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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4.2010

주체적 사고

소크라테스에 있어서 "아이러니irony," 즉 의심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표현 형식으로서의 풍자가 만들어낸 결정적인 성과가 있다면, 그것은 개인이 자신의 신념을 성찰없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natural attitude를 우회적으로 해체시켰다는 것이다. (풍자irony를 통해) 개인은 객관적 지식의 확실성을 상실하는 반면에 자기 자신(또는 주관적 자기해석)을 발견하게 된다. 이때야 비로소 개인은 자신이 지식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닿게 된다. 키에르케고르는 지식이 '무엇'인가라고 묻기 보다, 개인이 어떻게 지식과 자기 자신을 연결시키면서 자기 주관을 유지하는 가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키에르케고르가 보기에, 소크라테스는 인식하는 사람과 그가 인식하는 내용을 날카롭게 분리시켜버렸다. 어떻게 인식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이 인식하는 내용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Ronald J. Manheimer, Kierkegaard as Educator,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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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2009

진리는 사랑이다


"참 사랑은 리얼리즘realism이다...인간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한계성을 두려워하지 말고 똑바르게 정직하게 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만 된다...참된 진리를 찾아가는 자가 노력해야 될 것은 자기중심적인 거짓 자기를 부수고 진정한 참자기를 발견해 내는 일이다...진실은 항상 사랑과 함께 있어야 하고 사랑은 항상 진실과 함께 있어야 한다."

강원용 (1917-2006), 중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19.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1b-32) 이 말씀은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진리를 아는 것"은 어차피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진리를 알 수 있는 능력과 의도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성은 참된 진리를 거부하는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 진리를 혐오한다. 참된 진리는 인간의 부패와 죄악을 밝히 드러 내기 때문이다. 성경은 "변하지 않는 영원하며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절대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며 성령을 통해 알려지는 하나님" 이심을 증거한다. 이 전제를 수용하려면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이 믿음을 거부하고 진리의 타자성을 무시하며 진리의 인격성을 멸시한다. 그래서 근대적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절대화 하여 유한하며 제한적인 이성의 두레박으로 망망한 진리의 바다를 재려는 우매함에 빠져 버렸다. 그래서 이러한 과학적 인간들은 진리를 자신의 사고와 이해의 한계라는 철장에 가두어 놓음으로서 고독과 소외, 허무라는 진창속에 스스로를 투신하고 말았다.

또 다른 극단의 부류들은 과학적 인간들의 이성주의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고 신앙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과학제일주의의 맹주인 절대이성을 타도하기 위해 신앙제일주의자들이 선택한 주인은 바로 도그마였다. 그러나 건강한 이성의 사용과 자기반성을 거부한 맹목적이며 자기 중심적인 신앙주의는 절대이성의 왕좌위에 도그마적 신앙을 올려 놓아 경배의 대상을 바꾸었을 뿐, 절대 진리의 무한성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따듯한 인격으로서의 진리를 삶속에 실천하기를 거부하며 자신의 한계와 유한성을 철저히 부인한다는 점에서는 그토록 적대시했던 과학주의와 한 패였다.

참된 "진리를 앎"은 절대타자, 절대진리, 절대자의 존재를 긍정하고 믿음으로 수용하며 이성적 이해의 한계를 알면서도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하려는 신앙을 요구한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를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으로 불렀다. 신앙은 참된 진리에 자신의 이성과 경험과 의지를 내려놓는 겸손한 삶의 태도이며 세상의 모든 것을 진실로 사랑하는 용기있는 행동이다. 그래서 모든 진리는 이러한 삶을 명징하게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에게 귀착된다. 예수는 진리이고 예수는 사랑이다. 그래서 진리는 사랑이며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진리를 아는 유일한 길이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하며 사랑은 리얼리즘이라는 강원용 목사님의 말씀은 이런 점에서 옳다.

bk

3.18.2009

알려는 열망

"Knowing is the responsible human struggle to rely on clues to focus on a coherent pattern and submit to its reality." Esther Meek

Meek은 Michael Polanyi를 연구한 철학자이다.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자동차 수리공을 유비하였다. 깔깔대며 웃는 유쾌한 웃음이 귀엽기까지 한 Meek은 Longing to Know라는 책에서 철학적 인식론을 일상의 언어로 생생하게 그려내는 값진 작업을 하였다.


“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Meek은 결론을 내리기 전에 철저하게 이 질문에 대해 탐구할 것을요 청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알 수 없다”는 명제 자체도 “하나님은 알 수 있다”라는 명제를 증명하는 것 만큼, 아니 보다 더 어려운 작업들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증명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성서가 증언하는 또 다른 난관인 “우리의 앎의 능력은 왜곡되고 상실되었다”는 진리 앞에 서야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어거스틴의 오랜 전통을 따라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망을 외면하고 포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존재적으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고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젖먹이의 옹알이로부터 프로이드의 왜곡된 Id까지 진리를 향한 열망은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아 프라이오리a priori이다.

도대체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어떤 의심할 수 없고 오류도 있을 수 없는 절대적 보편진리를 인식한다는 것인가? 대답은 “아니다.” 안다는 것은 의심이라는 행위와 오류의 실패를 포함하는 더 포괄적인 행위이다. 앎은 끝없는 인식의 과정이다. 결국 인간의 삶은 끝없는 알아감의 여정이며 알아가는 것은 인간됨의 행위이다.

세 상 속에 흩어진 실체의 편린들을 단서로 그리고 보여진 실체 너머에 있는 배후의 관계들을 통해 일관성cohesive있는 의미를 발견해 내는 것은 때로는 고통스럽고 무모하며, 어쩌면 너무나 어려워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정도이다. 그러나 “세상the world”은 여전히 실재하고, 세상을 인식하는 주체이며 동시에 중요한 인식의 대상이기도 한 “나body”도 실재하기에 포기할 수도 없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인식의 대상과 인식의 주체 사이의 관계를 정립해 주는 일종의 “지침/방향direction”이다 (나는 Meek의 direction보다 인식론적 방향성과 인식의 주체와의 관계성을 더 포괄적으로 설명해 주는 Geertz의 “Map” 개념을 선호한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지도의 범례keynote/legend가 되어 인식의 틀을 형성하고 기존의 틀을 계속해서 교정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삶의 복잡다단한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실체들은 정념화되어 경직되지 않고 계속 역동적으로 구성과 해체, 그리고 재구성을 거듭할 수 있도록 유연해야 한다. 진리는 단순히 감각과 인식과 언어 너머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소망과 겸손을 가지고 반응respond할 수 있다. "확실함certainty"도 절대진리를 명확히 "표현할 길"도 없기 때문에 겸손해야 할 것이며, 이러한 겸손함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인식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소망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겸손함과 소망은 세상에 대해 존재를 여는 태도이다 (피녹은 이를 인간의 "세계 개방성"이라고 불렀다. 다만 그는 이를 인간 존재의 자연스러운 본성으로 설명했지만 내가 보건대 이는 죄로 인해 왜곡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많은 중요한 본성들 중 으뜸이 되는 것이다. 자기만의 도그마에 갖혀 진리를 자기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양 법석을 부리는 경직되고 오만한 사람들속에 내가 속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증거는 충분하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세상을 향해 자신의 존재를 여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나는 세상과 연합하고 세상을 이해하며 세상에 섞여 세상을 풀어(해석해)나간다. 서양적 전통의 분석적 사고에 대한 강조는 인간의 의식에 대한 과도한 의존과 확신을전제로 하게 될 때 결국 실체로 부터의 메마른 단절만을 부추겨 결국 인간을 끝없는 고독의 무저갱에 처박아 놓게 된다. 실체와 인식의 주체는 분리될 수 없다.

인식의 행위는 인식자의 적극적이고 책임성 있는 순종과 헌신을 요청한다. 앎yadah이라는 것은 부부가 결혼을 하여 서로 알아가는 것과 같은 그런 종류의 앎이다. 완전히 다 알아 앎이 종료되는 순간은 없다. 다 만 계속해서 알아갈 뿐이다. 그리고 그 앎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필요하다. 용기와 희생과 책임이 뒤따른다. 말씀word를 통해, 세상world를 통해, 그리고 우리자신we-self를 통해 우리를 만나시는 하나님은 그래서 임마누엘이다. 나와 세상을 통해 그리고 말씀을 통해 계시는 하나님 밖에서 어떻게 내가 존재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어거스틴은 고백한다. "그러므로 나의 하나님이여, 당신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할 수가, 결단코 존재할 수가 없나이다. 아니면 이렇게도 말할 수도 있지 않겠나이까? 내가 당신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니이다…. 그러하나이다 주여… 당신은 말씀하셨나이다.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렘23:24). Confessio, I.ii.2


앎은 또한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하는 행위이다. 믿음과 이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지, 정, 의의 모든 인간됨이 총동원 되는 것이다. 보이는 것 너머의 복잡한 관계들을 성경과 성령이 지시하는 대로 민감하게 반추하여 의미를 발견하려는 적극적인 "앎의 행동"이 필요하다.

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진정한 앎은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앎은 존재와 존재의 충돌이기에 변화에 대한 용기를 요구한다. 앎은 알려지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되는 것이다. 그를 알기 전의 나와 그를 알고 난 후의 나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더할 나위 없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변화되는 것이다. 더 많이 알아갈 수록, 더 많이 변화되며, 더 많이 변화될 수록, 더 많이 알고 싶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거룩이 더해 갈 수록 죄에 대한 인식이 더 또렷하고 깊어지며 이는 더 깊은 거룩의 갈망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정말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는 지를 먼저 물을 일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만나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 않고 궁금하지 않은 담에야 "알고 싶을"리 만무하지 않은가? 알고 싶지 않은데 알 수는 없는 노릇이며, 사랑해야만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앎"을 "세상의 실체를 받아들이고 탐구하려는 인간의 책임있는 노력"으로 정의한 에스더 믹의 진술은 좀 메마른 감이 있어 아쉽다.

b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