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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2010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라!

오늘은 혼자가 아닌 공동체 안에서 리더십을 향상시키는 방법에 대해 간단히 나누고자 합니다. 리더의 자리에서 개인의 성장을 위해 여러 가지 연구와 공부를 거듭하여 자신의 한계를 넓혀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고 보완해 나가는 것은 더욱 효과적이고 고무적일 수 있습니다.  
존 맥스웰은 리더가 영향력을 더욱 많이 끼치기 위해서는 자신의 활동 범위, 소위 교제의 범위를 넓히라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안정적인 교제의 범위를 넘어 리더로서 영향을 주고받을 것을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연 자신의 영향력을 향상시키고 극대화시키기 위한 노력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한계를 확장하기 위해 맥스웰은 5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1. 당신의 측근 그룹을 넘어서라
우리의 측근 그룹을 벗어나기 위해 어디서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요? 맥스웰은 나의 측근의 친구 중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부터 시작할 것을 추천합니다. 이렇게 안정적인 관계의 범위를 벗어날 때는 아주 파격적인 변화보다는 절친한 사람과의 관계를 쉽게 건널 수 있는 다리 역할로 활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2. 당신의 전문 지식을 넘어서라
리더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문 지식을 활용하여 공동체를 섬깁니다. 이때 리더는 종종 자신의 전문적인 지식의 한계를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관계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전문 지식을 빌리는 것도 이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됩니다.
3. 당신의 강점을 넘어서라
리더는 모든 측면에서 자신의 강점을 살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강점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강점 뒤에는 반드시 약점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때, 리더는 자신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강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면, 더욱 영향력 있는 리더십을 가질 수 있는 시너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4. 당신의 편견을 넘어서라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지드는 편견 없는 생각이 세상에서 가장 보기 드물다 말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말이 사실이라고 동의해야 할지 모릅니다. 리더라면 이러한 생각의 한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신과 너무 다른 공동체를 바라보며 한편으로는 그 공동체를 정죄하고 또 한편으로는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점을 갖고 있는 공동체 속에 뛰어들어 그들의 강점을 발견하고 배우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5. 당신의 일상을 넘어서라
일상의 쳇바퀴를 한번 벗어나자는 것입니다. 매일 반복하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야 우리는 비로소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하루를 사는 데 급급하다 보면 리더는 비효율적인 과정을 경험하게 되어도 그 과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만남과 교제를 위해 자신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난다면, 설상 새로운 만남과 교제를 경험하지 않더라도 유익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리더는 자신의 리더십을 십분 발휘하기 위해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사실은 자신의 리더십을 더욱 향상시키기 위해서 또 다른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공급을 받고 재충전을 받을 수 있는 그러한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공동체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리더는 그 어떤 때보다 자신의 교제의 범위를 뛰어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리더는 분명 홀로서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과 함께 빛날 수 있는 리더들의 공동체를 찾게 된다면 그들과 함께 더욱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빛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 된 교회에서 함께 연합하여 사역하는 것이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생각해 봅니다.
* 이 글은 국제제자훈련원에서 출판된 차세대 리더십 개발을 위한 무크지 <카탈리스트> 2권 5장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리더십 네트웍 527호 (05/10/10)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라
평신도를 깨운다 국제제자훈련원

5.18.2010

죄 죽이기mortification와 영적 성장

"죄를 크게 죽여 본 사례를 가지는 것은 죄의 몸에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이다. 또한, 죄에 강타를 퍼부어서 비틀거리게 하고 주춤거리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죄와 싸울 수 있는 튼튼한 기반과 발판을 얻게 되며, 죄는 쓰러지기 직전이 되고, 다음 번에 우리는 죄와 더 쉽게 싸울 수 있게 된다. 죄는 점점 겁을 먹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쉽게 죄를 굴복시킬 수 있으며 적어도 죄와 싸우는 것이 쉽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마음대로 죄를 죽일 수 있다. 죄를 크게 죽여 본 사례들과 자기를 부인해 본 경험 없이 살아가는 동안에는 옛 사람이 계속해서 자기 자리를 잡고 있다. 옛 사람은 억세고 끈질기기 때문에 작은 타격에는 요동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이 왜 수많은 성도들이 은혜 안에서 민감하게 성장하지 못하는가 하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다. 가장 크게 죄를 죽이고 난 후에 나는 언제나 가장 큰 위로를 체험한다...."

조나단 에드워즈, 1723년 1월 14일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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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한다는 것은 성서와 역사가 증언하는 엄중한 사실이다. 죄된 본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최고의 선 대신 차선을 택하는 선의 결핍, 즉 "악"을 초래하게 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된 본성은 살살 달래야하는 우는 아기가 아니다. 철저히 소멸시켜야 하는 악의 근원이며 생명을 걸고 대적해 싸워야 하는 비열하고 악랄하며 끈질긴 원수이다.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살아나 나를 죽이려 덤벼드는 터미네이터 같다고나 할까.

죄를 다룸에 있어 신앙의 선배들은 성서의 교훈과 명령을 쫓아 "죄 죽이기"를 훈련하였다. 바울은 죄된 본성으로서의 육체적 소욕은 성령의 소욕과 정면으로 충돌하며 성령을 따라 살려는 모든 의지를 무력화시키려한다고 설명하고 그리스도를 주로 모신 사람들은 이러한 육체의 소욕을 성령의 능력으로 계속해서 십자가에 못밖아 죽여버리는 사람들이라고 선언하였다. 칼빈은 바울의 가르침을 수용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신자들의 성화과정이 "항구적 금식"과 같은 죄죽이기mortification의 연속이라고 표현하였다. 청교도였던 존 오웬은 신자들의 영적 성장과 생명력, 그리고 영혼의 참된 위로가 죄죽이기mortification에 달려 있다는 선배들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그 방법을 자세하고 조직적으로 설명하였다. 결국 스스로 높아지려는 교만과 자기만을 사랑하는 이기심, 허탄한 자기 자랑을 추구하는 욕망은 길들일 대상이 아니라 죽여버려야 할 대상이다.

자기 자신을 "크게 죽여본 경험"이 중요하다고 본 에드워즈의 통찰은 참으로 귀하다. 처음이 어려우면 갈수록 쉬워진다. 그러나 처음에 타협하여 쉬운 길을 택한다면 영원히 시작과 포기를 반복하다 말 것이다. 적당한 만족과 합리적인 포기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라고 유혹하는 육체의 소욕은 피가 튀기고 살점이 뜯기는 혈투를 통해서만 장악될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성적이며 상대적인 가치가 존중되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교회의 훈련과 교육 역시 "죄 죽이기"가 강조되고 훈련되어야 한다면 지금의 설교와 가르침이 어떻게 변해야 할까?

bk

5.17.2010

회개

"회개는 목표없는 방황의 발을 찍고 경솔한 교만의 머리를 치는 도끼이다."
캘빌 밀러

한번도 가지 않은 길

새벽 미명에 기도하러 나섰다.
난데 없이 교회 뒤쪽으로 난 산을 따라 걸으며 기도하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혼자서 한번도 가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내 마음이 "가보자"와 "가지말자"로 나뉘어 분열하기 시작했다.
가지 말자는 쪽이 더 좋은 그리고 더 많은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가보자는 쪽은 시덥지 않은 한두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러나 결정적인 한가지 이유도 또한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소망이었다. 무엇인가 가치있는 것이 있으리라는, 어렵더라도 좋은 경험이 되리라는 소망과 기대 말이다. 소망이 두려움을 이기는 용기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나는 그 때 배웠다 .

아직도 검푸른 여명속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두려운 마음을 흥얼흥얼 찬양으로 잠재우며 걷다가 작은 모퉁이를 돌아가는데 갑자기 큰 개가 미친듯이 짖어대며 나를 향해 덤벼들었다. 너무 놀라 거의 중심을 잃고 나 자빠지려 하는 찬라에 내 몸을 덮칠 그녀석의 거친 앞발과 내 목을 향해 날아오는 날카로운 이빨을 상상했다. 그러나 나는 넘어지지도 물리지 않았다. 개와 나 사이에는 철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장이 터질 정도로 놀랬으나 현실적으로는 아무일도 생기지 않았다. "돌아갈까?"하는 마음이 놓치지 않고 고개를 바짝 들었으나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번연의 주인공 크리스천이 쇠줄에 묶인 사자의 포효에 주춤하며 전진하지 못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계속 짓어대는 개에게 예수님처럼 "잠잠하라"고 영어로 말해 주었다-shut up!

물이 말라버린 얕으막한 계곡에 지저분한 쓰레기들과 버려진 차들이 보였다. 높은 기둥에 마치 피가 흐른듯이 빨간색 페인트로 갱단원들이 한 것 처럼 여겨지는 지저분하고 기괴한 낙서들이 역겨운  냄새와 함께 기분을 상하게 하자 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결코 유쾌한 경험이 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소망이 위협을 당하자 다시 두려움이 업습한다. "돌아가자..."

그러나 여기까지 온 것이 아까웠고 아찍 끝나지 않았다는 새로운 소망거리를 찾아내었다.
한 30분을 더 기도하며 산을 오르자 온 몸에서는 땀이 흐르고 기도는 깊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산의 정상에 섰을 때,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아름다운 절경이 거짓말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인내하지 앟았으면, 두려움을 물리치지 않았으면, 소망을 포기했다면 결코 볼 수 없었던 장관이었다. 하나님의 음성이 마음에 가득 차 올랐다.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그리고 소망은 사랑으로 가득찬 성품을 만들어 낸다는 바울의 고백을 온 몸으로 경험할 수 있음을 감사하며 정상에서 내려 올 때 하나님은 또다른 선물을 준비하고 계셨다. 산을 오를 때 겪었던 장애물들의 실체가 찬란한 아침 햇빛 아래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위협적이었던 모든 것들이 별것 아닌 것이 되어있었다. 오를 때 의심되었던 하나님의 임재가 내려갈 때는 자부심과 성취감, 보람과 삶의 긍정으로 충만하였다. 시내산을 내려가는 모세의 기분이 그랬을까?

한번도 가지 않은 길은 두려운 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믿음과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길이 행복하고  의미있고 보람된 길이 된다는 사실 또한 틀림없다. 왜냐하면 바로 하나님 자신이 행복이며 의미이며 보람이시기 때문이다. 다만 그 길을 끝까지 마쳐본 사람만이 그 하나님을 증언할 수 있으며, 그 길을 걸어본 사람만이 성숙을 노래할 수 있을뿐이다. 

bk

너른 사람

마음과 사고와 태도, 그리고 언어에 있어서 깊고 너른 사람이 되고싶다.

상대의 잘못과 실수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너그럽고 오래참지만
자신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서는 솔직하고 엄정한 사람이고 싶다.

상대의 장점과 선한 일에 대해서는 아낌없이 칭찬하고 격려하지만

자신의 성과나 장점에 대해서는 겸손하며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

예수님께서 그런 분이셨고 지금 내게도 그렇게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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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소원한지 10년이 넘어가건만 여전히 일말의 진보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오호 통재라...

bk

상처의 결과

상처와 아픔은 죄의 결과이지만, 성숙의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상처와 아픔을 통해 어떤이는 미라가 된다.
진정한 자아를 감춘채 이웃과 마음의 담을 쌓고 치유와 회복을 거부한다.

상처와 아픔을 통해 어떤이는 고슴도치가 된다.
수동적인 자기 방어적 태도나 호전적인 공격성은 자신과 다른이의 상처와 아픔을 더 심화시킨다.

그러나 상처와 아픔을 통해 어떤이는 진주가 된다.
시련과 연단은 상처와 아픔이지만 믿음과 소망으로 인내하며 삶을 긍정하고 다른 이들과의 연대를 더욱 공고히 할 때 상처와 아픔은 보석과 같은 인격과 성품이 만들어 지는 과정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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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권위

성급함, 산만함, 미룸은 어느정도는 두려움의 결과이기도 하다.
두려움을 이기려면 담대함이 필요하다.
담대하지 못하는 이유는 권위를 잃었기 때문이다.
권위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건강한 자아로 부터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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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짓과 표정

"표정과 몸짓에는 보여주고 싶은 자기 뿐 아니라 감추고 싶은 자기까지 숨김없이 나타난다."
최광선, 몸짓을 읽으면 사람이 재미있다

부탁

"부탁하는 사람은 5분동안 바보가 될 수 있지만, 부탁하지 않는 사람은 평생동안 바보가 될 수도 있다."
로번 샤르마

죄의식

"엔진이 깨끗할 수록 달리는 힘은 강해집니다."
주유소 광고

자동차만이 아니다. 사람들의 영혼도 마찬가지.
마음이 깨끗해야 영이 힘을 얻는다. 죄의식은 감정과 영혼을 피로하게 하는 제1의 요소이다.
릭 워렌

전문가의 주관성

"실력과 경험을 갖춘 전문가의 주관성은 보통 사람들의 객관성보다 더 신뢰할 만 하다."
히딩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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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는 보통 사람들의 상식과 합리성을 뛰어 넘는 깊은 안목과 혜안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제 아무리 깊은 통찰과 탁월한 감각을 갖추고 있다 할 지라도 평범한 사람들의 상식과 합리성을 존중하고 그 수준에 맞추어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면, 전문가일지는 모르지만 리더는 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리더는 팔로워들보다 한길은 멀리 보되 반발만 앞서는 사람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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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몸으로서의 교회, 성령의 능력안에 있는 교회

"교회란 결코 함께 살고싶지 않은 사람과 언제나 함께 살아야 하는 곳이다"
헨리 나우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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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르겐 몰트만은 "성령의 능력안에 있는 교회"에서 교회를 예수님의 몸으로 본 바울의 유비를 진지하게 수용하여 의미있는 신학적 해석을 제시하였다. 교회가 예수님의 몸body라면 예수님에 대한 모든 명제statement는 교회에 대한 명제여야 한다. 교회는 단순히 예수님의 사명을 물려받은 그리스도의 모임에 머물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회는 신비한 예수 그리스도의"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셨고 동시에 피조물의 회복을 위해 존재하셨듯이 교회는 삼위의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동시에 피조물의 회복을 위해 존재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 이 양자를 화해하기 위해 중보자로 자신을 버리셨듯이, 교회는 화해의 중보자로 거룩한 산 제사로 철저히 자기를 버려야 한다.
제도와 건물, 전통과 문화에 갇혀 스스로만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에서 자신을 분리시킴으로 스스로가 거룩한 공회에 속하지 않는 교회의 적임을 자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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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2010

성화의 의미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그러나 절대로 그대로 두지는 않으신다.

맥스 루케도, 예수님 처럼,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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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거룩은 아름다움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완전한 아름다움이시며 모든 아름다움의 제일 원인이시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주변의 상황이나 환경에 영향을 받는 피조물의 아름다움과는 달리 영원하고 무한하며 절대적인 아름다움이다. 또한 창조주 하나님은 존재를 가능하게 하시어 아름다움을 창조하시는 아름다움의 근원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름다움의 절대기준이시며 존재를 아름답게 만드는 아름다움의 시혜자이시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미적 기준에 머무르지 않고 선과 악,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확장되어 거룩(kadosh, holy)로 표현된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모든 피조물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어떤 방식으로든 반영하게 되기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쫓아 하나님을 닮아가는 일은 하나님의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다.

캘빈은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의 과정은 항구적 금식과 같은 고행mortification으로 보았지만, 그것이 완전한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한한 만족과 기쁨의 행복을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성화는 "달콤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본 조나단 에드워즈의 통찰은 참으로 귀하다.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되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정말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bk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는 사랑이다.
내가 그분을 상대하지 않아도, 무시해도, 퇴짜를 놓아도, 멸시해도, 불순종해도 그분은 변하지 않으신다.
나의 악이 그분의 사랑을 줄어들게 할 수 없다.
나의 선이 그분의 사랑을 더 커지게 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매하다고 잃는 것도 아니요
믿음으로 얻어내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한다고 덜 사랑하시고
성공한다고 더 사랑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는 사랑이다.

맥스 루케도, 예수님처럼, 95

관계와 용서

"관계가 성공하는 것은 죄있는 쪽이 벌을 받아서가 아니라 죄 없는 쪽이 긍휼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맥스루케도, 예수님처럼, 33

5.12.2010

영적 유기

"주일 아침마다 우리는 신앙을 고백합니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이렇게 고백하는 것을 더 이상 믿지 못하고 멈춰 설 때, 예레미야처럼 신앙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경험할 때, 도대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깊은 회의 에 빠지게 되는 때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 기도한다." 다시 말해서 계속 믿을 수 있도록, 우리의 신앙이 떨어지지 않도록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믿는 일을 계속 할 것입니다. 왜입니까?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믿고'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놀라운 은혜라고 부릅니다.
때로 신앙의 깊이를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신앙을 상실하는 것, 신앙의 붕괴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상실과 붕괴는 신앙의 크기 혹은 깊이를 경험하게 합니다. 자신의 신앙이 참으로 하찮고 보잘것없음을 체험할 때, 바로 그때 당신은 집요하고도 완강한 그리스도의 결심, 나의 신앙이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이야말로 당신의 영혼과 육체, 온몸과 온 마음을 움츠러들게 하며 소름끼치게 하는, 그럼에도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경험입니다."

유호준, 인간의 죄에 고뇌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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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유기spiritual desertion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공통적으로 겪게 되는 신앙여정의 한 부분이다. 주변의 환경이나 인간관계, 또는 신앙공동체에서 경험하는 여러가지 갈등, 고통, 긴장과 스트레스가 지속되거나 또는 자신만이 아는 멈출 수 없는 죄된 습관이 계속되어 불안과 죄책감 수치감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채로 오랜 시간이 지나면 영적 침체를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영적 침체가 계속 되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과 감정에 휩사여 절망의 심연으로 끝도없이 떨어져 버릴 때가 있다.

17세기 화란에서 일어났던 제 2의 개혁운동에 큰 역할을 감당했던 기스베르투스 후치우스Gisbertus Voetius(1589-1676)는 이러한 영적 유기의 상태를 "신앙인이 중심으로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감정을 갖지 못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내적 십자가 또는 영적 슬픔과 시련"이라고 정의했다 (Spiritual Desertion 1659, 30). 후치우스는 놀랍게도 (그가 야코보스 알미니우스의 제자라는 점에서 본다면 참 경악스러울 정도이지만, 그가 깔뱅의 후예라는 점에서는 너무도 당연하게) 신자들의 영적 유기의 일차적 원인을 하나님 자신에게서 찾는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과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시지 않는다면 인간편에서는 사실 제 아무리 노력을 기울인다 할 지라도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신앙을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영적 유기의 좀더 직접적이고 주요한 실제 원인은 믿음에 의한 분명한 확신의 결여이다. 즉 영적 유기의 문제는 믿음이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영적 침체와 유기를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단순히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라고 조언하는 것은 마치 먹을 빵이 없어 배고파하는 사람들에게 빵을 먹고 배부르라고 권하는 것과 같다.

어떻게 영적 침체와 유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영적인 붕괴에서 어떻게 탈출 하여 다시금 굳건한 신앙의 반석 위에 설 수 있을 것인가? 신앙의 확신결여로 인한 영적 침체를 경험하는 당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그러나 끊임없는 사랑과 은혜로 신앙을 주시는 분도, 신앙의 침체를 허락하시는 분도, 그리고  신앙을 다시 회복하시는 이도 그리스도이시다. 인간 편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처절하게 경험하는 것은 가혹하리 만큼 고통스러운 경험이지만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집요한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영적 침체 역시 신앙의 더 깊은 지경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 다만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믿음의 공동체 안에 머물면서 버티라"는 것이 가장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 신앙은 개인사가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경험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바로 이 때 절실하고 위력적으로 작용한다. 다윗은 "부르짖어도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찬송"중에 거하시며, 신앙공동체의 모임에서 선포와 증거와 찬양과 부르짖음을 통해 수치를 면하고 "찬송"을 회복할 수 있음을 노래하였다 (시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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