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1983년 Edward Farley (professor of Theology at Vanderbilt Divinity School, Nashville, Tennessee) 가 내놓은 이론 (Theologia: The Fragmentation and Unity of Theological Education)은 교회와 신학 사이의 단절에 대한 신학 논쟁에 불을 던졌다. 신학자들은 신학을 '과학화'함으로 신학을 불신의 대상으로 만들었으며, 신학교는 과학적 신학에 적응하면서 또 다른 불신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신학과 신학 교육은 신학적 합일(theological unity)을 잃으면서 기능과 기술 중심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I-1 Farley의 주장을 긍정하고 환영한 신학자는 Charles M. Wood (Southern Methodist University)였다. Wood는 (Vision and Discernment, Scholarly, 1985) 실천적 지혜라는 주제의 의미를 역사적으로 추적하였다.
우드에 의하면 '성서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목회학'의 4중적 형식의 신학교육은 16세기 종교개혁에 뒤따른 목회자 양성의 필요성에 따라 고착화 되었다고 주장한다.
16세기 성서신학의 일차적 목표는 신학생이 성서를 통해 신앙을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신학적인 성서주석의 기술을 습득하게 하는 것이었다. 조직신학의 목표는 신학생들에게 성경의 교리적 내용을 합리적으로 이해시키며 장차 그 내용을 교육하고 논쟁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역사신학은 과거의 역사와 전통을 이해함으로 교회와 세계 역사 뒤에 흐르는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의 패턴을 보게 하고, 그러한 관점으로 현재의 상황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었다. 목회학은 신앙 공동체의 상황과 신학 과목을 결합하여 목회의 본질과 의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우드에 따르면 18세기 산업혁명에서 대두된 '과학주의 (scientism)' 는 현대 대학을 태동시켰으며 아울러 신학의 상황마저 바꾸어 놓았다. 성서신학은 성서비평으로, 조직신학은 철학적 논쟁으로, 역사신학은 종교사로, 그리고 목회학은 학문의 반열에서 추방되었다. 이때부터 신학은 신학적 통전성을 잃기 시작했으며, 실천성practicality 마저 잃은 채 교회와 신학이 갈라지게 되었다.
II. 한편, Joseph C. Hough (Union Theological Seminary)와 과정신학자 John B. Cobb (School of Theology Claremont) 는 우드가 Vision and Discernment를 편찬한 같은 해에 Christian Identity and Theological Education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Hough and Cobb은 Farley의 이론이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추상적이며 형식적'이라고 비판했다.
이 두 학자들은 오늘의 신학교와 교회 사이의 문제는 과학주의에 적응하려 했던 4중적 신학교육의 변질이 문제라기 보다는, 16세기의 목회자양성을 위한 4중적 신학교육 시스템과 변화된 현대의 목회자의 역할 사이의 거대한 괴리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호우와 콥에 의하면, 16-17세기의 신학교육은 '스승, 교사, 지식인'상의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한 커리큘럼 구조였다. 지식인으로서 목사는 고전어, 성경, 역사, 철학, 논리학등을 통달한 스승이었으며 목회의 권위는 잘 가르치는 것에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부흥운동과 종교의 무한경쟁으로 목회자는 지식인에서 설득력있는 웅변가로 바뀌었다. 부흥사와 설교가들이 급부성하였으며 여기서부터 신학 교육과 교회는 서서히 불협화음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19세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목회자는 회중을 모으고 교회 건물을 짓고 제도를 만들어내는 조직의 건설자(Builder)로 바뀌었으며, 20세기 중반에는 목회를 하면서 교회를 경영하는 지도자, 경영자, 치유자로 목회자상이 급변하였다.
그러기에 오늘의 신학 교육의 문제는 지식인 양성을 위해 만들어 놓은 Academic Norms학문적 규범과 변화된 목회자상이 요구하는 Professional Norms전문적/기능적/직업적 규범 사이의 공백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코우와 홉은 학문적 규범과 전문적 규범 사이를 연결하는 새 목회자상을 Reflective Practitioner or Practical Theologian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리고 6학기 새 커리큘럼 시안까지 제시하였다.
III. 호우는 1988년 이미 고인이 된 James F. Hopewell을 기념하는 책을 편집하면서 새로운 신학교육의 대안을 제시하였다. Hopewell은 Beyond Clericalism: The Congregation as a Focus for Theological Education에서 목회자 패러다임 clerical paradigm 은 성직자 후보인 신학생 개개인의 신앙적 순례와 직업적 윤각에 초점을 맞출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개인의 발달단계와 기능주의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 태생적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신학교육이 성직자 하나만을 양성하는 일에 집중하는 동안, 정작 성직자를 통해 구현되는 궁극적 목표인 구속적 공동체redemptive community의 형성은 외면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신학교육이 "성직자 양성"에만 집중하면, 목회는 성직자 개인에게 시작되고 교회공동체는 그 한 성직자에게 모든 것을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사실상 교회 공동체는 신학과 신학 교육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성직자만이 존재하였다. 여기에 실패의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Hopewell은 여기서 혁명적인 제안을 한다. 그는 신학교육을 "목회자" 패러다임에서 "회중congregation"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것을 촉구한다. 마치 법학 교육이 타협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정의 공동체'의 실현인 것 같이, 의학교육이 '질병 치료'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사회'를 건설하는 것과 같이 신학교육이 '목회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사회의 대안인 구속 공동체'를 세우는 일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속적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신학교육은 어떤 것이며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우선적으로 우리의 신앙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모든 신앙인은 하나님 앞에서 실천적이며 책임감있는 신앙을 형성하고 그 신앙이 구체적인 삶에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신앙이 자기 자신과 이웃, 그리고 사회와 세계앞에서 구체적이고 책임있게 실현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회자와 신학자들의 임무이다. 신학은 신학자의 독점물 이기 이전에 모든 신앙인의 성찰의 과정이며 더 나아가 신앙공동체를 통해서만 가능한 작업이다. 신학의 자궁은 신앙공동체이다. 신앙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을 신학화하고 신학을 실천할 수 있는 교회공동체를 만들도록 해야 한다. 신학교육은 선장만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큰 배를 공동적으로 움직여 갈 수 있는 공동체를 위한 훈련의 장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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