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6.2012
bk
11.23.2011
한국 교회의 희망: 작은 선교적 신앙 공동체
"한국 교회의 위기는 근원적으로 영성과 도덕성과 공동체성을 상실한데 기인한다." 이원규, 종교사회학적 관점에서 본 한국교회의 위기와 희망, 2010.한국 교회의 위기에 대해 이보다 더 간단명료하고 정확한 표현을 찾을 수 있을까?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기도가 부족하거나, 헌신이 덜 되어 있거나, 종교적 열심이 식었거나 교리를 잘 못 가르쳤거나, 신앙심이 식었거나 하는 교회의 내적 문제가 다가 아니다. 실제 신앙의 실천 문제, 또는 믿는 바와 실천사이의 괴리문제, 더 나아가서는 포스트 모더니즘, 종교다원주의, 세속화와 같은 사회의 시대적 흐름에 대한 역사의식 결여의 문제이다. 영성은 소비성으로, 도덕성은 상업성으로, 공동체성은 배타적 이기성으로 똘똘 뭉쳐진 사회를 책망할 수 있으려면 교회는 정치화된 권력과 집단적 힘을 포기하고 일반 대중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
한국 교회의 희망에 대해서는 어떻게 간단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저자의 책에서는 단서를 찿아보기 어렵다. 종교사회학적 관점에서 현상에 대한 기술적 분석을 내놓은 책이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나는 한국교회의 유일한 희망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메타노이아(회개)"이며 이를 현실화 하는 구체적 방법은 작은 선교적 신앙공동체를 통해 희생적 사랑과 섬김을 훈련하며 이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실천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를 통해서 근원적 문제의 핵심인 영성과 도덕성과 공동체성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bk
6.29.2011
참을 수 없는 개인 비전의 변덕스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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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민족은 가치 공동체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익성만 남으면 온갖 이론을 끌어들이는 싸움을 하게 됩니다. 다양한 이익을 하나로 묶기 위해 모든 사람이 합의할 수 있는 시대의 가치를 제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치를 제도화, 정책화 해야 합니다" 박세일 교수
얼마전 보수세력의 재집권을 위해 한 정치 전문가가 내놓은 충고는 교회 공동체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시대를 초월하는 진리를 선포한다고 하면서도 보편가치가 아닌 개인의 감상적인 꿈을 단편적 프로젝트나 프로그램으로 이루려는 조급함과 산만함은 가뜩이나 이질적인 교인들의 종교적 소비성을 부추겨 진정한 예수공동체의 비전을 빛바랜 허울로 전락시키고 교회를 배타적인 종교적 이익집단으로 변질시킨다.
개인에게 의존된 비전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천박한 변덕스러움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공동체성의 핵심인 상호적 신뢰관계를 위협해 진정한 의미에서의 연합과 성장을 의도적으로 훼방한다는 것이다. 목적의 달성을 위해, 상황과 필요에 의해 관계가 희생당하는 조직은 더이상 공동체가 아니다.
예수 공동체의 비전은 절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예수만이 모든 시대를 초월한 영원하고 절대적이며 근원적인 가치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수를 통해서만이 죄인된 인간사이에 희생적 사랑과 섬김의 신뢰관계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며, 이를 바탕으로 진정한 공동체가 가능해 지기 때문이다. 예수 공동체의 비전이 "서로 사랑하여 하나됨" (요17)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 공동체에 주어진 예수의 비전이 사명으로 받아들여지는 대신, 개인의 몽상적 이상이 비전으로 오해되고 관계가 목적이 아닌 도구로 대치된 공동체가 보여주는 특징은 바로 변덕스러움이다. 출렁이는 파도처럼 가변적인 개인들의 욕구와 필요가 "하나님의 꿈"이니 "교회의 마지막 사명"이니 하는 구호로 포장되어 선동되는 것을 하나님은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실까?
공동체의 비전이 참되고 진정한 비전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가지 요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첫째, 공동체의 비전은 공동체원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것을 넘어서 인류의 보편가치에 기반해야 한다. 둘째, 공동체의 비전은 반드시 개인의 비전이 아닌 "공동의 비전"으로 공동체 구성원들이 소유하고 내면화하는 과정을 거처야 한다. 셋째, 공동체의 비전은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체계를 반영하여 공동체의 문화와 구조를 통해 구체적이고 지속적으로 실천, 평가, 재수정의 과정을 거쳐 발전되어야 한다.
정치인을 비판하는 사람들 조차 "가치공동체"를 운운하는 시대에 살아가는데도 정작 교회 공동체는 자신의 변덕스러움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성찰 없이 따듯한 공동체가 되자고, 소그룹에 열심히 참여하자고 캠페인을 벌이며 우스꽝스러운 영상광고를 만드는데에 힘쓰는 것을 보자니 본말전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고 안쓰럽기까지 하다.
bk
11.10.2010
교회와 문화
8.08.2010
이머징 교회 vs 개혁교회
탈근대화가 그토록 해체하고 싶어하던 근대성의 뿌리는 바로 자기 이성과 합리성을 숭앙하는 자기중심성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으로 대변되는 이시대의 정신은 상대주의, 다원주의, 개인주의로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던 근대성의 전체주의, 획일주의, 집단주의의 숭배대상인 자기중심성에는 조금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면서 오히려 인간에게 부여된 보편자와 도덕률에 대한 인식능력은 부정함으로써 인간이성을 파도에 밀려 표류하는 부유물정도로 전락시켜버렸다. 이러한 탈근대주의에 의존하는 이머징 교회들이 갖는 위험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전통과 경험과 이성과 문화를 재해석하고 교정하는 절대 기준이 아니라, 상징과 경험을 형성하고 촉진시키려는 문화적 도구로 전락할 수 있는 가능성에 과도히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편, 끊임없이 개혁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의 개혁대상은 바로 교회 자신이며 개혁의 근거는 다른 어떤 사상이 아닌 진리의 말씀(sola scriptura) 이어야 한다는 개혁자들의 오래된 기치는 개인과 공동체가 진지하고 겸손한 자기성찰을 추구하는데 초월적 힘을 의존하게 함으로 자기 한계를 뛰어 넘어 계속되는 변혁과 진보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탁월한 사고의 틀(frame of reference)을 제공한다고 하겠다.
bk
5.17.2010
예수의 몸으로서의 교회, 성령의 능력안에 있는 교회
헨리 나우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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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르겐 몰트만은 "성령의 능력안에 있는 교회"에서 교회를 예수님의 몸으로 본 바울의 유비를 진지하게 수용하여 의미있는 신학적 해석을 제시하였다. 교회가 예수님의 몸body라면 예수님에 대한 모든 명제statement는 교회에 대한 명제여야 한다. 교회는 단순히 예수님의 사명을 물려받은 그리스도의 모임에 머물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회는 신비한 예수 그리스도의"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셨고 동시에 피조물의 회복을 위해 존재하셨듯이 교회는 삼위의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동시에 피조물의 회복을 위해 존재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 이 양자를 화해하기 위해 중보자로 자신을 버리셨듯이, 교회는 화해의 중보자로 거룩한 산 제사로 철저히 자기를 버려야 한다.
제도와 건물, 전통과 문화에 갇혀 스스로만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에서 자신을 분리시킴으로 스스로가 거룩한 공회에 속하지 않는 교회의 적임을 자증하는 것이다.
bk
8.05.2009
원탁의 그리스도
원탁의 그리스도스탠리 존스 지음 황병규 옮김평단문화사 국판 변형 420쪽 13,000원원탁의 그리스도 (Christ at the Round Table)교회의 선민의식과 배타적 독선에 경종을 울리고세상 속 기독교가 지향해야 할 좌표를 제시한 책!
“세계적 베스트셀러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의 저자 스탠리 존스의 두 번째 책!”
“진정한 종교는 몸을 구부려 겸손히 섬기고 육체와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며 약해진 영혼과 대화하고 그 영혼을 다시 살려내어 하늘의 아버지를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타임> 지가 뽑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선교사 스탠리 존스가 자신의 사명을 알고 그 사명을 완수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이 시대 최고의 복음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한 종교관을 가진 인도 사람들의 사상을 그들의 언어로 직접 들으면서 다원주의 사회에서 복음이 지닌 의미를 새롭게 규명한다. 또한 현대의 문화와 전통이 다원多元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복음이 여전히 진리임을 강조하고, 그들의 신관神觀, 내세관, 세계관 등을 파악하면서 진정한 기독교적 복음을 제시함으로써 교회의 역사적 사명과 선교에 대한 올바른 방향을 일깨워 주고 있다.이 책은 저자가 감리교 선교사로 20여 년간 인도 각처를 전도 여행하면서 만난 인도의 대표 지성인들, 즉 브라흐마 학자, 이슬람교 학자, 불교 승려, 힌두교 지도자 등과 함께 종파주의를 초월해 열린 원탁에 둘러앉아 허심탄회하게 나눈 종교적 신념을 촘촘히 기록하고 있다. 특히 종교적 승리주의와 종파주의를 초월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영혼의 가면을 벗어 놓고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신념을 토로하고 있는 이 책은 우리에게 이 시대 진정한 그리스도의 길이 무엇인지 묻는다. 이 책은 오늘을 살아가는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이 땅의 끝없는 고난과 모순에 대해 의구심을 가져 본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야 할 책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논리적으로 변증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것을 변증론적으로 풀어내고 있는 스탠리 존스라는 사람에 대해 두 번 놀라게 될 것이다.“이 시대 진정한 그리스도의 길이란 무엇인가?”전 세계 수많은 독자들을 감동시킨 이 시대 최고의 복음서!이 책은 1928년 영국에서 출간되자마자 전 세계 기독교인들의 심금을 울리며 베스트셀러 명단에 올랐으며,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선교 사역의 최대 명저로 꼽히고 있다. 교회의 선민의식과 배타적 독선에 경종을 울리고 세상 속 기독교가 지향해야 할 좌표를 제시한 이 책은 총 17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초반부에는 인도의 종교지도자, 사상가, 정치가 등과 같이 각계각층 사람들이 원탁에 둘러앉아서 그들의 사상과 종교를 솔직하게 토론한다. 후반부로 가면서 인도 사람들의 두려움과 절망 가운데서 희망의 증거를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이 왜 복음이고 참길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 변증론적으로 입증해 보인다.이 책은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적 복음의 실체를 낯선 땅에서 평생의 삶으로 증거한 신앙의 거인 스탠리 존스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들려주는 신앙 고백서다! 자신의 목적을 알고 그 사명을 완수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무한한 가치를 지닌다. 다원주의적 입장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의 길을 설명하고자 한 스탠리 존스의 이 새로운 시도는 수백만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 저자 및 역자 소개저자 : 스탠리 존스 E. Stanley Jones1884년, 미국 동부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태어나 18세 되던 해 예수 그리스도께 회심했다. ‘따뜻해진 마음’과 ‘세계 교구’를 강조하는 애즈베리대학에서 수학한 뒤, 1907년부터 감리교 선교사로 인도에서 평생 사역했다. 1920년대 초반, 마하트마 간디, 타고르 등과 함께 아슈람Ashram운동에 참여했으며, 1930년대부터는 기독교 아슈람운동을 펼치며 간디의 정신적 지도력을 바탕으로 한 크리스타그라하Kristagraha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40년 미국 뉴욕시에 할렘 아슈람을 세우면서 그의 기독교 아슈람운동은 인도를 넘어 미국과 유럽 등 세계 여러 나라로 퍼져 나갔다. 1938년 12월 12일자 〈타임〉 지에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선정되기도 했고, 1961년에는 ‘간디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인도 독립운동과 연관된 활동과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펼친 평화활동 등으로 두 차례 노벨평화상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다. 스탠리 존스는 철저한 복음주의자로 살면서도 열린 마음으로 인도인들에게 다가갔으며,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유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했던 인물이었다.
역자 : 황병규한양대학교 공과대학 졸업. 1984년부터 World Leadership Conference를 비롯하여 컨퍼런스 강의와 설교를 통역함. 2003년부터 아내와 함께 영묵, 예정, 승묵, 세 자녀를 홈스쿨링하고 있다. 현재 IBLP-Korea에서 삶의 기본 원리와 품성 계발 교육에 참여하고 있다. 역서로는 《지혜의 시작》, 《고전적 교육 입문》, 《흔들리지 않는 고전교육의 뿌리를 찾아서》가 있다.
《원탁의 그리스도》에 보내 온 각계의 추천사
위대한 선교사 스탠리 존스는 이 책에서 오늘날 한국 교회가 회복해야 할 교회의 역사적 사명과 선교의 올바른 방향을 일깨워 주고 있다. 특히 종교적 선민의식과 종파주의를 초월해 열린 원탁에 둘러앉아 허심탄회하게 종교적 신념을 이야기하는 이 책은 우리로 하여금 ‘잃어버린 천국’으로 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길을 안내하고 있다!-한완상(전 대한적십자사 총재)
교회의 선민의식과 배타적 독선에 경종을 울리고 세상 속 기독교가 지향해야 할 좌표를 제시한 복음서다. 특히 종교적 승리주의와 종파주의를 초월했던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영혼의 가면을 벗어 놓고 허심탄회하게 종교적 신념을 토로하고 있는 이 책은 오늘을 살아가는 종교인들에게 미래 교회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을 보여 주고 있다.-이어령(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 겸 중앙일보 고문)
청소년 시절, 영적으로 매우 고갈되고 생의 여러 문제에 봉착했을 때 스탠리 존스의 책은 내 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데 빛이 되었다. 복음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해 명확하게 안내하고 있는 이 책은 요즘처럼 복음의 능력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에 대한 분명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 -임영수(모새골 공동체 목사)
스탠리 존스는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적 복음의 실체를 낯선 땅에서 평생의 삶으로 증거한 신앙의 거인이다. 그는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한 종교관을 가진 인도 사람들의 사상을 그들의 언어로 직접 들으면서 이 시대 진정한 그리스도의 길이 무엇인지 제시하고 있다. 독자들은 이 책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몸으로 보여 주고자 했던 진정한 복음의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오정현(사랑의 교회 목사)
본문 속으로
나는 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이기고 승리하는 일 따위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다. 혹시 승리할 수도 있겠지만 거기까지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우리의 목표는 진실이고, 만유의 실재이며, 영의 자유이다. 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정복한다고 해도 얼마든지 이런 문제를 등한시하거나 잊고 악화시킬 수 있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했지만 결국 그리스도가 거기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뿐이다.-p.9 (프롤로그)
종교는 삶에 적절한 해답을 주고 있는가? 아니면 삶 자체나 삶의 의미와는 아무 공통점도 없는, 즉 삶에 해결책을 주지 못하는 정신적·사회적 찌꺼기인가? 우리는 이 위대한 실험 결과를 보고해야 하고, 확인한 내용이 있다면 기꺼이 알려야 했다. 마음속 깊은 곳을 향해 말하는 것은 정말이지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p.15 (제1장 출발)
“저는 욕망의 격렬한 싸움 속에서 스러져 가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의 발아래 제 욕망을 내려놓자 그분이 폭풍우를 잠재우고 제 자신에게서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 “제 인생이 산산이 부서져 있을 때 그리스도가 다가와 정상으로 돌려놓으셨습니다. 이제 저에게는, 하나님은 숨을 쉬는 것보다 더 가깝고 손발보다 더 가까운 친밀한 실재입니다.” -p.25 (제2장 인도인의 삶과 맞붙다)
“나 자신을 비울수록 하나님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질서정연한 기계이므로 우리가 그 법칙에 순종할 때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만 기적은 바랄 수 없기에 오랜 세월이 걸립니다. 그래서 샹카라도 ‘하나님을 찾으려는 사람은, 바닷가에 앉아 지푸라기로 물 한 방울씩 묻혀 옮겨 놓아 대양을 비우려는 사람 같은 인내를 지녀야 한다’고 말한 것이지요.”-p.53 (제3장 종교에 대한 솔직한 고백들)
누가 진정 그리스도인일까? 루터는 “인간은 절대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인이 되어 갈 뿐이다.”라고 말했다. 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모든 의미에 응답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와 사귐에 따라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사람이다. -p.79 (제4장 거듭남)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했다. 섬기지 않으려는 사람은 벽에 부딪힐 것이다. 나는 지난해에 유럽의 빈 왕궁 열세 곳을 둘러보았다. 그 왕궁들이 어째서 비어 있을까? 그 왕궁에 살던 사람들은 섬김을 받고 싶었을 뿐 섬기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이 법칙에 따라 스스로 망한 것이다. -p.104 (제5장 생명의 속죄)
원탁에 앉아서 사람들이 삶과 운명과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동안, 내 구원자가 앞에서 자라고 있는 모습을 지켜봤다. 나는 예수가 나를 어디에서 구원했고, 어디까지 구원했는지, 그리고 어디로 구원해 가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예수는 나를 죄에서 구원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예수는 내 우주를 구원하고, 내 우주 속에서 건드리는 모든 것을 구원한다.-p.128 (제6장 더욱 커지는 구원자)
우리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살라고 지어진 존재이다!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 우리 자아, 곧 참다운 내 자아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법이 내 삶과 일치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붙잡아라.’ 물론 그 제의 속에는 회개하고, 자기를 포기하며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는 요구가 들어 있다. 그러나 일단 그 제의를 받아들이면 그 요구는 어느새 사라지고 즐거움으로 변한다. -p.155 (제7장 하나님에 대한 체험)
나는 《신약성서》를 펴고 기도하면서 어둠을 밝히고 길을 안내해 줄 말씀을 찾았다. 그 순간 〈사도행전〉 1장에 있는 사건이 떠올랐다. 제자들이 예수에게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때와 시기는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p.175 (제8장 안타까운 약속의 땅)
우리는 어디서 권위를 찾을 수 있을까? 절대 오류가 없는 교회, 절대 오류가 없는 성서, 절대 오류가 없는 그리스도의 체험에 권위가 있을까? 권위는 세 가지 모두 안에 있다. 최종 확실성과 권위의 자리는 역사의 예수가 체험의 그리스도가 되는 연결점이며, 그 결과로 생긴 개인의 체험이 단체 체험으로써 확증되고 바로잡히는 곳이다. 그때 권위의 자리는 바로 그리스도다.-p.193 (제9장 확실성과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복음은 통역이다. 복음은 영원의 언어를 시간의 말로 바꾼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속죄 목적이 우리에게 가까이 와 닿아 현실이 되고, 누구나 얻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단테가 입을 열었을 때 ‘천 년의 침묵’이 깨졌다고 한다. 예수 안에서 ‘영원의 침묵’이 깨졌고, 우리는 복음을 듣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이 속죄의 사실을 통역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p.214 (제10장 그리스도의 통역자)
섬기는 자세, 곧 종의 자세가 그리스도인의 자세다. 그것은 예수가 취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힌두교인 애국주의자는 우리에게 “현재 인도의 영혼을 붙잡고 있는 위대한 낱말 두 개가 있습니다. 곧 ‘섬김’과 ‘자기희생’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이상은 우리 복음의 심장부에 깊이 박혀 있다. 우리가 동양에서 도덕적 권위를 얻으려면 이것이 우리의 자세와 심장부에 깊이 박혀 있어야 한다.-p.233 (제11장 원탁에 앉은 선교 단체)
죽음 앞에서 마지막으로 쥐고 있던 힘마저 다 빠졌을 때에도 여전히 예수는 최후이자 최고의 일을 하려고 했다. 사람들을 위해 죽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 성배 속으로 들어갔다. 우리 영혼이 악과 증오에 대해 분개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 우리는 이 완전한 승리를 마신다. 무엇으로도 사라지거나 꺼지지 않을 영원한 사랑을 마시면서 우리는 루터처럼 말할 수 있다. “내 영혼은 한없이 기쁘고 위대해서 어느 누구의 원수도 될 수 없다.” -p.279 (제13장 가장 신성한 원탁)
종교는 인간을 자신의 가장 높은 자아와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야 분열된 영혼의 힘이 하나가 되고 형제들과 잘 어울릴 수 있다. 또한 하나님과도 잘 어울리게 된다. 종교의 임무는 속죄다. 종교가 속죄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치명적이다. 종교 의식이 아름다울 수 있고, 종교 규약의 역사가 아주 오래될 수 있으며, 그 교훈이 좋을 수 있지만, 속죄에 실패한다면 회복할 길이 없다. -p.301(제14장 십자가는 삶의 열쇠)
사랑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의 법칙이다. 미움이 아니고 사랑이 바로 우리 존재의 법칙이다. 미움은 산酸처럼 우리 영혼을 부식시키지만, 사랑은 우리 영혼을 밝은 건강으로 빛나게 한다. 순결이 그리스도 안의 삶의 법칙이고, 우리 존재의 법칙이다. 불결은 내면의 삶을 시들게 하지만 순결은 내면의 삶을 상쾌함으로 설레게 한다. 선이 바로 우리 존재의 법칙이다. -p.327 (제15장 참길)
우주의 원탁에서는 모든 것, 곧 바울,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스승, 세상을 비롯한 모든 사실, 삶을 비롯한 모든 실재, 죽음을 비롯한 모든 변화, 현재와 미래를 비롯한 모든 시간을 포함하는 만물이 일어나 그리스도의 주권을 증언하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에게 복종한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으로 조건을 확인해야 한다. 모든 것에는 불멸의 조건이 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라.” -p.383 (제17장 우주의 원탁)
■ 차 례
프롤로그 껍데기는 버리고 본질을 추구하라!
Ch. 1 출발 하나님의 약속|그리스도의 명령
Ch. 2 인도인의 삶과 맞붙다 원탁에서 만난 사람들|간절한 마음의 소리
Ch. 3 종교에 대한 솔직한 고백들 불확실한 영혼|고매한 절망
Ch. 4 거듭남 수평 개종과 수직 회심|회심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
Ch. 5 생명의 속죄 하나님 나라의 실현|좁은 문의 법칙
Ch. 6 더욱 커지는 구원자 사람의 아들, 예수|사람과 하나님이 만나는 곳, 예수
Ch. 7 하나님에 대한 체험 복음은 이론이 아닌 체험|복음은 요구가 아닌 제의
Ch. 8 안타까운 약속의 땅 거의 타오를 뻔하다가 꺼지는 불꽃|거의 될 뻔하다 가 실패하는 교회
Ch. 9 확실성과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인격|스스로 역사 의 증인이 된 예수
Ch. 10 그리스도의 통역자 복음은 생명 언어로의 통역이다|진정한 통역자는 예수
Ch. 11 원탁에 앉은 선교 단체 종의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나다|민족도 개인 도 사랑한 백부장
Ch. 12 원탁에 앉은 나라들 자기중심적인 바보들|자기희생의 권력
Ch. 13 가장 신성한 원탁 생명의 잔|완전한 승리
Ch. 14 십자가는 삶의 열쇠 값없이 받는 보혈의 선물|십자가는 하나님의 본성
Ch. 15 참길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다가온 하나님|예수는 길이고 진리며 생명
Ch. 16 예수는 보편적인 실체 진리는 보편적, 오류는 제한적|어느 상황에서 든 예수는 그 상황의 빛
Ch. 17 우주의 원탁 우리는 예수의 것|예수만이 참 소망옮긴이의 말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From NewsNJoy 서평 이벤트
7.14.2009
"믿으시면 아멘하세요!": 학습에 대한 두 관점과 문화, 그리고 하나님 나라
한국 뿐 아니라 세상의 많은 나라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어떤 면에서는 현재까지도 지배적인, 학습문화는 "수용"적 학습관에 기초를 두고 있다. 수용적 학습관은 학습learning을 "지식의 수용"으로 이해한다. 이는 "공장의 생산라인"이나 "은행구좌"같은 메타포로 설명될 수 있다. 지식은 전달자(교사)로 부터 수용자(학습자)으로 전달되며 단시간 최대량의 지식을 전달하고 저장하는 것이 학습의 목표가 된다. 학습의 평가는 교사가 전달한 지식과 학생이 획득한 지식이 얼마만큼 일치하는가, 교사가 전달한 지식을 학습자가 얼마나 저장하고 있는지에 중점을 둔다. 따라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지식을 전달하고 수용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오랬동안 수용된 지식을 정확하게 저장할 수 있는가가 최고의 관심이다.
수용적 학습관에 기초한 지식의 획득과 저장을 특징으로 하는 학습문화는 다음과 같은 가정을 담고 있다. (1) 지식은 객관적이며 독립적이다. 이 세상의 실체는 인식자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지식은 실재에 대한 객관적인 표상이다. 지식은 언어를 포함한 매체를 통해 그 순수성을 상실하지 않고 유통될 수 있다. (2) 가르침 또는 교수instruction는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다. 교사는 축척되고 조직된 지식을 효과적으로 학습자들에게 전달하는 전달자transformer이다. (3) 학습learning은 전달된 지식을 획득하고 저장하는 것이다. (4) 저장된 지식은 언제든지 다른 상황에 적용된다. 지식의 적용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보다 기초적이고 일반화된, 추상적 지식이 선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수용적 학습관은 여러가지 면으로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Paulo Freire는 수용적 학습관을 폭압적이라고 비판하였다. 주입적 암기와 반복rote memory을 통해 이루어 지는 은행예금식(banking) 학습은 학습자들의 주체적이며 비판적 사고를 근본적으로 제한하고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사고와 표현을 구속함으로서 개인의 인격과 독특성을 파괴하고 기득권이 만들어 놓은 사고체계에 순응하는 종속적이며 타율적인 인간을 양성한다고 보았다. 또한 학습의 실천적이며 공동체적인 특성을 현격히 제한하여 다른 사람들과의 함께 하는 대화와 활동를 거부하여 배움을 고립된 개인의 수행으로서의 "공부"로 축소시켰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수용적 학습문화는 비판적 사고력, 문제해결력, 창의력, 그리고 상상력같은 고차원적 사고의 발달을 이해하고 지원하는 데 심각한 한계를 드러내었다.
행동주의와 인지발달주의를 거처 1970년대 이후 끊임없이 주목을 받아온 학습에 대한 관점은 구성주의constructionism 관점이다. 구성주의적 관점에서 지식은 인식의 주체인 학습자가 내적 인식과 외적 환경사이에서 끊임없이 구성, 해체, 재구성된다. 학습은 이러한 인식 주체의 능동적 지식 구성의 과정이다. 구성주의 학습관에서는 학습자가 처해 있는 상황과 학습자 사이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과정이 학습이라고 보기 때문에 학습은 본질적으로 상황 의존적이라고 주장한다. 즉 어떤 상황에서 어떤 활동을 하는가가 학습의 내용과 결과를 규정하게 된다. 따라서 학습은 고립된 개인의 활동일 수 없으며 전달자와 수용자의 관계에서 처럼 일방적일 수도 없다. 자신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 그리고 구체적 학습의 상황이나 학습자가 처한 사회문화적 환경등이 학습에 있어 본질적인 요소들이며 따라서 학습은 상황적이고 사회적이다.
이러한 학습에 대한 이해는 자연스럽게 교사와 학습자의 역할에 근본적 변화를 요청한다. 교사는 학습자가 주체적으로 지식을 구성할 수 있도록 돕는 안내자 또는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 학습자가 최대로 자기 자신을 개발 할 수 있도록 상황과 환경을 최적화 해 주어야 한다. 또한 학습자 개개인의 특성과 역사를 이해하며 그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하고 인격적인 신뢰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무엇보다 학습자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학습자를 신뢰하고 인내함으로 "안전하게 실패"할 수 있는 문화와 구조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학습자는 학습의 주체로 자기 주도적이며, 창의적이고 비평적이며 탐구적인 학습행위를 통해 개인과 공동체의 지식구성행위에 능동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스스로의 사고방식과 고정관념을 떠받치고 있는 전제와 가정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날카롭게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과의 사고와 행동에서 대립되는 차이점을 긍정하고 수용하며 상호 발전시키는 자세와 노력이 요구된다. 개인이 아닌 공동체로서 함께 배워가려는 겸허한 마음과 구성된 지식을 구체적인 현장에서 검증하고 확인하는 용기와 도전이 있어야 한다.
학습에 대한 수용적 관점과 구성적 관점의 차이점은 교회 사역에 대해 심각한 시사점들을 제공한다. 설교와 성경공부에서 부터 시작하여 예배와 선교에 이르기 까지 교회 사역 본질중 하나는 칼빈이 지적한 바 대로 어머니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이다. 성도들을 단순한 성경지식의 전달과 문화화된 교회의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도록 강요함으로서 현재도 상당히 진행되어 온 교회의 세속화를 심화시킬 것인지, 아니면 성도들로 하여금 말씀을 준거의 틀로 삼아 개인과 공동체의 성향과 활동에 녹아 있는 세속성을 분별하도록 비판적 성찰의 능력을 함양하게 하고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문화를 창조하여 세상에 대안을 제시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로 양육할지는 교회의 책임있는 리더들이 가지고 있는 "학습"에 대한 이해에 따라 달라지게 될 것이다.
학습에 대한 두 관점을 생각하면서 실제 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사역을 예로 들어 성찰해 보자. 위성을 통한 예배, 인터넷을 통한 신앙강좌, 텔레비전을 통한 복음 전도등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성서신학적인 지식을 가지고서는 현상에 대한 직접적인 해답을 얻기 어려울 것이다. 수용적 관점에서 본다면 인터넷이나 기타 위성과 텔레비전을 통한 신앙행위들은 원하는 정보를 습득하고 주관적 감정을 움직이는 동기부여를 일으키는 데에는 상당한 도움을 주고 또 효과적일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극복하고 학습자/성도들의 필요와 취향에 따라 지식습득(신앙/말씀 강좌)과 신앙적 행위(예배)를 선택하고 향유할 수 있기 대문이다. 따라서 지식의 전달과 수용, 그리고 축적이라는 측면에서 인터넷 예배나 성경공부는 탁월한 학습의 도구로 유용하게 활용해야 한다.
한편, 구성주의적 관점으로 이 문제를 본다면, 학습자 또는 청중의 컨텍스트와 특성이 고려 될 수 없는 일방적 전달의 의사소통과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 속에서의 상호작용이 없는 정보의 수동적 수용은 개인의 비판적 성찰 능력을 개발하고 더 넓은 진리를 이해하며 실천하는 데 주체적 노력을 기울이는 변화와 성숙을 가져 오기에는 제약되는 점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축척된 (수용된) 지식이나 경험이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실질적인 적용성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점에서는 실증적 연구가 필요하다.
설교에 있어서 예를 들어 보자.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 선포"라는 측면에서 접근하여 설교자를 "말씀의 대언자"로 보려는 시각이 있었다. 이러한 접근은 지식의 수용적 관점을 그대로 대변한다. 선포자는 전달하며 청중은 수용하고 축적한다. 성서를 해석하고 전달하는 과정은 전적으로 설교자의 고독한 작업에 의존하며 일체의 질문과 의심을 용납되지 않는다. "믿으시면 아멘하세요!"라는 설교자의 외침이 이를 대변한다.
그러나 토마스 롱을 주축으로 하는 "공동체적 증언"의 관점으로 설교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설교자를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중 하나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사람"으로 여긴다. 역시 지식의 구성주의적 측면이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최근에는 "대화적 설교dialogical preaching"를 통해 설교자가 청중들과 서로 양방향의 의사소통을 추구하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다. 고차원의 학습을 통한 창조적 변화가 일어나려면 학습자의 필요와 동기, 그리고 삶의 현장과 실제 경험을 중심으로 상호간의 의사소통이 일어나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간의 학습을 보는 관점에 따라 이렇듯 실제 삶에서 살아가는 방식, 즉 의사소통의 스타일, 조직의 구조와 문화,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는 많은 차이를 나타낼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 발전하고 있는 사회과학의 발견과 발전을 잘 이해하여 좀 더 신학적이면서도 효과적인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더 왕성하게 구현되어야 할 것이다.
bk
7.08.2009
혁명적 복음과 알깨기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보낸 편지 중
헤르만헤세, 데미안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자신을 둘러 싼 낡은 현실의 파괴와 맞닿아 있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구절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불을 던지고 평화를 파괴하는 검을 주러 왔다고 가르치셨다. 또한 종교와 정치, 교육과 경제의 실질적 중심이었고 한 민족의 아이덴티티였던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주장하셨고 그로 인해 신성모독의 죄목으로 정치적 타살을 당하셨다. 예수의 복음은 그 본질상 '전복적'subversive이고 해체적이며 혁명적이다. 이 말은 폭력적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개인과 집단의 죄성으로 인한 모든 불의와 죄악에 대한 정면도전이다. 새로운 생명은 안전하게 무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참생명 또는 온전한 삶은 죄와 사망의 세력에 대항하는 혁명과 전쟁의 댓가를 지불하고 획득하는 것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의 옮김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흘림을 비용으로 치뤄야 할 만큼 치열하고 맹렬한 세상과의 전쟁을 치루고 난 후 얻어지는 것이다.
복음의 선포는 이렇듯 기존의 질서와 갈등관계에 있을 수 밖에 없다. 예수의 삼중 직 중, 선지자로서의 예수는 사회와 도통 어울릴 수가 없다. 기득권자들과 좋은 관계일 수 없으며, 지도자들과 화평할 수가 없고, 지식인들과 논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그의 몸으로서 교회에게 위임된 것이다. 왕과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실행하는 것 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선지자만으로도 안된다. 모두가 다 필요하다. 그러니 모든 교회가 다 필요할 것이 아닌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가는 서로 견제하며 대화하고 협력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자신을 둘러싼 자신의 세계를 인식하고 확장하려는 인간 영혼의 투쟁을 심리적으로는 "자아 발달"로 교육이론으로는 "변형적 학습"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발달과 변형이론들의 핵심은 인간의 "인식 구조" 또는 "인식의 틀"이 신체, 나이, 성별, 사회적 환경, 문화에 따라 어떻게, 어떤 과정에 따라, 어떤 촉매적 요건들을 통해 발달 또는 변형되는 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구조변형의 이해들은 인식구조의 발달과 변화의 설계자이며 원인자이고 협력자인 동시에 완성자이신 창조의 영을 간과한다는 점에서 자기 인식의 한계에 갖히는 심각한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반면 교회에서의 설교와 가르침은 보편은혜에 기반한 창조원리의 구조적 측면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깊이있는 이해를 추구하려 노력하지 않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사회과학을 통해 발견된 인간 발달과 인식구조 변형의 원리들이 근거가 빈약한 오류이며 교회의 신학과 신앙적 실천에 마치 원수나 되는 것 처럼 떠벌여 유치한 이분법적 사고에 근거한 싸움을 부추키기도 한다. 이로서 자기 인식의 한계안에 갖혀 있는 자신의 가련함을 보지 못한 채, 진리를 자기 호주머니 속에 넣고 있는 양 호들갑을 떠는 어리석음과 오만함을 보이기까지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교만함으로 스스로를 갱신할 줄 아는 능력을 상실한 교회는 세상의 권위주의적이고, 성취지향적(또는 경쟁적)이며, 가변적이고 폭압적인 세상문화의 사회화 과정에 저항하고 극복하여 그리스도의 문화를 창출해 냄으로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급속도로 세속화되어 스스로 경쟁하여 분쟁하고 결국 분열하여 자멸하게 된다는 점이다.
전통과 인습, 도그마와 자기 경험의 한계에 갖혀있는 사람들을 향해 "새술은 새부대"에 담을 수 밖에 없다고 일갈하신 예수의 통렬한 지적은 금식 논쟁과 같은 지엽적인 실천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똑같은 성정을 가진 나사렛의 젊은 목수를 창조주의 아들로 인정해야 하는 믿음은 기존의 인식구조의 틀을 무너뜨리는 새로운 인식구조로의 전환paradigm shift이 없이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 바로 이 시작점에서 부터 죽어야 살고, 나눠주어야 풍성해지며, 낮아져야 높아지고, 포기해야 얻는 다는 불가해한 역설이 시대와 상황과 문화를 초월한 삶의 근원적 원리로 존중되기 시작한다.
그러니 이렇듯 자기의 존재의 집인 "자기 세계"를 부수는 일이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가능하단 말인가!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자기한계의 인식만이 우리를 죽은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창조의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로 인도한다. 또한 이를 삶으로 증명해 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과 우리 안에서 그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믿음과 힘 주심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하도록 한다. 나의 한 부분인 세계를 파괴하는 일은 그래서 하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다.
bk
5.02.2009
유앙겔리온Euangelion
초기 기독교인들은 나사렛에서 살다가 처형당한 예수가 다시 부활하고 하늘로 올라갔으며 이 세상을 완전하게 회복하기 위해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러한 주장, 즉 한 인간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 살다가 죽고 하늘로 올라갔다가 다시 올 것이라는 이야기들은 1세기를 살았던 로마제국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신화적 이야기가 아니라도 로마의 황제들은 스스로를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죽은 후 다시 하늘로 올라가 세상을 다스리는 쿠리오스, 즉 주Lord 라고 선언했다. 사람들은 시장agora에서 만날 때 마다, "시저가 주님이시다"라고 인사를 나누어야 했다. 정복지의 피식민지들은 역시 시저가 세상의 유일한 주님이심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 주님을 예배해야만 했다. 시저 이외에 다른 대상을 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위험천만한 행동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예수의 부활과 재림에 대한 경험과 믿음은 강력한 로마제국의 체제와 정신문화를 뒤집어 놓았다. 소수의 변두리 사람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이 아름다운 세상의 고통과 절망, 깊은 아픔을 온 몸으로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가난하고 소외당하고 억압당하고 배고프며 상처받아 고통당하는 자들은 예수에게 소망을 걸었다. 예수의 생전에 그들이 가지고 있던 소망은 로마 문화에 바탕을 둔 소망이었다. 강력한 군사력, 정교한 법률을 바탕으로 한 고도의 정치력, 높은 교육과 세련된 문화 예술의 힘으로 로마는 영국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활한 세상을 정복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가 보여준 기적과 이사, 지혜와 용기를 경험하면서 만약 이스라엘이 예수를 중심으로 뭉치기만 한다면 로마의 힘에 대항해 볼 만 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으로 모든 기대와 소망은 산산조각났다. 로마와 대항할 수 있다고 믿었던 "로마적 힘"을 예수가 스스로 거부하고 허무하게 스러진 것이었다. "십자가에서 너를 구원하고 내려와라"고 소리질렀던 사람들의 외침은 "더 강력한 로마적 힘"에 대한 갈망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절규였던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다. 군중은 흩어졌고 예수의 제자들 마저 뿔뿔이 귀향한 터였다.
끝내 예수를 잊지 못했던 것은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진정으로 예수를 사랑했다. "힘"의 그림자 조차 사라저 버린 싸늘한 시체라도 쓰다듬지 않고 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그들은 예수를 사랑했다. 안식일이 지난 첫 새벽 미명에 그 여자들은 전혀 새로운 예수를 만났다. 새로운 예수는 이전의 예수가 아니었다. 그는 더이상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여전히 먹고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만질 수 있었지만 그는 감각의 세계를 초월하여 존재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증거한 모든 증거가 참된 진리임이 드러났으며 따라서 그가 진정한 인간이며 동시에 진정한 "신"이라는 사실이 확증되었다.
예수를 경험한 증인들은 이 세상의 회복이 정치권력이나 군사적 힘, 조직화된 법률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온 몸으로, 삶으로 증언하였다. 로마인들은 조간 신문이나 텔레비젼에서 들려오는 로마의 번영, 이를 테면 영토의 확장이나 군사력의 증강, 또는 피식민자들이 제공하는 특산물의 유입등을 "유앙겔리온" 좋은 소식으로 생각하고 환영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증인들은 그로마식 유앙겔리온에 대항해 전혀 다른 차원의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당신을 위해 나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나셔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주린 자들에게 기름진 잔치가 배설되었다. 수치로 그늘진 자들에게 긍지와 자부심이 생겼다. 노예에게는 해방이 선포되었으며 감옥에 수감되었던 자들에게는 사면선언이 내려졌다. 공동체에서 따돌림을 당했던 외톨이들에게는 저명한 친구들이 생겼다. 죄책감과 열등감에 괴로워 하던 사람들에게 인정과 격려의 박수와 환호가 주어졌다. 안정감과 자신감이 솟아 올랐다. 비난과 정죄로 오염된 언어에 칭찬과 감사의 샘이 터졌다. 가난한 자들과 부요한 자들이 한 상에서 즐겁게 애찬을 나눴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후투와 투치가, 영국인과 프랑스인이, 일본인과 한국인이, 북미인디안과 백인이, 미국인과 이라크인이, 독일인과 폴란드인이, 세르비아인들과 알바니아인들이, 인도네시아 인들과 동티모르인이, 수십년, 수백년을 미움과 혐오로 원수가 되어버린 도저히 상종할 수 없는 사람들이 서로 형제와 자매가 되었다.
상처받고, 외면당하고, 죄 짓고, 더럽고, 교활하며, 폭력적이고, 사기치며, 거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신 예수는 나를 변화시켜 이 복음의 경험자로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나눌 것을 명령하신다. 나누면 나눌 수록, 경험하면 경험할 수록 더 풍성하게 채워질 것이다. 복음을 예수 믿고 교회 출석하고 죽어 천당가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해변 유양지에서 유람선을 타고 즐기는 휴가를 생각하며 "놀러 가자"라고 말 한 아버지의 "놀이"를 골목에서 코흘리게들과 딱지치기 하는 수준의 놀이로 심각하게 오해한 아이들의 생각과 같을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 아버지의 것이며 이 사실위에 (안에, 통해) 살아간다는 것이 유앙겔리온이다.
1.26.2009
학습 공동체
Learning Organization is a place where people continually expand their capacity to create the results they truly desire, where new and expansive patterns of thinking are nurtured, where collective aspiration is set free, and where people are continually learning how to learn together.
Peter M. Senge, The Fifth Discipline: The Art & Practice of the Learning Organization
(1) 학습조직의 정의
Peter Senge는 ‘학습조직’(Learning Organization)을 전통적인 조직과 구별하여 그 성격과 요건을 규정하였다. 그의 이론은 개방체제모형과 자기실현적 인간관을 전제적 이론으로 삼은 것이다. 그는 외재적 조건보다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교호작용 양태를 더 중요시한다. 조직은 사람들의 생각과 상호작용의 산물이라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Senge가 말한 학습조직이란 ⅰ) 조직구성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결과를 창출할 능력을 지속적으로 신장할 것, ⅱ) 새롭고 개방적인 사고방식이 육성될 것, ⅲ) 공동의 갈망이 자유롭게 분출될 수 있게 할 것, ⅳ) 조직구성원들이 함께 배우는 방법을 계속적으로 배울 것 등의 조건이 구비된 조직이다.
(2) 다섯가지 수련(제5의 수련)
Senge 는 학습조직의 성립에 필요한 다섯 가지 수련(훈련·계율·과정 : disciplines)을 제시하였다. 이들 수련은 학습조직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요건이며 방법이고 기술(component technologies)이다. 서로 수렴해 가는 다섯 가지의 새로운 기술 또는 수련이 함께 학습조직을 탄생시킨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새롭게 사고하고 교호작용하는 방법을 깨닫고 이를 행동화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려는 다섯 가지 수련은 다음과 같다.
1) 자기완성(personal mastery) : 이에 관한 수련은 생애와 일에 관한 개인의 접근방법을 성숙시키는 것이다. 각 개인은 원하는 결과를 창출할 수 있는 자기역량의 확대방법을 학습해야 한다. 조직은 그 구성원들이 선택한 목표를 향해 스스로를 개발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
2) 사고의 틀(mental models) : 이에 관한 수련은 뇌리에 깊이 박힌 전제 또는 정신적 이미지를 성찰하고 새롭게 하는 것이다. 세상에 관한 사람들의 생각과 관점,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가다듬어야 한다.
3) 공동의 비전(shared vision) : 이에 관한 수련은 조직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추구하는 목표와 원칙에 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4) 집단적 학습(team learning) : 이에 관한 수련은 집단구성원들이 진정한 대화와 집단적인 사고의 과정을 통해 개인적 능력의 합계를 능가하는 지혜와 능력을 구축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1.18.2009
UnChristian 나쁜 그리스도인
1. 위선적이다.
2. 전도에만 열을 올린다.
3. 동성애자를 혐오한다.
4. 안일하다.
5. 지나치게 정치적이다.
6. 타인을 판단하려고 한다.
B.R Nov. 2008
12.31.2008
개혁주의
1. 개혁주의자들은 "교리주의자들 the doctrinalist"이다.
교리주의자들은 교리를 영원 불변한 것이라고 고집하여 구체적인 조건과 변화된 상황, 새로운 인식과 실천적 경험을 고려하지 않고 고정된 개념과 문자적 의미에 매여 무비판적이 되는 교조주의dogmatism와는 다르다. 교리주의자들은 성경에 의해 가르쳐지고 신조들에 의해 정리된 기독교의 교리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가 삶에 궁극적인 변화와 영향력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혁주의자들은 (1) 성경을 영감되고inspired, 절대적이며infallable, 권위있는authoritative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2) 개혁주의자들은 창조-타락-구속으로 설명되는 구속사적 성경관을 믿는다. (3) 개혁주의자들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를 철저히 배재하는 하나님의 전적 은혜를 믿는다. (4) 개혁주의자들은 하나님과 그 백성들이 맺으시는 특별한 관계로서의 언약을 믿는다. (5) 개혁주의자들은 죄를 억제하셔서 하나님께서 인류를 보존하시고 구속사역을 완성하기 위해 일반은총을 사용하신다고 믿는다.
2. 개혁주의자들은 "경건주의자들the pietiest"이다.
교리주의자들에 대한 강조는 자연스럽게 삶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함이 삶 속에 어떻게 구현되는가? 어떻게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가?
경건주의자들로서 개혁주의자들은 경건에 있어 (1)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2) 성화로 이끄시는 성령의 역사와 사역을 강조한다. (3) 성화의 과정을 은혜의 조건이 아닌 은혜의 결과로 보며 감사를 강조한다. (4)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강조한다. (5) 말씀과 성례가 가지는 독특성과 중요성을 강조한다.
3. 개혁주의자들은 "변혁주의자들the transfomationalist"이다.
개혁주의자들은 문화와 세계관, 그리고 문화를 변혁하시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진다. 어떻게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것인가?
변혁주의자들로서 개혁주의자들은 (1) 예수 그리스도가 우주의 주되심을 강조한다. (2) 이미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강조한다. (3) 말과 행위의 일치를 강조한다. (4)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창달하는 문화적 명령을 강조한다. (5) 가정과 학교와 교회의 세가지 영역에서의 기독교 교육을 강조한다. (6) 각각의 부르심에 따라 일하는 직업적 소명을 강조한다.
12.30.2008
공동체를 위한 신학교육
12.24.2008
개혁
Thomas Case recited from Michael Walzer, The revolution of the Saints: A Study in the Origins of Radical Politic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65), 1-2.
12.22.2008
학문과 자유
Abraham Kuyer (1837-1920)
또 하나, 학문이 융성하기 위하여 대중의 마음이 자유를 얻어야 했다. 하지만 교회는 삶이ㅡ 유일한 목적을 그 공로를 통해 하늘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가르쳤고, 사람들은 교회가 이 주된 목적과 일치한다고 인정하는 만큼만 세상에서 향유할 수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는 아무도 지상적 실존에 대한 연구에 공감을 갖거나 헌신할 수가 없었다. … 모든 참된 칼빈주의자에게 이 복된 상태는 '중생'에서 자라며 '성도의 견인에 의하여 보증된다. 이 '믿음의 확실성'을 근거로, 칼빈주의는 기독교 세계에게 창조 명령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그 가운데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땅을 정복하기 위하여 땅에 대한 지식은 필수적이었고, 대양과 자연에 대한 지식, 그리고 이 자연의 속성과 법칙에 대한 지식은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학문을 권장하기를 꺼리는 백성이 새롭고 활기 넘치는 힘으로 자유의 느낌을 향유하도록 학문에 박차를 가했다.
이 갈등은 신앙과 학문의 갈등이 아니다. 그런 갈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학문은 어느 정도 신앙에서 출발하지만, 반대로 학문에 이르지 못하는 신앙은 잘못된 잘못된 신
앙이거나 미신이다. 참되고 진정한 신앙은 그렇지 않다. 모든 학문은 신앙을 전제한다.
특별히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는 원리에서 신앙을 전제한다. 이는 학문적 탐구에 필요한 모든 공리가 우리의 자의식과 더불어 주어져 있음을 뜻한다.
반면에 모든 신앙은 발언하려는 충동을 내적으로 갖고 있다. 이를 위하여 신앙은 말과 용어와 표현을 필요로 하고, 이 말들은 사상의 구현이 되어야 한다. 이 사상들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상황과 함께 상호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래서 신앙이 우리의 의식에 빛을 비추자마자 학문과 논증의 필요가 생겨난다.
따라서 갈등은 신앙과 학문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존재하는 우주가 정상적 상태인가 비정상적 상태인가 하는 주장 사이에 존재한다. 만일 우주가 정상이라면, 우주는 잠재력에서 이상(ideal)으로 가는 영원한 진화의 의미로 움직인다. 그러나 우주가 비정상이
라면, 과거에 혼란이 일어났고 그 목적의 최종적 달성을 보증할 수 있는 것은 중생적 능력뿐이다. 이 대립은 학문의 영역에서 사유하는 두 가지 지성을 전투 대형으로 나눈다.
아브라함 카이퍼 <칼빈주의 강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