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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0.2010

영혼과 자아



『영혼과 자아의 성장과 몰락』은 서양지성사에 나타난 자아와 인격동일성 사상에 대해 살펴보고 있는 책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유물론 철학자들의 사상을 발판으로 한 고대 그리스철학을 시작으로 사도 바울, 필로,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몽테뉴 등 교부시대와 중세 르네상스 철학자들의 사상을 거쳐, 17세기 자연철학을 통해 자아와 인격동일성 사상이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개념에서 더 과학적이며 사회적 개념으로 바뀐 과정을, 또 근대 철학과 심리학 사상을 중심으로 페미니즘과 성차별, 윤리학 연구가 자아와 인격동일성 사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자크 라캉,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와 같은 현대 철학자들은 어떤 식으로 자아와 인격동일성을 부인했는지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자아와 인격동일성 사상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그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모든 사상'을 통해 살피고 있는 이 책은 서양지성사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중요한 철학자와 사상들을 다루고 있어 책의 주제인 자아와 인격동일성 사상뿐만 아니라 서양지성사의 흐름을 익힐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저자 및 역자 소개


저자 : 레이먼드 마틴(Raymond Martin)

유 니언 대학(Union College) 철학교수이자 학과장으로, 《자기관심: 인간의 존속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경험적 접근법(Self-Concern: An Experiential Approach to What Matters in Survival)》을 비롯한 여러 저서를 집필했다.


저자 : 존 배러시(John Barresi)

댈하우지 대학(Dalhousie University) 심리학교수로, 《영혼의 자연화: 18세기 자아와 인격동일성 사상(Naturalization of the Soul: Self and Personal Identity in the Eighteenth Century)》을 레이먼드 마틴과 공동 저술했다.


역자 : 마리오

서울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대학원 교육학과를 졸업했으며 캐나다 테일러 신학교(Taylor Seminary)에서 신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는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며 옮긴 책으로는 《스승으로 산다는 것》《의롭다 하시는 하나님》 《람세스 최후의 비밀》 등이 있다.

 목차
1장 신화에서 과학으로
2장 인간과 개인
3장 서양 종교사상
4장 부활한 자아
5장 두 갈래 사상
6장 아리스토텔레스주의 합성
7장 영혼을 염려하다
8장 자연의 기계화
9장 영혼의 자연화
10장 정신 철학
11장 인간본성학
12장 추락하는 자아
13장 잃어버린 낙원
14장 자초지종과 그 의미
관련 자료
1 장 신화에서 과학으로에서는 철학사상이 등장하기 이전과 이후에 고대 그리스인들이 영혼과 내세를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았는지 살펴보고 있다. 호메로스의 작품이나 디오니소스와 오르페우스를 숭배하던 신비종교 사상, 핀다로스의 시(詩)나 소포클레스의 희곡 등에 나타난 단순한 영혼과 내세관이 기원전 5세기에 접어들어 자아에 관심을 보인 최초의 철학자들이 등장하게 되면서 어떻게 철학적으로 풀이되는지 각각의 철학자들의 저술을 통해 밝히고 있다.

2장 인간과 개인에서는 알렉산더 제국이 해체된 후 새로운 제국으로 떠오른 로마의 철학자들이 그리스 철학을 바탕으로 자아와 인격동일성 사상을 어떻게 발달시켰는지 설명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인간 중심의 전통 그리스 사상과 개인 중심의 로마 사상을 접목하여 인간은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 키케로, 키케로 사상의 영향을 받아 인간은 타고난 성격이나 외부환경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그것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는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한 에픽테토스, 에픽테토스의 제자로 영혼의 문제에 깊이 몰두하여 종교적이고 내면적인 사상을 표출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실체가 없는 영혼과 내세의 존재를 부정하고 에피쿠로스 사상을 반영하는 장편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통해 중세와 근대 사상가에게 영향을 준 루크레티우스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다.

3장 서양 종교사상에서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서양의 종교사상에 나타난 영혼과 자아 개념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이들 세 종교는 발상지가 비슷한 유일신교로 우주를 창조한 전지전능한 신이 있다고 믿었을 뿐 아니라 신앙과 그리스 철학의 통합을 시도한 사상가들을 통해 발전했다. 인간이 육체가 죽은 후에 부활하여 지상의 행적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는 세 종교의 관점은 인격동일성과 육체의 동일성에 철학적 관심이 쏠리게 된 계기가 되어 철학사에 인성, 개체성, 동일성이라는 최장수 논제를 남기게 된다.

4장 부활한 자아에서는 썩은 육체가 부활한다는 것을 철학적으로 증명해야 하는 신학적 입장을 최초로 제시한 유스티누스, 아테나고라스와 같은 초기 기독교 변증가들부터 최후의 변증가로 불리며 3대 부활사상을 제기한 이레나이우스, 미누키우스 펠릭스, 테르툴리아누스의 사상을 통해 육체의 부활이 어떻게 철학적으로 증명되었는지 살피고 있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 이전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불리는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는 플라톤철학을 받아들여 비물질적인 영혼과 물질적인 육체라는 이원론을 정립했고, 그의 사상은 메토디오스, 니사의 그레고리가 더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기독교 사상 최고의 신학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등장하면서 중세부터 종교개혁까지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었던 삼위일체, 악의 존재, 자유의지, 시간의 본질, 인간의 심리와 부활 등의 문제를 정립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5장 두 갈래 사상에서는 플라톤주의와 기독교 사상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하면서 보편자와 개별자, 이데아의 실재성 등을 설명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던 교부시대 말기부터 르네상스 초기에 이르는 중세초기 철학과 아랍철학, 유대철학, 13~14세기 중세후기 철학 시대의 사상가들을 살피고 있다.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의 이단을 축출하는 데 관심을 쏟았던 보에티우스, 아리스토델레스 저작에 대한 최고의 주석가인 아프로디시아스의 알렉산더, 그의 사상에 의존하다가 개인의 불멸성 쪽으로 선회한 테미스티우스, 동방의 신플라톤주의를 도입한 사상을 펼치다 이단으로 몰린 에리우게나, 인간의 부활이 영적인 육체의 부활이라고 주장한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등이 이 시대에 활동하던 철학자들이다.

6장 아리스토텔레스주의 합성에서는 그동안 플라톤학파의 탈현실적인 논쟁에만 익숙해 있던 라틴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과 그에 대한 아비켄나와 아베로에스의 주석서들을 접하면서 당시 막 발달하기 시작한 자연주의 사상과 맞물려 신플로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합성하는 과정에서 자아와 영혼에 대한 사상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 점점 우세해 지면서 영혼을 자연주의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과정과 이들에 의한 이중진리론이 스콜라학파와 르네상스 사상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된 과정을 자세히 살피고 있다.

7장 영혼을 염려하다에서는 르네상스 초기의 인본주의와 페트라르카, 미란돌라, 피치노의 플라톤주의, 그리고 폼포나치, 피콜로미니, 자바렐라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나타난 자아 사상이 16세기에 들어서 종교개혁에 따른 신학적 논쟁과 파라셀수스, 텔레시오, 브루노 등의 자연철학자들의 사상에 의해 도전을 받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몽테뉴로 대표되는 주관주의가 자기성찰의 관점에서 자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도 정리하고 있다.

8장 자연의 기계화에서는 17세기에 접어들면서 등장한 과학사상이 서양의 자아와 인격동일성 사상에 어떤 큰 변화를 일으켰는지 살피고 있다. 플라톤의 영혼 사상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요소를 제거하면서 당시 다른 사상가들처럼 영혼을 물질적 세계와 조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했던 데카르트의 사상 중에서 개인의 통합성, 실체, 이원적 상호작용론, 개인의 동일성과 불멸성 등을 중심으로 이에 반대하거나 불완전한 부분을 보완하려 했던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가상디, 홉스 등의 사상을 설명하고 있고, 이 과정에서 르네상스 과학이 종말을 고함과 동시에 자연의 완전 기계화를 목표로 하는 시대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설명한다.

9장 영혼의 자연화에서는 로크의 사상과 그의 사상에 대한 비평을 중심으로 근대 인격동일성 사상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살피고 있다. 이 시기에는 영혼이 본질적으로 불멸하는가 라는 문제로 벌어진 새무얼 클라크와 앤서니 콜린스의 서면 논쟁, <마르티누스 스크리블러러스의 회상록>에 나타난 영혼과 의식에 대한 개념, 인격동일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쟁 등을 통해 근대 인격동일성 사상의 기틀이 마련된다.

10장 정신 철학에서는 칸트의 자아 사상과 비교하여 프랑스 · 독일 · 영국의 낭만주의와 독일 관념철학에 나타난 자아와 인격동일성 사상을 설명하고, 독일 관념철학에 대한 비판으로 등장한 쇼펜하우어, 키르케고르, 니체의 사상과 딜타이의 해석학 등을 통해 19세기 정신철학에 나타난 자아 사상을 살피고 있다.

11장 인간본성학에서는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진보주의자들조차 인간은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믿던 관념이 찰스 다윈과 카를 마르크스의 영향으로 인간은 '생물과 사회'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믿게 되는 영혼의 자연화 또는 인간의 자연화가 완결상태에 이르는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12장 추락하는 자아에서는 현상학, 분석철학, 심리학, 비판이론 등 20세기 초반의 다양한 사상에서 언급된 자아와 인격동일성 개념과 이를 통해 이전까지 하나의 통합된 존재로 인식되던 자아가 사회적 · 심리적 상황의 부산물이라는 이름으로 추락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13장 잃어버린 낙원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하여 현상학, 분석철학, 심층심리학, 실존주의 · 인본주의 심리학, 사회 · 발달 심리학, 비판이론 등의 집중포화에도 불구하고 굳건히 살아남았던 자아와 인격동일성 사상이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여러 다양한 이론을 통해 본격적으로 해체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14장 자초지종과 그 의미에서는 자아와 인격동일성 사상을 통해 우리가 자기행동이나 자기현상에 대해 계속 지식을 쌓아갈 수는 있지만 단일자아에 대한 하나의 통합된 이론에는 도달하지 못한다고 저자들은 결론을 내리며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인간의 실존적 질문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어떤 통합적인 관점이나 단일자아 없이도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가? 아니면 그런 질문에 대해 그냥 무시해 버릴 것인가? 라는 의문을 던지고 있다.
출판사 리뷰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극작가 에피카르모스가 쓴 희극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빚을 갚으라고 독촉한다. 그러자 채무자가 이렇게 되묻는다.
"사물에 변화가 일어날 때, 예를 들어 돌무더기에서 하나가 더해지거나 제거되면서 그 형태가 달라질 경우, 그 사물은 이전 것과 같은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것입니까?"
채권자는 다른 것이라고 대답한다. 채권자는 계속 묻는다.
"그렇다면 사람들도 끊임없이 변하지 않습니까?"

채권자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채무자는 "그렇다면 저는 더 이상 당신에게 빚진 사람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 빚을 갚을 필요가 없어요." 라고 말한다.

화가 난 채권자는 채무자를 마구 때린다. 채무자가 항의하자 채권자는 그런 항의는 하지 말라고 대꾸한다. 자신은 더 이상 때린 사람이 아니니까.

이처럼 인간이나 자아(영혼)가 동일한 존재로 지속되는지 여부를 따지는 인격동일성 문제는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극장 관객들조차 관심을 가질 만한 주제였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이 일화에서 채권자와 채무자가 나눈 대화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늘 변한다. 엄밀히 따져 본다면 우리는 변할 때마다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채무자가 돈을 빌린 사람이 아니며, 채권자는 때린 사람이 아닌 것이다.

"내가 어제 너를 보았어"라고 말할 때 이것이 사실이 되려면 우리가 변화 속에서도 동일한 인물로 지속됨을 주장할 수 있는 어떤 근거가 있어야 한다. 바로 그 근거를 밝히는 것이 인격동일성 사상의 과제이다. 과연 우리는 어떤 근거로 육체나 사람이 세월과 변화 속에서도 동일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9.13.2009

신학과 과학이 만나다

많은 인문과학들과는 달리 신학은 주로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있는가" 하는 것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다. 신학적으로 건전하다고 할 수 있는 대상들이 "어떻게 믿게 되는가"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믿는가"에 관한 질문들에 대한 대부분의 답변들은 교묘하게 "무엇"에 관한 답변으로 바뀌어지든지, 성령에 관한 대답으로 어느새 둔갑해 버리고 마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성령에 관한 문제야말로 기독교의 중심적인 여러 교리들 가운데서 가장 잘못 정의되고있고, 가장 신비에 싸인 채로 모호하게 설명되고 있으며, 혼돈상태에 빠져 있는 교리 중의 하나이다.

인문과학의 방법론은 특수화시키고, 구체화시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인문과학은 신비한 체험들이 가지는 함축적인 의미들을 과정적인 관점에서 관찰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인문과학은 그러한 관찰이 가능하게 된 궁극적인 근거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거나 "잊고있다." 인문과학은 그러한 근본적인 실체에 대한 체험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반면, 신학적인 방법론은 이와 같은 체험의 중요성, 이러한 체험을 가능하게 한 궁극적인 근거 및 이러한 체험의 내용에 특별히 초점을 맞추게 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신학의 방법론에서는 구체성이라든지 특수성이 무시된다. 다시 말해서 신학은 그러한 변화의 체험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성격을 해석하는 데 필요한 충분한 근거를 마련해 주지 못하며, 그 체험들의 각 과정에서 찾아 볼 수 있는 특수한 성격들을 제대로 분석해 내지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도 못하고 있다. 우리들이 그러한 체험을 통해서 신학에서 주장하고 있는 궁극적인 원인들에 어떻게 참여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신학은 설명해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James E. Loder, The Transforming Moment,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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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교부 터툴리안은 "아덴이 예루살렘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Quid ergo Athenis et Hierosolymis)"라고 도전하면서 신앙과 이성에 있어 신앙의 우위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를 구원의 전제로 보는 개혁주의적 입장에서는 예루살렘과 아덴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해하는 양 날개와 같다. 일반은총와 특별은총의 우위를 논쟁하려면 언제나 승리는 극단적 칼빈주의자의 것으로 남겨질 테지만, 궁극적인 진리는 하나님만이 아실 일이라는 칼빈의 뻔한 권고는 여전히 유효하며, 따라서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포함한 모든 과학적 접근을 구속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일은 더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특정한 전통, 경험, 문화, 그리고 시대정신 속에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임을 겸손히 수용한다면 맹목적 신앙의 파시즘과 이미 파산해 버린 이성주의의 허상을 뛰어 넘어 신학과 과학의 진지한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실천들은 신학과 과학의 진지한 상호성찰 위에 세워 져야 하며 이는 모든 공동체원의 주체적 참여를 요청한다.

로더는 T. Parsons의 복합적 사회시스템을 기반으로 개인의 정신, 문화, 조직, 그리고 사회가 각각 어떻게 상호관련을 맺는지 분석하려 했다. 특히 성령의 역동적 역사가 이 네 시스템 속에서 어떻게 일어나며 또한 이 네 시스템 속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탐구하려 했다.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하는가? 인간은 어떻게 변화되는가?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 자연적 발달단계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인간의 종교경험과 뇌세포의 화학작용은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가?

피상적 경험의 주관성에 함몰된 설교와 가르침이 신학적 타당성과 함께 실제 삶에서의 적합성을 확보하려면 자의적 해석으로 가득찬 자기신학의 한계를 정직하게 고백하고 보편인간에게 부어주신 일반은총의 도구들을 긍정하여 겸손과 부지런함으로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고 창조세계에 대해 진지하게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bk

7.08.2009

혁명적 복음과 알깨기

“새는 알을 까고 나온다. 알은 한 세계다. 태어나려하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은 아프락서스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보낸 편지 중
헤르만헤세, 데미안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자신을 둘러 싼 낡은 현실의 파괴와 맞닿아 있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구절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불을 던지고 평화를 파괴하는 검을 주러 왔다고 가르치셨다. 또한 종교와 정치, 교육과 경제의 실질적 중심이었고 한 민족의 아이덴티티였던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주장하셨고 그로 인해 신성모독의 죄목으로 정치적 타살을 당하셨다. 예수의 복음은 그 본질상 '전복적'subversive이고 해체적이며 혁명적이다. 이 말은 폭력적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개인과 집단의 죄성으로 인한 모든 불의와 죄악에 대한 정면도전이다. 새로운 생명은 안전하게 무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참생명 또는 온전한 삶은 죄와 사망의 세력에 대항하는 혁명과 전쟁의 댓가를 지불하고 획득하는 것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의 옮김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흘림을 비용으로 치뤄야 할 만큼 치열하고 맹렬한 세상과의 전쟁을 치루고 난 후 얻어지는 것이다.

복음의 선포는 이렇듯 기존의 질서와 갈등관계에 있을 수 밖에 없다. 예수의 삼중 직 중, 선지자로서의 예수는 사회와 도통 어울릴 수가 없다. 기득권자들과 좋은 관계일 수 없으며, 지도자들과 화평할 수가 없고, 지식인들과 논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그의 몸으로서 교회에게 위임된 것이다. 왕과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실행하는 것 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선지자만으로도 안된다. 모두가 다 필요하다. 그러니 모든 교회가 다 필요할 것이 아닌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가는 서로 견제하며 대화하고 협력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자신을 둘러싼 자신의 세계를 인식하고 확장하려는 인간 영혼의 투쟁을 심리적으로는 "자아 발달"로 교육이론으로는 "변형적 학습"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발달과 변형이론들의 핵심은 인간의 "인식 구조" 또는 "인식의 틀"이 신체, 나이, 성별, 사회적 환경, 문화에 따라 어떻게, 어떤 과정에 따라, 어떤 촉매적 요건들을 통해 발달 또는 변형되는 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구조변형의 이해들은 인식구조의 발달과 변화의 설계자이며 원인자이고 협력자인 동시에 완성자이신 창조의 영을 간과한다는 점에서 자기 인식의 한계에 갖히는 심각한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반면 교회에서의 설교와 가르침은 보편은혜에 기반한 창조원리의 구조적 측면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깊이있는 이해를 추구하려 노력하지 않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사회과학을 통해 발견된 인간 발달과 인식구조 변형의 원리들이 근거가 빈약한 오류이며 교회의 신학과 신앙적 실천에 마치 원수나 되는 것 처럼 떠벌여 유치한 이분법적 사고에 근거한 싸움을 부추키기도 한다. 이로서 자기 인식의 한계안에 갖혀 있는 자신의 가련함을 보지 못한 채, 진리를 자기 호주머니 속에 넣고 있는 양 호들갑을 떠는 어리석음과 오만함을 보이기까지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교만함으로 스스로를 갱신할 줄 아는 능력을 상실한 교회는 세상의 권위주의적이고, 성취지향적(또는 경쟁적)이며, 가변적이고 폭압적인 세상문화의 사회화 과정에 저항하고 극복하여 그리스도의 문화를 창출해 냄으로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급속도로 세속화되어 스스로 경쟁하여 분쟁하고 결국 분열하여 자멸하게 된다는 점이다.

전통과 인습, 도그마와 자기 경험의 한계에 갖혀있는 사람들을 향해 "새술은 새부대"에 담을 수 밖에 없다고 일갈하신 예수의 통렬한 지적은 금식 논쟁과 같은 지엽적인 실천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똑같은 성정을 가진 나사렛의 젊은 목수를 창조주의 아들로 인정해야 하는 믿음은 기존의 인식구조의 틀을 무너뜨리는 새로운 인식구조로의 전환paradigm shift이 없이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 바로 이 시작점에서 부터 죽어야 살고, 나눠주어야 풍성해지며, 낮아져야 높아지고, 포기해야 얻는 다는 불가해한 역설이 시대와 상황과 문화를 초월한 삶의 근원적 원리로 존중되기 시작한다.

그러니 이렇듯 자기의 존재의 집인 "자기 세계"를 부수는 일이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가능하단 말인가!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자기한계의 인식만이 우리를 죽은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창조의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로 인도한다. 또한 이를 삶으로 증명해 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과 우리 안에서 그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믿음과 힘 주심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하도록 한다. 나의 한 부분인 세계를 파괴하는 일은 그래서 하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다.

bk

5.11.2009

진리는 사랑이다


"참 사랑은 리얼리즘realism이다...인간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한계성을 두려워하지 말고 똑바르게 정직하게 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만 된다...참된 진리를 찾아가는 자가 노력해야 될 것은 자기중심적인 거짓 자기를 부수고 진정한 참자기를 발견해 내는 일이다...진실은 항상 사랑과 함께 있어야 하고 사랑은 항상 진실과 함께 있어야 한다."

강원용 (1917-2006), 중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19.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1b-32) 이 말씀은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진리를 아는 것"은 어차피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진리를 알 수 있는 능력과 의도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성은 참된 진리를 거부하는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 진리를 혐오한다. 참된 진리는 인간의 부패와 죄악을 밝히 드러 내기 때문이다. 성경은 "변하지 않는 영원하며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절대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며 성령을 통해 알려지는 하나님" 이심을 증거한다. 이 전제를 수용하려면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이 믿음을 거부하고 진리의 타자성을 무시하며 진리의 인격성을 멸시한다. 그래서 근대적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절대화 하여 유한하며 제한적인 이성의 두레박으로 망망한 진리의 바다를 재려는 우매함에 빠져 버렸다. 그래서 이러한 과학적 인간들은 진리를 자신의 사고와 이해의 한계라는 철장에 가두어 놓음으로서 고독과 소외, 허무라는 진창속에 스스로를 투신하고 말았다.

또 다른 극단의 부류들은 과학적 인간들의 이성주의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고 신앙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과학제일주의의 맹주인 절대이성을 타도하기 위해 신앙제일주의자들이 선택한 주인은 바로 도그마였다. 그러나 건강한 이성의 사용과 자기반성을 거부한 맹목적이며 자기 중심적인 신앙주의는 절대이성의 왕좌위에 도그마적 신앙을 올려 놓아 경배의 대상을 바꾸었을 뿐, 절대 진리의 무한성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따듯한 인격으로서의 진리를 삶속에 실천하기를 거부하며 자신의 한계와 유한성을 철저히 부인한다는 점에서는 그토록 적대시했던 과학주의와 한 패였다.

참된 "진리를 앎"은 절대타자, 절대진리, 절대자의 존재를 긍정하고 믿음으로 수용하며 이성적 이해의 한계를 알면서도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하려는 신앙을 요구한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를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으로 불렀다. 신앙은 참된 진리에 자신의 이성과 경험과 의지를 내려놓는 겸손한 삶의 태도이며 세상의 모든 것을 진실로 사랑하는 용기있는 행동이다. 그래서 모든 진리는 이러한 삶을 명징하게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에게 귀착된다. 예수는 진리이고 예수는 사랑이다. 그래서 진리는 사랑이며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진리를 아는 유일한 길이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하며 사랑은 리얼리즘이라는 강원용 목사님의 말씀은 이런 점에서 옳다.

bk

3.05.2009

신과 과학

1. The visible order of the universe proclaims a supreme intelligence.
눈에 보이는 질서정연한 우주는 최고의 지성적 존재를 웅변한다.
-Jean-Jacues Rousseau

2. Science brings men nearer to God
과학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이끈다.
-Louis Pasteur

3. Truth between candid minds can never do harm.
편견없는 지성간의 진실은 절대 해롭지 않다.
-Thomas Jefferson

4. The visible marks of extraordinary wisdom and power appear so plainly in all the works of the creation that rational creature, who will but seriously reflect on them, cannot miss the discovery of a Deity.
모든 창조사역속에 드러나는 비범한 지혜와 권능의 증표들은 너무도 명백하여서 이를 진지하게 상고하는 이성적 피조물은 하나님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John Locke

12.22.2008

학문과 자유

Abraham Kuyer (1837-1920)


하나, 학문이 융성하기 위하여 대중의 마음이 자유를 얻어야 했다. 하지만 교회는 삶이ㅡ 유일한 목적을 공로를 통해 하늘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가르쳤고, 사람들은 교회가 주된 목적과 일치한다고 인정하는 만큼만 세상에서 향유할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는 아무도 지상적 실존에 대한 연구에 공감을 갖거나 헌신할 수가 없었다. 모든 참된 칼빈주의자에게 복된 상태는 '중생'에서 자라며 '성도의 견인에 의하여 보증된다. '믿음의 확실성' 근거로, 칼빈주의는 기독교 세계에게 창조 명령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가운데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땅을 정복하기 위하여 땅에 대한 지식은 필수적이었고, 대양과 자연에 대한 지식, 그리고 자연의 속성과 법칙에 대한 지식은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학문을 권장하기를 꺼리는 백성이 새롭고 활기 넘치는 힘으로 자유의 느낌을 향유하도록 학문에 박차를 가했다.


갈등은 신앙과 학문의 갈등이 아니다. 그런 갈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문은 어느 정도 신앙에서 출발하지만, 반대로 학문에 이르지 못하는 신앙은 잘못된 잘못된

앙이거나 미신이다. 참되고 진정한 신앙은 그렇지 않다. 모든 학문은 신앙을 전제한다.

특별히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는 원리에서 신앙을 전제한다. 이는 학문적 탐구에 필요한 모든 공리가 우리의 자의식과 더불어 주어져 있음을 뜻한다.


반면에 모든 신앙은 발언하려는 충동을 내적으로 갖고 있다. 이를 위하여 신앙은 말과 용어와 표현을 필요로 하고, 말들은 사상의 구현이 되어야 한다. 사상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상황과 함께 상호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래서 신앙이 우리의 의식에 빛을 비추자마자 학문과 논증의 필요가 생겨난다.


따라서 갈등은 신앙과 학문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존재하는 우주가 정상적 상태인가 비정상적 상태인가 하는 주장 사이에 존재한다. 만일 우주가 정상이라면, 우주는 잠재력에서 이상(ideal)으로 가는 영원한 진화의 의미로 움직인다. 그러나 우주가 비정상이

라면, 과거에 란이 일어났고 목적의 최종적 달성을 보증할 있는 것은 중생적 능력뿐이다. 대립은 학문의 영역에서 사유하는 가지 지성을 전투 대형으로 나눈다.


아브라함 카이퍼 <칼빈주의 강연>

12.18.2008

뇌의 마음

뇌의 마음 - 10점
월터 J. 프리먼 지음, 진성록 옮김/부글북스

나는 무엇일까? 내 뇌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누가 좀 꺼내 봐 주었으면...
그래서 내가 무엇인지 가르쳐 줄 수 있었으면...

12.17.2008

신경과학과 인간 본성


인간이란 무엇인가. 특히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물음은 신앙과 학문 등 모든 사유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철학자 칸트는 이에 대해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를 철학의 근본 물음이라고 규정하면서 이 세 가지 물음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 환원된다고 주장했다. 그가 철학을 ‘인간학’이라고 정의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인간 본성에 관한 철학 이야기/이현복 외 지음/아카넷/1만3000원

5월 들어 나란히 번역 출간된 ‘인간 본성에 관한 철학 이야기’(이현복 지음, 아카넷), ‘의식의 재발견-현대 뇌과학과 철학의 대화’(마르틴 후베르트 지음, 원석영 옮김, 프로네시스), ‘꿈꾸는 기계의 진화-뇌과학으로 보는 철학 명제’(로돌포 R. 이나스 지음, 김미선 옮김, 북센스)는 모두 끝없는 물음의 원천인 ‘인간’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책들이다.

‘인간 본성에 관한 철학 이야기’는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이고, 그 본성은 어떻게 파악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세계 안에서 인간의 위치는 어떠한지 등 인간 본성과 관련해 제기되는 여러 문제를 인류가 축적한 철학적 사유를 총동원해 고찰하고 있다. 한양대 이현복 교수를 비롯해 세종대 이태하, 경북대 손성철, 서강대 김영건 류제동 교수 등 대학에서 철학과 종교학을 강의하는 13명의 필자가 참여했다. 정낙림 경북대 교수는 ‘자기를 긍정하는 디오니소스적 인간’에서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

◆의식의 재발견-현대 뇌과학과 철학의 대화/마르틴 후베르트 지음/원석영 옮김/프로네시스/1만3800원

에 놓인 밧줄이다. 심연 위에 걸쳐진 밧줄이다. 저쪽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줄 가운데 있는 것도 위험하며 뒤돌아보는 것도 벌벌 떨고 있는 것도 멈춰 서는 것도 위험하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는 니체의 사유를 인용하며 인간을 설명했다.

‘인간은 자유의지의 주인인가 신경 회로의 노예인가’라는 화두를 먼저 던지고 출발하는 ‘의식의 재발견’은 “인간의 자유의지는 뇌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단정한다. 망원경이 발명되기 이전인 16세기까지 인간은 우주의 중심은 지구이며 하늘은 한낱 지구를 도는 바퀴로 상상했으나 지금은 지구란 태양 주위를 도는 작은 점에 불과함을 알게 되었듯이, 현재 인간은 자신의 사유기관을 들여다보는 기계들을 만들어 내 뇌 속까지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한다’는 수천 년간 지속하여 온 인간에 대한 견고한 생각은 타격을 입었고, ‘인간은 한 조각 자연에 불과하다’는 자조까지 하게 됐다. 물론, 인간이 느끼는 황혼의 장려함이나 바이올린 현의 미묘한 울림, 사랑에 빠진 순간의 불가해한 심적 상황은 설명하기 어렵지만….

◆꿈꾸는 기계의 진화-뇌과학으로 보는 철학 명제/로돌포 R. 이나스 지음/김미선 옮김/북센스/1만8000원

미국 뉴욕대 의대 생리학 및 신경학과 학과장 로돌포 R 이나스가 쓴 ‘꿈꾸는 기계의 진화’는 인간 뇌의 운동을 단순한 ‘작용’으로 파악하지 않고, 생명의 ‘기억’으로 바라본다. ‘마음은 곧 뇌’라고 정의하는 저자는 뇌의 신비를 단일 신경세포 단위에서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나스 교수는 ▲뇌의 기능과 언어·감정은 하나의 세포에서 시작된다 ▲뇌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예측한다 ▲인지능력의 대부분은 유전적으로 갖추어진 채 태어난다 ▲운동과 언어와 감정은 이미 패턴화되어 있다는 등 네 가지 특징으로 인간의 뇌과학 연구 성과를 정리한다.

‘마음은 생명체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진화의 산물’이라고 결론 내린 이나스 교수는 “인간의 유전자에는 30억 년 동안 진화를 거듭해온 인류의 역사가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이를 ‘생명체의 기억’이라고 표현한 나이스 교수는 “마음의 본성을 완전히 이해하는 날, 우리는 서로를 더욱 존중하고 찬미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이쯤 되니, 인간은 곧 우주이고, 인간은 곧 한울님이라는 종교의 경지가 낯설지 않다.

조정진 기자 jjj@segye.com


Nancy Murphy 교수님을 통해 신경과학과 철학이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을, 대화 해야만 한다는 것을 배웠다. 물질적 환원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동시에 영과 육을 분리시키는 플라톤-데카르트식의 이원론을 극복하는 인간 이해가 절실히 요청된다. Non-reductive mon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