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노인팅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기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기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 상한자를 고치며 나를 보내사 눈먼 자를 눈뜨게 하며
나를 보내사 갇힌 자를 놓이게 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님의 성령 내게 임하여 하늘의 영광 나타내게 하소서
주님의 성령 내게 임하여 하늘의 영광 나타내게 하소서
눅 4:18-19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약속의 말씀...
오 주님
주님의 영광을 위해 작은 불꽃으로 타오르게 하소서
주님의 성령으로 내게 기름 부으소서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며
상한자를 고치며
눈먼 자를 눈뜨게 하며
갇힌자를 놓이게 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소서
마지막 땀,
마지막 눈물,
마지막 피까지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쏟아 붇게 하소서
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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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9.2011
10.10.2009
자기 중심성에 교정을 요구하는 하나님 나라 (2/6)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염원하는 두 번 째 청원은 예수의 가르침의 요체인 산상수훈과 주기도문에서도 그 고갱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예수가 염원한 "당신의 나라(hei basileia sou)가 현실화 됨"이 내포하는 존재적 긴장(tensity)은 우리의 기도속에서 거의 무시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기 예수 공동체에게 있어 "나라"의 문제는 추상적 정치토론이나 스트레스를 푸는 잡담거리의 단골메뉴가 아니었다. 로마 제국의 식민지 통치나 이에 저항하는 유대민족주의자들에게 있어 "예수 공동체"는 공히 '공공의 적'이었기에 예수공동체에게 있어 "나라"의 문제는 하루의 안녕한 삶과 직결된 긴급하며 절박한 문제였다.
예수의 생애를 전후로 로마제국은 치밀한 법률과 강력한 군사력, 그리고 세련된 문화를 바탕으로 여러 민족들을 정복하고 착취하여 로마적 번영과 평화(pax Romanna)를 추구하였다. 반면 유대민족은 유대교의 선민사상과 메시아주의를 근거로 창조주 야훼의 통치가 유대민족의 정치적 해방과 흩어진 디아스포라가 집결됨을 통해 실현될 것을 신앙하고, 제국의 이데올로기와 황제숭배를 기반한 무력적 식민지 통치에 대항하여 격렬하게 투쟁하였다. 이 두 나라의 힘의 충돌 사이에 십자가가 서 있다. 이스라엘의 해방을 염원하던 유대 민족주의자들은 예수가 보여준 놀라운 기적과 이사를 팍스 로마나(pax Romanna)를 전복시키고 이스라엘을 살롬의 중심(Jerusalem)으로 회복하는 메시아적 힘으로 오해하였다. 반면 식민지의 치안을 제국 번영의 기초로 보았던 로마군인들은 스스로 왕임을 주장하는 예수와 골치아픈 유대지도자들 사이의 분쟁이 정치적 소요로 번지지 않도록 사전에 제압하려 하였다. 따라서 로마군인들은 예수에게 시저의 황금 면류관 대신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찌어다"라며 모욕하고 폭행하였고, 유대인들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스스로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소하였다. 자력으로 번영과 구원을 획득하려는 아담적 실존은 자기를 비움으로 생명을 얻는 그리스도의 실존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터였다. 십자가와 부활로 시위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당시 제자들의 "나라"의 이해, 즉 로마적 힘과 번영을 추구함과 이스라엘의 신적 존재에 힘입은 자기 실현, 에 근본적 교정을 요구한 것이었다.
로마적 힘의 추구와 유다적 메시아주의 공통적 뿌리가 스스로 주인되려 하는 "자기 중심성"이 라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청원은 이러한 "자기 중심성"의 뿌리를 찍어내는 강력한 도끼이다. 자기 스스로의 판단, 경험, 자원, 지혜, 힘, 인맥을 의존하여 자기의 왕국을 건설하고 안녕을 보장받으며 번영을 추구하려는 자기 중심성은 예수 공동체 안에서도 그 맹위를 떨쳐 부활한 예수에게 조차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를 질문하게 하였다. 그러나 스스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유혹의 정체를 직시하고 거부하며 하나님을 힘입어 그분의 언명대로 살아가기를 선포한 예수의 사람들은 지금 이 세상에 만연한 개인적, 사회적, 민족적, 국가세계적 문제의 근원이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려하는 죄성"임을 비분강개하고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신 둘 째 아담의 못다한 절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를 영혼에 담아 "나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가 내 삶의 구석 구석에 임하시기를 간절히 염원해야 한다. 이 염원을 예수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요약한다.
결국 하나님 나라의 현실화를 위한 청원은 실천적으로 자기 부정을 위한 기도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하지 않는 자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요원하다면, 자신의 자원과 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적대적이고 위협적이다. 스스로 절망하여 자기를 부인할 수 밖에 없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열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에 대한 절망은 하나님 신앙의 자궁이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절망은 자연스럽게 되지 않는다. 인간의 죄성은 스스로 살기 위해 자신과 이웃의 생명을 해할 만큼 뿌리가 깊고 강력하다. 따라서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음 조차 스스로 할 수 없다는 실존앞에 자아가 해체되는 것 (이러한 자기 부정을 자연인중 누가 감히 원한단 말인가?)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나라이 임하옵시며"는 자기 부정을 위해 초월적 은혜를 요청하는 기도로 발전한다.
이 기도를 바탕으로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통치속에 자기 한계를 초월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음습한 지하동굴에 숨어서도 로마의 제국주의와 배타적 유대주의를 뛰어넘어 노예와 주인이, 귀족과 하층민이, 부자와 거지가, 고매한 학자와 불학무식한 자가, 여자와 남자가, 유대인과 헬라인이, 도덕적으로 불량한 자들과 인격적으로 훈련된 자들이, 언어와 인종과 빈부와 학식과 정치적 이념과 삶의 방식과 문화를 뛰어 넘는 우주적 "하나님 나라" 예수 공동체를 경험할 수 있었다.
bk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염원하는 두 번 째 청원은 예수의 가르침의 요체인 산상수훈과 주기도문에서도 그 고갱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예수가 염원한 "당신의 나라(hei basileia sou)가 현실화 됨"이 내포하는 존재적 긴장(tensity)은 우리의 기도속에서 거의 무시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기 예수 공동체에게 있어 "나라"의 문제는 추상적 정치토론이나 스트레스를 푸는 잡담거리의 단골메뉴가 아니었다. 로마 제국의 식민지 통치나 이에 저항하는 유대민족주의자들에게 있어 "예수 공동체"는 공히 '공공의 적'이었기에 예수공동체에게 있어 "나라"의 문제는 하루의 안녕한 삶과 직결된 긴급하며 절박한 문제였다.
로마적 힘의 추구와 유다적 메시아주의 공통적 뿌리가 스스로 주인되려 하는 "자기 중심성"이 라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청원은 이러한 "자기 중심성"의 뿌리를 찍어내는 강력한 도끼이다. 자기 스스로의 판단, 경험, 자원, 지혜, 힘, 인맥을 의존하여 자기의 왕국을 건설하고 안녕을 보장받으며 번영을 추구하려는 자기 중심성은 예수 공동체 안에서도 그 맹위를 떨쳐 부활한 예수에게 조차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를 질문하게 하였다. 그러나 스스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유혹의 정체를 직시하고 거부하며 하나님을 힘입어 그분의 언명대로 살아가기를 선포한 예수의 사람들은 지금 이 세상에 만연한 개인적, 사회적, 민족적, 국가세계적 문제의 근원이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려하는 죄성"임을 비분강개하고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신 둘 째 아담의 못다한 절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를 영혼에 담아 "나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가 내 삶의 구석 구석에 임하시기를 간절히 염원해야 한다. 이 염원을 예수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요약한다.
결국 하나님 나라의 현실화를 위한 청원은 실천적으로 자기 부정을 위한 기도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하지 않는 자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요원하다면, 자신의 자원과 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적대적이고 위협적이다. 스스로 절망하여 자기를 부인할 수 밖에 없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열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에 대한 절망은 하나님 신앙의 자궁이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절망은 자연스럽게 되지 않는다. 인간의 죄성은 스스로 살기 위해 자신과 이웃의 생명을 해할 만큼 뿌리가 깊고 강력하다. 따라서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음 조차 스스로 할 수 없다는 실존앞에 자아가 해체되는 것 (이러한 자기 부정을 자연인중 누가 감히 원한단 말인가?)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나라이 임하옵시며"는 자기 부정을 위해 초월적 은혜를 요청하는 기도로 발전한다.
이 기도를 바탕으로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통치속에 자기 한계를 초월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음습한 지하동굴에 숨어서도 로마의 제국주의와 배타적 유대주의를 뛰어넘어 노예와 주인이, 귀족과 하층민이, 부자와 거지가, 고매한 학자와 불학무식한 자가, 여자와 남자가, 유대인과 헬라인이, 도덕적으로 불량한 자들과 인격적으로 훈련된 자들이, 언어와 인종과 빈부와 학식과 정치적 이념과 삶의 방식과 문화를 뛰어 넘는 우주적 "하나님 나라" 예수 공동체를 경험할 수 있었다.
bk
8.05.2009
원탁의 그리스도
원탁의 그리스도스탠리 존스 지음 황병규 옮김평단문화사 국판 변형 420쪽 13,000원원탁의 그리스도 (Christ at the Round Table)교회의 선민의식과 배타적 독선에 경종을 울리고세상 속 기독교가 지향해야 할 좌표를 제시한 책!
“세계적 베스트셀러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의 저자 스탠리 존스의 두 번째 책!”
“진정한 종교는 몸을 구부려 겸손히 섬기고 육체와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며 약해진 영혼과 대화하고 그 영혼을 다시 살려내어 하늘의 아버지를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타임> 지가 뽑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선교사 스탠리 존스가 자신의 사명을 알고 그 사명을 완수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이 시대 최고의 복음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한 종교관을 가진 인도 사람들의 사상을 그들의 언어로 직접 들으면서 다원주의 사회에서 복음이 지닌 의미를 새롭게 규명한다. 또한 현대의 문화와 전통이 다원多元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복음이 여전히 진리임을 강조하고, 그들의 신관神觀, 내세관, 세계관 등을 파악하면서 진정한 기독교적 복음을 제시함으로써 교회의 역사적 사명과 선교에 대한 올바른 방향을 일깨워 주고 있다.이 책은 저자가 감리교 선교사로 20여 년간 인도 각처를 전도 여행하면서 만난 인도의 대표 지성인들, 즉 브라흐마 학자, 이슬람교 학자, 불교 승려, 힌두교 지도자 등과 함께 종파주의를 초월해 열린 원탁에 둘러앉아 허심탄회하게 나눈 종교적 신념을 촘촘히 기록하고 있다. 특히 종교적 승리주의와 종파주의를 초월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영혼의 가면을 벗어 놓고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신념을 토로하고 있는 이 책은 우리에게 이 시대 진정한 그리스도의 길이 무엇인지 묻는다. 이 책은 오늘을 살아가는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이 땅의 끝없는 고난과 모순에 대해 의구심을 가져 본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야 할 책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논리적으로 변증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것을 변증론적으로 풀어내고 있는 스탠리 존스라는 사람에 대해 두 번 놀라게 될 것이다.“이 시대 진정한 그리스도의 길이란 무엇인가?”전 세계 수많은 독자들을 감동시킨 이 시대 최고의 복음서!이 책은 1928년 영국에서 출간되자마자 전 세계 기독교인들의 심금을 울리며 베스트셀러 명단에 올랐으며,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선교 사역의 최대 명저로 꼽히고 있다. 교회의 선민의식과 배타적 독선에 경종을 울리고 세상 속 기독교가 지향해야 할 좌표를 제시한 이 책은 총 17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초반부에는 인도의 종교지도자, 사상가, 정치가 등과 같이 각계각층 사람들이 원탁에 둘러앉아서 그들의 사상과 종교를 솔직하게 토론한다. 후반부로 가면서 인도 사람들의 두려움과 절망 가운데서 희망의 증거를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이 왜 복음이고 참길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 변증론적으로 입증해 보인다.이 책은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적 복음의 실체를 낯선 땅에서 평생의 삶으로 증거한 신앙의 거인 스탠리 존스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들려주는 신앙 고백서다! 자신의 목적을 알고 그 사명을 완수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무한한 가치를 지닌다. 다원주의적 입장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의 길을 설명하고자 한 스탠리 존스의 이 새로운 시도는 수백만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 저자 및 역자 소개저자 : 스탠리 존스 E. Stanley Jones1884년, 미국 동부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태어나 18세 되던 해 예수 그리스도께 회심했다. ‘따뜻해진 마음’과 ‘세계 교구’를 강조하는 애즈베리대학에서 수학한 뒤, 1907년부터 감리교 선교사로 인도에서 평생 사역했다. 1920년대 초반, 마하트마 간디, 타고르 등과 함께 아슈람Ashram운동에 참여했으며, 1930년대부터는 기독교 아슈람운동을 펼치며 간디의 정신적 지도력을 바탕으로 한 크리스타그라하Kristagraha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40년 미국 뉴욕시에 할렘 아슈람을 세우면서 그의 기독교 아슈람운동은 인도를 넘어 미국과 유럽 등 세계 여러 나라로 퍼져 나갔다. 1938년 12월 12일자 〈타임〉 지에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선정되기도 했고, 1961년에는 ‘간디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인도 독립운동과 연관된 활동과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펼친 평화활동 등으로 두 차례 노벨평화상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다. 스탠리 존스는 철저한 복음주의자로 살면서도 열린 마음으로 인도인들에게 다가갔으며,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유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했던 인물이었다.
역자 : 황병규한양대학교 공과대학 졸업. 1984년부터 World Leadership Conference를 비롯하여 컨퍼런스 강의와 설교를 통역함. 2003년부터 아내와 함께 영묵, 예정, 승묵, 세 자녀를 홈스쿨링하고 있다. 현재 IBLP-Korea에서 삶의 기본 원리와 품성 계발 교육에 참여하고 있다. 역서로는 《지혜의 시작》, 《고전적 교육 입문》, 《흔들리지 않는 고전교육의 뿌리를 찾아서》가 있다.
《원탁의 그리스도》에 보내 온 각계의 추천사
위대한 선교사 스탠리 존스는 이 책에서 오늘날 한국 교회가 회복해야 할 교회의 역사적 사명과 선교의 올바른 방향을 일깨워 주고 있다. 특히 종교적 선민의식과 종파주의를 초월해 열린 원탁에 둘러앉아 허심탄회하게 종교적 신념을 이야기하는 이 책은 우리로 하여금 ‘잃어버린 천국’으로 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길을 안내하고 있다!-한완상(전 대한적십자사 총재)
교회의 선민의식과 배타적 독선에 경종을 울리고 세상 속 기독교가 지향해야 할 좌표를 제시한 복음서다. 특히 종교적 승리주의와 종파주의를 초월했던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영혼의 가면을 벗어 놓고 허심탄회하게 종교적 신념을 토로하고 있는 이 책은 오늘을 살아가는 종교인들에게 미래 교회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을 보여 주고 있다.-이어령(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 겸 중앙일보 고문)
청소년 시절, 영적으로 매우 고갈되고 생의 여러 문제에 봉착했을 때 스탠리 존스의 책은 내 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데 빛이 되었다. 복음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해 명확하게 안내하고 있는 이 책은 요즘처럼 복음의 능력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에 대한 분명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 -임영수(모새골 공동체 목사)
스탠리 존스는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적 복음의 실체를 낯선 땅에서 평생의 삶으로 증거한 신앙의 거인이다. 그는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한 종교관을 가진 인도 사람들의 사상을 그들의 언어로 직접 들으면서 이 시대 진정한 그리스도의 길이 무엇인지 제시하고 있다. 독자들은 이 책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몸으로 보여 주고자 했던 진정한 복음의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오정현(사랑의 교회 목사)
본문 속으로
나는 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이기고 승리하는 일 따위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다. 혹시 승리할 수도 있겠지만 거기까지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우리의 목표는 진실이고, 만유의 실재이며, 영의 자유이다. 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정복한다고 해도 얼마든지 이런 문제를 등한시하거나 잊고 악화시킬 수 있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했지만 결국 그리스도가 거기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뿐이다.-p.9 (프롤로그)
종교는 삶에 적절한 해답을 주고 있는가? 아니면 삶 자체나 삶의 의미와는 아무 공통점도 없는, 즉 삶에 해결책을 주지 못하는 정신적·사회적 찌꺼기인가? 우리는 이 위대한 실험 결과를 보고해야 하고, 확인한 내용이 있다면 기꺼이 알려야 했다. 마음속 깊은 곳을 향해 말하는 것은 정말이지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p.15 (제1장 출발)
“저는 욕망의 격렬한 싸움 속에서 스러져 가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의 발아래 제 욕망을 내려놓자 그분이 폭풍우를 잠재우고 제 자신에게서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 “제 인생이 산산이 부서져 있을 때 그리스도가 다가와 정상으로 돌려놓으셨습니다. 이제 저에게는, 하나님은 숨을 쉬는 것보다 더 가깝고 손발보다 더 가까운 친밀한 실재입니다.” -p.25 (제2장 인도인의 삶과 맞붙다)
“나 자신을 비울수록 하나님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질서정연한 기계이므로 우리가 그 법칙에 순종할 때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만 기적은 바랄 수 없기에 오랜 세월이 걸립니다. 그래서 샹카라도 ‘하나님을 찾으려는 사람은, 바닷가에 앉아 지푸라기로 물 한 방울씩 묻혀 옮겨 놓아 대양을 비우려는 사람 같은 인내를 지녀야 한다’고 말한 것이지요.”-p.53 (제3장 종교에 대한 솔직한 고백들)
누가 진정 그리스도인일까? 루터는 “인간은 절대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인이 되어 갈 뿐이다.”라고 말했다. 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모든 의미에 응답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와 사귐에 따라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사람이다. -p.79 (제4장 거듭남)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했다. 섬기지 않으려는 사람은 벽에 부딪힐 것이다. 나는 지난해에 유럽의 빈 왕궁 열세 곳을 둘러보았다. 그 왕궁들이 어째서 비어 있을까? 그 왕궁에 살던 사람들은 섬김을 받고 싶었을 뿐 섬기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이 법칙에 따라 스스로 망한 것이다. -p.104 (제5장 생명의 속죄)
원탁에 앉아서 사람들이 삶과 운명과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동안, 내 구원자가 앞에서 자라고 있는 모습을 지켜봤다. 나는 예수가 나를 어디에서 구원했고, 어디까지 구원했는지, 그리고 어디로 구원해 가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예수는 나를 죄에서 구원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예수는 내 우주를 구원하고, 내 우주 속에서 건드리는 모든 것을 구원한다.-p.128 (제6장 더욱 커지는 구원자)
우리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살라고 지어진 존재이다!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 우리 자아, 곧 참다운 내 자아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법이 내 삶과 일치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붙잡아라.’ 물론 그 제의 속에는 회개하고, 자기를 포기하며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는 요구가 들어 있다. 그러나 일단 그 제의를 받아들이면 그 요구는 어느새 사라지고 즐거움으로 변한다. -p.155 (제7장 하나님에 대한 체험)
나는 《신약성서》를 펴고 기도하면서 어둠을 밝히고 길을 안내해 줄 말씀을 찾았다. 그 순간 〈사도행전〉 1장에 있는 사건이 떠올랐다. 제자들이 예수에게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때와 시기는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p.175 (제8장 안타까운 약속의 땅)
우리는 어디서 권위를 찾을 수 있을까? 절대 오류가 없는 교회, 절대 오류가 없는 성서, 절대 오류가 없는 그리스도의 체험에 권위가 있을까? 권위는 세 가지 모두 안에 있다. 최종 확실성과 권위의 자리는 역사의 예수가 체험의 그리스도가 되는 연결점이며, 그 결과로 생긴 개인의 체험이 단체 체험으로써 확증되고 바로잡히는 곳이다. 그때 권위의 자리는 바로 그리스도다.-p.193 (제9장 확실성과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복음은 통역이다. 복음은 영원의 언어를 시간의 말로 바꾼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속죄 목적이 우리에게 가까이 와 닿아 현실이 되고, 누구나 얻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단테가 입을 열었을 때 ‘천 년의 침묵’이 깨졌다고 한다. 예수 안에서 ‘영원의 침묵’이 깨졌고, 우리는 복음을 듣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이 속죄의 사실을 통역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p.214 (제10장 그리스도의 통역자)
섬기는 자세, 곧 종의 자세가 그리스도인의 자세다. 그것은 예수가 취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힌두교인 애국주의자는 우리에게 “현재 인도의 영혼을 붙잡고 있는 위대한 낱말 두 개가 있습니다. 곧 ‘섬김’과 ‘자기희생’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이상은 우리 복음의 심장부에 깊이 박혀 있다. 우리가 동양에서 도덕적 권위를 얻으려면 이것이 우리의 자세와 심장부에 깊이 박혀 있어야 한다.-p.233 (제11장 원탁에 앉은 선교 단체)
죽음 앞에서 마지막으로 쥐고 있던 힘마저 다 빠졌을 때에도 여전히 예수는 최후이자 최고의 일을 하려고 했다. 사람들을 위해 죽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 성배 속으로 들어갔다. 우리 영혼이 악과 증오에 대해 분개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 우리는 이 완전한 승리를 마신다. 무엇으로도 사라지거나 꺼지지 않을 영원한 사랑을 마시면서 우리는 루터처럼 말할 수 있다. “내 영혼은 한없이 기쁘고 위대해서 어느 누구의 원수도 될 수 없다.” -p.279 (제13장 가장 신성한 원탁)
종교는 인간을 자신의 가장 높은 자아와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야 분열된 영혼의 힘이 하나가 되고 형제들과 잘 어울릴 수 있다. 또한 하나님과도 잘 어울리게 된다. 종교의 임무는 속죄다. 종교가 속죄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치명적이다. 종교 의식이 아름다울 수 있고, 종교 규약의 역사가 아주 오래될 수 있으며, 그 교훈이 좋을 수 있지만, 속죄에 실패한다면 회복할 길이 없다. -p.301(제14장 십자가는 삶의 열쇠)
사랑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의 법칙이다. 미움이 아니고 사랑이 바로 우리 존재의 법칙이다. 미움은 산酸처럼 우리 영혼을 부식시키지만, 사랑은 우리 영혼을 밝은 건강으로 빛나게 한다. 순결이 그리스도 안의 삶의 법칙이고, 우리 존재의 법칙이다. 불결은 내면의 삶을 시들게 하지만 순결은 내면의 삶을 상쾌함으로 설레게 한다. 선이 바로 우리 존재의 법칙이다. -p.327 (제15장 참길)
우주의 원탁에서는 모든 것, 곧 바울,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스승, 세상을 비롯한 모든 사실, 삶을 비롯한 모든 실재, 죽음을 비롯한 모든 변화, 현재와 미래를 비롯한 모든 시간을 포함하는 만물이 일어나 그리스도의 주권을 증언하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에게 복종한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으로 조건을 확인해야 한다. 모든 것에는 불멸의 조건이 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라.” -p.383 (제17장 우주의 원탁)
■ 차 례
프롤로그 껍데기는 버리고 본질을 추구하라!
Ch. 1 출발 하나님의 약속|그리스도의 명령
Ch. 2 인도인의 삶과 맞붙다 원탁에서 만난 사람들|간절한 마음의 소리
Ch. 3 종교에 대한 솔직한 고백들 불확실한 영혼|고매한 절망
Ch. 4 거듭남 수평 개종과 수직 회심|회심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
Ch. 5 생명의 속죄 하나님 나라의 실현|좁은 문의 법칙
Ch. 6 더욱 커지는 구원자 사람의 아들, 예수|사람과 하나님이 만나는 곳, 예수
Ch. 7 하나님에 대한 체험 복음은 이론이 아닌 체험|복음은 요구가 아닌 제의
Ch. 8 안타까운 약속의 땅 거의 타오를 뻔하다가 꺼지는 불꽃|거의 될 뻔하다 가 실패하는 교회
Ch. 9 확실성과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인격|스스로 역사 의 증인이 된 예수
Ch. 10 그리스도의 통역자 복음은 생명 언어로의 통역이다|진정한 통역자는 예수
Ch. 11 원탁에 앉은 선교 단체 종의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나다|민족도 개인 도 사랑한 백부장
Ch. 12 원탁에 앉은 나라들 자기중심적인 바보들|자기희생의 권력
Ch. 13 가장 신성한 원탁 생명의 잔|완전한 승리
Ch. 14 십자가는 삶의 열쇠 값없이 받는 보혈의 선물|십자가는 하나님의 본성
Ch. 15 참길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다가온 하나님|예수는 길이고 진리며 생명
Ch. 16 예수는 보편적인 실체 진리는 보편적, 오류는 제한적|어느 상황에서 든 예수는 그 상황의 빛
Ch. 17 우주의 원탁 우리는 예수의 것|예수만이 참 소망옮긴이의 말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From NewsNJoy 서평 이벤트
7.08.2009
혁명적 복음과 알깨기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보낸 편지 중
헤르만헤세, 데미안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자신을 둘러 싼 낡은 현실의 파괴와 맞닿아 있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구절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불을 던지고 평화를 파괴하는 검을 주러 왔다고 가르치셨다. 또한 종교와 정치, 교육과 경제의 실질적 중심이었고 한 민족의 아이덴티티였던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주장하셨고 그로 인해 신성모독의 죄목으로 정치적 타살을 당하셨다. 예수의 복음은 그 본질상 '전복적'subversive이고 해체적이며 혁명적이다. 이 말은 폭력적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개인과 집단의 죄성으로 인한 모든 불의와 죄악에 대한 정면도전이다. 새로운 생명은 안전하게 무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참생명 또는 온전한 삶은 죄와 사망의 세력에 대항하는 혁명과 전쟁의 댓가를 지불하고 획득하는 것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의 옮김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흘림을 비용으로 치뤄야 할 만큼 치열하고 맹렬한 세상과의 전쟁을 치루고 난 후 얻어지는 것이다.
복음의 선포는 이렇듯 기존의 질서와 갈등관계에 있을 수 밖에 없다. 예수의 삼중 직 중, 선지자로서의 예수는 사회와 도통 어울릴 수가 없다. 기득권자들과 좋은 관계일 수 없으며, 지도자들과 화평할 수가 없고, 지식인들과 논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그의 몸으로서 교회에게 위임된 것이다. 왕과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실행하는 것 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선지자만으로도 안된다. 모두가 다 필요하다. 그러니 모든 교회가 다 필요할 것이 아닌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가는 서로 견제하며 대화하고 협력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자신을 둘러싼 자신의 세계를 인식하고 확장하려는 인간 영혼의 투쟁을 심리적으로는 "자아 발달"로 교육이론으로는 "변형적 학습"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발달과 변형이론들의 핵심은 인간의 "인식 구조" 또는 "인식의 틀"이 신체, 나이, 성별, 사회적 환경, 문화에 따라 어떻게, 어떤 과정에 따라, 어떤 촉매적 요건들을 통해 발달 또는 변형되는 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구조변형의 이해들은 인식구조의 발달과 변화의 설계자이며 원인자이고 협력자인 동시에 완성자이신 창조의 영을 간과한다는 점에서 자기 인식의 한계에 갖히는 심각한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반면 교회에서의 설교와 가르침은 보편은혜에 기반한 창조원리의 구조적 측면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깊이있는 이해를 추구하려 노력하지 않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사회과학을 통해 발견된 인간 발달과 인식구조 변형의 원리들이 근거가 빈약한 오류이며 교회의 신학과 신앙적 실천에 마치 원수나 되는 것 처럼 떠벌여 유치한 이분법적 사고에 근거한 싸움을 부추키기도 한다. 이로서 자기 인식의 한계안에 갖혀 있는 자신의 가련함을 보지 못한 채, 진리를 자기 호주머니 속에 넣고 있는 양 호들갑을 떠는 어리석음과 오만함을 보이기까지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교만함으로 스스로를 갱신할 줄 아는 능력을 상실한 교회는 세상의 권위주의적이고, 성취지향적(또는 경쟁적)이며, 가변적이고 폭압적인 세상문화의 사회화 과정에 저항하고 극복하여 그리스도의 문화를 창출해 냄으로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급속도로 세속화되어 스스로 경쟁하여 분쟁하고 결국 분열하여 자멸하게 된다는 점이다.
전통과 인습, 도그마와 자기 경험의 한계에 갖혀있는 사람들을 향해 "새술은 새부대"에 담을 수 밖에 없다고 일갈하신 예수의 통렬한 지적은 금식 논쟁과 같은 지엽적인 실천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똑같은 성정을 가진 나사렛의 젊은 목수를 창조주의 아들로 인정해야 하는 믿음은 기존의 인식구조의 틀을 무너뜨리는 새로운 인식구조로의 전환paradigm shift이 없이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 바로 이 시작점에서 부터 죽어야 살고, 나눠주어야 풍성해지며, 낮아져야 높아지고, 포기해야 얻는 다는 불가해한 역설이 시대와 상황과 문화를 초월한 삶의 근원적 원리로 존중되기 시작한다.
그러니 이렇듯 자기의 존재의 집인 "자기 세계"를 부수는 일이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가능하단 말인가!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자기한계의 인식만이 우리를 죽은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창조의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로 인도한다. 또한 이를 삶으로 증명해 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과 우리 안에서 그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믿음과 힘 주심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하도록 한다. 나의 한 부분인 세계를 파괴하는 일은 그래서 하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다.
bk
5.02.2009
유앙겔리온Euangelion
"복음"을 깊이 이해를 하려면 로마제국을 이해해야 한다. 원래 "Euangelion복음"이라는 단어는 로마제국의 통합을 위해 로마가 추구하던 정치, 군사, 문화의 저변에 깔려있는 가치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이 추구하던 힘의 "유앙겔리온"을 차용해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의 "유앙겔리온"(막 1:1)을 선포하였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나사렛에서 살다가 처형당한 예수가 다시 부활하고 하늘로 올라갔으며 이 세상을 완전하게 회복하기 위해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러한 주장, 즉 한 인간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 살다가 죽고 하늘로 올라갔다가 다시 올 것이라는 이야기들은 1세기를 살았던 로마제국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신화적 이야기가 아니라도 로마의 황제들은 스스로를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죽은 후 다시 하늘로 올라가 세상을 다스리는 쿠리오스, 즉 주Lord 라고 선언했다. 사람들은 시장agora에서 만날 때 마다, "시저가 주님이시다"라고 인사를 나누어야 했다. 정복지의 피식민지들은 역시 시저가 세상의 유일한 주님이심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 주님을 예배해야만 했다. 시저 이외에 다른 대상을 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위험천만한 행동일 수 밖에 없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나사렛에서 살다가 처형당한 예수가 다시 부활하고 하늘로 올라갔으며 이 세상을 완전하게 회복하기 위해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러한 주장, 즉 한 인간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 살다가 죽고 하늘로 올라갔다가 다시 올 것이라는 이야기들은 1세기를 살았던 로마제국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신화적 이야기가 아니라도 로마의 황제들은 스스로를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죽은 후 다시 하늘로 올라가 세상을 다스리는 쿠리오스, 즉 주Lord 라고 선언했다. 사람들은 시장agora에서 만날 때 마다, "시저가 주님이시다"라고 인사를 나누어야 했다. 정복지의 피식민지들은 역시 시저가 세상의 유일한 주님이심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 주님을 예배해야만 했다. 시저 이외에 다른 대상을 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위험천만한 행동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예수의 부활과 재림에 대한 경험과 믿음은 강력한 로마제국의 체제와 정신문화를 뒤집어 놓았다. 소수의 변두리 사람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이 아름다운 세상의 고통과 절망, 깊은 아픔을 온 몸으로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가난하고 소외당하고 억압당하고 배고프며 상처받아 고통당하는 자들은 예수에게 소망을 걸었다. 예수의 생전에 그들이 가지고 있던 소망은 로마 문화에 바탕을 둔 소망이었다. 강력한 군사력, 정교한 법률을 바탕으로 한 고도의 정치력, 높은 교육과 세련된 문화 예술의 힘으로 로마는 영국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활한 세상을 정복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가 보여준 기적과 이사, 지혜와 용기를 경험하면서 만약 이스라엘이 예수를 중심으로 뭉치기만 한다면 로마의 힘에 대항해 볼 만 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으로 모든 기대와 소망은 산산조각났다. 로마와 대항할 수 있다고 믿었던 "로마적 힘"을 예수가 스스로 거부하고 허무하게 스러진 것이었다. "십자가에서 너를 구원하고 내려와라"고 소리질렀던 사람들의 외침은 "더 강력한 로마적 힘"에 대한 갈망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절규였던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다. 군중은 흩어졌고 예수의 제자들 마저 뿔뿔이 귀향한 터였다.
끝내 예수를 잊지 못했던 것은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진정으로 예수를 사랑했다. "힘"의 그림자 조차 사라저 버린 싸늘한 시체라도 쓰다듬지 않고 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그들은 예수를 사랑했다. 안식일이 지난 첫 새벽 미명에 그 여자들은 전혀 새로운 예수를 만났다. 새로운 예수는 이전의 예수가 아니었다. 그는 더이상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여전히 먹고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만질 수 있었지만 그는 감각의 세계를 초월하여 존재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증거한 모든 증거가 참된 진리임이 드러났으며 따라서 그가 진정한 인간이며 동시에 진정한 "신"이라는 사실이 확증되었다.
도대체 전능한 하나님이 연약한 인간들에게 무슨 볼일이 있단 말인가! 여전히 이스라엘의 "나라"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 (행1:3). 예수는 이 온 우주가 하나님의 나라이며 이미 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회복되기 시작되었음을 경험적으로 증거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선포하였다. 전혀 새로운 나라,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 하나님의 영이 주도하는 나라, 그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 우리에게 시작되었다! 이것이아니면 무엇이 "유앙겔리온"이겠는가?
예수를 경험한 증인들은 이 세상의 회복이 정치권력이나 군사적 힘, 조직화된 법률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온 몸으로, 삶으로 증언하였다. 로마인들은 조간 신문이나 텔레비젼에서 들려오는 로마의 번영, 이를 테면 영토의 확장이나 군사력의 증강, 또는 피식민자들이 제공하는 특산물의 유입등을 "유앙겔리온" 좋은 소식으로 생각하고 환영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증인들은 그로마식 유앙겔리온에 대항해 전혀 다른 차원의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당신을 위해 나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나셔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주린 자들에게 기름진 잔치가 배설되었다. 수치로 그늘진 자들에게 긍지와 자부심이 생겼다. 노예에게는 해방이 선포되었으며 감옥에 수감되었던 자들에게는 사면선언이 내려졌다. 공동체에서 따돌림을 당했던 외톨이들에게는 저명한 친구들이 생겼다. 죄책감과 열등감에 괴로워 하던 사람들에게 인정과 격려의 박수와 환호가 주어졌다. 안정감과 자신감이 솟아 올랐다. 비난과 정죄로 오염된 언어에 칭찬과 감사의 샘이 터졌다. 가난한 자들과 부요한 자들이 한 상에서 즐겁게 애찬을 나눴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후투와 투치가, 영국인과 프랑스인이, 일본인과 한국인이, 북미인디안과 백인이, 미국인과 이라크인이, 독일인과 폴란드인이, 세르비아인들과 알바니아인들이, 인도네시아 인들과 동티모르인이, 수십년, 수백년을 미움과 혐오로 원수가 되어버린 도저히 상종할 수 없는 사람들이 서로 형제와 자매가 되었다.
예수를 경험한 증인들은 이 세상의 회복이 정치권력이나 군사적 힘, 조직화된 법률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온 몸으로, 삶으로 증언하였다. 로마인들은 조간 신문이나 텔레비젼에서 들려오는 로마의 번영, 이를 테면 영토의 확장이나 군사력의 증강, 또는 피식민자들이 제공하는 특산물의 유입등을 "유앙겔리온" 좋은 소식으로 생각하고 환영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증인들은 그로마식 유앙겔리온에 대항해 전혀 다른 차원의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당신을 위해 나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나셔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주린 자들에게 기름진 잔치가 배설되었다. 수치로 그늘진 자들에게 긍지와 자부심이 생겼다. 노예에게는 해방이 선포되었으며 감옥에 수감되었던 자들에게는 사면선언이 내려졌다. 공동체에서 따돌림을 당했던 외톨이들에게는 저명한 친구들이 생겼다. 죄책감과 열등감에 괴로워 하던 사람들에게 인정과 격려의 박수와 환호가 주어졌다. 안정감과 자신감이 솟아 올랐다. 비난과 정죄로 오염된 언어에 칭찬과 감사의 샘이 터졌다. 가난한 자들과 부요한 자들이 한 상에서 즐겁게 애찬을 나눴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후투와 투치가, 영국인과 프랑스인이, 일본인과 한국인이, 북미인디안과 백인이, 미국인과 이라크인이, 독일인과 폴란드인이, 세르비아인들과 알바니아인들이, 인도네시아 인들과 동티모르인이, 수십년, 수백년을 미움과 혐오로 원수가 되어버린 도저히 상종할 수 없는 사람들이 서로 형제와 자매가 되었다.
로마인들은 이러한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들의 대답은 "유앙겔리온"이었다. 로마인들은 노예와 주인이, 귀족과 하층민이, 부자와 거지가, 고매한 학자와 불학무식한 자가, 여자와 남자가, 유대인과 헬라인이 도덕적으로 불량한 자들과 인격적으로 훈련된 자들이 언어와 인종과 빈부와 학식과 정치적 이념과 삶의 방식과 문화를 뛰어 넘어 한 공동체를 이루어 유앙겔리온을 증거하는 이 특수한 집단의 사람들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혼동스러웠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할 수 없이 새로운 "유앙겔리온"을 증거하는 이 사람들을 "크리스티아노스Kristianos-그리스도인들" 이라고 불렀다 (행 11:27).
상처받고, 외면당하고, 죄 짓고, 더럽고, 교활하며, 폭력적이고, 사기치며, 거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신 예수는 나를 변화시켜 이 복음의 경험자로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나눌 것을 명령하신다. 나누면 나눌 수록, 경험하면 경험할 수록 더 풍성하게 채워질 것이다. 복음을 예수 믿고 교회 출석하고 죽어 천당가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해변 유양지에서 유람선을 타고 즐기는 휴가를 생각하며 "놀러 가자"라고 말 한 아버지의 "놀이"를 골목에서 코흘리게들과 딱지치기 하는 수준의 놀이로 심각하게 오해한 아이들의 생각과 같을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 아버지의 것이며 이 사실위에 (안에, 통해) 살아간다는 것이 유앙겔리온이다.
상처받고, 외면당하고, 죄 짓고, 더럽고, 교활하며, 폭력적이고, 사기치며, 거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신 예수는 나를 변화시켜 이 복음의 경험자로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나눌 것을 명령하신다. 나누면 나눌 수록, 경험하면 경험할 수록 더 풍성하게 채워질 것이다. 복음을 예수 믿고 교회 출석하고 죽어 천당가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해변 유양지에서 유람선을 타고 즐기는 휴가를 생각하며 "놀러 가자"라고 말 한 아버지의 "놀이"를 골목에서 코흘리게들과 딱지치기 하는 수준의 놀이로 심각하게 오해한 아이들의 생각과 같을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 아버지의 것이며 이 사실위에 (안에, 통해) 살아간다는 것이 유앙겔리온이다.
bk
2.21.2009
나의 사명
좌옹 윤치호(1864-1945)
일기, 1권 410쪽, 1889년 12월 14일
윤치호는 조선 최초의 미국 유학생 신학도였다. 신사유람단의 일행으로 김옥균, 박영효등의 개화인사들에게 영향을 받은 윤치호는 1884년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허망하게 끝나자 삶을 회의하고 좌절하였으나 '그리스도 신앙'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1888년 부터 Vandervilt 신학부에서 3년 Emory대학에서 2년 도합 5년간 수학하였으며 신학 외에도 정치와 경제, 그리고 심리학등을 배웠다.
인간의 개혁과 사회적 혁신이라는 실용주의적 관심이 지대했던 윤치호는 조선말기의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관리들의 악과 그들의 사상적 뿌리인 유교에 실랄한 비판을 가한다. 스스로 도덕적 타락을 경험했던 윤치호는 "자기 부정"을 통한 인간갱신은 바른 종교만으로 가능하며 종교를 통한 "이기심의 극복"만이 도덕적 사회를 건설하는 기초라고 보았다.
귀국 후 정치를 통해 민족의 갱신을 도모하였으나 이미 기울어진 국운을 돌이킬 수는 없자 교육운동에 전념하였다. 한미서원(1906년, 후일 송도 고등보통학교로 개편)과 황성기독청년회 (조선YMCA, 1903)를 중심으로 민족의식과 민족성 개혁운동을 벌였던 그는 백성을 근대화하는 실업교육을 중요하게 여겼다.
윤치호는 하나님 사랑과 나라사랑을 하나로 보담았던 시인이기도 하였다. 그가 만든 찬송시 중 이런 낮익은 것이 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찬미가 14장 1절-
1900년의 마지막 날 일기에 "시간이 지나면 조선도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문명한 나라가 될 것이다...그렇다. 이 모든 꿈은 꼭 실현될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아, 300년 후 이 달라진 모습을 보기 위해 이 조선에 다시 돌아고 싶구나" 라고 소망하였던 윤치호가 100년이 조금 지난 오늘 천국에서 한국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못 궁금하다.
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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