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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7.2009

천천히 설교합시다.

천천히 설교합시다

요즘 다른 목사의 설교집을 제법 많이 읽었습니다. 인터넷이나 기독교 방송을 통해서 여러 분의 설교도 직접 들었습니다. 옛날부터 느낀 바이지만, 설교자들이 청중을 너무 어린애 다루듯이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아이의 특성은, 독립적으로 생각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결정해주면 그저 따르는 것으로 만족해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판단 능력이 없을 때도 있지만, 있다고 하더라도 정서적으로 의존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합니다. 어린이들이 담임선생님 말씀을 무조건 순종하듯이 신자들은 목사의 설교를 그렇게 순종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목사들은 신자들을 그렇게 어린애로 만들어놓아야 설교하기가 쉽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 신자들의 유아성은 너무 심각한 상태입니다. 심지어 대학교 선생이나 의사·변호사 등 나름대로 사회 지도층 인사인데도 불구하고 신앙 부분에서는 어린애와 똑같습니다.
이런 상황을 목사들은 속으로 즐겁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국 한국 교회의 토대가 위태로워지는 길입니다. 약간 다른 상황이지만 니체는 이런 유럽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가리켜 '가축떼' 윤리라고 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사육되는 가축 말입니다.

나는 니체의 비판이 그렇게 빗나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의 신자들은 '가축떼'로 사육되고 있습니다. '순종하라'는 말씀을 목사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린애가 어머니의 젖을 먹고 만족하듯이 종교적 만족감에 젖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본 회퍼가 말하는 '값싼 은혜'이기도 합니다. 값싼 은혜에 만족하고 아무런 영적 에너지를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요? 그 문제를 지금은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목사의 설교가 너무 조급증에 빠져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만 합니다. 설교자들이 너무 설치는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말을 너무 많이 합니다. 겨우 성서 내용을 정보로만 알고 있으면서 대단한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열을 올립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격언이 딱 어울립니다.

저는 그런 목사들의 설교를 듣고 나면 너무 허무해집니다. 자신이 아는 것만큼만 정직하게 설교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성령이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그 설교를 완성시키십니다. 그 비밀을 모르는 설교자들은 자신이 당장 청중의 신앙적 결단을 끌어내기 위해서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쏟아놓습니다. 본인이나 청중이나 허탈해집니다. 그런 허탈을 모면하기 위해서 자극적인 예화를 끌어들이거나 신앙을 과장합니다.

우리 설교자들, 조급하게 설교하지 맙시다. 구원은 우리의 말재주가 아니라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하십니다. 우리의 영역이 줄어들어야 영의 영역이 늘어납니다.
천천히 목회하고 천천히 설교합시다. 우리의 주제를 잘 파악하고 그분에게 많은 부분을 맡깁시다. 그래도 교회는 잘 굴러갈 테니까, 그래도 신자들의 신앙은 줄어들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맙시다.

정용섭 / 샘터교회 목사·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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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 만큼, 경험한 것 만큼, 삶으로 체득한 것 만큼만 설교해야 할 일이다. 풍부한 언어와 현란한 수사, 정교한 논리, 깜짝 놀랄만한 통찰에 집착하게 될 때, 사람을 잠시 설득할 수는 있겠으나, 오히려 자신과 공동체를 진리와 성령의 초월적 은혜의 자리에 깊이 머무르게 하는 것을 방해할 소지가 더 많다. 진리는 단순하며 인격적이다. 그 진리가 오셔서 성령의 역동적 역사로 일하실 수 있도록 천천히, 차분히, 그리고 진리를 실천함으로 설교해야 한다. 내 삶이 설교가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필요 이상의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꼭 필요한 것과 행해야 할 것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전달하고는 그대로 행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복음은 말의 지혜에 제한 받지 않는다 (고전 1:17). 오히려 나의 말과 행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구속당해야 할 것이며, 그러할 때 드러나는 삼위 하나님의 초월적 역사를 공동체가 함께 경험하도록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공동체의 구성원 하나 하나가 주체적으로 말씀을 통해 세상과 자신을 깊이 반추하여 각성하고 지혜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bk

7.21.2009

믿음은 삶이다

프란체스코의 설교

믿음이란 관념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이어야 한다. 설교란 일방통행식의 가르침이 아니라 그 사람의 평편과 눈높이에 맞춘 진정한 교감이어야 한다. 가정에서는 온유하고, 타인에게 겸손하며, 불행한 자에게는 동정을, 악한 자에게는 저항을, 축복을 입은 자에게는 축하를, 뉘우치는 자에게는 용서를 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은 관념이 아니라 삶이다.

-김동훈, 역사와 함께하는 말씀묵상

7.06.2009

해돈 로빈슨의 조언

오늘날 강해설교가 더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강해설교를 논할 때, 그것은 단순히 설교의 형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을 논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성경에 굴복시킬 것인가, 아니면 성경을 우리의 생각에 굴복시킬 것인가?’ 이 질문에 얼마나 정직한 대답을 하느냐가 그 사람이 진정한 강해설교자인지 아닌지를 판별해 주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강해설교가 더 중요한 이유는 과거의 설교자들이 지녔던 권위가 이제는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성장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이 시대의 보통 사람들은 설교자를 지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리더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20년 전만 해도 목사를 대상으로 법적인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목사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들은 배심원들에게 그가 목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하려고 무슨 일이든지 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수많은 이유로 사람들에게 신뢰를 잃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 자체가 스스로 진리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연구하게 만든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설교자가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보고, 듣고, 이해하게 만든다면, 성경은 그 자체로 그들을 확신시키고,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고,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우리가 성경본문을 가지고 설교해야 하는 이유는, 성경본문 자체가 권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본래의 정체성,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재하고, 성령이 그 말씀에 응답하며, 설교자가 그 말씀을 청중들의 삶과 연관된 방식으로 전달할 때, 성경은 설교자의 권위로 할 수 없는 일들을 해 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설교의 형식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설교의 형식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설교의 형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것입니다. 설교의 형식은 본문의 형식을 반영해야 합니다. 설교는 본문의 사상을 반영할 뿐 아니라 본문의 형식에도 영향을 받아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구약의 내러티브 문학을 다룬다면, 설교도 반드시 구약에서 사용한 이야기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시편을 다룬다면, 시편은 사람들이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를 보여 주거나, 예배에 대해 가르치는 책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시편의 문학과 씨름해야만 합니다. 시편이 전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우리의 설교에서 어떻게 시적인 요소들을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하나님이 자신의 진리를 전달하실 때 특정한 형식을 취하셨기 때문에 설교자는 그 형식을 반영해야 한다는 철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설교 적용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부분의 복음주의진영과 자유주의 진영의 심각한 이단들의 이론은 교리 자체보다 적용에서 문제가 많습니다. 중요한 질문은 ‘본문을 특정한 방식으로 적용할 때, 설교자는 여전히 성경의 권위를 갖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세계와는 전혀 다른 고대 세계의 진리를 성경의 권위라는 이름으로 설득시키려면 반드시 본문과 씨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설교자는 본문을 적용하는 일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이 작업은 필수입니다. 청중들이 적용된 진리를 삶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본문을 적용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하지만 적용에는 율법주의의 위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어머니가 몸이 아픈데 자식들이 부모님을 모시지 않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때 우리는 만약 부모를 진정으로 공경한다면, 부모님이 나이가 들어 아프실 때 집에서 모셔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바로 그 적용(부모님을 집에서 모셔야 함)이 원리(부모님을 공경해야 함)를 지배하게 됩니다. 원리의 적용이 율법주의가 될 때, 적용 자체가 원리를 지배하게 될 때, 우리는 그릇된 길로 접어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적용 방식에는 신학적 위험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청중들에게 전하는 설교내용이 본문에서 추출한 원리와 본문의 상황을 역동성 있고 정확하게 반영하려면, 더 많이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분명, 설교자들은 전에 비해 이 부분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습니다만, 저는(로빈슨 교수) 설교자들이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기보다 청중들에게 죄책감을 심어 주는 방식을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이 본문이 ‘우리가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고 가르쳤는데, 청중들이 이를 실천에 옮기지 않자, 설교자들이 그것을 ‘당신이 해야 한다.’는 의미로 바꿔서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만약 거기에 ‘주께서 이르시기를’이라는 말까지 덧붙이면,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행사할 수 있는 모든 권력을 갖추게 되는 셈입니다.

적용에 관해 또 한 가지 기억할 것은, 목회자가 회중들을 격자로 구분하는 방법이 유용하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격자든지 괜찮겠지만, 한쪽은 베이비붐 세대, 베이비버스터 세대(출생률 격감기에 태어난 세대), Y세대와 같이 연령별 구분을 하고, 다른 한 쪽은 부모와 함께 사는 미혼자, 무자녀 부부, 기혼자, 이혼자와 같은 식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격자구분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격자구분을 만들고 나면, “나는 오늘 내가 전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진리임을 믿는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가족 없이 혼자 생활하는 18세의 젊은 여성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룸메이트와 함께 살면서 직장에 다니는 여성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만약 그 자매가 사무실에 찾아와 ‘목사님, 까다로운 룸메이트랑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혹은 ‘온종일 저만 감시하는 직장상사는 어떻게 대해야하죠?’라고 질문했을 때 이 본문은 과연 그녀에게 답을 제시해 주는가.”에 대해서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설교자는 청중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이처럼 회중들을 구분해 놓으면, 각 개인들 혹은 비슷한 개인을 묶어 놓은 그룹들을 좀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국제제자훈련원의 신간 “능력있는 설교 이렇게 한다!”에 실린 이 새대 최고의 설교자 20인의 조언 가운데 하나인 해돈 로빈슨 교수의 조언(69-9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