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s

Showing posts with label 의미.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의미. Show all posts

11.10.2010

기억과 망각

내셔널 지오그래픽

글 : 조슈아 포어____사진 : 매기 스티버


무엇이든 줄줄 외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의 뇌는 어떻게 기억하고 망각하는가?

사무원으로 일하는 41세 여성이 있다. 의학 연구 자료에서 'AJ'로 언급되는 이 여성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 출신으로 11세 이후 삶의 하루하루를 거의 빠짐없이 기억한다. 한편 실험실 연구원으로 일하다 은퇴한 85세 남성인 'EP'는 방금 전 일만 기억한다. AJ의 기억력을 세계 최고로, EP의 기억력을 최악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내게 과거는 상영 중인 영화 같아요. 멈출 수도, 통제할 수도 없어요." AJ는 말한다. 그녀는 1986년 8월 3일 일요일 오후 12시 34분, 짝사랑하던 청년에게 전화가 왔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1988년 12월 12일 방영된 TV 쇼 '머피 브라운'의 내용도 기억한다. 1992년 3월 28일 베벌리힐스호텔에서 아버지와 점심을 먹었던 것도 기억한다.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사건들, 장보러 간 일, 날씨, 그날그날 기분도 기억한다. 매일매일이 훤하다. 어떤 걸 물어봐도 거침없이 대답한다.
손으로 꼽을 정도긴 하지만 비범한 기억력의 소유자들은 종종 있었다. 영화 '레인맨'의 실제 모델인 천재 킴 픽(56)은 1만 2000권에 달하는 책을 외운다고 한다(한 쪽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은 8~10초). 러시아 신경심리학자 알렉산더 루리아가 30년 동안 연구했던 러시아 저널리스트 'S'는 엄청나게 긴 단어나 숫자, 의미 없는 음절들을 한 번 들으면 몇 년이 지난 뒤에도 기억해냈다. 하지만 AJ는 특이하다. 그녀의 비상한 기억력은 사실이나 숫자가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외우고 있다. 이처럼 고갈되지 않는 기억력으로 자신이 겪은 일을 세세한 것까지 기억하는 일은 유례가 없는 데다 학계에서 규명된 것도 거의 없다. AJ를 7년 동안 연구해온 캘리포니아대학교 어바인캠퍼스의 신경과학자 제임스 맥거프, 엘리자베스 파커, 래리 케이힐은 AJ의 상태를 설명하는 새로운 의학 용어를 만들어야 했다. 바로 '과잉기억 증후군'이다.

 키 180cm인 EP는 단정하게 가르마 탄 백발에 귀가 유난히 길다. 다정다감하고 정중하며 잘 웃는다. 첫인상은 마음씨 좋은 옆집 할아버지 같다. 그러나 15년 전, 단순포진 바이러스가 벌레가 사과를 갉아먹듯 뇌 중앙까지 파먹어 들어갔다. 바이러스가 활동을 마치자 양쪽 내측두엽에 호두알만 한 구멍이 생겼고 EP의 기억도 대부분 사라졌다. 공교롭게도 바이러스는 결정적인 부위를 정확히 공격했다. 뇌 양쪽에 있는 내측두엽엔 지각을 장기기억으로 변환시키는 '해마'라는 고부라진 기관과 주변 영역이 자리하고 있다. 사실 기억이 저장되는 곳은 해마가 아니다. 기억은 쭈글쭈글한 뇌 외피층인 신피질에 저장된다. 하지만 해마는 기억을 붙잡아놓는 역할을 담당하는 뇌조직 중 하나다. 해마가 손상된 EP의 뇌는 마치 헤드가 고장난 캠코더와 비슷하다. 보기는 하되 기록할 수 없는 것이다.

EP는 순행성과 역행성, 두 종류 기억상실증을 동시에 앓고 있다. 순행성 기억상실증은 새로 습득한 정보를 기억으로 전환시키지 못하며 역행성 기억상실증은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따라서 EP는 새로운 기억을 만들 수 없을 뿐 아니라 1960년 이후의 과거 역시 기억하지 못한다. EP는 어린시절과 상선선원 시절, 제2차 세계대전은 모두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서 휘발유 가격은 아직도 리터당 25센트며 달 착륙은 일어난 적이 없다.

AJ와 EP는 기억력의 양 극단을 보여준다. 또한 두 사람의 사례는 기억력이 그 사람의 정체성까지 좌우할 수 있음을 어떤 뇌 영상보다 더 생생하게 보여준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양 극단 사이에서 왔다갔다한다. 유난히 기억이 잘 날 때는 내가 AJ처럼 천재가 아닐까 착각하거나, 혹시 EP처럼 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본 경험이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척추 꼭대기에 달랑 얹혀 있는 약 1.3kg의 주름 투성이 살덩이는 어린시절의 사소한 일도 평생 저장하는가 하면 아주 중요한 전화번호를 2분도 안 돼 잊어버리기도 한다. 기억이란 이처럼 묘한 것이다.
기억의 정체는 뭘까? 현재 신경과학자들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정의는 뉴런 사이의 일정한 연결 패턴이 저장된 것이 기억이다. 뇌에는 약 1000억 개의 뉴런이 있고, 각각의 뉴런은 5000~1만 개의 시냅스를 형성할 수 있다. 따라서 보통 성인의 뇌에는 총 500~1000조의 시냅스가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미국 의회도서관 장서에 있는 정보를 다 모아도 약 32조 바이트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양이다. 우리가 어떤 기분을 떠올리거나 어떤 걸 생각할 때마다 이 방대한 네트워크의 연결 패턴에 변화가 일어난다. 시냅스는 더 공고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하며 새로 형성되기도 한다. 우리 몸의 조직은 변하고 있다. 항상, 매 순간, 심지어 잠든 사이에도.
-----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 그 때가 지금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1.7.12) 어거스틴의 고백록

기억이 나지 않으면, 잊혀지면 현재의 나와는 상관 없는 것이 되는 것일까? 지나간 과거들이 나는 빨리 잊혀진다. 좋은 기억들 뿐 아니라 나쁜 기억들도, 그리고 내가 애쓰고 힘써 배웠던 것들도, 심지어는 잊지 말자고 다짐했던 것들조차 다 망각의 방으로 자취를 감춰 버린다. 기억할 수 없다면 현재에 통합할 자료를 잊어 버린다. 기억이 없다면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면 적용할 수 없으며, 적용이 안되면 분석도 평가도 그리고 새로운 창조도 가능하지 않다.

정말 무서운 것은 기억이 정체성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롱텀메모리에 남겨진 것들만이 나의 자아를 형성하고 내 가치관을 세운다.그런데 나는 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 숫자를 기억하는 것 뿐 아니라 있었던 일 들과 그 의미까지 쉽게 잊는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했갈리나 보다.

한편, 왜곡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은 기억을 잘 못하는 것 보다 더욱 위험하다. 메멘토의 레너드는 10분 이상 기억을 지속하지 못하는 휘발성 메모리를 가졌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문제는 짧은 기억력이 아니라 왜곡된 기억이었다.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은 두뇌학에서는 무엇이라고 할까? 기억력과 뇌의 기능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어떻게 기억력을 향상시킬 수 있을까? 기억력은 향상되는 것일까? 기억과 신앙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기억과 인간의 성숙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데이빗 수사의 책을 좀 살펴 보아야 겠다.
bk

3.14.2010

인간됨의 결정적 조건

"A defining condition of being human is our urgent need to understand and order the meaning of our experience, to integrate it with what we know to avoid the threat of chaos." Jack Mezirow (2000)

인간됨의 결정적 조건중 하나는 우리의 경험을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과 연결해 이해하며 조직화함으로 혼란과 혼동이 주는 위협을 피하려는 절박한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며, 의미를 구성하고, 의미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이다. 의미는 인간에게 생명과 같다. 무의미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투쟁은 죽음의 힘 보다 더 강력하다. 인생의 의미를 구성하지 못할 때 조차, 인간은 죽음으로써 삶의 무의미를 종식시키려 할 만큼 인간에게 있어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며 의미를 구성/재구성하는 행위는 근원적 본능이다. 그렇다면 의미란 무슨 의미인가? 의미를 추구한다는 말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어떻게 의미를 추구하는가? 무슨 의미를 추구하는가? 의미는 발견하는 것인가 아니면 형성되는 것인가? 의미는 어떻게 변형/변화 되는가?

매저로는  구조주의적 인식론을 바탕으로이러한 질문들을 탐구해 나간다. 비판적 사고를 통한 인식구조의 변혁과 확장은 구조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개념이며 이러한 인식구조의 변형을 성인교육의 영역에서 설명하고 통합한 공로로 그는 변형적 학습이론transformative learning theory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그러나 매저로에게 있어 왜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가? 어떤 의미가 의미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의미의 근거는 무엇인가? 에 대한 대답은 대체로 무시되고 있다. 그것은 그가 인간의 의미구성이라는 현상을 이해하는데 있어 구조주의 인식론에 과도하게 의존하면서도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존재론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이 사회과학적 접근이 보변적으로 기반하는 암묵적 가정의 오류이다. 즉 관찰자의 실존적 한계를 간과하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는 스스로 알 수 없으며 나의 나됨을 인식하려면 절대 타자의 거울앞에 서야 한다는 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바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첫머리를 이렇게 기록한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지혜, 즉 참되고 온전한 지혜는 거의 모두가 두 가지 부분으로 구성된다.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다. 이 두 지식은 여러 끊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그 중 어떤 것이 먼저오며, 어떤 것이 그 결과로 파생되는 것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Institute I.i.1).

그렇다면, 인간됨의 결정적인 조건은 "혼란과 혼동을 피하려는 절박한 필요때문에 의미를 구성하려는 습성"이기 보다는, 그러한 갈망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절대의미, 의미의 절대기준, 의미를 추구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신 인간과 우주의 존재적 의미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깨달아 아는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과 내 자신을 알아가기를 통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향방없는 의미추구가 주는 허무와 절망의 긴 터널 통과한 후 증언한 어거스틴의 고백은 이런 점에서 울림이 크다: "당신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찬양하기를 즐거워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당신을 향하여 살도록 당신이 우리를 창조하신 까닭이니 우리 심령은 당신 안에서 쉼을 얻을 때가지 평안할 수 없습니다." (Confessio 1.1.1).

bk

11.28.2009

존재와 제 4의 힘

"사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하나의 존재라는 사실과 그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지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존재 자체에 개방하는 것이다."
Loder, J. (1981), p. 116

-------------------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왜,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묻고 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끊임없이 내 내면적 자아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삶의 환경에 대해 의미를 부과하고 그 관계를 설명하며 더 가치있고 의미있는 관계를 구성하기 위해 투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고민하고 투쟁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를 확인한다.

존재의 의미를 위해 투쟁이 필요한 이유는 자아와 환경이 존재를 파괴하며 무의미하게 만드는 죽음의 실체로 작용하기 때문이며 이 "제 3의 힘"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영혼의 투쟁은 바로 "제 4의 힘"을 갈망한다. 나는 갈망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를 소망한다.

제 4의 힘은 죽음을 극복하며 뒤틀려진 세계와 자아를 재구성하는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제 4의 힘을 통해 나는 존재하기를 포기하지 않으며 존재를 확신한다. 따라서 나의 존재는 비존재를 극복하고 존재를 영속화할 수 있는 추동력을 얻는다. 나는 제 4의 힘을 믿는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 영원히.

bk

7.04.2009

배움을 위한 기도

배우게 하소서 -존 베일리-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일을 잘 이용하여
죄의 열매를 거두지 않고
성결의 열매를 거두게 하소서

실망으로 희망을 배우게 하소서
성공으로 감사를 배우게 하소서
불안으로 참음을 배우게 하소서
위험으로 담대함을 배우게 하소서

비난으로 오래 참음을 배우게 하소서
칭찬으로 겸손을 배우게 하소서
기쁨으로 절제를 배우게 하소서
고통으로 인내를 배우게 하소서

4.14.2009

"그 신성한 덮개" -종교 사회학적 이론의 요소들

Peter Berger (1929-)
피터 버거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미국 사회학자이며 루터파 신학자이다. 토마스 루크만Thomas Luckmann과 공저한 "실체의 사회적 구성" The Social Construction of Reality: A Treatise in the Sociology of Knowledge (New York, 1966) 이라는 책으로 종교사회학 분야에 의미있는 공헌을 하였다.

4.02.2009

메뚜기도 한 철

우리집 가훈(?) 중 하나는 "메뚜기도 한 철"이다.
아이들에게 세상 만사는 사건들의 역동적 "움직임"으로 엮여져 있으며
거기에는 의미있는 시간으로써의 "때,"
즉 "카이로스"가 서로 연결 되어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이 가르침이 주는 여러 유익 중 하나를 잘 설명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
고대 이스라엘의 다윗 왕이 어느날 궁중의 세공장을 불러 자신을 기리는 아름다운 반지를 하나 만들라고 지시하였는데,

“반지에는 내가 큰 승리를 거둬 기쁨을 억제하지 못할 때
스스로를 자제할 수 있고,
반면 큰 절망에 빠졌을 때 좌절하지 않고 용기를 얻을 수있는
글귀를 새겨넣도록 해라”라고 주문하였다.

반지를 만들어놓고도 적합한 글귀가 생각나지 않아 며칠을 끙끙대던 세공장은
지혜롭기로 소문난 솔로몬 왕자를 찾아갔다.
세공장의 고민을 들은 솔로몬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렇게 적어라..."



'이 또한 곧 지나가리라’

----
이사야는 이렇게 적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음유적으로 표현했다.
"메뚜기도 한 철이여(이당께)!"

2.20.2009

앎과 노출

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

"The truth is a snare: you cannot have it, without being caught. You cannot have the truth in such a way that you catch it, but only in such a way that it catches you."

진리는 인격이다. 진리는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에게 우리가 노출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진리에 의해 점령당하는 것이다. 진리는 살아있는 인격이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알아간다는 것은 그에 의해 영향을 받는 다는 뜻이다. 그래서 진정한 앎은 내 자유를 댓가로 지불할 때에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하신 말씀은 이런 점에서 역설이다. 내 자유를 그분에게 내려 놓는 믿음이 선행되어야 진리를 알 수 있게 된다. 내 자유를 포기할 때에라야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된다. 키에르케가르는 말할 것이다. 내가 누리려는 자유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누리는 자유에는 극명한 질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말이다.

"무엇이 삶이냐"고 묻지 말고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라고 물어라. 내가 존재하는 방식이 내 삶을 규정하는 것이지 삶을 정의내리자고 내가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어차피 삶은 누구에 의해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방황하지 말아라. 대신 의미있다고 믿는 바를 행하며 오늘을 살아라. 그것이 의미있는 삶이며 삶의 의미이다.

2.10.2009

배움이란

배움이란 의미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느끼는 현재의 경험들을 의미화하는 것이다.
우리의 경험들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 통일성을 부여하고, 일관된 설명이 가능하게 하는 것, 즉 해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배움이란 끊임없는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 즉 경험의 해석과정이다.

Jack Mezirow, Transformative Dimensions of Adult Learning, 1991. p. 11

사람들은 저마다의 "습관화된 기대의 틀sets of habitual expectation" 또는 "의미관점meaning perspective"을 통해 감각된 자료들을 이해하고 수용하며 기억한다. 의미관점은 Albert Wolters가 설명한 세계관일 수도 있고, Thomas Kuhn의 패러다임일 수도 있고, Sara Little의 신념체계일 수도 있다. 여기서 매저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점은 사람들이 외부의 정보들을 수용할 때 주체적으로 이미 스스로 가지고 있는 의미를 부여하는 어떤 구조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사과를 본다고 할 때, 그 사과가 주는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에게는 단순한 과일로, 다른 사람에게는 누가 남기고 간 쓰레기로, 또 다른 사람에게는 그리고 싶은 대상물로 수용된다. 이렇게 같은 사물을 놓고도 다른 의미가 만들어 질 수 있는 원인은 그 대상물 자체의 속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실체를 수용하는 수용자의 "의미관점"의 차이 때문이다. "의미를 느낀다", "의미를 부여한다", "의미를 창출한다", 또는 "의미를 깨닫는다"는 것은 모두 외부의 자료를 수용하는 데 있어 "의미관점"을 활발하게 사용하여 외부의 자료들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은 사실상 언어라는 시스템을 통해 구체화된다. 사과를 인식할 때 이미 거기에는 "사과"라는 언어로 제한된 의미가 부여된 또는 분류categorized된"사과"의 개념을 수용하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비트겐쉬타인을 좀 공부해 놓을 것을 그랬다. 소쉬르로 부터 시작되는 언어사회학/기호학의 기본 개념을 배워둘 필요가 있다. 랑그와 빠롤, 그리고 기표와 기의를 구분하고자 했던가? 랑그는 빠롤이 가능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기의와 기표의 관계는 사물과 단어가 아니라 개념과 청각이미지와의 관계이다.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언어가 역사와 사회를 통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의미관점은 사회의 산물이며 문화적 상황에 항상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상인과 현대의 비즈니스맨은 언어만 다른 것이 아니다. 의미는 선언어적으로는 prelingustically 상황과 상징적 모델들을 통해, 그리고 (직접적으로는) 언어를 통해 구성된다.

의미관점은 새로운 자료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데 일정한 구조를 따르게 하며 수용된 경험은 다시 의미관점을 재형성하고 확장시킨다. 배움이라는 것은 이러한 과정들 속에서 기존의 의미관점에 커다란 변화가 올때 일어난다. 이미 구성화된 의미관점들, 선입관, 가정, 전제,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입장, 사회적 상태와 교육된 이해들의 복잡한 의미관점들에 변화가 생기는 것이다. 매저로는 이를 관점의 변화perspective transformation라고 지칭한다.

배움은 해석의 변증법적 과정이다. 이미 가지고 있는 의미관점을 통해 대상들이나 사건들과 상호작용을 하는 변증법적 과정이다. 보통은 이미 형성된 의미관점을 가지고 현재 사건이나 대상을 해석한다. 그러나 변화학습은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지나간 과거의 경험을 재해석하여 결국 과거 경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관점을 창조해 낸다.

배움은 현재 경험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재구성함으로 장래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강화하는 과정이다.

1.01.2009

고통스러운 조사

축구 팀에 비유한다면, 운동장에서 뛰는 11명의 선수들 가운데 4명만이 어느 쪽 골대에 골을 넣어야 하는지 알고 있는 셈이다. 또한 11명 가운데 2명만이 골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자기 포지션과 그 역할 을 알고 있다. 2명을 제외한 모든 선수들이 상대팀과 싸우기 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을 것이다.

Stephen Covey, The 8th Habit, 22

12.16.2008

문화와 신학

Stanley J. Grenz

신학 일반과 특히 복음주의 신학의 지역적
(국지적) 성격은 그것이 문화적 활동이라는 데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다.

현대에는 인류학자들이 문화를 문화적 집단의 성원들에게 외적으로 전달할 수 있고 개인들을 사회에 묶는 선재하는 사회 질서적 힘으로 묘사했었다. 그런데 포스트모던 인류학자들은 문화 안에서의 결렬과 나뉨(disjuncture)을 지적한다. 그들은 여러 다른 문화들이 전체를(wholes) 이룬다는 것을 쉽게 인정한다. 그런데 이 전체(wholes)는 단일한 성질의 것(monolithic)이 아니라, 내적으로 갈라진 것이라는 것을 포스트모던 인류학자들은 지적하는 것이다.[24] 그래서 헨리 코헨(Henry Cohen)은 문화를 "사람들과 과정들을 통합(統合)시키기(integrates) 보다는 그들을 집적(集積)시키는(aggregates) "이라고 묘사한다.[25] 더 나아가 포스트모던 인류학자들은 문화를 사회적 상호 작용의 결과나 산물이라고 말한다.[26] 사회는 공적 상징들의 의미를 규정하고 그렇게 해서 의견의 일치(consensus)를 형성하려고 계속 투쟁하는 일에 관여하는 사람들의 집적(集積)이라는 것이다.[27] 결과적으로, 알랑 뚜랑(Alain Touraine)이 지적한 바와 같이, 사람들은 사회 관계의 일반적 틀이나, 분명히 이해된 일단의 신념이나 가치들, 또는 주도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함께 엮어 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화적 접착제는 "사회적 행동가들이 조절하고 통제하려 하고, 충용하며, 또는 그것들을 사회적 조직으로 변혁시킬 때 그들이 서로 양보하고 절충하는 일련의 자원들과 모델들"로 구성된다.[28]

신학은 모든 문화 안에 있는 의미를 형성하는 활동(the meaning-making activity)과 연관된다. 좀더 구체적으로 신학은 특정한 사회의 건축 벽돌과 문화 의미의 전달자로서 기능하는 다양한 상징들과 실천들과 연관된다. 따라서 기독교 신학은 '기독교 문화적' 의미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을 형성하는 과제와 연관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스 프라이(Hans Frei)는 신학을 "기독교 공동체에 내재해 있는 규범이나 규범들 아래서 그 공동체 자체의 언어나 행동을 기독교 공동체가 다시 평가하는 것"이라고 묘사한다.[29] 또한 캐떠린 태너는 신학을 "의미 생산에 전념하는 실질적 사회적 습관"(a material social practice that specialized in meaning production)이라고 선언한다.[30]
24 Kathryn Tanner, Theories of Culture: A New Agenda for Theology (Minneapolis: Augsburg Press, 1997), 56.
25 Anthony P. Cohen, Self Consciousness: An Alternative Anthropology of Identity (London: Routledge, 1994), 118-19.
26 Cohen, Self Consciousness, 118-19.
27 Tanner, Theories of Culture, 56.
28 Alaine Touraine, Return of the Actor, trans. Myrna Godzich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apolis Press, 1988), 8, 26-27, 54-55.
* 여기서 신학의 문화적 환원이 발생할 위험이 있음에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신학이 문화 형성적 작업과 관련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학의 여러 기능 중의 하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학의 의미를 이 글에서의 그렌츠와 같이 오직 문화의 의미 형성 작업과만 연관시키면, 신학의 다른 측면을 놓치고, 문화론적, 의미론적 환원일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역자 주).
29 Hans W. Frei, Types of Modern Theology, ed. George Hunsinger and William C. Placher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2), 2.
30 Tanner, Theories of Culture, 72.

Getting Things Done

we spend so much time worrying about the agreements we make with others, but it begins with making and keeping agreements with ourselves, eliminating the negativity that happens when we don't.

David Allen

이론상으로는 단무지... 실천으로는 영무지
영어로 는 Just Do It... 한글로는 "그냥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