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에 대한 죄인들의 이러한 반항을 참아내신 분을 생각하십시오. 히 12:3
진정으로 사랑하고 섬겼던 사람에게 배신과 경멸과 모욕을 당해 본 일이 없는 사람이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자기 스스로가 하늘 아버지의 형용할 수 없는 은혜와 사랑을 모욕하고 경멸했다는 사실을 깨달으려면, 사랑하는 이로부터 당한 배신때문에 분노와 복수심으로 온 밤을 하얗게 지새는 고통을 경험해야 한다는 점에서 은혜는 고통을 댓가로 지불한 깨달음이라는 말이 성립한다.
복수와 응징의 폭력 액션영화를 즐기는 사이, 우리는 이 히브리서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점점 더 상실해 간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보면, 오히려 인간의 사랑이 가진 한계와 대조된 십자가 사랑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죄와 맞서서 싸우지만, 아직 피를 흘리기까지 대항한 일은 없습니다..." 살이 찣기고 피를 흘리기까지 죄와 맞서 싸우는 일은, 아이러니겠지만 폭력을 통해서는 절대로 배울 수 없다.
bk
Showing posts with label 악.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악. Show all posts
12.14.2010
5.15.2010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는 사랑이다.
내가 그분을 상대하지 않아도, 무시해도, 퇴짜를 놓아도, 멸시해도, 불순종해도 그분은 변하지 않으신다.
나의 악이 그분의 사랑을 줄어들게 할 수 없다.
나의 선이 그분의 사랑을 더 커지게 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매하다고 잃는 것도 아니요
믿음으로 얻어내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한다고 덜 사랑하시고
성공한다고 더 사랑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는 사랑이다.
맥스 루케도, 예수님처럼, 95
내가 그분을 상대하지 않아도, 무시해도, 퇴짜를 놓아도, 멸시해도, 불순종해도 그분은 변하지 않으신다.
나의 악이 그분의 사랑을 줄어들게 할 수 없다.
나의 선이 그분의 사랑을 더 커지게 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매하다고 잃는 것도 아니요
믿음으로 얻어내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한다고 덜 사랑하시고
성공한다고 더 사랑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는 사랑이다.
맥스 루케도, 예수님처럼, 95
4.13.2009
샬롬
악한 사람은 성난 바다처럼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 그 파도가 쓰레기와 진흙을 쉼없이 쳐올릴 뿐이다. "악한 사람에게는 평화가 없다." 내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사야 57:20-21
하나님을 떠나있는 증거는 너무나 분명하여 부인할 수 없다. 양심에게 물으면 된다. "평안이 있는가?" 안식과 쉼, 마음의 여유와 평강, 넉넉함과 푸근함. 웃음과 감사가 넘쳐 나는가? 행복한가?
빛이 없는 곳에 어두움이 지배하듯,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희소할 때 샬롬은 자취를 감춘다. 지금 여기에 하나님의 샬롬이 있는가?
이사야 57:20-21
하나님을 떠나있는 증거는 너무나 분명하여 부인할 수 없다. 양심에게 물으면 된다. "평안이 있는가?" 안식과 쉼, 마음의 여유와 평강, 넉넉함과 푸근함. 웃음과 감사가 넘쳐 나는가? 행복한가?
빛이 없는 곳에 어두움이 지배하듯,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희소할 때 샬롬은 자취를 감춘다. 지금 여기에 하나님의 샬롬이 있는가?
1.09.2009
죄
"Deep down...man is not only executioner, not only victim, not only spectator; he is all three at once."
Elie Viesel, The Town Beyond the Wall, 174
Elie Viesel, The Town Beyond the Wall, 174
12.09.2008
게으름의 발전: 정욕

3. 게으름의 발전: 정욕
게으름이 게으름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언제나 의무가 필요합니다. 의무가 없는 곳에서는 그 사람의 게으름을 말하기가 어렵습니다.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작 단계의 게으름은 늘 이러한 형태고 출발합니다. 아예 의무를 행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거나 귀찮은 부분을 소흘히 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최선을 다하면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힘이 들어도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게으름은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데, 그것은 바로 의무를 완전히 저버리는 것입니다. 게으름이 계속 발전하는 것은 게으름의 원인인 자기 사랑이 계속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게으름은 영육간에 편안한 삶을 이룬 것에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편안한 삶은 게으름의 소극적인 목표일 뿐입니다. 이 소극적인 목표가 만족되고 나면 나타나는 적극적인 목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쾌락입니다. 이처럼 게으름의 끝에는 길이 없습니다.
신자로서 해야 할 선하고 마땅한 의무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급기야 그 의무를 저버림으로써 편안함은 획득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에서 오는 사랑의 연합이 주는 신령한 기쁨도 사라졌습니다. 이 때 육체는 게으름으로 얻을 수 있는 편안함보다 더 자극적인 즐거움을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요구의 대부분은 죄를 짓지 않고는 성취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청교도 존 오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려면 그 사람의 행동보다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욕구를 살펴라. 그 사람의 욕구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준다."
발전된 게으름은 정욕들을 계속 솟아나게 하여, 신자로 하여금 의무를 수행하지 않음으로 편안함을 누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악을 행해서라도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하고자 하도록 만듭니다...더구나 이 후자의 욕구는 전자의 욕구보다 훨씬 강합니다. 죄를 지은 대가를 치르며 느끼는 괴로움 보다는, 불타오르는 정욕에도 불구하고 그 죄에 접근하지 못할 때에 느끼는 안타까움이 더 힘든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게으름 때문에 정욕에 완전히 사로잡힌 존재로 전락하면, 우리는 더 이상 그를 은혜의 통치 아래 사는 사람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는 죄의 지배 아래서 죄의 종이 되어, 구원받지 않은 사람과 방불한 삶을 사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게으름이 우리를 데려가고 싶어하는 종착지는 바로 여기이며, 이것을 행해 게으름은 끊임없이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달프지만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참된 행복으로 나아가는 비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한 일의 결과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일에 충성하고 분투하는 과정에 대해서 보상하시기 때문입니다.
땀 흘리는 부지런함, 게으름의 욕구를 꺾는 삶, 의무를 실천하고자 하는 진지한 몸부림이 있을 때, '하나님, 도와주세요'하는 기도에 눈물과 진액이 밸 수 있습니다.
Subscribe to:
Posts (At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