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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2012

우월감 섬김 그리고 겸손

"겸손하게 낮아져 섬기는 것은 가장 차원높은 사랑입니다.... 잘 섬기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너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우월감입니다...교만한 사람은 가르칠수는 있으나 섬길수는 없습니다. 진심으로 섬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겸손한 사람뿐입니다." 최순자 박사

오랬동안 발로 뛰는 선교를 하신 MOM선교회의 최순자 박사님을 거의 10년만에 다시 뵈었다. 퍼주는 선교와 가르치는 선교는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가르치신 복음의 정신을 담지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반드시 문제를 야기시킨다고 하신 말씀이 마음에 오래도록 남는다. 의존심, 거지근성, 그리고 주종관계가 형성되면 선교사의 제자는 길러낼 지 모르지만 주체적으로 신앙을 실천하는 예수의 제자는 만들어 내기 어렵다.

어디 선교지와 선교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겠는가 생각해 보니 많은 반성을 하게 된다. 전문가가 아니면 접근하기 어려운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늘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목회자는 예수의 제자가 아닌 자신의 제자를 만들어낼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있는 것 같다. 목회현장에도 의존성, 거지근성, 그리고 주종관계가 만연하다. 목회자의 가르침이 섬김이 되어 성도들이 신앙의 주체로 해방되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통전적인 신앙생활을 하도록 도우려면 먼저 인격적 만남과 상호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는 구조와 문화를 형성하는 데 자원을 집중해야 한다. 성육신은 신-인 의사소통 구조를 혁명적으로 바꾸고 하나님나라의 새로운 공동체 문화를 창출해 가시는 하나님의 인간섬김의 사건이지않은가!

bk

12.15.2010

Bravery 용기

Courage is the resistance to fear, mastery of fear, not the absence of it." Mark Twain
용기는 두려움에 대한 저항,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지 두려움의 부재가 아니다.

그러니까 결국, 진정한 용기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통해 피어나는 꽃이다.
bk

12.14.2010

십자가의 깊이와 폭력

자기에 대한 죄인들의 이러한 반항을 참아내신 분을 생각하십시오. 히 12:3

진정으로 사랑하고 섬겼던 사람에게 배신과 경멸과 모욕을 당해 본 일이 없는 사람이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자기 스스로가 하늘 아버지의 형용할 수 없는 은혜와 사랑을 모욕하고 경멸했다는 사실을 깨달으려면, 사랑하는 이로부터 당한 배신때문에 분노와 복수심으로 온 밤을 하얗게 지새는 고통을 경험해야 한다는 점에서 은혜는 고통을 댓가로 지불한 깨달음이라는 말이 성립한다. 

복수와 응징의 폭력 액션영화를 즐기는 사이, 우리는 이 히브리서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점점 더 상실해 간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보면, 오히려 인간의 사랑이 가진 한계와 대조된 십자가 사랑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죄와 맞서서 싸우지만, 아직 피를 흘리기까지 대항한 일은 없습니다..." 살이 찣기고 피를 흘리기까지 죄와 맞서 싸우는 일은, 아이러니겠지만 폭력을 통해서는 절대로 배울 수 없다.

bk

5.18.2010

죄 죽이기mortification와 영적 성장

"죄를 크게 죽여 본 사례를 가지는 것은 죄의 몸에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이다. 또한, 죄에 강타를 퍼부어서 비틀거리게 하고 주춤거리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죄와 싸울 수 있는 튼튼한 기반과 발판을 얻게 되며, 죄는 쓰러지기 직전이 되고, 다음 번에 우리는 죄와 더 쉽게 싸울 수 있게 된다. 죄는 점점 겁을 먹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쉽게 죄를 굴복시킬 수 있으며 적어도 죄와 싸우는 것이 쉽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마음대로 죄를 죽일 수 있다. 죄를 크게 죽여 본 사례들과 자기를 부인해 본 경험 없이 살아가는 동안에는 옛 사람이 계속해서 자기 자리를 잡고 있다. 옛 사람은 억세고 끈질기기 때문에 작은 타격에는 요동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이 왜 수많은 성도들이 은혜 안에서 민감하게 성장하지 못하는가 하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다. 가장 크게 죄를 죽이고 난 후에 나는 언제나 가장 큰 위로를 체험한다...."

조나단 에드워즈, 1723년 1월 14일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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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한다는 것은 성서와 역사가 증언하는 엄중한 사실이다. 죄된 본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최고의 선 대신 차선을 택하는 선의 결핍, 즉 "악"을 초래하게 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된 본성은 살살 달래야하는 우는 아기가 아니다. 철저히 소멸시켜야 하는 악의 근원이며 생명을 걸고 대적해 싸워야 하는 비열하고 악랄하며 끈질긴 원수이다.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살아나 나를 죽이려 덤벼드는 터미네이터 같다고나 할까.

죄를 다룸에 있어 신앙의 선배들은 성서의 교훈과 명령을 쫓아 "죄 죽이기"를 훈련하였다. 바울은 죄된 본성으로서의 육체적 소욕은 성령의 소욕과 정면으로 충돌하며 성령을 따라 살려는 모든 의지를 무력화시키려한다고 설명하고 그리스도를 주로 모신 사람들은 이러한 육체의 소욕을 성령의 능력으로 계속해서 십자가에 못밖아 죽여버리는 사람들이라고 선언하였다. 칼빈은 바울의 가르침을 수용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신자들의 성화과정이 "항구적 금식"과 같은 죄죽이기mortification의 연속이라고 표현하였다. 청교도였던 존 오웬은 신자들의 영적 성장과 생명력, 그리고 영혼의 참된 위로가 죄죽이기mortification에 달려 있다는 선배들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그 방법을 자세하고 조직적으로 설명하였다. 결국 스스로 높아지려는 교만과 자기만을 사랑하는 이기심, 허탄한 자기 자랑을 추구하는 욕망은 길들일 대상이 아니라 죽여버려야 할 대상이다.

자기 자신을 "크게 죽여본 경험"이 중요하다고 본 에드워즈의 통찰은 참으로 귀하다. 처음이 어려우면 갈수록 쉬워진다. 그러나 처음에 타협하여 쉬운 길을 택한다면 영원히 시작과 포기를 반복하다 말 것이다. 적당한 만족과 합리적인 포기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라고 유혹하는 육체의 소욕은 피가 튀기고 살점이 뜯기는 혈투를 통해서만 장악될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성적이며 상대적인 가치가 존중되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교회의 훈련과 교육 역시 "죄 죽이기"가 강조되고 훈련되어야 한다면 지금의 설교와 가르침이 어떻게 변해야 할까?

bk

5.15.2010

관계와 용서

"관계가 성공하는 것은 죄있는 쪽이 벌을 받아서가 아니라 죄 없는 쪽이 긍휼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맥스루케도, 예수님처럼, 33

10.03.2009

자기 중심성과 하나님 나라 (1/6)

'하늘에 계신' 이라고 말하지 말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말하지 말라,
너 혼자만을 생각하며 살아 가면서...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
하나님의 아들, 딸로서 살아가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말하지 말라,
실제론, 자기 이름을 빛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하지 말라,
물질 만능의 이 세상을 좋아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라고 하지 말라,
내 뜻대로 되기를 원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라고 말하지 말라,
속으로는 평생토록 먹을 양식을 쌓아두려 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저희를 용서해 주옵시고' 라고 말하지 말라,
누구에겐가 지금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며'라고 말하지 말라,
죄 지을 기회를 은밀히 찾아 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옵시며'라고 말하지 말라,
악을 보고도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으면서...
'아멘'하지 말라,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조금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우루과이의 어느 성당에 써 있다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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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자기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문(엄격하게 말한다면, 주께서 가르치신 또는 명령하신 기도모범)은 그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핵심 메세지를 담지하고 있다. 특히 마태판에서의 주기도문은 산상수훈의 정 가운데 위치함으로 '하나님 나라'공동체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에 절정부분을 차지한다. 여섯 가지의 요청/청원으로 되어 있는 주기도문은 그당시 다양한 유대공동체에서 회람되던 생활 기도문들과 비교하여 볼 때, 문학적 형식과 일상에서의 사용방식을 공유하지만, 그 내용은 현격히 다르다. 특별히 인간의 근원적 죄성인 자기 중심성에 기반한 기도를 우주적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염원으로 교정하고, 실제 삶 속에서의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한 의도적 실천(orthopraxis)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점이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
마태판에서 등장하는 '하늘에 계신'의 수식은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다. 하늘(uranos)은 초월과 궁극을 상징하는 메타포임과 동시에 '늘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전능성과 무소부재의 속성을 내포한다.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 안에 계시고, 만물을 통해 계시는 무한한 창조주가 '우리 아빠'가 되셨다는 선포는 그래서 혁명적이다. 무한한 하나님이 한낱 먼지와 같은 피조물과 생명 세계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친밀하고 깊은 관계를 맺으셨다! '아버지와 자녀들'의 관계는 영원한 신뢰와 사랑, 자비와 긍휼, 용서와 수용, 보호와 공급의 언약관계가 공동체적으로 주어졌음을 천명하며 창조주의 피조물을 향한 기이한 사랑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기도는 비인격적인 주문이나 부적일 수 없고, 왕에게 고하는 신하의 상소도 아니다. 기도는 어린 자녀가 아빠와 갖는 친밀한 관계의 속삭임이며 전 존재의 의지적 의존과 하나됨이다. "아빠"를 부르는 순간은 창조의 영과 인간 영의 교통이 시작되고 왜곡된 자아와 뒤틀린 세계를 강압하는 존재의 허무를 부수고 무한한 생명의 파장으로 침투하시는 성령의 사건이 발생한다.

일인칭 복수 소유격인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창조주와 언약공동체인 자녀들과의 공동체적 관계를 통해 구현됨을 암시한다. '우리 아빠'는 개체적이며 자기 중심적인 수직관계를 형제와 자매된 공동체원들과의 관계 보다 우선시 하려는 시도가 가지는 불합리성을 지적한다. 초월적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만 도달하는 것이며 따라서 실존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우리"가 없이는 "아빠"도 존재할 수 없다는 명제가 가능해 진다. 세종대왕이 예수를 경험적으로 알리 만무하며 이순신 장군이 "하나님 나라"를 상상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다른 이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초월적 하늘 아빠와 피조물이 관계 맺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분의 은혜를 믿음으로 수용하여 아버지와 자녀들의 "공동체적 언약관계"가 성립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 뿐이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한 까닭은 동료가 없을 때 경험하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함이 아니며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었다는 점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존재양식 자체가 세분의 하나님이 한 하나님이 되시는 완전한 공동체이심을 상기한다면 기도는 공동체의 공동체에 의한 공동체를 위한 것임이 자명해 진다. 따라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는 나의 나에의한 나를 위한 기도가 가지는 중요성과 한계를 동시에 인식하게 하고 기도주체는 언약 공동체임을, 하나님의 나라는 언약 공동체에 기초함을 각인시킨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기도하는 이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는 청원의 주체와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실존적 차이와 이를 뛰어 넘는 하늘아버지의 사랑을 인식하며, 깊은 신뢰와 함께 두렵고 떨림의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간구할 것을 요청한다. 따라서 이러한 실존적 차이를 극복하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인식은 자연스럽게 하늘 아버지의 속성들이 찬양되고 인정되기를 바라는 첫번 째 청원으로 연결된다.

거룩의 일차적 개념은 윤리적이기 보다 관계적이다. 영원한 타자로서의 하나님은 유한한 피조물과 극명히 대조되는 초월적 존재이시다. 하나님의 존재선포인 그분의 이름에 외경심을 느끼고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카도쉬)이 돌려지기를 사모하는 마음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아버지와 자녀들이 갖는 '관계의 진실성'을 반증한다. 즉 하나님의 이름에 두려움도, 떨림도, 흠모함도, 깊은 신뢰나 사랑도 느낄 수 없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마땅히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는 간절한 염원이 없다면, 스스로 하늘아빠와 맺고 있는 언약관계를 점검해야 한다.

이러한 초월적 절대 타자와의 특별한 관계맺음에서 거룩의 이차적 개념인 윤리성이 도출된다. 하나님의 거룩은 그와 관계맺는 인간의 속성과 존재가치를 무한히 끌어 올려 상대적이며 주관적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도덕과 윤리를 지고한 보편과 궁극의 굳건한 반석 위에 올려 놓는다. 하나님을 경외함과 성스러움에 대한 갈망은 인간의 충만한 삶을 보장하는 샬롬의 기반이며 자유와 평등, 정의와 인권, 평화와 행복의 가치들을 인간됨, 또는 인간관계의 "기본"조건으로 승격시킨다.

따라서 하나님 이름의 거룩함을 부르짖는 기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에 대한 광대하고 우주적인 선포이며 인간의 거대한 절망과 한계를 미세한 분진으로 축소시키는 강력한 인식의 전환이다. 동시에 거룩에의 청원은 찬양과 경배의 대상에 인간 자신을 위치시키려는 죄의 본질을 근원적으로 부정하게 함으로 지독하게 뿌리깊은 자기 우상화를 경계하고 동료인간과 전 피조세계에 샬롬을 천착시키려는 갈망과 의지를 독려한다. 말과 행동과 의지와 생각과 태도에서 하나님의 성스러움을 힘입어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 드리려는 마음과 결단의 표현은 경배와 예배를 배타적 집단이 갖는 자기 만족의 사적 종교의식에서 벗어나 전 인류의 발전과 피조세계의 중흥을 신의 주권에 맡기고 의탁하는 웅혼한 축제로 승화하게 한다.

bk


7.10.2009

구원에 대한 심각한 오해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하고,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찌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막 15:30-32

하나님의 작정과 약속 대로 예수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의 경륜은 창조세계의 회복을 위한 대안으로 자신의 아들이 죄의 댓가를 치루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다시 새로운 생명을 통해 회복시키시는 것이었다. 사도바울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방법을 "하나님의 의" 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로 지칭했다.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를 심각하게 오해했다는 점이다. 사람들의 구원에 대한 이해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이해 사이에 여전히 큰 차이가 존재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성경은 바로 이점, 즉 구원에 대한 오해가 죄의 근원이라고 가르친다. 죄의 근원은 절대 타자인 하나님 대신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인간의 의식적이며 무의식적인 자율의지에 기인한다.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 있는 인간은 바로 그 죄로 인해 샬롬을 상실하고 생명의 근원에서 뿌리 뽑혀 스스로의 한계로 인한 죄의 고통들로 처절하게 신음해야 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편, 즉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어떤 죄의 문제이든지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여 죽고 하나님의 힘으로 다시 사는 일 없이는 참된 구원은 일어나지 않는다.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고 외쳤던 종교지도자들의 비아냥이 자신의 창조세계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향했다는 점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죽어야 다시 사는 십자가와 부활의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고 신뢰하고 순종하지 않는 이유는 "자기 의" 때문이다 (롬 10:3). 자신의 논리와 상식과 경험과 합리성과 자원들에 대한 한계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런 것들로 구원을 획득하려는 지독한 경향성, 즉 "자기 의"의 응집체가 바로 인간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자기 의"는 십자가와 부활의 "그리스도의 의"와 격렬하게 충돌한다.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절규하며 죽어간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고 그의 부활과 온 세상의 주되심을 영혼 깊이 인정할 뿐아니라, 세상을 향해 선포하고 고백하며(homologeow) 그 분을 "의"를 쫓아 살아가는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며 절대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막15:39; 롬 10:9-13).

7.08.2009

혁명적 복음과 알깨기

“새는 알을 까고 나온다. 알은 한 세계다. 태어나려하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은 아프락서스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보낸 편지 중
헤르만헤세, 데미안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자신을 둘러 싼 낡은 현실의 파괴와 맞닿아 있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구절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불을 던지고 평화를 파괴하는 검을 주러 왔다고 가르치셨다. 또한 종교와 정치, 교육과 경제의 실질적 중심이었고 한 민족의 아이덴티티였던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주장하셨고 그로 인해 신성모독의 죄목으로 정치적 타살을 당하셨다. 예수의 복음은 그 본질상 '전복적'subversive이고 해체적이며 혁명적이다. 이 말은 폭력적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개인과 집단의 죄성으로 인한 모든 불의와 죄악에 대한 정면도전이다. 새로운 생명은 안전하게 무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참생명 또는 온전한 삶은 죄와 사망의 세력에 대항하는 혁명과 전쟁의 댓가를 지불하고 획득하는 것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의 옮김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흘림을 비용으로 치뤄야 할 만큼 치열하고 맹렬한 세상과의 전쟁을 치루고 난 후 얻어지는 것이다.

복음의 선포는 이렇듯 기존의 질서와 갈등관계에 있을 수 밖에 없다. 예수의 삼중 직 중, 선지자로서의 예수는 사회와 도통 어울릴 수가 없다. 기득권자들과 좋은 관계일 수 없으며, 지도자들과 화평할 수가 없고, 지식인들과 논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그의 몸으로서 교회에게 위임된 것이다. 왕과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실행하는 것 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선지자만으로도 안된다. 모두가 다 필요하다. 그러니 모든 교회가 다 필요할 것이 아닌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가는 서로 견제하며 대화하고 협력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자신을 둘러싼 자신의 세계를 인식하고 확장하려는 인간 영혼의 투쟁을 심리적으로는 "자아 발달"로 교육이론으로는 "변형적 학습"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발달과 변형이론들의 핵심은 인간의 "인식 구조" 또는 "인식의 틀"이 신체, 나이, 성별, 사회적 환경, 문화에 따라 어떻게, 어떤 과정에 따라, 어떤 촉매적 요건들을 통해 발달 또는 변형되는 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구조변형의 이해들은 인식구조의 발달과 변화의 설계자이며 원인자이고 협력자인 동시에 완성자이신 창조의 영을 간과한다는 점에서 자기 인식의 한계에 갖히는 심각한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반면 교회에서의 설교와 가르침은 보편은혜에 기반한 창조원리의 구조적 측면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깊이있는 이해를 추구하려 노력하지 않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사회과학을 통해 발견된 인간 발달과 인식구조 변형의 원리들이 근거가 빈약한 오류이며 교회의 신학과 신앙적 실천에 마치 원수나 되는 것 처럼 떠벌여 유치한 이분법적 사고에 근거한 싸움을 부추키기도 한다. 이로서 자기 인식의 한계안에 갖혀 있는 자신의 가련함을 보지 못한 채, 진리를 자기 호주머니 속에 넣고 있는 양 호들갑을 떠는 어리석음과 오만함을 보이기까지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교만함으로 스스로를 갱신할 줄 아는 능력을 상실한 교회는 세상의 권위주의적이고, 성취지향적(또는 경쟁적)이며, 가변적이고 폭압적인 세상문화의 사회화 과정에 저항하고 극복하여 그리스도의 문화를 창출해 냄으로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급속도로 세속화되어 스스로 경쟁하여 분쟁하고 결국 분열하여 자멸하게 된다는 점이다.

전통과 인습, 도그마와 자기 경험의 한계에 갖혀있는 사람들을 향해 "새술은 새부대"에 담을 수 밖에 없다고 일갈하신 예수의 통렬한 지적은 금식 논쟁과 같은 지엽적인 실천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똑같은 성정을 가진 나사렛의 젊은 목수를 창조주의 아들로 인정해야 하는 믿음은 기존의 인식구조의 틀을 무너뜨리는 새로운 인식구조로의 전환paradigm shift이 없이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 바로 이 시작점에서 부터 죽어야 살고, 나눠주어야 풍성해지며, 낮아져야 높아지고, 포기해야 얻는 다는 불가해한 역설이 시대와 상황과 문화를 초월한 삶의 근원적 원리로 존중되기 시작한다.

그러니 이렇듯 자기의 존재의 집인 "자기 세계"를 부수는 일이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가능하단 말인가!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자기한계의 인식만이 우리를 죽은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창조의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로 인도한다. 또한 이를 삶으로 증명해 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과 우리 안에서 그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믿음과 힘 주심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하도록 한다. 나의 한 부분인 세계를 파괴하는 일은 그래서 하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다.

bk

4.13.2009

샬롬

악한 사람은 성난 바다처럼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 그 파도가 쓰레기와 진흙을 쉼없이 쳐올릴 뿐이다. "악한 사람에게는 평화가 없다." 내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사야 57:20-21

하나님을 떠나있는 증거는 너무나 분명하여 부인할 수 없다. 양심에게 물으면 된다. "평안이 있는가?" 안식과 쉼, 마음의 여유와 평강, 넉넉함과 푸근함. 웃음과 감사가 넘쳐 나는가? 행복한가?
빛이 없는 곳에 어두움이 지배하듯,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희소할 때 샬롬은 자취를 감춘다. 지금 여기에 하나님의 샬롬이 있는가?

3.31.2009

용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신의 죄를 보고 두려워 떨어 본 일이 있는 사람은 형제의 어떤 무서운 죄에도 놀라지 않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신도들의 공동생활, 152

1.24.2009

1.18.2009

"이성"은 희생의 결과

"In a real sense, I came to believe moral selflessness is a prerequisite for the life of reason-not its consequence, as so many philosophers contend."

Rangdon Gilkey, Shantung Compound, 1966. p.93


도덕적 자기희생은 이성적인 삶을 위한 전제이지 그 결과가 아니다.

UnChristian 나쁜 그리스도인

미국 바나 그룹이 3년간 10회에 걸쳐 20만명 이상의 기독교 밖의 와부인들에 대한 리서치와 특히 버스터 세대의 저 연령층(30세 이하)과 모자이크 세대에 속한 16세에서 29세의 젊은이들을 인터뷰한 결과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이미지는 다음과 같다.

1. 위선적이다.
2. 전도에만 열을 올린다.
3. 동성애자를 혐오한다.
4. 안일하다.
5. 지나치게 정치적이다.
6. 타인을 판단하려고 한다.

B.R Nov. 2008

1.10.2009

인간 본성


According to Niebuhr, humankind exists in a dual state of finite and self-transcendence. Since we face our mortality and yet our ability to at times “go beyond” ourselves, human exists in a state of anxiety. To deal with this anxiety, we pursue pride to cover up our finitude resulting in self-justification, self-rationalization, and the stereotyping of the oppressed. We also pursue sensuality to abdicate responsibility resulting in resentment, rebellion, and repression. Consequently, human sin is making self efforts to cover up their finitude without trusting God. To combat sin, we should correct our sins by mutual support in the community.

1.09.2009

"Deep down...man is not only executioner, not only victim, not only spectator; he is all three at once."

Elie Viesel, The Town Beyond the Wall, 174

1.04.2009

죄의 발전

Hieronymus Bosch's Garden of Earthly Delights.

죄의 발전과정에 대한 설명은 바빙크와 오웬을 참조하라.

(1) 유혹
(2) 자유/순종에 대한 혼동
(3) 의심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4) 불신앙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 파기)
(5) 상상의 자유로운 확장
(6) 의지와 감정이 어우러진 계획
(7) 작은 실행
(8) 욕심/정욕의 확장
(9) 더 큰 실행

1.03.2009

"누구나 죄를 범한다"라는 사실 때문에 죄가 정상적인 것이라고 '정당화될'수는 없다.

Cornelius Plantinga Jr.

12.24.2008

문: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까?

답: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으로만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비록 내 양심이 나를 고소하기를
하나님의 명령에 저항하여 지독히 죄를 지음으로
결코 그 명령들을 지키지 않으며
여전히 모든 죄악으로 향하는 죄성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무가치한 나를 순전한 은혜로써
마치 내가 한번도 죄를 지은 일이 없는 것처럼
마치 내가 완전히 순종한 것 처럼
그리스도의 나를 위한 순종으로
그분의 완전한 보상과 의로움과, 거룩함을
내게 부어주시고 나의 것으로 여겨 주셨습니다.

오직 내가 해야 할 일은
믿는 마음으로 그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The Heidelberg Catechism Q/A 60

12.23.2008

죄, 습관 그리고 예속

그러나 우리는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을 거부하는 삶을 살고 있다...예를 들어서 마약 중독자 자신은 그가 마약을 투여하면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약에 손을 댄다. 그는 얼마간 자유롭게 마약을 가까이하며 지낸다. 그에게는 선택이 있다. 그는 자유롭게 "죽음에 이르는 새로운 길"을 시작했고, 자기 자신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이유에서 그것을 멈추지 못한 채 끝내 파멸에 이르고 만다.
그도 처음에는 자신의 '선택'으로 마약을 시작했다. 하지만 끝내 '습관'으로 마치게 된다. 그 습관은 하나님에 의해서만...깨어질 수 있는 일종의 '예속'으로 서서히 바뀐다.

Patrick McCormick, Sin as Addiction (New York: Paulist, 1989), 152.

운명


"어떤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가치 있는 사람들인지 알고 싶다면, 그들의 운명을 전체적으로, 그리고 개략적으로 생각해보기만 하면 된다. 그들의 운명이란 결핍과 비참함과 고난과 불행과 죽음이다."

Arthur Schopenhauer, The World as Will and Idea (London: Everyman, 1995), 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