의 확장에 제한될 수 없으며 삶의 행위들이 발생하는 상황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여섯째, 신앙은 구속적이다. 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샬롬회복이다. 신앙은 성취되거나 개발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초월적이며 구속적 은혜로 계속해서 변형되어가는과정이다.

파울러의 신앙이해에 대한 로더의 반박 중, The Logic of the Spirit, 257

11.05.2009

존재하기 위한 용기

용기란 非存在의 사실에도 불구하고 존재에 대해 갖는 자기 확신이다.
- Paul Tillich, Courage to be, 155

인간은 존재적으로 영원한 죽음, 궁극적 허무와 무의미, 철저한 죄의식이라는 염려에 포로되어있다. 용기란 이러한 거부할 수 없는 존재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자아를 긍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용감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용납되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며, 그래서 하나님을 신앙함으로 얻게 되는 존재의 힘은 비존재가 가져오는 허무와 공허, 그리고 죄의식을 부수는 존재의 용기가 된다.

8.03.2009

기독교의 위험한 사상


Christianity's Dangerous Idea: The Protestant Revolution--A History from the Sixteenth Century to the Twenty-First, Sep. 1997, by Alister E. McGrath 560 pages
This is McGrath's third book title borrowed from his atheist bête noir Richard Dawkins. But don't let the titular borrowings fool you: this is an original and important book. Someone had to imitate the long, popular works of history being written on secular subjects from Lewis & Clark to FDR, and McGrath has the theological and historical expertise necessary to tell a story stretching from the Reformation's origins in the 16th century to today. The dangerous idea was Martin Luther's: that individual believers could and should read the Bible for themselves. The result was occasionally violent (as in the peasants' revolt and the English Civil War), occasionally brilliant (musicians like Bach, theologians like Calvin and Jonathan Edwards, poets like Milton) and certainly world altering (the Calvinist Reformation clearing space for the rise of secular science and capitalism). McGrath concludes not with the faith practices of present-day England or America, but with the increasingly Pentecostal global south. The book occasionally falls into the dry tone of a textbook and assumes points that historians would want to debate, but is still the most readable introduction to the history, theology and present-day practices of Protestantism. (Oct.) Copyright © Reed Business Information, a division of Reed Elsevier Inc. All rights reserved.
"맥그래스는 야심찬 사상을 대담하게 제시하면서 종교개혁으로부터 현대 세계 기독교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개신교와 그 변형들의 역사를 체계 있게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은 아주 쉽게 읽을 수 있고, 놀라울 정도로 폭넓은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공정한 시각에서 서술하고 있다."-필립 젠킨스"


이 책은 개신교와 그 역사를 독특한 시각으로 검토하여 재해석하고, 개신교가 지닌 놀라운 다양성과 내적 일관성을 함께 제시하며, 상세한 연구 내용을 통찰력 넘치는 광대한 해석들과 잘 결합시켜 놓았다. 우리에겐 이런 책이 필요했다. 정말 잘 쓴 책이다."-후스토 곤살레스"

각 사람이 성경을 이해하고 자신과 자신이 사는 세계에 적용할 수 있다는 사상은 사회 구조와 개인의 삶에 무한한 시사점을 던져주는 폭발적 사상이다. 이 책<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는 이 사상으로부터 발전된 것과, 이 사상이 전 세계 기독교의 현재와 미래에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는데 독특하면서도 고귀한 도움을 제공해 준다."-댈러스 윌러드


옥스퍼드 석학, 앨리스터 맥그래스의 기념비적 저작!개신교 역사와 그 세계적 영향력을 새롭게 해석하다!
개신교의 중심에 자리 잡은 '위험한 사상'은 성경 해석이 각 사람의 권리이자 책임이라는 것이다. 이 원리가 확산되면서 개신교는 500년에 걸쳐 두드러진 혁신과 적응의 역사를 보여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적 일관성이 사라지고 사회 불안을 조성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고집불통인'사상들을 통제할 수 있는 최고 권위가 없었기에 쟁점을 놓고 논쟁하는 당사자들은 성경에 호소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성경은 갖가지 수많은 해석들에게 그 문을 열어놓고 있다.
이 책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는 처음으로 개신교의 핵심 요소와 이 위험한 사상이 만들어낸 종교적, 문화적 역동성을 정의해 보려고 시도한 책이다. 이 종교적, 문화적 역동성은 결국 20세기에 이르러 개신교에 놀랍도록 새로운 발전을 가져다 주었다. 세계적 명성의 옥스퍼드 석학 앨리스터 맥그래스는 독특한 접근방법을 이용해 전 세계 개신교 교회들과 공동체들이 연관된 논쟁과 분열에 여전히 영감을 불어넣고 있는 매력적 인물들과 운동들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이 책 1부(기원)는 연대를 따라 내려가며 역사를 관통해가는 유희를 제공한다. 2 부(표현)는 개신교의 신앙과 관습이 지닌 독특한 특징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3부(변형)는 전 세계 개신교의 미래에 대해 깜짝 놀랄 평가를 내리고 있다.


차례
들어가는 글
1부 기원
1장 몰려오는 폭풍
2장 우연히 혁명가가 된 혁명가 - 마르틴 루터
3장 루터의 대안들 - 종교개혁의 다양화
4장 힘의 이동 - 칼뱅과 제네바
5장 잉글랜드 - 성공회의 등장
6장 전쟁, 평화 그리고 무관심 - 위기에 빠진 유럽의 개신교 (1560~1800)
7장 미국의 개신교8장 19세기 - 전 세계로 뻗어나간 개신교
2부 표현
9장 성경과 개신교
10장 믿음과 특성 - 개신교의 몇 가지 두드러진 믿음들
11장 신앙의 틀 - 조직, 예배, 설교
12장 개신교와 서구 문화의 형성
13장 개신교와 예술 그리고 자연과학3부 변형
14장 미국 개신교의 변화상
15장 불의 혀 - 개신교 안에서 일어난 오순절 혁명
16장 개신교의 새 개척자들 - 남반구
17장 개신교 - 다음세대
옮긴이의 글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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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알리스터 맥그래스1953년, 북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벨파스트에 있는 감리교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 등을 공부한 뒤, 옥스퍼드와 캠브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현재 옥스퍼드 대학교의 위클리프 홀(Wycliffe Hall)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같은 대학에서 역사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역자: 박규태 고려대학교 법과대학과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2006년 3월 교회 사역에서 물러난 뒤, 현재는 영미권과 독일어권 신학서 번역과 저작에 전념하고 있다. 역서로는 『종교개혁 시대의 영성』, 『기독교의 미래』, 『성경완전정복』(이상 좋은씨앗), 『약할 때 기뻐하라』(복있는사람), 『세상을 잃은 제자도 세상을 얻는 제자도』(국제제자훈련원) 등이 있다.
from 국제제자훈련원 "사랑몰"
올해 필독도서에 추가됨

5.19.2009

저주를 통해 도달하는 직업

"Theologians are not made by reading and studying books but by living and dying and being damned."
Martin Luther

신학자들은 서적을 읽고 연구하는 것을 통해 만들어 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살고 또 죽으며 저주받음을 통해 만들어 집니다.
-마틴 루터-

십자가의 신학을 주창한 마틴루터 다운 말이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 그분의 진리에 노출되는 것은 추상적 관념의 사색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삶의 한 복판에서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게 되는" 역설을 온 몸으로 체득하고,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나를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를 쫓아 순교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그러니 이것이 어떻게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하단 말인가? Sola Gracia는 그렇게 죽음과 저주를 기쁨으로 수용하는 자들을 가능하게 하고 또한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만 확증된다. 그러니 신학자라고 함부로 말할 일이 아니다.

bk

5.11.2009

진리는 사랑이다


"참 사랑은 리얼리즘realism이다...인간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한계성을 두려워하지 말고 똑바르게 정직하게 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만 된다...참된 진리를 찾아가는 자가 노력해야 될 것은 자기중심적인 거짓 자기를 부수고 진정한 참자기를 발견해 내는 일이다...진실은 항상 사랑과 함께 있어야 하고 사랑은 항상 진실과 함께 있어야 한다."

강원용 (1917-2006), 중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19.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1b-32) 이 말씀은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진리를 아는 것"은 어차피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진리를 알 수 있는 능력과 의도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성은 참된 진리를 거부하는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 진리를 혐오한다. 참된 진리는 인간의 부패와 죄악을 밝히 드러 내기 때문이다. 성경은 "변하지 않는 영원하며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절대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며 성령을 통해 알려지는 하나님" 이심을 증거한다. 이 전제를 수용하려면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이 믿음을 거부하고 진리의 타자성을 무시하며 진리의 인격성을 멸시한다. 그래서 근대적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절대화 하여 유한하며 제한적인 이성의 두레박으로 망망한 진리의 바다를 재려는 우매함에 빠져 버렸다. 그래서 이러한 과학적 인간들은 진리를 자신의 사고와 이해의 한계라는 철장에 가두어 놓음으로서 고독과 소외, 허무라는 진창속에 스스로를 투신하고 말았다.

또 다른 극단의 부류들은 과학적 인간들의 이성주의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고 신앙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과학제일주의의 맹주인 절대이성을 타도하기 위해 신앙제일주의자들이 선택한 주인은 바로 도그마였다. 그러나 건강한 이성의 사용과 자기반성을 거부한 맹목적이며 자기 중심적인 신앙주의는 절대이성의 왕좌위에 도그마적 신앙을 올려 놓아 경배의 대상을 바꾸었을 뿐, 절대 진리의 무한성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따듯한 인격으로서의 진리를 삶속에 실천하기를 거부하며 자신의 한계와 유한성을 철저히 부인한다는 점에서는 그토록 적대시했던 과학주의와 한 패였다.

참된 "진리를 앎"은 절대타자, 절대진리, 절대자의 존재를 긍정하고 믿음으로 수용하며 이성적 이해의 한계를 알면서도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하려는 신앙을 요구한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를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으로 불렀다. 신앙은 참된 진리에 자신의 이성과 경험과 의지를 내려놓는 겸손한 삶의 태도이며 세상의 모든 것을 진실로 사랑하는 용기있는 행동이다. 그래서 모든 진리는 이러한 삶을 명징하게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에게 귀착된다. 예수는 진리이고 예수는 사랑이다. 그래서 진리는 사랑이며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진리를 아는 유일한 길이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하며 사랑은 리얼리즘이라는 강원용 목사님의 말씀은 이런 점에서 옳다.

bk

3.25.2009

깊은 냄비를 주시는 하나님

늦은 밤, 도서관을 나서 집으로 가는 중 선교사님을 만났다. 사실은 선교사님이 어두운 곳에서 내 이름을 부른 통에 놀라서 섰다. 반가운 목소리로 불러주는 소리가 즐거웠고 한적한 곳에 큼직한 빡스를 어깨에 매고 있는 선교사님이 엉뚱했다. "선교사님, 이 밤에 거기서 뭐하십니까?" 싱글벙글 즐거운 목소리로 대답하신다. "아내가 기도하던 깊은 냄비를 주셨어요!"

"아내가 기도하던 깊은 냄비..." 몇마디 않고 헤어졌지만 "아내가 기도하던 깊은 냄비..."가 계속 마음 속에서 맴돌았다.

모교회에서 후원이 끊겨 기도하는 중이지만 하나님이 더 좋은 후원자들을 만나게 하실것이라며 함께 식당에서 손붙잡고 기도했던 것이 두 주 전이었다.

깊은 냄비가 필요해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하나님 깊은 냄비가 필요한데 마련해 주세요"라고 순수하고 친밀한 기도를 드렸을 사모님의 성스러운 모습이 떠올랐다.

아내의 기도를 유심히 귀담아 듣고 "깊은 냄비의 필요"를 자기 일처럼 묵상했을 선교사님의 따듯하고 책임감있는 마음이 느껴졌다.

누군가 놓아둔 박스를 어둡고 바람부는 밤에 그냥 스쳐 지나가지 않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보물 찾듯 소망의 기대를 놓치지 않는 그의 성실함과 믿음이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깊은 냄비가 거기 그렇게 놓여져 있었던 것이 결코 우연이나 운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자애롭고 치밀한 준비하심이라고 생각하는 영적 민감함과 깨어있음에 내 자신이 부끄러워 졌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그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기 위해 이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예비하시는 하나님, 나로하여금 그 현장에 참여하게 하심으로 "내가 너를 기억하며 내 손바닥에 새겼다"는 아침의 말씀을 컨펌해 주시는 놀랍고도 달콤한 하나님의 사랑에 코끗이 찡하고 가슴이 묵직하게 아려왔다.

"사랑하는 아들아 보았니? 어땠니?" 라고 물으시는 것 같아 반짝이는 별들을 향해 말씀드렸다. "깊은 냄비의 사랑을 보여주신 아버지, 사랑합니다."

3.25.09, bk

3.18.2009

알려는 열망

"Knowing is the responsible human struggle to rely on clues to focus on a coherent pattern and submit to its reality." Esther Meek

Meek은 Michael Polanyi를 연구한 철학자이다.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자동차 수리공을 유비하였다. 깔깔대며 웃는 유쾌한 웃음이 귀엽기까지 한 Meek은 Longing to Know라는 책에서 철학적 인식론을 일상의 언어로 생생하게 그려내는 값진 작업을 하였다.


“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Meek은 결론을 내리기 전에 철저하게 이 질문에 대해 탐구할 것을요 청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알 수 없다”는 명제 자체도 “하나님은 알 수 있다”라는 명제를 증명하는 것 만큼, 아니 보다 더 어려운 작업들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증명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성서가 증언하는 또 다른 난관인 “우리의 앎의 능력은 왜곡되고 상실되었다”는 진리 앞에 서야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어거스틴의 오랜 전통을 따라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망을 외면하고 포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존재적으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고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젖먹이의 옹알이로부터 프로이드의 왜곡된 Id까지 진리를 향한 열망은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아 프라이오리a priori이다.

도대체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어떤 의심할 수 없고 오류도 있을 수 없는 절대적 보편진리를 인식한다는 것인가? 대답은 “아니다.” 안다는 것은 의심이라는 행위와 오류의 실패를 포함하는 더 포괄적인 행위이다. 앎은 끝없는 인식의 과정이다. 결국 인간의 삶은 끝없는 알아감의 여정이며 알아가는 것은 인간됨의 행위이다.

세 상 속에 흩어진 실체의 편린들을 단서로 그리고 보여진 실체 너머에 있는 배후의 관계들을 통해 일관성cohesive있는 의미를 발견해 내는 것은 때로는 고통스럽고 무모하며, 어쩌면 너무나 어려워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정도이다. 그러나 “세상the world”은 여전히 실재하고, 세상을 인식하는 주체이며 동시에 중요한 인식의 대상이기도 한 “나body”도 실재하기에 포기할 수도 없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인식의 대상과 인식의 주체 사이의 관계를 정립해 주는 일종의 “지침/방향direction”이다 (나는 Meek의 direction보다 인식론적 방향성과 인식의 주체와의 관계성을 더 포괄적으로 설명해 주는 Geertz의 “Map” 개념을 선호한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지도의 범례keynote/legend가 되어 인식의 틀을 형성하고 기존의 틀을 계속해서 교정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삶의 복잡다단한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실체들은 정념화되어 경직되지 않고 계속 역동적으로 구성과 해체, 그리고 재구성을 거듭할 수 있도록 유연해야 한다. 진리는 단순히 감각과 인식과 언어 너머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소망과 겸손을 가지고 반응respond할 수 있다. "확실함certainty"도 절대진리를 명확히 "표현할 길"도 없기 때문에 겸손해야 할 것이며, 이러한 겸손함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인식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소망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겸손함과 소망은 세상에 대해 존재를 여는 태도이다 (피녹은 이를 인간의 "세계 개방성"이라고 불렀다. 다만 그는 이를 인간 존재의 자연스러운 본성으로 설명했지만 내가 보건대 이는 죄로 인해 왜곡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많은 중요한 본성들 중 으뜸이 되는 것이다. 자기만의 도그마에 갖혀 진리를 자기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양 법석을 부리는 경직되고 오만한 사람들속에 내가 속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증거는 충분하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세상을 향해 자신의 존재를 여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나는 세상과 연합하고 세상을 이해하며 세상에 섞여 세상을 풀어(해석해)나간다. 서양적 전통의 분석적 사고에 대한 강조는 인간의 의식에 대한 과도한 의존과 확신을전제로 하게 될 때 결국 실체로 부터의 메마른 단절만을 부추겨 결국 인간을 끝없는 고독의 무저갱에 처박아 놓게 된다. 실체와 인식의 주체는 분리될 수 없다.

인식의 행위는 인식자의 적극적이고 책임성 있는 순종과 헌신을 요청한다. 앎yadah이라는 것은 부부가 결혼을 하여 서로 알아가는 것과 같은 그런 종류의 앎이다. 완전히 다 알아 앎이 종료되는 순간은 없다. 다 만 계속해서 알아갈 뿐이다. 그리고 그 앎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필요하다. 용기와 희생과 책임이 뒤따른다. 말씀word를 통해, 세상world를 통해, 그리고 우리자신we-self를 통해 우리를 만나시는 하나님은 그래서 임마누엘이다. 나와 세상을 통해 그리고 말씀을 통해 계시는 하나님 밖에서 어떻게 내가 존재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어거스틴은 고백한다. "그러므로 나의 하나님이여, 당신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할 수가, 결단코 존재할 수가 없나이다. 아니면 이렇게도 말할 수도 있지 않겠나이까? 내가 당신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니이다…. 그러하나이다 주여… 당신은 말씀하셨나이다.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렘23:24). Confessio, I.ii.2


앎은 또한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하는 행위이다. 믿음과 이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지, 정, 의의 모든 인간됨이 총동원 되는 것이다. 보이는 것 너머의 복잡한 관계들을 성경과 성령이 지시하는 대로 민감하게 반추하여 의미를 발견하려는 적극적인 "앎의 행동"이 필요하다.

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진정한 앎은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앎은 존재와 존재의 충돌이기에 변화에 대한 용기를 요구한다. 앎은 알려지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되는 것이다. 그를 알기 전의 나와 그를 알고 난 후의 나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더할 나위 없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변화되는 것이다. 더 많이 알아갈 수록, 더 많이 변화되며, 더 많이 변화될 수록, 더 많이 알고 싶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거룩이 더해 갈 수록 죄에 대한 인식이 더 또렷하고 깊어지며 이는 더 깊은 거룩의 갈망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정말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는 지를 먼저 물을 일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만나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 않고 궁금하지 않은 담에야 "알고 싶을"리 만무하지 않은가? 알고 싶지 않은데 알 수는 없는 노릇이며, 사랑해야만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앎"을 "세상의 실체를 받아들이고 탐구하려는 인간의 책임있는 노력"으로 정의한 에스더 믹의 진술은 좀 메마른 감이 있어 아쉽다.

bk

1.27.2009

변화를 가져오는 배움

Adult education in congregations should equip adults for their ministries and invite them to engage in a "critically reflective practice" of Christian faith for the sake of the world.to do so requires that adult Christians bring critical theological reflection to their various practices of ministry.

1.02.2009

이해하기 위해 믿는 신앙


I do not seek to understand that I may believe, but I believe in order to understand (fides quaerens intellectum). for this I believe-that unless I believe, I should not understand.

Anselm (1033-1109), Proslogium


Anselm is the most important Christian theologian in the West between Augustine and Thomas Aquinas. His two great accomplishments are his Proslogium (in which he undertakes to show that Reason requires that men should believe in God), and his Cur Deus Homo? (in which he undertakes to show that Divine Love responding to human rebelliousness requires that God should become a man).

12.30.2008

공동체를 위한 신학교육

I. 1983년 Edward Farley (professor of Theology at Vanderbilt Divinity School, Nashville, Tennessee) 가 내놓은 이론 (Theologia: The Fragmentation and Unity of Theological Education)은 교회와 신학 사이의 단절에 대한 신학 논쟁에 불을 던졌다. 신학자들은 신학을 '과학화'함으로 신학을 불신의 대상으로 만들었으며, 신학교는 과학적 신학에 적응하면서 또 다른 불신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신학과 신학 교육은 신학적 합일(theological unity)을 잃으면서 기능과 기술 중심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I-1 Farley의 주장을 긍정하고 환영한 신학자는 Charles M. Wood (Southern Methodist University)였다. Wood는 (Vision and Discernment, Scholarly, 1985) 실천적 지혜라는 주제의 의미를 역사적으로 추적하였다.
우드에 의하면 '성서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목회학'의 4중적 형식의 신학교육은 16세기 종교개혁에 뒤따른 목회자 양성의 필요성에 따라 고착화 되었다고 주장한다.

16세기 성서신학의 일차적 목표는 신학생이 성서를 통해 신앙을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신학적인 성서주석의 기술을 습득하게 하는 것이었다. 조직신학의 목표는 신학생들에게 성경의 교리적 내용을 합리적으로 이해시키며 장차 그 내용을 교육하고 논쟁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역사신학은 과거의 역사와 전통을 이해함으로 교회와 세계 역사 뒤에 흐르는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의 패턴을 보게 하고, 그러한 관점으로 현재의 상황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었다. 목회학은 신앙 공동체의 상황과 신학 과목을 결합하여 목회의 본질과 의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우드에 따르면 18세기 산업혁명에서 대두된 '과학주의 (scientism)' 는 현대 대학을 태동시켰으며 아울러 신학의 상황마저 바꾸어 놓았다. 성서신학은 성서비평으로, 조직신학은 철학적 논쟁으로, 역사신학은 종교사로, 그리고 목회학은 학문의 반열에서 추방되었다. 이때부터 신학은 신학적 통전성을 잃기 시작했으며, 실천성practicality 마저 잃은 채 교회와 신학이 갈라지게 되었다.

II. 한편, Joseph C. Hough (Union Theological Seminary)와 과정신학자 John B. Cobb (School of Theology Claremont) 는 우드가 Vision and Discernment를 편찬한 같은 해에 Christian Identity and Theological Education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Hough and Cobb은 Farley의 이론이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추상적이며 형식적'이라고 비판했다.

이 두 학자들은 오늘의 신학교와 교회 사이의 문제는 과학주의에 적응하려 했던 4중적 신학교육의 변질이 문제라기 보다는, 16세기의 목회자양성을 위한 4중적 신학교육 시스템과 변화된 현대의 목회자의 역할 사이의 거대한 괴리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호우와 콥에 의하면, 16-17세기의 신학교육은 '스승, 교사, 지식인'상의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한 커리큘럼 구조였다. 지식인으로서 목사는 고전어, 성경, 역사, 철학, 논리학등을 통달한 스승이었으며 목회의 권위는 잘 가르치는 것에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부흥운동과 종교의 무한경쟁으로 목회자는 지식인에서 설득력있는 웅변가로 바뀌었다. 부흥사와 설교가들이 급부성하였으며 여기서부터 신학 교육과 교회는 서서히 불협화음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19세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목회자는 회중을 모으고 교회 건물을 짓고 제도를 만들어내는 조직의 건설자(Builder)로 바뀌었으며, 20세기 중반에는 목회를 하면서 교회를 경영하는 지도자, 경영자, 치유자로 목회자상이 급변하였다.

그러기에 오늘의 신학 교육의 문제는 지식인 양성을 위해 만들어 놓은 Academic Norms학문적 규범과 변화된 목회자상이 요구하는 Professional Norms전문적/기능적/직업적 규범 사이의 공백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코우와 홉은 학문적 규범과 전문적 규범 사이를 연결하는 새 목회자상을 Reflective Practitioner or Practical Theologian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리고 6학기 새 커리큘럼 시안까지 제시하였다.

III. 호우는 1988년 이미 고인이 된 James F. Hopewell을 기념하는 책을 편집하면서 새로운 신학교육의 대안을 제시하였다. Hopewell은 Beyond Clericalism: The Congregation as a Focus for Theological Education에서 목회자 패러다임 clerical paradigm 은 성직자 후보인 신학생 개개인의 신앙적 순례와 직업적 윤각에 초점을 맞출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개인의 발달단계와 기능주의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 태생적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신학교육이 성직자 하나만을 양성하는 일에 집중하는 동안, 정작 성직자를 통해 구현되는 궁극적 목표인 구속적 공동체redemptive community의 형성은 외면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신학교육이 "성직자 양성"에만 집중하면, 목회는 성직자 개인에게 시작되고 교회공동체는 그 한 성직자에게 모든 것을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사실상 교회 공동체는 신학과 신학 교육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성직자만이 존재하였다. 여기에 실패의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Hopewell은 여기서 혁명적인 제안을 한다. 그는 신학교육을 "목회자" 패러다임에서 "회중congregation"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것을 촉구한다. 마치 법학 교육이 타협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정의 공동체'의 실현인 것 같이, 의학교육이 '질병 치료'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사회'를 건설하는 것과 같이 신학교육이 '목회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사회의 대안인 구속 공동체'를 세우는 일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속적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신학교육은 어떤 것이며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우선적으로 우리의 신앙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모든 신앙인은 하나님 앞에서 실천적이며 책임감있는 신앙을 형성하고 그 신앙이 구체적인 삶에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신앙이 자기 자신과 이웃, 그리고 사회와 세계앞에서 구체적이고 책임있게 실현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회자와 신학자들의 임무이다. 신학은 신학자의 독점물 이기 이전에 모든 신앙인의 성찰의 과정이며 더 나아가 신앙공동체를 통해서만 가능한 작업이다. 신학의 자궁은 신앙공동체이다. 신앙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을 신학화하고 신학을 실천할 수 있는 교회공동체를 만들도록 해야 한다. 신학교육은 선장만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큰 배를 공동적으로 움직여 갈 수 있는 공동체를 위한 훈련의 장이어야 한다.

12.22.2008

학문과 자유

Abraham Kuyer (1837-1920)


하나, 학문이 융성하기 위하여 대중의 마음이 자유를 얻어야 했다. 하지만 교회는 삶이ㅡ 유일한 목적을 공로를 통해 하늘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가르쳤고, 사람들은 교회가 주된 목적과 일치한다고 인정하는 만큼만 세상에서 향유할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는 아무도 지상적 실존에 대한 연구에 공감을 갖거나 헌신할 수가 없었다. 모든 참된 칼빈주의자에게 복된 상태는 '중생'에서 자라며 '성도의 견인에 의하여 보증된다. '믿음의 확실성' 근거로, 칼빈주의는 기독교 세계에게 창조 명령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가운데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땅을 정복하기 위하여 땅에 대한 지식은 필수적이었고, 대양과 자연에 대한 지식, 그리고 자연의 속성과 법칙에 대한 지식은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학문을 권장하기를 꺼리는 백성이 새롭고 활기 넘치는 힘으로 자유의 느낌을 향유하도록 학문에 박차를 가했다.


갈등은 신앙과 학문의 갈등이 아니다. 그런 갈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문은 어느 정도 신앙에서 출발하지만, 반대로 학문에 이르지 못하는 신앙은 잘못된 잘못된

앙이거나 미신이다. 참되고 진정한 신앙은 그렇지 않다. 모든 학문은 신앙을 전제한다.

특별히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는 원리에서 신앙을 전제한다. 이는 학문적 탐구에 필요한 모든 공리가 우리의 자의식과 더불어 주어져 있음을 뜻한다.


반면에 모든 신앙은 발언하려는 충동을 내적으로 갖고 있다. 이를 위하여 신앙은 말과 용어와 표현을 필요로 하고, 말들은 사상의 구현이 되어야 한다. 사상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상황과 함께 상호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래서 신앙이 우리의 의식에 빛을 비추자마자 학문과 논증의 필요가 생겨난다.


따라서 갈등은 신앙과 학문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존재하는 우주가 정상적 상태인가 비정상적 상태인가 하는 주장 사이에 존재한다. 만일 우주가 정상이라면, 우주는 잠재력에서 이상(ideal)으로 가는 영원한 진화의 의미로 움직인다. 그러나 우주가 비정상이

라면, 과거에 란이 일어났고 목적의 최종적 달성을 보증할 있는 것은 중생적 능력뿐이다. 대립은 학문의 영역에서 사유하는 가지 지성을 전투 대형으로 나눈다.


아브라함 카이퍼 <칼빈주의 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