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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2009

100 Best Books of the Century

Books of the Century by Christianity Today


1.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2.
디트리히 본회퍼- 제자의 길과 십자가
3.
바르트- 교회 교의학
4.J.R.R.
톨킨- 반지의 제왕
5.
요더- 예수의 정치학
6.G.K.
체스터턴- 정통주의
7.
토머스 머턴- 칠층산
8.
리차드 포스터- 영적 훈련과 성장
9.
오스왈드 챔버스- 주님은 나의 최고봉
10.
라인홀드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The Other 90 in Alphabetical Order


*
치누아 아체베- 모든 것은 무너진다
*
익명의 알콜중독자(빅북)
*
롤란드 베이턴- 마르틴 루터의 생애
*
바르트- 로마서 강해
*
어니스트 베커- 죽음의 부인
*
로버트N. 벨라 - 마음의 습관
*
조르주 베르나노스- 시골 사제의 일기
*
디트리히 본회퍼- 옥중서간
*
데이비드 보쉬- 변화하고 있는 선교
*
월터 브루지만- 예언자적 상상력
*
에밀 부르너- 만남으로서의 진리
*
알베르 카뮈- 페스트
*
에드워드 카넬- 정통신학
*
윌라 캐더- 대주교에게 죽음은 온다
*
도로시 데이- 오랜 고독
*
애니 딜라드- 팅거 크리크의 순례자
*
2 바티칸공의회 문헌
*W.E.B
두보이스- 흑인의 영혼
*T.S.
엘리엇- 개의 사중주
*
랠프 엘리슨- 보이지 않는 인간
*
자크 엘륄- 기술의 역사
*
엔도 슈사쿠- 침묵
*
안네 프랑크- 안네의 일기
*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
지그문트 프로이트 문명 속의 불만
*
근본적인 진리
*
랭던 길키- 산동 지구
*
캐럴 길리건- 다른 목소리로
*
그레이엄 그린- 권력과 영광
*
하워드 그리핀- 나같이 검은
*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해방신학
*
필립 핼리- 부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
스탠리 하우어워스- 인물 군상
*
바클라프 하벨- 진실되게 살기
*
리처드 헤이스- 신약의 윤리적 비전
*
F.H. 헨리- , 계시, 권위
*
R. 허시- 히로시마의 증인들
*
아르바함 허셀- 예언자들
*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
윌리엄 제임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
프란츠 카프카- 심판
*
마틴 루터 - 희망의 언약
*
토머스S. - 과학 혁명의 구조
*
하퍼 - 앵무새 죽이기
*
알도 레오폴드- 모래 군의 열두
*C.S.
루이스- 나니아 나라 이야기(특히, 사자와 마녀와 옷장),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J.
그레셤 메이첸- 기독교와 자유주의
*
래러스데어C. 매킨타이어- 미덕을 찾아서
*
말콤X, 알렉스 헤일리- 말콤X
*
조지 M. 마스든- 근본주의와 미국 문화
*
프랑수아 모리아크- 독사 뭉치
*
유르겐 몰트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
리처드 노이하우스- 벌거벗은 광장
*
레슬리 뉴비긴-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H.
리처드 니버- 그리스도와 문화
*
라인홀드 니버- 인간의 본성과 운명
*
캐슬린 노리스- 수도원 산책
*
헬리 나우엔- 상처입은 치유자
*
앤더스 니그렌- 아가페와 에로스
*
엘리자베스 오코너- 그리스도인의 내적 성숙과 세상 속의 교회
*
플래너리 오코너- 선한 사람을 찾기 힘들다
*
루돌프 오토- 성스러움의 의미
*
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
앨런 페이턴- 울어라, 사랑하는 조국이여
*
야로슬라프 페리칸- 예수의 역사 2000
*
조셉 파이퍼- 가지 덕목
*
마이클 폴라니- 개인적 지식
*
하임 포톡- 선택한
*
발터 라우센부쉬- 기독교와 사회 위기
*
도로시 L. 세이어스- 창조주 생각
*
앨버트 슈바이처- 예수의 생애 연구사
*
네빌 슈트- 해변에서
*
로널드 J. 사이더-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수용소 군도
*
스토트- 기독교의 기본진리
*
투르니에- 인간 의미
*A.W.
토저- 하나님을 추구함
*
바바라 터크먼 *8월의 총성
*
에블린 언더힐- 신비주의
*
미로슬라프 볼프- 추방과 포용
*
게르하르트 라트- 구약성서 신학
*
앤드류 F. 월스- 기독교 선교사
*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
시몬느 베유- 신을 기다리며
*
엘리 위젤-
*
찰스 윌리엄스- 음부로 내려감
*
월터 윙크- 권력에의 동참
*
필립 얀시-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Original article is located at: http://www.christianitytoday.com/ct/2000/april24/5.92.html

11.28.2009

존재와 제 4의 힘

"사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하나의 존재라는 사실과 그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지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존재 자체에 개방하는 것이다."
Loder, J. (1981), p.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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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왜,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묻고 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끊임없이 내 내면적 자아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삶의 환경에 대해 의미를 부과하고 그 관계를 설명하며 더 가치있고 의미있는 관계를 구성하기 위해 투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고민하고 투쟁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를 확인한다.

존재의 의미를 위해 투쟁이 필요한 이유는 자아와 환경이 존재를 파괴하며 무의미하게 만드는 죽음의 실체로 작용하기 때문이며 이 "제 3의 힘"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영혼의 투쟁은 바로 "제 4의 힘"을 갈망한다. 나는 갈망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를 소망한다.

제 4의 힘은 죽음을 극복하며 뒤틀려진 세계와 자아를 재구성하는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제 4의 힘을 통해 나는 존재하기를 포기하지 않으며 존재를 확신한다. 따라서 나의 존재는 비존재를 극복하고 존재를 영속화할 수 있는 추동력을 얻는다. 나는 제 4의 힘을 믿는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 영원히.

bk

11.05.2009

존재하기 위한 용기

용기란 非存在의 사실에도 불구하고 존재에 대해 갖는 자기 확신이다.
- Paul Tillich, Courage to be, 155

인간은 존재적으로 영원한 죽음, 궁극적 허무와 무의미, 철저한 죄의식이라는 염려에 포로되어있다. 용기란 이러한 거부할 수 없는 존재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자아를 긍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용감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용납되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며, 그래서 하나님을 신앙함으로 얻게 되는 존재의 힘은 비존재가 가져오는 허무와 공허, 그리고 죄의식을 부수는 존재의 용기가 된다.

11.03.2009

선배로 부터 듣는 리더십 훈수

리더의 책무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자신보다 훌륭한 사람들과 팀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혼자서 모든 것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이세상에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일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장점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와 다른 사람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세운 후에는 그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어야 합니다. 덴버 세미나리를 떠나올 때 학교의 전통에 따라 초상화를 찍을 것을 제안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팀으로 일했고 인정을 받아야 한다면 팀 모두가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초상화 대신 함께 일한 팀사진을 건다면 승락하겠다고 했더니 실무자들은 무척 난감해 했고 이사들은 화를 내었습니다. 이상하죠? 리더가 팀으로 일한다는 것은 리더의 존재적 전제조건이기도 합니다. 팀이 없는데 무슨 리더가 존재한단말입니까? 좋은 리더가 있다는 것은 좋은 팀이 있다는 전제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좋은 팀의 핵심은 유기적 다양성과 하나됨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리더는 모든 것을 다 잘하려는 교만한 이상을 내려 놓아야합니다. 즉 리더는 전략적인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이것은 개인의 리더십 스타일에도 해당되겠지만 또한 조직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모든 부서가 A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자원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이상적으로는 모든 부서들이 보통 이상의 수준을 유지하면 좋겠지만, 리더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몇가지에 신중하게 계획된 에너지와 자원을 집중해 탁월성을 나타내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참 이상하게도 나머지 부분들도 같이 개발되기 시작할 테지만, 그렇지 못하면 모든 것이 지리멸렬해 집니다.

전략적 목표세우기는 문제의 핵심을 간파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내가 트리니티에서 박사과정을 하면서 배운 것 중 가장 값진 것은 "문화인류학적 연구조사ethnographical research"방법을 배운 것입니다. 즉 겉으로 드러난 현상의 기저에 감춰진 문제의 핵심을 찾아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학과 철학 뿐 아니라 사회학, 심리학, 인류학, 문화학등을 배우지 않습니까? 어떤 한 현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복잡다단합니다. 리더는 단편적인 이해를 가지고 현상을 해결하려 하면 안됩니다. 보이는 현상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잠재된 다른 문제들을 부상시켜 어려움을 가중시키기 때문입니다. 리더는 현상을 가져온 더 근본적인 수준의 문제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이런 능력은 경험이 쌓인다고 저절로 갖추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양한 사람들과의 의도적이고 깊이있는 대화와 진지한 토론이 필요합니다. 더 나아가 팀 모두가 이러한 자질을 갖추도록 함께 배우는 문화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리더십의 덕목이 요구됩니다. 이것은 왜 Trinity 의 EDS program이 전 세계의 수많은 리더들에게 영향을 미쳤는지와 연관됩니다. 리더는 기본적으로 배우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리더는 항상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이 귀에 따갑도록 들었겠지만 배움learning은 혼자하는 지식 습득으로서의 공부study가 아닙니다. 배운다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사고 패턴을 교정하고 확장해 가는 과정입니다. 필연적으로 자기 생각의 습관과 틀을 비평적으로 성찰해야 합니다. 내 방식을 고집하는 것, 자신의 직관을 의심하지 않는 것, 듣고 이해하고 질문하기 보다는 지시하고 설명하고 통제하는 것, 의사소통이 권위적으로 되는 것, 홀로 스타가 되어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받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리더들이 진정한 "배움의 자세"를 잃어 버렸을 때 나타나는 부정적 증상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차원의 일들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꿈과 비전이 (내 것이 아니라) 현실화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고정된 사고체계가 배움의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교정되고 확장되어야만 합니다. 이런 점에서 리더는 모든 상황과 환경, 특별히 하나님이 함께 두신 동료들을 통해 심각한 자세로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리더에게 요구하시는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리더는 하나님을 통해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직면하고 있는 도전들은 우리를 낙심시키기에 충분합니다. 리더들은 끊임없이 이러한 도전의 한복판에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역설적으로 리더들은 책임감responsibility을 통해 힘을 얻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책임을 감당하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도전들보다 크시며 신실하시고 자비로우십니다. 그리고 감당할 힘을 주시고 친히 이끌어 가십니다. 도전이 클수록 책임은 무거워 지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도 더 커지고 감당할 능력도 더욱 강하게 자라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을 때 책임을 통해 힘을 얻게 되며 배움에 대한 "용기"와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일련의 교과과정(Curriculum)이니까요. 그리고 그 교과과정은 언제나 완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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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니티 신학대학원과 대학교에 신임 총장으로 부임한 Craig Williford는 덴버 세미나리의 전 총장이었으며 오랫동안 지역교회를 목회하기도 하였다. Ted Ward, Linda Cannell, Warren Benson, Perry Downs의 지도로 성인교육과 영성개발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가 선배로서 EDS Advisee Meeting 에 시간을 내어 참석하였고 함께 피자를 먹으며 나눈 대화에서 연륜있는 크리스찬 리더의 깊은 통찰을 배울 수 있었다. 또한 내가 배운 것들이 장래에 어떻게 쓰여질 것인가에 대한 한 모델을 보는 것 같아 기뻤다. 여러 질문과 대답을 통해 진술된 내용을 나름대로 요약 정리 각색해 보았다.
bk

10.10.2009

자기 중심성에 교정을 요구하는 하나님 나라 (2/6)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염원하는 두 번 째 청원은 예수의 가르침의 요체인 산상수훈과 주기도문에서도 그 고갱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예수가 염원한 "당신의 나라(hei basileia sou)가 현실화 됨"이 내포하는 존재적 긴장(tensity)은 우리의 기도속에서 거의 무시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기 예수 공동체에게 있어 "나라"의 문제는 추상적 정치토론이나 스트레스를 푸는 잡담거리의 단골메뉴가 아니었다. 로마 제국의 식민지 통치나 이에 저항하는 유대민족주의자들에게 있어 "예수 공동체"는 공히 '공공의 적'이었기에 예수공동체에게 있어 "나라"의 문제는 하루의 안녕한 삶과 직결된 긴급하며 절박한 문제였다.

예수의 생애를 전후로 로마제국은 치밀한 법률과 강력한 군사력, 그리고 세련된 문화를 바탕으로 여러 민족들을 정복하고 착취하여 로마적 번영과 평화(pax Romanna)를 추구하였다. 반면 유대민족은 유대교의 선민사상과 메시아주의를 근거로 창조주 야훼의 통치가 유대민족의 정치적 해방과 흩어진 디아스포라가 집결됨을 통해 실현될 것을 신앙하고, 제국의 이데올로기와 황제숭배를 기반한 무력적 식민지 통치에 대항하여 격렬하게 투쟁하였다. 이 두 나라의 힘의 충돌 사이에 십자가가 서 있다. 이스라엘의 해방을 염원하던 유대 민족주의자들은 예수가 보여준 놀라운 기적과 이사를 팍스 로마나(pax Romanna)를 전복시키고 이스라엘을 살롬의 중심(Jerusalem)으로 회복하는 메시아적 힘으로 오해하였다. 반면 식민지의 치안을 제국 번영의 기초로 보았던 로마군인들은 스스로 왕임을 주장하는 예수와 골치아픈 유대지도자들 사이의 분쟁이 정치적 소요로 번지지 않도록 사전에 제압하려 하였다. 따라서 로마군인들은 예수에게 시저의 황금 면류관 대신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찌어다"라며 모욕하고 폭행하였고, 유대인들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스스로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소하였다. 자력으로 번영과 구원을 획득하려는 아담적 실존은 자기를 비움으로 생명을 얻는 그리스도의 실존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터였다. 십자가와 부활로 시위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당시 제자들의 "나라"의 이해, 즉 로마적 힘과 번영을 추구함과 이스라엘의 신적 존재에 힘입은 자기 실현, 에 근본적 교정을 요구한 것이었다.

로마적 힘의 추구와 유다적 메시아주의 공통적 뿌리가 스스로 주인되려 하는 "자기 중심성"이 라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청원은 이러한 "자기 중심성"의 뿌리를 찍어내는 강력한 도끼이다. 자기 스스로의 판단, 경험, 자원, 지혜, 힘, 인맥을 의존하여 자기의 왕국을 건설하고 안녕을 보장받으며 번영을 추구하려는 자기 중심성은 예수 공동체 안에서도 그 맹위를 떨쳐 부활한 예수에게 조차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를 질문하게 하였다. 그러나 스스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유혹의 정체를 직시하고 거부하며 하나님을 힘입어 그분의 언명대로 살아가기를 선포한 예수의 사람들은 지금 이 세상에 만연한 개인적, 사회적, 민족적, 국가세계적 문제의 근원이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려하는 죄성"임을 비분강개하고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신 둘 째 아담의 못다한 절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를 영혼에 담아 "나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가 내 삶의 구석 구석에 임하시기를 간절히 염원해야 한다. 이 염원을 예수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요약한다.

결국 하나님 나라의 현실화를 위한 청원은 실천적으로 자기 부정을 위한 기도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하지 않는 자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요원하다면, 자신의 자원과 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적대적이고 위협적이다. 스스로 절망하여 자기를 부인할 수 밖에 없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열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에 대한 절망은 하나님 신앙의 자궁이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절망은 자연스럽게 되지 않는다. 인간의 죄성은 스스로 살기 위해 자신과 이웃의 생명을 해할 만큼 뿌리가 깊고 강력하다. 따라서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음 조차 스스로 할 수 없다는 실존앞에 자아가 해체되는 것 (이러한 자기 부정을 자연인중 누가 감히 원한단 말인가?)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나라이 임하옵시며"는 자기 부정을 위해 초월적 은혜를 요청하는 기도로 발전한다.

이 기도를 바탕으로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통치속에 자기 한계를 초월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음습한 지하동굴에 숨어서도 로마의 제국주의와 배타적 유대주의를 뛰어넘어 노예와 주인이, 귀족과 하층민이, 부자와 거지가, 고매한 학자와 불학무식한 자가, 여자와 남자가, 유대인과 헬라인이, 도덕적으로 불량한 자들과 인격적으로 훈련된 자들이, 언어와 인종과 빈부와 학식과 정치적 이념과 삶의 방식과 문화를 뛰어 넘
는 우주적 "하나님 나라" 예수 공동체를 경험할 수 있었다.

bk

10.03.2009

자기 중심성과 하나님 나라 (1/6)

'하늘에 계신' 이라고 말하지 말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말하지 말라,
너 혼자만을 생각하며 살아 가면서...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
하나님의 아들, 딸로서 살아가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말하지 말라,
실제론, 자기 이름을 빛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하지 말라,
물질 만능의 이 세상을 좋아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라고 하지 말라,
내 뜻대로 되기를 원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라고 말하지 말라,
속으로는 평생토록 먹을 양식을 쌓아두려 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저희를 용서해 주옵시고' 라고 말하지 말라,
누구에겐가 지금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며'라고 말하지 말라,
죄 지을 기회를 은밀히 찾아 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옵시며'라고 말하지 말라,
악을 보고도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으면서...
'아멘'하지 말라,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조금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우루과이의 어느 성당에 써 있다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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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자기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문(엄격하게 말한다면, 주께서 가르치신 또는 명령하신 기도모범)은 그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핵심 메세지를 담지하고 있다. 특히 마태판에서의 주기도문은 산상수훈의 정 가운데 위치함으로 '하나님 나라'공동체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에 절정부분을 차지한다. 여섯 가지의 요청/청원으로 되어 있는 주기도문은 그당시 다양한 유대공동체에서 회람되던 생활 기도문들과 비교하여 볼 때, 문학적 형식과 일상에서의 사용방식을 공유하지만, 그 내용은 현격히 다르다. 특별히 인간의 근원적 죄성인 자기 중심성에 기반한 기도를 우주적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염원으로 교정하고, 실제 삶 속에서의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한 의도적 실천(orthopraxis)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점이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
마태판에서 등장하는 '하늘에 계신'의 수식은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다. 하늘(uranos)은 초월과 궁극을 상징하는 메타포임과 동시에 '늘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전능성과 무소부재의 속성을 내포한다.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 안에 계시고, 만물을 통해 계시는 무한한 창조주가 '우리 아빠'가 되셨다는 선포는 그래서 혁명적이다. 무한한 하나님이 한낱 먼지와 같은 피조물과 생명 세계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친밀하고 깊은 관계를 맺으셨다! '아버지와 자녀들'의 관계는 영원한 신뢰와 사랑, 자비와 긍휼, 용서와 수용, 보호와 공급의 언약관계가 공동체적으로 주어졌음을 천명하며 창조주의 피조물을 향한 기이한 사랑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기도는 비인격적인 주문이나 부적일 수 없고, 왕에게 고하는 신하의 상소도 아니다. 기도는 어린 자녀가 아빠와 갖는 친밀한 관계의 속삭임이며 전 존재의 의지적 의존과 하나됨이다. "아빠"를 부르는 순간은 창조의 영과 인간 영의 교통이 시작되고 왜곡된 자아와 뒤틀린 세계를 강압하는 존재의 허무를 부수고 무한한 생명의 파장으로 침투하시는 성령의 사건이 발생한다.

일인칭 복수 소유격인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창조주와 언약공동체인 자녀들과의 공동체적 관계를 통해 구현됨을 암시한다. '우리 아빠'는 개체적이며 자기 중심적인 수직관계를 형제와 자매된 공동체원들과의 관계 보다 우선시 하려는 시도가 가지는 불합리성을 지적한다. 초월적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만 도달하는 것이며 따라서 실존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우리"가 없이는 "아빠"도 존재할 수 없다는 명제가 가능해 진다. 세종대왕이 예수를 경험적으로 알리 만무하며 이순신 장군이 "하나님 나라"를 상상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다른 이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초월적 하늘 아빠와 피조물이 관계 맺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분의 은혜를 믿음으로 수용하여 아버지와 자녀들의 "공동체적 언약관계"가 성립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 뿐이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한 까닭은 동료가 없을 때 경험하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함이 아니며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었다는 점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존재양식 자체가 세분의 하나님이 한 하나님이 되시는 완전한 공동체이심을 상기한다면 기도는 공동체의 공동체에 의한 공동체를 위한 것임이 자명해 진다. 따라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는 나의 나에의한 나를 위한 기도가 가지는 중요성과 한계를 동시에 인식하게 하고 기도주체는 언약 공동체임을, 하나님의 나라는 언약 공동체에 기초함을 각인시킨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기도하는 이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는 청원의 주체와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실존적 차이와 이를 뛰어 넘는 하늘아버지의 사랑을 인식하며, 깊은 신뢰와 함께 두렵고 떨림의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간구할 것을 요청한다. 따라서 이러한 실존적 차이를 극복하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인식은 자연스럽게 하늘 아버지의 속성들이 찬양되고 인정되기를 바라는 첫번 째 청원으로 연결된다.

거룩의 일차적 개념은 윤리적이기 보다 관계적이다. 영원한 타자로서의 하나님은 유한한 피조물과 극명히 대조되는 초월적 존재이시다. 하나님의 존재선포인 그분의 이름에 외경심을 느끼고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카도쉬)이 돌려지기를 사모하는 마음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아버지와 자녀들이 갖는 '관계의 진실성'을 반증한다. 즉 하나님의 이름에 두려움도, 떨림도, 흠모함도, 깊은 신뢰나 사랑도 느낄 수 없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마땅히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는 간절한 염원이 없다면, 스스로 하늘아빠와 맺고 있는 언약관계를 점검해야 한다.

이러한 초월적 절대 타자와의 특별한 관계맺음에서 거룩의 이차적 개념인 윤리성이 도출된다. 하나님의 거룩은 그와 관계맺는 인간의 속성과 존재가치를 무한히 끌어 올려 상대적이며 주관적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도덕과 윤리를 지고한 보편과 궁극의 굳건한 반석 위에 올려 놓는다. 하나님을 경외함과 성스러움에 대한 갈망은 인간의 충만한 삶을 보장하는 샬롬의 기반이며 자유와 평등, 정의와 인권, 평화와 행복의 가치들을 인간됨, 또는 인간관계의 "기본"조건으로 승격시킨다.

따라서 하나님 이름의 거룩함을 부르짖는 기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에 대한 광대하고 우주적인 선포이며 인간의 거대한 절망과 한계를 미세한 분진으로 축소시키는 강력한 인식의 전환이다. 동시에 거룩에의 청원은 찬양과 경배의 대상에 인간 자신을 위치시키려는 죄의 본질을 근원적으로 부정하게 함으로 지독하게 뿌리깊은 자기 우상화를 경계하고 동료인간과 전 피조세계에 샬롬을 천착시키려는 갈망과 의지를 독려한다. 말과 행동과 의지와 생각과 태도에서 하나님의 성스러움을 힘입어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 드리려는 마음과 결단의 표현은 경배와 예배를 배타적 집단이 갖는 자기 만족의 사적 종교의식에서 벗어나 전 인류의 발전과 피조세계의 중흥을 신의 주권에 맡기고 의탁하는 웅혼한 축제로 승화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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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2009

고착된 마음의 틀, 성장하는 마음의 틀

Fixed Mindset vs. Growth Mindset: Which One Are You?

By Michael Graham Richard
Here is an excerpt from an article about Carol Dweck, a professor of psychology at Stanford University:
Through more than three decades of systematic research, [Carol Dweck] has been figuring out answers to why some people achieve their potential while equally talented others don’t—why some become Muhammad Ali and others Mike Tyson. The key, she found, isn’t ability; it’s whether you look at ability as something inherent that needs to be demonstrated or as something that can be developed.
To anyone who is into personal growth and self-improvement, this seems obvious. But clearly, it is not obvious to everybody: look at thethis diagram by Nigel Holmes representing the two types of mindsets and I’ll sure you’ll recognize the attitudes of many people you know.

Fixed Mindset

Let’s have a look, starting with the Fixed Mindset side:
fixed-001
People who hold these beliefs think that “they are the way they are”, but that doesn’t mean that they have less of a desire for a positive self-image than anyone else. So of course they want to perform well and look smart. But to achieve these goals…
fixed-002
By definition, a challenge is hard and success is not assured, so rather than risk failing and negatively impacting their self-image, they will often avoid challenges and stick to what they know they can do well.
fixed-003
Same with obstacles. The difference here, as I see it, is that challenges are things that you can decide to do while obstacles are external forces that get in your way.
fixed-004
What’s the point of working hard and making efforts if afterwards you are still on square one? If your worldview tells you that effort is an unpleasant thing that doesn’t really pay dividends, then the smart thing to do is to avoid it as much as possible.
fixed-005
Useful negative feedback is ignored in the best of cases, and taken as an insult the rest of the time. The Fixed Mindset logically leads you to believe that any criticism of your capabilities is criticism of you. This usually discourages the people around and after a while they stop giving any negative feedback, further isolating the person from external influences that could generate some change.
fixed-006
The success of others is seen as a benchmark against which the person looks bad. Usually when others succeed, people with a Fixed Mindset will try to convince themselves and the people around them that the success was due to either luck (after all, almost everything is due to luck in the Fixed Mindset world) or objectionable actions. In some cases, they will even try to tarnish the success of others by bringing up things that are completely unrelated (”Yes, but did you know about his…”).
fixed-007
As a result, they don’t reach their full potential and their beliefs feed on themselves: They don’t change or improve much with time, if at all, and so to them this confirms that “they are as they are”.

Growth Mindset

Let’s now look at the Growth Mindset:
growth-001
People who hold the Growth Mindset believe that intelligence can be developed, that the brain is like a muscle that can be trained. This leads to the desire to improve.
growth-002
And how do you improve? First, you embrace challenges, because you know that you’ll come out stronger on the other side.
growth-003
Similarly, obstacles – external setbacks – do not discourage you. Your self-image is not tied to your success and how you will look to others; failure is an opportunity to learn, and so whatever happens you win.
growth-004
Effort is seen not as something useless to be avoid but as necessaryto grow and master useful skills.
growth-005
Criticism and negative feedback are sources of information. That doesn’t mean that all criticism is worth integrating or that nothing is never taken personally, but at least the Growth Mindset individual knowns that he or she can change and improve, so the negative feedback is not perceived as being directly about them as a person, but rather about their current abilities.
growth-006
The success of others is seen as a source of inspiration and information. To Growth Mindset individuals, success is not seen as azero-sum game.
growth-007
And so, Growth Mindset individuals will improve and this will create a positive feedback loops that encourages them to keep learning and improving.

What Now

The good news – especially if you just recognized yourself as being someone who holds the Fixed Mindset worldview – is that it is possible to change from one to the other. In fact, I think this should be taught to all children.
What’s more, Dweck has shown that people can learn to adopt the latter belief and make dramatic strides in performance. [...]
The most dramatic proof comes from a recent study by Dweck and Lisa Sorich Blackwell of low-achieving seventh graders. All students participated in sessions on study skills, the brain and the like; in addition, one group attended a neutral session on memory while the other learned that intelligence, like a muscle, grows stronger through exercise. Training students to adopt a growth mind-set about intelligence had a catalytic effect on motivation and math grades; students in the control group showed no improvement despite all the other interventions.
“Study skills and learning skills are inert until they’re powered by an active ingredient,” Dweck explains. Students may know how to study, but won’t want to if they believe their efforts are futile. “If you target that belief, you can see more benefit than you have any reason to hope for.”
Does the Fixed vs. Growth Mindset theory fits with your personal experience? Does it describe well the people around you? Please let me know in the comments below.
Thanks to Guy Kawasaki.
Images credit: Nigel Holmes
See also:
Update: Carol Dweck recently published The Secret to Raising Smart Kids in Scientific American.

9.13.2009

신학과 과학이 만나다

많은 인문과학들과는 달리 신학은 주로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있는가" 하는 것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다. 신학적으로 건전하다고 할 수 있는 대상들이 "어떻게 믿게 되는가"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믿는가"에 관한 질문들에 대한 대부분의 답변들은 교묘하게 "무엇"에 관한 답변으로 바뀌어지든지, 성령에 관한 대답으로 어느새 둔갑해 버리고 마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성령에 관한 문제야말로 기독교의 중심적인 여러 교리들 가운데서 가장 잘못 정의되고있고, 가장 신비에 싸인 채로 모호하게 설명되고 있으며, 혼돈상태에 빠져 있는 교리 중의 하나이다.

인문과학의 방법론은 특수화시키고, 구체화시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인문과학은 신비한 체험들이 가지는 함축적인 의미들을 과정적인 관점에서 관찰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인문과학은 그러한 관찰이 가능하게 된 궁극적인 근거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거나 "잊고있다." 인문과학은 그러한 근본적인 실체에 대한 체험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반면, 신학적인 방법론은 이와 같은 체험의 중요성, 이러한 체험을 가능하게 한 궁극적인 근거 및 이러한 체험의 내용에 특별히 초점을 맞추게 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신학의 방법론에서는 구체성이라든지 특수성이 무시된다. 다시 말해서 신학은 그러한 변화의 체험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성격을 해석하는 데 필요한 충분한 근거를 마련해 주지 못하며, 그 체험들의 각 과정에서 찾아 볼 수 있는 특수한 성격들을 제대로 분석해 내지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도 못하고 있다. 우리들이 그러한 체험을 통해서 신학에서 주장하고 있는 궁극적인 원인들에 어떻게 참여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신학은 설명해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James E. Loder, The Transforming Moment,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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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교부 터툴리안은 "아덴이 예루살렘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Quid ergo Athenis et Hierosolymis)"라고 도전하면서 신앙과 이성에 있어 신앙의 우위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를 구원의 전제로 보는 개혁주의적 입장에서는 예루살렘과 아덴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해하는 양 날개와 같다. 일반은총와 특별은총의 우위를 논쟁하려면 언제나 승리는 극단적 칼빈주의자의 것으로 남겨질 테지만, 궁극적인 진리는 하나님만이 아실 일이라는 칼빈의 뻔한 권고는 여전히 유효하며, 따라서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포함한 모든 과학적 접근을 구속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일은 더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특정한 전통, 경험, 문화, 그리고 시대정신 속에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임을 겸손히 수용한다면 맹목적 신앙의 파시즘과 이미 파산해 버린 이성주의의 허상을 뛰어 넘어 신학과 과학의 진지한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실천들은 신학과 과학의 진지한 상호성찰 위에 세워 져야 하며 이는 모든 공동체원의 주체적 참여를 요청한다.

로더는 T. Parsons의 복합적 사회시스템을 기반으로 개인의 정신, 문화, 조직, 그리고 사회가 각각 어떻게 상호관련을 맺는지 분석하려 했다. 특히 성령의 역동적 역사가 이 네 시스템 속에서 어떻게 일어나며 또한 이 네 시스템 속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탐구하려 했다.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하는가? 인간은 어떻게 변화되는가?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 자연적 발달단계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인간의 종교경험과 뇌세포의 화학작용은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가?

피상적 경험의 주관성에 함몰된 설교와 가르침이 신학적 타당성과 함께 실제 삶에서의 적합성을 확보하려면 자의적 해석으로 가득찬 자기신학의 한계를 정직하게 고백하고 보편인간에게 부어주신 일반은총의 도구들을 긍정하여 겸손과 부지런함으로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고 창조세계에 대해 진지하게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bk

선물

만일 그대가 원한다면
나 그대에게 드리렵니다
아침, 그토록 상쾌한 아침과
당신이 좋아하는
빛나는 내 머리칼과
푸르고 금빛나는 내 눈을.

만일 그대가 원한다면
나 그대에게 드리렵니다
따스한 햇살 비치는 곳에서
눈뜰 때 들려오는 온갖 소리와
분수에서 들리는
흐르는 물줄기의 아름다운 소리를.

마침내 찾아들 석양 노을과
쓸쓸한 내 마음으로 얼룩진 저녁,
조그만 내 손과
당신 가까이에
놓아두고 싶은
나의 마음을.

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
(painting; Muse Inspiring the Poet. Portrait of Apollinaire and Marie Laurencin, by Henri Rousseau,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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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아폴리네르는 이탈리아의 시인이며 예술 평론가였다. 피카소 등과 입체파 미학을 확립하고 20세기 초반의 전위적 예술 활동에 참가하면서 모더니즘을 이끌어 갔다.

"당신 가까이 놓아두고 싶은 마음"보다 더 큰 선물이 있을까? 나를 다 주도록 사랑하는 그 사랑은 계속 되어야 할 일이다. 그렇게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 가까이 놓아두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해준 그 상대가 더 큰 선물이리라. 그건 그렇고 이장희씨는 아폴리네르를 알았을까?

예배와 기도는 마음과 태도의 문제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다시 한번 나의 마음을 그분 가까이 놓아 드리기로 결심한다. 비록 빛나는 머리칼이나 푸르고 금빛나는 눈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 모나고 거친 마음에 실수 투성이인 허물 많은 나라도 목숨을 다해 사랑하시는 그분에게 내 마음과 정성을 모아 드릴 일이다. 애쓰고 힘쓰기 전에, 그분을 향한 그 애틋한 마음이 왜 덤덤해 졌는 가를 점검하고 평가해 볼 일이다. 그분의 깊고도 깊은 사랑에 충만히 졌도록 나를 그 거룩한 지성소 안으로 들일 일이다. 그래서 그분의 신실하신 사랑에 고요히 나를 잠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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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1.2009

하나님의 날에

하나님의 날
성전에 와 앉았다.

벽 사이 십자가 틈으로
따스한 빛 한줄기
내 몸에 내려 앉는다.

환희 웃으시는
예수의 얼굴
그 따스한 미소로
내 영혼에 와 닿았다.

차갑고 어두운
거부할 수 없는 기운에 눌려
애쓰고 고닳픈 영혼

그 감춰진 곤고함을 뚫고
강렬한 사랑의 생명으로
떨리는 울림으로
내 영혼을 감싸 흘렀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 하도록
나로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값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

찬미하며 드린 그 노래
눈물 사이로
나는 묻는다.

왜 내게 이런 은혜를 주실까?
왜 나를 이렇게 사랑하실까?

예수의 사랑은
원수 사랑이라

원수된 나를 위해
몸버려 사랑하신
예수를 위해
나도 그렇게

몸버려 내 원수 품기를
몸태워 빛이 되기를
녹아져 소금이 되기를

불가능한 사랑
순종의 열매
나의 사랑 예수처럼

사랑하며 죽고
사랑하며 살기를
매일 매일이
하나님의 날 되기를

나 하나님의 날에
그렇게 기도드렸다.

bk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푸쉬킨 (Alekasandr Sergeyevich Pushikin, 1799-1837)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오
슬픔을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쁜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오늘이 한없이 우울하다 해도
모든 것은 한순간에 지나가는 것이리
그리고 지나간 것은 그리워지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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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 러시아의 암울한 상황에서 푸쉬킨은 인내와 소망을 노래했다.
그러나,
오늘이 너무 밝고 아름다워 그래서 슬프다면 어떨까?
지나가는 한 순간이 안타까워 그래서 슬프다면 어떨까?
이미 지난 그리움을 꿈꾸며 그래서 슬프다면 어떨까?



8.27.2009

천천히 설교합시다.

천천히 설교합시다

요즘 다른 목사의 설교집을 제법 많이 읽었습니다. 인터넷이나 기독교 방송을 통해서 여러 분의 설교도 직접 들었습니다. 옛날부터 느낀 바이지만, 설교자들이 청중을 너무 어린애 다루듯이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아이의 특성은, 독립적으로 생각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결정해주면 그저 따르는 것으로 만족해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판단 능력이 없을 때도 있지만, 있다고 하더라도 정서적으로 의존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합니다. 어린이들이 담임선생님 말씀을 무조건 순종하듯이 신자들은 목사의 설교를 그렇게 순종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목사들은 신자들을 그렇게 어린애로 만들어놓아야 설교하기가 쉽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 신자들의 유아성은 너무 심각한 상태입니다. 심지어 대학교 선생이나 의사·변호사 등 나름대로 사회 지도층 인사인데도 불구하고 신앙 부분에서는 어린애와 똑같습니다.
이런 상황을 목사들은 속으로 즐겁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국 한국 교회의 토대가 위태로워지는 길입니다. 약간 다른 상황이지만 니체는 이런 유럽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가리켜 '가축떼' 윤리라고 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사육되는 가축 말입니다.

나는 니체의 비판이 그렇게 빗나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의 신자들은 '가축떼'로 사육되고 있습니다. '순종하라'는 말씀을 목사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린애가 어머니의 젖을 먹고 만족하듯이 종교적 만족감에 젖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본 회퍼가 말하는 '값싼 은혜'이기도 합니다. 값싼 은혜에 만족하고 아무런 영적 에너지를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요? 그 문제를 지금은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목사의 설교가 너무 조급증에 빠져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만 합니다. 설교자들이 너무 설치는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말을 너무 많이 합니다. 겨우 성서 내용을 정보로만 알고 있으면서 대단한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열을 올립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격언이 딱 어울립니다.

저는 그런 목사들의 설교를 듣고 나면 너무 허무해집니다. 자신이 아는 것만큼만 정직하게 설교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성령이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그 설교를 완성시키십니다. 그 비밀을 모르는 설교자들은 자신이 당장 청중의 신앙적 결단을 끌어내기 위해서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쏟아놓습니다. 본인이나 청중이나 허탈해집니다. 그런 허탈을 모면하기 위해서 자극적인 예화를 끌어들이거나 신앙을 과장합니다.

우리 설교자들, 조급하게 설교하지 맙시다. 구원은 우리의 말재주가 아니라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하십니다. 우리의 영역이 줄어들어야 영의 영역이 늘어납니다.
천천히 목회하고 천천히 설교합시다. 우리의 주제를 잘 파악하고 그분에게 많은 부분을 맡깁시다. 그래도 교회는 잘 굴러갈 테니까, 그래도 신자들의 신앙은 줄어들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맙시다.

정용섭 / 샘터교회 목사·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Pasted fr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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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 만큼, 경험한 것 만큼, 삶으로 체득한 것 만큼만 설교해야 할 일이다. 풍부한 언어와 현란한 수사, 정교한 논리, 깜짝 놀랄만한 통찰에 집착하게 될 때, 사람을 잠시 설득할 수는 있겠으나, 오히려 자신과 공동체를 진리와 성령의 초월적 은혜의 자리에 깊이 머무르게 하는 것을 방해할 소지가 더 많다. 진리는 단순하며 인격적이다. 그 진리가 오셔서 성령의 역동적 역사로 일하실 수 있도록 천천히, 차분히, 그리고 진리를 실천함으로 설교해야 한다. 내 삶이 설교가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필요 이상의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꼭 필요한 것과 행해야 할 것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전달하고는 그대로 행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복음은 말의 지혜에 제한 받지 않는다 (고전 1:17). 오히려 나의 말과 행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구속당해야 할 것이며, 그러할 때 드러나는 삼위 하나님의 초월적 역사를 공동체가 함께 경험하도록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공동체의 구성원 하나 하나가 주체적으로 말씀을 통해 세상과 자신을 깊이 반추하여 각성하고 지혜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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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3.2009

은혜의 통로들

"기도할 때 어떤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양심을 통해 들으면서 하나님을 체험한다. 성경을 읽을 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 대해 직접 하는 말로 받아들여지면서 하나님을 체험한다. 우리의 도움과 참여를 필요로 하는 현장에서 자기를 바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때, 그곳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한다."

후광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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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과 이성, 그리고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는 체험된다. 지,정,의의 조화와 균형 속에서 경험된 하나님을 간결하게 증언하였다.
bk

8.21.2009

사랑하는 당신에게


















허물과 약점, 실수를 너그럽게 품고 용서하는 남편,
아픔과 고난의 현실을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극복하는 남편,
소명의 자리에서 고귀한 가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인내로 투쟁하는 남편으로 기억되도록 성실이 살아가기를 기도한다.

bk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선생님의 마지막 일기 중

2009년 1월 6일
오늘은 나의 85회 생일이다. 돌아보면 파란만장의 일생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투쟁한 일생이었고, 경제를 살리고 남북 화해의 길을 여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일생이었다. 내가 살아온 길에 미흡한 점은 있으나 후회는 없다.

1월 7일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
1월 11일
오늘은 날씨가 몹시 춥다. 그러나 일기는 화창하다. 점심 먹고 아내와 같이 한강변을 드라이브했다. 요즘 아내와의 사이는 우리 결혼 이래 최상이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아내 없이는 지금 내가 있기 어려웠지만 현재도 살기 힘들 것 같다. 둘이 건강하게 오래 살도록 매일매일 하느님께 같이 기도한다.
1월 14일
인생은 얼마만큼 오래 살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얼마만큼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았느냐가 문제다. 그것은 얼마만큼 이웃을 위해서, 그것도 고통받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살았느냐가 문제다.
1월 15일
긴 인생이었다. 나는 일생을 예수님의 눌린 자들을 위해 헌신하라는 교훈을 받들고 살아왔다. 납치, 사형 언도, 투옥, 감시,
도청 등 수없는 박해 속에서도 역사와 국민을 믿고 살아왔다. 앞으로도 생이 있는 한 길을 갈 것이다.
1월 16일
역사상 모든 독재자들은 자기만은 잘 대비해서 전철을 밟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 전철을 밟거나 역사의 가혹한 심판을 받는다.

1월 17일
그저께 외신기자 클럽의 연설과 질의응답은 신문, 방송에서도 잘 보도되고 네티즌들의 반응도 크다. 여러 네티즌들의 ‘다시 한 번 대통령 해달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다시 보고 싶다, 답답하다, 슬프다’는 댓글을 볼 때 국민이 불쌍해서 눈물이 난다. 몸은 늙고 병들었지만 힘닿는 데까지 헌신, 노력하겠다.
1월 20일
용산구의 건물
철거 과정에서 단속 경찰의 난폭진압으로 5인이 죽고 10여 인이 부상 입원했다. 참으로 야만적인 처사다. 이 추운 겨울에 쫓겨나는 빈민들의 처지가 너무 눈물겹다.
1월 26일
오늘은 설날이다. 수백만의 시민들이 귀성길을 오고가고 있다. 날씨가 매우 추워 고생이 크고 사고도 자주 일어날 것 같다. 가난한 사람들, 임금을 못 받은 사람들, 주지 못한 사람들, 그들에게는 설날이 큰 고통이다.
2월 4일
비서관회의 주재. 박지원 실장 보고에 의하면 나에 대해서 허위사실을 공표한 한나라당 의원에 대해서(100억 CD) 대검에서 조사한 결과 나는 아무런 관계 없다고 발표. 너무도 긴 세월 동안 ‘용공’이니 ‘비자금 은닉’이니 한 것, 이번은 법적 심판받을 것. 그 의원은 아내가 6조원을 은행에 가지고 있다고도 발표, 이것도 법의 심판을 받을 것.
2월 7일
하루종일 아내와 같이 집에서 지냈다. 둘이 있는 것이 기쁘다.
2월 17일
명동
성당에 안치된 김수환 추기경의 시신 앞에서 감사를 드리고 천국영생을 빌었다. 평소 얼굴 모습보다 더 맑은 얼굴 모습이었다. 역시 위대한 성직자의 사후 모습이구나 하는 감동을 받았다.
2월 20일
방한 중인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으로부터 출국 중
전용기 안에서 전화가 왔다. 그는 전화로 1. 클린턴 대통령의 안부 2. 과거 자기 내외와 같이 있을 때의 좋았던 기억 3. 나의 재임시의 외환위기 수습과 북한 방문시 보여준 리더십 4. 다음 왔을 때는 꼭 직접 만나고 싶다 5. 남편 클린턴 대통령도 나를 만나기를 바라고 있다고 했다.
힐러리 여사가 뜻밖에 전화한 것은 나의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 표명으로 한국 정부와 북한 당국에 대한 메시지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아무튼 클린턴 내외분의 배려와 우정에는 감사할 뿐이다.
3월 10일
미국의 북한 핵문제 특사인 보즈워스씨가 방한했다가 떠나기 직전 인천공항에서 전화를 했다. 개인적 친분도 있지만 한국 정부에 내가 추진하던 햇볕정책에의 관심의 메시지를 보낸 거라고 외신들은 전한다.
3월 18일
투석치료. 혈액검사, X레이 검사 결과 모두 양호. 신장을 안전하게 치료하는 발명이 나왔으면 좋겠다. 다리 힘이 약해져 조금 먼 거리도 걷기 힘들다.
인류의 역사는 맑스의 이론같이 경제형태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이 헤게모니를 쥔 역사 같다.
1. 봉건시대는 농민은 무식하고 소수의 왕과 귀족 그리고 관료만이 지식을 가지고 국가 운영을 담당했다.
2. 자본주의 시대는 지식과 돈을 겸해서 가진 부르주아지가 패권을 장악하고 절대다수의 노동자 농민은 피지배층이었다.
3. 산업사회의 성장과 더불어 노동자도 교육을 받고 또한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 노동자와 합류해서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4. 21세기 들어 전 국민이 지식을 갖게 되자 직접적으로 국정에 참가하기 시작하고 있다.
2008년 촛불시위가 그 조짐을 말해주고 있다.
4월 14일
북한이 예상대로 유엔 안보리의 의장성명에 반발해 6자회담 불참, 핵개발 재추진 등 발표. 예상했던 일이다. 6자회담 복구하되 그 사이에 미국과 1 대 1 결판으로 실질적인 합의를 보지 않겠는가 싶다.
4월 18일
노무현 전 대통령 일가와 인척, 측근들이 줄지어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노 대통령도 사법처리될 모양. 큰 불행이다. 노 대통령 개인을 위해서도, 야당을 위해서도, 같은 진보진영 대통령이었던 나를 위해서도, 불행이다. 노 대통령이 잘 대응하기를 바란다.
4월 24일
14년 만에 고향 방문. 선산에 가서 배례. 하의대리 덕봉서원 방문. 하의 초등학교 방문, 내가 3년간 배우던 곳이다. 어린이들의 활달하고 기쁨에 찬 태도에 감동했다. 여기저기 도는 동안 부슬비가 와서 매우 걱정했으나 무사히 마쳤다. 하의도민의 환영의 열기가 너무도 대단하였다. 행복한 고향 방문이었다.
4월 27일
투석치료. 4시간 누워 있기가 힘들다. 그러나 치료 덕으로 활동할 수 있는 것 크게 감사. 나는 많은 고생도 했지만 여러 가지 남다른 성공도 했다. 나이도 85세. 이 세상 바랄 것이 무엇 있는가. 끝까지 건강 유지하여 지금의 3대 위기-민주주의 위기, 중소서민 경제위기, 남북문제 위기 해결을 위해 필요한 조언과 노력을 하겠다. ‘찬미예수 백세건강’
5월 1일
이제 아름다운 꽃의 계절이자 훈풍의 계절이 왔다. 꽃을 많이 봤으면 좋겠다. 마당의 진달래와 연대 뒷동산의 진달래가 이미 졌다. 지금 우리 마당에는 영산홍과 철쭉꽃이 보기 좋게 피어 있다.
5월 2일
종일 집에서 독서, TV, 아내와의 대화로 소일. 조용하고 기분 좋은 5월의 초여름이다. 살아있다는 것이 행복이고 아내와 좋은 사이라는 것이 행복이고 건강도 괜찮은 편인 것이 행복이다. 생활에 특별한 고통이 없는 것이 옛날 청장년 때의 빈궁 시대에 비하면 행복하다. 불행을 세자면 한이 없고, 행복을 세어도 한이 없다. 인생은 이러한 행복과 불행의 도전과 응전 관계다. 어느 쪽을 택하느냐가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할 것이다.
5월 18일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이 내한한 길에 나를 초청하여 만찬을 같이했다. 언제나 다정한 친구다. 대북정책 등에 대해서 논의하고 나의 메모를 주었다. 힐러리 국무장관에 보낼 문서도 포함했다. 우리의 대화는 진지하고 유쾌했다.
5월 20일
걷기가 다시 힘들다. 집안에서조차 휠체어를 탈 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하다. 좋은 아내가 건강하게 옆에 있다. 나를 도와주는 비서들이 성심성의 애쓰고 있다. 85세의 나이지만 세계가 잊지 않고 초청하고 찾아온다. 감사하고 보람 있는 생애다.
5월 22일
버마 혁명민주지도자 등 수명이 내방. 민주화에 대해서, 나는 “버마는 외국의 지지는 충분히 얻고 있으니 이를 활용해서 안에서 국민이 자력으로 쟁취하도록 노력하시오”라고 격려했다.
5월 23일
자고 나니 청천벽력 같은 소식-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다는 보도. 슬프고 충격적이다. 그간 검찰이 너무도 가혹하게 수사를 했다. 노 대통령, 부인, 아들, 딸, 형, 조카사위 등 마치 소탕작전을 하듯 공격했다. 그리고 매일같이 수사기밀 발표가 금지된 법을 어기며 언론플레이를 했다. 그리고 노 대통령의 신병을 구속하느니 마느니 등 심리적 압박을 계속했다. 결국 노 대통령의 자살은 강요된 거나 마찬가지다.
5월 24일
노 대통령
장례식을 정부와 측근들은 국민장을 주장하는데 가족은 가족장을 주장해 결말을 못 보았다. 박지원 의원 시켜서 ‘노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 살았고 국민은 그를 사랑해 대통령까지 시켰다. 그러니 국민이 바라는 대로 국민장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전했는데 측근들이 이 논리로 가족을 설득했다 한다.
5월 25일
북의 2차 핵실험은 참으로 개탄스럽다.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의 태도도 아쉽다. 북의 기대와 달리 대북정책 발표를 질질 끌었다.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 주력하고 이란, 시리아,
러시아, 쿠바까지 관계개선 의사를 표시하면서 북한만 제외시켰다. 이러한 미숙함이 북한으로 하여금 미국의 관심을 끌게 하기 위해서 핵실험을 강행하게 한 것 같다.
5월 29일
고 노 대통령 영결식에 아내와 같이 참석했다. 이번처럼 거국적인 애도는 일찍이 그 예가 없을 것이다. 국민의 현실에 대한 실망, 분노, 슬픔이 노 대통령의 그것과 겹친 것 같다. 앞으로도 정부가 강압일변도로 나갔다가는 큰 변을 면치 못할 것이다.
5월 30일
손자 종대에게 나의 일생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고 이웃사랑이 믿음과 인생살이의 핵심인 것을 강조했다.
6월 2일
71년 국회의원 선거시 박 정권의 살해음모로 트럭에 치어 다친
허벅지 관절이 매우 불편해져서 김성윤 박사에게 치료를 받았다.

공동체를 세우는 예배

예배공동체를 세우는 예배사역 Worship Ministry For Building a Worshiping Community

오늘날 예배사역은 곧 예배이벤트(worship event)와 예배상품(worship product)을 의미하는 것으로 더욱 보편화 되어지고 있는 것 같다. "오늘 예배가 너무 좋았다"라는 말은 예배인도자와 예배기획자가 듣기에 기분좋은 말인건 사실이지만 그런 평가로 예배가 성공적이었다고 자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오늘날 예배사역의 무게가 지나치게 '개인적인 예배체험을 만들어내는 것(creating personal worship experience)'에 집중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 예배체험'이 예배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 사람들은 예배인도자와 기획자들에게 자신들의 눈과 귀를 맡긴채 '자, 최고의 예배의 경험으로 나를 인도해 보시죠.'라는 태도로 예배에 참여하고 또 예배상품을 구입한다. 예배이벤트와 예배상품이 만족할 만한 개인적 예배의 체험을 만들어 냈을 때 사람들은 '예배 참 좋았어'라고 말한다. 그리고 예배사역자, 예배기획자들은 이러한 경험을 안겨주기 위해 더 화려한 조명과 음향, 미디어등을 통한 기획효과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 개인적인 예배의 체험(personal worship experience)을 만들어 내기 위한 예배사역은 결국 모든 힘이 worship production에 집중될 수 밖에 없으며 '예배사역은 곧 개인의 예배체험을 만들어 내기 위한 예배프로덕션'이라는 공식에 대한 염려와 우려의 목소리들이 늘어나고 있다.

사실 문제는 예배프로덕션 자체가 아니라 예배프로덕션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개인적인 예배의 경험을 만들어내는데 멈추고 있다는 것이다. 예배사역의 궁극적인 목표는 개인적인 '예배의 경험을 만들어 내는 것(creating personal worship experience)'에서 멈추어선 안되며 '예배공동체를 세우는 것(building a worshiping community)'이 되어야 한다. 예배이벤트와 예배상품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예배공동체를 세우겠다는 목표를 갖고 예배이벤트와 상품을 기획하고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적 예배체험을 만들어내는 예배사역과 예배공동체를 세우는 예배사역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도록 하자. 개인적 예배체험을 만들어 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예배사역은 모든 힘을 창조성(creativity)에 집중시킨다. Emphasizing creativity for producing personal worship experience 매주 예배이벤트에 참가하는 개인들에게 개인적 예배체험을 선사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사람들의 현실적 필요(felt-need)로 부터 예배의 주제(central theme of worship)의 논의가 시작된다. 예배의 주제를 정할때는 주제가 사람들의 실제적 삶의 필요에 얼마나 적합한가(relevant)가 최고의 관심요소가 된다. 사람들의 삶과 관련 없게(ir-relevant) 여겨지는 주제들은 예배의 주제에서 외면당하기 쉽다. 사람들의 관심과 필요가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해 예배의 주제를 정하면 이제는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이 그 주제을 머리로 이해 할 뿐 아니라 가슴으로 느낄 수 있도록 다감도(multi-sensory) 예배기획이 이뤄지며 이러한 예배기획에서는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개인적인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예배의 창조성(creativity)에 모든 힘이 모아진다. 즉 창조적인 기획력을 통해서 예배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강한 개인적 임팩트를 주는 것이 목적이 된다. 즉 사람들의 실제적인 필요에 입각한 central theme을 중심으로 메세지가 준비되고 creative elements를 총동원하여 사람들에게 강한 개인적 임팩트를 주는 것이다.

이러한 단회적 이벤트 중심의 예배프로덕션이 다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예배공동체를 세우겠다는 큰 목표가 없을 때 몇가지 문제점이 발생하게 되는데 첫째, 예배의 강한 임팩트가 철저히 개인적인 경험이라는 점이다. 극장이나 콘서트홀에서 청중은 같은 내용의 영화와 공연에 울고 웃지만 이런 경험은 철저히 개인적인 경험이며 쇼가 진행되는 동안 그리고 끝나고 나서도 공동체적인 성숙에 이르게 하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예배가운데서도 군중속의 고독을 느끼고 있다. 둘째, 예배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반응이 아닌 프로덕션에 의한 반응으로 끝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음악, 조명, 무대디자인, 미디어등을 통해 우리는 믿는자들의 모임가운데 임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도록 도와야 하는데 이것이 돕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대신하는(replace) 착각을 일으킬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가 아닌 창조적 프로덕션에 대한 반응은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움직일 수는 있어도 내면의 진정한 변화로 이어질 수 없을 것이다. 셋째, 예배기획의 목표가 예배의 경험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계속해서 예배의 경험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주제들만을 물색하게 된다. 사실 교회의 예배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실제적인 필요와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는 것을 뛰어넘어 성경전체에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스토리를 연속적으로 배우고 그에 반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성경통독을 하다보면 각 장을 읽을 때마다 황홀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지루한 장도 있고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장도 있다. 그러나 이모든 장들이 연결되어 결국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연속적으로 계시하며 하나님의 스토리를 완성해 가고 있음으로 우리의 예배가운데 연속적인 하나님의 스토리를 다루어야 한다.

예배공동체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는 예배사역은 모든 힘을 연속성(continuity)에 집중시킨다. Emphasizing continuity for building a worshiping community 오늘날 개인적 예배체험에 무게를 두는 예배프로덕션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 두가지는 예배의 공동체성 상실과 예배의 비연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예배는 그 시작이 믿는자의 개인적인 경험일 수 있지만 결론적으로 공동체적 행위이며 예배신학과 교회론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교회의 책임있는 일원이 되지 않고서도 이벤트와 상품을 통해 얼마든지 만족할 만한 예배를 경험할 수 있다. 또는 교회안의 예배사역이 교회의 목적들인 예배, 양육, 봉사, 선교, 교제의 중요성을 모두 균형있게 인식하지 않고 교회안의 다른 사역부서들과는 철저히 분리되어져 진행될 수 있으며 이러한 예배사역은 건강한 교회론에서 벗어난 예배체험만을 찾는 예배체험중독증에 빠진 비정상적 예배자들을 양산할 수 있다. 건강한 예배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안의 모든 부서들이 예배하는 부서들이 되어야 하며 교회의 모든 사역들이 예배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교회의 모든 세대들이 예배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한번의 예배를 디자인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어떻게 하면 교회의 모든 부서들과 모든 세대들로 예배하는 공동체가 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비연속적인 주제들을 바꿔가며 그때마다 감동을 선사하려는 단기적인 시도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스토리를 연속적으로 계시하며 궁극적으로 교회안의 모든 부서와 모든 세대가 예배하는 예배공동체를 세우려는 장기력인 노력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노력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로 하여금 '교회력(Christian year)'에 근거한 예배디자인을 하도록 했는데 마치 오늘날 우리가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 처럼 교회의 예배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 부활과 성령의 강림등을 중심으로 매년 반복되도록 하였다. 교회의 상황에 따라 교회력을 모두 적용할 수 있는 교회와 일부만 적용할 수 있는 교회들이 있겠지만 예배사역자, 기획자라면 충분히 교회력을 연구해 볼 가치가 있으며 일부만 적용하더라도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벤트성 예배가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 비연속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마치 영화을 볼 때는 울고 웃으며 영화에 동화가 되다가도 영화가 끝나고 영화관을 나오면 다시 현실로 돌아와 그 영화가 나의 삶과 아무 상관 없어지듯이 오늘날 예배의 체험역시 교회건물을 나옴과 동시에 그냥 하나의 좋은 경험으로 남게되는 현상말이다. 이것은 예배가 반드시 180도 사람들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가 예배가운데 만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와 관련되어있다. 우리가 매주 예배가운데 만나는 하나님이 진정 성경이 계시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형식과 장소는 다를 지라도 반드시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 이어져야 한다. 나는 예배의 연속성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예배사역자와 기획자들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벤트로서의 예배와 삶의 예배의 연속성이 우리 예배사역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실 삶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벤트적예배로 모일때마다 서로에게 주기적으로 상기시키고 있다. 하지만 삶으로 예배한다는 것이 실제로 어떤 의미인가를 모델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어디에서 예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를 예배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신 예수님의 가르침처럼(요4장) 어디에 있던지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는 삶이 예배자의 삶이라는 것을 살아있는 모델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미국 달라스의 직장에서 일할 때 하루에 몇차례씩 시간을 정해 놓고 정해진 장소에 가서 기도하는 무슬림들을 보았다. 또 그들은 라마단이라는 장기간의 금식기도기간을 직장에서도 이행하는 것을 보았다. 이에 자극을 받고 나는 직장동료 크리스찬들에게 일시작하기전 아침이나 점심시간을 이용해 만나서 성도의 교제를 하자고 제안했으나 "교회에서 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느냐 왜 직장에서까지 만나야 하느냐"라는 답을 받았을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무슬림들에게서 예배의 연속성을 발견한 것이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예배당안에서만 거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연속적인 예배운동이 필요하다. 당신이 예배기획자라면 주일예배에 최고의 예배의 경험을 선사하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월요예배자의 모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며 주중 가정예배를 위한 지침과 자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소그룹으로 모였을때 할 수 있는 예배를 도울 수 있을것이며 연속적인 중보기도운동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예배사역과 예배프로덕션의 목적은 예배의 체험이 아니라 예배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이다. 예배공동체는 결국 어디서나 그들의 삶가운데 연속적으로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의 연합체인만큼 예배사역자들의 모든 예배기획은 교회의 모든 부서와 교회의 모든 세대들을 전인격적인 예배자로 양성하는데 무게를 두고 장기간의 계획과 노력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매주 한번 예배인도하는 것 외에 자신이 섬기는 공동체의 모든 부서와 모든 세대가 연속적으로 예배하도록 돕기위해 어떤 총체적인 그림과 계획을 갖고 있는가, 또 어떠한 장기적인 노력이 필요한가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김재우 (King's Region, Journey of Faith Church)
Magnifying the Glory of God among all peoples - kingsregion.org

삶이 예배여야 하며 예배의 전제는 믿음의 공동체라는 기초를 잘 설명해 주는 글을 만났다. 예배, 특히 예전으로서의 공동체 예배가 한 사람의 신념 형성과 유지, 그리고 확장에 어떤 영향을 주는 지, 그리고 예배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는지에 대해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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