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s

Showing posts with label 영성.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영성. Show all posts

11.23.2011

한국 교회의 희망: 작은 선교적 신앙 공동체





"한국 교회의 위기는 근원적으로 영성과 도덕성과 공동체성을 상실한데 기인한다." 이원규, 종교사회학적 관점에서 본 한국교회의 위기와 희망, 2010.

한국 교회의 위기에 대해 이보다 더 간단명료하고 정확한 표현을 찾을 수 있을까?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기도가 부족하거나, 헌신이 덜 되어 있거나, 종교적 열심이 식었거나 교리를 잘 못 가르쳤거나, 신앙심이 식었거나 하는 교회의 내적 문제가 다가 아니다. 실제 신앙의 실천 문제, 또는 믿는 바와 실천사이의 괴리문제, 더 나아가서는 포스트 모더니즘, 종교다원주의, 세속화와 같은 사회의 시대적 흐름에 대한 역사의식 결여의 문제이다. 영성은 소비성으로, 도덕성은 상업성으로, 공동체성은 배타적 이기성으로 똘똘 뭉쳐진 사회를 책망할 수 있으려면 교회는 정치화된 권력과 집단적 힘을 포기하고 일반 대중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 

한국 교회의 희망에 대해서는 어떻게 간단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저자의 책에서는 단서를 찿아보기 어렵다. 종교사회학적 관점에서 현상에 대한 기술적 분석을 내놓은 책이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나는 한국교회의 유일한 희망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메타노이아(회개)"이며 이를 현실화 하는 구체적 방법은 작은 선교적 신앙공동체를 통해 희생적 사랑과 섬김을 훈련하며 이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실천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를 통해서 근원적 문제의 핵심인 영성과 도덕성과 공동체성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bk

8.21.2009

공동체를 세우는 예배

예배공동체를 세우는 예배사역 Worship Ministry For Building a Worshiping Community

오늘날 예배사역은 곧 예배이벤트(worship event)와 예배상품(worship product)을 의미하는 것으로 더욱 보편화 되어지고 있는 것 같다. "오늘 예배가 너무 좋았다"라는 말은 예배인도자와 예배기획자가 듣기에 기분좋은 말인건 사실이지만 그런 평가로 예배가 성공적이었다고 자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오늘날 예배사역의 무게가 지나치게 '개인적인 예배체험을 만들어내는 것(creating personal worship experience)'에 집중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 예배체험'이 예배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 사람들은 예배인도자와 기획자들에게 자신들의 눈과 귀를 맡긴채 '자, 최고의 예배의 경험으로 나를 인도해 보시죠.'라는 태도로 예배에 참여하고 또 예배상품을 구입한다. 예배이벤트와 예배상품이 만족할 만한 개인적 예배의 체험을 만들어 냈을 때 사람들은 '예배 참 좋았어'라고 말한다. 그리고 예배사역자, 예배기획자들은 이러한 경험을 안겨주기 위해 더 화려한 조명과 음향, 미디어등을 통한 기획효과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 개인적인 예배의 체험(personal worship experience)을 만들어 내기 위한 예배사역은 결국 모든 힘이 worship production에 집중될 수 밖에 없으며 '예배사역은 곧 개인의 예배체험을 만들어 내기 위한 예배프로덕션'이라는 공식에 대한 염려와 우려의 목소리들이 늘어나고 있다.

사실 문제는 예배프로덕션 자체가 아니라 예배프로덕션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개인적인 예배의 경험을 만들어내는데 멈추고 있다는 것이다. 예배사역의 궁극적인 목표는 개인적인 '예배의 경험을 만들어 내는 것(creating personal worship experience)'에서 멈추어선 안되며 '예배공동체를 세우는 것(building a worshiping community)'이 되어야 한다. 예배이벤트와 예배상품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예배공동체를 세우겠다는 목표를 갖고 예배이벤트와 상품을 기획하고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적 예배체험을 만들어내는 예배사역과 예배공동체를 세우는 예배사역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도록 하자. 개인적 예배체험을 만들어 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예배사역은 모든 힘을 창조성(creativity)에 집중시킨다. Emphasizing creativity for producing personal worship experience 매주 예배이벤트에 참가하는 개인들에게 개인적 예배체험을 선사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사람들의 현실적 필요(felt-need)로 부터 예배의 주제(central theme of worship)의 논의가 시작된다. 예배의 주제를 정할때는 주제가 사람들의 실제적 삶의 필요에 얼마나 적합한가(relevant)가 최고의 관심요소가 된다. 사람들의 삶과 관련 없게(ir-relevant) 여겨지는 주제들은 예배의 주제에서 외면당하기 쉽다. 사람들의 관심과 필요가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해 예배의 주제를 정하면 이제는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이 그 주제을 머리로 이해 할 뿐 아니라 가슴으로 느낄 수 있도록 다감도(multi-sensory) 예배기획이 이뤄지며 이러한 예배기획에서는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개인적인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예배의 창조성(creativity)에 모든 힘이 모아진다. 즉 창조적인 기획력을 통해서 예배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강한 개인적 임팩트를 주는 것이 목적이 된다. 즉 사람들의 실제적인 필요에 입각한 central theme을 중심으로 메세지가 준비되고 creative elements를 총동원하여 사람들에게 강한 개인적 임팩트를 주는 것이다.

이러한 단회적 이벤트 중심의 예배프로덕션이 다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예배공동체를 세우겠다는 큰 목표가 없을 때 몇가지 문제점이 발생하게 되는데 첫째, 예배의 강한 임팩트가 철저히 개인적인 경험이라는 점이다. 극장이나 콘서트홀에서 청중은 같은 내용의 영화와 공연에 울고 웃지만 이런 경험은 철저히 개인적인 경험이며 쇼가 진행되는 동안 그리고 끝나고 나서도 공동체적인 성숙에 이르게 하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예배가운데서도 군중속의 고독을 느끼고 있다. 둘째, 예배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반응이 아닌 프로덕션에 의한 반응으로 끝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음악, 조명, 무대디자인, 미디어등을 통해 우리는 믿는자들의 모임가운데 임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도록 도와야 하는데 이것이 돕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대신하는(replace) 착각을 일으킬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가 아닌 창조적 프로덕션에 대한 반응은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움직일 수는 있어도 내면의 진정한 변화로 이어질 수 없을 것이다. 셋째, 예배기획의 목표가 예배의 경험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계속해서 예배의 경험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주제들만을 물색하게 된다. 사실 교회의 예배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실제적인 필요와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는 것을 뛰어넘어 성경전체에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스토리를 연속적으로 배우고 그에 반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성경통독을 하다보면 각 장을 읽을 때마다 황홀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지루한 장도 있고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장도 있다. 그러나 이모든 장들이 연결되어 결국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연속적으로 계시하며 하나님의 스토리를 완성해 가고 있음으로 우리의 예배가운데 연속적인 하나님의 스토리를 다루어야 한다.

예배공동체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는 예배사역은 모든 힘을 연속성(continuity)에 집중시킨다. Emphasizing continuity for building a worshiping community 오늘날 개인적 예배체험에 무게를 두는 예배프로덕션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 두가지는 예배의 공동체성 상실과 예배의 비연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예배는 그 시작이 믿는자의 개인적인 경험일 수 있지만 결론적으로 공동체적 행위이며 예배신학과 교회론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교회의 책임있는 일원이 되지 않고서도 이벤트와 상품을 통해 얼마든지 만족할 만한 예배를 경험할 수 있다. 또는 교회안의 예배사역이 교회의 목적들인 예배, 양육, 봉사, 선교, 교제의 중요성을 모두 균형있게 인식하지 않고 교회안의 다른 사역부서들과는 철저히 분리되어져 진행될 수 있으며 이러한 예배사역은 건강한 교회론에서 벗어난 예배체험만을 찾는 예배체험중독증에 빠진 비정상적 예배자들을 양산할 수 있다. 건강한 예배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안의 모든 부서들이 예배하는 부서들이 되어야 하며 교회의 모든 사역들이 예배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교회의 모든 세대들이 예배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한번의 예배를 디자인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어떻게 하면 교회의 모든 부서들과 모든 세대들로 예배하는 공동체가 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비연속적인 주제들을 바꿔가며 그때마다 감동을 선사하려는 단기적인 시도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스토리를 연속적으로 계시하며 궁극적으로 교회안의 모든 부서와 모든 세대가 예배하는 예배공동체를 세우려는 장기력인 노력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노력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로 하여금 '교회력(Christian year)'에 근거한 예배디자인을 하도록 했는데 마치 오늘날 우리가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 처럼 교회의 예배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 부활과 성령의 강림등을 중심으로 매년 반복되도록 하였다. 교회의 상황에 따라 교회력을 모두 적용할 수 있는 교회와 일부만 적용할 수 있는 교회들이 있겠지만 예배사역자, 기획자라면 충분히 교회력을 연구해 볼 가치가 있으며 일부만 적용하더라도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벤트성 예배가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 비연속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마치 영화을 볼 때는 울고 웃으며 영화에 동화가 되다가도 영화가 끝나고 영화관을 나오면 다시 현실로 돌아와 그 영화가 나의 삶과 아무 상관 없어지듯이 오늘날 예배의 체험역시 교회건물을 나옴과 동시에 그냥 하나의 좋은 경험으로 남게되는 현상말이다. 이것은 예배가 반드시 180도 사람들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가 예배가운데 만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와 관련되어있다. 우리가 매주 예배가운데 만나는 하나님이 진정 성경이 계시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형식과 장소는 다를 지라도 반드시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 이어져야 한다. 나는 예배의 연속성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예배사역자와 기획자들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벤트로서의 예배와 삶의 예배의 연속성이 우리 예배사역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실 삶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벤트적예배로 모일때마다 서로에게 주기적으로 상기시키고 있다. 하지만 삶으로 예배한다는 것이 실제로 어떤 의미인가를 모델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어디에서 예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를 예배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신 예수님의 가르침처럼(요4장) 어디에 있던지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는 삶이 예배자의 삶이라는 것을 살아있는 모델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미국 달라스의 직장에서 일할 때 하루에 몇차례씩 시간을 정해 놓고 정해진 장소에 가서 기도하는 무슬림들을 보았다. 또 그들은 라마단이라는 장기간의 금식기도기간을 직장에서도 이행하는 것을 보았다. 이에 자극을 받고 나는 직장동료 크리스찬들에게 일시작하기전 아침이나 점심시간을 이용해 만나서 성도의 교제를 하자고 제안했으나 "교회에서 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느냐 왜 직장에서까지 만나야 하느냐"라는 답을 받았을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무슬림들에게서 예배의 연속성을 발견한 것이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예배당안에서만 거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연속적인 예배운동이 필요하다. 당신이 예배기획자라면 주일예배에 최고의 예배의 경험을 선사하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월요예배자의 모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며 주중 가정예배를 위한 지침과 자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소그룹으로 모였을때 할 수 있는 예배를 도울 수 있을것이며 연속적인 중보기도운동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예배사역과 예배프로덕션의 목적은 예배의 체험이 아니라 예배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이다. 예배공동체는 결국 어디서나 그들의 삶가운데 연속적으로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의 연합체인만큼 예배사역자들의 모든 예배기획은 교회의 모든 부서와 교회의 모든 세대들을 전인격적인 예배자로 양성하는데 무게를 두고 장기간의 계획과 노력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매주 한번 예배인도하는 것 외에 자신이 섬기는 공동체의 모든 부서와 모든 세대가 연속적으로 예배하도록 돕기위해 어떤 총체적인 그림과 계획을 갖고 있는가, 또 어떠한 장기적인 노력이 필요한가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김재우 (King's Region, Journey of Faith Church)
Magnifying the Glory of God among all peoples - kingsregion.org

삶이 예배여야 하며 예배의 전제는 믿음의 공동체라는 기초를 잘 설명해 주는 글을 만났다. 예배, 특히 예전으로서의 공동체 예배가 한 사람의 신념 형성과 유지, 그리고 확장에 어떤 영향을 주는 지, 그리고 예배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는지에 대해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bk

8.05.2009

원탁의 그리스도

원탁의 그리스도스탠리 존스 지음 황병규 옮김평단문화사 국판 변형 420쪽 13,000원

원탁의 그리스도 (Christ at the Round Table)교회의 선민의식과 배타적 독선에 경종을 울리고세상 속 기독교가 지향해야 할 좌표를 제시한 책!

“세계적 베스트셀러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의 저자 스탠리 존스의 두 번째 책!”

“진정한 종교는 몸을 구부려 겸손히 섬기고 육체와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며 약해진 영혼과 대화하고 그 영혼을 다시 살려내어 하늘의 아버지를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타임> 지가 뽑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선교사 스탠리 존스가 자신의 사명을 알고 그 사명을 완수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이 시대 최고의 복음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한 종교관을 가진 인도 사람들의 사상을 그들의 언어로 직접 들으면서 다원주의 사회에서 복음이 지닌 의미를 새롭게 규명한다. 또한 현대의 문화와 전통이 다원多元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복음이 여전히 진리임을 강조하고, 그들의 신관神觀, 내세관, 세계관 등을 파악하면서 진정한 기독교적 복음을 제시함으로써 교회의 역사적 사명과 선교에 대한 올바른 방향을 일깨워 주고 있다.이 책은 저자가 감리교 선교사로 20여 년간 인도 각처를 전도 여행하면서 만난 인도의 대표 지성인들, 즉 브라흐마 학자, 이슬람교 학자, 불교 승려, 힌두교 지도자 등과 함께 종파주의를 초월해 열린 원탁에 둘러앉아 허심탄회하게 나눈 종교적 신념을 촘촘히 기록하고 있다. 특히 종교적 승리주의와 종파주의를 초월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영혼의 가면을 벗어 놓고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신념을 토로하고 있는 이 책은 우리에게 이 시대 진정한 그리스도의 길이 무엇인지 묻는다. 이 책은 오늘을 살아가는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이 땅의 끝없는 고난과 모순에 대해 의구심을 가져 본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야 할 책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논리적으로 변증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것을 변증론적으로 풀어내고 있는 스탠리 존스라는 사람에 대해 두 번 놀라게 될 것이다.“이 시대 진정한 그리스도의 길이란 무엇인가?”전 세계 수많은 독자들을 감동시킨 이 시대 최고의 복음서!이 책은 1928년 영국에서 출간되자마자 전 세계 기독교인들의 심금을 울리며 베스트셀러 명단에 올랐으며,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선교 사역의 최대 명저로 꼽히고 있다. 교회의 선민의식과 배타적 독선에 경종을 울리고 세상 속 기독교가 지향해야 할 좌표를 제시한 이 책은 총 17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초반부에는 인도의 종교지도자, 사상가, 정치가 등과 같이 각계각층 사람들이 원탁에 둘러앉아서 그들의 사상과 종교를 솔직하게 토론한다. 후반부로 가면서 인도 사람들의 두려움과 절망 가운데서 희망의 증거를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이 왜 복음이고 참길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 변증론적으로 입증해 보인다.이 책은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적 복음의 실체를 낯선 땅에서 평생의 삶으로 증거한 신앙의 거인 스탠리 존스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들려주는 신앙 고백서다! 자신의 목적을 알고 그 사명을 완수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무한한 가치를 지닌다. 다원주의적 입장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의 길을 설명하고자 한 스탠리 존스의 이 새로운 시도는 수백만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 저자 및 역자 소개저자 : 스탠리 존스 E. Stanley Jones1884년, 미국 동부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태어나 18세 되던 해 예수 그리스도께 회심했다. ‘따뜻해진 마음’과 ‘세계 교구’를 강조하는 애즈베리대학에서 수학한 뒤, 1907년부터 감리교 선교사로 인도에서 평생 사역했다. 1920년대 초반, 마하트마 간디, 타고르 등과 함께 아슈람Ashram운동에 참여했으며, 1930년대부터는 기독교 아슈람운동을 펼치며 간디의 정신적 지도력을 바탕으로 한 크리스타그라하Kristagraha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40년 미국 뉴욕시에 할렘 아슈람을 세우면서 그의 기독교 아슈람운동은 인도를 넘어 미국과 유럽 등 세계 여러 나라로 퍼져 나갔다. 1938년 12월 12일자 〈타임〉 지에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선정되기도 했고, 1961년에는 ‘간디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인도 독립운동과 연관된 활동과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펼친 평화활동 등으로 두 차례 노벨평화상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다. 스탠리 존스는 철저한 복음주의자로 살면서도 열린 마음으로 인도인들에게 다가갔으며,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유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했던 인물이었다.

역자 : 황병규한양대학교 공과대학 졸업. 1984년부터 World Leadership Conference를 비롯하여 컨퍼런스 강의와 설교를 통역함. 2003년부터 아내와 함께 영묵, 예정, 승묵, 세 자녀를 홈스쿨링하고 있다. 현재 IBLP-Korea에서 삶의 기본 원리와 품성 계발 교육에 참여하고 있다. 역서로는 《지혜의 시작》, 《고전적 교육 입문》, 《흔들리지 않는 고전교육의 뿌리를 찾아서》가 있다.

《원탁의 그리스도》에 보내 온 각계의 추천사

위대한 선교사 스탠리 존스는 이 책에서 오늘날 한국 교회가 회복해야 할 교회의 역사적 사명과 선교의 올바른 방향을 일깨워 주고 있다. 특히 종교적 선민의식과 종파주의를 초월해 열린 원탁에 둘러앉아 허심탄회하게 종교적 신념을 이야기하는 이 책은 우리로 하여금 ‘잃어버린 천국’으로 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길을 안내하고 있다!-한완상(전 대한적십자사 총재)

교회의 선민의식과 배타적 독선에 경종을 울리고 세상 속 기독교가 지향해야 할 좌표를 제시한 복음서다. 특히 종교적 승리주의와 종파주의를 초월했던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영혼의 가면을 벗어 놓고 허심탄회하게 종교적 신념을 토로하고 있는 이 책은 오늘을 살아가는 종교인들에게 미래 교회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을 보여 주고 있다.-이어령(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 겸 중앙일보 고문)

청소년 시절, 영적으로 매우 고갈되고 생의 여러 문제에 봉착했을 때 스탠리 존스의 책은 내 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데 빛이 되었다. 복음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해 명확하게 안내하고 있는 이 책은 요즘처럼 복음의 능력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에 대한 분명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 -임영수(모새골 공동체 목사)

스탠리 존스는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적 복음의 실체를 낯선 땅에서 평생의 삶으로 증거한 신앙의 거인이다. 그는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한 종교관을 가진 인도 사람들의 사상을 그들의 언어로 직접 들으면서 이 시대 진정한 그리스도의 길이 무엇인지 제시하고 있다. 독자들은 이 책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몸으로 보여 주고자 했던 진정한 복음의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오정현(사랑의 교회 목사)

본문 속으로

나는 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이기고 승리하는 일 따위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다. 혹시 승리할 수도 있겠지만 거기까지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우리의 목표는 진실이고, 만유의 실재이며, 영의 자유이다. 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정복한다고 해도 얼마든지 이런 문제를 등한시하거나 잊고 악화시킬 수 있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했지만 결국 그리스도가 거기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뿐이다.-p.9 (프롤로그)

종교는 삶에 적절한 해답을 주고 있는가? 아니면 삶 자체나 삶의 의미와는 아무 공통점도 없는, 즉 삶에 해결책을 주지 못하는 정신적·사회적 찌꺼기인가? 우리는 이 위대한 실험 결과를 보고해야 하고, 확인한 내용이 있다면 기꺼이 알려야 했다. 마음속 깊은 곳을 향해 말하는 것은 정말이지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p.15 (제1장 출발)

“저는 욕망의 격렬한 싸움 속에서 스러져 가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의 발아래 제 욕망을 내려놓자 그분이 폭풍우를 잠재우고 제 자신에게서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 “제 인생이 산산이 부서져 있을 때 그리스도가 다가와 정상으로 돌려놓으셨습니다. 이제 저에게는, 하나님은 숨을 쉬는 것보다 더 가깝고 손발보다 더 가까운 친밀한 실재입니다.” -p.25 (제2장 인도인의 삶과 맞붙다)

“나 자신을 비울수록 하나님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질서정연한 기계이므로 우리가 그 법칙에 순종할 때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만 기적은 바랄 수 없기에 오랜 세월이 걸립니다. 그래서 샹카라도 ‘하나님을 찾으려는 사람은, 바닷가에 앉아 지푸라기로 물 한 방울씩 묻혀 옮겨 놓아 대양을 비우려는 사람 같은 인내를 지녀야 한다’고 말한 것이지요.”-p.53 (제3장 종교에 대한 솔직한 고백들)

누가 진정 그리스도인일까? 루터는 “인간은 절대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인이 되어 갈 뿐이다.”라고 말했다. 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모든 의미에 응답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와 사귐에 따라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사람이다. -p.79 (제4장 거듭남)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했다. 섬기지 않으려는 사람은 벽에 부딪힐 것이다. 나는 지난해에 유럽의 빈 왕궁 열세 곳을 둘러보았다. 그 왕궁들이 어째서 비어 있을까? 그 왕궁에 살던 사람들은 섬김을 받고 싶었을 뿐 섬기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이 법칙에 따라 스스로 망한 것이다. -p.104 (제5장 생명의 속죄)

원탁에 앉아서 사람들이 삶과 운명과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동안, 내 구원자가 앞에서 자라고 있는 모습을 지켜봤다. 나는 예수가 나를 어디에서 구원했고, 어디까지 구원했는지, 그리고 어디로 구원해 가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예수는 나를 죄에서 구원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예수는 내 우주를 구원하고, 내 우주 속에서 건드리는 모든 것을 구원한다.-p.128 (제6장 더욱 커지는 구원자)

우리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살라고 지어진 존재이다!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 우리 자아, 곧 참다운 내 자아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법이 내 삶과 일치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붙잡아라.’ 물론 그 제의 속에는 회개하고, 자기를 포기하며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는 요구가 들어 있다. 그러나 일단 그 제의를 받아들이면 그 요구는 어느새 사라지고 즐거움으로 변한다. -p.155 (제7장 하나님에 대한 체험)

나는 《신약성서》를 펴고 기도하면서 어둠을 밝히고 길을 안내해 줄 말씀을 찾았다. 그 순간 〈사도행전〉 1장에 있는 사건이 떠올랐다. 제자들이 예수에게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때와 시기는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p.175 (제8장 안타까운 약속의 땅)

우리는 어디서 권위를 찾을 수 있을까? 절대 오류가 없는 교회, 절대 오류가 없는 성서, 절대 오류가 없는 그리스도의 체험에 권위가 있을까? 권위는 세 가지 모두 안에 있다. 최종 확실성과 권위의 자리는 역사의 예수가 체험의 그리스도가 되는 연결점이며, 그 결과로 생긴 개인의 체험이 단체 체험으로써 확증되고 바로잡히는 곳이다. 그때 권위의 자리는 바로 그리스도다.-p.193 (제9장 확실성과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복음은 통역이다. 복음은 영원의 언어를 시간의 말로 바꾼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속죄 목적이 우리에게 가까이 와 닿아 현실이 되고, 누구나 얻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단테가 입을 열었을 때 ‘천 년의 침묵’이 깨졌다고 한다. 예수 안에서 ‘영원의 침묵’이 깨졌고, 우리는 복음을 듣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이 속죄의 사실을 통역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p.214 (제10장 그리스도의 통역자)

섬기는 자세, 곧 종의 자세가 그리스도인의 자세다. 그것은 예수가 취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힌두교인 애국주의자는 우리에게 “현재 인도의 영혼을 붙잡고 있는 위대한 낱말 두 개가 있습니다. 곧 ‘섬김’과 ‘자기희생’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이상은 우리 복음의 심장부에 깊이 박혀 있다. 우리가 동양에서 도덕적 권위를 얻으려면 이것이 우리의 자세와 심장부에 깊이 박혀 있어야 한다.-p.233 (제11장 원탁에 앉은 선교 단체)

죽음 앞에서 마지막으로 쥐고 있던 힘마저 다 빠졌을 때에도 여전히 예수는 최후이자 최고의 일을 하려고 했다. 사람들을 위해 죽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 성배 속으로 들어갔다. 우리 영혼이 악과 증오에 대해 분개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 우리는 이 완전한 승리를 마신다. 무엇으로도 사라지거나 꺼지지 않을 영원한 사랑을 마시면서 우리는 루터처럼 말할 수 있다. “내 영혼은 한없이 기쁘고 위대해서 어느 누구의 원수도 될 수 없다.” -p.279 (제13장 가장 신성한 원탁)

종교는 인간을 자신의 가장 높은 자아와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야 분열된 영혼의 힘이 하나가 되고 형제들과 잘 어울릴 수 있다. 또한 하나님과도 잘 어울리게 된다. 종교의 임무는 속죄다. 종교가 속죄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치명적이다. 종교 의식이 아름다울 수 있고, 종교 규약의 역사가 아주 오래될 수 있으며, 그 교훈이 좋을 수 있지만, 속죄에 실패한다면 회복할 길이 없다. -p.301(제14장 십자가는 삶의 열쇠)

사랑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의 법칙이다. 미움이 아니고 사랑이 바로 우리 존재의 법칙이다. 미움은 산酸처럼 우리 영혼을 부식시키지만, 사랑은 우리 영혼을 밝은 건강으로 빛나게 한다. 순결이 그리스도 안의 삶의 법칙이고, 우리 존재의 법칙이다. 불결은 내면의 삶을 시들게 하지만 순결은 내면의 삶을 상쾌함으로 설레게 한다. 선이 바로 우리 존재의 법칙이다. -p.327 (제15장 참길)

우주의 원탁에서는 모든 것, 곧 바울,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스승, 세상을 비롯한 모든 사실, 삶을 비롯한 모든 실재, 죽음을 비롯한 모든 변화, 현재와 미래를 비롯한 모든 시간을 포함하는 만물이 일어나 그리스도의 주권을 증언하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에게 복종한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으로 조건을 확인해야 한다. 모든 것에는 불멸의 조건이 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라.” -p.383 (제17장 우주의 원탁)


■ 차 례
프롤로그 껍데기는 버리고 본질을 추구하라!
Ch. 1 출발 하나님의 약속|그리스도의 명령
Ch. 2 인도인의 삶과 맞붙다 원탁에서 만난 사람들|간절한 마음의 소리
Ch. 3 종교에 대한 솔직한 고백들 불확실한 영혼|고매한 절망
Ch. 4 거듭남 수평 개종과 수직 회심|회심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
Ch. 5 생명의 속죄 하나님 나라의 실현|좁은 문의 법칙
Ch. 6 더욱 커지는 구원자 사람의 아들, 예수|사람과 하나님이 만나는 곳, 예수
Ch. 7 하나님에 대한 체험 복음은 이론이 아닌 체험|복음은 요구가 아닌 제의
Ch. 8 안타까운 약속의 땅 거의 타오를 뻔하다가 꺼지는 불꽃|거의 될 뻔하다 가 실패하는 교회
Ch. 9 확실성과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인격|스스로 역사 의 증인이 된 예수
Ch. 10 그리스도의 통역자 복음은 생명 언어로의 통역이다|진정한 통역자는 예수
Ch. 11 원탁에 앉은 선교 단체 종의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나다|민족도 개인 도 사랑한 백부장
Ch. 12 원탁에 앉은 나라들 자기중심적인 바보들|자기희생의 권력
Ch. 13 가장 신성한 원탁 생명의 잔|완전한 승리
Ch. 14 십자가는 삶의 열쇠 값없이 받는 보혈의 선물|십자가는 하나님의 본성
Ch. 15 참길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다가온 하나님|예수는 길이고 진리며 생명
Ch. 16 예수는 보편적인 실체 진리는 보편적, 오류는 제한적|어느 상황에서 든 예수는 그 상황의 빛
Ch. 17 우주의 원탁 우리는 예수의 것|예수만이 참 소망옮긴이의 말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From NewsNJoy 서평 이벤트

3.25.2009

깊은 냄비를 주시는 하나님

늦은 밤, 도서관을 나서 집으로 가는 중 선교사님을 만났다. 사실은 선교사님이 어두운 곳에서 내 이름을 부른 통에 놀라서 섰다. 반가운 목소리로 불러주는 소리가 즐거웠고 한적한 곳에 큼직한 빡스를 어깨에 매고 있는 선교사님이 엉뚱했다. "선교사님, 이 밤에 거기서 뭐하십니까?" 싱글벙글 즐거운 목소리로 대답하신다. "아내가 기도하던 깊은 냄비를 주셨어요!"

"아내가 기도하던 깊은 냄비..." 몇마디 않고 헤어졌지만 "아내가 기도하던 깊은 냄비..."가 계속 마음 속에서 맴돌았다.

모교회에서 후원이 끊겨 기도하는 중이지만 하나님이 더 좋은 후원자들을 만나게 하실것이라며 함께 식당에서 손붙잡고 기도했던 것이 두 주 전이었다.

깊은 냄비가 필요해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하나님 깊은 냄비가 필요한데 마련해 주세요"라고 순수하고 친밀한 기도를 드렸을 사모님의 성스러운 모습이 떠올랐다.

아내의 기도를 유심히 귀담아 듣고 "깊은 냄비의 필요"를 자기 일처럼 묵상했을 선교사님의 따듯하고 책임감있는 마음이 느껴졌다.

누군가 놓아둔 박스를 어둡고 바람부는 밤에 그냥 스쳐 지나가지 않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보물 찾듯 소망의 기대를 놓치지 않는 그의 성실함과 믿음이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깊은 냄비가 거기 그렇게 놓여져 있었던 것이 결코 우연이나 운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자애롭고 치밀한 준비하심이라고 생각하는 영적 민감함과 깨어있음에 내 자신이 부끄러워 졌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그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기 위해 이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예비하시는 하나님, 나로하여금 그 현장에 참여하게 하심으로 "내가 너를 기억하며 내 손바닥에 새겼다"는 아침의 말씀을 컨펌해 주시는 놀랍고도 달콤한 하나님의 사랑에 코끗이 찡하고 가슴이 묵직하게 아려왔다.

"사랑하는 아들아 보았니? 어땠니?" 라고 물으시는 것 같아 반짝이는 별들을 향해 말씀드렸다. "깊은 냄비의 사랑을 보여주신 아버지, 사랑합니다."

3.25.09, bk

12.27.2008

기측기와 영성 테스터

도시를 떠나 산 속 깊은 곳에 사시는 한 집사님 집을 방문했다가 기를 측정하는 기구를 보게 되었습니다. 기측기(氣測器)(?)라고나 할까요? 기구까지라고 할 수 도 없는 이 기역(ㄱ) 자 같이 생긴 두 개의 쇠막대는 신통하게도 물건이나 공간, 사람의 기가 어느 정도 되는지를 가늠해 줍니다. 만약 양 손에 이 쇠막대를 잡고 그 물건이나 공간, 사람을 향해 들면 기의 양에 따라 오므려졌다 펴졌다 합니다. 만약 기가 적다면 이 막대기가 거의 X자를 만들지만 기가 많다면 각이 넓은 V를 만들게 되지요. 그 집사님이 시험 삼아 제 머리에 그 쇠막대를 접근시켰을 때 저는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그 짧은 순간 속으로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주님. 그래도 명색이 목산데 기가 안 나와 영성이 모자란다거나 머리가 나쁘다거나 하는 불필요한 오해를 산다면 제 망신 주님 망신 단체망신입니다. 힘좀 써 주세요. 네? 그러면서 복어처럼 머리에 힘을 바짝 주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기가 많이 나와 쇠막대가 V자를 그려졌지만 그 집사님 웃으면서 그러시더군요. 목사님. 힘주면 기 대신에 응아 나와요

기는 생명력이다라고 정의하시면서 모든 살아있는 것에는 기가 있다고 설명해 주시는 집사님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으면서 속으로 이런 생각을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충만을 측정하는 그런 도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딱 갔다 대면 얼마나 성령으로 충만한지, 얼마나 영성이 있는지, 얼마나 하나님과 친밀한지를 알려주는 그런 도구. 그런 도구가 있다면 매일 매일 내 영성을 측정해 보면서 최고의 영적 컨디션을 유지하도록 할 텐데. 또 다른 사람들의 영성을 측정해 주고 말만 많고 아무런 능력 없는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줄 수 있을 텐데.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봐라 당신은 살아있지만 실제는 죽었다.고 말해주면서 도전할 수 있을 텐데 이런 공상을 부담 없이 하고 있을 때 주님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그런 도구가 이미 있단다.흠짓 놀라며 주님. 그런 도구가 정말 있단 말입니까? (큰일인데) 라고 묻는 제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은 도구가 아니라 테스터, 즉 시험지란다. 90점 만점의 시험지이지. 영성을 측정하는 시험지 뿐만 아니라 타락의 정도를 측정하는 시험지도 같이 있단다. 한번 풀어보렴. 그리고 네 점수에 너무 놀라거나 낙심하지는 말거라. 시험에 점수에 상관 없이 나는 너를 사랑하니까. 시험지는 네가 가진 성경 신약 308쪽에 있단다."

여러분의 편의를 위해 영성 테스터(시험지)를 제가 여기 복사해 놓습니다.(바울에게 저작권이 있는 문제지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함부로 복사하셔도 무방합니다. 사용료는 각자 교회에다 내세요; 갈 5:22-23). 총 9개의 문제이구요 특히 1번 문제는 20점이 만점이구요 나머지는 문제들은 각각 10점이 만점입니다. 그러면 100점이 만점이겠지요? 건투를 빕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0점) 어쩌다 그렇다. (3점) 가끔 그렇다. (5점) 종종 그렇다. (7점) 항상 그렇다. (10점)

1. 나는 내 삶 속에서 예수님의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경험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너무도 사랑하며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 처럼 그렇게 사랑하고 있다. (점수에 2를 곱하세요. )
2. 나는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삶이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다. 그래서 매사에 긍정적이다.
3. 나는 예수님 때문에 환경과 상황과 조건들을 초월하는 마음의 평강과 평안이 있다.
4. 나는 내 삶을 주관하시는 예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나를 짓누르는 여러가지 조건들과 사람들에 대해 끝까지 참고 인내한다.
5. 나는 예수님처럼 어려운 일을 당했거나 힘든 사람들을 보면 참지 못하고 같이 아파하며 돕는다.
6. 나는 예수님처럼 악한 사람들에게 똑같이 악을 행함으로 지지 않고 선을 행함으로 악을 이긴다.
7. 나는 예수님처럼 늘 신실하며 약속을 잘 지키고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산다.
8. 나는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세우고 섬기기 위해 나의 자랑이나 지위나 권리, 힘을 유보하는 온유함을 실천한다.
9. 나는 예수님처럼 식욕, 성욕, 수면욕, 구매욕, 음주 흡연욕, 소유욕, 노동욕, 게으름 등등의 욕구를 주님의 요구에 따라 조절(Control)한다.

참고로 본인이나 타인의 타락 정도를 측정하고 싶으시다면 같은 페이지의 갈라디아서 6장 16절부터 21절까지를 참조하세요.


b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