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s

Showing posts with label 용기.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용기. Show all posts

1.01.2011

진정한 장벽

1947년 10월 14일, 조종사 척 예거 (Chuck Yeager, 1923-)는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알려져 온 음속의 한계를 돌파함으로써 마침내 초음속 비행의 시대를 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저명한 과학자들 중에는 음속의 한계는 결코 깨뜨릴 수 없다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다른 과학자들 역시 마하 1의 속도에서는 조종사와 비행기 모두가 산산 조각날 것이라느니, 혹은 조종사는 목소리를 잃고 나이를 거꾸로 먹으며 또 극심한 충격을 받을 것이라는 등 섬뜩한 예견들을 하던 터였다. 그러나 예거는 그 역사적인 날 조금도 당황함이 없이 벨 항공(Bell-Aviation)의 X-1기에 탑승하여 시속 700마일 (마하 1.06)로 비행하는 데 성공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3주후 마하 1.35로 비행했고, 6년 후에는 다시 시속 1,612마일(마하 2.44)이라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하늘을 날았다. 깨뜨릴 수 없는 장벽에 대한 신화가 무너져 내리는 순간들이었다.

예거는 자서전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비행은 오히려 더 편안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마하를 가리키는 바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늘은 마하 0.965에 도달했고, 곧 속도계의 오른쪽 끝이 기울었다. 나는 마치 환각을 경험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 순간 초음속을 날고 있었다. 하지만 그 느낌은 어린아기의 엉덩이만큼이나 부드러웠다. 그 편안함이라면 나이 든 할머니라도 거기 않아서 레모네이드를 즐길 수 있으리라! 나는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토록 염려하고 그토록 기대했건만, 막상 음속을 돌파하고 나니 오히려 실망스럽게 느껴졌다. 미지의 것이었던 음속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실은 포크로 젤리를 가르는 것처럼, 마치 잘 포장되 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쉬웠다. 그러나 나는 훗날 그때의 임무가 왜 그렇게 실망스럽게 끝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깨달았다. 그건 진정한 장벽은 하늘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초음속 비행에 관한 우리 인간의 지식과 경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티븐 코비, 원칙 중심의 리덥십, 김영사, 104.
-----

나와 이웃과 세계를 아름답게 만드는 진보와 개혁을 가로막는 장벽은 외부의 환경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장벽은 인간의 지식과 경험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절대 진리인양 확신해 버리는 내적 교만과 아집, 그리고 두려움이며, 초월적 힘을 간과하고 부러 잊으려 하는 영적 완고함과 둔감함입니다.

내 안에 있는 거대한 장벽을 뛰어 넘으려면 절대 타자에 대한 절대적 의존과 순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훈련함으로 성취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한계와 두려움을 극복하는 힘은 보이지 않는 절대진리에 대한 감정적 확신으로서의 믿음, 하나님 신앙을 기반으로 한 풍부하고 건강한 상상력의 발현으로서의 소망,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시위된 희생적 섬김의 사랑을 연습하고 경험함으로 길러집니다.

bk

12.15.2010

Integrity 인테그리티

"Integrity without knowledge is weak and useless, and knowledge without integrity is dangerous and dreadful." Samuel Johnson

지식이 없는 성실함은 약하거나 쓸모가 없다. 성실함이 없는 지식은 위험하고 위협적이다.
실체에 대한 깊은 이해가 사랑할 줄 아는 인격과 인품이 합쳐졌을 때 거기서 우리는 신의 성품을 맛본다. 헤세드!

bk

Bravery 용기

Courage is the resistance to fear, mastery of fear, not the absence of it." Mark Twain
용기는 두려움에 대한 저항,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지 두려움의 부재가 아니다.

그러니까 결국, 진정한 용기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통해 피어나는 꽃이다.
bk

5.17.2010

한번도 가지 않은 길

새벽 미명에 기도하러 나섰다.
난데 없이 교회 뒤쪽으로 난 산을 따라 걸으며 기도하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혼자서 한번도 가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내 마음이 "가보자"와 "가지말자"로 나뉘어 분열하기 시작했다.
가지 말자는 쪽이 더 좋은 그리고 더 많은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가보자는 쪽은 시덥지 않은 한두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러나 결정적인 한가지 이유도 또한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소망이었다. 무엇인가 가치있는 것이 있으리라는, 어렵더라도 좋은 경험이 되리라는 소망과 기대 말이다. 소망이 두려움을 이기는 용기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나는 그 때 배웠다 .

아직도 검푸른 여명속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두려운 마음을 흥얼흥얼 찬양으로 잠재우며 걷다가 작은 모퉁이를 돌아가는데 갑자기 큰 개가 미친듯이 짖어대며 나를 향해 덤벼들었다. 너무 놀라 거의 중심을 잃고 나 자빠지려 하는 찬라에 내 몸을 덮칠 그녀석의 거친 앞발과 내 목을 향해 날아오는 날카로운 이빨을 상상했다. 그러나 나는 넘어지지도 물리지 않았다. 개와 나 사이에는 철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장이 터질 정도로 놀랬으나 현실적으로는 아무일도 생기지 않았다. "돌아갈까?"하는 마음이 놓치지 않고 고개를 바짝 들었으나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번연의 주인공 크리스천이 쇠줄에 묶인 사자의 포효에 주춤하며 전진하지 못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계속 짓어대는 개에게 예수님처럼 "잠잠하라"고 영어로 말해 주었다-shut up!

물이 말라버린 얕으막한 계곡에 지저분한 쓰레기들과 버려진 차들이 보였다. 높은 기둥에 마치 피가 흐른듯이 빨간색 페인트로 갱단원들이 한 것 처럼 여겨지는 지저분하고 기괴한 낙서들이 역겨운  냄새와 함께 기분을 상하게 하자 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결코 유쾌한 경험이 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소망이 위협을 당하자 다시 두려움이 업습한다. "돌아가자..."

그러나 여기까지 온 것이 아까웠고 아찍 끝나지 않았다는 새로운 소망거리를 찾아내었다.
한 30분을 더 기도하며 산을 오르자 온 몸에서는 땀이 흐르고 기도는 깊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산의 정상에 섰을 때,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아름다운 절경이 거짓말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인내하지 앟았으면, 두려움을 물리치지 않았으면, 소망을 포기했다면 결코 볼 수 없었던 장관이었다. 하나님의 음성이 마음에 가득 차 올랐다.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그리고 소망은 사랑으로 가득찬 성품을 만들어 낸다는 바울의 고백을 온 몸으로 경험할 수 있음을 감사하며 정상에서 내려 올 때 하나님은 또다른 선물을 준비하고 계셨다. 산을 오를 때 겪었던 장애물들의 실체가 찬란한 아침 햇빛 아래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위협적이었던 모든 것들이 별것 아닌 것이 되어있었다. 오를 때 의심되었던 하나님의 임재가 내려갈 때는 자부심과 성취감, 보람과 삶의 긍정으로 충만하였다. 시내산을 내려가는 모세의 기분이 그랬을까?

한번도 가지 않은 길은 두려운 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믿음과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길이 행복하고  의미있고 보람된 길이 된다는 사실 또한 틀림없다. 왜냐하면 바로 하나님 자신이 행복이며 의미이며 보람이시기 때문이다. 다만 그 길을 끝까지 마쳐본 사람만이 그 하나님을 증언할 수 있으며, 그 길을 걸어본 사람만이 성숙을 노래할 수 있을뿐이다. 

bk

3.23.2010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예쁜이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요. 어떻게 들을 수 있죠?

나: 참 좋은 질문 (얼굴만 예쁜 줄 알았더니 마음도 예쁘군...) 예쁜이들은 어떻게 생각해?

예쁜이들: 말씀, 기도, 환상, 계시, 양심, 조언, 실천....

나: (보통이 아니군...) 다 알면서 왜 물어볼까?

예쁜이들: 그래도 잘 모르겠어요 (갈켜주삼...)

나: 가장 강력하고 분명하며 또렸하고 오래도록 지속되는 방법을 알려줄까.... (말까...)

예쁜이들: (똘망똘망... 초롱초롱...우린 예쁜데...)

나: (가르쳐 줘야겠군) 실수, 실패, 낙망, 좌절,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학.실.히. 말씀하시던데..

예쁜이들: (먹던 감자칩 떨어뜨리며...) 목싸님! 실수 안하려고 음성 들으려는 거잖아요!

나: (미안하구나...) 아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고 음성 듣는 거야. 그럼 하나님이 "너 좀 실수해 줄래..." 그러면 하나님 음성 안듣겠네 (이경우 듣는다는 것은 순종함을 의미하겠지...).  순종하지 않을 거면서 왜 하나님의 뜻을 묻지?

예쁜이들: ... 결국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게 어려운게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과 순종하기위한 결단과 용기를 내는 것이 어려운 거네요.

나: ... (내가 잘 가르친 것일까 예쁜이들이 똑똑한 것일까?)

성령님: 오늘은 거기가지만 진도 나가자...

나: 아차 아이스크림 사주는 것 깜빡 잊었네....

bk

"최초의 가르침을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게 있네." 마법사가 말했다.
"일단 길을 발견하게 되면 두려워해선 안 되네.
실수를 감당할 용기도 필요해. 실망과 패배감,
좌절은 신께서 길을 드러내 보이는 데
사용하는 도구일세."


- 파울로 코엘료의《브리다》중에서 -

11.05.2009

존재하기 위한 용기

용기란 非存在의 사실에도 불구하고 존재에 대해 갖는 자기 확신이다.
- Paul Tillich, Courage to be, 155

인간은 존재적으로 영원한 죽음, 궁극적 허무와 무의미, 철저한 죄의식이라는 염려에 포로되어있다. 용기란 이러한 거부할 수 없는 존재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자아를 긍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용감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용납되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며, 그래서 하나님을 신앙함으로 얻게 되는 존재의 힘은 비존재가 가져오는 허무와 공허, 그리고 죄의식을 부수는 존재의 용기가 된다.

3.18.2009

알려는 열망

"Knowing is the responsible human struggle to rely on clues to focus on a coherent pattern and submit to its reality." Esther Meek

Meek은 Michael Polanyi를 연구한 철학자이다.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자동차 수리공을 유비하였다. 깔깔대며 웃는 유쾌한 웃음이 귀엽기까지 한 Meek은 Longing to Know라는 책에서 철학적 인식론을 일상의 언어로 생생하게 그려내는 값진 작업을 하였다.


“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Meek은 결론을 내리기 전에 철저하게 이 질문에 대해 탐구할 것을요 청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알 수 없다”는 명제 자체도 “하나님은 알 수 있다”라는 명제를 증명하는 것 만큼, 아니 보다 더 어려운 작업들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증명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성서가 증언하는 또 다른 난관인 “우리의 앎의 능력은 왜곡되고 상실되었다”는 진리 앞에 서야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어거스틴의 오랜 전통을 따라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망을 외면하고 포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존재적으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고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젖먹이의 옹알이로부터 프로이드의 왜곡된 Id까지 진리를 향한 열망은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아 프라이오리a priori이다.

도대체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어떤 의심할 수 없고 오류도 있을 수 없는 절대적 보편진리를 인식한다는 것인가? 대답은 “아니다.” 안다는 것은 의심이라는 행위와 오류의 실패를 포함하는 더 포괄적인 행위이다. 앎은 끝없는 인식의 과정이다. 결국 인간의 삶은 끝없는 알아감의 여정이며 알아가는 것은 인간됨의 행위이다.

세 상 속에 흩어진 실체의 편린들을 단서로 그리고 보여진 실체 너머에 있는 배후의 관계들을 통해 일관성cohesive있는 의미를 발견해 내는 것은 때로는 고통스럽고 무모하며, 어쩌면 너무나 어려워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정도이다. 그러나 “세상the world”은 여전히 실재하고, 세상을 인식하는 주체이며 동시에 중요한 인식의 대상이기도 한 “나body”도 실재하기에 포기할 수도 없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인식의 대상과 인식의 주체 사이의 관계를 정립해 주는 일종의 “지침/방향direction”이다 (나는 Meek의 direction보다 인식론적 방향성과 인식의 주체와의 관계성을 더 포괄적으로 설명해 주는 Geertz의 “Map” 개념을 선호한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지도의 범례keynote/legend가 되어 인식의 틀을 형성하고 기존의 틀을 계속해서 교정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삶의 복잡다단한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실체들은 정념화되어 경직되지 않고 계속 역동적으로 구성과 해체, 그리고 재구성을 거듭할 수 있도록 유연해야 한다. 진리는 단순히 감각과 인식과 언어 너머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소망과 겸손을 가지고 반응respond할 수 있다. "확실함certainty"도 절대진리를 명확히 "표현할 길"도 없기 때문에 겸손해야 할 것이며, 이러한 겸손함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인식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소망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겸손함과 소망은 세상에 대해 존재를 여는 태도이다 (피녹은 이를 인간의 "세계 개방성"이라고 불렀다. 다만 그는 이를 인간 존재의 자연스러운 본성으로 설명했지만 내가 보건대 이는 죄로 인해 왜곡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많은 중요한 본성들 중 으뜸이 되는 것이다. 자기만의 도그마에 갖혀 진리를 자기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양 법석을 부리는 경직되고 오만한 사람들속에 내가 속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증거는 충분하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세상을 향해 자신의 존재를 여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나는 세상과 연합하고 세상을 이해하며 세상에 섞여 세상을 풀어(해석해)나간다. 서양적 전통의 분석적 사고에 대한 강조는 인간의 의식에 대한 과도한 의존과 확신을전제로 하게 될 때 결국 실체로 부터의 메마른 단절만을 부추겨 결국 인간을 끝없는 고독의 무저갱에 처박아 놓게 된다. 실체와 인식의 주체는 분리될 수 없다.

인식의 행위는 인식자의 적극적이고 책임성 있는 순종과 헌신을 요청한다. 앎yadah이라는 것은 부부가 결혼을 하여 서로 알아가는 것과 같은 그런 종류의 앎이다. 완전히 다 알아 앎이 종료되는 순간은 없다. 다 만 계속해서 알아갈 뿐이다. 그리고 그 앎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필요하다. 용기와 희생과 책임이 뒤따른다. 말씀word를 통해, 세상world를 통해, 그리고 우리자신we-self를 통해 우리를 만나시는 하나님은 그래서 임마누엘이다. 나와 세상을 통해 그리고 말씀을 통해 계시는 하나님 밖에서 어떻게 내가 존재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어거스틴은 고백한다. "그러므로 나의 하나님이여, 당신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할 수가, 결단코 존재할 수가 없나이다. 아니면 이렇게도 말할 수도 있지 않겠나이까? 내가 당신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니이다…. 그러하나이다 주여… 당신은 말씀하셨나이다.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렘23:24). Confessio, I.ii.2


앎은 또한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하는 행위이다. 믿음과 이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지, 정, 의의 모든 인간됨이 총동원 되는 것이다. 보이는 것 너머의 복잡한 관계들을 성경과 성령이 지시하는 대로 민감하게 반추하여 의미를 발견하려는 적극적인 "앎의 행동"이 필요하다.

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진정한 앎은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앎은 존재와 존재의 충돌이기에 변화에 대한 용기를 요구한다. 앎은 알려지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되는 것이다. 그를 알기 전의 나와 그를 알고 난 후의 나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더할 나위 없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변화되는 것이다. 더 많이 알아갈 수록, 더 많이 변화되며, 더 많이 변화될 수록, 더 많이 알고 싶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거룩이 더해 갈 수록 죄에 대한 인식이 더 또렷하고 깊어지며 이는 더 깊은 거룩의 갈망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정말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는 지를 먼저 물을 일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만나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 않고 궁금하지 않은 담에야 "알고 싶을"리 만무하지 않은가? 알고 싶지 않은데 알 수는 없는 노릇이며, 사랑해야만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앎"을 "세상의 실체를 받아들이고 탐구하려는 인간의 책임있는 노력"으로 정의한 에스더 믹의 진술은 좀 메마른 감이 있어 아쉽다.

bk

12.27.2008

목표

"목표는 현재 상태와의 계획된 갈등이다"

목표에 이른다는 것은 뭔가 새로운 것을 하는 것, 안정된 상태라는 편안하고 익숙한 영역에서 빠져 나와 새로운 미개척지로 탐험 하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영역을 탐색하는 일은 위험하고, 고통스럽고 힘든 경험일 수도 있다.

-중력을 이겨 하늘을 날으려면 중력을 극복할 만큼의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한다.-

SMART의 법칙

Specific
Measurable
Action-Oriented
Realistic
Timely

12.14.2008

용기

용기는 우리가 두려움을 느낄 때 생기는 것임을 명심하라.
당신이 도전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면 어느정도 긴장해야 한다.
용기는 두려움 없이 생기지 않는다.
용기는 두려움의 산물이다.
월터 앤더슨 <삶을 바꾸는 내 안의 힘>

간단히 말해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없다.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굴하지 않는 것이다.
용기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소망을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다.
용기는 두려워 하는 내 속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 분의 성품을 신뢰하고 믿는 행위이다.
용기는 여전히 두려워 하면서도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용기는 두려움의 폭풍우를 뚫고 피어나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꽃이다.

legei autois, Ego eimi. John 18:5
내겐 지금 용기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