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급함, 산만함, 미룸은 어느정도는 두려움의 결과이기도 하다.
두려움을 이기려면 담대함이 필요하다.
담대하지 못하는 이유는 권위를 잃었기 때문이다.
권위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건강한 자아로 부터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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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2010
8.05.2009
원탁의 그리스도

원탁의 그리스도 (Christ at the Round Table)교회의 선민의식과 배타적 독선에 경종을 울리고세상 속 기독교가 지향해야 할 좌표를 제시한 책!
“세계적 베스트셀러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의 저자 스탠리 존스의 두 번째 책!”
“진정한 종교는 몸을 구부려 겸손히 섬기고 육체와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며 약해진 영혼과 대화하고 그 영혼을 다시 살려내어 하늘의 아버지를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타임> 지가 뽑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선교사 스탠리 존스가 자신의 사명을 알고 그 사명을 완수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이 시대 최고의 복음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한 종교관을 가진 인도 사람들의 사상을 그들의 언어로 직접 들으면서 다원주의 사회에서 복음이 지닌 의미를 새롭게 규명한다. 또한 현대의 문화와 전통이 다원多元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복음이 여전히 진리임을 강조하고, 그들의 신관神觀, 내세관, 세계관 등을 파악하면서 진정한 기독교적 복음을 제시함으로써 교회의 역사적 사명과 선교에 대한 올바른 방향을 일깨워 주고 있다.이 책은 저자가 감리교 선교사로 20여 년간 인도 각처를 전도 여행하면서 만난 인도의 대표 지성인들, 즉 브라흐마 학자, 이슬람교 학자, 불교 승려, 힌두교 지도자 등과 함께 종파주의를 초월해 열린 원탁에 둘러앉아 허심탄회하게 나눈 종교적 신념을 촘촘히 기록하고 있다. 특히 종교적 승리주의와 종파주의를 초월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영혼의 가면을 벗어 놓고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신념을 토로하고 있는 이 책은 우리에게 이 시대 진정한 그리스도의 길이 무엇인지 묻는다. 이 책은 오늘을 살아가는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이 땅의 끝없는 고난과 모순에 대해 의구심을 가져 본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야 할 책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논리적으로 변증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것을 변증론적으로 풀어내고 있는 스탠리 존스라는 사람에 대해 두 번 놀라게 될 것이다.“이 시대 진정한 그리스도의 길이란 무엇인가?”전 세계 수많은 독자들을 감동시킨 이 시대 최고의 복음서!이 책은 1928년 영국에서 출간되자마자 전 세계 기독교인들의 심금을 울리며 베스트셀러 명단에 올랐으며,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선교 사역의 최대 명저로 꼽히고 있다. 교회의 선민의식과 배타적 독선에 경종을 울리고 세상 속 기독교가 지향해야 할 좌표를 제시한 이 책은 총 17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초반부에는 인도의 종교지도자, 사상가, 정치가 등과 같이 각계각층 사람들이 원탁에 둘러앉아서 그들의 사상과 종교를 솔직하게 토론한다. 후반부로 가면서 인도 사람들의 두려움과 절망 가운데서 희망의 증거를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이 왜 복음이고 참길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 변증론적으로 입증해 보인다.이 책은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적 복음의 실체를 낯선 땅에서 평생의 삶으로 증거한 신앙의 거인 스탠리 존스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들려주는 신앙 고백서다! 자신의 목적을 알고 그 사명을 완수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무한한 가치를 지닌다. 다원주의적 입장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의 길을 설명하고자 한 스탠리 존스의 이 새로운 시도는 수백만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 저자 및 역자 소개저자 : 스탠리 존스 E. Stanley Jones1884년, 미국 동부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태어나 18세 되던 해 예수 그리스도께 회심했다. ‘따뜻해진 마음’과 ‘세계 교구’를 강조하는 애즈베리대학에서 수학한 뒤, 1907년부터 감리교 선교사로 인도에서 평생 사역했다. 1920년대 초반, 마하트마 간디, 타고르 등과 함께 아슈람Ashram운동에 참여했으며, 1930년대부터는 기독교 아슈람운동을 펼치며 간디의 정신적 지도력을 바탕으로 한 크리스타그라하Kristagraha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40년 미국 뉴욕시에 할렘 아슈람을 세우면서 그의 기독교 아슈람운동은 인도를 넘어 미국과 유럽 등 세계 여러 나라로 퍼져 나갔다. 1938년 12월 12일자 〈타임〉 지에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선정되기도 했고, 1961년에는 ‘간디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인도 독립운동과 연관된 활동과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펼친 평화활동 등으로 두 차례 노벨평화상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다. 스탠리 존스는 철저한 복음주의자로 살면서도 열린 마음으로 인도인들에게 다가갔으며,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유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했던 인물이었다.
역자 : 황병규한양대학교 공과대학 졸업. 1984년부터 World Leadership Conference를 비롯하여 컨퍼런스 강의와 설교를 통역함. 2003년부터 아내와 함께 영묵, 예정, 승묵, 세 자녀를 홈스쿨링하고 있다. 현재 IBLP-Korea에서 삶의 기본 원리와 품성 계발 교육에 참여하고 있다. 역서로는 《지혜의 시작》, 《고전적 교육 입문》, 《흔들리지 않는 고전교육의 뿌리를 찾아서》가 있다.
《원탁의 그리스도》에 보내 온 각계의 추천사
위대한 선교사 스탠리 존스는 이 책에서 오늘날 한국 교회가 회복해야 할 교회의 역사적 사명과 선교의 올바른 방향을 일깨워 주고 있다. 특히 종교적 선민의식과 종파주의를 초월해 열린 원탁에 둘러앉아 허심탄회하게 종교적 신념을 이야기하는 이 책은 우리로 하여금 ‘잃어버린 천국’으로 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길을 안내하고 있다!-한완상(전 대한적십자사 총재)
교회의 선민의식과 배타적 독선에 경종을 울리고 세상 속 기독교가 지향해야 할 좌표를 제시한 복음서다. 특히 종교적 승리주의와 종파주의를 초월했던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영혼의 가면을 벗어 놓고 허심탄회하게 종교적 신념을 토로하고 있는 이 책은 오늘을 살아가는 종교인들에게 미래 교회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을 보여 주고 있다.-이어령(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 겸 중앙일보 고문)
청소년 시절, 영적으로 매우 고갈되고 생의 여러 문제에 봉착했을 때 스탠리 존스의 책은 내 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데 빛이 되었다. 복음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해 명확하게 안내하고 있는 이 책은 요즘처럼 복음의 능력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에 대한 분명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 -임영수(모새골 공동체 목사)
스탠리 존스는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적 복음의 실체를 낯선 땅에서 평생의 삶으로 증거한 신앙의 거인이다. 그는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한 종교관을 가진 인도 사람들의 사상을 그들의 언어로 직접 들으면서 이 시대 진정한 그리스도의 길이 무엇인지 제시하고 있다. 독자들은 이 책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몸으로 보여 주고자 했던 진정한 복음의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오정현(사랑의 교회 목사)
본문 속으로
나는 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이기고 승리하는 일 따위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다. 혹시 승리할 수도 있겠지만 거기까지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우리의 목표는 진실이고, 만유의 실재이며, 영의 자유이다. 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정복한다고 해도 얼마든지 이런 문제를 등한시하거나 잊고 악화시킬 수 있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했지만 결국 그리스도가 거기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뿐이다.-p.9 (프롤로그)
종교는 삶에 적절한 해답을 주고 있는가? 아니면 삶 자체나 삶의 의미와는 아무 공통점도 없는, 즉 삶에 해결책을 주지 못하는 정신적·사회적 찌꺼기인가? 우리는 이 위대한 실험 결과를 보고해야 하고, 확인한 내용이 있다면 기꺼이 알려야 했다. 마음속 깊은 곳을 향해 말하는 것은 정말이지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p.15 (제1장 출발)
“저는 욕망의 격렬한 싸움 속에서 스러져 가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의 발아래 제 욕망을 내려놓자 그분이 폭풍우를 잠재우고 제 자신에게서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 “제 인생이 산산이 부서져 있을 때 그리스도가 다가와 정상으로 돌려놓으셨습니다. 이제 저에게는, 하나님은 숨을 쉬는 것보다 더 가깝고 손발보다 더 가까운 친밀한 실재입니다.” -p.25 (제2장 인도인의 삶과 맞붙다)
“나 자신을 비울수록 하나님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질서정연한 기계이므로 우리가 그 법칙에 순종할 때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만 기적은 바랄 수 없기에 오랜 세월이 걸립니다. 그래서 샹카라도 ‘하나님을 찾으려는 사람은, 바닷가에 앉아 지푸라기로 물 한 방울씩 묻혀 옮겨 놓아 대양을 비우려는 사람 같은 인내를 지녀야 한다’고 말한 것이지요.”-p.53 (제3장 종교에 대한 솔직한 고백들)
누가 진정 그리스도인일까? 루터는 “인간은 절대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인이 되어 갈 뿐이다.”라고 말했다. 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모든 의미에 응답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와 사귐에 따라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사람이다. -p.79 (제4장 거듭남)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했다. 섬기지 않으려는 사람은 벽에 부딪힐 것이다. 나는 지난해에 유럽의 빈 왕궁 열세 곳을 둘러보았다. 그 왕궁들이 어째서 비어 있을까? 그 왕궁에 살던 사람들은 섬김을 받고 싶었을 뿐 섬기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이 법칙에 따라 스스로 망한 것이다. -p.104 (제5장 생명의 속죄)
원탁에 앉아서 사람들이 삶과 운명과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동안, 내 구원자가 앞에서 자라고 있는 모습을 지켜봤다. 나는 예수가 나를 어디에서 구원했고, 어디까지 구원했는지, 그리고 어디로 구원해 가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예수는 나를 죄에서 구원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예수는 내 우주를 구원하고, 내 우주 속에서 건드리는 모든 것을 구원한다.-p.128 (제6장 더욱 커지는 구원자)
우리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살라고 지어진 존재이다!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 우리 자아, 곧 참다운 내 자아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법이 내 삶과 일치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붙잡아라.’ 물론 그 제의 속에는 회개하고, 자기를 포기하며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는 요구가 들어 있다. 그러나 일단 그 제의를 받아들이면 그 요구는 어느새 사라지고 즐거움으로 변한다. -p.155 (제7장 하나님에 대한 체험)
나는 《신약성서》를 펴고 기도하면서 어둠을 밝히고 길을 안내해 줄 말씀을 찾았다. 그 순간 〈사도행전〉 1장에 있는 사건이 떠올랐다. 제자들이 예수에게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때와 시기는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p.175 (제8장 안타까운 약속의 땅)
우리는 어디서 권위를 찾을 수 있을까? 절대 오류가 없는 교회, 절대 오류가 없는 성서, 절대 오류가 없는 그리스도의 체험에 권위가 있을까? 권위는 세 가지 모두 안에 있다. 최종 확실성과 권위의 자리는 역사의 예수가 체험의 그리스도가 되는 연결점이며, 그 결과로 생긴 개인의 체험이 단체 체험으로써 확증되고 바로잡히는 곳이다. 그때 권위의 자리는 바로 그리스도다.-p.193 (제9장 확실성과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복음은 통역이다. 복음은 영원의 언어를 시간의 말로 바꾼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속죄 목적이 우리에게 가까이 와 닿아 현실이 되고, 누구나 얻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단테가 입을 열었을 때 ‘천 년의 침묵’이 깨졌다고 한다. 예수 안에서 ‘영원의 침묵’이 깨졌고, 우리는 복음을 듣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이 속죄의 사실을 통역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p.214 (제10장 그리스도의 통역자)
섬기는 자세, 곧 종의 자세가 그리스도인의 자세다. 그것은 예수가 취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힌두교인 애국주의자는 우리에게 “현재 인도의 영혼을 붙잡고 있는 위대한 낱말 두 개가 있습니다. 곧 ‘섬김’과 ‘자기희생’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이상은 우리 복음의 심장부에 깊이 박혀 있다. 우리가 동양에서 도덕적 권위를 얻으려면 이것이 우리의 자세와 심장부에 깊이 박혀 있어야 한다.-p.233 (제11장 원탁에 앉은 선교 단체)
죽음 앞에서 마지막으로 쥐고 있던 힘마저 다 빠졌을 때에도 여전히 예수는 최후이자 최고의 일을 하려고 했다. 사람들을 위해 죽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 성배 속으로 들어갔다. 우리 영혼이 악과 증오에 대해 분개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 우리는 이 완전한 승리를 마신다. 무엇으로도 사라지거나 꺼지지 않을 영원한 사랑을 마시면서 우리는 루터처럼 말할 수 있다. “내 영혼은 한없이 기쁘고 위대해서 어느 누구의 원수도 될 수 없다.” -p.279 (제13장 가장 신성한 원탁)
종교는 인간을 자신의 가장 높은 자아와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야 분열된 영혼의 힘이 하나가 되고 형제들과 잘 어울릴 수 있다. 또한 하나님과도 잘 어울리게 된다. 종교의 임무는 속죄다. 종교가 속죄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치명적이다. 종교 의식이 아름다울 수 있고, 종교 규약의 역사가 아주 오래될 수 있으며, 그 교훈이 좋을 수 있지만, 속죄에 실패한다면 회복할 길이 없다. -p.301(제14장 십자가는 삶의 열쇠)
사랑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의 법칙이다. 미움이 아니고 사랑이 바로 우리 존재의 법칙이다. 미움은 산酸처럼 우리 영혼을 부식시키지만, 사랑은 우리 영혼을 밝은 건강으로 빛나게 한다. 순결이 그리스도 안의 삶의 법칙이고, 우리 존재의 법칙이다. 불결은 내면의 삶을 시들게 하지만 순결은 내면의 삶을 상쾌함으로 설레게 한다. 선이 바로 우리 존재의 법칙이다. -p.327 (제15장 참길)
우주의 원탁에서는 모든 것, 곧 바울,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스승, 세상을 비롯한 모든 사실, 삶을 비롯한 모든 실재, 죽음을 비롯한 모든 변화, 현재와 미래를 비롯한 모든 시간을 포함하는 만물이 일어나 그리스도의 주권을 증언하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에게 복종한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으로 조건을 확인해야 한다. 모든 것에는 불멸의 조건이 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라.” -p.383 (제17장 우주의 원탁)
■ 차 례
프롤로그 껍데기는 버리고 본질을 추구하라!
Ch. 1 출발 하나님의 약속|그리스도의 명령
Ch. 2 인도인의 삶과 맞붙다 원탁에서 만난 사람들|간절한 마음의 소리
Ch. 3 종교에 대한 솔직한 고백들 불확실한 영혼|고매한 절망
Ch. 4 거듭남 수평 개종과 수직 회심|회심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
Ch. 5 생명의 속죄 하나님 나라의 실현|좁은 문의 법칙
Ch. 6 더욱 커지는 구원자 사람의 아들, 예수|사람과 하나님이 만나는 곳, 예수
Ch. 7 하나님에 대한 체험 복음은 이론이 아닌 체험|복음은 요구가 아닌 제의
Ch. 8 안타까운 약속의 땅 거의 타오를 뻔하다가 꺼지는 불꽃|거의 될 뻔하다 가 실패하는 교회
Ch. 9 확실성과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인격|스스로 역사 의 증인이 된 예수
Ch. 10 그리스도의 통역자 복음은 생명 언어로의 통역이다|진정한 통역자는 예수
Ch. 11 원탁에 앉은 선교 단체 종의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나다|민족도 개인 도 사랑한 백부장
Ch. 12 원탁에 앉은 나라들 자기중심적인 바보들|자기희생의 권력
Ch. 13 가장 신성한 원탁 생명의 잔|완전한 승리
Ch. 14 십자가는 삶의 열쇠 값없이 받는 보혈의 선물|십자가는 하나님의 본성
Ch. 15 참길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다가온 하나님|예수는 길이고 진리며 생명
Ch. 16 예수는 보편적인 실체 진리는 보편적, 오류는 제한적|어느 상황에서 든 예수는 그 상황의 빛
Ch. 17 우주의 원탁 우리는 예수의 것|예수만이 참 소망옮긴이의 말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From NewsNJoy 서평 이벤트
7.06.2009
해돈 로빈슨의 조언
오늘날 강해설교가 더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강해설교를 논할 때, 그것은 단순히 설교의 형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을 논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성경에 굴복시킬 것인가, 아니면 성경을 우리의 생각에 굴복시킬 것인가?’ 이 질문에 얼마나 정직한 대답을 하느냐가 그 사람이 진정한 강해설교자인지 아닌지를 판별해 주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강해설교가 더 중요한 이유는 과거의 설교자들이 지녔던 권위가 이제는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성장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이 시대의 보통 사람들은 설교자를 지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리더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20년 전만 해도 목사를 대상으로 법적인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목사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들은 배심원들에게 그가 목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하려고 무슨 일이든지 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수많은 이유로 사람들에게 신뢰를 잃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 자체가 스스로 진리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연구하게 만든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설교자가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보고, 듣고, 이해하게 만든다면, 성경은 그 자체로 그들을 확신시키고,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고,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우리가 성경본문을 가지고 설교해야 하는 이유는, 성경본문 자체가 권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본래의 정체성,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재하고, 성령이 그 말씀에 응답하며, 설교자가 그 말씀을 청중들의 삶과 연관된 방식으로 전달할 때, 성경은 설교자의 권위로 할 수 없는 일들을 해 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설교의 형식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설교의 형식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설교의 형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것입니다. 설교의 형식은 본문의 형식을 반영해야 합니다. 설교는 본문의 사상을 반영할 뿐 아니라 본문의 형식에도 영향을 받아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구약의 내러티브 문학을 다룬다면, 설교도 반드시 구약에서 사용한 이야기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시편을 다룬다면, 시편은 사람들이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를 보여 주거나, 예배에 대해 가르치는 책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시편의 문학과 씨름해야만 합니다. 시편이 전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우리의 설교에서 어떻게 시적인 요소들을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하나님이 자신의 진리를 전달하실 때 특정한 형식을 취하셨기 때문에 설교자는 그 형식을 반영해야 한다는 철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설교 적용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부분의 복음주의진영과 자유주의 진영의 심각한 이단들의 이론은 교리 자체보다 적용에서 문제가 많습니다. 중요한 질문은 ‘본문을 특정한 방식으로 적용할 때, 설교자는 여전히 성경의 권위를 갖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세계와는 전혀 다른 고대 세계의 진리를 성경의 권위라는 이름으로 설득시키려면 반드시 본문과 씨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설교자는 본문을 적용하는 일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이 작업은 필수입니다. 청중들이 적용된 진리를 삶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본문을 적용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하지만 적용에는 율법주의의 위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어머니가 몸이 아픈데 자식들이 부모님을 모시지 않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때 우리는 만약 부모를 진정으로 공경한다면, 부모님이 나이가 들어 아프실 때 집에서 모셔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바로 그 적용(부모님을 집에서 모셔야 함)이 원리(부모님을 공경해야 함)를 지배하게 됩니다. 원리의 적용이 율법주의가 될 때, 적용 자체가 원리를 지배하게 될 때, 우리는 그릇된 길로 접어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적용 방식에는 신학적 위험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청중들에게 전하는 설교내용이 본문에서 추출한 원리와 본문의 상황을 역동성 있고 정확하게 반영하려면, 더 많이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분명, 설교자들은 전에 비해 이 부분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습니다만, 저는(로빈슨 교수) 설교자들이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기보다 청중들에게 죄책감을 심어 주는 방식을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이 본문이 ‘우리가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고 가르쳤는데, 청중들이 이를 실천에 옮기지 않자, 설교자들이 그것을 ‘당신이 해야 한다.’는 의미로 바꿔서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만약 거기에 ‘주께서 이르시기를’이라는 말까지 덧붙이면,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행사할 수 있는 모든 권력을 갖추게 되는 셈입니다.
적용에 관해 또 한 가지 기억할 것은, 목회자가 회중들을 격자로 구분하는 방법이 유용하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격자든지 괜찮겠지만, 한쪽은 베이비붐 세대, 베이비버스터 세대(출생률 격감기에 태어난 세대), Y세대와 같이 연령별 구분을 하고, 다른 한 쪽은 부모와 함께 사는 미혼자, 무자녀 부부, 기혼자, 이혼자와 같은 식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격자구분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격자구분을 만들고 나면, “나는 오늘 내가 전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진리임을 믿는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가족 없이 혼자 생활하는 18세의 젊은 여성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룸메이트와 함께 살면서 직장에 다니는 여성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만약 그 자매가 사무실에 찾아와 ‘목사님, 까다로운 룸메이트랑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혹은 ‘온종일 저만 감시하는 직장상사는 어떻게 대해야하죠?’라고 질문했을 때 이 본문은 과연 그녀에게 답을 제시해 주는가.”에 대해서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설교자는 청중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이처럼 회중들을 구분해 놓으면, 각 개인들 혹은 비슷한 개인을 묶어 놓은 그룹들을 좀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국제제자훈련원의 신간 “능력있는 설교 이렇게 한다!”에 실린 이 새대 최고의 설교자 20인의 조언 가운데 하나인 해돈 로빈슨 교수의 조언(69-94쪽)
우리가 강해설교를 논할 때, 그것은 단순히 설교의 형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을 논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성경에 굴복시킬 것인가, 아니면 성경을 우리의 생각에 굴복시킬 것인가?’ 이 질문에 얼마나 정직한 대답을 하느냐가 그 사람이 진정한 강해설교자인지 아닌지를 판별해 주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강해설교가 더 중요한 이유는 과거의 설교자들이 지녔던 권위가 이제는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성장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이 시대의 보통 사람들은 설교자를 지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리더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20년 전만 해도 목사를 대상으로 법적인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목사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들은 배심원들에게 그가 목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하려고 무슨 일이든지 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수많은 이유로 사람들에게 신뢰를 잃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 자체가 스스로 진리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연구하게 만든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설교자가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보고, 듣고, 이해하게 만든다면, 성경은 그 자체로 그들을 확신시키고,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고,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우리가 성경본문을 가지고 설교해야 하는 이유는, 성경본문 자체가 권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본래의 정체성,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재하고, 성령이 그 말씀에 응답하며, 설교자가 그 말씀을 청중들의 삶과 연관된 방식으로 전달할 때, 성경은 설교자의 권위로 할 수 없는 일들을 해 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설교의 형식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설교의 형식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설교의 형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것입니다. 설교의 형식은 본문의 형식을 반영해야 합니다. 설교는 본문의 사상을 반영할 뿐 아니라 본문의 형식에도 영향을 받아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구약의 내러티브 문학을 다룬다면, 설교도 반드시 구약에서 사용한 이야기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시편을 다룬다면, 시편은 사람들이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를 보여 주거나, 예배에 대해 가르치는 책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시편의 문학과 씨름해야만 합니다. 시편이 전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우리의 설교에서 어떻게 시적인 요소들을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하나님이 자신의 진리를 전달하실 때 특정한 형식을 취하셨기 때문에 설교자는 그 형식을 반영해야 한다는 철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설교 적용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부분의 복음주의진영과 자유주의 진영의 심각한 이단들의 이론은 교리 자체보다 적용에서 문제가 많습니다. 중요한 질문은 ‘본문을 특정한 방식으로 적용할 때, 설교자는 여전히 성경의 권위를 갖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세계와는 전혀 다른 고대 세계의 진리를 성경의 권위라는 이름으로 설득시키려면 반드시 본문과 씨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설교자는 본문을 적용하는 일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이 작업은 필수입니다. 청중들이 적용된 진리를 삶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본문을 적용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하지만 적용에는 율법주의의 위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어머니가 몸이 아픈데 자식들이 부모님을 모시지 않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때 우리는 만약 부모를 진정으로 공경한다면, 부모님이 나이가 들어 아프실 때 집에서 모셔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바로 그 적용(부모님을 집에서 모셔야 함)이 원리(부모님을 공경해야 함)를 지배하게 됩니다. 원리의 적용이 율법주의가 될 때, 적용 자체가 원리를 지배하게 될 때, 우리는 그릇된 길로 접어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적용 방식에는 신학적 위험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청중들에게 전하는 설교내용이 본문에서 추출한 원리와 본문의 상황을 역동성 있고 정확하게 반영하려면, 더 많이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분명, 설교자들은 전에 비해 이 부분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습니다만, 저는(로빈슨 교수) 설교자들이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기보다 청중들에게 죄책감을 심어 주는 방식을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이 본문이 ‘우리가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고 가르쳤는데, 청중들이 이를 실천에 옮기지 않자, 설교자들이 그것을 ‘당신이 해야 한다.’는 의미로 바꿔서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만약 거기에 ‘주께서 이르시기를’이라는 말까지 덧붙이면,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행사할 수 있는 모든 권력을 갖추게 되는 셈입니다.
적용에 관해 또 한 가지 기억할 것은, 목회자가 회중들을 격자로 구분하는 방법이 유용하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격자든지 괜찮겠지만, 한쪽은 베이비붐 세대, 베이비버스터 세대(출생률 격감기에 태어난 세대), Y세대와 같이 연령별 구분을 하고, 다른 한 쪽은 부모와 함께 사는 미혼자, 무자녀 부부, 기혼자, 이혼자와 같은 식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격자구분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격자구분을 만들고 나면, “나는 오늘 내가 전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진리임을 믿는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가족 없이 혼자 생활하는 18세의 젊은 여성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룸메이트와 함께 살면서 직장에 다니는 여성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만약 그 자매가 사무실에 찾아와 ‘목사님, 까다로운 룸메이트랑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혹은 ‘온종일 저만 감시하는 직장상사는 어떻게 대해야하죠?’라고 질문했을 때 이 본문은 과연 그녀에게 답을 제시해 주는가.”에 대해서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설교자는 청중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이처럼 회중들을 구분해 놓으면, 각 개인들 혹은 비슷한 개인을 묶어 놓은 그룹들을 좀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국제제자훈련원의 신간 “능력있는 설교 이렇게 한다!”에 실린 이 새대 최고의 설교자 20인의 조언 가운데 하나인 해돈 로빈슨 교수의 조언(69-94쪽)
2.27.2009
하나님
하나님은 "하나"이시다. 하나님은 산술적 개념으로서 "하나"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모든 것의 궁극, "수로써 표시할 수 없는 절대absolute"라는 의미에서의 하나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무한하고 영원한 "한"님이시며 절대적 권위와 권능의 "하늘"님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해 계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시는 분"이시다. 엡 4:6
그래서 유한한 인간은 무한의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크시고 또한 동시에 너무도 작으시다. 하나님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공동체를 통해서이다. 모든 것 위에, 모든 것을 통해, 그리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인식하려면 "모든 것"을 통합하는 것이 필요하다. 누구도 하나님을 온전하게 알 수 없다는 기본적인 전제를 수용하여 겸손과 배움의 자세를 가지고 서로를 존중하며 서로를 이해하려는 열린 마음, 너른 관점을 견지하여야 한다.
장님들이 코끼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신뢰하며 비평적으로 수용해야만 할 뿐 아니라, 나의 지식과 이해를 다른 사람들의 지식과 이해에 연관시켜 수정 보완하는 변증법적 접근이 필요한 것 처럼, 하나님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의 선이해를 객관화 시키고 나의 생각이 정초해 있는 전제와 가정에 질문을 던져 좀더 보편화된 기반을 확보하고 그 위에 논리적이며 통합적인 구조를 확립해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무한한 존재라는 믿음은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것을 요청한다. 하나님은 무한자이시기에 하나님 밖에서는 존재를 찾을 수 없다. 하나님 만이 스스로 존재하신다. 또한 하나님 만이 존재를 가능하게 하신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하나님께 의존적이다. 그렇다면 비존재는 어떤가? 비존재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음은 존재할 수 있는가? 실체reality가 없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더 긍국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빛은 존재한다. 어두움은 존재하는가?
12.28.2008
리더십
"구덩이를 파는 데 옷을 입고 팔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상의를 벗고 있으면 자네가 장교인지 누가 알아보겠나?"
...
"글쎄요, 견장을 차고 있어야만 내가 장교라고 알아본다면 그게 더 문제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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