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2009
용서
디트리히 본회퍼, 신도들의 공동생활, 152
내 인생은 십자수
- Anonymous
My life is but a weaving, between my God and me,
I do not choose the colors, He worketh steadily.
Of times He weave the sorrow, and I in foolish pride,
Forget He sees the upper, and I the underside.
Not till the loom is silent, and shuttles cease to fly,
Will God unroll the canvas and explain the reason why.
The dark threads are as needful in the skillful weaver’s hand,
As the threads of gold and silver in the pattern He has planned.
내 인생
내 인생은
하나님과 나, 둘이서 꾸며가는 십자수라네
나 아무런 색상도 고르지 못할 때
그 분의 손길은 여전히 바쁘다오
때론 칙칙한 실 꿰어가는 그 분을 보며
내 눈가에
불만이 차 오른다네
그 분의 시선 머무는 곳을 벌써 잊었기 때문이라오
꿰메고 자르고 잇대어 옹쳐 매고
머지 않아 바지런한 두 손을 멈춘다네
그림 펼쳐들고 그 분이 친히 설명하신다오
그 때는 왜 그렇게 하셨는지
나 원치 않던 어두운 실들도
청실 홍실만큼이나 소중하다네
내 인생 가꾸시는 그 분의 계획 속에
이 모든 것 어우러짐을 그제서야 보게 된다오…
3.29.2009
동양과 서양
메세지의 내용 뿐만 아니라 의사전달의 통로인 언어의 문장구조와 구문syntax도 큰 차이를 보인다. 다음 문장들을 관찰하면서 차이점을 찾아보자. 그리고 왜 그런 차이들이 나타나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자.
동: 접시가 깨졌네
서: I broke the plate.
동: 버스가 벌서 떠나 버렸어요.
서: I missed the bus.
동: 문제가 있어. 잘 되겠지만 말이야.
서: I have a problem. Let's talk about it.
동: 잔디깎기가 고장났네. 고쳐야지.
서: I forgot to check the oil in the lawnmower and burned out the engine.
동: 라디오가 없어졌어.
서: My radio was stolen.
동: 사고가 났어.
서: I was in an accident.
차이점들:
차이들의 원인들:
3.27.2009
문화의 정의들
Culture is "the collective programming of the mind that distinguishes the members of one group or category of people from others." Hofstede, Geert. Culture and Organization. 2005. p.5
호프스테드는 문화를 "정신의 프로그램" 또는 "정신의 소프트웨어"라고 정의한다. 인간의 본성과 개성의 사이에서 문화는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습득되는 것이며 한 개인을 넘어 특정 집단이 공유하는 것이다.
3.25.2009
깊은 냄비를 주시는 하나님
"아내가 기도하던 깊은 냄비..." 몇마디 않고 헤어졌지만 "아내가 기도하던 깊은 냄비..."가 계속 마음 속에서 맴돌았다.
모교회에서 후원이 끊겨 기도하는 중이지만 하나님이 더 좋은 후원자들을 만나게 하실것이라며 함께 식당에서 손붙잡고 기도했던 것이 두 주 전이었다.
깊은 냄비가 필요해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하나님 깊은 냄비가 필요한데 마련해 주세요"라고 순수하고 친밀한 기도를 드렸을 사모님의 성스러운 모습이 떠올랐다.
아내의 기도를 유심히 귀담아 듣고 "깊은 냄비의 필요"를 자기 일처럼 묵상했을 선교사님의 따듯하고 책임감있는 마음이 느껴졌다.
누군가 놓아둔 박스를 어둡고 바람부는 밤에 그냥 스쳐 지나가지 않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보물 찾듯 소망의 기대를 놓치지 않는 그의 성실함과 믿음이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깊은 냄비가 거기 그렇게 놓여져 있었던 것이 결코 우연이나 운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자애롭고 치밀한 준비하심이라고 생각하는 영적 민감함과 깨어있음에 내 자신이 부끄러워 졌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그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기 위해 이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예비하시는 하나님, 나로하여금 그 현장에 참여하게 하심으로 "내가 너를 기억하며 내 손바닥에 새겼다"는 아침의 말씀을 컨펌해 주시는 놀랍고도 달콤한 하나님의 사랑에 코끗이 찡하고 가슴이 묵직하게 아려왔다.
"사랑하는 아들아 보았니? 어땠니?" 라고 물으시는 것 같아 반짝이는 별들을 향해 말씀드렸다. "깊은 냄비의 사랑을 보여주신 아버지, 사랑합니다."
3.25.09, bk
사랑하다 헤어질 때
그럴 때, 미안하다는 말 대신 고맙다고 말하자.
사랑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사랑받을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했다고. 살면서 당신을 만난 것이
가장 좋았다고. 그래서 너무나 고맙다고,
그렇게 이별의 인사를 하자.
헤어짐은 끝이 아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다시 시작되고,
사랑이 끝나는 곳에서 사랑은
다시 시작된다.
- 권소연의《사랑은 한 줄의 고백으로 온다》중에서 -
* 사랑은 때때로 헤어짐으로 끝이 납니다.
아프고 쓰리지만 '사랑의 경험'은 그대로 남아,
다음에 오는 사랑을 더 찬란하게 꽃피웁니다.
그 '사랑의 경험'을 안겨주고 떠난 사람이
고마운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헤어짐은 사랑의 종착역이 아니라
또 다른 사랑의 시작입니다.
3.18.2009
Longing to Know
Geneva College, Beaver Falls, PA
“Knowing Knowing, Knowing God: Contours of Covenant Epistemology”
Most people have never had a philosophy course; that doesn’t keep them from practicing philosophy. We all inherit “default settings,” unexamined presumptions about what knowing is, which are proving unhealthy and unbiblical. They infect every dimension of human life, including knowing God. “Epistemological therapy” thus holds the prospect of favorably impacting everything from business to Christian discipleship, athletics to scientific research. This lecture will introduce you to Meek’s “covenant epistemology,” centrally the proposal that we take, as our paradigm of all human knowing, the transformative, interpersonal, covenantally-featured relationship. We will explore its key features and the ways it accords with the Christian Scripture, commending its value for reshaping the way we engage the world, and restoring us to ourselves.
Related:
- Ester Meek’s personal website
- John Frame’s positive review of Esther Meek’s Longing to Know: Frame writes, “This is a terrific book. I can’t begin in a short review to illustrate adequately the beauty of its writing and the cogency of its reasoning. But let me just say that I have never read a serious philosophical work (and this surely is one) that is as eloquently and delightfully expressed. Meek has a wonderful gift of illustration. Analogies and pictures fly from her mind like drops of water from a great fountain. Every page contains two or three of them, so there must be hundreds in this book. You’ll read about kitchen tables, golf games, copperhead snakes, children, weddings, on and on, as Meek seeks to show us how knowing happens in all the ordinary experiences of life.”
What follows are some sketchy notes from Meeks’s thoughtful address for which the audio and video should be available soon here.
Introduction
She describes herself as “a one-trick horse” whose specialty is epistemology. Knowing isn’t more than one step removed from living.
1. Knowing as Information: The Defective Epistemic Default
Many people have powerful assumptions about knowledge. Meeks sees herself “as in the business of epistemological therapy. The way forward is to find our epistemic default layer (i.e., the default mode) and recognize that it is sick.
“Esther’s daisy of dichotomies” notes the default mode for many people. (The first item is like the center of the daisy, and the second represents the petal.)
- knowledge as over against belief
- fact : opinion
- fact : value
- reason : emotion
- reason : faith
- science : art
- theory : application
- mind : body
- possibly male : female
This operates as a default setting, and people have presumptive opinions about what knowledge is and isn’t. One of these binary pairs esp. affects pastors: reason and faith.
Meek’s proposal is an interpersonal, covenantally constituted relationship, i.e., what she calls covenant epistemology. Knowing is not information so much as transformation, and it involves the idea of covenant as an unfolding pers0nal relationship.
2. Knowing Is Subsidiary Focal Integrative Transformation
Illustration: learning to read.
We know that we have made contact with reality when we have a sense of the possibility of indeterminate or unspecifiable manifestations.
3. Knowing Is Covenantal
Covenant is first and foremost a relationship of mutuality involving initiative and response constituted by promises and obligations, one that unfolds over time resulting in friendship and communion.
4. Knowing Is Interpersonal
A critical and profound insight of what should be obvious: To be a person is fundamentally is not to be a reactional animal but a being in communion.
“I - it” vs. “I - you”: Information is “I - it.” An encounter is “I - you.”
Covenantal illustrations: (1) “Starbucking,” (2) dance.
5. Knowing and Being Known by God Is the Paradigm and Central Core of Human Knowing
Two necessary dimensions of situated stewardship are (1) the lived world and (2) the self that lives it. But there are two other dimensions that lie outside our own capacity to being or control: (1) any experience of the reality of the threat of not being and (2) the holy, namely, the gracious possibility of new being, a deliverance that comes outside of us and to us only when we are in the void, the other that graciously seeks our flourishing, the personal other that will not go away.
Having been known by and knowing Christ is the epistemic paradigm for all human knowing.
6. Inviting the Real: Epistemological Etiquette
We are to “invite the real,” not passively gather information or actively demand it. We must practical “epistemological etiquette.”
7. A Short Objection and Reply: What About Collecting Data?
Both knower and known are persons in personal relationship. Many might ask, “What about collecting data?” The question reflects a defective epistemic default (i.e., knowledge as information).
Conclusion
“I hope that all this draws you more deeply into loving and knowing him.”
알려는 열망
"Knowing is the responsible human struggle to rely on clues to focus on a coherent pattern and submit to its reality." Esther MeekMeek은 Michael Polanyi를 연구한 철학자이다.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자동차 수리공을 유비하였다. 깔깔대며 웃는 유쾌한 웃음이 귀엽기까지 한 Meek은 Longing to Know라는 책에서 철학적 인식론을 일상의 언어로 생생하게 그려내는 값진 작업을 하였다.
“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Meek은 결론을 내리기 전에 철저하게 이 질문에 대해 탐구할 것을요 청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알 수 없다”는 명제 자체도 “하나님은 알 수 있다”라는 명제를 증명하는 것 만큼, 아니 보다 더 어려운 작업들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증명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성서가 증언하는 또 다른 난관인 “우리의 앎의 능력은 왜곡되고 상실되었다”는 진리 앞에 서야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어거스틴의 오랜 전통을 따라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망을 외면하고 포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존재적으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고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젖먹이의 옹알이로부터 프로이드의 왜곡된 Id까지 진리를 향한 열망은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아 프라이오리a priori이다.
도대체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어떤 의심할 수 없고 오류도 있을 수 없는 절대적 보편진리를 인식한다는 것인가? 대답은 “아니다.” 안다는 것은 의심이라는 행위와 오류의 실패를
포함하는 더 포괄적인 행위이다. 앎은 끝없는 인식의 과정이다. 결국 인간의 삶은 끝없는 알아감의 여정이며 알아가는 것은 인간됨의 행위이다.세 상 속에 흩어진 실체의 편린들을 단서로 그리고 보여진 실체 너머에 있는 배후의 관계들을 통해 일관성cohesive있는 의미를 발견해 내는 것은 때로는 고통스럽고 무모하며, 어쩌면 너무나 어려워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정도이다. 그러나 “세상the world”은 여전히 실재하고, 세상을 인식하는 주체이며 동시에 중요한 인식의 대상이기도 한 “나body”도 실재하기에 포기할 수도 없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인식의 대상과 인식의 주체 사이의 관계를 정립해 주는 일종의 “지침/방향direction”이다 (나는 Meek의 direction보다 인식론적 방향성과 인식의 주체와의 관계성을 더 포괄적으로 설명해 주는 Geertz의 “Map” 개념을 선호한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지도의 범례keynote/legend가 되어 인식의 틀을 형성하고 기존의 틀을 계속해서 교정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삶의 복잡다단한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실체들은 정념화되어 경직되지 않고 계속 역동적으로 구성과 해체, 그리고 재구성을 거듭할 수 있도록 유연해야 한다. 진리는 단순히 감각과 인식과 언어 너머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소망과 겸손을 가지고 반응respond할 수 있다. "확실함certainty"도 절대진리를 명확히 "표현할 길"도 없기 때문에 겸손해야 할 것이며, 이러한 겸손함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인식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소망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겸손함과 소망은 세상에 대해 존재를 여는 태도이다 (피녹은 이를 인간의 "세계 개방성"이라고 불렀다. 다만 그는 이를 인간 존재의 자연스러운 본성으로 설명했지만 내가 보건대 이는 죄로 인해 왜곡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많은 중요한 본성들 중 으뜸이 되는 것이다. 자기만의 도그마에 갖혀 진리를 자기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양 법석을 부리는 경직되고 오만한 사람들속에 내가 속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증거는 충분하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세상을 향해 자신의 존재를 여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나는 세상과 연합하고 세상을 이해하며 세상에 섞여 세상을 풀어(해석해)나간다. 서양적 전통의 분석적 사고에 대한 강조는 인간의 의식에 대한 과도한 의존과 확신을전제로 하게 될 때 결국 실체로 부터의 메마른 단절만을 부추겨 결국 인간을 끝없는 고독의 무저갱에 처박아 놓게 된다. 실체와 인식의 주체는 분리될 수 없다.
인식의 행위는 인식자의 적극적이고 책임성 있는 순종과 헌신을 요청한다. 앎yadah이라는 것은 부부가 결혼을 하여 서로 알아가는 것과 같은 그런 종류의 앎이다. 완전히 다 알아 앎이 종료되는 순간은 없다. 다 만 계속해서 알아갈 뿐이다. 그리고 그 앎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필요하다. 용기와 희생과 책임이 뒤따른다. 말씀word를 통해, 세상world를 통해, 그리고 우리자신we-self를 통해 우리를 만나시는 하나님은 그래서 임마누엘이다. 나와 세상을 통해 그리고 말씀을 통해 계시는 하나님 밖에서 어떻게 내가 존재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어거스틴은 고백한다. "그러므로 나의 하나님이여, 당신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할 수가, 결단코 존재할 수가 없나이다. 아니면 이렇게도 말할 수도 있지 않겠나이까? 내가 당신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니이다…. 그러하나이다 주여… 당신은 말씀하셨나이다.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렘23:24). Confessio, I.ii.2
앎은 또한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하는 행위이다. 믿음과 이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지, 정, 의의 모든 인간됨이 총동원 되는 것이다. 보이는 것 너머의 복잡한 관계들을 성경과 성령이 지시하는 대로 민감하게 반추하여 의미를 발견하려는 적극적인 "앎의 행동"이 필요하다.
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진정한 앎은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앎은 존재와 존재의 충돌이기에 변화에 대한 용기를 요구한다. 앎은 알려지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되는 것이다. 그를 알기 전의 나와 그를 알고 난 후의 나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더할 나위 없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변화되는 것이다. 더 많이 알아갈 수록, 더 많이 변화되며, 더 많이 변화될 수록, 더 많이 알고 싶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거룩이 더해 갈 수록 죄에 대한 인식이 더 또렷하고 깊어지며 이는 더 깊은 거룩의 갈망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정말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는 지를 먼저 물을 일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만나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 않고 궁금하지 않은 담에야 "알고 싶을"리 만무하지 않은가? 알고 싶지 않은데 알 수는 없는 노릇이며, 사랑해야만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앎"을 "세상의 실체를 받아들이고 탐구하려는 인간의 책임있는 노력"으로 정의한 에스더 믹의 진술은 좀 메마른 감이 있어 아쉽다.
bk
3.12.2009
사람이 안보여
bk
3.10.2009
3.05.2009
신과 과학
눈에 보이는 질서정연한 우주는 최고의 지성적 존재를 웅변한다.
-Jean-Jacues Rousseau
2. Science brings men nearer to God
과학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이끈다.
-Louis Pasteur
3. Truth between candid minds can never do harm.
편견없는 지성간의 진실은 절대 해롭지 않다.
-Thomas Jefferson
4. The visible marks of extraordinary wisdom and power appear so plainly in all the works of the creation that rational creature, who will but seriously reflect on them, cannot miss the discovery of a Deity.
모든 창조사역속에 드러나는 비범한 지혜와 권능의 증표들은 너무도 명백하여서 이를 진지하게 상고하는 이성적 피조물은 하나님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John Locke
호기심
호기심은 영혼의 갈증이다.
Samuel Johnson
질문
질문하기를 멈추기 전 까지는 누구도 멍청하지 않다.
-Charles P. Steinmetz-
3.04.2009
불꽃놀이와 창조
어두운 밤하늘에 강력하게 솟아올라 분수처럼 흩어지는 불빛들의 향연을 보노라면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력에 경외감 마져 느껴진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마치 불꽃놀이를 하시는 것 처럼 즐겁고 재미있으셨지 않을까? 혼돈과 공허, 흑암가운데 오색찬란한 빛들이 우주를 뒤흔드는 소리와 함께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제 자리를 찾아 퍼져 나간다. 빛이 생겨난 자리에 어둠은 물러가고 열기와 생명력의 에너지들은 형형의 색들로 옷을 입고 장엄한 조화를 형성하며 밤하늘의 캔버스를 진하게 물들인다. 광대하고 아름다운 우주적 예술...
누군가는 차이코프스키가 불꽃놀이와 어울린다지만, 나는 그래도 모짜르트가 더 좋다.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올 해 독립기념일에는 아이들과 함께 폭죽놀이를 해 볼 것이다. 모짜르트를 크게 들어 놓고 말이다.
창조를 예술적 표현artistic expression 또는 놀이play로 보는 견해가 있다.
전통적으로 창조는 역사work로 인식되었다. "창조사역"이라는 말은 창조를 "일" 또는 "노동"으로 보는 견해를 반영한다. "일"이라는 단어는 댓가를 얻기 위해 지불되어야 하는 노력의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전적으로 자유로우며free 자발적spontaneous이다.
1. 창조는 자유로우며 구속이나 제한됨이 없는 행위이다. 다른 모든 예술적 표현과 같이 자유로우며, 표현적이고, 즐거우며 창조적인 행위이다.
2. 놀이로서의 창조에는 자발적 구속과 제한을 포함한다. 조화와 통일, 균형과 화합을 위한 종합적 통합성은 자발적인 자기제한을 요구한다.
3. 개채와 전체의 어우러짐은 상호 보완과 견제, 그리고 협력의 상호의존성을 근간으로 한다. 개채는 그 자체로서 완전하며 동시에 전체에 의존적이다.
4. 개채는 전체의 일부가 되었을 때 새로운 존재로 재구성된다.
2.27.2009
하나님
"이스라엘아 들으라, 야훼 하나님은 하나이신 하나님이시니.." 신명기 6:4하나님은 "하나"이시다. 하나님은 산술적 개념으로서 "하나"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모든 것의 궁극, "수로써 표시할 수 없는 절대absolute"라는 의미에서의 하나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무한하고 영원한 "한"님이시며 절대적 권위와 권능의 "하늘"님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해 계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시는 분"이시다. 엡 4:6
그래서 유한한 인간은 무한의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크시고 또한 동시에 너무도 작으시다. 하나님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공동체를 통해서이다. 모든 것 위에, 모든 것을 통해, 그리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인식하려면 "모든 것"을 통합하는 것이 필요하다. 누구도 하나님을 온전하게 알 수 없다는 기본적인 전제를 수용하여 겸손과 배움의 자세를 가지고 서로를 존중하며 서로를 이해하려는 열린 마음, 너른 관점을 견지하여야 한다.
장님들이 코끼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신뢰하며 비평적으로 수용해야만 할 뿐 아니라, 나의 지식과 이해를 다른 사람들의 지식과 이해에 연관시켜 수정 보완하는 변증법적 접근이 필요한 것 처럼, 하나님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의 선이해를 객관화 시키고 나의 생각이 정초해 있는 전제와 가정에 질문을 던져 좀더 보편화된 기반을 확보하고 그 위에 논리적이며 통합적인 구조를 확립해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무한한 존재라는 믿음은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것을 요청한다. 하나님은 무한자이시기에 하나님 밖에서는 존재를 찾을 수 없다. 하나님 만이 스스로 존재하신다. 또한 하나님 만이 존재를 가능하게 하신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하나님께 의존적이다. 그렇다면 비존재는 어떤가? 비존재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음은 존재할 수 있는가? 실체reality가 없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더 긍국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빛은 존재한다. 어두움은 존재하는가?
우주적 그리스도
장공 김재준(金在俊, 1901~1987)"크리스챤이 역사에 대하는 태도란 언제든지 구속사적 입장과 성격 안에서 이 현실의 역사를 비판해야 하며, 동시에 그 역사로 하여금 구원의 목표를 지향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 이 비판과 지향에서 크리스찬은 십자가를 각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기독교 사상 제2권 3호-
장공의 사상은 변혁적이며 문화적이고 창조적이다. 무엇보다 역사참여의식이 강한 선지자적 '얼'을 담고 있다. 바르트와 니버의 신정통주의를 수용하는데 있어 민족적 주체성이라는 자기의식을 잃지 않는다. 장공은 주체적 한국 신학을 정립하고 그 정신을 역사속에 구현하려 몸부림쳤던 선지자였다. 그에게 있어 복음의 핵심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였기 때문이다. 초월적 하나님이 강조된 신정통주의를 수용하며 한국의 근대상황에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을 강조함으로 주체적 신학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의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강조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초월성보다 내재적 그리스도를 더욱 강조하는 진보신학의 토대가 되면서 토착화 신학, 민중신학등의 원류를 제공한다.
장공은 시대의 사상적 조류를 꿰뚤어 보는 넓은 안목을 지닌 학자였다. 자신을 공격하는 수구 보수세력의 신학적 정체성과 그 뚜렸한 한계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의 장로교가 19세기 말부터 사멸의 길을 걷는 구프린스턴 중심의 근본주의에 과도히 영향을 받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성경 연구에 과학적 방법을 수용하면서도 사도적 신앙을 타협하지 않는 자율적 신학과 역사참여적 신앙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주체적으로 신학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세상을 변혁하는 창조적인 소수를 양성하고자 애썼다. 강원용, 문익환, 문동환, 안병무, 서남동 등은 그가 배출한 인물들이었다.
그의 선교의식 역시 선지자적이다. 교회의 선교란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전도로 축소될 수 없다. 역사속에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세상의 역사를 변혁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하나님의 뜻인 자유와 사랑과 정의의 평화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도록 하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다.
장공의 신학과 사상은 주체적이면서도 동시에 우주적이었다. 그에게 우주는 "하느님의 집," "아버지의 집"이었고 삶의 목표는 "범세계적, 더 넓게는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실현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카인의 문명과 아벨의 구속사가 하나로 통합이 되는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그것을 실현하는 주체가 교회이며,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선교였다.
함석헌, 김교신, 이용도와 함께 1901년 생인 그는 구한말 "역사의 어둠이 짙었을 때에" 태어나 질곡의 한국 근대사를 걸었다. 그러나 암울하고 폭압적인 역사앞에 좌절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계명성 동쪽에 밝아 이 나라의 여명"이 왔음을 선포했고, 은둔과 자적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인류의 횃불이 될 것"을 노래했다 (새찬582). 20세기를 살며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역사를 변혁하려 했던 그의 정신과 자취는 강렬한 빛이 되어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에게도 여전히 밝고 따습게 비췬다.
bk
2.21.2009
나의 사명
"나는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다. 그리고 내 일생은 나의 이 의무들을 얼마나 잘 감당하느냐에 따라서 성패가 결정될 것이다. 내 사명이란 곧 나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과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다."좌옹 윤치호(1864-1945)
일기, 1권 410쪽, 1889년 12월 14일
윤치호는 조선 최초의 미국 유학생 신학도였다. 신사유람단의 일행으로 김옥균, 박영효등의 개화인사들에게 영향을 받은 윤치호는 1884년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허망하게 끝나자 삶을 회의하고 좌절하였으나 '그리스도 신앙'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1888년 부터 Vandervilt 신학부에서 3년 Emory대학에서 2년 도합 5년간 수학하였으며 신학 외에도 정치와 경제, 그리고 심리학등을 배웠다.
인간의 개혁과 사회적 혁신이라는 실용주의적 관심이 지대했던 윤치호는 조선말기의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관리들의 악과 그들의 사상적 뿌리인 유교에 실랄한 비판을 가한다. 스스로 도덕적 타락을 경험했던 윤치호는 "자기 부정"을 통한 인간갱신은 바른 종교만으로 가능하며 종교를 통한 "이기심의 극복"만이 도덕적 사회를 건설하는 기초라고 보았다.
귀국 후 정치를 통해 민족의 갱신을 도모하였으나 이미 기울어진 국운을 돌이킬 수는 없자 교육운동에 전념하였다. 한미서원(1906년, 후일 송도 고등보통학교로 개편)과 황성기독청년회 (조선YMCA, 1903)를 중심으로 민족의식과 민족성 개혁운동을 벌였던 그는 백성을 근대화하는 실업교육을 중요하게 여겼다.
윤치호는 하나님 사랑과 나라사랑을 하나로 보담았던 시인이기도 하였다. 그가 만든 찬송시 중 이런 낮익은 것이 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찬미가 14장 1절-
1900년의 마지막 날 일기에 "시간이 지나면 조선도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문명한 나라가 될 것이다...그렇다. 이 모든 꿈은 꼭 실현될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아, 300년 후 이 달라진 모습을 보기 위해 이 조선에 다시 돌아고 싶구나" 라고 소망하였던 윤치호가 100년이 조금 지난 오늘 천국에서 한국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못 궁금하다.
bk
2.20.2009
앎과 노출
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The truth is a snare: you cannot have it, without being caught. You cannot have the truth in such a way that you catch it, but only in such a way that it catches you."
진리는 인격이다. 진리는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에게 우리가 노출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진리에 의해 점령당하는 것이다. 진리는 살아있는 인격이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알아간다는 것은 그에 의해 영향을 받는 다는 뜻이다. 그래서 진정한 앎은 내 자유를 댓가로 지불할 때에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하신 말씀은 이런 점에서 역설이다. 내 자유를 그분에게 내려 놓는 믿음이 선행되어야 진리를 알 수 있게 된다. 내 자유를 포기할 때에라야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된다. 키에르케가르는 말할 것이다. 내가 누리려는 자유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누리는 자유에는 극명한 질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말이다.
"무엇이 삶이냐"고 묻지 말고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라고 물어라. 내가 존재하는 방식이 내 삶을 규정하는 것이지 삶을 정의내리자고 내가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어차피 삶은 누구에 의해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방황하지 말아라. 대신 의미있다고 믿는 바를 행하며 오늘을 살아라. 그것이 의미있는 삶이며 삶의 의미이다.
2.13.2009
종교 교육의 목적
사랑하는 당신에게,William Ellery Channing이라는 미국 교육자가 쓰신 글을 읽다가 감동받은 내용을 나누고 싶습니다. Channing은 1780년에 태어나신 분이니까 한국으로 따지면 조선시대 정조때 사람이에요. 이 분이 1830년에 선데이스쿨 연합회에서 설교를 하셨는데 그 내용중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어요.
"진정한 종교교육의 목적은, 그것이 주일학교에서건, 아니면 가정에서건 간에, 우리의 생각을 아이들의 마음에 도장 찍듯 새겨 넣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 자신의 생각을 불러 일으키도록 돕는 것이며; 아이들이 우리들의 시각으로 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탐구하면서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며; 정해진 양의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열정적 사랑을 고취시키는 것이며; 외적 규범들을 형성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적 동기를 자극하는 것이며; 암기의 짐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사고하는 능력을 강화시키고 촉진시키는 것이며; 편협하고 좁은 특정한 그룹의 뿌리깊은 편견으로 아이들을 얽매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어떤 주제이든 공정하고 양심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며; 진정한 기반 없이 그저 어른들의 전통과 규칙들로 종교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양심을 일깨우고 도덕적 분별력을 함양하게 함으로 아이들이 자신과 세계를 위해 궁극적으로 선하고 옳은 것을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안과 밖에서 선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느끼고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적 눈을 열어 그리스도의 아름답고 광대하신 성품을 보게 하여 그를 흠모하며 닮아가고 싶은 열정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William E. Channing, The Sunday School: A Discourse Pronounced Before the Sunday School Society (Boston: James Munroe, 1838), 9-10.
너무나 옳기에 차라리 아름답기까지 한 진술이지요? 그런데 이분은 삼위일체를 믿지 않고 예수님을 그저 위대한 선생님으로 보는 유니테리안주의자였다고 해요. 하지만 그가 무슨 주의의 사람이었건 간에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을깊이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 많큼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말로 설명해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게 해 주셨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되 한번도 강요하신 적이 없으세요. 다만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자라도록 꿈의 씨앗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그분은 한번도 자기처럼 생각하라고 강요하신 적이 없으셨어요. 대신 늘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도전하셨고, 정형화된 교리와 도덕주의에 안주하며 사람들을 정죄하고 스스로 분리되려고 했던 종교지도자들을 무섭게 비판하시고는 말씀과 율법에서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의 정신을 재해석하고 현실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방법을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무시당하던 절대 약자인 아이들을 "천국의 주인"으로 표준화 하시는 혁명적인 선언을 하시고는 꼬질꼬질 더럽고 냄새나고 천방지축인 가난한 아이들을 사랑으로 끌어 안아 주셨습니다. 가장 위대한 교사이셨던 그분의 가르침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니..."
어디 아이들 뿐 이겠습니까?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직장에서나, 사업장에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죽는 그날 까지 배워가는 평생 학습자들입니다. 진정한 개인과 사회의 변화는 뿌리 깊은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상대를 존중하고, 공동체를 가치있게 여기며, 서로 다름을 소중하게 받아들이고, 함께 배우고 자라가려는 겸손한 마음의 태도 속에서, 그리고 각자가 처해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너른 상상력과 공교한 실천적 지혜로 대안을 만들고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공동의 노력을 통해서, 무엇보다 우리 안에서 일을 이루어 가시는 삼위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 진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이러한 믿음을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실천하려고 몸부림치는 부모의 모습을 통해서 선한 영향력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180년 전에 선포된 Channing의 교육에 대한 메세지를 대하면서 내가 받았던 교육과 내가 하고 있는 교육을 생각해 보니 한편으로는 부럽고 한편으로는 너무나 부끄러운 복잡한 심정입니다. 그래서 부러 "사람으로는 할 수 없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되뇌어 보며, 아이들과 우리 자신을 위한 특별한 기도의 시간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면서 무릎꿇기를 고대해 봅니다.
오늘도 힘내시고 많이 행복하세요.
bk
2.10.2009
배움이란
배움이란 의미를 만드는 것이다.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느끼는 현재의 경험들을 의미화하는 것이다.
우리의 경험들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 통일성을 부여하고, 일관된 설명이 가능하게 하는 것, 즉 해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배움이란 끊임없는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 즉 경험의 해석과정이다.
Jack Mezirow, Transformative Dimensions of Adult Learning, 1991. p. 11
사람들은 저마다의 "습관화된 기대의 틀sets of habitual expectation" 또는 "의미관점meaning perspective"을 통해 감각된 자료들을 이해하고 수용하며 기억한다. 의미관점은 Albert Wolters가 설명한 세계관일 수도 있고, Thomas Kuhn의 패러다임일 수도 있고, Sara Little의 신념체계일 수도 있다. 여기서 매저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점은 사람들이 외부의 정보들을 수용할 때 주체적으로 이미 스스로 가지고 있는 의미를 부여하는 어떤 구조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사과를 본다고 할 때, 그 사과가 주는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에게는 단순한 과일로, 다른 사람에게는 누가 남기고 간 쓰레기로, 또 다른 사람에게는 그리고 싶은 대상물로 수용된다. 이렇게 같은 사물을 놓고도 다른 의미가 만들어 질 수 있는 원인은 그 대상물 자체의 속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실체를 수용하는 수용자의 "의미관점"의 차이 때문이다. "의미를 느낀다", "의미를 부여한다", "의미를 창출한다", 또는 "의미를 깨닫는다"는 것은 모두 외부의 자료를 수용하는 데 있어 "의미관점"을 활발하게 사용하여 외부의 자료들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은 사실상 언어라는 시스템을 통해 구체화된다. 사과를 인식할 때 이미 거기에는 "사과"라는 언어로 제한된 의미가 부여된 또는 분류categorized된"사과"의 개념을 수용하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비트겐쉬타인을 좀 공부해 놓을 것을 그랬다. 소쉬르로 부터 시작되는 언어사회학/기호학의 기본 개념을 배워둘 필요가 있다. 랑그와 빠롤, 그리고 기표와 기의를 구분하고자 했던가? 랑그는 빠롤이 가능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기의와 기표의 관계는 사물과 단어가 아니라 개념과 청각이미지와의 관계이다.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언어가 역사와 사회를 통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의미관점은 사회의 산물이며 문화적 상황에 항상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상인과 현대의 비즈니스맨은 언어만 다른 것이 아니다. 의미는 선언어적으로는 prelingustically 상황과 상징적 모델들을 통해, 그리고 (직접적으로는) 언어를 통해 구성된다.
의미관점은 새로운 자료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데 일정한 구조를 따르게 하며 수용된 경험은 다시 의미관점을 재형성하고 확장시킨다. 배움이라는 것은 이러한 과정들 속에서 기존의 의미관점에 커다란 변화가 올때 일어난다. 이미 구성화된 의미관점들, 선입관, 가정, 전제,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입장, 사회적 상태와 교육된 이해들의 복잡한 의미관점들에 변화가 생기는 것이다. 매저로는 이를 관점의 변화perspective transformation라고 지칭한다.
배움은 해석의 변증법적 과정이다. 이미 가지고 있는 의미관점을 통해 대상들이나 사건들과 상호작용을 하는 변증법적 과정이다. 보통은 이미 형성된 의미관점을 가지고 현재 사건이나 대상을 해석한다. 그러나 변화학습은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지나간 과거의 경험을 재해석하여 결국 과거 경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관점을 창조해 낸다.
배움은 현재 경험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재구성함으로 장래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강화하는 과정이다.
2.05.2009
Bloom's Taxonomy
시대가 지남에 따라 앎의 내용과 과정은 변화한다. 디지탈시대에 앎이란 컴퓨터와 인터넷에 상호 의존적이 될 수 밖에 없다. 구글링과 블로깅은 인식의 내용과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친다. 모든 것이 그렇듯 긍정적것과 부정적인 것이 혼재한다.
지식의 진정한 기반이 유동적이며 가변적일 때 그것은 더이상 기반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한다. 끊임없는 해체와 재구성, 창조적 발달을 지향하면서도 그것이 바른 방향성을 상실하지 않으려면 거대한 외부, 또는 절대 타자에 의존적이어야 한다는 가정을 믿음으로 수용하여야 한다. 우리에게 그것은 곧 신앙공동체의 신학하는 삶을 통해 확증되고 구현된다고 믿는다.
bk
1.27.2009
변화를 가져오는 배움
1.26.2009
학습 공동체

Learning Organization is a place where people continually expand their capacity to create the results they truly desire, where new and expansive patterns of thinking are nurtured, where collective aspiration is set free, and where people are continually learning how to learn together.
Peter M. Senge, The Fifth Discipline: The Art & Practice of the Learning Organization
(1) 학습조직의 정의
Peter Senge는 ‘학습조직’(Learning Organization)을 전통적인 조직과 구별하여 그 성격과 요건을 규정하였다. 그의 이론은 개방체제모형과 자기실현적 인간관을 전제적 이론으로 삼은 것이다. 그는 외재적 조건보다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교호작용 양태를 더 중요시한다. 조직은 사람들의 생각과 상호작용의 산물이라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Senge가 말한 학습조직이란 ⅰ) 조직구성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결과를 창출할 능력을 지속적으로 신장할 것, ⅱ) 새롭고 개방적인 사고방식이 육성될 것, ⅲ) 공동의 갈망이 자유롭게 분출될 수 있게 할 것, ⅳ) 조직구성원들이 함께 배우는 방법을 계속적으로 배울 것 등의 조건이 구비된 조직이다.
(2) 다섯가지 수련(제5의 수련)
Senge 는 학습조직의 성립에 필요한 다섯 가지 수련(훈련·계율·과정 : disciplines)을 제시하였다. 이들 수련은 학습조직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요건이며 방법이고 기술(component technologies)이다. 서로 수렴해 가는 다섯 가지의 새로운 기술 또는 수련이 함께 학습조직을 탄생시킨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새롭게 사고하고 교호작용하는 방법을 깨닫고 이를 행동화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려는 다섯 가지 수련은 다음과 같다.
1) 자기완성(personal mastery) : 이에 관한 수련은 생애와 일에 관한 개인의 접근방법을 성숙시키는 것이다. 각 개인은 원하는 결과를 창출할 수 있는 자기역량의 확대방법을 학습해야 한다. 조직은 그 구성원들이 선택한 목표를 향해 스스로를 개발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
2) 사고의 틀(mental models) : 이에 관한 수련은 뇌리에 깊이 박힌 전제 또는 정신적 이미지를 성찰하고 새롭게 하는 것이다. 세상에 관한 사람들의 생각과 관점,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가다듬어야 한다.
3) 공동의 비전(shared vision) : 이에 관한 수련은 조직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추구하는 목표와 원칙에 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4) 집단적 학습(team learning) : 이에 관한 수련은 집단구성원들이 진정한 대화와 집단적인 사고의 과정을 통해 개인적 능력의 합계를 능가하는 지혜와 능력을 구축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1.24.2009
주 없이 살 수 없네
주 없이 살 수 없네 죄인의 구주여
그 귀한 보배 피로 날 구속하소서
구주의 사랑으로 흘리신 보혈이
내 소망 나의 위로 내 영광 됩니다.
주 없이 살 수 없네 나 혼자 못서리
힘없고 부족하며 지혜도 없도다
내 주는 나의 생명 또 나의 힘이라
주님을 의지하여 지혜를 얻으리
주 없이 살 수 없네 내 주는 아신다
내 영의 깊은 간구 마음의 소원을
주 밖에 나의 마음 뉘 알아주리요
내 마음 위로하사 평온케 하시네
주 없이 살 수 없네 세월이 흐르고
이 깊은 고독 속에 내 생명끝나도
사나운 풍랑 일 때 날 지켜 주시니
내 곁에 계신 주님 늘 힘이 됩니다.
아멘 (새찬292/통415)
I could not do without Thee
O Savior of the lost,
Whose precious blood redeemed me
At such tremendous cost.
Thy righteousness, thy pardon
Thy precious blood, must be
My only hope and comfort,
My glory and my plea.
I could not do without Thee,
I cannot stand alone,
I have no strength or goodness,
No wisdom of my own;
But Thou, beloved Savior,
Art all in all to me,
And weakness will be power
If leaning hard on Thee.
I could not do without Thee,
For, oh, the way is long,
And I am often weary,
And sigh replaces song:
How could I do without Thee?
I do not know the way;
Thou knowest, and Thou leadest,
And wilt not let me stray.
I could not do without Thee,
O Jesus, Savior dear;
E’en when my eyes are holden,
I know that Thou art near.
How dreary and how lonely
This changeful life would be,
Without the sweet communion,
The secret rest with Thee!
I could not do without Thee;
No other friend can read
The spirit’s strange deep longings,
Interpreting its need;
No human heart could enter
Each dim recess of mine,
And soothe, and hush, and calm it,
O blessèd Lord, but Thine.
I could not do without Thee,
For years are fleeting fast,
And soon in solemn oneness
The river must be passed;
But Thou wilt never leave me,
And though the waves roll high,
I know Thou wilt be near me,
And whisper, “It is I.”
Frances Ridley Havergal (1836-1879)
1.23.2009
학습공동체 Learning Community
1. Shared Vision
2. Commitment to Learning
3. Dialogue and Discussion
4. Systematic Problem Solving
Measuring and Creating Learning Organization
Three Overlapping Stages
1. Cognitive
2. Behavioral
3. Performance Improvement
1.18.2009
"이성"은 희생의 결과
"In a real sense, I came to believe moral selflessness is a prerequisite for the life of reason-not its consequence, as so many philosophers contend."Rangdon Gilkey, Shantung Compound, 1966. p.93
도덕적 자기희생은 이성적인 삶을 위한 전제이지 그 결과가 아니다.
UnChristian 나쁜 그리스도인
미국 바나 그룹이 3년간 10회에 걸쳐 20만명 이상의 기독교 밖의 와부인들에 대한 리서치와 특히 버스터 세대의 저 연령층(30세 이하)과 모자이크 세대에 속한 16세에서 29세의 젊은이들을 인터뷰한 결과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이미지는 다음과 같다.1. 위선적이다.
2. 전도에만 열을 올린다.
3. 동성애자를 혐오한다.
4. 안일하다.
5. 지나치게 정치적이다.
6. 타인을 판단하려고 한다.
B.R Nov. 2008
1.10.2009
인간 본성
According to Niebuhr, humankind exists in a dual state of finite and self-transcendence. Since we face our mortality and yet our ability to at times “go beyond” ourselves, human exists in a state of anxiety. To deal with this anxiety, we pursue pride to cover up our finitude resulting in self-justification, self-rationalization, and the stereotyping of the oppressed. We also pursue sensuality to abdicate responsibility resulting in resentment, rebellion, and repression. Consequently, human sin is making self efforts to cover up their finitude without trusting God. To combat sin, we should correct our sins by mutual support in the communit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