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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2009

용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신의 죄를 보고 두려워 떨어 본 일이 있는 사람은 형제의 어떤 무서운 죄에도 놀라지 않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신도들의 공동생활, 152

내 인생은 십자수

My Life
- Anonymous

My life is but a weaving, between my God and me,
I do not choose the colors, He worketh steadily.

Of times He weave the sorrow, and I in foolish pride,
Forget He sees the upper, and I the underside.

Not till the loom is silent, and shuttles cease to fly,
Will God unroll the canvas and explain the reason why.

The dark threads are as needful in the skillful weaver’s hand,
As the threads of gold and silver in the pattern He has planned.


내 인생

내 인생은
하나님과 나, 둘이서 꾸며가는 십자수라네
나 아무런 색상도 고르지 못할 때
그 분의 손길은 여전히 바쁘다오

때론 칙칙한 실 꿰어가는 그 분을 보며
내 눈가에
불만이 차 오른다네
그 분의 시선 머무는 곳을 벌써 잊었기 때문이라오

꿰메고 자르고 잇대어 옹쳐 매고
머지 않아 바지런한 두 손을 멈춘다네
그림 펼쳐들고 그 분이 친히 설명하신다오
그 때는 왜 그렇게 하셨는지

나 원치 않던 어두운 실들도
청실 홍실만큼이나 소중하다네
내 인생 가꾸시는 그 분의 계획 속에
이 모든 것 어우러짐을 그제서야 보게 된다오…

3.29.2009

동양과 서양

동양과 서양의 문화차이는 의사소통에서도 큰 차이를 만들어 낸다.
메세지의 내용 뿐만 아니라 의사전달의 통로인 언어의 문장구조와 구문syntax도 큰 차이를 보인다. 다음 문장들을 관찰하면서 차이점을 찾아보자. 그리고 왜 그런 차이들이 나타나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자.

동: 접시가 깨졌네
서: I broke the plate.

동: 버스가 벌서 떠나 버렸어요.
서: I missed the bus.

동: 문제가 있어. 잘 되겠지만 말이야.
서: I have a problem. Let's talk about it.

동: 잔디깎기가 고장났네. 고쳐야지.
서: I forgot to check the oil in the lawnmower and burned out the engine.

동: 라디오가 없어졌어.
서: My radio was stolen.

동: 사고가 났어.
서: I was in an accident.

차이점들:


차이들의 원인들:

3.27.2009

문화의 정의들

Culture is "the collective programming of the mind that distinguishes the members of one group or category of people from others." Hofstede, Geert. Culture and Organization. 2005. p.5


호프스테드는 문화를 "정신의 프로그램" 또는 "정신의 소프트웨어"라고 정의한다. 인간의 본성과 개성의 사이에서 문화는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습득되는 것이며 한 개인을 넘어 특정 집단이 공유하는 것이다.

3.25.2009

깊은 냄비를 주시는 하나님

늦은 밤, 도서관을 나서 집으로 가는 중 선교사님을 만났다. 사실은 선교사님이 어두운 곳에서 내 이름을 부른 통에 놀라서 섰다. 반가운 목소리로 불러주는 소리가 즐거웠고 한적한 곳에 큼직한 빡스를 어깨에 매고 있는 선교사님이 엉뚱했다. "선교사님, 이 밤에 거기서 뭐하십니까?" 싱글벙글 즐거운 목소리로 대답하신다. "아내가 기도하던 깊은 냄비를 주셨어요!"

"아내가 기도하던 깊은 냄비..." 몇마디 않고 헤어졌지만 "아내가 기도하던 깊은 냄비..."가 계속 마음 속에서 맴돌았다.

모교회에서 후원이 끊겨 기도하는 중이지만 하나님이 더 좋은 후원자들을 만나게 하실것이라며 함께 식당에서 손붙잡고 기도했던 것이 두 주 전이었다.

깊은 냄비가 필요해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하나님 깊은 냄비가 필요한데 마련해 주세요"라고 순수하고 친밀한 기도를 드렸을 사모님의 성스러운 모습이 떠올랐다.

아내의 기도를 유심히 귀담아 듣고 "깊은 냄비의 필요"를 자기 일처럼 묵상했을 선교사님의 따듯하고 책임감있는 마음이 느껴졌다.

누군가 놓아둔 박스를 어둡고 바람부는 밤에 그냥 스쳐 지나가지 않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보물 찾듯 소망의 기대를 놓치지 않는 그의 성실함과 믿음이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깊은 냄비가 거기 그렇게 놓여져 있었던 것이 결코 우연이나 운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자애롭고 치밀한 준비하심이라고 생각하는 영적 민감함과 깨어있음에 내 자신이 부끄러워 졌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그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기 위해 이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예비하시는 하나님, 나로하여금 그 현장에 참여하게 하심으로 "내가 너를 기억하며 내 손바닥에 새겼다"는 아침의 말씀을 컨펌해 주시는 놀랍고도 달콤한 하나님의 사랑에 코끗이 찡하고 가슴이 묵직하게 아려왔다.

"사랑하는 아들아 보았니? 어땠니?" 라고 물으시는 것 같아 반짝이는 별들을 향해 말씀드렸다. "깊은 냄비의 사랑을 보여주신 아버지, 사랑합니다."

3.25.09, bk

사랑하다 헤어질 때

사랑하다 보면 헤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미안하다는 말 대신 고맙다고 말하자.
사랑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사랑받을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했다고. 살면서 당신을 만난 것이
가장 좋았다고. 그래서 너무나 고맙다고,
그렇게 이별의 인사를 하자.
헤어짐은 끝이 아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다시 시작되고,
사랑이 끝나는 곳에서 사랑은
다시 시작된다.


- 권소연의《사랑은 한 줄의 고백으로 온다》중에서 -


* 사랑은 때때로 헤어짐으로 끝이 납니다.
아프고 쓰리지만 '사랑의 경험'은 그대로 남아,
다음에 오는 사랑을 더 찬란하게 꽃피웁니다.
그 '사랑의 경험'을 안겨주고 떠난 사람이
고마운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헤어짐은 사랑의 종착역이 아니라
또 다른 사랑의 시작입니다.

3.18.2009

Longing to Know

Geneva College, Beaver Falls, PA

“Knowing Knowing, Knowing God: Contours of Covenant Epistemology”

Most people have never had a philosophy course; that doesn’t keep them from practicing philosophy. We all inherit “default settings,” unexamined presumptions about what knowing is, which are proving unhealthy and unbiblical. They infect every dimension of human life, including knowing God. “Epistemological therapy” thus holds the prospect of favorably impacting everything from business to Christian discipleship, athletics to scientific research. This lecture will introduce you to Meek’s “covenant epistemology,” centrally the proposal that we take, as our paradigm of all human knowing, the transformative, interpersonal, covenantally-featured relationship. We will explore its key features and the ways it accords with the Christian Scripture, commending its value for reshaping the way we engage the world, and restoring us to ourselves.

Related:

  1. Ester Meek’s personal website
  2. John Frame’s positive review of Esther Meek’s Longing to Know: Frame writes, “This is a terrific book. I can’t begin in a short review to illustrate adequately the beauty of its writing and the cogency of its reasoning. But let me just say that I have never read a serious philosophical work (and this surely is one) that is as eloquently and delightfully expressed. Meek has a wonderful gift of illustration. Analogies and pictures fly from her mind like drops of water from a great fountain. Every page contains two or three of them, so there must be hundreds in this book. You’ll read about kitchen tables, golf games, copperhead snakes, children, weddings, on and on, as Meek seeks to show us how knowing happens in all the ordinary experiences of life.”

What follows are some sketchy notes from Meeks’s thoughtful address for which the audio and video should be available soon here.

Introduction

She describes herself as “a one-trick horse” whose specialty is epistemology. Knowing isn’t more than one step removed from living.

1. Knowing as Information: The Defective Epistemic Default

Many people have powerful assumptions about knowledge. Meeks sees herself “as in the business of epistemological therapy. The way forward is to find our epistemic default layer (i.e., the default mode) and recognize that it is sick.

“Esther’s daisy of dichotomies” notes the default mode for many people. (The first item is like the center of the daisy, and the second represents the petal.)

  1. knowledge as over against belief
  2. fact : opinion
  3. fact : value
  4. reason : emotion
  5. reason : faith
  6. science : art
  7. theory : application
  8. mind : body
  9. possibly male : female

This operates as a default setting, and people have presumptive opinions about what knowledge is and isn’t. One of these binary pairs esp. affects pastors: reason and faith.

Meek’s proposal is an interpersonal, covenantally constituted relationship, i.e., what she calls covenant epistemology. Knowing is not information so much as transformation, and it involves the idea of covenant as an unfolding pers0nal relationship.

2. Knowing Is Subsidiary Focal Integrative Transformation

Illustration: learning to read.

We know that we have made contact with reality when we have a sense of the possibility of indeterminate or unspecifiable manifestations.

3. Knowing Is Covenantal

Covenant is first and foremost a relationship of mutuality involving initiative and response constituted by promises and obligations, one that unfolds over time resulting in friendship and communion.

4. Knowing Is Interpersonal

A critical and profound insight of what should be obvious: To be a person is fundamentally is not to be a reactional animal but a being in communion.

“I - it” vs. “I - you”: Information is “I - it.” An encounter is “I - you.”

Covenantal illustrations: (1) “Starbucking,” (2) dance.

5. Knowing and Being Known by God Is the Paradigm and Central Core of Human Knowing

Two necessary dimensions of situated stewardship are (1) the lived world and (2) the self that lives it. But there are two other dimensions that lie outside our own capacity to being or control: (1) any experience of the reality of the threat of not being and (2) the holy, namely, the gracious possibility of new being, a deliverance that comes outside of us and to us only when we are in the void, the other that graciously seeks our flourishing, the personal other that will not go away.

Having been known by and knowing Christ is the epistemic paradigm for all human knowing.

6. Inviting the Real: Epistemological Etiquette

We are to “invite the real,” not passively gather information or actively demand it. We must practical “epistemological etiquette.”

7. A Short Objection and Reply: What About Collecting Data?

Both knower and known are persons in personal relationship. Many might ask, “What about collecting data?” The question reflects a defective epistemic default (i.e., knowledge as information).

Conclusion

“I hope that all this draws you more deeply into loving and knowing him.”

알려는 열망

"Knowing is the responsible human struggle to rely on clues to focus on a coherent pattern and submit to its reality." Esther Meek

Meek은 Michael Polanyi를 연구한 철학자이다.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자동차 수리공을 유비하였다. 깔깔대며 웃는 유쾌한 웃음이 귀엽기까지 한 Meek은 Longing to Know라는 책에서 철학적 인식론을 일상의 언어로 생생하게 그려내는 값진 작업을 하였다.


“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Meek은 결론을 내리기 전에 철저하게 이 질문에 대해 탐구할 것을요 청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알 수 없다”는 명제 자체도 “하나님은 알 수 있다”라는 명제를 증명하는 것 만큼, 아니 보다 더 어려운 작업들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증명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성서가 증언하는 또 다른 난관인 “우리의 앎의 능력은 왜곡되고 상실되었다”는 진리 앞에 서야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어거스틴의 오랜 전통을 따라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망을 외면하고 포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존재적으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고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젖먹이의 옹알이로부터 프로이드의 왜곡된 Id까지 진리를 향한 열망은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아 프라이오리a priori이다.

도대체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어떤 의심할 수 없고 오류도 있을 수 없는 절대적 보편진리를 인식한다는 것인가? 대답은 “아니다.” 안다는 것은 의심이라는 행위와 오류의 실패를 포함하는 더 포괄적인 행위이다. 앎은 끝없는 인식의 과정이다. 결국 인간의 삶은 끝없는 알아감의 여정이며 알아가는 것은 인간됨의 행위이다.

세 상 속에 흩어진 실체의 편린들을 단서로 그리고 보여진 실체 너머에 있는 배후의 관계들을 통해 일관성cohesive있는 의미를 발견해 내는 것은 때로는 고통스럽고 무모하며, 어쩌면 너무나 어려워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정도이다. 그러나 “세상the world”은 여전히 실재하고, 세상을 인식하는 주체이며 동시에 중요한 인식의 대상이기도 한 “나body”도 실재하기에 포기할 수도 없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인식의 대상과 인식의 주체 사이의 관계를 정립해 주는 일종의 “지침/방향direction”이다 (나는 Meek의 direction보다 인식론적 방향성과 인식의 주체와의 관계성을 더 포괄적으로 설명해 주는 Geertz의 “Map” 개념을 선호한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지도의 범례keynote/legend가 되어 인식의 틀을 형성하고 기존의 틀을 계속해서 교정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삶의 복잡다단한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실체들은 정념화되어 경직되지 않고 계속 역동적으로 구성과 해체, 그리고 재구성을 거듭할 수 있도록 유연해야 한다. 진리는 단순히 감각과 인식과 언어 너머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소망과 겸손을 가지고 반응respond할 수 있다. "확실함certainty"도 절대진리를 명확히 "표현할 길"도 없기 때문에 겸손해야 할 것이며, 이러한 겸손함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인식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소망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겸손함과 소망은 세상에 대해 존재를 여는 태도이다 (피녹은 이를 인간의 "세계 개방성"이라고 불렀다. 다만 그는 이를 인간 존재의 자연스러운 본성으로 설명했지만 내가 보건대 이는 죄로 인해 왜곡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많은 중요한 본성들 중 으뜸이 되는 것이다. 자기만의 도그마에 갖혀 진리를 자기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양 법석을 부리는 경직되고 오만한 사람들속에 내가 속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증거는 충분하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세상을 향해 자신의 존재를 여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나는 세상과 연합하고 세상을 이해하며 세상에 섞여 세상을 풀어(해석해)나간다. 서양적 전통의 분석적 사고에 대한 강조는 인간의 의식에 대한 과도한 의존과 확신을전제로 하게 될 때 결국 실체로 부터의 메마른 단절만을 부추겨 결국 인간을 끝없는 고독의 무저갱에 처박아 놓게 된다. 실체와 인식의 주체는 분리될 수 없다.

인식의 행위는 인식자의 적극적이고 책임성 있는 순종과 헌신을 요청한다. 앎yadah이라는 것은 부부가 결혼을 하여 서로 알아가는 것과 같은 그런 종류의 앎이다. 완전히 다 알아 앎이 종료되는 순간은 없다. 다 만 계속해서 알아갈 뿐이다. 그리고 그 앎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필요하다. 용기와 희생과 책임이 뒤따른다. 말씀word를 통해, 세상world를 통해, 그리고 우리자신we-self를 통해 우리를 만나시는 하나님은 그래서 임마누엘이다. 나와 세상을 통해 그리고 말씀을 통해 계시는 하나님 밖에서 어떻게 내가 존재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어거스틴은 고백한다. "그러므로 나의 하나님이여, 당신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할 수가, 결단코 존재할 수가 없나이다. 아니면 이렇게도 말할 수도 있지 않겠나이까? 내가 당신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니이다…. 그러하나이다 주여… 당신은 말씀하셨나이다.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렘23:24). Confessio, I.ii.2


앎은 또한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하는 행위이다. 믿음과 이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지, 정, 의의 모든 인간됨이 총동원 되는 것이다. 보이는 것 너머의 복잡한 관계들을 성경과 성령이 지시하는 대로 민감하게 반추하여 의미를 발견하려는 적극적인 "앎의 행동"이 필요하다.

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진정한 앎은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앎은 존재와 존재의 충돌이기에 변화에 대한 용기를 요구한다. 앎은 알려지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되는 것이다. 그를 알기 전의 나와 그를 알고 난 후의 나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더할 나위 없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변화되는 것이다. 더 많이 알아갈 수록, 더 많이 변화되며, 더 많이 변화될 수록, 더 많이 알고 싶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거룩이 더해 갈 수록 죄에 대한 인식이 더 또렷하고 깊어지며 이는 더 깊은 거룩의 갈망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정말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는 지를 먼저 물을 일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만나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 않고 궁금하지 않은 담에야 "알고 싶을"리 만무하지 않은가? 알고 싶지 않은데 알 수는 없는 노릇이며, 사랑해야만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앎"을 "세상의 실체를 받아들이고 탐구하려는 인간의 책임있는 노력"으로 정의한 에스더 믹의 진술은 좀 메마른 감이 있어 아쉽다.

bk

3.12.2009

사람이 안보여

"이제 막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이나 젊은이들은 성취에 대한 집념이 크기 때문에 정작 주변의 사람들을 놓치기 쉽다. 그러나 일의 경중을 떠나 세상의 모든 일은 결국 사람에 의해, 사람을 통해, 그리고 사람을 위해 해야 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요 인간의 도리라는 것을 명심한다면 나만의 성취를 위해 이웃의 절실한 필요를 외면하는 전도본말의 우는 절대 범치 말아야 할 일이다. 소수의 리더들이 '비전'이라는 미명하에 추구하는 성취를 위해 얼마나 많은 가족공동체가 서로에게 등을 돌리며 깨어지는 가를 본다면 참된 하나님 중심신앙은 진정한 인간존중이 최고로 발현되는 현장을 통해서만 확인될 수 있다는 생각이 더욱 굳어지게 된다. 이사야의 고백처럼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자원들은 곤핍한 자들을 위로하기 위함이지 자기 자랑과 자기만족을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사50:4)"
bk

3.05.2009

신과 과학

1. The visible order of the universe proclaims a supreme intelligence.
눈에 보이는 질서정연한 우주는 최고의 지성적 존재를 웅변한다.
-Jean-Jacues Rousseau

2. Science brings men nearer to God
과학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이끈다.
-Louis Pasteur

3. Truth between candid minds can never do harm.
편견없는 지성간의 진실은 절대 해롭지 않다.
-Thomas Jefferson

4. The visible marks of extraordinary wisdom and power appear so plainly in all the works of the creation that rational creature, who will but seriously reflect on them, cannot miss the discovery of a Deity.
모든 창조사역속에 드러나는 비범한 지혜와 권능의 증표들은 너무도 명백하여서 이를 진지하게 상고하는 이성적 피조물은 하나님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John Locke

호기심

Curiosity is the thirst of the soul.
호기심은 영혼의 갈증이다.

Samuel Johnson

질문

No man really becomes a fool until he stops asking questions
질문하기를 멈추기 전 까지는 누구도 멍청하지 않다.

-Charles P. Steinmetz-

"Believe those who are seeking the truth. Doubt those who find it."
--Andre Gide
슬라이드 10

3.04.2009

불꽃놀이와 창조

나는 불꽃놀이를 좋아한다. 하나님의 창조를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어두운 밤하늘에 강력하게 솟아올라 분수처럼 흩어지는 불빛들의 향연을 보노라면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력에 경외감 마져 느껴진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마치 불꽃놀이를 하시는 것 처럼 즐겁고 재미있으셨지 않을까? 혼돈과 공허, 흑암가운데 오색찬란한 빛들이 우주를 뒤흔드는 소리와 함께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제 자리를 찾아 퍼져 나간다. 빛이 생겨난 자리에 어둠은 물러가고 열기와 생명력의 에너지들은 형형의 색들로 옷을 입고 장엄한 조화를 형성하며 밤하늘의 캔버스를 진하게 물들인다. 광대하고 아름다운 우주적 예술...

누군가는 차이코프스키가 불꽃놀이와 어울린다지만, 나는 그래도 모짜르트가 더 좋다.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올 해 독립기념일에는 아이들과 함께 폭죽놀이를 해 볼 것이다. 모짜르트를 크게 들어 놓고 말이다.

창조를 예술적 표현artistic expression 또는 놀이play로 보는 견해가 있다.
전통적으로 창조는 역사work로 인식되었다. "창조사역"이라는 말은 창조를 "일" 또는 "노동"으로 보는 견해를 반영한다. "일"이라는 단어는 댓가를 얻기 위해 지불되어야 하는 노력의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전적으로 자유로우며free 자발적spontaneous이다.

1. 창조는 자유로우며 구속이나 제한됨이 없는 행위이다. 다른 모든 예술적 표현과 같이 자유로우며, 표현적이고, 즐거우며 창조적인 행위이다.
2. 놀이로서의 창조에는 자발적 구속과 제한을 포함한다. 조화와 통일, 균형과 화합을 위한 종합적 통합성은 자발적인 자기제한을 요구한다.
3. 개채와 전체의 어우러짐은 상호 보완과 견제, 그리고 협력의 상호의존성을 근간으로 한다. 개채는 그 자체로서 완전하며 동시에 전체에 의존적이다.
4. 개채는 전체의 일부가 되었을 때 새로운 존재로 재구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