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강해설교가 더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강해설교를 논할 때, 그것은 단순히 설교의 형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을 논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성경에 굴복시킬 것인가, 아니면 성경을 우리의 생각에 굴복시킬 것인가?’ 이 질문에 얼마나 정직한 대답을 하느냐가 그 사람이 진정한 강해설교자인지 아닌지를 판별해 주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강해설교가 더 중요한 이유는 과거의 설교자들이 지녔던 권위가 이제는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성장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이 시대의 보통 사람들은 설교자를 지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리더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20년 전만 해도 목사를 대상으로 법적인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목사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들은 배심원들에게 그가 목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하려고 무슨 일이든지 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수많은 이유로 사람들에게 신뢰를 잃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 자체가 스스로 진리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연구하게 만든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설교자가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보고, 듣고, 이해하게 만든다면, 성경은 그 자체로 그들을 확신시키고,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고,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우리가 성경본문을 가지고 설교해야 하는 이유는, 성경본문 자체가 권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본래의 정체성,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재하고, 성령이 그 말씀에 응답하며, 설교자가 그 말씀을 청중들의 삶과 연관된 방식으로 전달할 때, 성경은 설교자의 권위로 할 수 없는 일들을 해 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설교의 형식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설교의 형식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설교의 형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것입니다. 설교의 형식은 본문의 형식을 반영해야 합니다. 설교는 본문의 사상을 반영할 뿐 아니라 본문의 형식에도 영향을 받아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구약의 내러티브 문학을 다룬다면, 설교도 반드시 구약에서 사용한 이야기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시편을 다룬다면, 시편은 사람들이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를 보여 주거나, 예배에 대해 가르치는 책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시편의 문학과 씨름해야만 합니다. 시편이 전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우리의 설교에서 어떻게 시적인 요소들을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하나님이 자신의 진리를 전달하실 때 특정한 형식을 취하셨기 때문에 설교자는 그 형식을 반영해야 한다는 철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설교 적용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부분의 복음주의진영과 자유주의 진영의 심각한 이단들의 이론은 교리 자체보다 적용에서 문제가 많습니다. 중요한 질문은 ‘본문을 특정한 방식으로 적용할 때, 설교자는 여전히 성경의 권위를 갖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세계와는 전혀 다른 고대 세계의 진리를 성경의 권위라는 이름으로 설득시키려면 반드시 본문과 씨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설교자는 본문을 적용하는 일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이 작업은 필수입니다. 청중들이 적용된 진리를 삶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본문을 적용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하지만 적용에는 율법주의의 위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어머니가 몸이 아픈데 자식들이 부모님을 모시지 않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때 우리는 만약 부모를 진정으로 공경한다면, 부모님이 나이가 들어 아프실 때 집에서 모셔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바로 그 적용(부모님을 집에서 모셔야 함)이 원리(부모님을 공경해야 함)를 지배하게 됩니다. 원리의 적용이 율법주의가 될 때, 적용 자체가 원리를 지배하게 될 때, 우리는 그릇된 길로 접어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적용 방식에는 신학적 위험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청중들에게 전하는 설교내용이 본문에서 추출한 원리와 본문의 상황을 역동성 있고 정확하게 반영하려면, 더 많이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분명, 설교자들은 전에 비해 이 부분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습니다만, 저는(로빈슨 교수) 설교자들이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기보다 청중들에게 죄책감을 심어 주는 방식을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이 본문이 ‘우리가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고 가르쳤는데, 청중들이 이를 실천에 옮기지 않자, 설교자들이 그것을 ‘당신이 해야 한다.’는 의미로 바꿔서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만약 거기에 ‘주께서 이르시기를’이라는 말까지 덧붙이면,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행사할 수 있는 모든 권력을 갖추게 되는 셈입니다.
적용에 관해 또 한 가지 기억할 것은, 목회자가 회중들을 격자로 구분하는 방법이 유용하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격자든지 괜찮겠지만, 한쪽은 베이비붐 세대, 베이비버스터 세대(출생률 격감기에 태어난 세대), Y세대와 같이 연령별 구분을 하고, 다른 한 쪽은 부모와 함께 사는 미혼자, 무자녀 부부, 기혼자, 이혼자와 같은 식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격자구분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격자구분을 만들고 나면, “나는 오늘 내가 전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진리임을 믿는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가족 없이 혼자 생활하는 18세의 젊은 여성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룸메이트와 함께 살면서 직장에 다니는 여성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만약 그 자매가 사무실에 찾아와 ‘목사님, 까다로운 룸메이트랑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혹은 ‘온종일 저만 감시하는 직장상사는 어떻게 대해야하죠?’라고 질문했을 때 이 본문은 과연 그녀에게 답을 제시해 주는가.”에 대해서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설교자는 청중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이처럼 회중들을 구분해 놓으면, 각 개인들 혹은 비슷한 개인을 묶어 놓은 그룹들을 좀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국제제자훈련원의 신간 “능력있는 설교 이렇게 한다!”에 실린 이 새대 최고의 설교자 20인의 조언 가운데 하나인 해돈 로빈슨 교수의 조언(69-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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