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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1.2009

믿음은 삶이다

프란체스코의 설교

믿음이란 관념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이어야 한다. 설교란 일방통행식의 가르침이 아니라 그 사람의 평편과 눈높이에 맞춘 진정한 교감이어야 한다. 가정에서는 온유하고, 타인에게 겸손하며, 불행한 자에게는 동정을, 악한 자에게는 저항을, 축복을 입은 자에게는 축하를, 뉘우치는 자에게는 용서를 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은 관념이 아니라 삶이다.

-김동훈, 역사와 함께하는 말씀묵상

7.20.2009

학습욕구

"Humans are the learning organism par excellence. The drive to learn is as strong as the sexual drive--it begins earlier and lasts longer."

Edward Hall

학습에 대한 욕구는 성욕보다 강하다. 학습욕구는 성욕보다 훨씬 일찍 시작되며 보다 오랫동안 지속된다.

인테그리티


1. 마음을 얻으라
리더십이란 영향력입니다. 결국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 리더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물론 마음을 얻지 못해도 리더를 따르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없이는 최선의 노력도 안하고, 최선의 결과도 얻지 못합니다. 즉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결코 그 사람의 열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훌륭한 리더는 상대방의 마음을 얻음으로, 그의 의지와 열정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것은 좋은 성품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좋은 성품 이상의 것이 필요합니다. 그럼 무엇이 필요할까요?


2. 공감하라
공감이라는 단어는 ‘안’과 ‘감정’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비롯했습니다. 따라서 공감은 상대방의 ‘감정’안에 있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아무리 훌륭한 리더가 객관적으로 좋은 목표를 제시한다고 해도, 그가 자신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낀다면, 사람들은 전심으로 그를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이해 받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리더에게는 다른 사람과 진심으로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이 절대적입니다.그런데 공감을 위해서는 몇 가지 요소들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감정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감정능력이란 자신의 진짜 감정을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모르는 사람이 절대 다른 사람과 공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아는 능력이 필요하며, 이는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정확히 진단하고 파악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경계선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의 감정을 이해할 때는 자신의 감정과 다른 사람의 감정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공감이란 상대방의 감정에 단순히 빠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감정에 빠지면 그가 현재의 경험을 극복하기 위해 희망의 다리를 놓는 일을 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경계의 벽이 너무 높아 자기 감정만 주장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따라서 균형이 필요합니다.

세 번째는 경청하는 능력입니다.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이해한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진심으로 듣고 있는지 아닌지는 상대방이 더 잘 압니다. 리더가 진심으로 듣고 이해하고자 할 때, 상대방 역시 그에게 마음의 문을 열게 될 것입니다.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점은 공감과 견해 차이는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즉 상대방의 경험을 인정하고 공감하는 것이 상대방의 의견에 반드시 동의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공감이 전제되지 않은 설득은 불가능하며, 참된 의사소통은 공감을 전제로 합니다. 하지만 변화를 이룰 수 없는 공감 역시 무익합니다. 상대방과 공감하게 되면 상대방으로부터 배우게 되고 심지어 자신의 생각이 바꿀 수도 있지만, 바른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하는 공감은 무익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3. 은혜를 베풀라
공감과 더불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는데 필요한 것은 마음 주기입니다. 마음 주기는 세 부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피해망상증입니다. 이 증상에 빠진 사람들은 신뢰라는 개념을 생각지도 않고 일만 잘 풀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상대방이 자신을 속일 것임을 전제하고 사람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부류의 리더는 우리 중에 없을 것이라고 믿고 바랍니다.둘째는 조건부 신뢰로, 우리 대부분은 여기에 속할 것입니다. 이들은 신뢰와 좋은 관계를 원합니다. 다만 잘하는 상대에게만 잘해줍니다. 이들의 중요한 가치는 공평입니다. 성과를 올린 사람에게는 그에 합당한 대우를, 그렇지 않으면 동일하게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신뢰를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이고, 이 때 필요한 것은 도움이기 때문입니다.셋째는 무조건적인 신뢰로, 자신보다는 남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는 마음을 가진 리더들입니다. 이런 사람은 우리 중에 흔하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바로 무조건적인 은혜에 기반한 종교임에도 우리의 리더들은 이 은혜와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습니다. 은혜는 기독교적 삶의 태도이자 존재 방식입니다. 이 은혜 속에서 궁극적으로 신뢰가 싹트며, 리더에게 은혜를 맛본 사람들은 리더에게 마음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그렇다고 상대방에 대해 바라는 기준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은혜로운 리더는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높은 기준으로 끌어 올리기 위해 조언이나 훈련, 격려, 자원 등을 제공합니다. 그는 아직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기준점에 도달하도록 섬기고 돕습니다. 반면에 은혜롭지 않은 리더는 요구만 할 뿐 도와주지 않으며 상대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그를 적으로 몰아 붙입니다. 은혜로운 리더만이 사람들이 진심으로 신뢰를 보이고 따르게 됩니다.


삶 속에 사람이 있다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사실이 있다면, 사람의 중요성입니다. 사람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인생을 통해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을 얻는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핸리 클라우드, 인테그리티-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진정한 사랑을 심리학과 리더십이라는 렌즈를 통해 잘 정리하고 분석해 놓았다는 점에서 저자의 노력과 통찰은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나는 저자가 주장했던 "인테그리티"에서 "리더십"과 "영향력"을 위해 사랑이 이용되는 "디스인테그리티"가 느껴졌다면 역설일까? 마음을 얻기 위해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을 얻고 싶은 것일까? 예수님도 제자들의 마음을 얻기위해 사랑하셨을까? 그냥 아무런 댓가와 결과를 바라지 않고 심지어 내자신을 희생해 다른 사람을 세워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 그것을 은혜라고 정의하고 그 은혜가 기독교의 기반이며 존재방식이라고 믿는다면, 리더십과 영향력이라는 결과물을 내려 놓고, 가족이 서로를 사랑하듯 연인이 서로를 사랑하듯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인테그리티가 아닐까? 하나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받은 자로서 내게 허락하신 자들과 그 은혜를 나누는 삶을 살아가려 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즐거이 지는 희생적 사랑만이 "영향력"과 "리더십"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조건적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조정하려는 은밀하고 집요한 자기 사랑의 죄성을 극복하는 길이라 믿는다. 존재목적과 존재방식 사이의 혼동을 분별하고 사랑받았기에 사랑하고, 사랑하기에 사랑으로 살아가는 "목적과 방식사이의 인테그리티"가 있기를 소원해 본다.

bk

7.18.2009

자아에 대한 세 개념과 윤동주

자아를 이해하는 데 는 세 가지 개념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잠재적 자아potential self와 존재적 자아existing self, 그리고 자아의 이미지the image of the self이다."

Lewis Sherrill, The Gift of Power, 19

잠재적 자아는 되어저 가는 과정,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자아이다.
존재적 자아는 특정 순간에 존재하는 자아이다.
자아의 이미지는 내가 어떻게 나를 보는가에서 내가 생각하는 자아상이다.
잠재적 자아와 존재적 자아, 그리고 자아상을 되도록이면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중요하다. 그러나 이 일은 절대타자인 하나님이라는 거울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자아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상호의존적이다. 이 자아에 대한 이해가 신념체계의 형성에 근본이 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만약 이 세가지 자아에 근본적인 혼동이 올 수 밖에 없는 환경에 있다면 어떨까? 죄된 세상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세상과 내 자신의 실체에 대해 뒤틀린 상을 강요한다. 따라서 절대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만남은 왜곡된 세계속에서 억압된 내 자아와의 충돌을 가져올 수 밖에 없다. 그 충돌은 의미의 통합을 위한 혼란을 가져온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나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혼란이 지향점을 향한 동경, 그리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배태하고 있다면 그 혼란은 아련한 아픔을 품고 아름다움으로 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왜곡된 세계속의 자아와 진리와의 충돌이 긍정적 통합 지향할지, 아니면 파괴적인 분열을 가져 올 지의 분기점에 십자가가 서 있다. 제임스 로더의 표현을 빌자면 "창조의 영"의 "인간 영"에 대한 역동적 역사가 필요하다.

쉐릴이 윤동주를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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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自畵像)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

로마서를 읽다가 십자가 앞에 서다

하늘은 맑고 구름은 깊다.
나무는 푸르고 바람은 시원하다.
세상은 아름답고 평온해 보인다.

난 두려워하고 있다.
"두려워말라"
그래도 두렵다고
너무도 떨린다고
두눈을 감는다.

온 세계를 덮어버린 칧흙같은 어두움
폭풍우 속에 성난 산 솟구친 파도
내려 꽃히는 번개 찟을 듯한 천둥사이
삼켜져 버릴듯 요동치는 배 한조각
그 속에 쪼그라든 내가 웅크려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평안하라고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면 증거를 보이라고

벌거벗긴채
침뱃음을 당하는
만왕의 왕

가시로 만든
왕관에 찔려
나무에 매달린
하나님의 아들

아하 아하
하나님의 아들이여
만왕의 왕이여
스스로 구원하고
거기서 내려오라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물처럼 쏟아지는 피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갈증
터처버린 심장
뻣뻣해진 근육
멈추고 싶은 호흡
마비되는 정신

"일로이 일로이 라마 사박다니"
외로운 외침
소망 향한 절규

"나의 주 당신의 손에
다시 또 한번
당신을 위해
나의 영혼을 맡겨 드리니

내가 사는
이세상
죽음까지도
당신의 손에 있는것

내가 살아가는
바로 그 목적
내가 노래하는
바로 그 이유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당신의 품에
그렇게 영원히
나 있기에..."


다윗의 노래를 따라
수백번 수천번
겟세마네에서 드렸던
바로 그 기도

나의 주님 그렇게
기도하시다
마치지도 못한 채
운명하셨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신뢰하는 자
부끄러움 없으리

하나님의 눈물
땅을 뒤덮고
막혀진 죄의 휘장
찟겨 나갔다.

into your hand I commit again
with all I am
for you Lord

you hold my world
in the palm of your hand
and I'm yours forever

Jesus I believe in you
Jesus I belong to you
You're the reason that I live
the reason that I sing
with all I am

I'll walk with you
wherever you go
throguh tears and joy
I'll trust you

and I will live
in all of your ways and
your promises forever

I will worship
I will worship you
forever

Amen

-Hillsong United-
Psalm 22
Mark 15
Romans 10


bk

7.14.2009

"믿으시면 아멘하세요!": 학습에 대한 두 관점과 문화, 그리고 하나님 나라

"믿으시면 아멘하세요!": 학습에 대한 두 관점과 문화, 그리고 하나님 나라

한국 뿐 아니라 세상의 많은 나라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어떤 면에서는 현재까지도 지배적인, 학습문화는 "수용"적 학습관에 기초를 두고 있다. 수용적 학습관은 학습learning을 "지식의 수용"으로 이해한다. 이는 "공장의 생산라인"이나 "은행구좌"같은 메타포로 설명될 수 있다. 지식은 전달자(교사)로 부터 수용자(학습자)으로 전달되며 단시간 최대량의 지식을 전달하고 저장하는 것이 학습의 목표가 된다. 학습의 평가는 교사가 전달한 지식과 학생이 획득한 지식이 얼마만큼 일치하는가, 교사가 전달한 지식을 학습자가 얼마나 저장하고 있는지에 중점을 둔다. 따라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지식을 전달하고 수용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오랬동안 수용된 지식을 정확하게 저장할 수 있는가가 최고의 관심이다.

수용적 학습관에 기초한 지식의 획득과 저장을 특징으로 하는 학습문화는 다음과 같은 가정을 담고 있다. (1) 지식은 객관적이며 독립적이다. 이 세상의 실체는 인식자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지식은 실재에 대한 객관적인 표상이다. 지식은 언어를 포함한 매체를 통해 그 순수성을 상실하지 않고 유통될 수 있다. (2) 가르침 또는 교수instruction는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다. 교사는 축척되고 조직된 지식을 효과적으로 학습자들에게 전달하는 전달자transformer이다. (3) 학습learning은 전달된 지식을 획득하고 저장하는 것이다. (4) 저장된 지식은 언제든지 다른 상황에 적용된다. 지식의 적용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보다 기초적이고 일반화된, 추상적 지식이 선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수용적 학습관은 여러가지 면으로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Paulo Freire는 수용적 학습관을 폭압적이라고 비판하였다. 주입적 암기와 반복rote memory을 통해 이루어 지는 은행예금식(banking) 학습은 학습자들의 주체적이며 비판적 사고를 근본적으로 제한하고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사고와 표현을 구속함으로서 개인의 인격과 독특성을 파괴하고 기득권이 만들어 놓은 사고체계에 순응하는 종속적이며 타율적인 인간을 양성한다고 보았다. 또한 학습의 실천적이며 공동체적인 특성을 현격히 제한하여 다른 사람들과의 함께 하는 대화와 활동를 거부하여 배움을 고립된 개인의 수행으로서의 "공부"로 축소시켰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수용적 학습문화는 비판적 사고력, 문제해결력, 창의력, 그리고 상상력같은 고차원적 사고의 발달을 이해하고 지원하는 데 심각한 한계를 드러내었다.

행동주의와 인지발달주의를 거처 1970년대 이후 끊임없이 주목을 받아온 학습에 대한 관점은 구성주의constructionism 관점이다. 구성주의적 관점에서 지식은 인식의 주체인 학습자가 내적 인식과 외적 환경사이에서 끊임없이 구성, 해체, 재구성된다. 학습은 이러한 인식 주체의 능동적 지식 구성의 과정이다. 구성주의 학습관에서는 학습자가 처해 있는 상황과 학습자 사이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과정이 학습이라고 보기 때문에 학습은 본질적으로 상황 의존적이라고 주장한다. 즉 어떤 상황에서 어떤 활동을 하는가가 학습의 내용과 결과를 규정하게 된다. 따라서 학습은 고립된 개인의 활동일 수 없으며 전달자와 수용자의 관계에서 처럼 일방적일 수도 없다. 자신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 그리고 구체적 학습의 상황이나 학습자가 처한 사회문화적 환경등이 학습에 있어 본질적인 요소들이며 따라서 학습은 상황적이고 사회적이다.

이러한 학습에 대한 이해는 자연스럽게 교사와 학습자의 역할에 근본적 변화를 요청한다. 교사는 학습자가 주체적으로 지식을 구성할 수 있도록 돕는 안내자 또는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 학습자가 최대로 자기 자신을 개발 할 수 있도록 상황과 환경을 최적화 해 주어야 한다. 또한 학습자 개개인의 특성과 역사를 이해하며 그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하고 인격적인 신뢰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무엇보다 학습자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학습자를 신뢰하고 인내함으로 "안전하게 실패"할 수 있는 문화와 구조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학습자는 학습의 주체로 자기 주도적이며, 창의적이고 비평적이며 탐구적인 학습행위를 통해 개인과 공동체의 지식구성행위에 능동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스스로의 사고방식과 고정관념을 떠받치고 있는 전제와 가정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날카롭게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과의 사고와 행동에서 대립되는 차이점을 긍정하고 수용하며 상호 발전시키는 자세와 노력이 요구된다. 개인이 아닌 공동체로서 함께 배워가려는 겸허한 마음과 구성된 지식을 구체적인 현장에서 검증하고 확인하는 용기와 도전이 있어야 한다.

학습에 대한 수용적 관점과 구성적 관점의 차이점은 교회 사역에 대해 심각한 시사점들을 제공한다. 설교와 성경공부에서 부터 시작하여 예배와 선교에 이르기 까지 교회 사역 본질중 하나는 칼빈이 지적한 바 대로 어머니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이다. 성도들을 단순한 성경지식의 전달과 문화화된 교회의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도록 강요함으로서 현재도 상당히 진행되어 온 교회의 세속화를 심화시킬 것인지, 아니면 성도들로 하여금 말씀을 준거의 틀로 삼아 개인과 공동체의 성향과 활동에 녹아 있는 세속성을 분별하도록 비판적 성찰의 능력을 함양하게 하고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문화를 창조하여 세상에 대안을 제시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로 양육할지는 교회의 책임있는 리더들이 가지고 있는 "학습"에 대한 이해에 따라 달라지게 될 것이다.

학습에 대한 두 관점을 생각하면서 실제 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사역을 예로 들어 성찰해 보자. 위성을 통한 예배, 인터넷을 통한 신앙강좌, 텔레비전을 통한 복음 전도등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성서신학적인 지식을 가지고서는 현상에 대한 직접적인 해답을 얻기 어려울 것이다. 수용적 관점에서 본다면 인터넷이나 기타 위성과 텔레비전을 통한 신앙행위들은 원하는 정보를 습득하고 주관적 감정을 움직이는 동기부여를 일으키는 데에는 상당한 도움을 주고 또 효과적일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극복하고 학습자/성도들의 필요와 취향에 따라 지식습득(신앙/말씀 강좌)과 신앙적 행위(예배)를 선택하고 향유할 수 있기 대문이다. 따라서 지식의 전달과 수용, 그리고 축적이라는 측면에서 인터넷 예배나 성경공부는 탁월한 학습의 도구로 유용하게 활용해야 한다.

한편, 구성주의적 관점으로 이 문제를 본다면, 학습자 또는 청중의 컨텍스트와 특성이 고려 될 수 없는 일방적 전달의 의사소통과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 속에서의 상호작용이 없는 정보의 수동적 수용은 개인의 비판적 성찰 능력을 개발하고 더 넓은 진리를 이해하며 실천하는 데 주체적 노력을 기울이는 변화와 성숙을 가져 오기에는 제약되는 점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축척된 (수용된) 지식이나 경험이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실질적인 적용성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점에서는 실증적 연구가 필요하다.

설교에 있어서 예를 들어 보자.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 선포"라는 측면에서 접근하여 설교자를 "말씀의 대언자"로 보려는 시각이 있었다. 이러한 접근은 지식의 수용적 관점을 그대로 대변한다. 선포자는 전달하며 청중은 수용하고 축적한다. 성서를 해석하고 전달하는 과정은 전적으로 설교자의 고독한 작업에 의존하며 일체의 질문과 의심을 용납되지 않는다. "믿으시면 아멘하세요!"라는 설교자의 외침이 이를 대변한다.

그러나 토마스 롱을 주축으로 하는 "공동체적 증언"의 관점으로 설교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설교자를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중 하나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사람"으로 여긴다. 역시 지식의 구성주의적 측면이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최근에는 "대화적 설교dialogical preaching"를 통해 설교자가 청중들과 서로 양방향의 의사소통을 추구하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다. 고차원의 학습을 통한 창조적 변화가 일어나려면 학습자의 필요와 동기, 그리고 삶의 현장과 실제 경험을 중심으로 상호간의 의사소통이 일어나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간의 학습을 보는 관점에 따라 이렇듯 실제 삶에서 살아가는 방식, 즉 의사소통의 스타일, 조직의 구조와 문화,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는 많은 차이를 나타낼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 발전하고 있는 사회과학의 발견과 발전을 잘 이해하여 좀 더 신학적이면서도 효과적인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더 왕성하게 구현되어야 할 것이다.


bk

7.10.2009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말씀 읽기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순종되고 복종되어 "현실"이 되는 세계다 (시 103:19-22). 그것은 곧 공평과 정의를 인간 역사속에 실현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 (창 18:19, 삼하 8:15)의 빛 아래서 성경을 읽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경과 기독교 복음이 단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만을 위한 선물이 아니라 온 누리의 만민을 위한 선물임을 강조하는 성경 읽기다. 기독교 신앙의 공공성과 역사성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성경읽기다. 성경에서 영혼 구원의 원리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벌어지는 정치, 경제, 국제관계등의 공적 영역 속에 성경적 원리와 가치를 뿌리내리게 하고 실현시키려는 성경읽기다.
김회권,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사도행전 1, 복있는 사람 2007, p. 11.

창조와 타락과 구속의 구속사적이며 개혁주의적 세계관의 렌즈를 쓰고 읽어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진 하나님의 세계 통치를 염두에 두고 개인과 사회, 성과 속, 삶과 정신, 현상과 본질, 구조와 방향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 않으며 읽어 가는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통해 나와 세상을 보고, 역사를 통해 말씀을 이해하는 통전적인 접근만이 주관적인 자의적 해석의 유혹, "영지주의적 심령주의의 침잠spiritualistic retreat into the private realm"(김회권, 16) 과 그로 인한 우월감, 그리고 문자와 교리에 사로잡힌 경직된 적용의 폭압을 극복하고 진정으로 인간과 세상을 해방하시는 하나님의 따듯한 진리를 풍성하게 누리도록 할 것이다.
bk

구원에 대한 심각한 오해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하고,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찌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막 15:30-32

하나님의 작정과 약속 대로 예수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의 경륜은 창조세계의 회복을 위한 대안으로 자신의 아들이 죄의 댓가를 치루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다시 새로운 생명을 통해 회복시키시는 것이었다. 사도바울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방법을 "하나님의 의" 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로 지칭했다.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를 심각하게 오해했다는 점이다. 사람들의 구원에 대한 이해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이해 사이에 여전히 큰 차이가 존재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성경은 바로 이점, 즉 구원에 대한 오해가 죄의 근원이라고 가르친다. 죄의 근원은 절대 타자인 하나님 대신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인간의 의식적이며 무의식적인 자율의지에 기인한다.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 있는 인간은 바로 그 죄로 인해 샬롬을 상실하고 생명의 근원에서 뿌리 뽑혀 스스로의 한계로 인한 죄의 고통들로 처절하게 신음해야 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편, 즉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어떤 죄의 문제이든지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여 죽고 하나님의 힘으로 다시 사는 일 없이는 참된 구원은 일어나지 않는다.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고 외쳤던 종교지도자들의 비아냥이 자신의 창조세계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향했다는 점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죽어야 다시 사는 십자가와 부활의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고 신뢰하고 순종하지 않는 이유는 "자기 의" 때문이다 (롬 10:3). 자신의 논리와 상식과 경험과 합리성과 자원들에 대한 한계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런 것들로 구원을 획득하려는 지독한 경향성, 즉 "자기 의"의 응집체가 바로 인간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자기 의"는 십자가와 부활의 "그리스도의 의"와 격렬하게 충돌한다.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절규하며 죽어간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고 그의 부활과 온 세상의 주되심을 영혼 깊이 인정할 뿐아니라, 세상을 향해 선포하고 고백하며(homologeow) 그 분을 "의"를 쫓아 살아가는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며 절대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막15:39; 롬 10:9-13).

7.08.2009

혁명적 복음과 알깨기

“새는 알을 까고 나온다. 알은 한 세계다. 태어나려하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은 아프락서스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보낸 편지 중
헤르만헤세, 데미안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자신을 둘러 싼 낡은 현실의 파괴와 맞닿아 있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구절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불을 던지고 평화를 파괴하는 검을 주러 왔다고 가르치셨다. 또한 종교와 정치, 교육과 경제의 실질적 중심이었고 한 민족의 아이덴티티였던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주장하셨고 그로 인해 신성모독의 죄목으로 정치적 타살을 당하셨다. 예수의 복음은 그 본질상 '전복적'subversive이고 해체적이며 혁명적이다. 이 말은 폭력적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개인과 집단의 죄성으로 인한 모든 불의와 죄악에 대한 정면도전이다. 새로운 생명은 안전하게 무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참생명 또는 온전한 삶은 죄와 사망의 세력에 대항하는 혁명과 전쟁의 댓가를 지불하고 획득하는 것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의 옮김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흘림을 비용으로 치뤄야 할 만큼 치열하고 맹렬한 세상과의 전쟁을 치루고 난 후 얻어지는 것이다.

복음의 선포는 이렇듯 기존의 질서와 갈등관계에 있을 수 밖에 없다. 예수의 삼중 직 중, 선지자로서의 예수는 사회와 도통 어울릴 수가 없다. 기득권자들과 좋은 관계일 수 없으며, 지도자들과 화평할 수가 없고, 지식인들과 논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그의 몸으로서 교회에게 위임된 것이다. 왕과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실행하는 것 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선지자만으로도 안된다. 모두가 다 필요하다. 그러니 모든 교회가 다 필요할 것이 아닌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가는 서로 견제하며 대화하고 협력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자신을 둘러싼 자신의 세계를 인식하고 확장하려는 인간 영혼의 투쟁을 심리적으로는 "자아 발달"로 교육이론으로는 "변형적 학습"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발달과 변형이론들의 핵심은 인간의 "인식 구조" 또는 "인식의 틀"이 신체, 나이, 성별, 사회적 환경, 문화에 따라 어떻게, 어떤 과정에 따라, 어떤 촉매적 요건들을 통해 발달 또는 변형되는 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구조변형의 이해들은 인식구조의 발달과 변화의 설계자이며 원인자이고 협력자인 동시에 완성자이신 창조의 영을 간과한다는 점에서 자기 인식의 한계에 갖히는 심각한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반면 교회에서의 설교와 가르침은 보편은혜에 기반한 창조원리의 구조적 측면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깊이있는 이해를 추구하려 노력하지 않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사회과학을 통해 발견된 인간 발달과 인식구조 변형의 원리들이 근거가 빈약한 오류이며 교회의 신학과 신앙적 실천에 마치 원수나 되는 것 처럼 떠벌여 유치한 이분법적 사고에 근거한 싸움을 부추키기도 한다. 이로서 자기 인식의 한계안에 갖혀 있는 자신의 가련함을 보지 못한 채, 진리를 자기 호주머니 속에 넣고 있는 양 호들갑을 떠는 어리석음과 오만함을 보이기까지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교만함으로 스스로를 갱신할 줄 아는 능력을 상실한 교회는 세상의 권위주의적이고, 성취지향적(또는 경쟁적)이며, 가변적이고 폭압적인 세상문화의 사회화 과정에 저항하고 극복하여 그리스도의 문화를 창출해 냄으로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급속도로 세속화되어 스스로 경쟁하여 분쟁하고 결국 분열하여 자멸하게 된다는 점이다.

전통과 인습, 도그마와 자기 경험의 한계에 갖혀있는 사람들을 향해 "새술은 새부대"에 담을 수 밖에 없다고 일갈하신 예수의 통렬한 지적은 금식 논쟁과 같은 지엽적인 실천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똑같은 성정을 가진 나사렛의 젊은 목수를 창조주의 아들로 인정해야 하는 믿음은 기존의 인식구조의 틀을 무너뜨리는 새로운 인식구조로의 전환paradigm shift이 없이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 바로 이 시작점에서 부터 죽어야 살고, 나눠주어야 풍성해지며, 낮아져야 높아지고, 포기해야 얻는 다는 불가해한 역설이 시대와 상황과 문화를 초월한 삶의 근원적 원리로 존중되기 시작한다.

그러니 이렇듯 자기의 존재의 집인 "자기 세계"를 부수는 일이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가능하단 말인가!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자기한계의 인식만이 우리를 죽은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창조의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로 인도한다. 또한 이를 삶으로 증명해 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과 우리 안에서 그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믿음과 힘 주심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하도록 한다. 나의 한 부분인 세계를 파괴하는 일은 그래서 하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다.

bk

7.06.2009

해돈 로빈슨의 조언

오늘날 강해설교가 더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강해설교를 논할 때, 그것은 단순히 설교의 형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을 논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성경에 굴복시킬 것인가, 아니면 성경을 우리의 생각에 굴복시킬 것인가?’ 이 질문에 얼마나 정직한 대답을 하느냐가 그 사람이 진정한 강해설교자인지 아닌지를 판별해 주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강해설교가 더 중요한 이유는 과거의 설교자들이 지녔던 권위가 이제는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성장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이 시대의 보통 사람들은 설교자를 지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리더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20년 전만 해도 목사를 대상으로 법적인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목사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들은 배심원들에게 그가 목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하려고 무슨 일이든지 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수많은 이유로 사람들에게 신뢰를 잃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 자체가 스스로 진리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연구하게 만든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설교자가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보고, 듣고, 이해하게 만든다면, 성경은 그 자체로 그들을 확신시키고,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고,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우리가 성경본문을 가지고 설교해야 하는 이유는, 성경본문 자체가 권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본래의 정체성,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재하고, 성령이 그 말씀에 응답하며, 설교자가 그 말씀을 청중들의 삶과 연관된 방식으로 전달할 때, 성경은 설교자의 권위로 할 수 없는 일들을 해 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설교의 형식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설교의 형식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설교의 형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것입니다. 설교의 형식은 본문의 형식을 반영해야 합니다. 설교는 본문의 사상을 반영할 뿐 아니라 본문의 형식에도 영향을 받아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구약의 내러티브 문학을 다룬다면, 설교도 반드시 구약에서 사용한 이야기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시편을 다룬다면, 시편은 사람들이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를 보여 주거나, 예배에 대해 가르치는 책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시편의 문학과 씨름해야만 합니다. 시편이 전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우리의 설교에서 어떻게 시적인 요소들을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하나님이 자신의 진리를 전달하실 때 특정한 형식을 취하셨기 때문에 설교자는 그 형식을 반영해야 한다는 철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설교 적용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부분의 복음주의진영과 자유주의 진영의 심각한 이단들의 이론은 교리 자체보다 적용에서 문제가 많습니다. 중요한 질문은 ‘본문을 특정한 방식으로 적용할 때, 설교자는 여전히 성경의 권위를 갖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세계와는 전혀 다른 고대 세계의 진리를 성경의 권위라는 이름으로 설득시키려면 반드시 본문과 씨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설교자는 본문을 적용하는 일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이 작업은 필수입니다. 청중들이 적용된 진리를 삶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본문을 적용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하지만 적용에는 율법주의의 위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어머니가 몸이 아픈데 자식들이 부모님을 모시지 않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때 우리는 만약 부모를 진정으로 공경한다면, 부모님이 나이가 들어 아프실 때 집에서 모셔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바로 그 적용(부모님을 집에서 모셔야 함)이 원리(부모님을 공경해야 함)를 지배하게 됩니다. 원리의 적용이 율법주의가 될 때, 적용 자체가 원리를 지배하게 될 때, 우리는 그릇된 길로 접어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적용 방식에는 신학적 위험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청중들에게 전하는 설교내용이 본문에서 추출한 원리와 본문의 상황을 역동성 있고 정확하게 반영하려면, 더 많이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분명, 설교자들은 전에 비해 이 부분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습니다만, 저는(로빈슨 교수) 설교자들이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기보다 청중들에게 죄책감을 심어 주는 방식을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이 본문이 ‘우리가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고 가르쳤는데, 청중들이 이를 실천에 옮기지 않자, 설교자들이 그것을 ‘당신이 해야 한다.’는 의미로 바꿔서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만약 거기에 ‘주께서 이르시기를’이라는 말까지 덧붙이면,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행사할 수 있는 모든 권력을 갖추게 되는 셈입니다.

적용에 관해 또 한 가지 기억할 것은, 목회자가 회중들을 격자로 구분하는 방법이 유용하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격자든지 괜찮겠지만, 한쪽은 베이비붐 세대, 베이비버스터 세대(출생률 격감기에 태어난 세대), Y세대와 같이 연령별 구분을 하고, 다른 한 쪽은 부모와 함께 사는 미혼자, 무자녀 부부, 기혼자, 이혼자와 같은 식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격자구분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격자구분을 만들고 나면, “나는 오늘 내가 전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진리임을 믿는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가족 없이 혼자 생활하는 18세의 젊은 여성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룸메이트와 함께 살면서 직장에 다니는 여성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만약 그 자매가 사무실에 찾아와 ‘목사님, 까다로운 룸메이트랑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혹은 ‘온종일 저만 감시하는 직장상사는 어떻게 대해야하죠?’라고 질문했을 때 이 본문은 과연 그녀에게 답을 제시해 주는가.”에 대해서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설교자는 청중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이처럼 회중들을 구분해 놓으면, 각 개인들 혹은 비슷한 개인을 묶어 놓은 그룹들을 좀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국제제자훈련원의 신간 “능력있는 설교 이렇게 한다!”에 실린 이 새대 최고의 설교자 20인의 조언 가운데 하나인 해돈 로빈슨 교수의 조언(69-94쪽)

7.04.2009

아기 낙타의 질문

하루는 아기 낙타가 엄마 낙타에게 물었다.
"엄마, 왜 나는 이렇게 커다란 발가락이 세 개나 되나요?"
엄마 낙타가 대답했다.
"사막을 건널 때 부드러운 모래 더미 위에서 미끄러지지 말라고 있는 거란다."
"그럼 눈썹은 왜 이렇게 길어요?"
"사막을 건너는 동안 모래가 눈 속에 들어가는 걸 막기 위해서지."
"그럼, 등에 혹은요?"
"그건 건조한 사막을 건널 때 필요한 물을 저장해 두기 위해서란다."
아기 낙타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멋져요, 엄마. 큰 발이 있어서 미끄러지지 않고, 긴 눈썹이 있어서 눈에 모래도 안들어가고, 혹이 있어서 물을 저장해 둘 수 있으니까요. 근데 엄마..."
"응, 아들아?"
"왜 우리는 동물원에 있어요?"

David Jeremiah

하나님이 주신 자원, 이를테면 은사, 건강, 전공, 기술, 시간, 재정, 경험, 관계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주께서 부르신 소명의 자리에서 최대로 활용할 일이다.

배움을 위한 기도

배우게 하소서 -존 베일리-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일을 잘 이용하여
죄의 열매를 거두지 않고
성결의 열매를 거두게 하소서

실망으로 희망을 배우게 하소서
성공으로 감사를 배우게 하소서
불안으로 참음을 배우게 하소서
위험으로 담대함을 배우게 하소서

비난으로 오래 참음을 배우게 하소서
칭찬으로 겸손을 배우게 하소서
기쁨으로 절제를 배우게 하소서
고통으로 인내를 배우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