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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7.2010

개념 없는 인식은 무지

"Percept without concept is blind" I. Kant

경험이란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이기 보다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이다. 의미를 만들거나 의미를 변경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의미를 만드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더 근원적으로 중요하다. 인식에 개념이 부과된다면 의미가 된다. 같은 인식에 다른 개념을 부여한다면 의미의 변경 즉 인식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인식하는 방식/틀/구조 자체가 변화된다면 의미구조meaning perspective,  즉 인식의 지평이 확장된 것이다. 이러한 인식 구조의 변화(changes of form)을 교육계에서는 변형학습 trans-from-ative learning 이라 부르고 심리학계에서는 구조-발달주의constructive developmentalism 이라고 한다. 

bk

3.14.2010

인간됨의 결정적 조건

"A defining condition of being human is our urgent need to understand and order the meaning of our experience, to integrate it with what we know to avoid the threat of chaos." Jack Mezirow (2000)

인간됨의 결정적 조건중 하나는 우리의 경험을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과 연결해 이해하며 조직화함으로 혼란과 혼동이 주는 위협을 피하려는 절박한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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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며, 의미를 구성하고, 의미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이다. 의미는 인간에게 생명과 같다. 무의미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투쟁은 죽음의 힘 보다 더 강력하다. 인생의 의미를 구성하지 못할 때 조차, 인간은 죽음으로써 삶의 무의미를 종식시키려 할 만큼 인간에게 있어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며 의미를 구성/재구성하는 행위는 근원적 본능이다. 그렇다면 의미란 무슨 의미인가? 의미를 추구한다는 말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어떻게 의미를 추구하는가? 무슨 의미를 추구하는가? 의미는 발견하는 것인가 아니면 형성되는 것인가? 의미는 어떻게 변형/변화 되는가?

매저로는  구조주의적 인식론을 바탕으로이러한 질문들을 탐구해 나간다. 비판적 사고를 통한 인식구조의 변혁과 확장은 구조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개념이며 이러한 인식구조의 변형을 성인교육의 영역에서 설명하고 통합한 공로로 그는 변형적 학습이론transformative learning theory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그러나 매저로에게 있어 왜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가? 어떤 의미가 의미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의미의 근거는 무엇인가? 에 대한 대답은 대체로 무시되고 있다. 그것은 그가 인간의 의미구성이라는 현상을 이해하는데 있어 구조주의 인식론에 과도하게 의존하면서도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존재론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이 사회과학적 접근이 보변적으로 기반하는 암묵적 가정의 오류이다. 즉 관찰자의 실존적 한계를 간과하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는 스스로 알 수 없으며 나의 나됨을 인식하려면 절대 타자의 거울앞에 서야 한다는 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바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첫머리를 이렇게 기록한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지혜, 즉 참되고 온전한 지혜는 거의 모두가 두 가지 부분으로 구성된다.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다. 이 두 지식은 여러 끊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그 중 어떤 것이 먼저오며, 어떤 것이 그 결과로 파생되는 것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Institute I.i.1).

그렇다면, 인간됨의 결정적인 조건은 "혼란과 혼동을 피하려는 절박한 필요때문에 의미를 구성하려는 습성"이기 보다는, 그러한 갈망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절대의미, 의미의 절대기준, 의미를 추구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신 인간과 우주의 존재적 의미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깨달아 아는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과 내 자신을 알아가기를 통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향방없는 의미추구가 주는 허무와 절망의 긴 터널 통과한 후 증언한 어거스틴의 고백은 이런 점에서 울림이 크다: "당신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찬양하기를 즐거워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당신을 향하여 살도록 당신이 우리를 창조하신 까닭이니 우리 심령은 당신 안에서 쉼을 얻을 때가지 평안할 수 없습니다." (Confessio 1.1.1).

bk

7.08.2009

혁명적 복음과 알깨기

“새는 알을 까고 나온다. 알은 한 세계다. 태어나려하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은 아프락서스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보낸 편지 중
헤르만헤세, 데미안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자신을 둘러 싼 낡은 현실의 파괴와 맞닿아 있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구절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불을 던지고 평화를 파괴하는 검을 주러 왔다고 가르치셨다. 또한 종교와 정치, 교육과 경제의 실질적 중심이었고 한 민족의 아이덴티티였던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주장하셨고 그로 인해 신성모독의 죄목으로 정치적 타살을 당하셨다. 예수의 복음은 그 본질상 '전복적'subversive이고 해체적이며 혁명적이다. 이 말은 폭력적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개인과 집단의 죄성으로 인한 모든 불의와 죄악에 대한 정면도전이다. 새로운 생명은 안전하게 무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참생명 또는 온전한 삶은 죄와 사망의 세력에 대항하는 혁명과 전쟁의 댓가를 지불하고 획득하는 것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의 옮김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흘림을 비용으로 치뤄야 할 만큼 치열하고 맹렬한 세상과의 전쟁을 치루고 난 후 얻어지는 것이다.

복음의 선포는 이렇듯 기존의 질서와 갈등관계에 있을 수 밖에 없다. 예수의 삼중 직 중, 선지자로서의 예수는 사회와 도통 어울릴 수가 없다. 기득권자들과 좋은 관계일 수 없으며, 지도자들과 화평할 수가 없고, 지식인들과 논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그의 몸으로서 교회에게 위임된 것이다. 왕과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실행하는 것 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선지자만으로도 안된다. 모두가 다 필요하다. 그러니 모든 교회가 다 필요할 것이 아닌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가는 서로 견제하며 대화하고 협력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자신을 둘러싼 자신의 세계를 인식하고 확장하려는 인간 영혼의 투쟁을 심리적으로는 "자아 발달"로 교육이론으로는 "변형적 학습"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발달과 변형이론들의 핵심은 인간의 "인식 구조" 또는 "인식의 틀"이 신체, 나이, 성별, 사회적 환경, 문화에 따라 어떻게, 어떤 과정에 따라, 어떤 촉매적 요건들을 통해 발달 또는 변형되는 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구조변형의 이해들은 인식구조의 발달과 변화의 설계자이며 원인자이고 협력자인 동시에 완성자이신 창조의 영을 간과한다는 점에서 자기 인식의 한계에 갖히는 심각한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반면 교회에서의 설교와 가르침은 보편은혜에 기반한 창조원리의 구조적 측면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깊이있는 이해를 추구하려 노력하지 않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사회과학을 통해 발견된 인간 발달과 인식구조 변형의 원리들이 근거가 빈약한 오류이며 교회의 신학과 신앙적 실천에 마치 원수나 되는 것 처럼 떠벌여 유치한 이분법적 사고에 근거한 싸움을 부추키기도 한다. 이로서 자기 인식의 한계안에 갖혀 있는 자신의 가련함을 보지 못한 채, 진리를 자기 호주머니 속에 넣고 있는 양 호들갑을 떠는 어리석음과 오만함을 보이기까지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교만함으로 스스로를 갱신할 줄 아는 능력을 상실한 교회는 세상의 권위주의적이고, 성취지향적(또는 경쟁적)이며, 가변적이고 폭압적인 세상문화의 사회화 과정에 저항하고 극복하여 그리스도의 문화를 창출해 냄으로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급속도로 세속화되어 스스로 경쟁하여 분쟁하고 결국 분열하여 자멸하게 된다는 점이다.

전통과 인습, 도그마와 자기 경험의 한계에 갖혀있는 사람들을 향해 "새술은 새부대"에 담을 수 밖에 없다고 일갈하신 예수의 통렬한 지적은 금식 논쟁과 같은 지엽적인 실천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똑같은 성정을 가진 나사렛의 젊은 목수를 창조주의 아들로 인정해야 하는 믿음은 기존의 인식구조의 틀을 무너뜨리는 새로운 인식구조로의 전환paradigm shift이 없이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 바로 이 시작점에서 부터 죽어야 살고, 나눠주어야 풍성해지며, 낮아져야 높아지고, 포기해야 얻는 다는 불가해한 역설이 시대와 상황과 문화를 초월한 삶의 근원적 원리로 존중되기 시작한다.

그러니 이렇듯 자기의 존재의 집인 "자기 세계"를 부수는 일이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가능하단 말인가!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자기한계의 인식만이 우리를 죽은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창조의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로 인도한다. 또한 이를 삶으로 증명해 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과 우리 안에서 그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믿음과 힘 주심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하도록 한다. 나의 한 부분인 세계를 파괴하는 일은 그래서 하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다.

b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