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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2009

알려는 열망

"Knowing is the responsible human struggle to rely on clues to focus on a coherent pattern and submit to its reality." Esther Meek

Meek은 Michael Polanyi를 연구한 철학자이다.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자동차 수리공을 유비하였다. 깔깔대며 웃는 유쾌한 웃음이 귀엽기까지 한 Meek은 Longing to Know라는 책에서 철학적 인식론을 일상의 언어로 생생하게 그려내는 값진 작업을 하였다.


“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Meek은 결론을 내리기 전에 철저하게 이 질문에 대해 탐구할 것을요 청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알 수 없다”는 명제 자체도 “하나님은 알 수 있다”라는 명제를 증명하는 것 만큼, 아니 보다 더 어려운 작업들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증명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성서가 증언하는 또 다른 난관인 “우리의 앎의 능력은 왜곡되고 상실되었다”는 진리 앞에 서야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어거스틴의 오랜 전통을 따라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망을 외면하고 포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존재적으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고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젖먹이의 옹알이로부터 프로이드의 왜곡된 Id까지 진리를 향한 열망은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아 프라이오리a priori이다.

도대체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어떤 의심할 수 없고 오류도 있을 수 없는 절대적 보편진리를 인식한다는 것인가? 대답은 “아니다.” 안다는 것은 의심이라는 행위와 오류의 실패를 포함하는 더 포괄적인 행위이다. 앎은 끝없는 인식의 과정이다. 결국 인간의 삶은 끝없는 알아감의 여정이며 알아가는 것은 인간됨의 행위이다.

세 상 속에 흩어진 실체의 편린들을 단서로 그리고 보여진 실체 너머에 있는 배후의 관계들을 통해 일관성cohesive있는 의미를 발견해 내는 것은 때로는 고통스럽고 무모하며, 어쩌면 너무나 어려워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정도이다. 그러나 “세상the world”은 여전히 실재하고, 세상을 인식하는 주체이며 동시에 중요한 인식의 대상이기도 한 “나body”도 실재하기에 포기할 수도 없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인식의 대상과 인식의 주체 사이의 관계를 정립해 주는 일종의 “지침/방향direction”이다 (나는 Meek의 direction보다 인식론적 방향성과 인식의 주체와의 관계성을 더 포괄적으로 설명해 주는 Geertz의 “Map” 개념을 선호한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지도의 범례keynote/legend가 되어 인식의 틀을 형성하고 기존의 틀을 계속해서 교정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삶의 복잡다단한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실체들은 정념화되어 경직되지 않고 계속 역동적으로 구성과 해체, 그리고 재구성을 거듭할 수 있도록 유연해야 한다. 진리는 단순히 감각과 인식과 언어 너머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소망과 겸손을 가지고 반응respond할 수 있다. "확실함certainty"도 절대진리를 명확히 "표현할 길"도 없기 때문에 겸손해야 할 것이며, 이러한 겸손함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인식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소망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겸손함과 소망은 세상에 대해 존재를 여는 태도이다 (피녹은 이를 인간의 "세계 개방성"이라고 불렀다. 다만 그는 이를 인간 존재의 자연스러운 본성으로 설명했지만 내가 보건대 이는 죄로 인해 왜곡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많은 중요한 본성들 중 으뜸이 되는 것이다. 자기만의 도그마에 갖혀 진리를 자기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양 법석을 부리는 경직되고 오만한 사람들속에 내가 속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증거는 충분하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세상을 향해 자신의 존재를 여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나는 세상과 연합하고 세상을 이해하며 세상에 섞여 세상을 풀어(해석해)나간다. 서양적 전통의 분석적 사고에 대한 강조는 인간의 의식에 대한 과도한 의존과 확신을전제로 하게 될 때 결국 실체로 부터의 메마른 단절만을 부추겨 결국 인간을 끝없는 고독의 무저갱에 처박아 놓게 된다. 실체와 인식의 주체는 분리될 수 없다.

인식의 행위는 인식자의 적극적이고 책임성 있는 순종과 헌신을 요청한다. 앎yadah이라는 것은 부부가 결혼을 하여 서로 알아가는 것과 같은 그런 종류의 앎이다. 완전히 다 알아 앎이 종료되는 순간은 없다. 다 만 계속해서 알아갈 뿐이다. 그리고 그 앎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필요하다. 용기와 희생과 책임이 뒤따른다. 말씀word를 통해, 세상world를 통해, 그리고 우리자신we-self를 통해 우리를 만나시는 하나님은 그래서 임마누엘이다. 나와 세상을 통해 그리고 말씀을 통해 계시는 하나님 밖에서 어떻게 내가 존재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어거스틴은 고백한다. "그러므로 나의 하나님이여, 당신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할 수가, 결단코 존재할 수가 없나이다. 아니면 이렇게도 말할 수도 있지 않겠나이까? 내가 당신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니이다…. 그러하나이다 주여… 당신은 말씀하셨나이다.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렘23:24). Confessio, I.ii.2


앎은 또한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하는 행위이다. 믿음과 이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지, 정, 의의 모든 인간됨이 총동원 되는 것이다. 보이는 것 너머의 복잡한 관계들을 성경과 성령이 지시하는 대로 민감하게 반추하여 의미를 발견하려는 적극적인 "앎의 행동"이 필요하다.

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진정한 앎은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앎은 존재와 존재의 충돌이기에 변화에 대한 용기를 요구한다. 앎은 알려지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되는 것이다. 그를 알기 전의 나와 그를 알고 난 후의 나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더할 나위 없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변화되는 것이다. 더 많이 알아갈 수록, 더 많이 변화되며, 더 많이 변화될 수록, 더 많이 알고 싶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거룩이 더해 갈 수록 죄에 대한 인식이 더 또렷하고 깊어지며 이는 더 깊은 거룩의 갈망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정말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는 지를 먼저 물을 일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만나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 않고 궁금하지 않은 담에야 "알고 싶을"리 만무하지 않은가? 알고 싶지 않은데 알 수는 없는 노릇이며, 사랑해야만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앎"을 "세상의 실체를 받아들이고 탐구하려는 인간의 책임있는 노력"으로 정의한 에스더 믹의 진술은 좀 메마른 감이 있어 아쉽다.

bk

12.30.2008

공동체를 위한 신학교육

I. 1983년 Edward Farley (professor of Theology at Vanderbilt Divinity School, Nashville, Tennessee) 가 내놓은 이론 (Theologia: The Fragmentation and Unity of Theological Education)은 교회와 신학 사이의 단절에 대한 신학 논쟁에 불을 던졌다. 신학자들은 신학을 '과학화'함으로 신학을 불신의 대상으로 만들었으며, 신학교는 과학적 신학에 적응하면서 또 다른 불신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신학과 신학 교육은 신학적 합일(theological unity)을 잃으면서 기능과 기술 중심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I-1 Farley의 주장을 긍정하고 환영한 신학자는 Charles M. Wood (Southern Methodist University)였다. Wood는 (Vision and Discernment, Scholarly, 1985) 실천적 지혜라는 주제의 의미를 역사적으로 추적하였다.
우드에 의하면 '성서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목회학'의 4중적 형식의 신학교육은 16세기 종교개혁에 뒤따른 목회자 양성의 필요성에 따라 고착화 되었다고 주장한다.

16세기 성서신학의 일차적 목표는 신학생이 성서를 통해 신앙을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신학적인 성서주석의 기술을 습득하게 하는 것이었다. 조직신학의 목표는 신학생들에게 성경의 교리적 내용을 합리적으로 이해시키며 장차 그 내용을 교육하고 논쟁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역사신학은 과거의 역사와 전통을 이해함으로 교회와 세계 역사 뒤에 흐르는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의 패턴을 보게 하고, 그러한 관점으로 현재의 상황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었다. 목회학은 신앙 공동체의 상황과 신학 과목을 결합하여 목회의 본질과 의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우드에 따르면 18세기 산업혁명에서 대두된 '과학주의 (scientism)' 는 현대 대학을 태동시켰으며 아울러 신학의 상황마저 바꾸어 놓았다. 성서신학은 성서비평으로, 조직신학은 철학적 논쟁으로, 역사신학은 종교사로, 그리고 목회학은 학문의 반열에서 추방되었다. 이때부터 신학은 신학적 통전성을 잃기 시작했으며, 실천성practicality 마저 잃은 채 교회와 신학이 갈라지게 되었다.

II. 한편, Joseph C. Hough (Union Theological Seminary)와 과정신학자 John B. Cobb (School of Theology Claremont) 는 우드가 Vision and Discernment를 편찬한 같은 해에 Christian Identity and Theological Education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Hough and Cobb은 Farley의 이론이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추상적이며 형식적'이라고 비판했다.

이 두 학자들은 오늘의 신학교와 교회 사이의 문제는 과학주의에 적응하려 했던 4중적 신학교육의 변질이 문제라기 보다는, 16세기의 목회자양성을 위한 4중적 신학교육 시스템과 변화된 현대의 목회자의 역할 사이의 거대한 괴리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호우와 콥에 의하면, 16-17세기의 신학교육은 '스승, 교사, 지식인'상의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한 커리큘럼 구조였다. 지식인으로서 목사는 고전어, 성경, 역사, 철학, 논리학등을 통달한 스승이었으며 목회의 권위는 잘 가르치는 것에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부흥운동과 종교의 무한경쟁으로 목회자는 지식인에서 설득력있는 웅변가로 바뀌었다. 부흥사와 설교가들이 급부성하였으며 여기서부터 신학 교육과 교회는 서서히 불협화음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19세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목회자는 회중을 모으고 교회 건물을 짓고 제도를 만들어내는 조직의 건설자(Builder)로 바뀌었으며, 20세기 중반에는 목회를 하면서 교회를 경영하는 지도자, 경영자, 치유자로 목회자상이 급변하였다.

그러기에 오늘의 신학 교육의 문제는 지식인 양성을 위해 만들어 놓은 Academic Norms학문적 규범과 변화된 목회자상이 요구하는 Professional Norms전문적/기능적/직업적 규범 사이의 공백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코우와 홉은 학문적 규범과 전문적 규범 사이를 연결하는 새 목회자상을 Reflective Practitioner or Practical Theologian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리고 6학기 새 커리큘럼 시안까지 제시하였다.

III. 호우는 1988년 이미 고인이 된 James F. Hopewell을 기념하는 책을 편집하면서 새로운 신학교육의 대안을 제시하였다. Hopewell은 Beyond Clericalism: The Congregation as a Focus for Theological Education에서 목회자 패러다임 clerical paradigm 은 성직자 후보인 신학생 개개인의 신앙적 순례와 직업적 윤각에 초점을 맞출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개인의 발달단계와 기능주의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 태생적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신학교육이 성직자 하나만을 양성하는 일에 집중하는 동안, 정작 성직자를 통해 구현되는 궁극적 목표인 구속적 공동체redemptive community의 형성은 외면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신학교육이 "성직자 양성"에만 집중하면, 목회는 성직자 개인에게 시작되고 교회공동체는 그 한 성직자에게 모든 것을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사실상 교회 공동체는 신학과 신학 교육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성직자만이 존재하였다. 여기에 실패의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Hopewell은 여기서 혁명적인 제안을 한다. 그는 신학교육을 "목회자" 패러다임에서 "회중congregation"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것을 촉구한다. 마치 법학 교육이 타협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정의 공동체'의 실현인 것 같이, 의학교육이 '질병 치료'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사회'를 건설하는 것과 같이 신학교육이 '목회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사회의 대안인 구속 공동체'를 세우는 일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속적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신학교육은 어떤 것이며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우선적으로 우리의 신앙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모든 신앙인은 하나님 앞에서 실천적이며 책임감있는 신앙을 형성하고 그 신앙이 구체적인 삶에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신앙이 자기 자신과 이웃, 그리고 사회와 세계앞에서 구체적이고 책임있게 실현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회자와 신학자들의 임무이다. 신학은 신학자의 독점물 이기 이전에 모든 신앙인의 성찰의 과정이며 더 나아가 신앙공동체를 통해서만 가능한 작업이다. 신학의 자궁은 신앙공동체이다. 신앙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을 신학화하고 신학을 실천할 수 있는 교회공동체를 만들도록 해야 한다. 신학교육은 선장만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큰 배를 공동적으로 움직여 갈 수 있는 공동체를 위한 훈련의 장이어야 한다.

12.15.2008

세계관


Albert M. Wolters
What is a Worldview?
Creation
Fall
Redmption
Discerning Structure and Direction

Worldview is "the comprehensive framework of one's basic beliefs about things."
The most significant feature of worldviews is their tendency toward pattern and coherence; even their inconsistencies tend to fall into clearly recognizable patterns.
In general, therefore, everyone has a worldview, however inarticulate he or she may be in expressing it. Having a worldview is simply part of being an adult human be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