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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7.2010

개념 없는 인식은 무지

"Percept without concept is blind" I. Kant

경험이란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이기 보다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이다. 의미를 만들거나 의미를 변경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의미를 만드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더 근원적으로 중요하다. 인식에 개념이 부과된다면 의미가 된다. 같은 인식에 다른 개념을 부여한다면 의미의 변경 즉 인식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인식하는 방식/틀/구조 자체가 변화된다면 의미구조meaning perspective,  즉 인식의 지평이 확장된 것이다. 이러한 인식 구조의 변화(changes of form)을 교육계에서는 변형학습 trans-from-ative learning 이라 부르고 심리학계에서는 구조-발달주의constructive developmentalism 이라고 한다. 

bk

11.10.2010

기억과 망각

내셔널 지오그래픽

글 : 조슈아 포어____사진 : 매기 스티버


무엇이든 줄줄 외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의 뇌는 어떻게 기억하고 망각하는가?

사무원으로 일하는 41세 여성이 있다. 의학 연구 자료에서 'AJ'로 언급되는 이 여성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 출신으로 11세 이후 삶의 하루하루를 거의 빠짐없이 기억한다. 한편 실험실 연구원으로 일하다 은퇴한 85세 남성인 'EP'는 방금 전 일만 기억한다. AJ의 기억력을 세계 최고로, EP의 기억력을 최악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내게 과거는 상영 중인 영화 같아요. 멈출 수도, 통제할 수도 없어요." AJ는 말한다. 그녀는 1986년 8월 3일 일요일 오후 12시 34분, 짝사랑하던 청년에게 전화가 왔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1988년 12월 12일 방영된 TV 쇼 '머피 브라운'의 내용도 기억한다. 1992년 3월 28일 베벌리힐스호텔에서 아버지와 점심을 먹었던 것도 기억한다.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사건들, 장보러 간 일, 날씨, 그날그날 기분도 기억한다. 매일매일이 훤하다. 어떤 걸 물어봐도 거침없이 대답한다.
손으로 꼽을 정도긴 하지만 비범한 기억력의 소유자들은 종종 있었다. 영화 '레인맨'의 실제 모델인 천재 킴 픽(56)은 1만 2000권에 달하는 책을 외운다고 한다(한 쪽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은 8~10초). 러시아 신경심리학자 알렉산더 루리아가 30년 동안 연구했던 러시아 저널리스트 'S'는 엄청나게 긴 단어나 숫자, 의미 없는 음절들을 한 번 들으면 몇 년이 지난 뒤에도 기억해냈다. 하지만 AJ는 특이하다. 그녀의 비상한 기억력은 사실이나 숫자가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외우고 있다. 이처럼 고갈되지 않는 기억력으로 자신이 겪은 일을 세세한 것까지 기억하는 일은 유례가 없는 데다 학계에서 규명된 것도 거의 없다. AJ를 7년 동안 연구해온 캘리포니아대학교 어바인캠퍼스의 신경과학자 제임스 맥거프, 엘리자베스 파커, 래리 케이힐은 AJ의 상태를 설명하는 새로운 의학 용어를 만들어야 했다. 바로 '과잉기억 증후군'이다.

 키 180cm인 EP는 단정하게 가르마 탄 백발에 귀가 유난히 길다. 다정다감하고 정중하며 잘 웃는다. 첫인상은 마음씨 좋은 옆집 할아버지 같다. 그러나 15년 전, 단순포진 바이러스가 벌레가 사과를 갉아먹듯 뇌 중앙까지 파먹어 들어갔다. 바이러스가 활동을 마치자 양쪽 내측두엽에 호두알만 한 구멍이 생겼고 EP의 기억도 대부분 사라졌다. 공교롭게도 바이러스는 결정적인 부위를 정확히 공격했다. 뇌 양쪽에 있는 내측두엽엔 지각을 장기기억으로 변환시키는 '해마'라는 고부라진 기관과 주변 영역이 자리하고 있다. 사실 기억이 저장되는 곳은 해마가 아니다. 기억은 쭈글쭈글한 뇌 외피층인 신피질에 저장된다. 하지만 해마는 기억을 붙잡아놓는 역할을 담당하는 뇌조직 중 하나다. 해마가 손상된 EP의 뇌는 마치 헤드가 고장난 캠코더와 비슷하다. 보기는 하되 기록할 수 없는 것이다.

EP는 순행성과 역행성, 두 종류 기억상실증을 동시에 앓고 있다. 순행성 기억상실증은 새로 습득한 정보를 기억으로 전환시키지 못하며 역행성 기억상실증은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따라서 EP는 새로운 기억을 만들 수 없을 뿐 아니라 1960년 이후의 과거 역시 기억하지 못한다. EP는 어린시절과 상선선원 시절, 제2차 세계대전은 모두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서 휘발유 가격은 아직도 리터당 25센트며 달 착륙은 일어난 적이 없다.

AJ와 EP는 기억력의 양 극단을 보여준다. 또한 두 사람의 사례는 기억력이 그 사람의 정체성까지 좌우할 수 있음을 어떤 뇌 영상보다 더 생생하게 보여준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양 극단 사이에서 왔다갔다한다. 유난히 기억이 잘 날 때는 내가 AJ처럼 천재가 아닐까 착각하거나, 혹시 EP처럼 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본 경험이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척추 꼭대기에 달랑 얹혀 있는 약 1.3kg의 주름 투성이 살덩이는 어린시절의 사소한 일도 평생 저장하는가 하면 아주 중요한 전화번호를 2분도 안 돼 잊어버리기도 한다. 기억이란 이처럼 묘한 것이다.
기억의 정체는 뭘까? 현재 신경과학자들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정의는 뉴런 사이의 일정한 연결 패턴이 저장된 것이 기억이다. 뇌에는 약 1000억 개의 뉴런이 있고, 각각의 뉴런은 5000~1만 개의 시냅스를 형성할 수 있다. 따라서 보통 성인의 뇌에는 총 500~1000조의 시냅스가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미국 의회도서관 장서에 있는 정보를 다 모아도 약 32조 바이트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양이다. 우리가 어떤 기분을 떠올리거나 어떤 걸 생각할 때마다 이 방대한 네트워크의 연결 패턴에 변화가 일어난다. 시냅스는 더 공고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하며 새로 형성되기도 한다. 우리 몸의 조직은 변하고 있다. 항상, 매 순간, 심지어 잠든 사이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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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 그 때가 지금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1.7.12) 어거스틴의 고백록

기억이 나지 않으면, 잊혀지면 현재의 나와는 상관 없는 것이 되는 것일까? 지나간 과거들이 나는 빨리 잊혀진다. 좋은 기억들 뿐 아니라 나쁜 기억들도, 그리고 내가 애쓰고 힘써 배웠던 것들도, 심지어는 잊지 말자고 다짐했던 것들조차 다 망각의 방으로 자취를 감춰 버린다. 기억할 수 없다면 현재에 통합할 자료를 잊어 버린다. 기억이 없다면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면 적용할 수 없으며, 적용이 안되면 분석도 평가도 그리고 새로운 창조도 가능하지 않다.

정말 무서운 것은 기억이 정체성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롱텀메모리에 남겨진 것들만이 나의 자아를 형성하고 내 가치관을 세운다.그런데 나는 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 숫자를 기억하는 것 뿐 아니라 있었던 일 들과 그 의미까지 쉽게 잊는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했갈리나 보다.

한편, 왜곡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은 기억을 잘 못하는 것 보다 더욱 위험하다. 메멘토의 레너드는 10분 이상 기억을 지속하지 못하는 휘발성 메모리를 가졌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문제는 짧은 기억력이 아니라 왜곡된 기억이었다.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은 두뇌학에서는 무엇이라고 할까? 기억력과 뇌의 기능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어떻게 기억력을 향상시킬 수 있을까? 기억력은 향상되는 것일까? 기억과 신앙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기억과 인간의 성숙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데이빗 수사의 책을 좀 살펴 보아야 겠다.
bk

10.04.2010

주체적 사고

소크라테스에 있어서 "아이러니irony," 즉 의심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표현 형식으로서의 풍자가 만들어낸 결정적인 성과가 있다면, 그것은 개인이 자신의 신념을 성찰없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natural attitude를 우회적으로 해체시켰다는 것이다. (풍자irony를 통해) 개인은 객관적 지식의 확실성을 상실하는 반면에 자기 자신(또는 주관적 자기해석)을 발견하게 된다. 이때야 비로소 개인은 자신이 지식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닿게 된다. 키에르케고르는 지식이 '무엇'인가라고 묻기 보다, 개인이 어떻게 지식과 자기 자신을 연결시키면서 자기 주관을 유지하는 가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키에르케고르가 보기에, 소크라테스는 인식하는 사람과 그가 인식하는 내용을 날카롭게 분리시켜버렸다. 어떻게 인식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이 인식하는 내용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Ronald J. Manheimer, Kierkegaard as Educator,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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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2010

인간됨의 결정적 조건

"A defining condition of being human is our urgent need to understand and order the meaning of our experience, to integrate it with what we know to avoid the threat of chaos." Jack Mezirow (2000)

인간됨의 결정적 조건중 하나는 우리의 경험을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과 연결해 이해하며 조직화함으로 혼란과 혼동이 주는 위협을 피하려는 절박한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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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며, 의미를 구성하고, 의미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이다. 의미는 인간에게 생명과 같다. 무의미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투쟁은 죽음의 힘 보다 더 강력하다. 인생의 의미를 구성하지 못할 때 조차, 인간은 죽음으로써 삶의 무의미를 종식시키려 할 만큼 인간에게 있어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며 의미를 구성/재구성하는 행위는 근원적 본능이다. 그렇다면 의미란 무슨 의미인가? 의미를 추구한다는 말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어떻게 의미를 추구하는가? 무슨 의미를 추구하는가? 의미는 발견하는 것인가 아니면 형성되는 것인가? 의미는 어떻게 변형/변화 되는가?

매저로는  구조주의적 인식론을 바탕으로이러한 질문들을 탐구해 나간다. 비판적 사고를 통한 인식구조의 변혁과 확장은 구조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개념이며 이러한 인식구조의 변형을 성인교육의 영역에서 설명하고 통합한 공로로 그는 변형적 학습이론transformative learning theory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그러나 매저로에게 있어 왜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가? 어떤 의미가 의미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의미의 근거는 무엇인가? 에 대한 대답은 대체로 무시되고 있다. 그것은 그가 인간의 의미구성이라는 현상을 이해하는데 있어 구조주의 인식론에 과도하게 의존하면서도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존재론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이 사회과학적 접근이 보변적으로 기반하는 암묵적 가정의 오류이다. 즉 관찰자의 실존적 한계를 간과하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는 스스로 알 수 없으며 나의 나됨을 인식하려면 절대 타자의 거울앞에 서야 한다는 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바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첫머리를 이렇게 기록한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지혜, 즉 참되고 온전한 지혜는 거의 모두가 두 가지 부분으로 구성된다.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다. 이 두 지식은 여러 끊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그 중 어떤 것이 먼저오며, 어떤 것이 그 결과로 파생되는 것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Institute I.i.1).

그렇다면, 인간됨의 결정적인 조건은 "혼란과 혼동을 피하려는 절박한 필요때문에 의미를 구성하려는 습성"이기 보다는, 그러한 갈망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절대의미, 의미의 절대기준, 의미를 추구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신 인간과 우주의 존재적 의미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깨달아 아는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과 내 자신을 알아가기를 통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향방없는 의미추구가 주는 허무와 절망의 긴 터널 통과한 후 증언한 어거스틴의 고백은 이런 점에서 울림이 크다: "당신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찬양하기를 즐거워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당신을 향하여 살도록 당신이 우리를 창조하신 까닭이니 우리 심령은 당신 안에서 쉼을 얻을 때가지 평안할 수 없습니다." (Confessio 1.1.1).

bk

1.15.2010

신앙

첫째, 신앙은 인간 존재의 확실성을 준다. 인간이 가지는 존재적 절망은 오직 하나님께서 수여하시는 신앙을 통해서만 극복된다. 따라서 신앙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기반이다. 이런 점에서 신앙은 단순히 의미 구성을 통한 인식론적 확장으로 제한되지 않으며 보다 포괄적이다.

둘째, 신앙은 미래지향적이다. 신앙은 현재의 갈등을 치유하고 회복하여 미래를 현실화시키는 힘이다. 따라서 신앙은 현재속에 미래를 배태하며 지향한다. 이런 점에서 신앙은 현재의 상태를 초월한다.

셋째, 신앙은 역동적이며 초월적인 능력이다. 신앙은 실존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노력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절망을 뚫고 침투하시는 창조주의 초월성에 참여하는 행위이다.

넷째, 신앙은 공동체를 통해 경험된다. 신앙의 본질은 창조주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며 이는 증거와 고백을 필요로 한다. 개인적 인식의 확장은 신앙의 결과일 수 있으나 신앙 그 자체는 아니다.

다섯째, 신앙은 구체적이다. 삶의 구체적인 사건들속에서 신앙은 형성되고 변형된다. 신앙은 인지구조의 확장에 제한될 수 없으며 삶의 행위들이 발생하는 상황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여섯째, 신앙은 구속적이다. 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샬롬회복이다. 신앙은 성취되거나 개발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초월적이며 구속적 은혜로 계속해서 변형되어가는과정이다.

파울러의 신앙이해에 대한 로더의 반박 중, The Logic of the Spirit, 257

9.13.2009

신학과 과학이 만나다

많은 인문과학들과는 달리 신학은 주로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있는가" 하는 것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다. 신학적으로 건전하다고 할 수 있는 대상들이 "어떻게 믿게 되는가"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믿는가"에 관한 질문들에 대한 대부분의 답변들은 교묘하게 "무엇"에 관한 답변으로 바뀌어지든지, 성령에 관한 대답으로 어느새 둔갑해 버리고 마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성령에 관한 문제야말로 기독교의 중심적인 여러 교리들 가운데서 가장 잘못 정의되고있고, 가장 신비에 싸인 채로 모호하게 설명되고 있으며, 혼돈상태에 빠져 있는 교리 중의 하나이다.

인문과학의 방법론은 특수화시키고, 구체화시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인문과학은 신비한 체험들이 가지는 함축적인 의미들을 과정적인 관점에서 관찰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인문과학은 그러한 관찰이 가능하게 된 궁극적인 근거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거나 "잊고있다." 인문과학은 그러한 근본적인 실체에 대한 체험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반면, 신학적인 방법론은 이와 같은 체험의 중요성, 이러한 체험을 가능하게 한 궁극적인 근거 및 이러한 체험의 내용에 특별히 초점을 맞추게 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신학의 방법론에서는 구체성이라든지 특수성이 무시된다. 다시 말해서 신학은 그러한 변화의 체험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성격을 해석하는 데 필요한 충분한 근거를 마련해 주지 못하며, 그 체험들의 각 과정에서 찾아 볼 수 있는 특수한 성격들을 제대로 분석해 내지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도 못하고 있다. 우리들이 그러한 체험을 통해서 신학에서 주장하고 있는 궁극적인 원인들에 어떻게 참여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신학은 설명해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James E. Loder, The Transforming Moment,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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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교부 터툴리안은 "아덴이 예루살렘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Quid ergo Athenis et Hierosolymis)"라고 도전하면서 신앙과 이성에 있어 신앙의 우위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를 구원의 전제로 보는 개혁주의적 입장에서는 예루살렘과 아덴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해하는 양 날개와 같다. 일반은총와 특별은총의 우위를 논쟁하려면 언제나 승리는 극단적 칼빈주의자의 것으로 남겨질 테지만, 궁극적인 진리는 하나님만이 아실 일이라는 칼빈의 뻔한 권고는 여전히 유효하며, 따라서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포함한 모든 과학적 접근을 구속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일은 더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특정한 전통, 경험, 문화, 그리고 시대정신 속에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임을 겸손히 수용한다면 맹목적 신앙의 파시즘과 이미 파산해 버린 이성주의의 허상을 뛰어 넘어 신학과 과학의 진지한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실천들은 신학과 과학의 진지한 상호성찰 위에 세워 져야 하며 이는 모든 공동체원의 주체적 참여를 요청한다.

로더는 T. Parsons의 복합적 사회시스템을 기반으로 개인의 정신, 문화, 조직, 그리고 사회가 각각 어떻게 상호관련을 맺는지 분석하려 했다. 특히 성령의 역동적 역사가 이 네 시스템 속에서 어떻게 일어나며 또한 이 네 시스템 속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탐구하려 했다.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하는가? 인간은 어떻게 변화되는가?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 자연적 발달단계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인간의 종교경험과 뇌세포의 화학작용은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가?

피상적 경험의 주관성에 함몰된 설교와 가르침이 신학적 타당성과 함께 실제 삶에서의 적합성을 확보하려면 자의적 해석으로 가득찬 자기신학의 한계를 정직하게 고백하고 보편인간에게 부어주신 일반은총의 도구들을 긍정하여 겸손과 부지런함으로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고 창조세계에 대해 진지하게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bk

7.08.2009

혁명적 복음과 알깨기

“새는 알을 까고 나온다. 알은 한 세계다. 태어나려하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은 아프락서스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보낸 편지 중
헤르만헤세, 데미안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자신을 둘러 싼 낡은 현실의 파괴와 맞닿아 있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구절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불을 던지고 평화를 파괴하는 검을 주러 왔다고 가르치셨다. 또한 종교와 정치, 교육과 경제의 실질적 중심이었고 한 민족의 아이덴티티였던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주장하셨고 그로 인해 신성모독의 죄목으로 정치적 타살을 당하셨다. 예수의 복음은 그 본질상 '전복적'subversive이고 해체적이며 혁명적이다. 이 말은 폭력적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개인과 집단의 죄성으로 인한 모든 불의와 죄악에 대한 정면도전이다. 새로운 생명은 안전하게 무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참생명 또는 온전한 삶은 죄와 사망의 세력에 대항하는 혁명과 전쟁의 댓가를 지불하고 획득하는 것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의 옮김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흘림을 비용으로 치뤄야 할 만큼 치열하고 맹렬한 세상과의 전쟁을 치루고 난 후 얻어지는 것이다.

복음의 선포는 이렇듯 기존의 질서와 갈등관계에 있을 수 밖에 없다. 예수의 삼중 직 중, 선지자로서의 예수는 사회와 도통 어울릴 수가 없다. 기득권자들과 좋은 관계일 수 없으며, 지도자들과 화평할 수가 없고, 지식인들과 논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그의 몸으로서 교회에게 위임된 것이다. 왕과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실행하는 것 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선지자만으로도 안된다. 모두가 다 필요하다. 그러니 모든 교회가 다 필요할 것이 아닌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가는 서로 견제하며 대화하고 협력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자신을 둘러싼 자신의 세계를 인식하고 확장하려는 인간 영혼의 투쟁을 심리적으로는 "자아 발달"로 교육이론으로는 "변형적 학습"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발달과 변형이론들의 핵심은 인간의 "인식 구조" 또는 "인식의 틀"이 신체, 나이, 성별, 사회적 환경, 문화에 따라 어떻게, 어떤 과정에 따라, 어떤 촉매적 요건들을 통해 발달 또는 변형되는 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구조변형의 이해들은 인식구조의 발달과 변화의 설계자이며 원인자이고 협력자인 동시에 완성자이신 창조의 영을 간과한다는 점에서 자기 인식의 한계에 갖히는 심각한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반면 교회에서의 설교와 가르침은 보편은혜에 기반한 창조원리의 구조적 측면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깊이있는 이해를 추구하려 노력하지 않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사회과학을 통해 발견된 인간 발달과 인식구조 변형의 원리들이 근거가 빈약한 오류이며 교회의 신학과 신앙적 실천에 마치 원수나 되는 것 처럼 떠벌여 유치한 이분법적 사고에 근거한 싸움을 부추키기도 한다. 이로서 자기 인식의 한계안에 갖혀 있는 자신의 가련함을 보지 못한 채, 진리를 자기 호주머니 속에 넣고 있는 양 호들갑을 떠는 어리석음과 오만함을 보이기까지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교만함으로 스스로를 갱신할 줄 아는 능력을 상실한 교회는 세상의 권위주의적이고, 성취지향적(또는 경쟁적)이며, 가변적이고 폭압적인 세상문화의 사회화 과정에 저항하고 극복하여 그리스도의 문화를 창출해 냄으로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급속도로 세속화되어 스스로 경쟁하여 분쟁하고 결국 분열하여 자멸하게 된다는 점이다.

전통과 인습, 도그마와 자기 경험의 한계에 갖혀있는 사람들을 향해 "새술은 새부대"에 담을 수 밖에 없다고 일갈하신 예수의 통렬한 지적은 금식 논쟁과 같은 지엽적인 실천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똑같은 성정을 가진 나사렛의 젊은 목수를 창조주의 아들로 인정해야 하는 믿음은 기존의 인식구조의 틀을 무너뜨리는 새로운 인식구조로의 전환paradigm shift이 없이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 바로 이 시작점에서 부터 죽어야 살고, 나눠주어야 풍성해지며, 낮아져야 높아지고, 포기해야 얻는 다는 불가해한 역설이 시대와 상황과 문화를 초월한 삶의 근원적 원리로 존중되기 시작한다.

그러니 이렇듯 자기의 존재의 집인 "자기 세계"를 부수는 일이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가능하단 말인가!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자기한계의 인식만이 우리를 죽은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창조의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로 인도한다. 또한 이를 삶으로 증명해 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과 우리 안에서 그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믿음과 힘 주심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하도록 한다. 나의 한 부분인 세계를 파괴하는 일은 그래서 하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다.

bk

5.23.2009

앎은 사건이다

"Knowing-generally and convictionally-is first, foremost, and fundamentally an event."
James E. Loder, Transforming Moment, p.33

앎은 사건이다. 존재와 존재가 만나는 존재가 변화되는 사건이다.

5.11.2009

진리는 사랑이다


"참 사랑은 리얼리즘realism이다...인간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한계성을 두려워하지 말고 똑바르게 정직하게 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만 된다...참된 진리를 찾아가는 자가 노력해야 될 것은 자기중심적인 거짓 자기를 부수고 진정한 참자기를 발견해 내는 일이다...진실은 항상 사랑과 함께 있어야 하고 사랑은 항상 진실과 함께 있어야 한다."

강원용 (1917-2006), 중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19.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1b-32) 이 말씀은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진리를 아는 것"은 어차피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진리를 알 수 있는 능력과 의도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성은 참된 진리를 거부하는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 진리를 혐오한다. 참된 진리는 인간의 부패와 죄악을 밝히 드러 내기 때문이다. 성경은 "변하지 않는 영원하며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절대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며 성령을 통해 알려지는 하나님" 이심을 증거한다. 이 전제를 수용하려면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이 믿음을 거부하고 진리의 타자성을 무시하며 진리의 인격성을 멸시한다. 그래서 근대적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절대화 하여 유한하며 제한적인 이성의 두레박으로 망망한 진리의 바다를 재려는 우매함에 빠져 버렸다. 그래서 이러한 과학적 인간들은 진리를 자신의 사고와 이해의 한계라는 철장에 가두어 놓음으로서 고독과 소외, 허무라는 진창속에 스스로를 투신하고 말았다.

또 다른 극단의 부류들은 과학적 인간들의 이성주의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고 신앙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과학제일주의의 맹주인 절대이성을 타도하기 위해 신앙제일주의자들이 선택한 주인은 바로 도그마였다. 그러나 건강한 이성의 사용과 자기반성을 거부한 맹목적이며 자기 중심적인 신앙주의는 절대이성의 왕좌위에 도그마적 신앙을 올려 놓아 경배의 대상을 바꾸었을 뿐, 절대 진리의 무한성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따듯한 인격으로서의 진리를 삶속에 실천하기를 거부하며 자신의 한계와 유한성을 철저히 부인한다는 점에서는 그토록 적대시했던 과학주의와 한 패였다.

참된 "진리를 앎"은 절대타자, 절대진리, 절대자의 존재를 긍정하고 믿음으로 수용하며 이성적 이해의 한계를 알면서도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하려는 신앙을 요구한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를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으로 불렀다. 신앙은 참된 진리에 자신의 이성과 경험과 의지를 내려놓는 겸손한 삶의 태도이며 세상의 모든 것을 진실로 사랑하는 용기있는 행동이다. 그래서 모든 진리는 이러한 삶을 명징하게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에게 귀착된다. 예수는 진리이고 예수는 사랑이다. 그래서 진리는 사랑이며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진리를 아는 유일한 길이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하며 사랑은 리얼리즘이라는 강원용 목사님의 말씀은 이런 점에서 옳다.

bk

4.14.2009

"그 신성한 덮개" -종교 사회학적 이론의 요소들

Peter Berger (1929-)
피터 버거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미국 사회학자이며 루터파 신학자이다. 토마스 루크만Thomas Luckmann과 공저한 "실체의 사회적 구성" The Social Construction of Reality: A Treatise in the Sociology of Knowledge (New York, 1966) 이라는 책으로 종교사회학 분야에 의미있는 공헌을 하였다.

3.27.2009

문화의 정의들

Culture is "the collective programming of the mind that distinguishes the members of one group or category of people from others." Hofstede, Geert. Culture and Organization. 2005. p.5


호프스테드는 문화를 "정신의 프로그램" 또는 "정신의 소프트웨어"라고 정의한다. 인간의 본성과 개성의 사이에서 문화는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습득되는 것이며 한 개인을 넘어 특정 집단이 공유하는 것이다.

3.18.2009

알려는 열망

"Knowing is the responsible human struggle to rely on clues to focus on a coherent pattern and submit to its reality." Esther Meek

Meek은 Michael Polanyi를 연구한 철학자이다.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자동차 수리공을 유비하였다. 깔깔대며 웃는 유쾌한 웃음이 귀엽기까지 한 Meek은 Longing to Know라는 책에서 철학적 인식론을 일상의 언어로 생생하게 그려내는 값진 작업을 하였다.


“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Meek은 결론을 내리기 전에 철저하게 이 질문에 대해 탐구할 것을요 청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알 수 없다”는 명제 자체도 “하나님은 알 수 있다”라는 명제를 증명하는 것 만큼, 아니 보다 더 어려운 작업들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증명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성서가 증언하는 또 다른 난관인 “우리의 앎의 능력은 왜곡되고 상실되었다”는 진리 앞에 서야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어거스틴의 오랜 전통을 따라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망을 외면하고 포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존재적으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고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젖먹이의 옹알이로부터 프로이드의 왜곡된 Id까지 진리를 향한 열망은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아 프라이오리a priori이다.

도대체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어떤 의심할 수 없고 오류도 있을 수 없는 절대적 보편진리를 인식한다는 것인가? 대답은 “아니다.” 안다는 것은 의심이라는 행위와 오류의 실패를 포함하는 더 포괄적인 행위이다. 앎은 끝없는 인식의 과정이다. 결국 인간의 삶은 끝없는 알아감의 여정이며 알아가는 것은 인간됨의 행위이다.

세 상 속에 흩어진 실체의 편린들을 단서로 그리고 보여진 실체 너머에 있는 배후의 관계들을 통해 일관성cohesive있는 의미를 발견해 내는 것은 때로는 고통스럽고 무모하며, 어쩌면 너무나 어려워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정도이다. 그러나 “세상the world”은 여전히 실재하고, 세상을 인식하는 주체이며 동시에 중요한 인식의 대상이기도 한 “나body”도 실재하기에 포기할 수도 없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인식의 대상과 인식의 주체 사이의 관계를 정립해 주는 일종의 “지침/방향direction”이다 (나는 Meek의 direction보다 인식론적 방향성과 인식의 주체와의 관계성을 더 포괄적으로 설명해 주는 Geertz의 “Map” 개념을 선호한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지도의 범례keynote/legend가 되어 인식의 틀을 형성하고 기존의 틀을 계속해서 교정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삶의 복잡다단한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실체들은 정념화되어 경직되지 않고 계속 역동적으로 구성과 해체, 그리고 재구성을 거듭할 수 있도록 유연해야 한다. 진리는 단순히 감각과 인식과 언어 너머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소망과 겸손을 가지고 반응respond할 수 있다. "확실함certainty"도 절대진리를 명확히 "표현할 길"도 없기 때문에 겸손해야 할 것이며, 이러한 겸손함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인식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소망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겸손함과 소망은 세상에 대해 존재를 여는 태도이다 (피녹은 이를 인간의 "세계 개방성"이라고 불렀다. 다만 그는 이를 인간 존재의 자연스러운 본성으로 설명했지만 내가 보건대 이는 죄로 인해 왜곡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많은 중요한 본성들 중 으뜸이 되는 것이다. 자기만의 도그마에 갖혀 진리를 자기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양 법석을 부리는 경직되고 오만한 사람들속에 내가 속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증거는 충분하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세상을 향해 자신의 존재를 여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나는 세상과 연합하고 세상을 이해하며 세상에 섞여 세상을 풀어(해석해)나간다. 서양적 전통의 분석적 사고에 대한 강조는 인간의 의식에 대한 과도한 의존과 확신을전제로 하게 될 때 결국 실체로 부터의 메마른 단절만을 부추겨 결국 인간을 끝없는 고독의 무저갱에 처박아 놓게 된다. 실체와 인식의 주체는 분리될 수 없다.

인식의 행위는 인식자의 적극적이고 책임성 있는 순종과 헌신을 요청한다. 앎yadah이라는 것은 부부가 결혼을 하여 서로 알아가는 것과 같은 그런 종류의 앎이다. 완전히 다 알아 앎이 종료되는 순간은 없다. 다 만 계속해서 알아갈 뿐이다. 그리고 그 앎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필요하다. 용기와 희생과 책임이 뒤따른다. 말씀word를 통해, 세상world를 통해, 그리고 우리자신we-self를 통해 우리를 만나시는 하나님은 그래서 임마누엘이다. 나와 세상을 통해 그리고 말씀을 통해 계시는 하나님 밖에서 어떻게 내가 존재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어거스틴은 고백한다. "그러므로 나의 하나님이여, 당신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할 수가, 결단코 존재할 수가 없나이다. 아니면 이렇게도 말할 수도 있지 않겠나이까? 내가 당신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니이다…. 그러하나이다 주여… 당신은 말씀하셨나이다.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렘23:24). Confessio, I.ii.2


앎은 또한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하는 행위이다. 믿음과 이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지, 정, 의의 모든 인간됨이 총동원 되는 것이다. 보이는 것 너머의 복잡한 관계들을 성경과 성령이 지시하는 대로 민감하게 반추하여 의미를 발견하려는 적극적인 "앎의 행동"이 필요하다.

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진정한 앎은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앎은 존재와 존재의 충돌이기에 변화에 대한 용기를 요구한다. 앎은 알려지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되는 것이다. 그를 알기 전의 나와 그를 알고 난 후의 나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더할 나위 없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변화되는 것이다. 더 많이 알아갈 수록, 더 많이 변화되며, 더 많이 변화될 수록, 더 많이 알고 싶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거룩이 더해 갈 수록 죄에 대한 인식이 더 또렷하고 깊어지며 이는 더 깊은 거룩의 갈망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정말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는 지를 먼저 물을 일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만나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 않고 궁금하지 않은 담에야 "알고 싶을"리 만무하지 않은가? 알고 싶지 않은데 알 수는 없는 노릇이며, 사랑해야만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앎"을 "세상의 실체를 받아들이고 탐구하려는 인간의 책임있는 노력"으로 정의한 에스더 믹의 진술은 좀 메마른 감이 있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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