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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2011

헌신

나는 무엇에 대해 헌신하는가?

첫째, 나는 하나님께 헌신한다.
둘째,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사람들에 대해 헌신한다.
셋째,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삶의 방식에 대해 헌신한다.

나는 무엇에 대해 헌신하지 않는가?

첫째, 나는 내가 하고자 원하는 일이나 그 일을 이루는 방식 자체에 헌신하지 않는다. 일은 내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둘째, 나는 내가 소유하고자 하는 것에 헌신하지 않는다. 소유에 대한 헌신은 나의 자유를 빼앗고 나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셋째, 나는 내가 자연스럽게 이끌리는 내 욕구에 헌신하지 않는다. 욕구에 대한 헌신은 나의 영혼을 눈멀게 하여 가치에 혼돈을 가져오며 판단을 흐리게 하여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게 하기 때문이다.

bk

5.15.2010

관계와 용서

"관계가 성공하는 것은 죄있는 쪽이 벌을 받아서가 아니라 죄 없는 쪽이 긍휼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맥스루케도, 예수님처럼, 33

2.06.2010

지도자의 3대 책무

지도자의 3대 책무

1. 방향설정 (Direction)
2. 동기부여 (Motivation)
3. 전략개발 (Strate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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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미나에서 들었던 내용이다. 일단 단순 명쾌하다. 그리고 단계적인 우선순위를 보여준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독단적이고 상명하복의 권위주로 흐를 가능성이 있는 것 외에도 관계중심이기 보다 일중심의 사고가 강조된다. 군대 지도자의 3대 의무라면 적절하겠나?

bk

4.07.2009

존재 이유와 존재 양식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점은 우리가 교회의 존재 이유와 존재양식을 혼동하는 것입니다...예배와 선교 자체가 교육적인 것이 되어야 하고, 교회의 모든 영역이 교육적 의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구원의 주체도, 매개도 아닙니다... 교회는 화해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은준관-

초기 웨스터호프John Westerhoff의 공동체적 접근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그는 90년대 이후 개신교회의 양적 정체와 사회적 신임 상실에 대한 원인을 웨스터호프의 이론에서 찾으며 신앙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형성되어 지는 것이며 공동체의 관계를 통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다는 Westerhoff의 주장을 한국적 상황에 접목시키려 애쓰고 있다.

이런 점에서 100여년 전 스미스Shelton Smith의 비판은 예언자적이다. 역사는 주일학교를 통해 교회 공동체에 부흥이 일어났다는 것을 한번도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 우리의 미래는 아이들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결정한다. 그래서 진정한 기독교 교육은 구속적 학습공동체의 존재양식을 유지해야만 한다는 주장이 기능적 측면에서도 적합성을 가진다는 나의 생각은 더욱 공고해 진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교회의 존재 이유가 하나님 나라의 구속적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 16, 28; 요 17, 엡1, 4).
bk

12.31.2008

The Purpose of My Life

I exist in order to glorify and enjoy God by loving Him and loving people through all of my God-given life, resources, and character.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생명과 자원들(은사/소유/관계/지식/전문성/시간), 그리고 성품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영광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기 위해 존재한다.

Q. 1. What is the chief end of man?
A. Man’s chief end is to glorify God,[1] and to enjoy him forever.[2]

[1] Psalm 86. Isaiah 60:21, Romans 11:36, 1 Corinthians 6:20, 31, Revelation 4:11.

[2] Psalm 16:5-11. Psalm 144:15, Isaiah 12:2, Luke 2:10, Philippians 4:4. Revelation 21:3-4.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12.29.2008

Education for Shalom

Shalom goes beyond justice, however. Shalom incorporates right relationships in general...right relationships to God, to one's fellow human beings, to nature, and to self. the shalom community is not merely the just community but is the responsible community, in which God's laws for our multifaceted existence are obeyed.

The vision of shalom comes to us, for one thing, as a two-part command: we are to pray and struggle for the release of the captives, and we are to pray and struggle for the release of the enriching potentials of God's creation. we live under both a liberation mandate and a cultural mandate.

The goal for which Christian educators are to teach is that our students be agents and celebrators of shalom, petitioners and mourners.
Nicholas Wolterstorff, Educating for Shalom (MI: Eerdmans, 2004) 24-25.

12.28.2008

공감적 경청 vs 동감

공감적 경청이란 이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경청하는 것을 말한다. 내가 먼저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 즉 진정한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다...
공감적 경청이란 다른 사람이 가진 준거틀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다른 사람의 관점을 통해서 사물을 보는 것, 즉 그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에 입각하여 세상을 보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그들의 패러다임을 이해하고, 또 그들이 느끼는 감정도 이해한다.

공감이란 동감을 말하는 것이아니다. 동감은 합의의 한 형태인 판단을 포함한다...[동감]은 사람들을 서로 종속적으로 만든다. 공감적 경청의 본질은 우리가 누군가에게 동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 이것은 어떤 사람을 감정적으로는 물론 지적으로도 완전하고 깊게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이 추정하는 바에 의하면, 커뮤니케이션 중 불과 10%만이 우리가 말하는 내용에 의해 전달되고 있다고 한다. 다른 30%는 우리가 내는 소리에 의해, 그리고 나머지 60%는 우리의 신체 언어를 통해 전달된다. 그러나 공감적 경청을 하는 경우 우리는 귀로 말을 들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더욱 중요한 눈과 가슴으로 듣는다.

12.24.2008

문: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까?

답: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으로만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비록 내 양심이 나를 고소하기를
하나님의 명령에 저항하여 지독히 죄를 지음으로
결코 그 명령들을 지키지 않으며
여전히 모든 죄악으로 향하는 죄성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무가치한 나를 순전한 은혜로써
마치 내가 한번도 죄를 지은 일이 없는 것처럼
마치 내가 완전히 순종한 것 처럼
그리스도의 나를 위한 순종으로
그분의 완전한 보상과 의로움과, 거룩함을
내게 부어주시고 나의 것으로 여겨 주셨습니다.

오직 내가 해야 할 일은
믿는 마음으로 그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The Heidelberg Catechism Q/A 60

3.15.2008

삼위 하나님은 서로 질투하시는가?

"그래요. 정말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바다보다 깊고 우주만큼 넓은 내 죄를 완전히 덮으셨으니까요. 그리고 그 사랑을 알면 알수록 내 죄는 더욱 커져만 가고, 그래서 그분의 사랑은 더 넓고 깊어만 갑니다. 영원히… 하나님은 "사랑하심"입니다. 사랑의 한 부분을 질투라 표현한다면 삼위일체 하나님도 서로 질투 하실 테고(신명기 4:24), 질투가 자기사랑의 변질된 사랑이라면 당연 해당이 안되겠지요. 자매의 사랑을 위해서라면 삼위 하나님은 서로 질투하실 거에요. ㅎㅎㅎ

이러한 진리를 배워갈 수 있도록 공동체를 허락하신 주님의 사랑 또한 꼭 언급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혼자사랑은 있을 수 없으니까요. 하다못해 짝사랑도 대상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하심처럼,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비결입니다. 공동체가 없다면 "서로 사랑함"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심한 좌절과 갈등을 경험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입장, 다른 관점, 다른 경험, 다른 나이, 다른 성장과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서로 갈등하고 아파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원하는 것이 다르고, 기대가 다르고, 이해하는 바가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고, 처해진 상황이 다르니까요. 게다가 나도 내가 이해가 안 갈 때가 많은데 어떻게 남이 이해가 가겠습니까? 나도 내가 싫을 때가 많은데 어떻게 남이 마냥 좋겠습니까?

세상 공동체 같으면 좀 간단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는 관계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그러니 목적을 위해 관계가 희생당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관계는 당연히 이해타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일을 위한 수단이 됩니다. 겉으로는 너무나 효율적이고, 너무나 조직적이고, 너무나 생산적일 수 있지만, 오히려 모든 도덕적 비극이 여기서(인격의 소외) 발생한다는 것을 철저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정 반대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의 핵심이고 교회의 힘입니다. 교회공동체는 관계 자체가 목적입니다. 그리고 관계를 통해 일이 성취됩니다. 신앙이라는 목적을 이룰 수단으로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 관계 속에서 신앙을 배워가는 것이 교회입니다. 예배를 위해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사랑으로 관계가 성립되기 때문에 모일 때 마다 예배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선교라는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관계는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선교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관계가 없이는 예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이 너희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내가 함께 있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것은 두 세 사람이 모인 장소에 예수님께서 같이 계신다는 뜻이기 보다는, 두 세 사람이 모인 그 관계 속에서 예수님이 드러나시고 경험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나와 여러분 속에 거하십니다. 그러니 모여서 공동체를 이룰 때 좀더 분명한 그리스도의 모습이 만들어 지지 않겠습니까? 내가 알고 느끼고 믿는 예수가 다라면 그렇게 부분적인 예수가 어떻게 진정한 예수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죠. 그래서 다른 이들에게 역사하시고 나타나시는 예수가 필요한 것이며 우리의 관계를 통해 역사하시는 예수가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공동체 안에서만 더 풍성하고 더 깊고, 더 심오한 예수, 깊은 예수가 경험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내 주변에 있는 형제 자매들이 얼마나 귀한 사람들입니까? 나에게 예수를 풍성하게 경험하게 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사랑을 전달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나의 죄를 깨닫게 해주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나로 하여금 기도의 자리를 펴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나의 연약함과 오만과 독선과 아집과 상처를 발견하게 해 주는 영혼의 거울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모습 그대로를 용납해 주며, 내 안에 있는 가능성을 드러나게 하고, 나의 무너진 자아를 곧추켜 세워주고, 깨어진 자아를 다시 재구성해 주는 치유자들입니다. 이런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을 때에야만, 우리는 사랑, 기쁨,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온유, 절제, 충성과 같은 성령의 열매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맺어지는 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공동체는 신비입니다. 연약한 공동체일 수록 그 신비가 더 뚜렸하게 나타납니다. 조용하고 느린 공동체일 수록 그 신비가 더 분명해 집니다. 오죽하면 하버드와 예일의 교수였던 헨리 나우웬은 정신 장애인 공동체인 라르슈에 들어갔을 때 진정한 "공동체"를 배우고 상처를 치유 받았다고 했겠습니까? 공동체는 행사나 집회, 강의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공동체는 서로의 연약함 때문에 서로 아파하면서도 예수의 사랑으로 함께 인내하고 보듬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을 통해서만 만들어 집니다. 그래서 순이 중요합니다.

쓰다 보니 직업병이 도지네요…  이 메일 길게 쓰는 것도 전염되는 모양입니다. 조심해야지…ㅎㅎ

오는 토요일에는 예수님이 세상을 향해 도전하셨던 공동체를 세우는 리더십에 대해 나눌 것입니다. 말씀 구절들을 성경에서 찾고 자신의 생각을 적어 오시기 바랍니다. 7시 30분부터 간단한 아침을 나누고 8시부터 찬양으로 시작해서 10시에 마치도록 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으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2.19.08 "삼위 하나님이 질투하시는가"를 묻는 자매에게 b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