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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1.2009

김대중 선생의 삶과 헤르만 헤세의 기도

"희망과 좌절, 기쁨과 공포, 그리고 해결과 의혹의 갈등과 번민을 매일 되풀이해왔고 지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며, 그분이 나와 같이 계시며,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며, 그 사랑 때문에 지금의 이 고난을 허락하셨으며, 나를 위하여 사소한 일까지 돌보시며, 지금 이 시간에도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시기 위한 역사를 쉬지 않고 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나의 감정이나 지식으로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든 것인가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통감하면서 부족한 믿음에 절망하고 화를 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현재의 환경도 주님이 주신 것이며, 주님이 보실 때 최선이 아니면 이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제가 주님의 뜻과 앞으로의 계획하심을 알 수는 없으나 오직 주님의 사랑만을 믿고 순종하며 찬양하겠습니다."

죽음을 앞둔 감옥에서
후광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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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믿음에 절망하고 화를 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만이 참 믿음이라고 성서와 신앙의 선배들은 늘 강조했다. 예수를 믿는 신앙은 철저한 자기 부정에서 출발한다. 스스로에 대한 절망은 신앙의 자궁이다. 스스로에 대해 절망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선"을 갈망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절대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절망은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죄성은 스스로 살기 위해 나와 이웃의 목숨마져 위태롭게 할 만 큼 뿌리 깊고 강력하다. 그래서 나 스스로에 대한 절망 마저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며 기도가 요구된다. 이런 점에서 "당신 안에서 기꺼이 멸망하고 싶다"고 기도한 헤르만 헤세의 외침도 울림이 크지만, 후광의 기도는 헤세의 기도를 온 삶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헤세보다 더욱 위대하다.

기도

신이여, 저를 절망케 해주소서.
당신에게가 아니라, 제자신에게
절망하게 하소서.
미친 듯 모든 슬픔 맛보게 하시고
온갖 고뇌의 불꽃을 핥게 하소서.
모든 치욕을 맛보게 하소서.
제 자신을 가눌 수 있게 돕지 마시고,
제가 뻗어 나가는 것을 돕지 마소서.
하나 저 자신 모두가 이지러질 때,
그 떼에는 제게 가르쳐 주소서.
당신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당신이 불꽃과 고뇌를 보내셨다는 것을.
기꺼이 멸망하고.
기꺼이 죽어가고 싶습니다만,
저는 오직 당신 속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헤르만 헤세 (Hernman Hesse, 1877-1962)

8.20.2009

경애하는 국민에게

"나는 정치를 하는 사람으로서 하나의 신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지도자라는 사람의 가치가 도대체 어떻게 결정되느냐 하는 점이다. 위대한 지도자는 바로 그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권력을 잡고 있었느냐, 또는 얼마나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느냐, 그리고 얼마나 많은 업적을 남겼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세로 국민을 대했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자기 나라 국민을 존경하고 사랑했느냐, 그리고 국민들에게 이득이 되는 올바른 방향과 정책들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또 그런 정책을 실현시키기위해 노력했는가 - 즉, 어느 정도로 충실하게 그리고 진심으로 국민을 대했으며 봉사했는가, 그 실적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고 방식을 철저하게 가진 인물이라면 가령, 그 사람이 높은 지위에 앉았던 기간이 비록 짧았더라도 그리고 별로 대단한 업적을 남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국민들은 역사 속에서 길이 기억하며 존경하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국민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정치의 기본 이념과 신조로 삼고 있다. 나는 국민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거나, 국민에게 자비심을 베푸는 것과 같은 정치 자세를 경멸하며 또한 증오한다."

김대중, 행동하는 양심으로, 박정희의 정치테러로 인해 일본에 망명중이던 1973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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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용 목사님, 김수환 추기경님, 노무현 대통령님에 이어 또 한 사람의 "경애"하는 스승이 영원한 나라로 가셨다. 그의 전 존재와 인생을 통해 남기고 가신 "행동하는 양심"과 "애닳픈 사람 사랑"은 본 회퍼와 마하트마 간디, 그리고 마틴 루터 킹의 정신을 잇는다. 자유, 정의, 평화, 인권, 평등, 통일, 공공의 선을 위한 초인적 헌신의 밑바탕에 "경천애인"이 인간됨의 기본이라는 굳건한 신념과 믿음이 있었으며 이는 예수의 사랑과 삶을 본받고 힘입으려는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행동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이 이들의 공통점이다. 나도 그렇게 살다가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예수님 곁에서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사고 기도를 올려본다.

bk

8.19.2009

김대중 대통령님의 기도

"지난 달 6·15 공동선언 9주년 기념행사가 끝난 후 행사위원들과의 오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민주주의는 싸우는 자, 지키는 자의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1년 남짓 만에 이렇게 후퇴한 것을 보면 꿈을 꾸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가 얻은 민주주의라도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으면 없어져버립니다.
젊은 당신들이 나서야 합니다.”

또 김대중 전대통령님께서는 매일 밤,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하신다면서 눈물을 글썽이셨습니다.

“예수님,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서민경제와 남북관계가 모두 위기입니다. 이제 나는 늙었습니다. 힘도 없습니다. 능력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하실 수 있는 힘이 있으니 당신이 우리들에게 최대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김대중 대통령님의 삶과 정치의 밑바닥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랑과 용서의 신앙이 깊게 흐르고 있습니다. 미국의 링컨처럼 ‘기도하는 정치인’,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보너스 인생을 사는 신앙인으로서의 정치인임을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김대중 대통령님을 위해 기도할 차례입니다.

이 땅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해 온 김대중 대통령님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그리고 당신께서 지키고자 했던 숭고한 민주주의 가치가 실현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이 기도는 우리와 우리의 아이들, 결국 대한민국을 위한 기도입니다. "


한명숙의 홈페이지 갈무리


8.10.2009

위대한 그리스도인

몇 해 동안 톰 랜드리는 미국인의 우상이었다. 그는 최고의 미식축구 팀 중 하나인 '달라스 카우보이즈'의 수석 코치였다. 몇 번인가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코치로 일하는 동안 훌륭한 선수들을 많이 만났지요. 하지만 위대한 선수는 극소수예요. 훌륭한 선수와 위대한 선수는 단 45센티미터 차이로 판가름이 납니다. 바로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죠. 경험으로 볼 때, 훌륭한 선수는 특출한 자질을 갖추고 있어요. 그러나 위대한 선수는 열정 어린 마음을 가진 선수에요. 즉 자기 희생, 잔인하리만치 길고 고도니 훈련과 연습, 전심전력을 다하는 집중력으로 결국 위대한 성과를 이뤄 냅니다."

거의 30년에 걸쳐 기독교 사역을 하는 동안 나 역시 그랬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많이 만나 봤지만 위대한 그리스도인은 극소수였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자신의 금쪽같은 시간, 돈, 욕구를 희생하는 그리스도인,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얻기 위해서 어떤 것이든 포기하려는 그리스도인은 별로 없었다.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자신의 직업, 명성, 신분, 우정, 재산, 심지어 생명까지 바치려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향한 열정 어린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앤 그레이엄 로츠, 위기속에 만난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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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많은 그리스도인이 같은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들에게 잔해를 받았던 적이 있었다. 단지 믿음이 다르다는 이유로, 신앙의 모습이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답게 살 권리를 박탈 당해야 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기 원했고 바로 그 점이 문제였다. 그들은 예수를 너무도 사랑했다. 자기 생명보다 예수가 더 귀했다.

위대한 그리스도인은 인간적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로츠"를 잘 못 이해할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잔인하리만치 길고 고된 훈련과 연습"은 그만큼 강한 동기와 열정이 없다면 애시당초 가능하지 않다. 더구나 "자신의 욕구를 포기하고" "생명"까지 희생하는 삶의 모습은 절대로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 오히려 단 한가지 만이 그 위대함을 가능하게 한다. 그건 사랑이다.

따라서, 위대한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사랑"으로 만들어 진다. 예수의 무한한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에 빠져 든 사람은 거부할 수 없는 예수의 사랑으로 자신을 초월 하게 된다. 그래서 예수 때문에 저주를 달게 받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예수의 위대함, 예수의 능력, 예수의 아름다움을 맛본 사람들은 그래서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자기를 초월하여 위대한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 즉 예수의 사람으로 불릴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다.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 물으시는 주님 앞에서, 사랑할 능력조차 없고 사랑받을 가치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신실하게 사랑하시는 주님 발앞에 겸손한 무릎을 조아리는 사람이 될 일이다. 그리고 뜨거운 눈물과 감사와 감격으로 주어진 자리에서 그분을 인정하며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될 일이다. 위대한 그리스도인은 "이뤄 내는"것이 아니라 "은혜로 수용하며 반응하는"것이라는 점에서 랜드리와 로츠는 오해했다.

bk

8.05.2009

원탁의 그리스도

원탁의 그리스도스탠리 존스 지음 황병규 옮김평단문화사 국판 변형 420쪽 13,000원

원탁의 그리스도 (Christ at the Round Table)교회의 선민의식과 배타적 독선에 경종을 울리고세상 속 기독교가 지향해야 할 좌표를 제시한 책!

“세계적 베스트셀러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의 저자 스탠리 존스의 두 번째 책!”

“진정한 종교는 몸을 구부려 겸손히 섬기고 육체와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며 약해진 영혼과 대화하고 그 영혼을 다시 살려내어 하늘의 아버지를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타임> 지가 뽑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선교사 스탠리 존스가 자신의 사명을 알고 그 사명을 완수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이 시대 최고의 복음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한 종교관을 가진 인도 사람들의 사상을 그들의 언어로 직접 들으면서 다원주의 사회에서 복음이 지닌 의미를 새롭게 규명한다. 또한 현대의 문화와 전통이 다원多元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복음이 여전히 진리임을 강조하고, 그들의 신관神觀, 내세관, 세계관 등을 파악하면서 진정한 기독교적 복음을 제시함으로써 교회의 역사적 사명과 선교에 대한 올바른 방향을 일깨워 주고 있다.이 책은 저자가 감리교 선교사로 20여 년간 인도 각처를 전도 여행하면서 만난 인도의 대표 지성인들, 즉 브라흐마 학자, 이슬람교 학자, 불교 승려, 힌두교 지도자 등과 함께 종파주의를 초월해 열린 원탁에 둘러앉아 허심탄회하게 나눈 종교적 신념을 촘촘히 기록하고 있다. 특히 종교적 승리주의와 종파주의를 초월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영혼의 가면을 벗어 놓고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신념을 토로하고 있는 이 책은 우리에게 이 시대 진정한 그리스도의 길이 무엇인지 묻는다. 이 책은 오늘을 살아가는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이 땅의 끝없는 고난과 모순에 대해 의구심을 가져 본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야 할 책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논리적으로 변증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것을 변증론적으로 풀어내고 있는 스탠리 존스라는 사람에 대해 두 번 놀라게 될 것이다.“이 시대 진정한 그리스도의 길이란 무엇인가?”전 세계 수많은 독자들을 감동시킨 이 시대 최고의 복음서!이 책은 1928년 영국에서 출간되자마자 전 세계 기독교인들의 심금을 울리며 베스트셀러 명단에 올랐으며,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선교 사역의 최대 명저로 꼽히고 있다. 교회의 선민의식과 배타적 독선에 경종을 울리고 세상 속 기독교가 지향해야 할 좌표를 제시한 이 책은 총 17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초반부에는 인도의 종교지도자, 사상가, 정치가 등과 같이 각계각층 사람들이 원탁에 둘러앉아서 그들의 사상과 종교를 솔직하게 토론한다. 후반부로 가면서 인도 사람들의 두려움과 절망 가운데서 희망의 증거를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이 왜 복음이고 참길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 변증론적으로 입증해 보인다.이 책은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적 복음의 실체를 낯선 땅에서 평생의 삶으로 증거한 신앙의 거인 스탠리 존스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들려주는 신앙 고백서다! 자신의 목적을 알고 그 사명을 완수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무한한 가치를 지닌다. 다원주의적 입장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의 길을 설명하고자 한 스탠리 존스의 이 새로운 시도는 수백만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 저자 및 역자 소개저자 : 스탠리 존스 E. Stanley Jones1884년, 미국 동부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태어나 18세 되던 해 예수 그리스도께 회심했다. ‘따뜻해진 마음’과 ‘세계 교구’를 강조하는 애즈베리대학에서 수학한 뒤, 1907년부터 감리교 선교사로 인도에서 평생 사역했다. 1920년대 초반, 마하트마 간디, 타고르 등과 함께 아슈람Ashram운동에 참여했으며, 1930년대부터는 기독교 아슈람운동을 펼치며 간디의 정신적 지도력을 바탕으로 한 크리스타그라하Kristagraha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40년 미국 뉴욕시에 할렘 아슈람을 세우면서 그의 기독교 아슈람운동은 인도를 넘어 미국과 유럽 등 세계 여러 나라로 퍼져 나갔다. 1938년 12월 12일자 〈타임〉 지에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선정되기도 했고, 1961년에는 ‘간디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인도 독립운동과 연관된 활동과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펼친 평화활동 등으로 두 차례 노벨평화상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다. 스탠리 존스는 철저한 복음주의자로 살면서도 열린 마음으로 인도인들에게 다가갔으며,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유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했던 인물이었다.

역자 : 황병규한양대학교 공과대학 졸업. 1984년부터 World Leadership Conference를 비롯하여 컨퍼런스 강의와 설교를 통역함. 2003년부터 아내와 함께 영묵, 예정, 승묵, 세 자녀를 홈스쿨링하고 있다. 현재 IBLP-Korea에서 삶의 기본 원리와 품성 계발 교육에 참여하고 있다. 역서로는 《지혜의 시작》, 《고전적 교육 입문》, 《흔들리지 않는 고전교육의 뿌리를 찾아서》가 있다.

《원탁의 그리스도》에 보내 온 각계의 추천사

위대한 선교사 스탠리 존스는 이 책에서 오늘날 한국 교회가 회복해야 할 교회의 역사적 사명과 선교의 올바른 방향을 일깨워 주고 있다. 특히 종교적 선민의식과 종파주의를 초월해 열린 원탁에 둘러앉아 허심탄회하게 종교적 신념을 이야기하는 이 책은 우리로 하여금 ‘잃어버린 천국’으로 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길을 안내하고 있다!-한완상(전 대한적십자사 총재)

교회의 선민의식과 배타적 독선에 경종을 울리고 세상 속 기독교가 지향해야 할 좌표를 제시한 복음서다. 특히 종교적 승리주의와 종파주의를 초월했던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영혼의 가면을 벗어 놓고 허심탄회하게 종교적 신념을 토로하고 있는 이 책은 오늘을 살아가는 종교인들에게 미래 교회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을 보여 주고 있다.-이어령(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 겸 중앙일보 고문)

청소년 시절, 영적으로 매우 고갈되고 생의 여러 문제에 봉착했을 때 스탠리 존스의 책은 내 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데 빛이 되었다. 복음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해 명확하게 안내하고 있는 이 책은 요즘처럼 복음의 능력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에 대한 분명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 -임영수(모새골 공동체 목사)

스탠리 존스는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적 복음의 실체를 낯선 땅에서 평생의 삶으로 증거한 신앙의 거인이다. 그는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한 종교관을 가진 인도 사람들의 사상을 그들의 언어로 직접 들으면서 이 시대 진정한 그리스도의 길이 무엇인지 제시하고 있다. 독자들은 이 책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몸으로 보여 주고자 했던 진정한 복음의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오정현(사랑의 교회 목사)

본문 속으로

나는 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이기고 승리하는 일 따위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다. 혹시 승리할 수도 있겠지만 거기까지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우리의 목표는 진실이고, 만유의 실재이며, 영의 자유이다. 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정복한다고 해도 얼마든지 이런 문제를 등한시하거나 잊고 악화시킬 수 있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했지만 결국 그리스도가 거기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뿐이다.-p.9 (프롤로그)

종교는 삶에 적절한 해답을 주고 있는가? 아니면 삶 자체나 삶의 의미와는 아무 공통점도 없는, 즉 삶에 해결책을 주지 못하는 정신적·사회적 찌꺼기인가? 우리는 이 위대한 실험 결과를 보고해야 하고, 확인한 내용이 있다면 기꺼이 알려야 했다. 마음속 깊은 곳을 향해 말하는 것은 정말이지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p.15 (제1장 출발)

“저는 욕망의 격렬한 싸움 속에서 스러져 가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의 발아래 제 욕망을 내려놓자 그분이 폭풍우를 잠재우고 제 자신에게서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 “제 인생이 산산이 부서져 있을 때 그리스도가 다가와 정상으로 돌려놓으셨습니다. 이제 저에게는, 하나님은 숨을 쉬는 것보다 더 가깝고 손발보다 더 가까운 친밀한 실재입니다.” -p.25 (제2장 인도인의 삶과 맞붙다)

“나 자신을 비울수록 하나님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질서정연한 기계이므로 우리가 그 법칙에 순종할 때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만 기적은 바랄 수 없기에 오랜 세월이 걸립니다. 그래서 샹카라도 ‘하나님을 찾으려는 사람은, 바닷가에 앉아 지푸라기로 물 한 방울씩 묻혀 옮겨 놓아 대양을 비우려는 사람 같은 인내를 지녀야 한다’고 말한 것이지요.”-p.53 (제3장 종교에 대한 솔직한 고백들)

누가 진정 그리스도인일까? 루터는 “인간은 절대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인이 되어 갈 뿐이다.”라고 말했다. 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모든 의미에 응답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와 사귐에 따라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사람이다. -p.79 (제4장 거듭남)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했다. 섬기지 않으려는 사람은 벽에 부딪힐 것이다. 나는 지난해에 유럽의 빈 왕궁 열세 곳을 둘러보았다. 그 왕궁들이 어째서 비어 있을까? 그 왕궁에 살던 사람들은 섬김을 받고 싶었을 뿐 섬기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이 법칙에 따라 스스로 망한 것이다. -p.104 (제5장 생명의 속죄)

원탁에 앉아서 사람들이 삶과 운명과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동안, 내 구원자가 앞에서 자라고 있는 모습을 지켜봤다. 나는 예수가 나를 어디에서 구원했고, 어디까지 구원했는지, 그리고 어디로 구원해 가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예수는 나를 죄에서 구원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예수는 내 우주를 구원하고, 내 우주 속에서 건드리는 모든 것을 구원한다.-p.128 (제6장 더욱 커지는 구원자)

우리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살라고 지어진 존재이다!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 우리 자아, 곧 참다운 내 자아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법이 내 삶과 일치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붙잡아라.’ 물론 그 제의 속에는 회개하고, 자기를 포기하며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는 요구가 들어 있다. 그러나 일단 그 제의를 받아들이면 그 요구는 어느새 사라지고 즐거움으로 변한다. -p.155 (제7장 하나님에 대한 체험)

나는 《신약성서》를 펴고 기도하면서 어둠을 밝히고 길을 안내해 줄 말씀을 찾았다. 그 순간 〈사도행전〉 1장에 있는 사건이 떠올랐다. 제자들이 예수에게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때와 시기는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p.175 (제8장 안타까운 약속의 땅)

우리는 어디서 권위를 찾을 수 있을까? 절대 오류가 없는 교회, 절대 오류가 없는 성서, 절대 오류가 없는 그리스도의 체험에 권위가 있을까? 권위는 세 가지 모두 안에 있다. 최종 확실성과 권위의 자리는 역사의 예수가 체험의 그리스도가 되는 연결점이며, 그 결과로 생긴 개인의 체험이 단체 체험으로써 확증되고 바로잡히는 곳이다. 그때 권위의 자리는 바로 그리스도다.-p.193 (제9장 확실성과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복음은 통역이다. 복음은 영원의 언어를 시간의 말로 바꾼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속죄 목적이 우리에게 가까이 와 닿아 현실이 되고, 누구나 얻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단테가 입을 열었을 때 ‘천 년의 침묵’이 깨졌다고 한다. 예수 안에서 ‘영원의 침묵’이 깨졌고, 우리는 복음을 듣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이 속죄의 사실을 통역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p.214 (제10장 그리스도의 통역자)

섬기는 자세, 곧 종의 자세가 그리스도인의 자세다. 그것은 예수가 취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힌두교인 애국주의자는 우리에게 “현재 인도의 영혼을 붙잡고 있는 위대한 낱말 두 개가 있습니다. 곧 ‘섬김’과 ‘자기희생’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이상은 우리 복음의 심장부에 깊이 박혀 있다. 우리가 동양에서 도덕적 권위를 얻으려면 이것이 우리의 자세와 심장부에 깊이 박혀 있어야 한다.-p.233 (제11장 원탁에 앉은 선교 단체)

죽음 앞에서 마지막으로 쥐고 있던 힘마저 다 빠졌을 때에도 여전히 예수는 최후이자 최고의 일을 하려고 했다. 사람들을 위해 죽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 성배 속으로 들어갔다. 우리 영혼이 악과 증오에 대해 분개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 우리는 이 완전한 승리를 마신다. 무엇으로도 사라지거나 꺼지지 않을 영원한 사랑을 마시면서 우리는 루터처럼 말할 수 있다. “내 영혼은 한없이 기쁘고 위대해서 어느 누구의 원수도 될 수 없다.” -p.279 (제13장 가장 신성한 원탁)

종교는 인간을 자신의 가장 높은 자아와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야 분열된 영혼의 힘이 하나가 되고 형제들과 잘 어울릴 수 있다. 또한 하나님과도 잘 어울리게 된다. 종교의 임무는 속죄다. 종교가 속죄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치명적이다. 종교 의식이 아름다울 수 있고, 종교 규약의 역사가 아주 오래될 수 있으며, 그 교훈이 좋을 수 있지만, 속죄에 실패한다면 회복할 길이 없다. -p.301(제14장 십자가는 삶의 열쇠)

사랑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의 법칙이다. 미움이 아니고 사랑이 바로 우리 존재의 법칙이다. 미움은 산酸처럼 우리 영혼을 부식시키지만, 사랑은 우리 영혼을 밝은 건강으로 빛나게 한다. 순결이 그리스도 안의 삶의 법칙이고, 우리 존재의 법칙이다. 불결은 내면의 삶을 시들게 하지만 순결은 내면의 삶을 상쾌함으로 설레게 한다. 선이 바로 우리 존재의 법칙이다. -p.327 (제15장 참길)

우주의 원탁에서는 모든 것, 곧 바울,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스승, 세상을 비롯한 모든 사실, 삶을 비롯한 모든 실재, 죽음을 비롯한 모든 변화, 현재와 미래를 비롯한 모든 시간을 포함하는 만물이 일어나 그리스도의 주권을 증언하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에게 복종한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으로 조건을 확인해야 한다. 모든 것에는 불멸의 조건이 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라.” -p.383 (제17장 우주의 원탁)


■ 차 례
프롤로그 껍데기는 버리고 본질을 추구하라!
Ch. 1 출발 하나님의 약속|그리스도의 명령
Ch. 2 인도인의 삶과 맞붙다 원탁에서 만난 사람들|간절한 마음의 소리
Ch. 3 종교에 대한 솔직한 고백들 불확실한 영혼|고매한 절망
Ch. 4 거듭남 수평 개종과 수직 회심|회심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
Ch. 5 생명의 속죄 하나님 나라의 실현|좁은 문의 법칙
Ch. 6 더욱 커지는 구원자 사람의 아들, 예수|사람과 하나님이 만나는 곳, 예수
Ch. 7 하나님에 대한 체험 복음은 이론이 아닌 체험|복음은 요구가 아닌 제의
Ch. 8 안타까운 약속의 땅 거의 타오를 뻔하다가 꺼지는 불꽃|거의 될 뻔하다 가 실패하는 교회
Ch. 9 확실성과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인격|스스로 역사 의 증인이 된 예수
Ch. 10 그리스도의 통역자 복음은 생명 언어로의 통역이다|진정한 통역자는 예수
Ch. 11 원탁에 앉은 선교 단체 종의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나다|민족도 개인 도 사랑한 백부장
Ch. 12 원탁에 앉은 나라들 자기중심적인 바보들|자기희생의 권력
Ch. 13 가장 신성한 원탁 생명의 잔|완전한 승리
Ch. 14 십자가는 삶의 열쇠 값없이 받는 보혈의 선물|십자가는 하나님의 본성
Ch. 15 참길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다가온 하나님|예수는 길이고 진리며 생명
Ch. 16 예수는 보편적인 실체 진리는 보편적, 오류는 제한적|어느 상황에서 든 예수는 그 상황의 빛
Ch. 17 우주의 원탁 우리는 예수의 것|예수만이 참 소망옮긴이의 말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From NewsNJoy 서평 이벤트

8.03.2009

왜 라고 묻게 하라

불쾌한 질문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면 성자가 된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왜 가난하냐고 물으면 화를 내고 욕을 먹는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음식을 주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난의 이유"를 밝혀 내는 것이다.
"왜"라는 질문은 현상을 떠받치고 있는 구조와 환경을 지적해 내고 근본적인 처방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다.

기독교의 위험한 사상


Christianity's Dangerous Idea: The Protestant Revolution--A History from the Sixteenth Century to the Twenty-First, Sep. 1997, by Alister E. McGrath 560 pages
This is McGrath's third book title borrowed from his atheist bête noir Richard Dawkins. But don't let the titular borrowings fool you: this is an original and important book. Someone had to imitate the long, popular works of history being written on secular subjects from Lewis & Clark to FDR, and McGrath has the theological and historical expertise necessary to tell a story stretching from the Reformation's origins in the 16th century to today. The dangerous idea was Martin Luther's: that individual believers could and should read the Bible for themselves. The result was occasionally violent (as in the peasants' revolt and the English Civil War), occasionally brilliant (musicians like Bach, theologians like Calvin and Jonathan Edwards, poets like Milton) and certainly world altering (the Calvinist Reformation clearing space for the rise of secular science and capitalism). McGrath concludes not with the faith practices of present-day England or America, but with the increasingly Pentecostal global south. The book occasionally falls into the dry tone of a textbook and assumes points that historians would want to debate, but is still the most readable introduction to the history, theology and present-day practices of Protestantism. (Oct.) Copyright © Reed Business Information, a division of Reed Elsevier Inc. All rights reserved.
"맥그래스는 야심찬 사상을 대담하게 제시하면서 종교개혁으로부터 현대 세계 기독교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개신교와 그 변형들의 역사를 체계 있게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은 아주 쉽게 읽을 수 있고, 놀라울 정도로 폭넓은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공정한 시각에서 서술하고 있다."-필립 젠킨스"


이 책은 개신교와 그 역사를 독특한 시각으로 검토하여 재해석하고, 개신교가 지닌 놀라운 다양성과 내적 일관성을 함께 제시하며, 상세한 연구 내용을 통찰력 넘치는 광대한 해석들과 잘 결합시켜 놓았다. 우리에겐 이런 책이 필요했다. 정말 잘 쓴 책이다."-후스토 곤살레스"

각 사람이 성경을 이해하고 자신과 자신이 사는 세계에 적용할 수 있다는 사상은 사회 구조와 개인의 삶에 무한한 시사점을 던져주는 폭발적 사상이다. 이 책<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는 이 사상으로부터 발전된 것과, 이 사상이 전 세계 기독교의 현재와 미래에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는데 독특하면서도 고귀한 도움을 제공해 준다."-댈러스 윌러드


옥스퍼드 석학, 앨리스터 맥그래스의 기념비적 저작!개신교 역사와 그 세계적 영향력을 새롭게 해석하다!
개신교의 중심에 자리 잡은 '위험한 사상'은 성경 해석이 각 사람의 권리이자 책임이라는 것이다. 이 원리가 확산되면서 개신교는 500년에 걸쳐 두드러진 혁신과 적응의 역사를 보여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적 일관성이 사라지고 사회 불안을 조성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고집불통인'사상들을 통제할 수 있는 최고 권위가 없었기에 쟁점을 놓고 논쟁하는 당사자들은 성경에 호소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성경은 갖가지 수많은 해석들에게 그 문을 열어놓고 있다.
이 책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는 처음으로 개신교의 핵심 요소와 이 위험한 사상이 만들어낸 종교적, 문화적 역동성을 정의해 보려고 시도한 책이다. 이 종교적, 문화적 역동성은 결국 20세기에 이르러 개신교에 놀랍도록 새로운 발전을 가져다 주었다. 세계적 명성의 옥스퍼드 석학 앨리스터 맥그래스는 독특한 접근방법을 이용해 전 세계 개신교 교회들과 공동체들이 연관된 논쟁과 분열에 여전히 영감을 불어넣고 있는 매력적 인물들과 운동들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이 책 1부(기원)는 연대를 따라 내려가며 역사를 관통해가는 유희를 제공한다. 2 부(표현)는 개신교의 신앙과 관습이 지닌 독특한 특징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3부(변형)는 전 세계 개신교의 미래에 대해 깜짝 놀랄 평가를 내리고 있다.


차례
들어가는 글
1부 기원
1장 몰려오는 폭풍
2장 우연히 혁명가가 된 혁명가 - 마르틴 루터
3장 루터의 대안들 - 종교개혁의 다양화
4장 힘의 이동 - 칼뱅과 제네바
5장 잉글랜드 - 성공회의 등장
6장 전쟁, 평화 그리고 무관심 - 위기에 빠진 유럽의 개신교 (1560~1800)
7장 미국의 개신교8장 19세기 - 전 세계로 뻗어나간 개신교
2부 표현
9장 성경과 개신교
10장 믿음과 특성 - 개신교의 몇 가지 두드러진 믿음들
11장 신앙의 틀 - 조직, 예배, 설교
12장 개신교와 서구 문화의 형성
13장 개신교와 예술 그리고 자연과학3부 변형
14장 미국 개신교의 변화상
15장 불의 혀 - 개신교 안에서 일어난 오순절 혁명
16장 개신교의 새 개척자들 - 남반구
17장 개신교 - 다음세대
옮긴이의 글
지은이
주찾아보기

저자:알리스터 맥그래스1953년, 북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벨파스트에 있는 감리교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 등을 공부한 뒤, 옥스퍼드와 캠브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현재 옥스퍼드 대학교의 위클리프 홀(Wycliffe Hall)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같은 대학에서 역사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역자: 박규태 고려대학교 법과대학과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2006년 3월 교회 사역에서 물러난 뒤, 현재는 영미권과 독일어권 신학서 번역과 저작에 전념하고 있다. 역서로는 『종교개혁 시대의 영성』, 『기독교의 미래』, 『성경완전정복』(이상 좋은씨앗), 『약할 때 기뻐하라』(복있는사람), 『세상을 잃은 제자도 세상을 얻는 제자도』(국제제자훈련원) 등이 있다.
from 국제제자훈련원 "사랑몰"
올해 필독도서에 추가됨

7.21.2009

믿음은 삶이다

프란체스코의 설교

믿음이란 관념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이어야 한다. 설교란 일방통행식의 가르침이 아니라 그 사람의 평편과 눈높이에 맞춘 진정한 교감이어야 한다. 가정에서는 온유하고, 타인에게 겸손하며, 불행한 자에게는 동정을, 악한 자에게는 저항을, 축복을 입은 자에게는 축하를, 뉘우치는 자에게는 용서를 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은 관념이 아니라 삶이다.

-김동훈, 역사와 함께하는 말씀묵상

7.20.2009

학습욕구

"Humans are the learning organism par excellence. The drive to learn is as strong as the sexual drive--it begins earlier and lasts longer."

Edward Hall

학습에 대한 욕구는 성욕보다 강하다. 학습욕구는 성욕보다 훨씬 일찍 시작되며 보다 오랫동안 지속된다.

인테그리티


1. 마음을 얻으라
리더십이란 영향력입니다. 결국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 리더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물론 마음을 얻지 못해도 리더를 따르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없이는 최선의 노력도 안하고, 최선의 결과도 얻지 못합니다. 즉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결코 그 사람의 열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훌륭한 리더는 상대방의 마음을 얻음으로, 그의 의지와 열정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것은 좋은 성품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좋은 성품 이상의 것이 필요합니다. 그럼 무엇이 필요할까요?


2. 공감하라
공감이라는 단어는 ‘안’과 ‘감정’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비롯했습니다. 따라서 공감은 상대방의 ‘감정’안에 있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아무리 훌륭한 리더가 객관적으로 좋은 목표를 제시한다고 해도, 그가 자신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낀다면, 사람들은 전심으로 그를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이해 받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리더에게는 다른 사람과 진심으로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이 절대적입니다.그런데 공감을 위해서는 몇 가지 요소들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감정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감정능력이란 자신의 진짜 감정을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모르는 사람이 절대 다른 사람과 공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아는 능력이 필요하며, 이는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정확히 진단하고 파악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경계선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의 감정을 이해할 때는 자신의 감정과 다른 사람의 감정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공감이란 상대방의 감정에 단순히 빠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감정에 빠지면 그가 현재의 경험을 극복하기 위해 희망의 다리를 놓는 일을 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경계의 벽이 너무 높아 자기 감정만 주장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따라서 균형이 필요합니다.

세 번째는 경청하는 능력입니다.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이해한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진심으로 듣고 있는지 아닌지는 상대방이 더 잘 압니다. 리더가 진심으로 듣고 이해하고자 할 때, 상대방 역시 그에게 마음의 문을 열게 될 것입니다.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점은 공감과 견해 차이는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즉 상대방의 경험을 인정하고 공감하는 것이 상대방의 의견에 반드시 동의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공감이 전제되지 않은 설득은 불가능하며, 참된 의사소통은 공감을 전제로 합니다. 하지만 변화를 이룰 수 없는 공감 역시 무익합니다. 상대방과 공감하게 되면 상대방으로부터 배우게 되고 심지어 자신의 생각이 바꿀 수도 있지만, 바른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하는 공감은 무익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3. 은혜를 베풀라
공감과 더불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는데 필요한 것은 마음 주기입니다. 마음 주기는 세 부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피해망상증입니다. 이 증상에 빠진 사람들은 신뢰라는 개념을 생각지도 않고 일만 잘 풀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상대방이 자신을 속일 것임을 전제하고 사람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부류의 리더는 우리 중에 없을 것이라고 믿고 바랍니다.둘째는 조건부 신뢰로, 우리 대부분은 여기에 속할 것입니다. 이들은 신뢰와 좋은 관계를 원합니다. 다만 잘하는 상대에게만 잘해줍니다. 이들의 중요한 가치는 공평입니다. 성과를 올린 사람에게는 그에 합당한 대우를, 그렇지 않으면 동일하게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신뢰를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이고, 이 때 필요한 것은 도움이기 때문입니다.셋째는 무조건적인 신뢰로, 자신보다는 남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는 마음을 가진 리더들입니다. 이런 사람은 우리 중에 흔하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바로 무조건적인 은혜에 기반한 종교임에도 우리의 리더들은 이 은혜와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습니다. 은혜는 기독교적 삶의 태도이자 존재 방식입니다. 이 은혜 속에서 궁극적으로 신뢰가 싹트며, 리더에게 은혜를 맛본 사람들은 리더에게 마음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그렇다고 상대방에 대해 바라는 기준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은혜로운 리더는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높은 기준으로 끌어 올리기 위해 조언이나 훈련, 격려, 자원 등을 제공합니다. 그는 아직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기준점에 도달하도록 섬기고 돕습니다. 반면에 은혜롭지 않은 리더는 요구만 할 뿐 도와주지 않으며 상대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그를 적으로 몰아 붙입니다. 은혜로운 리더만이 사람들이 진심으로 신뢰를 보이고 따르게 됩니다.


삶 속에 사람이 있다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사실이 있다면, 사람의 중요성입니다. 사람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인생을 통해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을 얻는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핸리 클라우드, 인테그리티-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진정한 사랑을 심리학과 리더십이라는 렌즈를 통해 잘 정리하고 분석해 놓았다는 점에서 저자의 노력과 통찰은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나는 저자가 주장했던 "인테그리티"에서 "리더십"과 "영향력"을 위해 사랑이 이용되는 "디스인테그리티"가 느껴졌다면 역설일까? 마음을 얻기 위해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을 얻고 싶은 것일까? 예수님도 제자들의 마음을 얻기위해 사랑하셨을까? 그냥 아무런 댓가와 결과를 바라지 않고 심지어 내자신을 희생해 다른 사람을 세워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 그것을 은혜라고 정의하고 그 은혜가 기독교의 기반이며 존재방식이라고 믿는다면, 리더십과 영향력이라는 결과물을 내려 놓고, 가족이 서로를 사랑하듯 연인이 서로를 사랑하듯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인테그리티가 아닐까? 하나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받은 자로서 내게 허락하신 자들과 그 은혜를 나누는 삶을 살아가려 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즐거이 지는 희생적 사랑만이 "영향력"과 "리더십"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조건적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조정하려는 은밀하고 집요한 자기 사랑의 죄성을 극복하는 길이라 믿는다. 존재목적과 존재방식 사이의 혼동을 분별하고 사랑받았기에 사랑하고, 사랑하기에 사랑으로 살아가는 "목적과 방식사이의 인테그리티"가 있기를 소원해 본다.

bk

7.18.2009

자아에 대한 세 개념과 윤동주

자아를 이해하는 데 는 세 가지 개념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잠재적 자아potential self와 존재적 자아existing self, 그리고 자아의 이미지the image of the self이다."

Lewis Sherrill, The Gift of Power, 19

잠재적 자아는 되어저 가는 과정,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자아이다.
존재적 자아는 특정 순간에 존재하는 자아이다.
자아의 이미지는 내가 어떻게 나를 보는가에서 내가 생각하는 자아상이다.
잠재적 자아와 존재적 자아, 그리고 자아상을 되도록이면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중요하다. 그러나 이 일은 절대타자인 하나님이라는 거울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자아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상호의존적이다. 이 자아에 대한 이해가 신념체계의 형성에 근본이 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만약 이 세가지 자아에 근본적인 혼동이 올 수 밖에 없는 환경에 있다면 어떨까? 죄된 세상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세상과 내 자신의 실체에 대해 뒤틀린 상을 강요한다. 따라서 절대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만남은 왜곡된 세계속에서 억압된 내 자아와의 충돌을 가져올 수 밖에 없다. 그 충돌은 의미의 통합을 위한 혼란을 가져온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나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혼란이 지향점을 향한 동경, 그리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배태하고 있다면 그 혼란은 아련한 아픔을 품고 아름다움으로 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왜곡된 세계속의 자아와 진리와의 충돌이 긍정적 통합 지향할지, 아니면 파괴적인 분열을 가져 올 지의 분기점에 십자가가 서 있다. 제임스 로더의 표현을 빌자면 "창조의 영"의 "인간 영"에 대한 역동적 역사가 필요하다.

쉐릴이 윤동주를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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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自畵像)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

로마서를 읽다가 십자가 앞에 서다

하늘은 맑고 구름은 깊다.
나무는 푸르고 바람은 시원하다.
세상은 아름답고 평온해 보인다.

난 두려워하고 있다.
"두려워말라"
그래도 두렵다고
너무도 떨린다고
두눈을 감는다.

온 세계를 덮어버린 칧흙같은 어두움
폭풍우 속에 성난 산 솟구친 파도
내려 꽃히는 번개 찟을 듯한 천둥사이
삼켜져 버릴듯 요동치는 배 한조각
그 속에 쪼그라든 내가 웅크려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평안하라고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면 증거를 보이라고

벌거벗긴채
침뱃음을 당하는
만왕의 왕

가시로 만든
왕관에 찔려
나무에 매달린
하나님의 아들

아하 아하
하나님의 아들이여
만왕의 왕이여
스스로 구원하고
거기서 내려오라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물처럼 쏟아지는 피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갈증
터처버린 심장
뻣뻣해진 근육
멈추고 싶은 호흡
마비되는 정신

"일로이 일로이 라마 사박다니"
외로운 외침
소망 향한 절규

"나의 주 당신의 손에
다시 또 한번
당신을 위해
나의 영혼을 맡겨 드리니

내가 사는
이세상
죽음까지도
당신의 손에 있는것

내가 살아가는
바로 그 목적
내가 노래하는
바로 그 이유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당신의 품에
그렇게 영원히
나 있기에..."


다윗의 노래를 따라
수백번 수천번
겟세마네에서 드렸던
바로 그 기도

나의 주님 그렇게
기도하시다
마치지도 못한 채
운명하셨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신뢰하는 자
부끄러움 없으리

하나님의 눈물
땅을 뒤덮고
막혀진 죄의 휘장
찟겨 나갔다.

into your hand I commit again
with all I am
for you Lord

you hold my world
in the palm of your hand
and I'm yours forever

Jesus I believe in you
Jesus I belong to you
You're the reason that I live
the reason that I sing
with all I am

I'll walk with you
wherever you go
throguh tears and joy
I'll trust you

and I will live
in all of your ways and
your promises forever

I will worship
I will worship you
forever

Amen

-Hillsong United-
Psalm 22
Mark 15
Romans 10


bk

7.14.2009

"믿으시면 아멘하세요!": 학습에 대한 두 관점과 문화, 그리고 하나님 나라

"믿으시면 아멘하세요!": 학습에 대한 두 관점과 문화, 그리고 하나님 나라

한국 뿐 아니라 세상의 많은 나라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어떤 면에서는 현재까지도 지배적인, 학습문화는 "수용"적 학습관에 기초를 두고 있다. 수용적 학습관은 학습learning을 "지식의 수용"으로 이해한다. 이는 "공장의 생산라인"이나 "은행구좌"같은 메타포로 설명될 수 있다. 지식은 전달자(교사)로 부터 수용자(학습자)으로 전달되며 단시간 최대량의 지식을 전달하고 저장하는 것이 학습의 목표가 된다. 학습의 평가는 교사가 전달한 지식과 학생이 획득한 지식이 얼마만큼 일치하는가, 교사가 전달한 지식을 학습자가 얼마나 저장하고 있는지에 중점을 둔다. 따라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지식을 전달하고 수용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오랬동안 수용된 지식을 정확하게 저장할 수 있는가가 최고의 관심이다.

수용적 학습관에 기초한 지식의 획득과 저장을 특징으로 하는 학습문화는 다음과 같은 가정을 담고 있다. (1) 지식은 객관적이며 독립적이다. 이 세상의 실체는 인식자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지식은 실재에 대한 객관적인 표상이다. 지식은 언어를 포함한 매체를 통해 그 순수성을 상실하지 않고 유통될 수 있다. (2) 가르침 또는 교수instruction는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다. 교사는 축척되고 조직된 지식을 효과적으로 학습자들에게 전달하는 전달자transformer이다. (3) 학습learning은 전달된 지식을 획득하고 저장하는 것이다. (4) 저장된 지식은 언제든지 다른 상황에 적용된다. 지식의 적용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보다 기초적이고 일반화된, 추상적 지식이 선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수용적 학습관은 여러가지 면으로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Paulo Freire는 수용적 학습관을 폭압적이라고 비판하였다. 주입적 암기와 반복rote memory을 통해 이루어 지는 은행예금식(banking) 학습은 학습자들의 주체적이며 비판적 사고를 근본적으로 제한하고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사고와 표현을 구속함으로서 개인의 인격과 독특성을 파괴하고 기득권이 만들어 놓은 사고체계에 순응하는 종속적이며 타율적인 인간을 양성한다고 보았다. 또한 학습의 실천적이며 공동체적인 특성을 현격히 제한하여 다른 사람들과의 함께 하는 대화와 활동를 거부하여 배움을 고립된 개인의 수행으로서의 "공부"로 축소시켰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수용적 학습문화는 비판적 사고력, 문제해결력, 창의력, 그리고 상상력같은 고차원적 사고의 발달을 이해하고 지원하는 데 심각한 한계를 드러내었다.

행동주의와 인지발달주의를 거처 1970년대 이후 끊임없이 주목을 받아온 학습에 대한 관점은 구성주의constructionism 관점이다. 구성주의적 관점에서 지식은 인식의 주체인 학습자가 내적 인식과 외적 환경사이에서 끊임없이 구성, 해체, 재구성된다. 학습은 이러한 인식 주체의 능동적 지식 구성의 과정이다. 구성주의 학습관에서는 학습자가 처해 있는 상황과 학습자 사이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과정이 학습이라고 보기 때문에 학습은 본질적으로 상황 의존적이라고 주장한다. 즉 어떤 상황에서 어떤 활동을 하는가가 학습의 내용과 결과를 규정하게 된다. 따라서 학습은 고립된 개인의 활동일 수 없으며 전달자와 수용자의 관계에서 처럼 일방적일 수도 없다. 자신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 그리고 구체적 학습의 상황이나 학습자가 처한 사회문화적 환경등이 학습에 있어 본질적인 요소들이며 따라서 학습은 상황적이고 사회적이다.

이러한 학습에 대한 이해는 자연스럽게 교사와 학습자의 역할에 근본적 변화를 요청한다. 교사는 학습자가 주체적으로 지식을 구성할 수 있도록 돕는 안내자 또는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 학습자가 최대로 자기 자신을 개발 할 수 있도록 상황과 환경을 최적화 해 주어야 한다. 또한 학습자 개개인의 특성과 역사를 이해하며 그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하고 인격적인 신뢰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무엇보다 학습자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학습자를 신뢰하고 인내함으로 "안전하게 실패"할 수 있는 문화와 구조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학습자는 학습의 주체로 자기 주도적이며, 창의적이고 비평적이며 탐구적인 학습행위를 통해 개인과 공동체의 지식구성행위에 능동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스스로의 사고방식과 고정관념을 떠받치고 있는 전제와 가정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날카롭게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과의 사고와 행동에서 대립되는 차이점을 긍정하고 수용하며 상호 발전시키는 자세와 노력이 요구된다. 개인이 아닌 공동체로서 함께 배워가려는 겸허한 마음과 구성된 지식을 구체적인 현장에서 검증하고 확인하는 용기와 도전이 있어야 한다.

학습에 대한 수용적 관점과 구성적 관점의 차이점은 교회 사역에 대해 심각한 시사점들을 제공한다. 설교와 성경공부에서 부터 시작하여 예배와 선교에 이르기 까지 교회 사역 본질중 하나는 칼빈이 지적한 바 대로 어머니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이다. 성도들을 단순한 성경지식의 전달과 문화화된 교회의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도록 강요함으로서 현재도 상당히 진행되어 온 교회의 세속화를 심화시킬 것인지, 아니면 성도들로 하여금 말씀을 준거의 틀로 삼아 개인과 공동체의 성향과 활동에 녹아 있는 세속성을 분별하도록 비판적 성찰의 능력을 함양하게 하고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문화를 창조하여 세상에 대안을 제시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로 양육할지는 교회의 책임있는 리더들이 가지고 있는 "학습"에 대한 이해에 따라 달라지게 될 것이다.

학습에 대한 두 관점을 생각하면서 실제 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사역을 예로 들어 성찰해 보자. 위성을 통한 예배, 인터넷을 통한 신앙강좌, 텔레비전을 통한 복음 전도등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성서신학적인 지식을 가지고서는 현상에 대한 직접적인 해답을 얻기 어려울 것이다. 수용적 관점에서 본다면 인터넷이나 기타 위성과 텔레비전을 통한 신앙행위들은 원하는 정보를 습득하고 주관적 감정을 움직이는 동기부여를 일으키는 데에는 상당한 도움을 주고 또 효과적일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극복하고 학습자/성도들의 필요와 취향에 따라 지식습득(신앙/말씀 강좌)과 신앙적 행위(예배)를 선택하고 향유할 수 있기 대문이다. 따라서 지식의 전달과 수용, 그리고 축적이라는 측면에서 인터넷 예배나 성경공부는 탁월한 학습의 도구로 유용하게 활용해야 한다.

한편, 구성주의적 관점으로 이 문제를 본다면, 학습자 또는 청중의 컨텍스트와 특성이 고려 될 수 없는 일방적 전달의 의사소통과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 속에서의 상호작용이 없는 정보의 수동적 수용은 개인의 비판적 성찰 능력을 개발하고 더 넓은 진리를 이해하며 실천하는 데 주체적 노력을 기울이는 변화와 성숙을 가져 오기에는 제약되는 점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축척된 (수용된) 지식이나 경험이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실질적인 적용성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점에서는 실증적 연구가 필요하다.

설교에 있어서 예를 들어 보자.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 선포"라는 측면에서 접근하여 설교자를 "말씀의 대언자"로 보려는 시각이 있었다. 이러한 접근은 지식의 수용적 관점을 그대로 대변한다. 선포자는 전달하며 청중은 수용하고 축적한다. 성서를 해석하고 전달하는 과정은 전적으로 설교자의 고독한 작업에 의존하며 일체의 질문과 의심을 용납되지 않는다. "믿으시면 아멘하세요!"라는 설교자의 외침이 이를 대변한다.

그러나 토마스 롱을 주축으로 하는 "공동체적 증언"의 관점으로 설교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설교자를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중 하나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사람"으로 여긴다. 역시 지식의 구성주의적 측면이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최근에는 "대화적 설교dialogical preaching"를 통해 설교자가 청중들과 서로 양방향의 의사소통을 추구하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다. 고차원의 학습을 통한 창조적 변화가 일어나려면 학습자의 필요와 동기, 그리고 삶의 현장과 실제 경험을 중심으로 상호간의 의사소통이 일어나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간의 학습을 보는 관점에 따라 이렇듯 실제 삶에서 살아가는 방식, 즉 의사소통의 스타일, 조직의 구조와 문화,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는 많은 차이를 나타낼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 발전하고 있는 사회과학의 발견과 발전을 잘 이해하여 좀 더 신학적이면서도 효과적인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더 왕성하게 구현되어야 할 것이다.


bk

7.10.2009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말씀 읽기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순종되고 복종되어 "현실"이 되는 세계다 (시 103:19-22). 그것은 곧 공평과 정의를 인간 역사속에 실현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 (창 18:19, 삼하 8:15)의 빛 아래서 성경을 읽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경과 기독교 복음이 단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만을 위한 선물이 아니라 온 누리의 만민을 위한 선물임을 강조하는 성경 읽기다. 기독교 신앙의 공공성과 역사성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성경읽기다. 성경에서 영혼 구원의 원리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벌어지는 정치, 경제, 국제관계등의 공적 영역 속에 성경적 원리와 가치를 뿌리내리게 하고 실현시키려는 성경읽기다.
김회권,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사도행전 1, 복있는 사람 2007, p. 11.

창조와 타락과 구속의 구속사적이며 개혁주의적 세계관의 렌즈를 쓰고 읽어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진 하나님의 세계 통치를 염두에 두고 개인과 사회, 성과 속, 삶과 정신, 현상과 본질, 구조와 방향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 않으며 읽어 가는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통해 나와 세상을 보고, 역사를 통해 말씀을 이해하는 통전적인 접근만이 주관적인 자의적 해석의 유혹, "영지주의적 심령주의의 침잠spiritualistic retreat into the private realm"(김회권, 16) 과 그로 인한 우월감, 그리고 문자와 교리에 사로잡힌 경직된 적용의 폭압을 극복하고 진정으로 인간과 세상을 해방하시는 하나님의 따듯한 진리를 풍성하게 누리도록 할 것이다.
bk

구원에 대한 심각한 오해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하고,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찌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막 15:30-32

하나님의 작정과 약속 대로 예수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의 경륜은 창조세계의 회복을 위한 대안으로 자신의 아들이 죄의 댓가를 치루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다시 새로운 생명을 통해 회복시키시는 것이었다. 사도바울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방법을 "하나님의 의" 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로 지칭했다.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를 심각하게 오해했다는 점이다. 사람들의 구원에 대한 이해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이해 사이에 여전히 큰 차이가 존재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성경은 바로 이점, 즉 구원에 대한 오해가 죄의 근원이라고 가르친다. 죄의 근원은 절대 타자인 하나님 대신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인간의 의식적이며 무의식적인 자율의지에 기인한다.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 있는 인간은 바로 그 죄로 인해 샬롬을 상실하고 생명의 근원에서 뿌리 뽑혀 스스로의 한계로 인한 죄의 고통들로 처절하게 신음해야 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편, 즉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어떤 죄의 문제이든지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여 죽고 하나님의 힘으로 다시 사는 일 없이는 참된 구원은 일어나지 않는다.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고 외쳤던 종교지도자들의 비아냥이 자신의 창조세계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향했다는 점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죽어야 다시 사는 십자가와 부활의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고 신뢰하고 순종하지 않는 이유는 "자기 의" 때문이다 (롬 10:3). 자신의 논리와 상식과 경험과 합리성과 자원들에 대한 한계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런 것들로 구원을 획득하려는 지독한 경향성, 즉 "자기 의"의 응집체가 바로 인간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자기 의"는 십자가와 부활의 "그리스도의 의"와 격렬하게 충돌한다.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절규하며 죽어간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고 그의 부활과 온 세상의 주되심을 영혼 깊이 인정할 뿐아니라, 세상을 향해 선포하고 고백하며(homologeow) 그 분을 "의"를 쫓아 살아가는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며 절대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막15:39; 롬 10:9-13).

7.08.2009

혁명적 복음과 알깨기

“새는 알을 까고 나온다. 알은 한 세계다. 태어나려하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은 아프락서스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보낸 편지 중
헤르만헤세, 데미안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자신을 둘러 싼 낡은 현실의 파괴와 맞닿아 있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구절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불을 던지고 평화를 파괴하는 검을 주러 왔다고 가르치셨다. 또한 종교와 정치, 교육과 경제의 실질적 중심이었고 한 민족의 아이덴티티였던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주장하셨고 그로 인해 신성모독의 죄목으로 정치적 타살을 당하셨다. 예수의 복음은 그 본질상 '전복적'subversive이고 해체적이며 혁명적이다. 이 말은 폭력적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개인과 집단의 죄성으로 인한 모든 불의와 죄악에 대한 정면도전이다. 새로운 생명은 안전하게 무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참생명 또는 온전한 삶은 죄와 사망의 세력에 대항하는 혁명과 전쟁의 댓가를 지불하고 획득하는 것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의 옮김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흘림을 비용으로 치뤄야 할 만큼 치열하고 맹렬한 세상과의 전쟁을 치루고 난 후 얻어지는 것이다.

복음의 선포는 이렇듯 기존의 질서와 갈등관계에 있을 수 밖에 없다. 예수의 삼중 직 중, 선지자로서의 예수는 사회와 도통 어울릴 수가 없다. 기득권자들과 좋은 관계일 수 없으며, 지도자들과 화평할 수가 없고, 지식인들과 논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그의 몸으로서 교회에게 위임된 것이다. 왕과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실행하는 것 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선지자만으로도 안된다. 모두가 다 필요하다. 그러니 모든 교회가 다 필요할 것이 아닌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가는 서로 견제하며 대화하고 협력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자신을 둘러싼 자신의 세계를 인식하고 확장하려는 인간 영혼의 투쟁을 심리적으로는 "자아 발달"로 교육이론으로는 "변형적 학습"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발달과 변형이론들의 핵심은 인간의 "인식 구조" 또는 "인식의 틀"이 신체, 나이, 성별, 사회적 환경, 문화에 따라 어떻게, 어떤 과정에 따라, 어떤 촉매적 요건들을 통해 발달 또는 변형되는 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구조변형의 이해들은 인식구조의 발달과 변화의 설계자이며 원인자이고 협력자인 동시에 완성자이신 창조의 영을 간과한다는 점에서 자기 인식의 한계에 갖히는 심각한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반면 교회에서의 설교와 가르침은 보편은혜에 기반한 창조원리의 구조적 측면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깊이있는 이해를 추구하려 노력하지 않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사회과학을 통해 발견된 인간 발달과 인식구조 변형의 원리들이 근거가 빈약한 오류이며 교회의 신학과 신앙적 실천에 마치 원수나 되는 것 처럼 떠벌여 유치한 이분법적 사고에 근거한 싸움을 부추키기도 한다. 이로서 자기 인식의 한계안에 갖혀 있는 자신의 가련함을 보지 못한 채, 진리를 자기 호주머니 속에 넣고 있는 양 호들갑을 떠는 어리석음과 오만함을 보이기까지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교만함으로 스스로를 갱신할 줄 아는 능력을 상실한 교회는 세상의 권위주의적이고, 성취지향적(또는 경쟁적)이며, 가변적이고 폭압적인 세상문화의 사회화 과정에 저항하고 극복하여 그리스도의 문화를 창출해 냄으로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급속도로 세속화되어 스스로 경쟁하여 분쟁하고 결국 분열하여 자멸하게 된다는 점이다.

전통과 인습, 도그마와 자기 경험의 한계에 갖혀있는 사람들을 향해 "새술은 새부대"에 담을 수 밖에 없다고 일갈하신 예수의 통렬한 지적은 금식 논쟁과 같은 지엽적인 실천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똑같은 성정을 가진 나사렛의 젊은 목수를 창조주의 아들로 인정해야 하는 믿음은 기존의 인식구조의 틀을 무너뜨리는 새로운 인식구조로의 전환paradigm shift이 없이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 바로 이 시작점에서 부터 죽어야 살고, 나눠주어야 풍성해지며, 낮아져야 높아지고, 포기해야 얻는 다는 불가해한 역설이 시대와 상황과 문화를 초월한 삶의 근원적 원리로 존중되기 시작한다.

그러니 이렇듯 자기의 존재의 집인 "자기 세계"를 부수는 일이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가능하단 말인가!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자기한계의 인식만이 우리를 죽은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창조의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로 인도한다. 또한 이를 삶으로 증명해 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과 우리 안에서 그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믿음과 힘 주심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하도록 한다. 나의 한 부분인 세계를 파괴하는 일은 그래서 하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다.

bk

7.06.2009

해돈 로빈슨의 조언

오늘날 강해설교가 더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강해설교를 논할 때, 그것은 단순히 설교의 형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을 논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성경에 굴복시킬 것인가, 아니면 성경을 우리의 생각에 굴복시킬 것인가?’ 이 질문에 얼마나 정직한 대답을 하느냐가 그 사람이 진정한 강해설교자인지 아닌지를 판별해 주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강해설교가 더 중요한 이유는 과거의 설교자들이 지녔던 권위가 이제는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성장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이 시대의 보통 사람들은 설교자를 지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리더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20년 전만 해도 목사를 대상으로 법적인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목사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들은 배심원들에게 그가 목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하려고 무슨 일이든지 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수많은 이유로 사람들에게 신뢰를 잃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 자체가 스스로 진리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연구하게 만든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설교자가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보고, 듣고, 이해하게 만든다면, 성경은 그 자체로 그들을 확신시키고,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고,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우리가 성경본문을 가지고 설교해야 하는 이유는, 성경본문 자체가 권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본래의 정체성,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재하고, 성령이 그 말씀에 응답하며, 설교자가 그 말씀을 청중들의 삶과 연관된 방식으로 전달할 때, 성경은 설교자의 권위로 할 수 없는 일들을 해 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설교의 형식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설교의 형식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설교의 형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것입니다. 설교의 형식은 본문의 형식을 반영해야 합니다. 설교는 본문의 사상을 반영할 뿐 아니라 본문의 형식에도 영향을 받아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구약의 내러티브 문학을 다룬다면, 설교도 반드시 구약에서 사용한 이야기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시편을 다룬다면, 시편은 사람들이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를 보여 주거나, 예배에 대해 가르치는 책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시편의 문학과 씨름해야만 합니다. 시편이 전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우리의 설교에서 어떻게 시적인 요소들을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하나님이 자신의 진리를 전달하실 때 특정한 형식을 취하셨기 때문에 설교자는 그 형식을 반영해야 한다는 철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설교 적용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부분의 복음주의진영과 자유주의 진영의 심각한 이단들의 이론은 교리 자체보다 적용에서 문제가 많습니다. 중요한 질문은 ‘본문을 특정한 방식으로 적용할 때, 설교자는 여전히 성경의 권위를 갖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세계와는 전혀 다른 고대 세계의 진리를 성경의 권위라는 이름으로 설득시키려면 반드시 본문과 씨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설교자는 본문을 적용하는 일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이 작업은 필수입니다. 청중들이 적용된 진리를 삶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본문을 적용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하지만 적용에는 율법주의의 위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어머니가 몸이 아픈데 자식들이 부모님을 모시지 않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때 우리는 만약 부모를 진정으로 공경한다면, 부모님이 나이가 들어 아프실 때 집에서 모셔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바로 그 적용(부모님을 집에서 모셔야 함)이 원리(부모님을 공경해야 함)를 지배하게 됩니다. 원리의 적용이 율법주의가 될 때, 적용 자체가 원리를 지배하게 될 때, 우리는 그릇된 길로 접어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적용 방식에는 신학적 위험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청중들에게 전하는 설교내용이 본문에서 추출한 원리와 본문의 상황을 역동성 있고 정확하게 반영하려면, 더 많이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분명, 설교자들은 전에 비해 이 부분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습니다만, 저는(로빈슨 교수) 설교자들이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기보다 청중들에게 죄책감을 심어 주는 방식을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이 본문이 ‘우리가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고 가르쳤는데, 청중들이 이를 실천에 옮기지 않자, 설교자들이 그것을 ‘당신이 해야 한다.’는 의미로 바꿔서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만약 거기에 ‘주께서 이르시기를’이라는 말까지 덧붙이면,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행사할 수 있는 모든 권력을 갖추게 되는 셈입니다.

적용에 관해 또 한 가지 기억할 것은, 목회자가 회중들을 격자로 구분하는 방법이 유용하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격자든지 괜찮겠지만, 한쪽은 베이비붐 세대, 베이비버스터 세대(출생률 격감기에 태어난 세대), Y세대와 같이 연령별 구분을 하고, 다른 한 쪽은 부모와 함께 사는 미혼자, 무자녀 부부, 기혼자, 이혼자와 같은 식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격자구분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격자구분을 만들고 나면, “나는 오늘 내가 전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진리임을 믿는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가족 없이 혼자 생활하는 18세의 젊은 여성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룸메이트와 함께 살면서 직장에 다니는 여성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만약 그 자매가 사무실에 찾아와 ‘목사님, 까다로운 룸메이트랑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혹은 ‘온종일 저만 감시하는 직장상사는 어떻게 대해야하죠?’라고 질문했을 때 이 본문은 과연 그녀에게 답을 제시해 주는가.”에 대해서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설교자는 청중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이처럼 회중들을 구분해 놓으면, 각 개인들 혹은 비슷한 개인을 묶어 놓은 그룹들을 좀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국제제자훈련원의 신간 “능력있는 설교 이렇게 한다!”에 실린 이 새대 최고의 설교자 20인의 조언 가운데 하나인 해돈 로빈슨 교수의 조언(69-94쪽)

7.04.2009

아기 낙타의 질문

하루는 아기 낙타가 엄마 낙타에게 물었다.
"엄마, 왜 나는 이렇게 커다란 발가락이 세 개나 되나요?"
엄마 낙타가 대답했다.
"사막을 건널 때 부드러운 모래 더미 위에서 미끄러지지 말라고 있는 거란다."
"그럼 눈썹은 왜 이렇게 길어요?"
"사막을 건너는 동안 모래가 눈 속에 들어가는 걸 막기 위해서지."
"그럼, 등에 혹은요?"
"그건 건조한 사막을 건널 때 필요한 물을 저장해 두기 위해서란다."
아기 낙타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멋져요, 엄마. 큰 발이 있어서 미끄러지지 않고, 긴 눈썹이 있어서 눈에 모래도 안들어가고, 혹이 있어서 물을 저장해 둘 수 있으니까요. 근데 엄마..."
"응, 아들아?"
"왜 우리는 동물원에 있어요?"

David Jeremiah

하나님이 주신 자원, 이를테면 은사, 건강, 전공, 기술, 시간, 재정, 경험, 관계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주께서 부르신 소명의 자리에서 최대로 활용할 일이다.

배움을 위한 기도

배우게 하소서 -존 베일리-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일을 잘 이용하여
죄의 열매를 거두지 않고
성결의 열매를 거두게 하소서

실망으로 희망을 배우게 하소서
성공으로 감사를 배우게 하소서
불안으로 참음을 배우게 하소서
위험으로 담대함을 배우게 하소서

비난으로 오래 참음을 배우게 하소서
칭찬으로 겸손을 배우게 하소서
기쁨으로 절제를 배우게 하소서
고통으로 인내를 배우게 하소서

6.24.2009

본회퍼와 윤동주

"The disciples are few in number and will always be few."

Dietrich Bonhoeffer in The Cost of Dicipleship. 162.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마다 기도가운데 떠 올리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데 있어 조건 보다는 의미를, 의미 보다는 소명을, 소명 보다는 이타적 희생의 사랑을 더 중요한 우선순위로 두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복음이 상품으로 전락해 버리고 기독교가 이익집단처럼 변질되 버린 오늘의 상황에서, 십자가의 희생적 은혜를 값싼 은혜로 바꿔 시장바닥에 팔아먹는 것이 교회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원수라고 절규하던 본회퍼의 외침이 더욱 힘있고 명징하게 들린다. 오늘날 예수의 제자로서 걸어야 할 그 길은 역사상 그 어느 때 보다 좁고 가는 사람이 적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목회자는 맡겨진 양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 놓는 목자여야 한다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라고 믿는 다면 그렇게 살다가 죽을 일" 이라고 말씀하시는 선배 목사님의 한마디에서 윤동주의 "십자가"를 듣는 행복과 기쁨을 맛 보았다.
. . .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붉은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bk

6.19.2009

회개와 배움

To grasp the meaning of "metanoia" is to grasp the deeper meaning of "learning," for learning also involves a fundamental shift or movement of mind.

Peter Senge, The Fifth Discipline, Doubleday, 2006 revised ed., p. 13

배움은 그 깊고 진정한 의미에 있어 "회개"에 상응한다. 진정한 배움은 단순한 지식습득의 피상성에 머무르지 않고 마음과 생각과 감정과 행동의 통전적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와 왔다"는 요한과 예수의 선포는 새로운 사고방식, 새로운 가치체계, 새로운 관점으로의 인식의 전환을 명령한 것이었다. 실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생각의 틀'에 비판적 성찰을 요청한 후에는 예의 새로운 질서에 대한 원리를 선포하는 discourse강화들이 뒤따르며 이를 바탕으로 실제 삶에서 구체적인 행동의 변화와 교정이 촉구된다.
진정한 배움은 근본적으로 마음의 변화이며 더 나아가 전 인격의 통합으로서 "영혼의 변화"이다. 이런 점에서 탁월한 조직은 계속적인 "회개"를 통해 세상과 개인의 의미있는 발전과 확장을 위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조직이라는 Senge의 통찰이 기업 경영의 영역에서 활발히 논의된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나의 가정, 내가 속한 공동체가 "회개"하는 공동체인가 생각하고 점검하며 진정으로 회개할 일이다.

bk

6.16.2009

받아들임


"나는 받는 법, 감사하다고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인내와 받아들임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얻어야 할 배움입니다. 사랑을 받고, 보호를 받고, 보살핌을 베푸는 대신 보살핌 받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나는 내가 마음의 주위에 큰 돌담을 쌓아놓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설계한 것이지만, 사랑이 들어오는 것도 막았습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 <인생수업> 중에서

6.13.2009

수용과 견딤

'수용'은 매력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소비자 만족'이 중심인 시대에 사람들은 직접 메뉴를 살펴보고 원하는 것을 선택하며, 원하지 않는 것을 거절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나 힘든 상황이 찾아오면 환영하지 않습니다. 억지로 받아들이는 것도 어려운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나 힘든 현실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여기고 수용하는 것은 더욱 낯설고 불편할 뿐입니다.

'견딤'도 매력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빠른 변화, 초고속 인터넷, 퀵 서비스 등으로 원하는 모든 것이 신혹히 제공되는 시대에 기다릴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싫증이 나면 쉽게 버리고 새것으로 바꿉니다. 불만족스러운 사람과의 관계나 상황을 오래 견디지 못합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라는 말씀은 무겁고 힘든 부담일 뿐입니다.

그러나 수용과 견딤의 과정이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는 사람이란 단지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령한 은사로 능력을 행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수용과 견딤을 통해 주님과 함께 걷는 십자가의 길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게 되고 그를 통해 복음과 생명이 전해집니다.

이훈 "영성의 길 9"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롬15:7)
"너희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눅 21:19)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을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 1:2-3)

5.29.2009

상상력을 춤추게 하라

상상력을 춤추게 하라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해 보면서 상상력을 춤추게 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정신신체의학자들은 심리적 원인에서 시작된 질병은 거의 항상 상징기능의 장애와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상징기능의 장애란 자신의 인생을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는 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상징기능의 장애는 현실을 변화시키거나 그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 꿈을 이용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 기 코르노의《마음의 치유》 중에서 -

* 사람이 현실을 떠나 살 수 없습니다.그러나 현실에만 묻히거나 갇혀 있으면 안됩니다.현실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며 새로운 상상력을 춤추게 하고, 그 상상력이 현실이 되는 경험을 자꾸자꾸 해야 합니다.상상력은 영혼이 살아있음을 드러내는 증표입니다.나이가 젊을수록 상상력이 춤을 추어야 영혼이 아름답게 자라납니다.

-고도원 편지중-

5.23.2009

앎은 사건이다

"Knowing-generally and convictionally-is first, foremost, and fundamentally an event."
James E. Loder, Transforming Moment, p.33

앎은 사건이다. 존재와 존재가 만나는 존재가 변화되는 사건이다.

5.19.2009

저주를 통해 도달하는 직업

"Theologians are not made by reading and studying books but by living and dying and being damned."
Martin Luther

신학자들은 서적을 읽고 연구하는 것을 통해 만들어 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살고 또 죽으며 저주받음을 통해 만들어 집니다.
-마틴 루터-

십자가의 신학을 주창한 마틴루터 다운 말이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 그분의 진리에 노출되는 것은 추상적 관념의 사색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삶의 한 복판에서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게 되는" 역설을 온 몸으로 체득하고,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나를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를 쫓아 순교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그러니 이것이 어떻게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하단 말인가? Sola Gracia는 그렇게 죽음과 저주를 기쁨으로 수용하는 자들을 가능하게 하고 또한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만 확증된다. 그러니 신학자라고 함부로 말할 일이 아니다.

bk

5.11.2009

진리는 사랑이다


"참 사랑은 리얼리즘realism이다...인간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한계성을 두려워하지 말고 똑바르게 정직하게 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만 된다...참된 진리를 찾아가는 자가 노력해야 될 것은 자기중심적인 거짓 자기를 부수고 진정한 참자기를 발견해 내는 일이다...진실은 항상 사랑과 함께 있어야 하고 사랑은 항상 진실과 함께 있어야 한다."

강원용 (1917-2006), 중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19.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1b-32) 이 말씀은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진리를 아는 것"은 어차피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진리를 알 수 있는 능력과 의도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성은 참된 진리를 거부하는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 진리를 혐오한다. 참된 진리는 인간의 부패와 죄악을 밝히 드러 내기 때문이다. 성경은 "변하지 않는 영원하며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절대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며 성령을 통해 알려지는 하나님" 이심을 증거한다. 이 전제를 수용하려면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이 믿음을 거부하고 진리의 타자성을 무시하며 진리의 인격성을 멸시한다. 그래서 근대적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절대화 하여 유한하며 제한적인 이성의 두레박으로 망망한 진리의 바다를 재려는 우매함에 빠져 버렸다. 그래서 이러한 과학적 인간들은 진리를 자신의 사고와 이해의 한계라는 철장에 가두어 놓음으로서 고독과 소외, 허무라는 진창속에 스스로를 투신하고 말았다.

또 다른 극단의 부류들은 과학적 인간들의 이성주의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고 신앙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과학제일주의의 맹주인 절대이성을 타도하기 위해 신앙제일주의자들이 선택한 주인은 바로 도그마였다. 그러나 건강한 이성의 사용과 자기반성을 거부한 맹목적이며 자기 중심적인 신앙주의는 절대이성의 왕좌위에 도그마적 신앙을 올려 놓아 경배의 대상을 바꾸었을 뿐, 절대 진리의 무한성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따듯한 인격으로서의 진리를 삶속에 실천하기를 거부하며 자신의 한계와 유한성을 철저히 부인한다는 점에서는 그토록 적대시했던 과학주의와 한 패였다.

참된 "진리를 앎"은 절대타자, 절대진리, 절대자의 존재를 긍정하고 믿음으로 수용하며 이성적 이해의 한계를 알면서도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하려는 신앙을 요구한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를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으로 불렀다. 신앙은 참된 진리에 자신의 이성과 경험과 의지를 내려놓는 겸손한 삶의 태도이며 세상의 모든 것을 진실로 사랑하는 용기있는 행동이다. 그래서 모든 진리는 이러한 삶을 명징하게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에게 귀착된다. 예수는 진리이고 예수는 사랑이다. 그래서 진리는 사랑이며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진리를 아는 유일한 길이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하며 사랑은 리얼리즘이라는 강원용 목사님의 말씀은 이런 점에서 옳다.

bk

5.10.2009

마음이 가난한 자

오늘 다시 최춘선 할아버지를 찾아 뵈었다. "마음이 가난한 자"로 산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정말 천국을 소유하는 행복한 삶일까를 묻고 싶어서였다.
할아버지께서 환한 얼굴로 대답해 주셨다.

"내가 스물 두살 부터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여기까지 살았어요. 그동안 얼마나 불충성, 불순종을 많이 했는지...진짜 죄인중의 괴수인데 하나님의 자비가 한량이 없어서 붙들어 주시니까 날마다 감사와 기쁨으로 승리합니다."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예수가 누구인지 아직도 잘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절대 자비가 필요하다.

5.06.2009

무위

是以聖人處無爲之事,行不言之敎
시이성인처무위지사,행불언지교'

그러기에, 성인은 일을 함에 있어서 꾸미지 아니하며, 말없이 행동으로 가르친다.

노자-도덕경 2장 중

노자에게 있어 "위"는 자연의 부정이다. 자연스러움, 있는 그대로를 거부하는 것이다. 모든 거짓과 꾸밈은 진실을 구렁텅이에 처 넣고 실체를 납치해 버린다. "위"가 판 치는 곳에서 진리는 실종되고 자유는 무저갱 속에 같혀 버린다. 자기의식의 거울마저 뿌옇게 바래버린 차가운 양심은 찬란한 진리의 빛을 피해 어두움의 거리를 헤매이게 된다.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추함을 위장하고 나면 추함이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아름다움을 상실해 버린다. 선하게 보이기 위해 악함을 덮어 버리면 정작 드러나는 것은 선이 아니라 악함을 위장하는 더 깊은 수준의 악이다. 자연스러운 나, 진정한 나를 거부할 때 나는 나를 잊어 버린다. 진정한 나를 인정할 수 없을 때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자유를 상실하게 된다. 선한 척, 좋은 척, 잘 난 척, 예쁜 척, 똑똑한 척, 진실한 척, 척할 줄 모르는 척...
"위"가 부가된 모든 실체는 공동묘지를 떠다니는 혼령처럼 불안과 혼동과 망각과 냉담한 무관심으로 서서히 스스로의 영혼을 파괴한다. 마스크속에 감춰진 영혼은 텅 비어있고 철장에 갖혀진 양심은 바위처럼 단단해 졌으며 뜨거웠던 열정은 축축한 잿더미가 되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출 수가 없고 곡을 해도 슬퍼할 수가 없다. 무엇이 슬픈지, 무엇이 기쁜지를 잊었기 때문이다.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 저주받은 영혼! 화 있을 진저!
아이들의 특징은 꾸밈이 없다는 것이다. "무위" 그것이 아이들의 위대함이다. "내 동생이 없어졌으면 좋겠어!" 라고 소리치는 꼬마의 언어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한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으면 좋겠다던 동생과 진정으로 행복하게 놀 수 있다.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웃고 조금만 힘들어도 울음을 터뜨린다. 누구와도 친구가 되고 또 금방 원수도 되지만 다시 친구가 되는데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아이들은 만들어진 말, 꾸며지고 포장되고 숨겨진 말을 하지 않는다. 아,니 아직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아이들의 행동을 보면 마음도 알 수 있다.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을 살아갈 수 없다는 예수의 말씀은 노자의 깨달음과도 통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무위," 그저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이 선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어린아이와 같음에는 "순수함"과 함께 "의존성"이라는 중요한 가치가 동시에 요구된다. 자연스러움 그 자체는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 자체가 선한 것이 아니며 더더군다나 목적이 될 수도 없다. 무위는 선을 위한 전제이지 선 그 자체가 아니다. 무위는 위장된 악을 폭로하여 선으로 향하게 하는 문을 열 뿐, 선이 아니라는 점에서 노자는 무위를 선으로 동일시함으로 필요한 수단과 과정을 목적 그 자체와 혼동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이기심, 질투, 분노, 빈곤, 조급함, 어리석음, 약함이 자연 스럽게 드러난다고 해서 "선"이 될 수는 없다. 아무리 자연스러워도 악은 악이며 악은 선의 부정이지 선의 전제가 아니다. 노자의 한계의 중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린아이와 같음"은 보호자의 보호와 인도를 겸허히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의존성에서 완성된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처럼 어린아이는 부모의 사랑과 보호와 인도를 통해 성장하고 성숙해 간다. 자신의 본능적 욕구나 환경에 종속되어 악의 부패성과 은폐성을 "무위"라는 허울에 감추려는 강력한 위의 죄성을 용기있게 폭로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되지 않는다. 오직 수치와 모욕으로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의 고통의 이유와 목적을 이해하고 부활의 새벽 미명에 죽음을 이기시고 사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 그의 사랑앞에 존재를 맡기는 결단과 선포가 있을 때에야 가능하다.
bk

5.02.2009

유앙겔리온Euangelion

"복음"을 깊이 이해를 하려면 로마제국을 이해해야 한다. 원래 "Euangelion복음"이라는 단어는 로마제국의 통합을 위해 로마가 추구하던 정치, 군사, 문화의 저변에 깔려있는 가치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이 추구하던 힘의 "유앙겔리온"을 차용해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의 "유앙겔리온"(막 1:1)을 선포하였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나사렛에서 살다가 처형당한 예수가 다시 부활하고 하늘로 올라갔으며 이 세상을 완전하게 회복하기 위해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러한 주장, 즉 한 인간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 살다가 죽고 하늘로 올라갔다가 다시 올 것이라는 이야기들은 1세기를 살았던 로마제국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신화적 이야기가 아니라도 로마의 황제들은 스스로를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죽은 후 다시 하늘로 올라가 세상을 다스리는 쿠리오스, 즉 주Lord 라고 선언했다. 사람들은 시장agora에서 만날 때 마다, "시저가 주님이시다"라고 인사를 나누어야 했다. 정복지의 피식민지들은 역시 시저가 세상의 유일한 주님이심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 주님을 예배해야만 했다. 시저 이외에 다른 대상을 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위험천만한 행동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예수의 부활과 재림에 대한 경험과 믿음은 강력한 로마제국의 체제와 정신문화를 뒤집어 놓았다. 소수의 변두리 사람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이 아름다운 세상의 고통과 절망, 깊은 아픔을 온 몸으로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가난하고 소외당하고 억압당하고 배고프며 상처받아 고통당하는 자들은 예수에게 소망을 걸었다. 예수의 생전에 그들이 가지고 있던 소망은 로마 문화에 바탕을 둔 소망이었다. 강력한 군사력, 정교한 법률을 바탕으로 한 고도의 정치력, 높은 교육과 세련된 문화 예술의 힘으로 로마는 영국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활한 세상을 정복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가 보여준 기적과 이사, 지혜와 용기를 경험하면서 만약 이스라엘이 예수를 중심으로 뭉치기만 한다면 로마의 힘에 대항해 볼 만 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으로 모든 기대와 소망은 산산조각났다. 로마와 대항할 수 있다고 믿었던 "로마적 힘"을 예수가 스스로 거부하고 허무하게 스러진 것이었다. "십자가에서 너를 구원하고 내려와라"고 소리질렀던 사람들의 외침은 "더 강력한 로마적 힘"에 대한 갈망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절규였던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다. 군중은 흩어졌고 예수의 제자들 마저 뿔뿔이 귀향한 터였다.

끝내 예수를 잊지 못했던 것은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진정으로 예수를 사랑했다. "힘"의 그림자 조차 사라저 버린 싸늘한 시체라도 쓰다듬지 않고 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그들은 예수를 사랑했다. 안식일이 지난 첫 새벽 미명에 그 여자들은 전혀 새로운 예수를 만났다. 새로운 예수는 이전의 예수가 아니었다. 그는 더이상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여전히 먹고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만질 수 있었지만 그는 감각의 세계를 초월하여 존재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증거한 모든 증거가 참된 진리임이 드러났으며 따라서 그가 진정한 인간이며 동시에 진정한 "신"이라는 사실이 확증되었다.
도대체 전능한 하나님이 연약한 인간들에게 무슨 볼일이 있단 말인가! 여전히 이스라엘의 "나라"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 (행1:3). 예수는 이 온 우주가 하나님의 나라이며 이미 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회복되기 시작되었음을 경험적으로 증거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선포하였다. 전혀 새로운 나라,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 하나님의 영이 주도하는 나라, 그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 우리에게 시작되었다! 이것이아니면 무엇이 "유앙겔리온"이겠는가?

예수를 경험한 증인들은 이 세상의 회복이 정치권력이나 군사적 힘, 조직화된 법률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온 몸으로, 삶으로 증언하였다. 로마인들은 조간 신문이나 텔레비젼에서 들려오는 로마의 번영, 이를 테면 영토의 확장이나 군사력의 증강, 또는 피식민자들이 제공하는 특산물의 유입등을 "유앙겔리온" 좋은 소식으로 생각하고 환영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증인들은 그로마식 유앙겔리온에 대항해 전혀 다른 차원의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당신을 위해 나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나셔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주린 자들에게 기름진 잔치가 배설되었다. 수치로 그늘진 자들에게 긍지와 자부심이 생겼다. 노예에게는 해방이 선포되었으며 감옥에 수감되었던 자들에게는 사면선언이 내려졌다. 공동체에서 따돌림을 당했던 외톨이들에게는 저명한 친구들이 생겼다. 죄책감과 열등감에 괴로워 하던 사람들에게 인정과 격려의 박수와 환호가 주어졌다. 안정감과 자신감이 솟아 올랐다. 비난과 정죄로 오염된 언어에 칭찬과 감사의 샘이 터졌다. 가난한 자들과 부요한 자들이 한 상에서 즐겁게 애찬을 나눴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후투와 투치가, 영국인과 프랑스인이, 일본인과 한국인이, 북미인디안과 백인이, 미국인과 이라크인이, 독일인과 폴란드인이, 세르비아인들과 알바니아인들이, 인도네시아 인들과 동티모르인이, 수십년, 수백년을 미움과 혐오로 원수가 되어버린 도저히 상종할 수 없는 사람들이 서로 형제와 자매가 되었다.
로마인들은 이러한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들의 대답은 "유앙겔리온"이었다. 로마인들은 노예와 주인이, 귀족과 하층민이, 부자와 거지가, 고매한 학자와 불학무식한 자가, 여자와 남자가, 유대인과 헬라인이 도덕적으로 불량한 자들과 인격적으로 훈련된 자들이 언어와 인종과 빈부와 학식과 정치적 이념과 삶의 방식과 문화를 뛰어 넘어 한 공동체를 이루어 유앙겔리온을 증거하는 이 특수한 집단의 사람들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혼동스러웠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할 수 없이 새로운 "유앙겔리온"을 증거하는 이 사람들을 "크리스티아노스Kristianos-그리스도인들" 이라고 불렀다 (행 11:27).

상처받고, 외면당하고, 죄 짓고, 더럽고, 교활하며, 폭력적이고, 사기치며, 거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신 예수는 나를 변화시켜 이 복음의 경험자로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나눌 것을 명령하신다. 나누면 나눌 수록, 경험하면 경험할 수록 더 풍성하게 채워질 것이다. 복음을 예수 믿고 교회 출석하고 죽어 천당가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해변 유양지에서 유람선을 타고 즐기는 휴가를 생각하며 "놀러 가자"라고 말 한 아버지의 "놀이"를 골목에서 코흘리게들과 딱지치기 하는 수준의 놀이로 심각하게 오해한 아이들의 생각과 같을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 아버지의 것이며 이 사실위에 (안에, 통해) 살아간다는 것이 유앙겔리온이다.
b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