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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1.2009

하나님의 날에

하나님의 날
성전에 와 앉았다.

벽 사이 십자가 틈으로
따스한 빛 한줄기
내 몸에 내려 앉는다.

환희 웃으시는
예수의 얼굴
그 따스한 미소로
내 영혼에 와 닿았다.

차갑고 어두운
거부할 수 없는 기운에 눌려
애쓰고 고닳픈 영혼

그 감춰진 곤고함을 뚫고
강렬한 사랑의 생명으로
떨리는 울림으로
내 영혼을 감싸 흘렀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 하도록
나로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값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

찬미하며 드린 그 노래
눈물 사이로
나는 묻는다.

왜 내게 이런 은혜를 주실까?
왜 나를 이렇게 사랑하실까?

예수의 사랑은
원수 사랑이라

원수된 나를 위해
몸버려 사랑하신
예수를 위해
나도 그렇게

몸버려 내 원수 품기를
몸태워 빛이 되기를
녹아져 소금이 되기를

불가능한 사랑
순종의 열매
나의 사랑 예수처럼

사랑하며 죽고
사랑하며 살기를
매일 매일이
하나님의 날 되기를

나 하나님의 날에
그렇게 기도드렸다.

bk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푸쉬킨 (Alekasandr Sergeyevich Pushikin, 1799-1837)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오
슬픔을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쁜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오늘이 한없이 우울하다 해도
모든 것은 한순간에 지나가는 것이리
그리고 지나간 것은 그리워지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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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 러시아의 암울한 상황에서 푸쉬킨은 인내와 소망을 노래했다.
그러나,
오늘이 너무 밝고 아름다워 그래서 슬프다면 어떨까?
지나가는 한 순간이 안타까워 그래서 슬프다면 어떨까?
이미 지난 그리움을 꿈꾸며 그래서 슬프다면 어떨까?



8.27.2009

천천히 설교합시다.

천천히 설교합시다

요즘 다른 목사의 설교집을 제법 많이 읽었습니다. 인터넷이나 기독교 방송을 통해서 여러 분의 설교도 직접 들었습니다. 옛날부터 느낀 바이지만, 설교자들이 청중을 너무 어린애 다루듯이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아이의 특성은, 독립적으로 생각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결정해주면 그저 따르는 것으로 만족해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판단 능력이 없을 때도 있지만, 있다고 하더라도 정서적으로 의존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합니다. 어린이들이 담임선생님 말씀을 무조건 순종하듯이 신자들은 목사의 설교를 그렇게 순종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목사들은 신자들을 그렇게 어린애로 만들어놓아야 설교하기가 쉽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 신자들의 유아성은 너무 심각한 상태입니다. 심지어 대학교 선생이나 의사·변호사 등 나름대로 사회 지도층 인사인데도 불구하고 신앙 부분에서는 어린애와 똑같습니다.
이런 상황을 목사들은 속으로 즐겁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국 한국 교회의 토대가 위태로워지는 길입니다. 약간 다른 상황이지만 니체는 이런 유럽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가리켜 '가축떼' 윤리라고 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사육되는 가축 말입니다.

나는 니체의 비판이 그렇게 빗나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의 신자들은 '가축떼'로 사육되고 있습니다. '순종하라'는 말씀을 목사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린애가 어머니의 젖을 먹고 만족하듯이 종교적 만족감에 젖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본 회퍼가 말하는 '값싼 은혜'이기도 합니다. 값싼 은혜에 만족하고 아무런 영적 에너지를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요? 그 문제를 지금은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목사의 설교가 너무 조급증에 빠져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만 합니다. 설교자들이 너무 설치는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말을 너무 많이 합니다. 겨우 성서 내용을 정보로만 알고 있으면서 대단한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열을 올립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격언이 딱 어울립니다.

저는 그런 목사들의 설교를 듣고 나면 너무 허무해집니다. 자신이 아는 것만큼만 정직하게 설교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성령이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그 설교를 완성시키십니다. 그 비밀을 모르는 설교자들은 자신이 당장 청중의 신앙적 결단을 끌어내기 위해서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쏟아놓습니다. 본인이나 청중이나 허탈해집니다. 그런 허탈을 모면하기 위해서 자극적인 예화를 끌어들이거나 신앙을 과장합니다.

우리 설교자들, 조급하게 설교하지 맙시다. 구원은 우리의 말재주가 아니라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하십니다. 우리의 영역이 줄어들어야 영의 영역이 늘어납니다.
천천히 목회하고 천천히 설교합시다. 우리의 주제를 잘 파악하고 그분에게 많은 부분을 맡깁시다. 그래도 교회는 잘 굴러갈 테니까, 그래도 신자들의 신앙은 줄어들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맙시다.

정용섭 / 샘터교회 목사·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Pasted fr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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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 만큼, 경험한 것 만큼, 삶으로 체득한 것 만큼만 설교해야 할 일이다. 풍부한 언어와 현란한 수사, 정교한 논리, 깜짝 놀랄만한 통찰에 집착하게 될 때, 사람을 잠시 설득할 수는 있겠으나, 오히려 자신과 공동체를 진리와 성령의 초월적 은혜의 자리에 깊이 머무르게 하는 것을 방해할 소지가 더 많다. 진리는 단순하며 인격적이다. 그 진리가 오셔서 성령의 역동적 역사로 일하실 수 있도록 천천히, 차분히, 그리고 진리를 실천함으로 설교해야 한다. 내 삶이 설교가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필요 이상의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꼭 필요한 것과 행해야 할 것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전달하고는 그대로 행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복음은 말의 지혜에 제한 받지 않는다 (고전 1:17). 오히려 나의 말과 행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구속당해야 할 것이며, 그러할 때 드러나는 삼위 하나님의 초월적 역사를 공동체가 함께 경험하도록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공동체의 구성원 하나 하나가 주체적으로 말씀을 통해 세상과 자신을 깊이 반추하여 각성하고 지혜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bk

8.23.2009

은혜의 통로들

"기도할 때 어떤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양심을 통해 들으면서 하나님을 체험한다. 성경을 읽을 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 대해 직접 하는 말로 받아들여지면서 하나님을 체험한다. 우리의 도움과 참여를 필요로 하는 현장에서 자기를 바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때, 그곳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한다."

후광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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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과 이성, 그리고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는 체험된다. 지,정,의의 조화와 균형 속에서 경험된 하나님을 간결하게 증언하였다.
bk

8.21.2009

사랑하는 당신에게


















허물과 약점, 실수를 너그럽게 품고 용서하는 남편,
아픔과 고난의 현실을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극복하는 남편,
소명의 자리에서 고귀한 가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인내로 투쟁하는 남편으로 기억되도록 성실이 살아가기를 기도한다.

bk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선생님의 마지막 일기 중

2009년 1월 6일
오늘은 나의 85회 생일이다. 돌아보면 파란만장의 일생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투쟁한 일생이었고, 경제를 살리고 남북 화해의 길을 여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일생이었다. 내가 살아온 길에 미흡한 점은 있으나 후회는 없다.

1월 7일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
1월 11일
오늘은 날씨가 몹시 춥다. 그러나 일기는 화창하다. 점심 먹고 아내와 같이 한강변을 드라이브했다. 요즘 아내와의 사이는 우리 결혼 이래 최상이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아내 없이는 지금 내가 있기 어려웠지만 현재도 살기 힘들 것 같다. 둘이 건강하게 오래 살도록 매일매일 하느님께 같이 기도한다.
1월 14일
인생은 얼마만큼 오래 살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얼마만큼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았느냐가 문제다. 그것은 얼마만큼 이웃을 위해서, 그것도 고통받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살았느냐가 문제다.
1월 15일
긴 인생이었다. 나는 일생을 예수님의 눌린 자들을 위해 헌신하라는 교훈을 받들고 살아왔다. 납치, 사형 언도, 투옥, 감시,
도청 등 수없는 박해 속에서도 역사와 국민을 믿고 살아왔다. 앞으로도 생이 있는 한 길을 갈 것이다.
1월 16일
역사상 모든 독재자들은 자기만은 잘 대비해서 전철을 밟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 전철을 밟거나 역사의 가혹한 심판을 받는다.

1월 17일
그저께 외신기자 클럽의 연설과 질의응답은 신문, 방송에서도 잘 보도되고 네티즌들의 반응도 크다. 여러 네티즌들의 ‘다시 한 번 대통령 해달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다시 보고 싶다, 답답하다, 슬프다’는 댓글을 볼 때 국민이 불쌍해서 눈물이 난다. 몸은 늙고 병들었지만 힘닿는 데까지 헌신, 노력하겠다.
1월 20일
용산구의 건물
철거 과정에서 단속 경찰의 난폭진압으로 5인이 죽고 10여 인이 부상 입원했다. 참으로 야만적인 처사다. 이 추운 겨울에 쫓겨나는 빈민들의 처지가 너무 눈물겹다.
1월 26일
오늘은 설날이다. 수백만의 시민들이 귀성길을 오고가고 있다. 날씨가 매우 추워 고생이 크고 사고도 자주 일어날 것 같다. 가난한 사람들, 임금을 못 받은 사람들, 주지 못한 사람들, 그들에게는 설날이 큰 고통이다.
2월 4일
비서관회의 주재. 박지원 실장 보고에 의하면 나에 대해서 허위사실을 공표한 한나라당 의원에 대해서(100억 CD) 대검에서 조사한 결과 나는 아무런 관계 없다고 발표. 너무도 긴 세월 동안 ‘용공’이니 ‘비자금 은닉’이니 한 것, 이번은 법적 심판받을 것. 그 의원은 아내가 6조원을 은행에 가지고 있다고도 발표, 이것도 법의 심판을 받을 것.
2월 7일
하루종일 아내와 같이 집에서 지냈다. 둘이 있는 것이 기쁘다.
2월 17일
명동
성당에 안치된 김수환 추기경의 시신 앞에서 감사를 드리고 천국영생을 빌었다. 평소 얼굴 모습보다 더 맑은 얼굴 모습이었다. 역시 위대한 성직자의 사후 모습이구나 하는 감동을 받았다.
2월 20일
방한 중인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으로부터 출국 중
전용기 안에서 전화가 왔다. 그는 전화로 1. 클린턴 대통령의 안부 2. 과거 자기 내외와 같이 있을 때의 좋았던 기억 3. 나의 재임시의 외환위기 수습과 북한 방문시 보여준 리더십 4. 다음 왔을 때는 꼭 직접 만나고 싶다 5. 남편 클린턴 대통령도 나를 만나기를 바라고 있다고 했다.
힐러리 여사가 뜻밖에 전화한 것은 나의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 표명으로 한국 정부와 북한 당국에 대한 메시지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아무튼 클린턴 내외분의 배려와 우정에는 감사할 뿐이다.
3월 10일
미국의 북한 핵문제 특사인 보즈워스씨가 방한했다가 떠나기 직전 인천공항에서 전화를 했다. 개인적 친분도 있지만 한국 정부에 내가 추진하던 햇볕정책에의 관심의 메시지를 보낸 거라고 외신들은 전한다.
3월 18일
투석치료. 혈액검사, X레이 검사 결과 모두 양호. 신장을 안전하게 치료하는 발명이 나왔으면 좋겠다. 다리 힘이 약해져 조금 먼 거리도 걷기 힘들다.
인류의 역사는 맑스의 이론같이 경제형태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이 헤게모니를 쥔 역사 같다.
1. 봉건시대는 농민은 무식하고 소수의 왕과 귀족 그리고 관료만이 지식을 가지고 국가 운영을 담당했다.
2. 자본주의 시대는 지식과 돈을 겸해서 가진 부르주아지가 패권을 장악하고 절대다수의 노동자 농민은 피지배층이었다.
3. 산업사회의 성장과 더불어 노동자도 교육을 받고 또한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 노동자와 합류해서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4. 21세기 들어 전 국민이 지식을 갖게 되자 직접적으로 국정에 참가하기 시작하고 있다.
2008년 촛불시위가 그 조짐을 말해주고 있다.
4월 14일
북한이 예상대로 유엔 안보리의 의장성명에 반발해 6자회담 불참, 핵개발 재추진 등 발표. 예상했던 일이다. 6자회담 복구하되 그 사이에 미국과 1 대 1 결판으로 실질적인 합의를 보지 않겠는가 싶다.
4월 18일
노무현 전 대통령 일가와 인척, 측근들이 줄지어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노 대통령도 사법처리될 모양. 큰 불행이다. 노 대통령 개인을 위해서도, 야당을 위해서도, 같은 진보진영 대통령이었던 나를 위해서도, 불행이다. 노 대통령이 잘 대응하기를 바란다.
4월 24일
14년 만에 고향 방문. 선산에 가서 배례. 하의대리 덕봉서원 방문. 하의 초등학교 방문, 내가 3년간 배우던 곳이다. 어린이들의 활달하고 기쁨에 찬 태도에 감동했다. 여기저기 도는 동안 부슬비가 와서 매우 걱정했으나 무사히 마쳤다. 하의도민의 환영의 열기가 너무도 대단하였다. 행복한 고향 방문이었다.
4월 27일
투석치료. 4시간 누워 있기가 힘들다. 그러나 치료 덕으로 활동할 수 있는 것 크게 감사. 나는 많은 고생도 했지만 여러 가지 남다른 성공도 했다. 나이도 85세. 이 세상 바랄 것이 무엇 있는가. 끝까지 건강 유지하여 지금의 3대 위기-민주주의 위기, 중소서민 경제위기, 남북문제 위기 해결을 위해 필요한 조언과 노력을 하겠다. ‘찬미예수 백세건강’
5월 1일
이제 아름다운 꽃의 계절이자 훈풍의 계절이 왔다. 꽃을 많이 봤으면 좋겠다. 마당의 진달래와 연대 뒷동산의 진달래가 이미 졌다. 지금 우리 마당에는 영산홍과 철쭉꽃이 보기 좋게 피어 있다.
5월 2일
종일 집에서 독서, TV, 아내와의 대화로 소일. 조용하고 기분 좋은 5월의 초여름이다. 살아있다는 것이 행복이고 아내와 좋은 사이라는 것이 행복이고 건강도 괜찮은 편인 것이 행복이다. 생활에 특별한 고통이 없는 것이 옛날 청장년 때의 빈궁 시대에 비하면 행복하다. 불행을 세자면 한이 없고, 행복을 세어도 한이 없다. 인생은 이러한 행복과 불행의 도전과 응전 관계다. 어느 쪽을 택하느냐가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할 것이다.
5월 18일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이 내한한 길에 나를 초청하여 만찬을 같이했다. 언제나 다정한 친구다. 대북정책 등에 대해서 논의하고 나의 메모를 주었다. 힐러리 국무장관에 보낼 문서도 포함했다. 우리의 대화는 진지하고 유쾌했다.
5월 20일
걷기가 다시 힘들다. 집안에서조차 휠체어를 탈 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하다. 좋은 아내가 건강하게 옆에 있다. 나를 도와주는 비서들이 성심성의 애쓰고 있다. 85세의 나이지만 세계가 잊지 않고 초청하고 찾아온다. 감사하고 보람 있는 생애다.
5월 22일
버마 혁명민주지도자 등 수명이 내방. 민주화에 대해서, 나는 “버마는 외국의 지지는 충분히 얻고 있으니 이를 활용해서 안에서 국민이 자력으로 쟁취하도록 노력하시오”라고 격려했다.
5월 23일
자고 나니 청천벽력 같은 소식-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다는 보도. 슬프고 충격적이다. 그간 검찰이 너무도 가혹하게 수사를 했다. 노 대통령, 부인, 아들, 딸, 형, 조카사위 등 마치 소탕작전을 하듯 공격했다. 그리고 매일같이 수사기밀 발표가 금지된 법을 어기며 언론플레이를 했다. 그리고 노 대통령의 신병을 구속하느니 마느니 등 심리적 압박을 계속했다. 결국 노 대통령의 자살은 강요된 거나 마찬가지다.
5월 24일
노 대통령
장례식을 정부와 측근들은 국민장을 주장하는데 가족은 가족장을 주장해 결말을 못 보았다. 박지원 의원 시켜서 ‘노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 살았고 국민은 그를 사랑해 대통령까지 시켰다. 그러니 국민이 바라는 대로 국민장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전했는데 측근들이 이 논리로 가족을 설득했다 한다.
5월 25일
북의 2차 핵실험은 참으로 개탄스럽다.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의 태도도 아쉽다. 북의 기대와 달리 대북정책 발표를 질질 끌었다.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 주력하고 이란, 시리아,
러시아, 쿠바까지 관계개선 의사를 표시하면서 북한만 제외시켰다. 이러한 미숙함이 북한으로 하여금 미국의 관심을 끌게 하기 위해서 핵실험을 강행하게 한 것 같다.
5월 29일
고 노 대통령 영결식에 아내와 같이 참석했다. 이번처럼 거국적인 애도는 일찍이 그 예가 없을 것이다. 국민의 현실에 대한 실망, 분노, 슬픔이 노 대통령의 그것과 겹친 것 같다. 앞으로도 정부가 강압일변도로 나갔다가는 큰 변을 면치 못할 것이다.
5월 30일
손자 종대에게 나의 일생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고 이웃사랑이 믿음과 인생살이의 핵심인 것을 강조했다.
6월 2일
71년 국회의원 선거시 박 정권의 살해음모로 트럭에 치어 다친
허벅지 관절이 매우 불편해져서 김성윤 박사에게 치료를 받았다.

공동체를 세우는 예배

예배공동체를 세우는 예배사역 Worship Ministry For Building a Worshiping Community

오늘날 예배사역은 곧 예배이벤트(worship event)와 예배상품(worship product)을 의미하는 것으로 더욱 보편화 되어지고 있는 것 같다. "오늘 예배가 너무 좋았다"라는 말은 예배인도자와 예배기획자가 듣기에 기분좋은 말인건 사실이지만 그런 평가로 예배가 성공적이었다고 자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오늘날 예배사역의 무게가 지나치게 '개인적인 예배체험을 만들어내는 것(creating personal worship experience)'에 집중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 예배체험'이 예배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 사람들은 예배인도자와 기획자들에게 자신들의 눈과 귀를 맡긴채 '자, 최고의 예배의 경험으로 나를 인도해 보시죠.'라는 태도로 예배에 참여하고 또 예배상품을 구입한다. 예배이벤트와 예배상품이 만족할 만한 개인적 예배의 체험을 만들어 냈을 때 사람들은 '예배 참 좋았어'라고 말한다. 그리고 예배사역자, 예배기획자들은 이러한 경험을 안겨주기 위해 더 화려한 조명과 음향, 미디어등을 통한 기획효과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 개인적인 예배의 체험(personal worship experience)을 만들어 내기 위한 예배사역은 결국 모든 힘이 worship production에 집중될 수 밖에 없으며 '예배사역은 곧 개인의 예배체험을 만들어 내기 위한 예배프로덕션'이라는 공식에 대한 염려와 우려의 목소리들이 늘어나고 있다.

사실 문제는 예배프로덕션 자체가 아니라 예배프로덕션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개인적인 예배의 경험을 만들어내는데 멈추고 있다는 것이다. 예배사역의 궁극적인 목표는 개인적인 '예배의 경험을 만들어 내는 것(creating personal worship experience)'에서 멈추어선 안되며 '예배공동체를 세우는 것(building a worshiping community)'이 되어야 한다. 예배이벤트와 예배상품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예배공동체를 세우겠다는 목표를 갖고 예배이벤트와 상품을 기획하고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적 예배체험을 만들어내는 예배사역과 예배공동체를 세우는 예배사역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도록 하자. 개인적 예배체험을 만들어 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예배사역은 모든 힘을 창조성(creativity)에 집중시킨다. Emphasizing creativity for producing personal worship experience 매주 예배이벤트에 참가하는 개인들에게 개인적 예배체험을 선사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사람들의 현실적 필요(felt-need)로 부터 예배의 주제(central theme of worship)의 논의가 시작된다. 예배의 주제를 정할때는 주제가 사람들의 실제적 삶의 필요에 얼마나 적합한가(relevant)가 최고의 관심요소가 된다. 사람들의 삶과 관련 없게(ir-relevant) 여겨지는 주제들은 예배의 주제에서 외면당하기 쉽다. 사람들의 관심과 필요가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해 예배의 주제를 정하면 이제는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이 그 주제을 머리로 이해 할 뿐 아니라 가슴으로 느낄 수 있도록 다감도(multi-sensory) 예배기획이 이뤄지며 이러한 예배기획에서는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개인적인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예배의 창조성(creativity)에 모든 힘이 모아진다. 즉 창조적인 기획력을 통해서 예배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강한 개인적 임팩트를 주는 것이 목적이 된다. 즉 사람들의 실제적인 필요에 입각한 central theme을 중심으로 메세지가 준비되고 creative elements를 총동원하여 사람들에게 강한 개인적 임팩트를 주는 것이다.

이러한 단회적 이벤트 중심의 예배프로덕션이 다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예배공동체를 세우겠다는 큰 목표가 없을 때 몇가지 문제점이 발생하게 되는데 첫째, 예배의 강한 임팩트가 철저히 개인적인 경험이라는 점이다. 극장이나 콘서트홀에서 청중은 같은 내용의 영화와 공연에 울고 웃지만 이런 경험은 철저히 개인적인 경험이며 쇼가 진행되는 동안 그리고 끝나고 나서도 공동체적인 성숙에 이르게 하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예배가운데서도 군중속의 고독을 느끼고 있다. 둘째, 예배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반응이 아닌 프로덕션에 의한 반응으로 끝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음악, 조명, 무대디자인, 미디어등을 통해 우리는 믿는자들의 모임가운데 임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도록 도와야 하는데 이것이 돕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대신하는(replace) 착각을 일으킬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가 아닌 창조적 프로덕션에 대한 반응은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움직일 수는 있어도 내면의 진정한 변화로 이어질 수 없을 것이다. 셋째, 예배기획의 목표가 예배의 경험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계속해서 예배의 경험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주제들만을 물색하게 된다. 사실 교회의 예배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실제적인 필요와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는 것을 뛰어넘어 성경전체에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스토리를 연속적으로 배우고 그에 반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성경통독을 하다보면 각 장을 읽을 때마다 황홀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지루한 장도 있고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장도 있다. 그러나 이모든 장들이 연결되어 결국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연속적으로 계시하며 하나님의 스토리를 완성해 가고 있음으로 우리의 예배가운데 연속적인 하나님의 스토리를 다루어야 한다.

예배공동체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는 예배사역은 모든 힘을 연속성(continuity)에 집중시킨다. Emphasizing continuity for building a worshiping community 오늘날 개인적 예배체험에 무게를 두는 예배프로덕션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 두가지는 예배의 공동체성 상실과 예배의 비연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예배는 그 시작이 믿는자의 개인적인 경험일 수 있지만 결론적으로 공동체적 행위이며 예배신학과 교회론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교회의 책임있는 일원이 되지 않고서도 이벤트와 상품을 통해 얼마든지 만족할 만한 예배를 경험할 수 있다. 또는 교회안의 예배사역이 교회의 목적들인 예배, 양육, 봉사, 선교, 교제의 중요성을 모두 균형있게 인식하지 않고 교회안의 다른 사역부서들과는 철저히 분리되어져 진행될 수 있으며 이러한 예배사역은 건강한 교회론에서 벗어난 예배체험만을 찾는 예배체험중독증에 빠진 비정상적 예배자들을 양산할 수 있다. 건강한 예배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안의 모든 부서들이 예배하는 부서들이 되어야 하며 교회의 모든 사역들이 예배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교회의 모든 세대들이 예배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한번의 예배를 디자인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어떻게 하면 교회의 모든 부서들과 모든 세대들로 예배하는 공동체가 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비연속적인 주제들을 바꿔가며 그때마다 감동을 선사하려는 단기적인 시도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스토리를 연속적으로 계시하며 궁극적으로 교회안의 모든 부서와 모든 세대가 예배하는 예배공동체를 세우려는 장기력인 노력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노력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로 하여금 '교회력(Christian year)'에 근거한 예배디자인을 하도록 했는데 마치 오늘날 우리가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 처럼 교회의 예배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 부활과 성령의 강림등을 중심으로 매년 반복되도록 하였다. 교회의 상황에 따라 교회력을 모두 적용할 수 있는 교회와 일부만 적용할 수 있는 교회들이 있겠지만 예배사역자, 기획자라면 충분히 교회력을 연구해 볼 가치가 있으며 일부만 적용하더라도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벤트성 예배가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 비연속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마치 영화을 볼 때는 울고 웃으며 영화에 동화가 되다가도 영화가 끝나고 영화관을 나오면 다시 현실로 돌아와 그 영화가 나의 삶과 아무 상관 없어지듯이 오늘날 예배의 체험역시 교회건물을 나옴과 동시에 그냥 하나의 좋은 경험으로 남게되는 현상말이다. 이것은 예배가 반드시 180도 사람들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가 예배가운데 만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와 관련되어있다. 우리가 매주 예배가운데 만나는 하나님이 진정 성경이 계시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형식과 장소는 다를 지라도 반드시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 이어져야 한다. 나는 예배의 연속성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예배사역자와 기획자들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벤트로서의 예배와 삶의 예배의 연속성이 우리 예배사역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실 삶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벤트적예배로 모일때마다 서로에게 주기적으로 상기시키고 있다. 하지만 삶으로 예배한다는 것이 실제로 어떤 의미인가를 모델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어디에서 예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를 예배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신 예수님의 가르침처럼(요4장) 어디에 있던지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는 삶이 예배자의 삶이라는 것을 살아있는 모델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미국 달라스의 직장에서 일할 때 하루에 몇차례씩 시간을 정해 놓고 정해진 장소에 가서 기도하는 무슬림들을 보았다. 또 그들은 라마단이라는 장기간의 금식기도기간을 직장에서도 이행하는 것을 보았다. 이에 자극을 받고 나는 직장동료 크리스찬들에게 일시작하기전 아침이나 점심시간을 이용해 만나서 성도의 교제를 하자고 제안했으나 "교회에서 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느냐 왜 직장에서까지 만나야 하느냐"라는 답을 받았을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무슬림들에게서 예배의 연속성을 발견한 것이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예배당안에서만 거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연속적인 예배운동이 필요하다. 당신이 예배기획자라면 주일예배에 최고의 예배의 경험을 선사하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월요예배자의 모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며 주중 가정예배를 위한 지침과 자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소그룹으로 모였을때 할 수 있는 예배를 도울 수 있을것이며 연속적인 중보기도운동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예배사역과 예배프로덕션의 목적은 예배의 체험이 아니라 예배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이다. 예배공동체는 결국 어디서나 그들의 삶가운데 연속적으로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의 연합체인만큼 예배사역자들의 모든 예배기획은 교회의 모든 부서와 교회의 모든 세대들을 전인격적인 예배자로 양성하는데 무게를 두고 장기간의 계획과 노력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매주 한번 예배인도하는 것 외에 자신이 섬기는 공동체의 모든 부서와 모든 세대가 연속적으로 예배하도록 돕기위해 어떤 총체적인 그림과 계획을 갖고 있는가, 또 어떠한 장기적인 노력이 필요한가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김재우 (King's Region, Journey of Faith Church)
Magnifying the Glory of God among all peoples - kingsregion.org

삶이 예배여야 하며 예배의 전제는 믿음의 공동체라는 기초를 잘 설명해 주는 글을 만났다. 예배, 특히 예전으로서의 공동체 예배가 한 사람의 신념 형성과 유지, 그리고 확장에 어떤 영향을 주는 지, 그리고 예배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는지에 대해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bk

김대중 선생의 삶과 헤르만 헤세의 기도

"희망과 좌절, 기쁨과 공포, 그리고 해결과 의혹의 갈등과 번민을 매일 되풀이해왔고 지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며, 그분이 나와 같이 계시며,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며, 그 사랑 때문에 지금의 이 고난을 허락하셨으며, 나를 위하여 사소한 일까지 돌보시며, 지금 이 시간에도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시기 위한 역사를 쉬지 않고 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나의 감정이나 지식으로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든 것인가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통감하면서 부족한 믿음에 절망하고 화를 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현재의 환경도 주님이 주신 것이며, 주님이 보실 때 최선이 아니면 이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제가 주님의 뜻과 앞으로의 계획하심을 알 수는 없으나 오직 주님의 사랑만을 믿고 순종하며 찬양하겠습니다."

죽음을 앞둔 감옥에서
후광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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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믿음에 절망하고 화를 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만이 참 믿음이라고 성서와 신앙의 선배들은 늘 강조했다. 예수를 믿는 신앙은 철저한 자기 부정에서 출발한다. 스스로에 대한 절망은 신앙의 자궁이다. 스스로에 대해 절망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선"을 갈망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절대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절망은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죄성은 스스로 살기 위해 나와 이웃의 목숨마져 위태롭게 할 만 큼 뿌리 깊고 강력하다. 그래서 나 스스로에 대한 절망 마저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며 기도가 요구된다. 이런 점에서 "당신 안에서 기꺼이 멸망하고 싶다"고 기도한 헤르만 헤세의 외침도 울림이 크지만, 후광의 기도는 헤세의 기도를 온 삶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헤세보다 더욱 위대하다.

기도

신이여, 저를 절망케 해주소서.
당신에게가 아니라, 제자신에게
절망하게 하소서.
미친 듯 모든 슬픔 맛보게 하시고
온갖 고뇌의 불꽃을 핥게 하소서.
모든 치욕을 맛보게 하소서.
제 자신을 가눌 수 있게 돕지 마시고,
제가 뻗어 나가는 것을 돕지 마소서.
하나 저 자신 모두가 이지러질 때,
그 떼에는 제게 가르쳐 주소서.
당신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당신이 불꽃과 고뇌를 보내셨다는 것을.
기꺼이 멸망하고.
기꺼이 죽어가고 싶습니다만,
저는 오직 당신 속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헤르만 헤세 (Hernman Hesse, 1877-1962)

8.20.2009

경애하는 국민에게

"나는 정치를 하는 사람으로서 하나의 신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지도자라는 사람의 가치가 도대체 어떻게 결정되느냐 하는 점이다. 위대한 지도자는 바로 그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권력을 잡고 있었느냐, 또는 얼마나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느냐, 그리고 얼마나 많은 업적을 남겼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세로 국민을 대했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자기 나라 국민을 존경하고 사랑했느냐, 그리고 국민들에게 이득이 되는 올바른 방향과 정책들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또 그런 정책을 실현시키기위해 노력했는가 - 즉, 어느 정도로 충실하게 그리고 진심으로 국민을 대했으며 봉사했는가, 그 실적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고 방식을 철저하게 가진 인물이라면 가령, 그 사람이 높은 지위에 앉았던 기간이 비록 짧았더라도 그리고 별로 대단한 업적을 남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국민들은 역사 속에서 길이 기억하며 존경하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국민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정치의 기본 이념과 신조로 삼고 있다. 나는 국민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거나, 국민에게 자비심을 베푸는 것과 같은 정치 자세를 경멸하며 또한 증오한다."

김대중, 행동하는 양심으로, 박정희의 정치테러로 인해 일본에 망명중이던 1973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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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용 목사님, 김수환 추기경님, 노무현 대통령님에 이어 또 한 사람의 "경애"하는 스승이 영원한 나라로 가셨다. 그의 전 존재와 인생을 통해 남기고 가신 "행동하는 양심"과 "애닳픈 사람 사랑"은 본 회퍼와 마하트마 간디, 그리고 마틴 루터 킹의 정신을 잇는다. 자유, 정의, 평화, 인권, 평등, 통일, 공공의 선을 위한 초인적 헌신의 밑바탕에 "경천애인"이 인간됨의 기본이라는 굳건한 신념과 믿음이 있었으며 이는 예수의 사랑과 삶을 본받고 힘입으려는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행동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이 이들의 공통점이다. 나도 그렇게 살다가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예수님 곁에서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사고 기도를 올려본다.

bk

8.19.2009

김대중 대통령님의 기도

"지난 달 6·15 공동선언 9주년 기념행사가 끝난 후 행사위원들과의 오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민주주의는 싸우는 자, 지키는 자의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1년 남짓 만에 이렇게 후퇴한 것을 보면 꿈을 꾸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가 얻은 민주주의라도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으면 없어져버립니다.
젊은 당신들이 나서야 합니다.”

또 김대중 전대통령님께서는 매일 밤,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하신다면서 눈물을 글썽이셨습니다.

“예수님,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서민경제와 남북관계가 모두 위기입니다. 이제 나는 늙었습니다. 힘도 없습니다. 능력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하실 수 있는 힘이 있으니 당신이 우리들에게 최대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김대중 대통령님의 삶과 정치의 밑바닥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랑과 용서의 신앙이 깊게 흐르고 있습니다. 미국의 링컨처럼 ‘기도하는 정치인’,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보너스 인생을 사는 신앙인으로서의 정치인임을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김대중 대통령님을 위해 기도할 차례입니다.

이 땅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해 온 김대중 대통령님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그리고 당신께서 지키고자 했던 숭고한 민주주의 가치가 실현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이 기도는 우리와 우리의 아이들, 결국 대한민국을 위한 기도입니다. "


한명숙의 홈페이지 갈무리


8.10.2009

위대한 그리스도인

몇 해 동안 톰 랜드리는 미국인의 우상이었다. 그는 최고의 미식축구 팀 중 하나인 '달라스 카우보이즈'의 수석 코치였다. 몇 번인가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코치로 일하는 동안 훌륭한 선수들을 많이 만났지요. 하지만 위대한 선수는 극소수예요. 훌륭한 선수와 위대한 선수는 단 45센티미터 차이로 판가름이 납니다. 바로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죠. 경험으로 볼 때, 훌륭한 선수는 특출한 자질을 갖추고 있어요. 그러나 위대한 선수는 열정 어린 마음을 가진 선수에요. 즉 자기 희생, 잔인하리만치 길고 고도니 훈련과 연습, 전심전력을 다하는 집중력으로 결국 위대한 성과를 이뤄 냅니다."

거의 30년에 걸쳐 기독교 사역을 하는 동안 나 역시 그랬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많이 만나 봤지만 위대한 그리스도인은 극소수였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자신의 금쪽같은 시간, 돈, 욕구를 희생하는 그리스도인,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얻기 위해서 어떤 것이든 포기하려는 그리스도인은 별로 없었다.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자신의 직업, 명성, 신분, 우정, 재산, 심지어 생명까지 바치려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향한 열정 어린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앤 그레이엄 로츠, 위기속에 만난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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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많은 그리스도인이 같은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들에게 잔해를 받았던 적이 있었다. 단지 믿음이 다르다는 이유로, 신앙의 모습이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답게 살 권리를 박탈 당해야 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기 원했고 바로 그 점이 문제였다. 그들은 예수를 너무도 사랑했다. 자기 생명보다 예수가 더 귀했다.

위대한 그리스도인은 인간적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로츠"를 잘 못 이해할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잔인하리만치 길고 고된 훈련과 연습"은 그만큼 강한 동기와 열정이 없다면 애시당초 가능하지 않다. 더구나 "자신의 욕구를 포기하고" "생명"까지 희생하는 삶의 모습은 절대로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 오히려 단 한가지 만이 그 위대함을 가능하게 한다. 그건 사랑이다.

따라서, 위대한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사랑"으로 만들어 진다. 예수의 무한한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에 빠져 든 사람은 거부할 수 없는 예수의 사랑으로 자신을 초월 하게 된다. 그래서 예수 때문에 저주를 달게 받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예수의 위대함, 예수의 능력, 예수의 아름다움을 맛본 사람들은 그래서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자기를 초월하여 위대한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 즉 예수의 사람으로 불릴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다.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 물으시는 주님 앞에서, 사랑할 능력조차 없고 사랑받을 가치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신실하게 사랑하시는 주님 발앞에 겸손한 무릎을 조아리는 사람이 될 일이다. 그리고 뜨거운 눈물과 감사와 감격으로 주어진 자리에서 그분을 인정하며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될 일이다. 위대한 그리스도인은 "이뤄 내는"것이 아니라 "은혜로 수용하며 반응하는"것이라는 점에서 랜드리와 로츠는 오해했다.

bk

8.05.2009

원탁의 그리스도

원탁의 그리스도스탠리 존스 지음 황병규 옮김평단문화사 국판 변형 420쪽 13,000원

원탁의 그리스도 (Christ at the Round Table)교회의 선민의식과 배타적 독선에 경종을 울리고세상 속 기독교가 지향해야 할 좌표를 제시한 책!

“세계적 베스트셀러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의 저자 스탠리 존스의 두 번째 책!”

“진정한 종교는 몸을 구부려 겸손히 섬기고 육체와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며 약해진 영혼과 대화하고 그 영혼을 다시 살려내어 하늘의 아버지를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타임> 지가 뽑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선교사 스탠리 존스가 자신의 사명을 알고 그 사명을 완수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이 시대 최고의 복음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한 종교관을 가진 인도 사람들의 사상을 그들의 언어로 직접 들으면서 다원주의 사회에서 복음이 지닌 의미를 새롭게 규명한다. 또한 현대의 문화와 전통이 다원多元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복음이 여전히 진리임을 강조하고, 그들의 신관神觀, 내세관, 세계관 등을 파악하면서 진정한 기독교적 복음을 제시함으로써 교회의 역사적 사명과 선교에 대한 올바른 방향을 일깨워 주고 있다.이 책은 저자가 감리교 선교사로 20여 년간 인도 각처를 전도 여행하면서 만난 인도의 대표 지성인들, 즉 브라흐마 학자, 이슬람교 학자, 불교 승려, 힌두교 지도자 등과 함께 종파주의를 초월해 열린 원탁에 둘러앉아 허심탄회하게 나눈 종교적 신념을 촘촘히 기록하고 있다. 특히 종교적 승리주의와 종파주의를 초월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영혼의 가면을 벗어 놓고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신념을 토로하고 있는 이 책은 우리에게 이 시대 진정한 그리스도의 길이 무엇인지 묻는다. 이 책은 오늘을 살아가는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이 땅의 끝없는 고난과 모순에 대해 의구심을 가져 본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야 할 책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논리적으로 변증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것을 변증론적으로 풀어내고 있는 스탠리 존스라는 사람에 대해 두 번 놀라게 될 것이다.“이 시대 진정한 그리스도의 길이란 무엇인가?”전 세계 수많은 독자들을 감동시킨 이 시대 최고의 복음서!이 책은 1928년 영국에서 출간되자마자 전 세계 기독교인들의 심금을 울리며 베스트셀러 명단에 올랐으며,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선교 사역의 최대 명저로 꼽히고 있다. 교회의 선민의식과 배타적 독선에 경종을 울리고 세상 속 기독교가 지향해야 할 좌표를 제시한 이 책은 총 17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초반부에는 인도의 종교지도자, 사상가, 정치가 등과 같이 각계각층 사람들이 원탁에 둘러앉아서 그들의 사상과 종교를 솔직하게 토론한다. 후반부로 가면서 인도 사람들의 두려움과 절망 가운데서 희망의 증거를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이 왜 복음이고 참길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 변증론적으로 입증해 보인다.이 책은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적 복음의 실체를 낯선 땅에서 평생의 삶으로 증거한 신앙의 거인 스탠리 존스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들려주는 신앙 고백서다! 자신의 목적을 알고 그 사명을 완수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무한한 가치를 지닌다. 다원주의적 입장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의 길을 설명하고자 한 스탠리 존스의 이 새로운 시도는 수백만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 저자 및 역자 소개저자 : 스탠리 존스 E. Stanley Jones1884년, 미국 동부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태어나 18세 되던 해 예수 그리스도께 회심했다. ‘따뜻해진 마음’과 ‘세계 교구’를 강조하는 애즈베리대학에서 수학한 뒤, 1907년부터 감리교 선교사로 인도에서 평생 사역했다. 1920년대 초반, 마하트마 간디, 타고르 등과 함께 아슈람Ashram운동에 참여했으며, 1930년대부터는 기독교 아슈람운동을 펼치며 간디의 정신적 지도력을 바탕으로 한 크리스타그라하Kristagraha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40년 미국 뉴욕시에 할렘 아슈람을 세우면서 그의 기독교 아슈람운동은 인도를 넘어 미국과 유럽 등 세계 여러 나라로 퍼져 나갔다. 1938년 12월 12일자 〈타임〉 지에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선정되기도 했고, 1961년에는 ‘간디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인도 독립운동과 연관된 활동과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펼친 평화활동 등으로 두 차례 노벨평화상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다. 스탠리 존스는 철저한 복음주의자로 살면서도 열린 마음으로 인도인들에게 다가갔으며,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유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했던 인물이었다.

역자 : 황병규한양대학교 공과대학 졸업. 1984년부터 World Leadership Conference를 비롯하여 컨퍼런스 강의와 설교를 통역함. 2003년부터 아내와 함께 영묵, 예정, 승묵, 세 자녀를 홈스쿨링하고 있다. 현재 IBLP-Korea에서 삶의 기본 원리와 품성 계발 교육에 참여하고 있다. 역서로는 《지혜의 시작》, 《고전적 교육 입문》, 《흔들리지 않는 고전교육의 뿌리를 찾아서》가 있다.

《원탁의 그리스도》에 보내 온 각계의 추천사

위대한 선교사 스탠리 존스는 이 책에서 오늘날 한국 교회가 회복해야 할 교회의 역사적 사명과 선교의 올바른 방향을 일깨워 주고 있다. 특히 종교적 선민의식과 종파주의를 초월해 열린 원탁에 둘러앉아 허심탄회하게 종교적 신념을 이야기하는 이 책은 우리로 하여금 ‘잃어버린 천국’으로 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길을 안내하고 있다!-한완상(전 대한적십자사 총재)

교회의 선민의식과 배타적 독선에 경종을 울리고 세상 속 기독교가 지향해야 할 좌표를 제시한 복음서다. 특히 종교적 승리주의와 종파주의를 초월했던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영혼의 가면을 벗어 놓고 허심탄회하게 종교적 신념을 토로하고 있는 이 책은 오늘을 살아가는 종교인들에게 미래 교회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을 보여 주고 있다.-이어령(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 겸 중앙일보 고문)

청소년 시절, 영적으로 매우 고갈되고 생의 여러 문제에 봉착했을 때 스탠리 존스의 책은 내 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데 빛이 되었다. 복음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해 명확하게 안내하고 있는 이 책은 요즘처럼 복음의 능력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에 대한 분명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 -임영수(모새골 공동체 목사)

스탠리 존스는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적 복음의 실체를 낯선 땅에서 평생의 삶으로 증거한 신앙의 거인이다. 그는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한 종교관을 가진 인도 사람들의 사상을 그들의 언어로 직접 들으면서 이 시대 진정한 그리스도의 길이 무엇인지 제시하고 있다. 독자들은 이 책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몸으로 보여 주고자 했던 진정한 복음의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오정현(사랑의 교회 목사)

본문 속으로

나는 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이기고 승리하는 일 따위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다. 혹시 승리할 수도 있겠지만 거기까지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우리의 목표는 진실이고, 만유의 실재이며, 영의 자유이다. 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정복한다고 해도 얼마든지 이런 문제를 등한시하거나 잊고 악화시킬 수 있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했지만 결국 그리스도가 거기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뿐이다.-p.9 (프롤로그)

종교는 삶에 적절한 해답을 주고 있는가? 아니면 삶 자체나 삶의 의미와는 아무 공통점도 없는, 즉 삶에 해결책을 주지 못하는 정신적·사회적 찌꺼기인가? 우리는 이 위대한 실험 결과를 보고해야 하고, 확인한 내용이 있다면 기꺼이 알려야 했다. 마음속 깊은 곳을 향해 말하는 것은 정말이지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p.15 (제1장 출발)

“저는 욕망의 격렬한 싸움 속에서 스러져 가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의 발아래 제 욕망을 내려놓자 그분이 폭풍우를 잠재우고 제 자신에게서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 “제 인생이 산산이 부서져 있을 때 그리스도가 다가와 정상으로 돌려놓으셨습니다. 이제 저에게는, 하나님은 숨을 쉬는 것보다 더 가깝고 손발보다 더 가까운 친밀한 실재입니다.” -p.25 (제2장 인도인의 삶과 맞붙다)

“나 자신을 비울수록 하나님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질서정연한 기계이므로 우리가 그 법칙에 순종할 때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만 기적은 바랄 수 없기에 오랜 세월이 걸립니다. 그래서 샹카라도 ‘하나님을 찾으려는 사람은, 바닷가에 앉아 지푸라기로 물 한 방울씩 묻혀 옮겨 놓아 대양을 비우려는 사람 같은 인내를 지녀야 한다’고 말한 것이지요.”-p.53 (제3장 종교에 대한 솔직한 고백들)

누가 진정 그리스도인일까? 루터는 “인간은 절대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인이 되어 갈 뿐이다.”라고 말했다. 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모든 의미에 응답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와 사귐에 따라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사람이다. -p.79 (제4장 거듭남)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했다. 섬기지 않으려는 사람은 벽에 부딪힐 것이다. 나는 지난해에 유럽의 빈 왕궁 열세 곳을 둘러보았다. 그 왕궁들이 어째서 비어 있을까? 그 왕궁에 살던 사람들은 섬김을 받고 싶었을 뿐 섬기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이 법칙에 따라 스스로 망한 것이다. -p.104 (제5장 생명의 속죄)

원탁에 앉아서 사람들이 삶과 운명과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동안, 내 구원자가 앞에서 자라고 있는 모습을 지켜봤다. 나는 예수가 나를 어디에서 구원했고, 어디까지 구원했는지, 그리고 어디로 구원해 가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예수는 나를 죄에서 구원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예수는 내 우주를 구원하고, 내 우주 속에서 건드리는 모든 것을 구원한다.-p.128 (제6장 더욱 커지는 구원자)

우리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살라고 지어진 존재이다!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 우리 자아, 곧 참다운 내 자아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법이 내 삶과 일치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붙잡아라.’ 물론 그 제의 속에는 회개하고, 자기를 포기하며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는 요구가 들어 있다. 그러나 일단 그 제의를 받아들이면 그 요구는 어느새 사라지고 즐거움으로 변한다. -p.155 (제7장 하나님에 대한 체험)

나는 《신약성서》를 펴고 기도하면서 어둠을 밝히고 길을 안내해 줄 말씀을 찾았다. 그 순간 〈사도행전〉 1장에 있는 사건이 떠올랐다. 제자들이 예수에게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때와 시기는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p.175 (제8장 안타까운 약속의 땅)

우리는 어디서 권위를 찾을 수 있을까? 절대 오류가 없는 교회, 절대 오류가 없는 성서, 절대 오류가 없는 그리스도의 체험에 권위가 있을까? 권위는 세 가지 모두 안에 있다. 최종 확실성과 권위의 자리는 역사의 예수가 체험의 그리스도가 되는 연결점이며, 그 결과로 생긴 개인의 체험이 단체 체험으로써 확증되고 바로잡히는 곳이다. 그때 권위의 자리는 바로 그리스도다.-p.193 (제9장 확실성과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복음은 통역이다. 복음은 영원의 언어를 시간의 말로 바꾼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속죄 목적이 우리에게 가까이 와 닿아 현실이 되고, 누구나 얻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단테가 입을 열었을 때 ‘천 년의 침묵’이 깨졌다고 한다. 예수 안에서 ‘영원의 침묵’이 깨졌고, 우리는 복음을 듣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이 속죄의 사실을 통역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p.214 (제10장 그리스도의 통역자)

섬기는 자세, 곧 종의 자세가 그리스도인의 자세다. 그것은 예수가 취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힌두교인 애국주의자는 우리에게 “현재 인도의 영혼을 붙잡고 있는 위대한 낱말 두 개가 있습니다. 곧 ‘섬김’과 ‘자기희생’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이상은 우리 복음의 심장부에 깊이 박혀 있다. 우리가 동양에서 도덕적 권위를 얻으려면 이것이 우리의 자세와 심장부에 깊이 박혀 있어야 한다.-p.233 (제11장 원탁에 앉은 선교 단체)

죽음 앞에서 마지막으로 쥐고 있던 힘마저 다 빠졌을 때에도 여전히 예수는 최후이자 최고의 일을 하려고 했다. 사람들을 위해 죽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 성배 속으로 들어갔다. 우리 영혼이 악과 증오에 대해 분개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 우리는 이 완전한 승리를 마신다. 무엇으로도 사라지거나 꺼지지 않을 영원한 사랑을 마시면서 우리는 루터처럼 말할 수 있다. “내 영혼은 한없이 기쁘고 위대해서 어느 누구의 원수도 될 수 없다.” -p.279 (제13장 가장 신성한 원탁)

종교는 인간을 자신의 가장 높은 자아와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야 분열된 영혼의 힘이 하나가 되고 형제들과 잘 어울릴 수 있다. 또한 하나님과도 잘 어울리게 된다. 종교의 임무는 속죄다. 종교가 속죄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치명적이다. 종교 의식이 아름다울 수 있고, 종교 규약의 역사가 아주 오래될 수 있으며, 그 교훈이 좋을 수 있지만, 속죄에 실패한다면 회복할 길이 없다. -p.301(제14장 십자가는 삶의 열쇠)

사랑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의 법칙이다. 미움이 아니고 사랑이 바로 우리 존재의 법칙이다. 미움은 산酸처럼 우리 영혼을 부식시키지만, 사랑은 우리 영혼을 밝은 건강으로 빛나게 한다. 순결이 그리스도 안의 삶의 법칙이고, 우리 존재의 법칙이다. 불결은 내면의 삶을 시들게 하지만 순결은 내면의 삶을 상쾌함으로 설레게 한다. 선이 바로 우리 존재의 법칙이다. -p.327 (제15장 참길)

우주의 원탁에서는 모든 것, 곧 바울,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스승, 세상을 비롯한 모든 사실, 삶을 비롯한 모든 실재, 죽음을 비롯한 모든 변화, 현재와 미래를 비롯한 모든 시간을 포함하는 만물이 일어나 그리스도의 주권을 증언하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에게 복종한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으로 조건을 확인해야 한다. 모든 것에는 불멸의 조건이 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라.” -p.383 (제17장 우주의 원탁)


■ 차 례
프롤로그 껍데기는 버리고 본질을 추구하라!
Ch. 1 출발 하나님의 약속|그리스도의 명령
Ch. 2 인도인의 삶과 맞붙다 원탁에서 만난 사람들|간절한 마음의 소리
Ch. 3 종교에 대한 솔직한 고백들 불확실한 영혼|고매한 절망
Ch. 4 거듭남 수평 개종과 수직 회심|회심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
Ch. 5 생명의 속죄 하나님 나라의 실현|좁은 문의 법칙
Ch. 6 더욱 커지는 구원자 사람의 아들, 예수|사람과 하나님이 만나는 곳, 예수
Ch. 7 하나님에 대한 체험 복음은 이론이 아닌 체험|복음은 요구가 아닌 제의
Ch. 8 안타까운 약속의 땅 거의 타오를 뻔하다가 꺼지는 불꽃|거의 될 뻔하다 가 실패하는 교회
Ch. 9 확실성과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인격|스스로 역사 의 증인이 된 예수
Ch. 10 그리스도의 통역자 복음은 생명 언어로의 통역이다|진정한 통역자는 예수
Ch. 11 원탁에 앉은 선교 단체 종의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나다|민족도 개인 도 사랑한 백부장
Ch. 12 원탁에 앉은 나라들 자기중심적인 바보들|자기희생의 권력
Ch. 13 가장 신성한 원탁 생명의 잔|완전한 승리
Ch. 14 십자가는 삶의 열쇠 값없이 받는 보혈의 선물|십자가는 하나님의 본성
Ch. 15 참길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다가온 하나님|예수는 길이고 진리며 생명
Ch. 16 예수는 보편적인 실체 진리는 보편적, 오류는 제한적|어느 상황에서 든 예수는 그 상황의 빛
Ch. 17 우주의 원탁 우리는 예수의 것|예수만이 참 소망옮긴이의 말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From NewsNJoy 서평 이벤트

8.03.2009

왜 라고 묻게 하라

불쾌한 질문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면 성자가 된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왜 가난하냐고 물으면 화를 내고 욕을 먹는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음식을 주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난의 이유"를 밝혀 내는 것이다.
"왜"라는 질문은 현상을 떠받치고 있는 구조와 환경을 지적해 내고 근본적인 처방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다.

기독교의 위험한 사상


Christianity's Dangerous Idea: The Protestant Revolution--A History from the Sixteenth Century to the Twenty-First, Sep. 1997, by Alister E. McGrath 560 pages
This is McGrath's third book title borrowed from his atheist bête noir Richard Dawkins. But don't let the titular borrowings fool you: this is an original and important book. Someone had to imitate the long, popular works of history being written on secular subjects from Lewis & Clark to FDR, and McGrath has the theological and historical expertise necessary to tell a story stretching from the Reformation's origins in the 16th century to today. The dangerous idea was Martin Luther's: that individual believers could and should read the Bible for themselves. The result was occasionally violent (as in the peasants' revolt and the English Civil War), occasionally brilliant (musicians like Bach, theologians like Calvin and Jonathan Edwards, poets like Milton) and certainly world altering (the Calvinist Reformation clearing space for the rise of secular science and capitalism). McGrath concludes not with the faith practices of present-day England or America, but with the increasingly Pentecostal global south. The book occasionally falls into the dry tone of a textbook and assumes points that historians would want to debate, but is still the most readable introduction to the history, theology and present-day practices of Protestantism. (Oct.) Copyright © Reed Business Information, a division of Reed Elsevier Inc. All rights reserved.
"맥그래스는 야심찬 사상을 대담하게 제시하면서 종교개혁으로부터 현대 세계 기독교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개신교와 그 변형들의 역사를 체계 있게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은 아주 쉽게 읽을 수 있고, 놀라울 정도로 폭넓은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공정한 시각에서 서술하고 있다."-필립 젠킨스"


이 책은 개신교와 그 역사를 독특한 시각으로 검토하여 재해석하고, 개신교가 지닌 놀라운 다양성과 내적 일관성을 함께 제시하며, 상세한 연구 내용을 통찰력 넘치는 광대한 해석들과 잘 결합시켜 놓았다. 우리에겐 이런 책이 필요했다. 정말 잘 쓴 책이다."-후스토 곤살레스"

각 사람이 성경을 이해하고 자신과 자신이 사는 세계에 적용할 수 있다는 사상은 사회 구조와 개인의 삶에 무한한 시사점을 던져주는 폭발적 사상이다. 이 책<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는 이 사상으로부터 발전된 것과, 이 사상이 전 세계 기독교의 현재와 미래에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는데 독특하면서도 고귀한 도움을 제공해 준다."-댈러스 윌러드


옥스퍼드 석학, 앨리스터 맥그래스의 기념비적 저작!개신교 역사와 그 세계적 영향력을 새롭게 해석하다!
개신교의 중심에 자리 잡은 '위험한 사상'은 성경 해석이 각 사람의 권리이자 책임이라는 것이다. 이 원리가 확산되면서 개신교는 500년에 걸쳐 두드러진 혁신과 적응의 역사를 보여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적 일관성이 사라지고 사회 불안을 조성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고집불통인'사상들을 통제할 수 있는 최고 권위가 없었기에 쟁점을 놓고 논쟁하는 당사자들은 성경에 호소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성경은 갖가지 수많은 해석들에게 그 문을 열어놓고 있다.
이 책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는 처음으로 개신교의 핵심 요소와 이 위험한 사상이 만들어낸 종교적, 문화적 역동성을 정의해 보려고 시도한 책이다. 이 종교적, 문화적 역동성은 결국 20세기에 이르러 개신교에 놀랍도록 새로운 발전을 가져다 주었다. 세계적 명성의 옥스퍼드 석학 앨리스터 맥그래스는 독특한 접근방법을 이용해 전 세계 개신교 교회들과 공동체들이 연관된 논쟁과 분열에 여전히 영감을 불어넣고 있는 매력적 인물들과 운동들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이 책 1부(기원)는 연대를 따라 내려가며 역사를 관통해가는 유희를 제공한다. 2 부(표현)는 개신교의 신앙과 관습이 지닌 독특한 특징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3부(변형)는 전 세계 개신교의 미래에 대해 깜짝 놀랄 평가를 내리고 있다.


차례
들어가는 글
1부 기원
1장 몰려오는 폭풍
2장 우연히 혁명가가 된 혁명가 - 마르틴 루터
3장 루터의 대안들 - 종교개혁의 다양화
4장 힘의 이동 - 칼뱅과 제네바
5장 잉글랜드 - 성공회의 등장
6장 전쟁, 평화 그리고 무관심 - 위기에 빠진 유럽의 개신교 (1560~1800)
7장 미국의 개신교8장 19세기 - 전 세계로 뻗어나간 개신교
2부 표현
9장 성경과 개신교
10장 믿음과 특성 - 개신교의 몇 가지 두드러진 믿음들
11장 신앙의 틀 - 조직, 예배, 설교
12장 개신교와 서구 문화의 형성
13장 개신교와 예술 그리고 자연과학3부 변형
14장 미국 개신교의 변화상
15장 불의 혀 - 개신교 안에서 일어난 오순절 혁명
16장 개신교의 새 개척자들 - 남반구
17장 개신교 - 다음세대
옮긴이의 글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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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알리스터 맥그래스1953년, 북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벨파스트에 있는 감리교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 등을 공부한 뒤, 옥스퍼드와 캠브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현재 옥스퍼드 대학교의 위클리프 홀(Wycliffe Hall)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같은 대학에서 역사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역자: 박규태 고려대학교 법과대학과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2006년 3월 교회 사역에서 물러난 뒤, 현재는 영미권과 독일어권 신학서 번역과 저작에 전념하고 있다. 역서로는 『종교개혁 시대의 영성』, 『기독교의 미래』, 『성경완전정복』(이상 좋은씨앗), 『약할 때 기뻐하라』(복있는사람), 『세상을 잃은 제자도 세상을 얻는 제자도』(국제제자훈련원) 등이 있다.
from 국제제자훈련원 "사랑몰"
올해 필독도서에 추가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