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영신학의 메카인 수정교회가 파산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연말이면 다시 들춰 보는 책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스티븐 코비의 책이다.
삶의 의미와 보람을 느끼며 영혼 깊은 만족을 느끼는 대신, 쫓기듯 열심히 살지만 늘 공허와 허무를 느끼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삶의 습관이 있단다. 말하자면 허무한 삶에도 일종의 원칙이 지배한다는 것이다.
1. 늘 상황에 끌려 다니면서 자신을 비하하고 상황을 탓하며 이웃을 원망한다.
2. 뚜렷한 목표 없이 그저 해야 하는 일을 해치운다.
3. 중요한 일보다 급한 일을 먼저 한다.
4. 누가 이기냐 지냐, 비교와 경쟁의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5. 상대를 깊이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내 주장을 관철시키기 급급하다.
6. 스스로 잘하고 있다는 생각에 상대를 신뢰하여 상호 협력할 의지와 능력이 없다.
7. 변화를 두려워 하며 자기 개발에 소극적이다.
탁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지는 7가지 습관들을 뒤집어 놓은 것이긴 하지만 생각할 수록 무릎을 치게 만든다. 상황적인 제약을 극복하고 자기 한계를 뛰어 넘으려면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부분에 시선을 고정하고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 바로 내 자신의 마음가짐과 태도만이 내가 의지적으로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근원적인 영역이다 (잠 4:23).
그러나 바로 인간의 마음이 죄로 오염되어 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것이 모든 자기 개발서들이 가지고 있는 전제의 오류이다. 즉 "내가 내 마음을 원하는 대로 컨트롤 할 수 있다"는 가정이다. 그러나 진정한 자기 개발은 영혼 깊이 물들어 있는 죄와 함께 자아가 죽어버리고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창조의 영에 힘입어 다시 살아나는 끊임없는 회개와 회심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 진다. 이러한 회개와 회심은 "긍정의 힘"과 같은 자기능력에 대한 신뢰를 중단하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선취하시고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시혜하시는 긍휼과 자비에 온 존재를 의탁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 성서의 증언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 진정한 자기 개발은 삼위 하나님을 신뢰하고 신앙하는 믿음을 통한 영적인 재탄생에서 출발한다.
믿음을 통한 회심으로 본격적이고 근원적인 수준에서의 자기 개발이 시작되었더라도 인격과 성품, 그리고 능력의 차원에서 "인간개발"에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일반은총의 법칙들이 여전히 적용된다. 인간 존재의 모든 수준에서 발현되는 끊임없는 창조적 발전은 타락 이전에 이미 인간의 본성으로 심겨진 하나님의 형상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코비가 기여하는 바는 바로 이 부분이다.
일반은총의 인간개발과 성령의 변혁하시는 역동적 활동이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에 대한 관찰이 그래서 중요하다. 나는 로더리안!
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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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6.2011
12.27.2010
개념 없는 인식은 무지
"Percept without concept is blind" I. Kant
경험이란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이기 보다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이다. 의미를 만들거나 의미를 변경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의미를 만드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더 근원적으로 중요하다. 인식에 개념이 부과된다면 의미가 된다. 같은 인식에 다른 개념을 부여한다면 의미의 변경 즉 인식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인식하는 방식/틀/구조 자체가 변화된다면 의미구조meaning perspective, 즉 인식의 지평이 확장된 것이다. 이러한 인식 구조의 변화(changes of form)을 교육계에서는 변형학습 trans-from-ative learning 이라 부르고 심리학계에서는 구조-발달주의constructive developmentalism 이라고 한다.
bk
경험이란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이기 보다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이다. 의미를 만들거나 의미를 변경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의미를 만드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더 근원적으로 중요하다. 인식에 개념이 부과된다면 의미가 된다. 같은 인식에 다른 개념을 부여한다면 의미의 변경 즉 인식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인식하는 방식/틀/구조 자체가 변화된다면 의미구조meaning perspective, 즉 인식의 지평이 확장된 것이다. 이러한 인식 구조의 변화(changes of form)을 교육계에서는 변형학습 trans-from-ative learning 이라 부르고 심리학계에서는 구조-발달주의constructive developmentalism 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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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0.2010
피그말리온 효과
redwiki: 피그말리온 효과
고대 그리이스에 살던 피그말리온이라는 조각가는 고민을 했다.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만들어야하는데 모델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예쁘다는 여자를 봐도 성에 차질 않았고, 자기가 찾는 이상적인 모델을 찾을 수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는 모델 없이 조각을 하기로 결정했다. 현실에서는 없는, 자기 머릿속에만 있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창조하기로 한 것이다.
이 조각상은 지상의 어느 여자도 감히 비교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완벽한 처녀의 모습이었다.
자신의 작품에 완전히 빠져 버린 피그말리온은 이 조각상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가 수줍음을 많이 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피그말리온은 자신의 조각상인 갈라테아를 깊이 흠모하게 되었다.
그는 조각상이 살아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가끔씩 만지기도 하고, 끌어 안기도 하고, 여러 장신구들로 꾸미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이 조각상이 단지 상아에 불과하다는 것 때문에 슬픔을 갖게 되었다. 슬픔이 깊어지자 그는 조각상에 옷을 입히고, 보석으로 장식도 해주며 한없는 애정으로 슬픔을 달랬다.
덕분에 조각상은 갈수록 더 살아있는 것 같았다. 급기야 피그말리온은 뮈로스 지방에서 나는 염료로 물들인 천을 덮은 침대와 부드러운 깃털을 넣고 만든 베개에 갈라테아를 눕히고, 그녀를 아내인양 대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프로디테의 제전이 다가왔다. 피그말리온은 이 제전에서 자기가 맡은 일을 다 끝내고 난 후 제단 앞에서 갈라테아와 같은 여인을 아내로 점지해 달라는 소원을 빌었다. 이 때 제전에 참석해 있던 아프로디테는 피그말리온의 소원을 알아채고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표시로 제단의 불길을 세 번이나 위로 솟아오르게 하였다.
소원을 빌고 집에 돌아 온 피그말리온은 침대에 있는 사랑스런 조각상에 입을 맞추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각상의 입술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피그말리온은 놀라면서 이번에는 조각상의 손을 만져보았다. 조각상은 피그말리온의 손을 잡았다.
조각상은 그의 소원대로 살아있었다. 피그말리온은 아프로디테에게 감사의 말을 올리고 기쁨에 겨워 다시 조각상에 입을 맞추었다. 조각상은 그의 입맞춤에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피그말리온을 바라보았다. 이런 모습을 지켜 본 아프로디테는 자신이 맺어준 아름다운 한 쌍의 연인들에게 한없는 축복을 내렸다. 피그말리온은 이 여인과 결혼을 하고 파포스라는 딸을 낳게 된다.
심리학자 로젠탈(T.L.Rosenthal)은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다고 한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어린이 지능향상을 예측할 수 있는 새로운 테스트 입니다. (사실은 거짓말)"
라고 설명을 해 놓고 검사를 실시했다. 그 후 20% 정도의 아이를 난수로 뽑아 놓고 "이 애들은 앞으로 지적발달이나 학업이 틀림없이 급상승할 것입니다"라고 선생님에게 결과보고를 해 주었다.
그런 암시후 8개월이 지난 다음 과거에 했던 것과 똑같은 지능 테스트를 하여 지난 번의 지능테스트 결과와 비교해 보았다. 그랬더니 앞으로 잘 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했던 이이들의 지능이 다른 아이들의 지능에 비하여 현저하게 향상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피그말리온의 이름을 따서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라고 한다. 피그말리온 효과는 선생님이 20%의 아이들을 지적 발달과 학업성적이 향상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정성껏 돌보고 칭찬한 결과 나타난 것이다. 그러한 사랑을 받은 아이들은 선생님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주니까 공부하는 태도도 변하고 공부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 결국 능력까지 변하게 된 것이다.
이 결과로 "칭찬하면 칭찬한 만큼 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론은 직장에서도 적용된다. 주위에 칭찬과 격려가 풍부하게 흘러다니는 부서와, 질책이나 강요만이 남발하는 부서는 그 구성원들의 애착심이나 생산성에 있어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피그말리온 효과』가 나타나려면 무엇보다도 구성원 상호간의 진지한 관심과 애정 및 인간적인 존중감이 실린 칭찬과 기대가 전달되어야 한다. 그리고, 한 조직의 리더는 부하사원들에게 칭찬을 통하여 회사생활의 즐거움과 기대감을 심어 주어야 할 것이다.
5.20.2010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라!
오늘은 혼자가 아닌 공동체 안에서 리더십을 향상시키는 방법에 대해 간단히 나누고자 합니다. 리더의 자리에서 개인의 성장을 위해 여러 가지 연구와 공부를 거듭하여 자신의 한계를 넓혀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고 보완해 나가는 것은 더욱 효과적이고 고무적일 수 있습니다.
존 맥스웰은 리더가 영향력을 더욱 많이 끼치기 위해서는 자신의 활동 범위, 소위 교제의 범위를 넓히라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안정적인 교제의 범위를 넘어 리더로서 영향을 주고받을 것을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연 자신의 영향력을 향상시키고 극대화시키기 위한 노력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한계를 확장하기 위해 맥스웰은 5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1. 당신의 측근 그룹을 넘어서라
우리의 측근 그룹을 벗어나기 위해 어디서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요? 맥스웰은 나의 측근의 친구 중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부터 시작할 것을 추천합니다. 이렇게 안정적인 관계의 범위를 벗어날 때는 아주 파격적인 변화보다는 절친한 사람과의 관계를 쉽게 건널 수 있는 다리 역할로 활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2. 당신의 전문 지식을 넘어서라
리더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문 지식을 활용하여 공동체를 섬깁니다. 이때 리더는 종종 자신의 전문적인 지식의 한계를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관계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전문 지식을 빌리는 것도 이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됩니다.
3. 당신의 강점을 넘어서라
리더는 모든 측면에서 자신의 강점을 살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강점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강점 뒤에는 반드시 약점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때, 리더는 자신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강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면, 더욱 영향력 있는 리더십을 가질 수 있는 시너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4. 당신의 편견을 넘어서라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지드는 편견 없는 생각이 세상에서 가장 보기 드물다 말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말이 사실이라고 동의해야 할지 모릅니다. 리더라면 이러한 생각의 한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신과 너무 다른 공동체를 바라보며 한편으로는 그 공동체를 정죄하고 또 한편으로는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점을 갖고 있는 공동체 속에 뛰어들어 그들의 강점을 발견하고 배우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5. 당신의 일상을 넘어서라
일상의 쳇바퀴를 한번 벗어나자는 것입니다. 매일 반복하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야 우리는 비로소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하루를 사는 데 급급하다 보면 리더는 비효율적인 과정을 경험하게 되어도 그 과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만남과 교제를 위해 자신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난다면, 설상 새로운 만남과 교제를 경험하지 않더라도 유익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리더는 자신의 리더십을 십분 발휘하기 위해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사실은 자신의 리더십을 더욱 향상시키기 위해서 또 다른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공급을 받고 재충전을 받을 수 있는 그러한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공동체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리더는 그 어떤 때보다 자신의 교제의 범위를 뛰어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리더는 분명 홀로서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과 함께 빛날 수 있는 리더들의 공동체를 찾게 된다면 그들과 함께 더욱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빛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 된 교회에서 함께 연합하여 사역하는 것이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생각해 봅니다.
* 이 글은 국제제자훈련원에서 출판된 차세대 리더십 개발을 위한 무크지 <카탈리스트> 2권 5장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리더십 네트웍 527호 (05/10/10)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라
평신도를 깨운다 국제제자훈련원
6.19.2009
회개와 배움
To grasp the meaning of "metanoia" is to grasp the deeper meaning of "learning," for learning also involves a fundamental shift or movement of mind.
Peter Senge, The Fifth Discipline, Doubleday, 2006 revised ed., p. 13
배움은 그 깊고 진정한 의미에 있어 "회개"에 상응한다. 진정한 배움은 단순한 지식습득의 피상성에 머무르지 않고 마음과 생각과 감정과 행동의 통전적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와 왔다"는 요한과 예수의 선포는 새로운 사고방식, 새로운 가치체계, 새로운 관점으로의 인식의 전환을 명령한 것이었다. 실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생각의 틀'에 비판적 성찰을 요청한 후에는 예의 새로운 질서에 대한 원리를 선포하는 discourse강화들이 뒤따르며 이를 바탕으로 실제 삶에서 구체적인 행동의 변화와 교정이 촉구된다.
진정한 배움은 근본적으로 마음의 변화이며 더 나아가 전 인격의 통합으로서 "영혼의 변화"이다. 이런 점에서 탁월한 조직은 계속적인 "회개"를 통해 세상과 개인의 의미있는 발전과 확장을 위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조직이라는 Senge의 통찰이 기업 경영의 영역에서 활발히 논의된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나의 가정, 내가 속한 공동체가 "회개"하는 공동체인가 생각하고 점검하며 진정으로 회개할 일이다.
bk
Peter Senge, The Fifth Discipline, Doubleday, 2006 revised ed., p. 13
배움은 그 깊고 진정한 의미에 있어 "회개"에 상응한다. 진정한 배움은 단순한 지식습득의 피상성에 머무르지 않고 마음과 생각과 감정과 행동의 통전적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와 왔다"는 요한과 예수의 선포는 새로운 사고방식, 새로운 가치체계, 새로운 관점으로의 인식의 전환을 명령한 것이었다. 실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생각의 틀'에 비판적 성찰을 요청한 후에는 예의 새로운 질서에 대한 원리를 선포하는 discourse강화들이 뒤따르며 이를 바탕으로 실제 삶에서 구체적인 행동의 변화와 교정이 촉구된다.
진정한 배움은 근본적으로 마음의 변화이며 더 나아가 전 인격의 통합으로서 "영혼의 변화"이다. 이런 점에서 탁월한 조직은 계속적인 "회개"를 통해 세상과 개인의 의미있는 발전과 확장을 위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조직이라는 Senge의 통찰이 기업 경영의 영역에서 활발히 논의된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나의 가정, 내가 속한 공동체가 "회개"하는 공동체인가 생각하고 점검하며 진정으로 회개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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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2009
수용과 견딤
'수용'은 매력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소비자 만족'이 중심인 시대에 사람들은 직접 메뉴를 살펴보고 원하는 것을 선택하며, 원하지 않는 것을 거절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나 힘든 상황이 찾아오면 환영하지 않습니다. 억지로 받아들이는 것도 어려운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나 힘든 현실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여기고 수용하는 것은 더욱 낯설고 불편할 뿐입니다.
'견딤'도 매력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빠른 변화, 초고속 인터넷, 퀵 서비스 등으로 원하는 모든 것이 신혹히 제공되는 시대에 기다릴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싫증이 나면 쉽게 버리고 새것으로 바꿉니다. 불만족스러운 사람과의 관계나 상황을 오래 견디지 못합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라는 말씀은 무겁고 힘든 부담일 뿐입니다.
그러나 수용과 견딤의 과정이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는 사람이란 단지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령한 은사로 능력을 행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수용과 견딤을 통해 주님과 함께 걷는 십자가의 길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게 되고 그를 통해 복음과 생명이 전해집니다.
이훈 "영성의 길 9"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롬15:7)
"너희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눅 21:19)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을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 1:2-3)
'견딤'도 매력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빠른 변화, 초고속 인터넷, 퀵 서비스 등으로 원하는 모든 것이 신혹히 제공되는 시대에 기다릴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싫증이 나면 쉽게 버리고 새것으로 바꿉니다. 불만족스러운 사람과의 관계나 상황을 오래 견디지 못합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라는 말씀은 무겁고 힘든 부담일 뿐입니다.
그러나 수용과 견딤의 과정이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는 사람이란 단지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령한 은사로 능력을 행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수용과 견딤을 통해 주님과 함께 걷는 십자가의 길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게 되고 그를 통해 복음과 생명이 전해집니다.
이훈 "영성의 길 9"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롬15:7)
"너희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눅 21:19)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을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 1:2-3)
5.23.2009
앎은 사건이다
"Knowing-generally and convictionally-is first, foremost, and fundamentally an event."
James E. Loder, Transforming Moment, p.33
앎은 사건이다. 존재와 존재가 만나는 존재가 변화되는 사건이다.
James E. Loder, Transforming Moment, p.33
앎은 사건이다. 존재와 존재가 만나는 존재가 변화되는 사건이다.
3.18.2009
알려는 열망
"Knowing is the responsible human struggle to rely on clues to focus on a coherent pattern and submit to its reality." Esther MeekMeek은 Michael Polanyi를 연구한 철학자이다.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자동차 수리공을 유비하였다. 깔깔대며 웃는 유쾌한 웃음이 귀엽기까지 한 Meek은 Longing to Know라는 책에서 철학적 인식론을 일상의 언어로 생생하게 그려내는 값진 작업을 하였다.
“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Meek은 결론을 내리기 전에 철저하게 이 질문에 대해 탐구할 것을요 청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알 수 없다”는 명제 자체도 “하나님은 알 수 있다”라는 명제를 증명하는 것 만큼, 아니 보다 더 어려운 작업들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증명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성서가 증언하는 또 다른 난관인 “우리의 앎의 능력은 왜곡되고 상실되었다”는 진리 앞에 서야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어거스틴의 오랜 전통을 따라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망을 외면하고 포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존재적으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고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젖먹이의 옹알이로부터 프로이드의 왜곡된 Id까지 진리를 향한 열망은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아 프라이오리a priori이다.
도대체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어떤 의심할 수 없고 오류도 있을 수 없는 절대적 보편진리를 인식한다는 것인가? 대답은 “아니다.” 안다는 것은 의심이라는 행위와 오류의 실패를
포함하는 더 포괄적인 행위이다. 앎은 끝없는 인식의 과정이다. 결국 인간의 삶은 끝없는 알아감의 여정이며 알아가는 것은 인간됨의 행위이다.세 상 속에 흩어진 실체의 편린들을 단서로 그리고 보여진 실체 너머에 있는 배후의 관계들을 통해 일관성cohesive있는 의미를 발견해 내는 것은 때로는 고통스럽고 무모하며, 어쩌면 너무나 어려워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정도이다. 그러나 “세상the world”은 여전히 실재하고, 세상을 인식하는 주체이며 동시에 중요한 인식의 대상이기도 한 “나body”도 실재하기에 포기할 수도 없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인식의 대상과 인식의 주체 사이의 관계를 정립해 주는 일종의 “지침/방향direction”이다 (나는 Meek의 direction보다 인식론적 방향성과 인식의 주체와의 관계성을 더 포괄적으로 설명해 주는 Geertz의 “Map” 개념을 선호한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지도의 범례keynote/legend가 되어 인식의 틀을 형성하고 기존의 틀을 계속해서 교정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삶의 복잡다단한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실체들은 정념화되어 경직되지 않고 계속 역동적으로 구성과 해체, 그리고 재구성을 거듭할 수 있도록 유연해야 한다. 진리는 단순히 감각과 인식과 언어 너머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소망과 겸손을 가지고 반응respond할 수 있다. "확실함certainty"도 절대진리를 명확히 "표현할 길"도 없기 때문에 겸손해야 할 것이며, 이러한 겸손함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인식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소망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겸손함과 소망은 세상에 대해 존재를 여는 태도이다 (피녹은 이를 인간의 "세계 개방성"이라고 불렀다. 다만 그는 이를 인간 존재의 자연스러운 본성으로 설명했지만 내가 보건대 이는 죄로 인해 왜곡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많은 중요한 본성들 중 으뜸이 되는 것이다. 자기만의 도그마에 갖혀 진리를 자기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양 법석을 부리는 경직되고 오만한 사람들속에 내가 속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증거는 충분하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세상을 향해 자신의 존재를 여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나는 세상과 연합하고 세상을 이해하며 세상에 섞여 세상을 풀어(해석해)나간다. 서양적 전통의 분석적 사고에 대한 강조는 인간의 의식에 대한 과도한 의존과 확신을전제로 하게 될 때 결국 실체로 부터의 메마른 단절만을 부추겨 결국 인간을 끝없는 고독의 무저갱에 처박아 놓게 된다. 실체와 인식의 주체는 분리될 수 없다.
인식의 행위는 인식자의 적극적이고 책임성 있는 순종과 헌신을 요청한다. 앎yadah이라는 것은 부부가 결혼을 하여 서로 알아가는 것과 같은 그런 종류의 앎이다. 완전히 다 알아 앎이 종료되는 순간은 없다. 다 만 계속해서 알아갈 뿐이다. 그리고 그 앎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필요하다. 용기와 희생과 책임이 뒤따른다. 말씀word를 통해, 세상world를 통해, 그리고 우리자신we-self를 통해 우리를 만나시는 하나님은 그래서 임마누엘이다. 나와 세상을 통해 그리고 말씀을 통해 계시는 하나님 밖에서 어떻게 내가 존재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어거스틴은 고백한다. "그러므로 나의 하나님이여, 당신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할 수가, 결단코 존재할 수가 없나이다. 아니면 이렇게도 말할 수도 있지 않겠나이까? 내가 당신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니이다…. 그러하나이다 주여… 당신은 말씀하셨나이다.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렘23:24). Confessio, I.ii.2
앎은 또한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하는 행위이다. 믿음과 이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지, 정, 의의 모든 인간됨이 총동원 되는 것이다. 보이는 것 너머의 복잡한 관계들을 성경과 성령이 지시하는 대로 민감하게 반추하여 의미를 발견하려는 적극적인 "앎의 행동"이 필요하다.
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진정한 앎은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앎은 존재와 존재의 충돌이기에 변화에 대한 용기를 요구한다. 앎은 알려지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되는 것이다. 그를 알기 전의 나와 그를 알고 난 후의 나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더할 나위 없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변화되는 것이다. 더 많이 알아갈 수록, 더 많이 변화되며, 더 많이 변화될 수록, 더 많이 알고 싶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거룩이 더해 갈 수록 죄에 대한 인식이 더 또렷하고 깊어지며 이는 더 깊은 거룩의 갈망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정말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는 지를 먼저 물을 일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만나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 않고 궁금하지 않은 담에야 "알고 싶을"리 만무하지 않은가? 알고 싶지 않은데 알 수는 없는 노릇이며, 사랑해야만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앎"을 "세상의 실체를 받아들이고 탐구하려는 인간의 책임있는 노력"으로 정의한 에스더 믹의 진술은 좀 메마른 감이 있어 아쉽다.
bk
2.10.2009
배움이란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느끼는 현재의 경험들을 의미화하는 것이다.
우리의 경험들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 통일성을 부여하고, 일관된 설명이 가능하게 하는 것, 즉 해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배움이란 끊임없는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 즉 경험의 해석과정이다.
Jack Mezirow, Transformative Dimensions of Adult Learning, 1991. p. 11
사람들은 저마다의 "습관화된 기대의 틀sets of habitual expectation" 또는 "의미관점meaning perspective"을 통해 감각된 자료들을 이해하고 수용하며 기억한다. 의미관점은 Albert Wolters가 설명한 세계관일 수도 있고, Thomas Kuhn의 패러다임일 수도 있고, Sara Little의 신념체계일 수도 있다. 여기서 매저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점은 사람들이 외부의 정보들을 수용할 때 주체적으로 이미 스스로 가지고 있는 의미를 부여하는 어떤 구조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사과를 본다고 할 때, 그 사과가 주는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에게는 단순한 과일로, 다른 사람에게는 누가 남기고 간 쓰레기로, 또 다른 사람에게는 그리고 싶은 대상물로 수용된다. 이렇게 같은 사물을 놓고도 다른 의미가 만들어 질 수 있는 원인은 그 대상물 자체의 속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실체를 수용하는 수용자의 "의미관점"의 차이 때문이다. "의미를 느낀다", "의미를 부여한다", "의미를 창출한다", 또는 "의미를 깨닫는다"는 것은 모두 외부의 자료를 수용하는 데 있어 "의미관점"을 활발하게 사용하여 외부의 자료들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은 사실상 언어라는 시스템을 통해 구체화된다. 사과를 인식할 때 이미 거기에는 "사과"라는 언어로 제한된 의미가 부여된 또는 분류categorized된"사과"의 개념을 수용하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비트겐쉬타인을 좀 공부해 놓을 것을 그랬다. 소쉬르로 부터 시작되는 언어사회학/기호학의 기본 개념을 배워둘 필요가 있다. 랑그와 빠롤, 그리고 기표와 기의를 구분하고자 했던가? 랑그는 빠롤이 가능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기의와 기표의 관계는 사물과 단어가 아니라 개념과 청각이미지와의 관계이다.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언어가 역사와 사회를 통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의미관점은 사회의 산물이며 문화적 상황에 항상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상인과 현대의 비즈니스맨은 언어만 다른 것이 아니다. 의미는 선언어적으로는 prelingustically 상황과 상징적 모델들을 통해, 그리고 (직접적으로는) 언어를 통해 구성된다.
의미관점은 새로운 자료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데 일정한 구조를 따르게 하며 수용된 경험은 다시 의미관점을 재형성하고 확장시킨다. 배움이라는 것은 이러한 과정들 속에서 기존의 의미관점에 커다란 변화가 올때 일어난다. 이미 구성화된 의미관점들, 선입관, 가정, 전제,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입장, 사회적 상태와 교육된 이해들의 복잡한 의미관점들에 변화가 생기는 것이다. 매저로는 이를 관점의 변화perspective transformation라고 지칭한다.
배움은 해석의 변증법적 과정이다. 이미 가지고 있는 의미관점을 통해 대상들이나 사건들과 상호작용을 하는 변증법적 과정이다. 보통은 이미 형성된 의미관점을 가지고 현재 사건이나 대상을 해석한다. 그러나 변화학습은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지나간 과거의 경험을 재해석하여 결국 과거 경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관점을 창조해 낸다.
배움은 현재 경험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재구성함으로 장래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강화하는 과정이다.
1.27.2009
변화를 가져오는 배움
Adult education in congregations should equip adults for their ministries and invite them to engage in a "critically reflective practice" of Christian faith for the sake of the world.to do so requires that adult Christians bring critical theological reflection to their various practices of ministry.
12.31.2008
주체가 되라
“삶에 주체가 되십시오.”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내 스스로 주도적이 되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것 만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내게 가장 소중한 것들을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됩니다.
똑 같은 이치로, 나도 남에게 이래라 저래라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내 삶에 주체가 된다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의 삶을 “존중해 줄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었다고 나는 믿습니다.
그 분은 자신의 십자가를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시려고 하셨다면 십자가를 지지도 않으셨겠죠.
다만 그분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섬김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사람들은 말이 아닌 행동에 영향을 받습니다.
행동이 뒷받침 되지 않은 강한 말들은 비난의 화살이 되어 되돌아 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환경도 바뀌고 사람들도 바뀝니다.
변화를 탓하고 불평하기 보다는 변화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창조적이고 도전적으로 변화를 즐기고 변화를 주도하는 우리를 만들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12.28.2008
10.08.2008
존재하는 것은 아름답다
푸르르던 교정이 이제 노랑, 주황, 빨강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변화한다는 것은 아릅답습니다. 비록 이제 나뭇잎은 찬 바람에 다 지고 차가운 겨울을 맞을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 마져도 아름다울 것입니다. 끝이 아니라 변화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너 무성한 잎을 내며,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면서 성숙하고 성장할 것이기에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 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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