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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2009

수용과 견딤

'수용'은 매력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소비자 만족'이 중심인 시대에 사람들은 직접 메뉴를 살펴보고 원하는 것을 선택하며, 원하지 않는 것을 거절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나 힘든 상황이 찾아오면 환영하지 않습니다. 억지로 받아들이는 것도 어려운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나 힘든 현실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여기고 수용하는 것은 더욱 낯설고 불편할 뿐입니다.

'견딤'도 매력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빠른 변화, 초고속 인터넷, 퀵 서비스 등으로 원하는 모든 것이 신혹히 제공되는 시대에 기다릴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싫증이 나면 쉽게 버리고 새것으로 바꿉니다. 불만족스러운 사람과의 관계나 상황을 오래 견디지 못합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라는 말씀은 무겁고 힘든 부담일 뿐입니다.

그러나 수용과 견딤의 과정이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는 사람이란 단지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령한 은사로 능력을 행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수용과 견딤을 통해 주님과 함께 걷는 십자가의 길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게 되고 그를 통해 복음과 생명이 전해집니다.

이훈 "영성의 길 9"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롬15:7)
"너희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눅 21:19)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을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 1:2-3)

5.29.2009

상상력을 춤추게 하라

상상력을 춤추게 하라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해 보면서 상상력을 춤추게 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정신신체의학자들은 심리적 원인에서 시작된 질병은 거의 항상 상징기능의 장애와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상징기능의 장애란 자신의 인생을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는 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상징기능의 장애는 현실을 변화시키거나 그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 꿈을 이용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 기 코르노의《마음의 치유》 중에서 -

* 사람이 현실을 떠나 살 수 없습니다.그러나 현실에만 묻히거나 갇혀 있으면 안됩니다.현실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며 새로운 상상력을 춤추게 하고, 그 상상력이 현실이 되는 경험을 자꾸자꾸 해야 합니다.상상력은 영혼이 살아있음을 드러내는 증표입니다.나이가 젊을수록 상상력이 춤을 추어야 영혼이 아름답게 자라납니다.

-고도원 편지중-

5.23.2009

앎은 사건이다

"Knowing-generally and convictionally-is first, foremost, and fundamentally an event."
James E. Loder, Transforming Moment, p.33

앎은 사건이다. 존재와 존재가 만나는 존재가 변화되는 사건이다.

5.19.2009

저주를 통해 도달하는 직업

"Theologians are not made by reading and studying books but by living and dying and being damned."
Martin Luther

신학자들은 서적을 읽고 연구하는 것을 통해 만들어 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살고 또 죽으며 저주받음을 통해 만들어 집니다.
-마틴 루터-

십자가의 신학을 주창한 마틴루터 다운 말이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 그분의 진리에 노출되는 것은 추상적 관념의 사색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삶의 한 복판에서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게 되는" 역설을 온 몸으로 체득하고,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나를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를 쫓아 순교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그러니 이것이 어떻게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하단 말인가? Sola Gracia는 그렇게 죽음과 저주를 기쁨으로 수용하는 자들을 가능하게 하고 또한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만 확증된다. 그러니 신학자라고 함부로 말할 일이 아니다.

bk

5.11.2009

진리는 사랑이다


"참 사랑은 리얼리즘realism이다...인간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한계성을 두려워하지 말고 똑바르게 정직하게 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만 된다...참된 진리를 찾아가는 자가 노력해야 될 것은 자기중심적인 거짓 자기를 부수고 진정한 참자기를 발견해 내는 일이다...진실은 항상 사랑과 함께 있어야 하고 사랑은 항상 진실과 함께 있어야 한다."

강원용 (1917-2006), 중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19.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1b-32) 이 말씀은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진리를 아는 것"은 어차피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진리를 알 수 있는 능력과 의도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성은 참된 진리를 거부하는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 진리를 혐오한다. 참된 진리는 인간의 부패와 죄악을 밝히 드러 내기 때문이다. 성경은 "변하지 않는 영원하며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절대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며 성령을 통해 알려지는 하나님" 이심을 증거한다. 이 전제를 수용하려면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이 믿음을 거부하고 진리의 타자성을 무시하며 진리의 인격성을 멸시한다. 그래서 근대적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절대화 하여 유한하며 제한적인 이성의 두레박으로 망망한 진리의 바다를 재려는 우매함에 빠져 버렸다. 그래서 이러한 과학적 인간들은 진리를 자신의 사고와 이해의 한계라는 철장에 가두어 놓음으로서 고독과 소외, 허무라는 진창속에 스스로를 투신하고 말았다.

또 다른 극단의 부류들은 과학적 인간들의 이성주의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고 신앙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과학제일주의의 맹주인 절대이성을 타도하기 위해 신앙제일주의자들이 선택한 주인은 바로 도그마였다. 그러나 건강한 이성의 사용과 자기반성을 거부한 맹목적이며 자기 중심적인 신앙주의는 절대이성의 왕좌위에 도그마적 신앙을 올려 놓아 경배의 대상을 바꾸었을 뿐, 절대 진리의 무한성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따듯한 인격으로서의 진리를 삶속에 실천하기를 거부하며 자신의 한계와 유한성을 철저히 부인한다는 점에서는 그토록 적대시했던 과학주의와 한 패였다.

참된 "진리를 앎"은 절대타자, 절대진리, 절대자의 존재를 긍정하고 믿음으로 수용하며 이성적 이해의 한계를 알면서도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하려는 신앙을 요구한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를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으로 불렀다. 신앙은 참된 진리에 자신의 이성과 경험과 의지를 내려놓는 겸손한 삶의 태도이며 세상의 모든 것을 진실로 사랑하는 용기있는 행동이다. 그래서 모든 진리는 이러한 삶을 명징하게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에게 귀착된다. 예수는 진리이고 예수는 사랑이다. 그래서 진리는 사랑이며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진리를 아는 유일한 길이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하며 사랑은 리얼리즘이라는 강원용 목사님의 말씀은 이런 점에서 옳다.

bk

5.10.2009

마음이 가난한 자

오늘 다시 최춘선 할아버지를 찾아 뵈었다. "마음이 가난한 자"로 산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정말 천국을 소유하는 행복한 삶일까를 묻고 싶어서였다.
할아버지께서 환한 얼굴로 대답해 주셨다.

"내가 스물 두살 부터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여기까지 살았어요. 그동안 얼마나 불충성, 불순종을 많이 했는지...진짜 죄인중의 괴수인데 하나님의 자비가 한량이 없어서 붙들어 주시니까 날마다 감사와 기쁨으로 승리합니다."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예수가 누구인지 아직도 잘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절대 자비가 필요하다.

5.06.2009

무위

是以聖人處無爲之事,行不言之敎
시이성인처무위지사,행불언지교'

그러기에, 성인은 일을 함에 있어서 꾸미지 아니하며, 말없이 행동으로 가르친다.

노자-도덕경 2장 중

노자에게 있어 "위"는 자연의 부정이다. 자연스러움, 있는 그대로를 거부하는 것이다. 모든 거짓과 꾸밈은 진실을 구렁텅이에 처 넣고 실체를 납치해 버린다. "위"가 판 치는 곳에서 진리는 실종되고 자유는 무저갱 속에 같혀 버린다. 자기의식의 거울마저 뿌옇게 바래버린 차가운 양심은 찬란한 진리의 빛을 피해 어두움의 거리를 헤매이게 된다.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추함을 위장하고 나면 추함이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아름다움을 상실해 버린다. 선하게 보이기 위해 악함을 덮어 버리면 정작 드러나는 것은 선이 아니라 악함을 위장하는 더 깊은 수준의 악이다. 자연스러운 나, 진정한 나를 거부할 때 나는 나를 잊어 버린다. 진정한 나를 인정할 수 없을 때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자유를 상실하게 된다. 선한 척, 좋은 척, 잘 난 척, 예쁜 척, 똑똑한 척, 진실한 척, 척할 줄 모르는 척...
"위"가 부가된 모든 실체는 공동묘지를 떠다니는 혼령처럼 불안과 혼동과 망각과 냉담한 무관심으로 서서히 스스로의 영혼을 파괴한다. 마스크속에 감춰진 영혼은 텅 비어있고 철장에 갖혀진 양심은 바위처럼 단단해 졌으며 뜨거웠던 열정은 축축한 잿더미가 되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출 수가 없고 곡을 해도 슬퍼할 수가 없다. 무엇이 슬픈지, 무엇이 기쁜지를 잊었기 때문이다.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 저주받은 영혼! 화 있을 진저!
아이들의 특징은 꾸밈이 없다는 것이다. "무위" 그것이 아이들의 위대함이다. "내 동생이 없어졌으면 좋겠어!" 라고 소리치는 꼬마의 언어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한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으면 좋겠다던 동생과 진정으로 행복하게 놀 수 있다.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웃고 조금만 힘들어도 울음을 터뜨린다. 누구와도 친구가 되고 또 금방 원수도 되지만 다시 친구가 되는데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아이들은 만들어진 말, 꾸며지고 포장되고 숨겨진 말을 하지 않는다. 아,니 아직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아이들의 행동을 보면 마음도 알 수 있다.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을 살아갈 수 없다는 예수의 말씀은 노자의 깨달음과도 통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무위," 그저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이 선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어린아이와 같음에는 "순수함"과 함께 "의존성"이라는 중요한 가치가 동시에 요구된다. 자연스러움 그 자체는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 자체가 선한 것이 아니며 더더군다나 목적이 될 수도 없다. 무위는 선을 위한 전제이지 선 그 자체가 아니다. 무위는 위장된 악을 폭로하여 선으로 향하게 하는 문을 열 뿐, 선이 아니라는 점에서 노자는 무위를 선으로 동일시함으로 필요한 수단과 과정을 목적 그 자체와 혼동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이기심, 질투, 분노, 빈곤, 조급함, 어리석음, 약함이 자연 스럽게 드러난다고 해서 "선"이 될 수는 없다. 아무리 자연스러워도 악은 악이며 악은 선의 부정이지 선의 전제가 아니다. 노자의 한계의 중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린아이와 같음"은 보호자의 보호와 인도를 겸허히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의존성에서 완성된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처럼 어린아이는 부모의 사랑과 보호와 인도를 통해 성장하고 성숙해 간다. 자신의 본능적 욕구나 환경에 종속되어 악의 부패성과 은폐성을 "무위"라는 허울에 감추려는 강력한 위의 죄성을 용기있게 폭로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되지 않는다. 오직 수치와 모욕으로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의 고통의 이유와 목적을 이해하고 부활의 새벽 미명에 죽음을 이기시고 사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 그의 사랑앞에 존재를 맡기는 결단과 선포가 있을 때에야 가능하다.
bk

5.02.2009

유앙겔리온Euangelion

"복음"을 깊이 이해를 하려면 로마제국을 이해해야 한다. 원래 "Euangelion복음"이라는 단어는 로마제국의 통합을 위해 로마가 추구하던 정치, 군사, 문화의 저변에 깔려있는 가치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이 추구하던 힘의 "유앙겔리온"을 차용해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의 "유앙겔리온"(막 1:1)을 선포하였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나사렛에서 살다가 처형당한 예수가 다시 부활하고 하늘로 올라갔으며 이 세상을 완전하게 회복하기 위해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러한 주장, 즉 한 인간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 살다가 죽고 하늘로 올라갔다가 다시 올 것이라는 이야기들은 1세기를 살았던 로마제국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신화적 이야기가 아니라도 로마의 황제들은 스스로를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죽은 후 다시 하늘로 올라가 세상을 다스리는 쿠리오스, 즉 주Lord 라고 선언했다. 사람들은 시장agora에서 만날 때 마다, "시저가 주님이시다"라고 인사를 나누어야 했다. 정복지의 피식민지들은 역시 시저가 세상의 유일한 주님이심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 주님을 예배해야만 했다. 시저 이외에 다른 대상을 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위험천만한 행동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예수의 부활과 재림에 대한 경험과 믿음은 강력한 로마제국의 체제와 정신문화를 뒤집어 놓았다. 소수의 변두리 사람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이 아름다운 세상의 고통과 절망, 깊은 아픔을 온 몸으로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가난하고 소외당하고 억압당하고 배고프며 상처받아 고통당하는 자들은 예수에게 소망을 걸었다. 예수의 생전에 그들이 가지고 있던 소망은 로마 문화에 바탕을 둔 소망이었다. 강력한 군사력, 정교한 법률을 바탕으로 한 고도의 정치력, 높은 교육과 세련된 문화 예술의 힘으로 로마는 영국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활한 세상을 정복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가 보여준 기적과 이사, 지혜와 용기를 경험하면서 만약 이스라엘이 예수를 중심으로 뭉치기만 한다면 로마의 힘에 대항해 볼 만 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으로 모든 기대와 소망은 산산조각났다. 로마와 대항할 수 있다고 믿었던 "로마적 힘"을 예수가 스스로 거부하고 허무하게 스러진 것이었다. "십자가에서 너를 구원하고 내려와라"고 소리질렀던 사람들의 외침은 "더 강력한 로마적 힘"에 대한 갈망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절규였던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다. 군중은 흩어졌고 예수의 제자들 마저 뿔뿔이 귀향한 터였다.

끝내 예수를 잊지 못했던 것은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진정으로 예수를 사랑했다. "힘"의 그림자 조차 사라저 버린 싸늘한 시체라도 쓰다듬지 않고 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그들은 예수를 사랑했다. 안식일이 지난 첫 새벽 미명에 그 여자들은 전혀 새로운 예수를 만났다. 새로운 예수는 이전의 예수가 아니었다. 그는 더이상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여전히 먹고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만질 수 있었지만 그는 감각의 세계를 초월하여 존재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증거한 모든 증거가 참된 진리임이 드러났으며 따라서 그가 진정한 인간이며 동시에 진정한 "신"이라는 사실이 확증되었다.
도대체 전능한 하나님이 연약한 인간들에게 무슨 볼일이 있단 말인가! 여전히 이스라엘의 "나라"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 (행1:3). 예수는 이 온 우주가 하나님의 나라이며 이미 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회복되기 시작되었음을 경험적으로 증거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선포하였다. 전혀 새로운 나라,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 하나님의 영이 주도하는 나라, 그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 우리에게 시작되었다! 이것이아니면 무엇이 "유앙겔리온"이겠는가?

예수를 경험한 증인들은 이 세상의 회복이 정치권력이나 군사적 힘, 조직화된 법률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온 몸으로, 삶으로 증언하였다. 로마인들은 조간 신문이나 텔레비젼에서 들려오는 로마의 번영, 이를 테면 영토의 확장이나 군사력의 증강, 또는 피식민자들이 제공하는 특산물의 유입등을 "유앙겔리온" 좋은 소식으로 생각하고 환영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증인들은 그로마식 유앙겔리온에 대항해 전혀 다른 차원의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당신을 위해 나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나셔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주린 자들에게 기름진 잔치가 배설되었다. 수치로 그늘진 자들에게 긍지와 자부심이 생겼다. 노예에게는 해방이 선포되었으며 감옥에 수감되었던 자들에게는 사면선언이 내려졌다. 공동체에서 따돌림을 당했던 외톨이들에게는 저명한 친구들이 생겼다. 죄책감과 열등감에 괴로워 하던 사람들에게 인정과 격려의 박수와 환호가 주어졌다. 안정감과 자신감이 솟아 올랐다. 비난과 정죄로 오염된 언어에 칭찬과 감사의 샘이 터졌다. 가난한 자들과 부요한 자들이 한 상에서 즐겁게 애찬을 나눴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후투와 투치가, 영국인과 프랑스인이, 일본인과 한국인이, 북미인디안과 백인이, 미국인과 이라크인이, 독일인과 폴란드인이, 세르비아인들과 알바니아인들이, 인도네시아 인들과 동티모르인이, 수십년, 수백년을 미움과 혐오로 원수가 되어버린 도저히 상종할 수 없는 사람들이 서로 형제와 자매가 되었다.
로마인들은 이러한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들의 대답은 "유앙겔리온"이었다. 로마인들은 노예와 주인이, 귀족과 하층민이, 부자와 거지가, 고매한 학자와 불학무식한 자가, 여자와 남자가, 유대인과 헬라인이 도덕적으로 불량한 자들과 인격적으로 훈련된 자들이 언어와 인종과 빈부와 학식과 정치적 이념과 삶의 방식과 문화를 뛰어 넘어 한 공동체를 이루어 유앙겔리온을 증거하는 이 특수한 집단의 사람들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혼동스러웠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할 수 없이 새로운 "유앙겔리온"을 증거하는 이 사람들을 "크리스티아노스Kristianos-그리스도인들" 이라고 불렀다 (행 11:27).

상처받고, 외면당하고, 죄 짓고, 더럽고, 교활하며, 폭력적이고, 사기치며, 거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신 예수는 나를 변화시켜 이 복음의 경험자로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나눌 것을 명령하신다. 나누면 나눌 수록, 경험하면 경험할 수록 더 풍성하게 채워질 것이다. 복음을 예수 믿고 교회 출석하고 죽어 천당가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해변 유양지에서 유람선을 타고 즐기는 휴가를 생각하며 "놀러 가자"라고 말 한 아버지의 "놀이"를 골목에서 코흘리게들과 딱지치기 하는 수준의 놀이로 심각하게 오해한 아이들의 생각과 같을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 아버지의 것이며 이 사실위에 (안에, 통해) 살아간다는 것이 유앙겔리온이다.
bk

4.14.2009

"그 신성한 덮개" -종교 사회학적 이론의 요소들

Peter Berger (1929-)
피터 버거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미국 사회학자이며 루터파 신학자이다. 토마스 루크만Thomas Luckmann과 공저한 "실체의 사회적 구성" The Social Construction of Reality: A Treatise in the Sociology of Knowledge (New York, 1966) 이라는 책으로 종교사회학 분야에 의미있는 공헌을 하였다.

4.13.2009

샬롬

악한 사람은 성난 바다처럼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 그 파도가 쓰레기와 진흙을 쉼없이 쳐올릴 뿐이다. "악한 사람에게는 평화가 없다." 내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사야 57:20-21

하나님을 떠나있는 증거는 너무나 분명하여 부인할 수 없다. 양심에게 물으면 된다. "평안이 있는가?" 안식과 쉼, 마음의 여유와 평강, 넉넉함과 푸근함. 웃음과 감사가 넘쳐 나는가? 행복한가?
빛이 없는 곳에 어두움이 지배하듯,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희소할 때 샬롬은 자취를 감춘다. 지금 여기에 하나님의 샬롬이 있는가?

4.11.2009

막스 베버


Max Weber (1864-1920)
독일 에르푸르트에서 출생해 1897년부터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가르쳤다.

베버는 맑스Karl Marx와 동시대 인물이나 맑스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수정하여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였다.
베버가 시도한 사회학적 탐구의 특징은 사회를 구조로 파악하고 사회를 조직하는 여러 구성요소들의 복잡한 인과관계를 탐구하는 기존의 실재론적 접근을 비판하였다는 점이다. 베버는 사회학이라는 학문적 시도가 사회에서 실재로 벌어지고 있는 것을 탐구하는 것이기 보다는 실재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어떻게 사회적 의미가 부여되는 지를 연구하는 "사회적 행위social action "에 대한 연구라고 보았다. 따라서 베버에게는 구조 속에서 움직이면서도 역동적으로 구조를 변화시키는 사회적 행위자들이 사회학에서의 탐구 대상이며, 사회적 행위자들의 행동양식 이면에서 행위자들의 행위에 의미를 구조화시키는 유형들을 사회-역사적 맥락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베버는 사회적 행위자들의 행동을 그 동기에 따라 4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1) Instrumental Social Action: 목적지향적인 행동. 기대하는 결과를 이루기 위해 취하는 행동으로 가장 활발한 사회적 행동이다.
2) Value oriented social actions: 가치지향적인 행동. 그 결과에 상관 없이 가치와 신념 때문에 취하는 행동이다.
3) Affectual Social Action: 가치나 목적을 고려하지 않은 감정적인 행위이다.
4) Traditional Social Action: 전해져 내려온 습관과 전통에 따른 전통적 행위.
From "Ideal Types" from Economy and Society: An Outline of Interpretive Socilogy by Max Weber, 1978
베버는 모든 사회적 행동들은 중첩되고 복합적이라고 보았고, 사람들의 사회적 행동들의 동기는 무엇이며 그 사회적 행동들이 어떻게 종교와 사회를 구성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사회적 행동을 유발하는 동기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무엇이 동기/의미를 만들어 내는지를 파악하고자 했다. 이러한 생각은 나중에 피터 버거와 조지 미드, 그리고 클리포드 기어츠의 구성주의 사회학파 입장의 뿌리가 된다.

4.07.2009

타당성 구조

타당성 구조plausiblility structure란 특정한 사회 안에서 더 타당하게 간주되는 신념이나 실천이 사회구조적으로 형성되는 것을 말한다. -Peter Berger-

plausibility structure

In Berger’s sense of the term, “plausibility structure”, every social institution has a specific structure and its structure works properly.
All parts are in the proper place, they have own function, they work together and keep the structure as a system alive. One structure, or you can read it one social institution may be is not plausible for some observers but it is not important. They are just observes. The mean point is that the structure is plausible for participants or, say, players. Top example is religion. Unbelievers think that religion and faith, especially in the modern world is completely nonsense and useless particularly when they confront whit unanswered questions or contradictory parts of a religion.
However, many religions continue to exist even in era of modernity.
The problem of “plausibility structure” is not the problem of observer and player. The problem is in fact the problem of player.
In the era of modernity and because of the plurality of institutions, roles and status, every social actor has in his everyday life many shifting between different roles in different institutions.
Every institution has own plausibility, and it is very possible that plausibility of one structure is partly or completely implausible from perspective of other plausibility structures.
In this field, a player confuses that where is the goal.
Contradiction between logic of different structures makes the play very difficult for contemporary man.
This is the problem of religion in the modern world and countries that are undergoing modernization: contradiction between plausibility of religious structure and plausibility of scientific structure.

존재 이유와 존재 양식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점은 우리가 교회의 존재 이유와 존재양식을 혼동하는 것입니다...예배와 선교 자체가 교육적인 것이 되어야 하고, 교회의 모든 영역이 교육적 의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구원의 주체도, 매개도 아닙니다... 교회는 화해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은준관-

초기 웨스터호프John Westerhoff의 공동체적 접근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그는 90년대 이후 개신교회의 양적 정체와 사회적 신임 상실에 대한 원인을 웨스터호프의 이론에서 찾으며 신앙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형성되어 지는 것이며 공동체의 관계를 통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다는 Westerhoff의 주장을 한국적 상황에 접목시키려 애쓰고 있다.

이런 점에서 100여년 전 스미스Shelton Smith의 비판은 예언자적이다. 역사는 주일학교를 통해 교회 공동체에 부흥이 일어났다는 것을 한번도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 우리의 미래는 아이들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결정한다. 그래서 진정한 기독교 교육은 구속적 학습공동체의 존재양식을 유지해야만 한다는 주장이 기능적 측면에서도 적합성을 가진다는 나의 생각은 더욱 공고해 진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교회의 존재 이유가 하나님 나라의 구속적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 16, 28; 요 17, 엡1, 4).
bk

4.06.2009

저 멀리서

저 멀리서
그저 얼굴만
살짝 바라볼수만 있어도
마음 설레는 사람

저 멀리서
환하게 웃는 미소
살짝 들리기만 하여도
가슴 들뜨는 사람

저 멀리서
누군가와 재잘재잘
나없이도 행복한 것만 같아
머리 멍해지는 그런 사람

4.02.2009

메뚜기도 한 철

우리집 가훈(?) 중 하나는 "메뚜기도 한 철"이다.
아이들에게 세상 만사는 사건들의 역동적 "움직임"으로 엮여져 있으며
거기에는 의미있는 시간으로써의 "때,"
즉 "카이로스"가 서로 연결 되어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이 가르침이 주는 여러 유익 중 하나를 잘 설명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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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스라엘의 다윗 왕이 어느날 궁중의 세공장을 불러 자신을 기리는 아름다운 반지를 하나 만들라고 지시하였는데,

“반지에는 내가 큰 승리를 거둬 기쁨을 억제하지 못할 때
스스로를 자제할 수 있고,
반면 큰 절망에 빠졌을 때 좌절하지 않고 용기를 얻을 수있는
글귀를 새겨넣도록 해라”라고 주문하였다.

반지를 만들어놓고도 적합한 글귀가 생각나지 않아 며칠을 끙끙대던 세공장은
지혜롭기로 소문난 솔로몬 왕자를 찾아갔다.
세공장의 고민을 들은 솔로몬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렇게 적어라..."



'이 또한 곧 지나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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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는 이렇게 적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음유적으로 표현했다.
"메뚜기도 한 철이여(이당께)!"

순수한 기도

하나님, 내가 무얼 원하는지
다 아시는데왜 기도를 해야 하나요?
그래도 하나님이좋아하신다면 기도할게요.
- 수 -

사랑하는 하나님,오른쪽 뺨을 맞으면왼쪽 뺨을 대라는 건 알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은여동생이 눈을 찌르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 사랑을 담아서 데레사 ㅡ

하나님 하나님왜 밤만 되면 해를 숨기시나요?
가장 필요할 때인데 말이에요.
- 바바라 -

하나님, 하나님은천사들에게 일을 전부 시키시나요?
우리 엄마는우리들이 엄마의 천사래요.
그래서 우리들한테 심부름을 다 시키나봐요.
- 사랑을 담아서 마리아 -

하나님, 지난 주 뉴욕에 갔을 때,성 패트릭 성당을 보았어요.
하나님은 아주 으리으리한 집에서 사시던데요.
- 프랭크로부터 ㅡ

하나님,착한 사람은 빨리 죽는다면서요?
엄마가 말하는 걸 들었어요.
저는요,항상 착하지는 않아요.
-미셸-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주일학교에서 배웠어요.
그런데 쉬는 날엔누가 그 일들을 하나요?
- 제인 ㅡ

책에서 보니까요,
토마스 에디슨이 전깃불을 만들었대요.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알고 있었는데요.
- 도나 ㅡ

나는 조지 워싱턴처럼
절대 거짓말을 하지않으려고 결심했는데,
가끔씩 까먹어요.
- 랄프ㅡ

하나님, 남동생이 태어나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갖고 싶다고기도한 건
강아지예요.
- 죠이스 -

하나님, 사람을 죽게 하고
또 사람을 만드는 대신,
지금 있는 사람을그대로 놔두는 건어떻겠어요?
- 제인 -

인생공식(?)

*LOVE*
사랑
Smart man + smart woman = romance
똑똑한남자 + 똑똑한여자 = 로맨스
Smart man + dumb woman = affair
똑똑한남자 + 멍청한여자 = 바람
Dumb man + smart woman = marriage
멍청한남자 + 똑똑한여자 = 결혼
Dumb man + dumb woman = pregnancy
멍청한남자 + 멍청한여자 = 임신

*OFFICE ARITHMETIC*
일에관한 수학공식
Smart boss + smart employee = profit
똑똑한 상사 + 똑똑한 부하직원 = 이윤..흑자!
Smart boss + dumb employee = production
똑똑한 상사 + 멍청한 부하직원 = 생산!
Dumb boss + smart employee = promotion
멍청한 상사 + 똑똑한 부하직원 = 진급!
Dumb boss + dumb employee = overtime
멍청한 상사 + 멍청한 부하직원 = 연장근무!

*SHOPPING MATH *
쇼핑에 관한 공식
A man will pay $2 for a $1 item he needs.
남자는 꼭 필요한 1달러짜리 물건을 2달러에 사온다.
A woman will pay $1 for a $2 item that she doesn't need.
여자는 전혀 필효하지 않은 2달러짜리 물건을 1달러에 사온다.

*GENERAL EQUATIONS & STATISTICS*
일반방정식과 통계
A woman worries about the future until she gets a husband.
여자는 결혼할때까지만 미래에 대해 걱정한다.
A man never worries about the future until he gets a wife.
남자는 전혀 걱정없이 살다가 결혼하고나서 걱정이 생긴다.
A successful man is one who makes more money than his wife can spend.
성공한 남자란 마누라가 쓰는 돈보다 많이 버는 사람이다
A successful woman is one who can find such a man.
성공한 여자는 그런 남자를 만나는 것이다.

*HAPPINESS *
행복
To be happy with a man, you must understand him a lot and love him a little.
남자와 행복하게 살려면 반드시 최대한 많이 그남자를 이해하려 노력해야하고 사랑은 쪼금만 해라..
To be happy with a woman, you must love her a lot and not try to understand her at all.
여자와 행복하게 살려면 반드시 그녀를 아주 많이 사랑하되 절대 그녀를 이해하려해선 안된다..

*LONGEVITY*
수명
Married men live longer than single men do, but married men are a lot more willing to die.
결혼한 남자는 평생혼자산 남자보다 수명이 길지만 결혼한 남자는 죽고싶어하는 사람이 많다.

*PROPENSITY TO CHANGE*
변화성향
A woman marries a man expecting he will change, but he doesn't.
여자는 결혼후 남자가 변하길 바라지만 남자는 변하지 않는다.
A man marries a woman expecting that she won't change, and she does.
남자는 결혼해도 여자가 변하지 않길 바라지만 여자는 변한다

*DISCUSSION TECHNIQUE *
대화기술
A woman has the last word in any argument.!
여자의 말다툼의 끝에는 항상 결론이 있다
Anything a man says after that is the beginning of a new argument.
남자의 말다툼의 끝에는 다른 말다툼의 시작이 따라온다.

3.31.2009

용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신의 죄를 보고 두려워 떨어 본 일이 있는 사람은 형제의 어떤 무서운 죄에도 놀라지 않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신도들의 공동생활, 152

내 인생은 십자수

My Life
- Anonymous

My life is but a weaving, between my God and me,
I do not choose the colors, He worketh steadily.

Of times He weave the sorrow, and I in foolish pride,
Forget He sees the upper, and I the underside.

Not till the loom is silent, and shuttles cease to fly,
Will God unroll the canvas and explain the reason why.

The dark threads are as needful in the skillful weaver’s hand,
As the threads of gold and silver in the pattern He has planned.


내 인생

내 인생은
하나님과 나, 둘이서 꾸며가는 십자수라네
나 아무런 색상도 고르지 못할 때
그 분의 손길은 여전히 바쁘다오

때론 칙칙한 실 꿰어가는 그 분을 보며
내 눈가에
불만이 차 오른다네
그 분의 시선 머무는 곳을 벌써 잊었기 때문이라오

꿰메고 자르고 잇대어 옹쳐 매고
머지 않아 바지런한 두 손을 멈춘다네
그림 펼쳐들고 그 분이 친히 설명하신다오
그 때는 왜 그렇게 하셨는지

나 원치 않던 어두운 실들도
청실 홍실만큼이나 소중하다네
내 인생 가꾸시는 그 분의 계획 속에
이 모든 것 어우러짐을 그제서야 보게 된다오…

3.29.2009

동양과 서양

동양과 서양의 문화차이는 의사소통에서도 큰 차이를 만들어 낸다.
메세지의 내용 뿐만 아니라 의사전달의 통로인 언어의 문장구조와 구문syntax도 큰 차이를 보인다. 다음 문장들을 관찰하면서 차이점을 찾아보자. 그리고 왜 그런 차이들이 나타나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자.

동: 접시가 깨졌네
서: I broke the plate.

동: 버스가 벌서 떠나 버렸어요.
서: I missed the bus.

동: 문제가 있어. 잘 되겠지만 말이야.
서: I have a problem. Let's talk about it.

동: 잔디깎기가 고장났네. 고쳐야지.
서: I forgot to check the oil in the lawnmower and burned out the engine.

동: 라디오가 없어졌어.
서: My radio was stolen.

동: 사고가 났어.
서: I was in an accident.

차이점들:


차이들의 원인들:

3.27.2009

문화의 정의들

Culture is "the collective programming of the mind that distinguishes the members of one group or category of people from others." Hofstede, Geert. Culture and Organization. 2005. p.5


호프스테드는 문화를 "정신의 프로그램" 또는 "정신의 소프트웨어"라고 정의한다. 인간의 본성과 개성의 사이에서 문화는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습득되는 것이며 한 개인을 넘어 특정 집단이 공유하는 것이다.

3.25.2009

깊은 냄비를 주시는 하나님

늦은 밤, 도서관을 나서 집으로 가는 중 선교사님을 만났다. 사실은 선교사님이 어두운 곳에서 내 이름을 부른 통에 놀라서 섰다. 반가운 목소리로 불러주는 소리가 즐거웠고 한적한 곳에 큼직한 빡스를 어깨에 매고 있는 선교사님이 엉뚱했다. "선교사님, 이 밤에 거기서 뭐하십니까?" 싱글벙글 즐거운 목소리로 대답하신다. "아내가 기도하던 깊은 냄비를 주셨어요!"

"아내가 기도하던 깊은 냄비..." 몇마디 않고 헤어졌지만 "아내가 기도하던 깊은 냄비..."가 계속 마음 속에서 맴돌았다.

모교회에서 후원이 끊겨 기도하는 중이지만 하나님이 더 좋은 후원자들을 만나게 하실것이라며 함께 식당에서 손붙잡고 기도했던 것이 두 주 전이었다.

깊은 냄비가 필요해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하나님 깊은 냄비가 필요한데 마련해 주세요"라고 순수하고 친밀한 기도를 드렸을 사모님의 성스러운 모습이 떠올랐다.

아내의 기도를 유심히 귀담아 듣고 "깊은 냄비의 필요"를 자기 일처럼 묵상했을 선교사님의 따듯하고 책임감있는 마음이 느껴졌다.

누군가 놓아둔 박스를 어둡고 바람부는 밤에 그냥 스쳐 지나가지 않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보물 찾듯 소망의 기대를 놓치지 않는 그의 성실함과 믿음이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깊은 냄비가 거기 그렇게 놓여져 있었던 것이 결코 우연이나 운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자애롭고 치밀한 준비하심이라고 생각하는 영적 민감함과 깨어있음에 내 자신이 부끄러워 졌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그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기 위해 이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예비하시는 하나님, 나로하여금 그 현장에 참여하게 하심으로 "내가 너를 기억하며 내 손바닥에 새겼다"는 아침의 말씀을 컨펌해 주시는 놀랍고도 달콤한 하나님의 사랑에 코끗이 찡하고 가슴이 묵직하게 아려왔다.

"사랑하는 아들아 보았니? 어땠니?" 라고 물으시는 것 같아 반짝이는 별들을 향해 말씀드렸다. "깊은 냄비의 사랑을 보여주신 아버지, 사랑합니다."

3.25.09, bk

사랑하다 헤어질 때

사랑하다 보면 헤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미안하다는 말 대신 고맙다고 말하자.
사랑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사랑받을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했다고. 살면서 당신을 만난 것이
가장 좋았다고. 그래서 너무나 고맙다고,
그렇게 이별의 인사를 하자.
헤어짐은 끝이 아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다시 시작되고,
사랑이 끝나는 곳에서 사랑은
다시 시작된다.


- 권소연의《사랑은 한 줄의 고백으로 온다》중에서 -


* 사랑은 때때로 헤어짐으로 끝이 납니다.
아프고 쓰리지만 '사랑의 경험'은 그대로 남아,
다음에 오는 사랑을 더 찬란하게 꽃피웁니다.
그 '사랑의 경험'을 안겨주고 떠난 사람이
고마운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헤어짐은 사랑의 종착역이 아니라
또 다른 사랑의 시작입니다.

3.18.2009

Longing to Know

Geneva College, Beaver Falls, PA

“Knowing Knowing, Knowing God: Contours of Covenant Epistemology”

Most people have never had a philosophy course; that doesn’t keep them from practicing philosophy. We all inherit “default settings,” unexamined presumptions about what knowing is, which are proving unhealthy and unbiblical. They infect every dimension of human life, including knowing God. “Epistemological therapy” thus holds the prospect of favorably impacting everything from business to Christian discipleship, athletics to scientific research. This lecture will introduce you to Meek’s “covenant epistemology,” centrally the proposal that we take, as our paradigm of all human knowing, the transformative, interpersonal, covenantally-featured relationship. We will explore its key features and the ways it accords with the Christian Scripture, commending its value for reshaping the way we engage the world, and restoring us to ourselves.

Related:

  1. Ester Meek’s personal website
  2. John Frame’s positive review of Esther Meek’s Longing to Know: Frame writes, “This is a terrific book. I can’t begin in a short review to illustrate adequately the beauty of its writing and the cogency of its reasoning. But let me just say that I have never read a serious philosophical work (and this surely is one) that is as eloquently and delightfully expressed. Meek has a wonderful gift of illustration. Analogies and pictures fly from her mind like drops of water from a great fountain. Every page contains two or three of them, so there must be hundreds in this book. You’ll read about kitchen tables, golf games, copperhead snakes, children, weddings, on and on, as Meek seeks to show us how knowing happens in all the ordinary experiences of life.”

What follows are some sketchy notes from Meeks’s thoughtful address for which the audio and video should be available soon here.

Introduction

She describes herself as “a one-trick horse” whose specialty is epistemology. Knowing isn’t more than one step removed from living.

1. Knowing as Information: The Defective Epistemic Default

Many people have powerful assumptions about knowledge. Meeks sees herself “as in the business of epistemological therapy. The way forward is to find our epistemic default layer (i.e., the default mode) and recognize that it is sick.

“Esther’s daisy of dichotomies” notes the default mode for many people. (The first item is like the center of the daisy, and the second represents the petal.)

  1. knowledge as over against belief
  2. fact : opinion
  3. fact : value
  4. reason : emotion
  5. reason : faith
  6. science : art
  7. theory : application
  8. mind : body
  9. possibly male : female

This operates as a default setting, and people have presumptive opinions about what knowledge is and isn’t. One of these binary pairs esp. affects pastors: reason and faith.

Meek’s proposal is an interpersonal, covenantally constituted relationship, i.e., what she calls covenant epistemology. Knowing is not information so much as transformation, and it involves the idea of covenant as an unfolding pers0nal relationship.

2. Knowing Is Subsidiary Focal Integrative Transformation

Illustration: learning to read.

We know that we have made contact with reality when we have a sense of the possibility of indeterminate or unspecifiable manifestations.

3. Knowing Is Covenantal

Covenant is first and foremost a relationship of mutuality involving initiative and response constituted by promises and obligations, one that unfolds over time resulting in friendship and communion.

4. Knowing Is Interpersonal

A critical and profound insight of what should be obvious: To be a person is fundamentally is not to be a reactional animal but a being in communion.

“I - it” vs. “I - you”: Information is “I - it.” An encounter is “I - you.”

Covenantal illustrations: (1) “Starbucking,” (2) dance.

5. Knowing and Being Known by God Is the Paradigm and Central Core of Human Knowing

Two necessary dimensions of situated stewardship are (1) the lived world and (2) the self that lives it. But there are two other dimensions that lie outside our own capacity to being or control: (1) any experience of the reality of the threat of not being and (2) the holy, namely, the gracious possibility of new being, a deliverance that comes outside of us and to us only when we are in the void, the other that graciously seeks our flourishing, the personal other that will not go away.

Having been known by and knowing Christ is the epistemic paradigm for all human knowing.

6. Inviting the Real: Epistemological Etiquette

We are to “invite the real,” not passively gather information or actively demand it. We must practical “epistemological etiquette.”

7. A Short Objection and Reply: What About Collecting Data?

Both knower and known are persons in personal relationship. Many might ask, “What about collecting data?” The question reflects a defective epistemic default (i.e., knowledge as information).

Conclusion

“I hope that all this draws you more deeply into loving and knowing him.”

알려는 열망

"Knowing is the responsible human struggle to rely on clues to focus on a coherent pattern and submit to its reality." Esther Meek

Meek은 Michael Polanyi를 연구한 철학자이다.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자동차 수리공을 유비하였다. 깔깔대며 웃는 유쾌한 웃음이 귀엽기까지 한 Meek은 Longing to Know라는 책에서 철학적 인식론을 일상의 언어로 생생하게 그려내는 값진 작업을 하였다.


“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Meek은 결론을 내리기 전에 철저하게 이 질문에 대해 탐구할 것을요 청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알 수 없다”는 명제 자체도 “하나님은 알 수 있다”라는 명제를 증명하는 것 만큼, 아니 보다 더 어려운 작업들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증명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성서가 증언하는 또 다른 난관인 “우리의 앎의 능력은 왜곡되고 상실되었다”는 진리 앞에 서야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어거스틴의 오랜 전통을 따라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망을 외면하고 포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존재적으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고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젖먹이의 옹알이로부터 프로이드의 왜곡된 Id까지 진리를 향한 열망은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아 프라이오리a priori이다.

도대체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어떤 의심할 수 없고 오류도 있을 수 없는 절대적 보편진리를 인식한다는 것인가? 대답은 “아니다.” 안다는 것은 의심이라는 행위와 오류의 실패를 포함하는 더 포괄적인 행위이다. 앎은 끝없는 인식의 과정이다. 결국 인간의 삶은 끝없는 알아감의 여정이며 알아가는 것은 인간됨의 행위이다.

세 상 속에 흩어진 실체의 편린들을 단서로 그리고 보여진 실체 너머에 있는 배후의 관계들을 통해 일관성cohesive있는 의미를 발견해 내는 것은 때로는 고통스럽고 무모하며, 어쩌면 너무나 어려워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정도이다. 그러나 “세상the world”은 여전히 실재하고, 세상을 인식하는 주체이며 동시에 중요한 인식의 대상이기도 한 “나body”도 실재하기에 포기할 수도 없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인식의 대상과 인식의 주체 사이의 관계를 정립해 주는 일종의 “지침/방향direction”이다 (나는 Meek의 direction보다 인식론적 방향성과 인식의 주체와의 관계성을 더 포괄적으로 설명해 주는 Geertz의 “Map” 개념을 선호한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지도의 범례keynote/legend가 되어 인식의 틀을 형성하고 기존의 틀을 계속해서 교정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삶의 복잡다단한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실체들은 정념화되어 경직되지 않고 계속 역동적으로 구성과 해체, 그리고 재구성을 거듭할 수 있도록 유연해야 한다. 진리는 단순히 감각과 인식과 언어 너머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소망과 겸손을 가지고 반응respond할 수 있다. "확실함certainty"도 절대진리를 명확히 "표현할 길"도 없기 때문에 겸손해야 할 것이며, 이러한 겸손함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인식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소망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겸손함과 소망은 세상에 대해 존재를 여는 태도이다 (피녹은 이를 인간의 "세계 개방성"이라고 불렀다. 다만 그는 이를 인간 존재의 자연스러운 본성으로 설명했지만 내가 보건대 이는 죄로 인해 왜곡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많은 중요한 본성들 중 으뜸이 되는 것이다. 자기만의 도그마에 갖혀 진리를 자기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양 법석을 부리는 경직되고 오만한 사람들속에 내가 속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증거는 충분하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세상을 향해 자신의 존재를 여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나는 세상과 연합하고 세상을 이해하며 세상에 섞여 세상을 풀어(해석해)나간다. 서양적 전통의 분석적 사고에 대한 강조는 인간의 의식에 대한 과도한 의존과 확신을전제로 하게 될 때 결국 실체로 부터의 메마른 단절만을 부추겨 결국 인간을 끝없는 고독의 무저갱에 처박아 놓게 된다. 실체와 인식의 주체는 분리될 수 없다.

인식의 행위는 인식자의 적극적이고 책임성 있는 순종과 헌신을 요청한다. 앎yadah이라는 것은 부부가 결혼을 하여 서로 알아가는 것과 같은 그런 종류의 앎이다. 완전히 다 알아 앎이 종료되는 순간은 없다. 다 만 계속해서 알아갈 뿐이다. 그리고 그 앎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필요하다. 용기와 희생과 책임이 뒤따른다. 말씀word를 통해, 세상world를 통해, 그리고 우리자신we-self를 통해 우리를 만나시는 하나님은 그래서 임마누엘이다. 나와 세상을 통해 그리고 말씀을 통해 계시는 하나님 밖에서 어떻게 내가 존재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어거스틴은 고백한다. "그러므로 나의 하나님이여, 당신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할 수가, 결단코 존재할 수가 없나이다. 아니면 이렇게도 말할 수도 있지 않겠나이까? 내가 당신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니이다…. 그러하나이다 주여… 당신은 말씀하셨나이다.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렘23:24). Confessio, I.ii.2


앎은 또한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하는 행위이다. 믿음과 이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지, 정, 의의 모든 인간됨이 총동원 되는 것이다. 보이는 것 너머의 복잡한 관계들을 성경과 성령이 지시하는 대로 민감하게 반추하여 의미를 발견하려는 적극적인 "앎의 행동"이 필요하다.

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진정한 앎은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앎은 존재와 존재의 충돌이기에 변화에 대한 용기를 요구한다. 앎은 알려지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되는 것이다. 그를 알기 전의 나와 그를 알고 난 후의 나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더할 나위 없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변화되는 것이다. 더 많이 알아갈 수록, 더 많이 변화되며, 더 많이 변화될 수록, 더 많이 알고 싶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거룩이 더해 갈 수록 죄에 대한 인식이 더 또렷하고 깊어지며 이는 더 깊은 거룩의 갈망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정말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는 지를 먼저 물을 일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만나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 않고 궁금하지 않은 담에야 "알고 싶을"리 만무하지 않은가? 알고 싶지 않은데 알 수는 없는 노릇이며, 사랑해야만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앎"을 "세상의 실체를 받아들이고 탐구하려는 인간의 책임있는 노력"으로 정의한 에스더 믹의 진술은 좀 메마른 감이 있어 아쉽다.

bk

3.12.2009

사람이 안보여

"이제 막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이나 젊은이들은 성취에 대한 집념이 크기 때문에 정작 주변의 사람들을 놓치기 쉽다. 그러나 일의 경중을 떠나 세상의 모든 일은 결국 사람에 의해, 사람을 통해, 그리고 사람을 위해 해야 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요 인간의 도리라는 것을 명심한다면 나만의 성취를 위해 이웃의 절실한 필요를 외면하는 전도본말의 우는 절대 범치 말아야 할 일이다. 소수의 리더들이 '비전'이라는 미명하에 추구하는 성취를 위해 얼마나 많은 가족공동체가 서로에게 등을 돌리며 깨어지는 가를 본다면 참된 하나님 중심신앙은 진정한 인간존중이 최고로 발현되는 현장을 통해서만 확인될 수 있다는 생각이 더욱 굳어지게 된다. 이사야의 고백처럼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자원들은 곤핍한 자들을 위로하기 위함이지 자기 자랑과 자기만족을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사50:4)"
bk

3.05.2009

신과 과학

1. The visible order of the universe proclaims a supreme intelligence.
눈에 보이는 질서정연한 우주는 최고의 지성적 존재를 웅변한다.
-Jean-Jacues Rousseau

2. Science brings men nearer to God
과학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이끈다.
-Louis Pasteur

3. Truth between candid minds can never do harm.
편견없는 지성간의 진실은 절대 해롭지 않다.
-Thomas Jefferson

4. The visible marks of extraordinary wisdom and power appear so plainly in all the works of the creation that rational creature, who will but seriously reflect on them, cannot miss the discovery of a Deity.
모든 창조사역속에 드러나는 비범한 지혜와 권능의 증표들은 너무도 명백하여서 이를 진지하게 상고하는 이성적 피조물은 하나님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John Locke

호기심

Curiosity is the thirst of the soul.
호기심은 영혼의 갈증이다.

Samuel Johnson

질문

No man really becomes a fool until he stops asking questions
질문하기를 멈추기 전 까지는 누구도 멍청하지 않다.

-Charles P. Steinmetz-

"Believe those who are seeking the truth. Doubt those who find it."
--Andre G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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