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는 그의 책 '복음주의 신학입문에서' 신학의 가장 큰 위협은 하나님으로 부터 온다고 일침을 가했다. 신학적 위협은 교회의 실천과 별개일 수 없다. 개혁파 선배들이 그토록 추구했던 살아 움직이는 역동적 말씀을 근거로한 자기 상대화와 중단없는 자기반성의 변혁적 실천은 점차 희미해 지고 특정 시대의 고루한 도그마와 파편화된 자기 경험, 그리고 세속화된 시대정신에 노예가 되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날 바르트가 살아있다면 '현대 교회의 가장 큰 위협은 하나님'이라고 할 것이다. 두렵다. 오금이 저릴 정도로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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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6.2012
1.09.2011
Evangelical Theology
McDermott, Gerald. 2010. The Oxford Handbook of Evangelical Theology. Oxford University Press.
Part I. Evangelical Theology
1. What is evangelical? / Mark Noll
2. Scripture and hermeneutics / Kevin J. Vanhoozer
3. Faith and reason / W. Jay Wood
4. Faith and experience / Oliver D. Crisp
5. Faith and tradition / Alister E. McGrath
Part II. Theology of Trinity
6. The triune God / Robert Letham
7. Creation / Loren Wilkinson
8. Sin / Henri A.G. Blocher
9. Jesus Christ / John G. Stackhouse, Jr.
10. Holy Spirit / Craig Keener
Part III. Theology of Salvation
11. Israel and salvation / Rikk Watts
12. The gospel / Scot McKnight
13. Conversion and redemption / Gordon T. Smith
14. Justification and atonement / Donald G. Bloesch
15. Discipleship / Dallas Willard
16. Spiritual practices / Simon Chan
17. Eschatology / Trevor Hart
Part IV. Theology of Church
18. Church and sacraments / Ephraim Radner
19. Church and churches : ecumenism / William J. Abraham
20. Worship / John D. Witvliet -- Spiritual gifts / Howard Snyder
21. Mission and evangelism / Michael J. McClymond
Part V. Theology of Mission
22. Other religions / Sung Wook Chung
23. The Bible and ethics / M. Daniel Carroll R. ; Darrell L. Bock
Part VI. Theological Approaches to Contemporary Life
24. Politics / Eric Gregory
25. Economics / John Lunn
26. The arts / Roger Lundin
27. Science / Alister E. McGrath
28. Sexuality / Robert A.J. Gagnon
29. Race / Timothy Tseng
30. The vulnerable : abortion and disability / C. Ben Mitchell --
31. Gender / Cherith Fee Nordling.
12.28.2010
기독교 신학 입문
Plantinga, Richard J, Thompson Thomas R, and Matthew Lundberg. 2010. An Introduction to Christian theology. New York, NY: Cambridge University Press.
개혁파들에게 있어 신학이란 하나님에 대한 지적 탐구에 그치지 않는다. 개혁파들에게 신학은 인간의 지, 정, 의를 포괄하는 전인격적인 만남이며 존재적 충돌이고 영적인 사건이다. 신학의 출발점이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자신을 계시하시는 사랑의 충만으로서의 창조주 하나님임을 신앙함에 일말의 타협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혁파 신학을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신학을 포괄적이고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 쓴 조직신학 개론서가 출간되었다. 신학을 "하나님과 씨름하며 사랑함"에 유비하는 저자들은 모두 칼빈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고전과 종교사, 철학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이다.
전체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는 신학 서론으로 신학의 역할과 배경 그리고 의미를, 2장에서는 신학의 제 주제들을, 그리고 3장에서는 각 시대별로 신학의 발전과정과 함의들을 탐구한다. 세 사람의 저자들이 함께 조직신학 개론서를 썼다는 것이 특이할 만한 점이며, 신학사를 함께 취급하여 신학서론, 신학주제들, 그리고 신학사를 간결하게 진술하고 묶었다는 점에서 Alister McGrath의 Christian Theology: An Introduction 과 상당히 유사하다. 조직신학을 가르치면서 잘 정리된 신학 입문서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칼빈교수들에 의해 쓰여진 책이 출간되어 반갑고 기쁜 한 편, 한국 신학자들에 의해 쓰여진, 전통에 충실하고 현대적 상황에 적합한 조직신학 입문서에 대한 목마름이 더해진다.
bk
I.
What is theology --
The critical context of theology --
Revelation and the knowledge of God --
A tale of two theisms --
II.
The triune God --
The world as creation --
Humanity in the image of God and the disfigurement of sin --
The problem of evil and the question of theodicy --
The identity and person of Jesus Christ --
The reconciling work of Jesus Christ --
The person and work of the Holy Spirit --
Dimensions of salvation --
The church and its mission --
Christianity in a global context --
Hope and the future --
III.
Theology in the patristic era (c.100-500) --
Theology in the Middle Ages (c.500-1400) --
Theology in the Reformation period (c.1400-1700) --
Theology in the modernity (c.11700-1960) --
Theology in the contemporary period (c.1960-present)
개혁파들에게 있어 신학이란 하나님에 대한 지적 탐구에 그치지 않는다. 개혁파들에게 신학은 인간의 지, 정, 의를 포괄하는 전인격적인 만남이며 존재적 충돌이고 영적인 사건이다. 신학의 출발점이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자신을 계시하시는 사랑의 충만으로서의 창조주 하나님임을 신앙함에 일말의 타협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혁파 신학을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신학을 포괄적이고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 쓴 조직신학 개론서가 출간되었다. 신학을 "하나님과 씨름하며 사랑함"에 유비하는 저자들은 모두 칼빈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고전과 종교사, 철학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이다.
전체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는 신학 서론으로 신학의 역할과 배경 그리고 의미를, 2장에서는 신학의 제 주제들을, 그리고 3장에서는 각 시대별로 신학의 발전과정과 함의들을 탐구한다. 세 사람의 저자들이 함께 조직신학 개론서를 썼다는 것이 특이할 만한 점이며, 신학사를 함께 취급하여 신학서론, 신학주제들, 그리고 신학사를 간결하게 진술하고 묶었다는 점에서 Alister McGrath의 Christian Theology: An Introduction 과 상당히 유사하다. 조직신학을 가르치면서 잘 정리된 신학 입문서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칼빈교수들에 의해 쓰여진 책이 출간되어 반갑고 기쁜 한 편, 한국 신학자들에 의해 쓰여진, 전통에 충실하고 현대적 상황에 적합한 조직신학 입문서에 대한 목마름이 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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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What is theology --
The critical context of theology --
Revelation and the knowledge of God --
A tale of two theisms --
II.
The triune God --
The world as creation --
Humanity in the image of God and the disfigurement of sin --
The problem of evil and the question of theodicy --
The identity and person of Jesus Christ --
The reconciling work of Jesus Christ --
The person and work of the Holy Spirit --
Dimensions of salvation --
The church and its mission --
Christianity in a global context --
Hope and the future --
III.
Theology in the patristic era (c.100-500) --
Theology in the Middle Ages (c.500-1400) --
Theology in the Reformation period (c.1400-1700) --
Theology in the modernity (c.11700-1960) --
Theology in the contemporary period (c.1960-present)
3.14.2010
인간됨의 결정적 조건
"A defining condition of being human is our urgent need to understand and order the meaning of our experience, to integrate it with what we know to avoid the threat of chaos." Jack Mezirow (2000)
인간됨의 결정적 조건중 하나는 우리의 경험을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과 연결해 이해하며 조직화함으로 혼란과 혼동이 주는 위협을 피하려는 절박한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며, 의미를 구성하고, 의미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이다. 의미는 인간에게 생명과 같다. 무의미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투쟁은 죽음의 힘 보다 더 강력하다. 인생의 의미를 구성하지 못할 때 조차, 인간은 죽음으로써 삶의 무의미를 종식시키려 할 만큼 인간에게 있어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며 의미를 구성/재구성하는 행위는 근원적 본능이다. 그렇다면 의미란 무슨 의미인가? 의미를 추구한다는 말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어떻게 의미를 추구하는가? 무슨 의미를 추구하는가? 의미는 발견하는 것인가 아니면 형성되는 것인가? 의미는 어떻게 변형/변화 되는가?
매저로는 구조주의적 인식론을 바탕으로이러한 질문들을 탐구해 나간다. 비판적 사고를 통한 인식구조의 변혁과 확장은 구조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개념이며 이러한 인식구조의 변형을 성인교육의 영역에서 설명하고 통합한 공로로 그는 변형적 학습이론transformative learning theory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그러나 매저로에게 있어 왜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가? 어떤 의미가 의미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의미의 근거는 무엇인가? 에 대한 대답은 대체로 무시되고 있다. 그것은 그가 인간의 의미구성이라는 현상을 이해하는데 있어 구조주의 인식론에 과도하게 의존하면서도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존재론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이 사회과학적 접근이 보변적으로 기반하는 암묵적 가정의 오류이다. 즉 관찰자의 실존적 한계를 간과하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는 스스로 알 수 없으며 나의 나됨을 인식하려면 절대 타자의 거울앞에 서야 한다는 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바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첫머리를 이렇게 기록한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지혜, 즉 참되고 온전한 지혜는 거의 모두가 두 가지 부분으로 구성된다.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다. 이 두 지식은 여러 끊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그 중 어떤 것이 먼저오며, 어떤 것이 그 결과로 파생되는 것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Institute I.i.1).
그렇다면, 인간됨의 결정적인 조건은 "혼란과 혼동을 피하려는 절박한 필요때문에 의미를 구성하려는 습성"이기 보다는, 그러한 갈망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절대의미, 의미의 절대기준, 의미를 추구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신 인간과 우주의 존재적 의미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깨달아 아는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과 내 자신을 알아가기를 통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향방없는 의미추구가 주는 허무와 절망의 긴 터널 통과한 후 증언한 어거스틴의 고백은 이런 점에서 울림이 크다: "당신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찬양하기를 즐거워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당신을 향하여 살도록 당신이 우리를 창조하신 까닭이니 우리 심령은 당신 안에서 쉼을 얻을 때가지 평안할 수 없습니다." (Confessio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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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됨의 결정적 조건중 하나는 우리의 경험을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과 연결해 이해하며 조직화함으로 혼란과 혼동이 주는 위협을 피하려는 절박한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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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며, 의미를 구성하고, 의미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이다. 의미는 인간에게 생명과 같다. 무의미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투쟁은 죽음의 힘 보다 더 강력하다. 인생의 의미를 구성하지 못할 때 조차, 인간은 죽음으로써 삶의 무의미를 종식시키려 할 만큼 인간에게 있어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며 의미를 구성/재구성하는 행위는 근원적 본능이다. 그렇다면 의미란 무슨 의미인가? 의미를 추구한다는 말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어떻게 의미를 추구하는가? 무슨 의미를 추구하는가? 의미는 발견하는 것인가 아니면 형성되는 것인가? 의미는 어떻게 변형/변화 되는가?
매저로는 구조주의적 인식론을 바탕으로이러한 질문들을 탐구해 나간다. 비판적 사고를 통한 인식구조의 변혁과 확장은 구조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개념이며 이러한 인식구조의 변형을 성인교육의 영역에서 설명하고 통합한 공로로 그는 변형적 학습이론transformative learning theory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그러나 매저로에게 있어 왜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가? 어떤 의미가 의미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의미의 근거는 무엇인가? 에 대한 대답은 대체로 무시되고 있다. 그것은 그가 인간의 의미구성이라는 현상을 이해하는데 있어 구조주의 인식론에 과도하게 의존하면서도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존재론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이 사회과학적 접근이 보변적으로 기반하는 암묵적 가정의 오류이다. 즉 관찰자의 실존적 한계를 간과하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는 스스로 알 수 없으며 나의 나됨을 인식하려면 절대 타자의 거울앞에 서야 한다는 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바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첫머리를 이렇게 기록한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지혜, 즉 참되고 온전한 지혜는 거의 모두가 두 가지 부분으로 구성된다.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다. 이 두 지식은 여러 끊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그 중 어떤 것이 먼저오며, 어떤 것이 그 결과로 파생되는 것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Institute I.i.1).
그렇다면, 인간됨의 결정적인 조건은 "혼란과 혼동을 피하려는 절박한 필요때문에 의미를 구성하려는 습성"이기 보다는, 그러한 갈망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절대의미, 의미의 절대기준, 의미를 추구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신 인간과 우주의 존재적 의미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깨달아 아는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과 내 자신을 알아가기를 통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향방없는 의미추구가 주는 허무와 절망의 긴 터널 통과한 후 증언한 어거스틴의 고백은 이런 점에서 울림이 크다: "당신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찬양하기를 즐거워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당신을 향하여 살도록 당신이 우리를 창조하신 까닭이니 우리 심령은 당신 안에서 쉼을 얻을 때가지 평안할 수 없습니다." (Confessio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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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3.2009
신학과 과학이 만나다
인문과학의 방법론은 특수화시키고, 구체화시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인문과학은 신비한 체험들이 가지는 함축적인 의미들을 과정적인 관점에서 관찰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인문과학은 그러한 관찰이 가능하게 된 궁극적인 근거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거나 "잊고있다." 인문과학은 그러한 근본적인 실체에 대한 체험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반면, 신학적인 방법론은 이와 같은 체험의 중요성, 이러한 체험을 가능하게 한 궁극적인 근거 및 이러한 체험의 내용에 특별히 초점을 맞추게 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신학의 방법론에서는 구체성이라든지 특수성이 무시된다. 다시 말해서 신학은 그러한 변화의 체험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성격을 해석하는 데 필요한 충분한 근거를 마련해 주지 못하며, 그 체험들의 각 과정에서 찾아 볼 수 있는 특수한 성격들을 제대로 분석해 내지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도 못하고 있다. 우리들이 그러한 체험을 통해서 신학에서 주장하고 있는 궁극적인 원인들에 어떻게 참여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신학은 설명해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James E. Loder, The Transforming Moment,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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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교부 터툴리안은 "아덴이 예루살렘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Quid ergo Athenis et Hierosolymis)"라고 도전하면서 신앙과 이성에 있어 신앙의 우위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를 구원의 전제로 보는 개혁주의적 입장에서는 예루살렘과 아덴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해하는 양 날개와 같다. 일반은총와 특별은총의 우위를 논쟁하려면 언제나 승리는 극단적 칼빈주의자의 것으로 남겨질 테지만, 궁극적인 진리는 하나님만이 아실 일이라는 칼빈의 뻔한 권고는 여전히 유효하며, 따라서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포함한 모든 과학적 접근을 구속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일은 더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특정한 전통, 경험, 문화, 그리고 시대정신 속에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임을 겸손히 수용한다면 맹목적 신앙의 파시즘과 이미 파산해 버린 이성주의의 허상을 뛰어 넘어 신학과 과학의 진지한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실천들은 신학과 과학의 진지한 상호성찰 위에 세워 져야 하며 이는 모든 공동체원의 주체적 참여를 요청한다.
로더는 T. Parsons의 복합적 사회시스템을 기반으로 개인의 정신, 문화, 조직, 그리고 사회가 각각 어떻게 상호관련을 맺는지 분석하려 했다. 특히 성령의 역동적 역사가 이 네 시스템 속에서 어떻게 일어나며 또한 이 네 시스템 속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탐구하려 했다.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하는가? 인간은 어떻게 변화되는가?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 자연적 발달단계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인간의 종교경험과 뇌세포의 화학작용은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가?
피상적 경험의 주관성에 함몰된 설교와 가르침이 신학적 타당성과 함께 실제 삶에서의 적합성을 확보하려면 자의적 해석으로 가득찬 자기신학의 한계를 정직하게 고백하고 보편인간에게 부어주신 일반은총의 도구들을 긍정하여 겸손과 부지런함으로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고 창조세계에 대해 진지하게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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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2009
저주를 통해 도달하는 직업
"Theologians are not made by reading and studying books but by living and dying and being damned."
Martin Luther
신학자들은 서적을 읽고 연구하는 것을 통해 만들어 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살고 또 죽으며 저주받음을 통해 만들어 집니다.
-마틴 루터-
십자가의 신학을 주창한 마틴루터 다운 말이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 그분의 진리에 노출되는 것은 추상적 관념의 사색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삶의 한 복판에서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게 되는" 역설을 온 몸으로 체득하고,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나를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를 쫓아 순교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그러니 이것이 어떻게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하단 말인가? Sola Gracia는 그렇게 죽음과 저주를 기쁨으로 수용하는 자들을 가능하게 하고 또한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만 확증된다. 그러니 신학자라고 함부로 말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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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in Luther
신학자들은 서적을 읽고 연구하는 것을 통해 만들어 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살고 또 죽으며 저주받음을 통해 만들어 집니다.
-마틴 루터-
십자가의 신학을 주창한 마틴루터 다운 말이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 그분의 진리에 노출되는 것은 추상적 관념의 사색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삶의 한 복판에서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게 되는" 역설을 온 몸으로 체득하고,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나를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를 쫓아 순교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그러니 이것이 어떻게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하단 말인가? Sola Gracia는 그렇게 죽음과 저주를 기쁨으로 수용하는 자들을 가능하게 하고 또한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만 확증된다. 그러니 신학자라고 함부로 말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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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2009
진리는 사랑이다
"참 사랑은 리얼리즘realism이다...인간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한계성을 두려워하지 말고 똑바르게 정직하게 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만 된다...참된 진리를 찾아가는 자가 노력해야 될 것은 자기중심적인 거짓 자기를 부수고 진정한 참자기를 발견해 내는 일이다...진실은 항상 사랑과 함께 있어야 하고 사랑은 항상 진실과 함께 있어야 한다."
강원용 (1917-2006), 중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19.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1b-32) 이 말씀은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진리를 아는 것"은 어차피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진리를 알 수 있는 능력과 의도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성은 참된 진리를 거부하는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 진리를 혐오한다. 참된 진리는 인간의 부패와 죄악을 밝히 드러 내기 때문이다. 성경은 "변하지 않는 영원하며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절대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며 성령을 통해 알려지는 하나님" 이심을 증거한다. 이 전제를 수용하려면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이 믿음을 거부하고 진리의 타자성을 무시하며 진리의 인격성을 멸시한다. 그래서 근대적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절대화 하여 유한하며 제한적인 이성의 두레박으로 망망한 진리의 바다를 재려는 우매함에 빠져 버렸다. 그래서 이러한 과학적 인간들은 진리를 자신의 사고와 이해의 한계라는 철장에 가두어 놓음으로서 고독과 소외, 허무라는 진창속에 스스로를 투신하고 말았다.
또 다른 극단의 부류들은 과학적 인간들의 이성주의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고 신앙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과학제일주의의 맹주인 절대이성을 타도하기 위해 신앙제일주의자들이 선택한 주인은 바로 도그마였다. 그러나 건강한 이성의 사용과 자기반성을 거부한 맹목적이며 자기 중심적인 신앙주의는 절대이성의 왕좌위에 도그마적 신앙을 올려 놓아 경배의 대상을 바꾸었을 뿐, 절대 진리의 무한성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따듯한 인격으로서의 진리를 삶속에 실천하기를 거부하며 자신의 한계와 유한성을 철저히 부인한다는 점에서는 그토록 적대시했던 과학주의와 한 패였다.
참된 "진리를 앎"은 절대타자, 절대진리, 절대자의 존재를 긍정하고 믿음으로 수용하며 이성적 이해의 한계를 알면서도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하려는 신앙을 요구한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를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으로 불렀다. 신앙은 참된 진리에 자신의 이성과 경험과 의지를 내려놓는 겸손한 삶의 태도이며 세상의 모든 것을 진실로 사랑하는 용기있는 행동이다. 그래서 모든 진리는 이러한 삶을 명징하게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에게 귀착된다. 예수는 진리이고 예수는 사랑이다. 그래서 진리는 사랑이며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진리를 아는 유일한 길이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하며 사랑은 리얼리즘이라는 강원용 목사님의 말씀은 이런 점에서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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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용 (1917-2006), 중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19.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1b-32) 이 말씀은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진리를 아는 것"은 어차피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진리를 알 수 있는 능력과 의도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성은 참된 진리를 거부하는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 진리를 혐오한다. 참된 진리는 인간의 부패와 죄악을 밝히 드러 내기 때문이다. 성경은 "변하지 않는 영원하며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절대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며 성령을 통해 알려지는 하나님" 이심을 증거한다. 이 전제를 수용하려면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이 믿음을 거부하고 진리의 타자성을 무시하며 진리의 인격성을 멸시한다. 그래서 근대적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절대화 하여 유한하며 제한적인 이성의 두레박으로 망망한 진리의 바다를 재려는 우매함에 빠져 버렸다. 그래서 이러한 과학적 인간들은 진리를 자신의 사고와 이해의 한계라는 철장에 가두어 놓음으로서 고독과 소외, 허무라는 진창속에 스스로를 투신하고 말았다.
또 다른 극단의 부류들은 과학적 인간들의 이성주의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고 신앙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과학제일주의의 맹주인 절대이성을 타도하기 위해 신앙제일주의자들이 선택한 주인은 바로 도그마였다. 그러나 건강한 이성의 사용과 자기반성을 거부한 맹목적이며 자기 중심적인 신앙주의는 절대이성의 왕좌위에 도그마적 신앙을 올려 놓아 경배의 대상을 바꾸었을 뿐, 절대 진리의 무한성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따듯한 인격으로서의 진리를 삶속에 실천하기를 거부하며 자신의 한계와 유한성을 철저히 부인한다는 점에서는 그토록 적대시했던 과학주의와 한 패였다.
참된 "진리를 앎"은 절대타자, 절대진리, 절대자의 존재를 긍정하고 믿음으로 수용하며 이성적 이해의 한계를 알면서도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하려는 신앙을 요구한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를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으로 불렀다. 신앙은 참된 진리에 자신의 이성과 경험과 의지를 내려놓는 겸손한 삶의 태도이며 세상의 모든 것을 진실로 사랑하는 용기있는 행동이다. 그래서 모든 진리는 이러한 삶을 명징하게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에게 귀착된다. 예수는 진리이고 예수는 사랑이다. 그래서 진리는 사랑이며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진리를 아는 유일한 길이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하며 사랑은 리얼리즘이라는 강원용 목사님의 말씀은 이런 점에서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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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2009
"그 신성한 덮개" -종교 사회학적 이론의 요소들
피터 버거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미국 사회학자이며 루터파 신학자이다. 토마스 루크만Thomas Luckmann과 공저한 "실체의 사회적 구성" The Social Construction of Reality: A Treatise in the Sociology of Knowledge (New York, 1966) 이라는 책으로 종교사회학 분야에 의미있는 공헌을 하였다.
3.18.2009
알려는 열망
"Knowing is the responsible human struggle to rely on clues to focus on a coherent pattern and submit to its reality." Esther MeekMeek은 Michael Polanyi를 연구한 철학자이다.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자동차 수리공을 유비하였다. 깔깔대며 웃는 유쾌한 웃음이 귀엽기까지 한 Meek은 Longing to Know라는 책에서 철학적 인식론을 일상의 언어로 생생하게 그려내는 값진 작업을 하였다.
“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Meek은 결론을 내리기 전에 철저하게 이 질문에 대해 탐구할 것을요 청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알 수 없다”는 명제 자체도 “하나님은 알 수 있다”라는 명제를 증명하는 것 만큼, 아니 보다 더 어려운 작업들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증명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성서가 증언하는 또 다른 난관인 “우리의 앎의 능력은 왜곡되고 상실되었다”는 진리 앞에 서야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어거스틴의 오랜 전통을 따라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망을 외면하고 포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존재적으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고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젖먹이의 옹알이로부터 프로이드의 왜곡된 Id까지 진리를 향한 열망은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아 프라이오리a priori이다.
도대체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어떤 의심할 수 없고 오류도 있을 수 없는 절대적 보편진리를 인식한다는 것인가? 대답은 “아니다.” 안다는 것은 의심이라는 행위와 오류의 실패를
포함하는 더 포괄적인 행위이다. 앎은 끝없는 인식의 과정이다. 결국 인간의 삶은 끝없는 알아감의 여정이며 알아가는 것은 인간됨의 행위이다.세 상 속에 흩어진 실체의 편린들을 단서로 그리고 보여진 실체 너머에 있는 배후의 관계들을 통해 일관성cohesive있는 의미를 발견해 내는 것은 때로는 고통스럽고 무모하며, 어쩌면 너무나 어려워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정도이다. 그러나 “세상the world”은 여전히 실재하고, 세상을 인식하는 주체이며 동시에 중요한 인식의 대상이기도 한 “나body”도 실재하기에 포기할 수도 없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인식의 대상과 인식의 주체 사이의 관계를 정립해 주는 일종의 “지침/방향direction”이다 (나는 Meek의 direction보다 인식론적 방향성과 인식의 주체와의 관계성을 더 포괄적으로 설명해 주는 Geertz의 “Map” 개념을 선호한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지도의 범례keynote/legend가 되어 인식의 틀을 형성하고 기존의 틀을 계속해서 교정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삶의 복잡다단한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실체들은 정념화되어 경직되지 않고 계속 역동적으로 구성과 해체, 그리고 재구성을 거듭할 수 있도록 유연해야 한다. 진리는 단순히 감각과 인식과 언어 너머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소망과 겸손을 가지고 반응respond할 수 있다. "확실함certainty"도 절대진리를 명확히 "표현할 길"도 없기 때문에 겸손해야 할 것이며, 이러한 겸손함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인식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소망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겸손함과 소망은 세상에 대해 존재를 여는 태도이다 (피녹은 이를 인간의 "세계 개방성"이라고 불렀다. 다만 그는 이를 인간 존재의 자연스러운 본성으로 설명했지만 내가 보건대 이는 죄로 인해 왜곡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많은 중요한 본성들 중 으뜸이 되는 것이다. 자기만의 도그마에 갖혀 진리를 자기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양 법석을 부리는 경직되고 오만한 사람들속에 내가 속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증거는 충분하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세상을 향해 자신의 존재를 여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나는 세상과 연합하고 세상을 이해하며 세상에 섞여 세상을 풀어(해석해)나간다. 서양적 전통의 분석적 사고에 대한 강조는 인간의 의식에 대한 과도한 의존과 확신을전제로 하게 될 때 결국 실체로 부터의 메마른 단절만을 부추겨 결국 인간을 끝없는 고독의 무저갱에 처박아 놓게 된다. 실체와 인식의 주체는 분리될 수 없다.
인식의 행위는 인식자의 적극적이고 책임성 있는 순종과 헌신을 요청한다. 앎yadah이라는 것은 부부가 결혼을 하여 서로 알아가는 것과 같은 그런 종류의 앎이다. 완전히 다 알아 앎이 종료되는 순간은 없다. 다 만 계속해서 알아갈 뿐이다. 그리고 그 앎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필요하다. 용기와 희생과 책임이 뒤따른다. 말씀word를 통해, 세상world를 통해, 그리고 우리자신we-self를 통해 우리를 만나시는 하나님은 그래서 임마누엘이다. 나와 세상을 통해 그리고 말씀을 통해 계시는 하나님 밖에서 어떻게 내가 존재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어거스틴은 고백한다. "그러므로 나의 하나님이여, 당신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할 수가, 결단코 존재할 수가 없나이다. 아니면 이렇게도 말할 수도 있지 않겠나이까? 내가 당신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니이다…. 그러하나이다 주여… 당신은 말씀하셨나이다.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렘23:24). Confessio, I.ii.2
앎은 또한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하는 행위이다. 믿음과 이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지, 정, 의의 모든 인간됨이 총동원 되는 것이다. 보이는 것 너머의 복잡한 관계들을 성경과 성령이 지시하는 대로 민감하게 반추하여 의미를 발견하려는 적극적인 "앎의 행동"이 필요하다.
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진정한 앎은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앎은 존재와 존재의 충돌이기에 변화에 대한 용기를 요구한다. 앎은 알려지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되는 것이다. 그를 알기 전의 나와 그를 알고 난 후의 나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더할 나위 없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변화되는 것이다. 더 많이 알아갈 수록, 더 많이 변화되며, 더 많이 변화될 수록, 더 많이 알고 싶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거룩이 더해 갈 수록 죄에 대한 인식이 더 또렷하고 깊어지며 이는 더 깊은 거룩의 갈망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정말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는 지를 먼저 물을 일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만나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 않고 궁금하지 않은 담에야 "알고 싶을"리 만무하지 않은가? 알고 싶지 않은데 알 수는 없는 노릇이며, 사랑해야만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앎"을 "세상의 실체를 받아들이고 탐구하려는 인간의 책임있는 노력"으로 정의한 에스더 믹의 진술은 좀 메마른 감이 있어 아쉽다.
bk
3.05.2009
신과 과학
1. The visible order of the universe proclaims a supreme intelligence.
눈에 보이는 질서정연한 우주는 최고의 지성적 존재를 웅변한다.
-Jean-Jacues Rousseau
2. Science brings men nearer to God
과학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이끈다.
-Louis Pasteur
3. Truth between candid minds can never do harm.
편견없는 지성간의 진실은 절대 해롭지 않다.
-Thomas Jefferson
4. The visible marks of extraordinary wisdom and power appear so plainly in all the works of the creation that rational creature, who will but seriously reflect on them, cannot miss the discovery of a Deity.
모든 창조사역속에 드러나는 비범한 지혜와 권능의 증표들은 너무도 명백하여서 이를 진지하게 상고하는 이성적 피조물은 하나님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John Locke
눈에 보이는 질서정연한 우주는 최고의 지성적 존재를 웅변한다.
-Jean-Jacues Rousseau
2. Science brings men nearer to God
과학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이끈다.
-Louis Pasteur
3. Truth between candid minds can never do harm.
편견없는 지성간의 진실은 절대 해롭지 않다.
-Thomas Jefferson
4. The visible marks of extraordinary wisdom and power appear so plainly in all the works of the creation that rational creature, who will but seriously reflect on them, cannot miss the discovery of a Deity.
모든 창조사역속에 드러나는 비범한 지혜와 권능의 증표들은 너무도 명백하여서 이를 진지하게 상고하는 이성적 피조물은 하나님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John Locke
3.04.2009
불꽃놀이와 창조
나는 불꽃놀이를 좋아한다. 하나님의 창조를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어두운 밤하늘에 강력하게 솟아올라 분수처럼 흩어지는 불빛들의 향연을 보노라면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력에 경외감 마져 느껴진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마치 불꽃놀이를 하시는 것 처럼 즐겁고 재미있으셨지 않을까? 혼돈과 공허, 흑암가운데 오색찬란한 빛들이 우주를 뒤흔드는 소리와 함께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제 자리를 찾아 퍼져 나간다. 빛이 생겨난 자리에 어둠은 물러가고 열기와 생명력의 에너지들은 형형의 색들로 옷을 입고 장엄한 조화를 형성하며 밤하늘의 캔버스를 진하게 물들인다. 광대하고 아름다운 우주적 예술...
누군가는 차이코프스키가 불꽃놀이와 어울린다지만, 나는 그래도 모짜르트가 더 좋다.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올 해 독립기념일에는 아이들과 함께 폭죽놀이를 해 볼 것이다. 모짜르트를 크게 들어 놓고 말이다.
창조를 예술적 표현artistic expression 또는 놀이play로 보는 견해가 있다.
전통적으로 창조는 역사work로 인식되었다. "창조사역"이라는 말은 창조를 "일" 또는 "노동"으로 보는 견해를 반영한다. "일"이라는 단어는 댓가를 얻기 위해 지불되어야 하는 노력의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전적으로 자유로우며free 자발적spontaneous이다.
1. 창조는 자유로우며 구속이나 제한됨이 없는 행위이다. 다른 모든 예술적 표현과 같이 자유로우며, 표현적이고, 즐거우며 창조적인 행위이다.
2. 놀이로서의 창조에는 자발적 구속과 제한을 포함한다. 조화와 통일, 균형과 화합을 위한 종합적 통합성은 자발적인 자기제한을 요구한다.
3. 개채와 전체의 어우러짐은 상호 보완과 견제, 그리고 협력의 상호의존성을 근간으로 한다. 개채는 그 자체로서 완전하며 동시에 전체에 의존적이다.
4. 개채는 전체의 일부가 되었을 때 새로운 존재로 재구성된다.
어두운 밤하늘에 강력하게 솟아올라 분수처럼 흩어지는 불빛들의 향연을 보노라면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력에 경외감 마져 느껴진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마치 불꽃놀이를 하시는 것 처럼 즐겁고 재미있으셨지 않을까? 혼돈과 공허, 흑암가운데 오색찬란한 빛들이 우주를 뒤흔드는 소리와 함께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제 자리를 찾아 퍼져 나간다. 빛이 생겨난 자리에 어둠은 물러가고 열기와 생명력의 에너지들은 형형의 색들로 옷을 입고 장엄한 조화를 형성하며 밤하늘의 캔버스를 진하게 물들인다. 광대하고 아름다운 우주적 예술...
누군가는 차이코프스키가 불꽃놀이와 어울린다지만, 나는 그래도 모짜르트가 더 좋다.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올 해 독립기념일에는 아이들과 함께 폭죽놀이를 해 볼 것이다. 모짜르트를 크게 들어 놓고 말이다.
창조를 예술적 표현artistic expression 또는 놀이play로 보는 견해가 있다.
전통적으로 창조는 역사work로 인식되었다. "창조사역"이라는 말은 창조를 "일" 또는 "노동"으로 보는 견해를 반영한다. "일"이라는 단어는 댓가를 얻기 위해 지불되어야 하는 노력의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전적으로 자유로우며free 자발적spontaneous이다.
1. 창조는 자유로우며 구속이나 제한됨이 없는 행위이다. 다른 모든 예술적 표현과 같이 자유로우며, 표현적이고, 즐거우며 창조적인 행위이다.
2. 놀이로서의 창조에는 자발적 구속과 제한을 포함한다. 조화와 통일, 균형과 화합을 위한 종합적 통합성은 자발적인 자기제한을 요구한다.
3. 개채와 전체의 어우러짐은 상호 보완과 견제, 그리고 협력의 상호의존성을 근간으로 한다. 개채는 그 자체로서 완전하며 동시에 전체에 의존적이다.
4. 개채는 전체의 일부가 되었을 때 새로운 존재로 재구성된다.
2.27.2009
우주적 그리스도
장공 김재준(金在俊, 1901~1987)"크리스챤이 역사에 대하는 태도란 언제든지 구속사적 입장과 성격 안에서 이 현실의 역사를 비판해야 하며, 동시에 그 역사로 하여금 구원의 목표를 지향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 이 비판과 지향에서 크리스찬은 십자가를 각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기독교 사상 제2권 3호-
장공의 사상은 변혁적이며 문화적이고 창조적이다. 무엇보다 역사참여의식이 강한 선지자적 '얼'을 담고 있다. 바르트와 니버의 신정통주의를 수용하는데 있어 민족적 주체성이라는 자기의식을 잃지 않는다. 장공은 주체적 한국 신학을 정립하고 그 정신을 역사속에 구현하려 몸부림쳤던 선지자였다. 그에게 있어 복음의 핵심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였기 때문이다. 초월적 하나님이 강조된 신정통주의를 수용하며 한국의 근대상황에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을 강조함으로 주체적 신학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의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강조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초월성보다 내재적 그리스도를 더욱 강조하는 진보신학의 토대가 되면서 토착화 신학, 민중신학등의 원류를 제공한다.
장공은 시대의 사상적 조류를 꿰뚤어 보는 넓은 안목을 지닌 학자였다. 자신을 공격하는 수구 보수세력의 신학적 정체성과 그 뚜렸한 한계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의 장로교가 19세기 말부터 사멸의 길을 걷는 구프린스턴 중심의 근본주의에 과도히 영향을 받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성경 연구에 과학적 방법을 수용하면서도 사도적 신앙을 타협하지 않는 자율적 신학과 역사참여적 신앙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주체적으로 신학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세상을 변혁하는 창조적인 소수를 양성하고자 애썼다. 강원용, 문익환, 문동환, 안병무, 서남동 등은 그가 배출한 인물들이었다.
그의 선교의식 역시 선지자적이다. 교회의 선교란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전도로 축소될 수 없다. 역사속에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세상의 역사를 변혁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하나님의 뜻인 자유와 사랑과 정의의 평화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도록 하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다.
장공의 신학과 사상은 주체적이면서도 동시에 우주적이었다. 그에게 우주는 "하느님의 집," "아버지의 집"이었고 삶의 목표는 "범세계적, 더 넓게는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실현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카인의 문명과 아벨의 구속사가 하나로 통합이 되는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그것을 실현하는 주체가 교회이며,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선교였다.
함석헌, 김교신, 이용도와 함께 1901년 생인 그는 구한말 "역사의 어둠이 짙었을 때에" 태어나 질곡의 한국 근대사를 걸었다. 그러나 암울하고 폭압적인 역사앞에 좌절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계명성 동쪽에 밝아 이 나라의 여명"이 왔음을 선포했고, 은둔과 자적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인류의 횃불이 될 것"을 노래했다 (새찬582). 20세기를 살며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역사를 변혁하려 했던 그의 정신과 자취는 강렬한 빛이 되어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에게도 여전히 밝고 따습게 비췬다.
bk
1.02.2009
개혁
개혁reformation은 창조creation의 어머니 이기 이전에 발견discorvery과 교정correction의 아들이다.
bk
(1) 신학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신앙공동체의 선포와 실천이 성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계시에 합당한 진리인가를 묻는 것이다. (describe and interpretive)
(2) 신학의 임무는 신앙 공동체의 선포와 실천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온전한 진리를 적절하게 표현하도록 하는 것이다. (prescriptive)
(3) 신학의 임무는 신앙 공동체의 선포와 실천이 현재의 삶의 정황에 생생한 실체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나타내도록 하는 것이다. (practical)
(4) 신학의 임무는 신앙공동체가 선포하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개인과 사회의 실천을 변화하도록 하는 것이다. (Transform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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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학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신앙공동체의 선포와 실천이 성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계시에 합당한 진리인가를 묻는 것이다. (describe and interpretive)
(2) 신학의 임무는 신앙 공동체의 선포와 실천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온전한 진리를 적절하게 표현하도록 하는 것이다. (prescriptive)
(3) 신학의 임무는 신앙 공동체의 선포와 실천이 현재의 삶의 정황에 생생한 실체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나타내도록 하는 것이다. (practical)
(4) 신학의 임무는 신앙공동체가 선포하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개인과 사회의 실천을 변화하도록 하는 것이다. (Transformative)
진리
진리는 올바른 명제들의 집합이나 주관적 가치가 아니라, 영원불변하며 초월적이며, 나아가 인격적이다.
Dr. JungSuk Rhee
Dr. JungSuk Rhee
이해하기 위해 믿는 신앙
I do not seek to understand that I may believe, but I believe in order to understand (fides quaerens intellectum). for this I believe-that unless I believe, I should not understand.
Anselm (1033-1109), Proslogium
Anselm is the most important Christian theologian in the West between Augustine and Thomas Aquinas. His two great accomplishments are his Proslogium (in which he undertakes to show that Reason requires that men should believe in God), and his Cur Deus Homo? (in which he undertakes to show that Divine Love responding to human rebelliousness requires that God should become a man).
창조, 타락, 구속
"God the Father has reconciled His created but fallen world through the death of His Son, and renews it into a Kingdom of God by His Spirit."
Herman Bavinck
개혁주의 신학의 가장 간단하고 명료한 진술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우주에 대한 포괄적이고 배타적인 주권과 섭리를 선언한다.
창조-타락-구속의 세계관을 통해 철학적 구조와 신학적 방향을 동시에 보여 준다.
12.30.2008
공동체를 위한 신학교육
I. 1983년 Edward Farley (professor of Theology at Vanderbilt Divinity School, Nashville, Tennessee) 가 내놓은 이론 (Theologia: The Fragmentation and Unity of Theological Education)은 교회와 신학 사이의 단절에 대한 신학 논쟁에 불을 던졌다. 신학자들은 신학을 '과학화'함으로 신학을 불신의 대상으로 만들었으며, 신학교는 과학적 신학에 적응하면서 또 다른 불신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신학과 신학 교육은 신학적 합일(theological unity)을 잃으면서 기능과 기술 중심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I-1 Farley의 주장을 긍정하고 환영한 신학자는 Charles M. Wood (Southern Methodist University)였다. Wood는 (Vision and Discernment, Scholarly, 1985) 실천적 지혜라는 주제의 의미를 역사적으
로 추적하였다.
우드에 의하면 '성서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목회학'의 4중적 형식의 신학교육은 16세기 종교개혁에 뒤따른 목회자 양성의 필요성에 따라 고착화 되었다고 주장한다.
16세기 성서신학의 일차적 목표는 신학생이 성서를 통해 신앙을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신학적인 성서주석의 기술을 습득하게 하는 것이었다. 조직신학의 목표는 신학생들에게 성경의 교리적 내용을 합리적으로 이해시키며 장차 그 내용을 교육하고 논쟁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역사신학은 과거의 역사와 전통을 이해함으로 교회와 세계 역사 뒤에 흐르는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의 패턴을 보게 하고, 그러한 관점으로 현재의 상황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었다. 목회학은 신앙 공동체의 상황과 신학 과목을 결합하여 목회의 본질과 의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우드에 따르면 18세기 산업혁명에서 대두된 '과학주의 (scientism)' 는 현대 대학을 태동시켰으며 아울러 신학의 상황마저 바꾸어 놓았다. 성서신학은 성서비평으로, 조직신학은 철학적 논쟁으로, 역사신학은 종교사로, 그리고 목회학은 학문의 반열에서 추방되었다. 이때부터 신학은 신학적 통전성을 잃기 시작했으며, 실천성practicality 마저 잃은 채 교회와 신학이 갈라지게 되었다.
II. 한편, Joseph C. Hough (Union Theological Seminary)와 과정신학자 John B. Cobb (School of Theology Claremont) 는 우드가 Vision and Discernment를 편찬한 같은 해에 Christian Identity and Theological Education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Hough and Cobb은 Farley의 이론이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추상적이며 형식적'이라고 비판했다.
이 두 학자들은 오늘의 신학교와 교회 사이의 문제는 과학주의에 적응하려 했던 4중적 신학교육의 변질이 문제라기 보다는, 16세기의 목회자양성을 위한 4중적 신학교육 시스템과 변화된 현대의 목회자의 역할 사이의 거대한 괴리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호우와 콥에 의하면, 16-17세기의 신학교육은 '스승, 교사, 지식인'상의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한 커리큘럼 구조였다. 지식인으로서 목사는 고전어, 성경, 역사, 철학, 논리학등을 통달한 스승이었으며 목회의 권위는 잘 가르치는 것에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부흥운동과 종교의 무한경쟁으로 목회자는 지식인에서 설득력있는 웅변가로 바뀌었다. 부흥사와 설교가들이 급부성하였으며 여기서부터 신학 교육과 교회는 서서히 불협화음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19세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목회자는 회중을 모으고 교회 건물을 짓고 제도를 만들어내는 조직의 건설자(Builder)로 바뀌었으며, 20세기 중반에는 목회를 하면서 교회를 경영하는 지도자, 경영자, 치유자로 목회자상이 급변하였다.
그러기에 오늘의 신학 교육의 문제는 지식인 양성을 위해 만들어 놓은 Academic Norms학문적 규범과 변화된 목회자상이 요구하는 Professional Norms전문적/기능적/직업적 규범 사이의 공백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코우와 홉은 학문적 규범과 전문적 규범 사이를 연결하는 새 목회자상을 Reflective Practitioner or Practical Theologian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리고 6학기 새 커리큘럼 시안까지 제시하였다.
III. 호우는 1988년 이미 고인이 된 James F. Hopewell을 기념하는 책을 편집하면서 새로운 신학교육의 대안을 제시하였다. Hopewell은 Beyond Clericalism: The Congregation as a Focus for Th
eological Education에서 목회자 패러다임 clerical paradigm 은 성직자 후보인 신학생 개개인의 신앙적 순례와 직업적 윤각에 초점을 맞출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개인의 발달단계와 기능주의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 태생적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신학교육이 성직자 하나만을 양성하는 일에 집중하는 동안, 정작 성직자를 통해 구현되는 궁극적 목표인 구속적 공동체redemptive community의 형성은 외면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신학교육이 "성직자 양성"에만 집중하면, 목회는 성직자 개인에게 시작되고 교회공동체는 그 한 성직자에게 모든 것을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사실상 교회 공동체는 신학과 신학 교육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성직자만이 존재하였다. 여기에 실패의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Hopewell은 여기서 혁명적인 제안을 한다. 그는 신학교육을 "목회자" 패러다임에서 "회중congregation"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것을 촉구한다. 마치 법학 교육이 타협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정의 공동체'의 실현인 것 같이, 의학교육이 '질병 치료'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사회'를 건설하는 것과 같이 신학교육이 '목회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사회의 대안인 구속 공동체'를 세우는 일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속적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신학교육은 어떤 것이며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우선적으로 우리의 신앙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모든 신앙인은 하나님 앞에서 실천적이며 책임감있는 신앙을 형성하고 그 신앙이 구체적인 삶에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신앙이 자기 자신과 이웃, 그리고 사회와 세계앞에서 구체적이고 책임있게 실현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회자와 신학자들의 임무이다. 신학은 신학자의 독점물 이기 이전에 모든 신앙인의 성찰의 과정이며 더 나아가 신앙공동체를 통해서만 가능한 작업이다. 신학의 자궁은 신앙공동체이다. 신앙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을 신학화하고 신학을 실천할 수 있는 교회공동체를 만들도록 해야 한다. 신학교육은 선장만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큰 배를 공동적으로 움직여 갈 수 있는 공동체를 위한 훈련의 장이어야 한다.
12.16.2008
문화와 신학
신학 일반과 특히 복음주의 신학의 지역적(국지적) 성격은 그것이 문화적 활동이라는 데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다.
현대에는 인류학자들이 문화를 문화적 집단의 성원들에게 외적으로 전달할 수 있고 개인들을 사회에 묶는 선재하는 사회 질서적 힘으로 묘사했었다. 그런데 포스트모던 인류학자들은 문화 안에서의 결렬과 나뉨(disjuncture)을 지적한다. 그들은 여러 다른 문화들이 전체를(wholes) 이룬다는 것을 쉽게 인정한다. 그런데 이 전체(wholes)는 단일한 성질의 것(monolithic)이 아니라, 내적으로 갈라진 것이라는 것을 포스트모던 인류학자들은 지적하는 것이다.[24] 그래서 헨리 코헨(Henry Cohen)은 문화를 "사람들과 과정들을 통합(統合)시키기(integrates) 보다는 그들을 집적(集積)시키는(aggregates) 것"이라고 묘사한다.[25] 더 나아가 포스트모던 인류학자들은 문화를 사회적 상호 작용의 결과나 산물이라고 말한다.[26] 사회는 공적 상징들의 의미를 규정하고 그렇게 해서 의견의 일치(consensus)를 형성하려고 계속 투쟁하는 일에 관여하는 사람들의 집적(集積)이라는 것이다.[27] 결과적으로, 알랑 뚜랑(Alain Touraine)이 지적한 바와 같이, 사람들은 사회 관계의 일반적 틀이나, 분명히 이해된 일단의 신념이나 가치들, 또는 주도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함께 엮어 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화적 접착제는 "사회적 행동가들이 조절하고 통제하려 하고, 충용하며, 또는 그것들을 사회적 조직으로 변혁시킬 때 그들이 서로 양보하고 절충하는 일련의 자원들과 모델들"로 구성된다.[28]
신학은 모든 문화 안에 있는 의미를 형성하는 활동(the meaning-making activity)과 연관된다. 좀더 구체적으로 신학은 특정한 사회의 건축 벽돌과 문화 의미의 전달자로서 기능하는 다양한 상징들과 실천들과 연관된다. 따라서 기독교 신학은 '기독교 문화적' 의미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을 형성하는 과제와 연관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스 프라이(Hans Frei)는 신학을 "기독교 공동체에 내재해 있는 규범이나 규범들 아래서 그 공동체 자체의 언어나 행동을 기독교 공동체가 다시 평가하는 것"이라고 묘사한다.[29] 또한 캐떠린 태너는 신학을 "의미 생산에 전념하는 실질적 사회적 습관"(a material social practice that specialized in meaning production)이라고 선언한다.[30]
24 Kathryn Tanner, Theories of Culture: A New Agenda for Theology (Minneapolis: Augsburg Press, 1997), 56.
25 Anthony P. Cohen, Self Consciousness: An Alternative Anthropology of Identity (London: Routledge, 1994), 118-19.
26 Cohen, Self Consciousness, 118-19.
27 Tanner, Theories of Culture, 56.
28 Alaine Touraine, Return of the Actor, trans. Myrna Godzich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apolis Press, 1988), 8, 26-27, 54-55.
* 여기서 신학의 문화적 환원이 발생할 위험이 있음에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신학이 문화 형성적 작업과 관련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학의 여러 기능 중의 하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학의 의미를 이 글에서의 그렌츠와 같이 오직 문화의 의미 형성 작업과만 연관시키면, 신학의 다른 측면을 놓치고, 문화론적, 의미론적 환원일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역자 주).
29 Hans W. Frei, Types of Modern Theology, ed. George Hunsinger and William C. Placher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2), 2.
30 Tanner, Theories of Culture, 72.
12.15.2008
신학
fides quaerens intellectum
"Theology is a continuing search for the fullness of the truth of God made known in Jesus Christ."
신학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풍부한 진리에 대해 탐구하는 행위이다.
안셀름의 유명한 경구를 빌자면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이다. 모든 진실된 탐구와 정직한 진리의 추구는 믿음을 전제로한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믿어야 한다. 믿기 위해 이해하려 한다면 켤코 작은 "이해"조차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한편 진정한 믿음은 켤코 이성의 욕구를 배제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믿음은 맹신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믿음은 철저하게 이해를 추구하고 거기서 만족과 기쁨을 얻는다. 이것은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며, 하나님은 진리이신 자신을 계시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진리를 이해하고 즐거워 함으로 그분을 영광돌리도록 창조하셨다고 믿는 믿음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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