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역사 변혁의 의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셔서 이 시대를 바꾸실 것이라고 믿는 역사 변혁의 주인공의식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드려지고 하나님은 자신을 사용하여 한 시대를 움직이실 것이라고 믿는 폭발적인 열망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사람에게로부터 비롯된 야망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진 꿈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꿈을 가진 사람들만이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오늘도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당신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비밀을 알리시고 당신이 이루고자 하시는 놀라운 계획에 동참하게 하십니다."
김남준, 자네 정말 그길을 가려나,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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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야망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진 꿈을 성서는 "계시" 또는 "비전"이라 지칭한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분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눈물겹도록 행복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을 나타내시고 당신의 꿈을 심으시며 그 꿈을 이루어 가신다. 그것이 하나님이 당신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방식이며 계시의 기본적인 요건이다. (요 14:21)
"역사변혁의 주인공의식"이 "폭발적인 열망"으로 충만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 흐르자 패기는 수그러들고 열정은 식어간다. 그러나 나는 나의 의식과 열망보다는 내 안에 역사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의식과 열망을 더욱 신뢰한다. 그것이 나의 야망을 꺽고 하나님의 뜻(계시)을 수용하고 순종하는 데 더 바람직하다는 것을 나의 하늘 아버지는 더 잘 아시는 것 같다.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를 위한 하나님의 폭발적인 열망을 철저하게 의뢰하는 것이 "역사변혁의 주인공의식"을 가장 현실적으로 지혜롭게 그리고 중단없이 실천해 내는 방법이라는 것을 배운다.
bk
11.25.2011
11.23.2011
한국 교회의 희망: 작은 선교적 신앙 공동체
"한국 교회의 위기는 근원적으로 영성과 도덕성과 공동체성을 상실한데 기인한다." 이원규, 종교사회학적 관점에서 본 한국교회의 위기와 희망, 2010.
한국 교회의 위기에 대해 이보다 더 간단명료하고 정확한 표현을 찾을 수 있을까?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기도가 부족하거나, 헌신이 덜 되어 있거나, 종교적 열심이 식었거나 교리를 잘 못 가르쳤거나, 신앙심이 식었거나 하는 교회의 내적 문제가 다가 아니다. 실제 신앙의 실천 문제, 또는 믿는 바와 실천사이의 괴리문제, 더 나아가서는 포스트 모더니즘, 종교다원주의, 세속화와 같은 사회의 시대적 흐름에 대한 역사의식 결여의 문제이다. 영성은 소비성으로, 도덕성은 상업성으로, 공동체성은 배타적 이기성으로 똘똘 뭉쳐진 사회를 책망할 수 있으려면 교회는 정치화된 권력과 집단적 힘을 포기하고 일반 대중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
한국 교회의 희망에 대해서는 어떻게 간단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저자의 책에서는 단서를 찿아보기 어렵다. 종교사회학적 관점에서 현상에 대한 기술적 분석을 내놓은 책이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나는 한국교회의 유일한 희망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메타노이아(회개)"이며 이를 현실화 하는 구체적 방법은 작은 선교적 신앙공동체를 통해 희생적 사랑과 섬김을 훈련하며 이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실천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를 통해서 근원적 문제의 핵심인 영성과 도덕성과 공동체성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bk
11.19.2011
어노인팅
어노인팅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기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기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 상한자를 고치며 나를 보내사 눈먼 자를 눈뜨게 하며
나를 보내사 갇힌 자를 놓이게 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님의 성령 내게 임하여 하늘의 영광 나타내게 하소서
주님의 성령 내게 임하여 하늘의 영광 나타내게 하소서
눅 4:18-19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약속의 말씀...
오 주님
주님의 영광을 위해 작은 불꽃으로 타오르게 하소서
주님의 성령으로 내게 기름 부으소서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며
상한자를 고치며
눈먼 자를 눈뜨게 하며
갇힌자를 놓이게 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소서
마지막 땀,
마지막 눈물,
마지막 피까지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쏟아 붇게 하소서
bk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기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기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 상한자를 고치며 나를 보내사 눈먼 자를 눈뜨게 하며
나를 보내사 갇힌 자를 놓이게 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님의 성령 내게 임하여 하늘의 영광 나타내게 하소서
주님의 성령 내게 임하여 하늘의 영광 나타내게 하소서
눅 4:18-19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약속의 말씀...
오 주님
주님의 영광을 위해 작은 불꽃으로 타오르게 하소서
주님의 성령으로 내게 기름 부으소서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며
상한자를 고치며
눈먼 자를 눈뜨게 하며
갇힌자를 놓이게 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소서
마지막 땀,
마지막 눈물,
마지막 피까지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쏟아 붇게 하소서
bk
10.20.2011
헌신
나는 무엇에 대해 헌신하는가?
첫째, 나는 하나님께 헌신한다.
둘째,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사람들에 대해 헌신한다.
셋째,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삶의 방식에 대해 헌신한다.
나는 무엇에 대해 헌신하지 않는가?
첫째, 나는 내가 하고자 원하는 일이나 그 일을 이루는 방식 자체에 헌신하지 않는다. 일은 내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둘째, 나는 내가 소유하고자 하는 것에 헌신하지 않는다. 소유에 대한 헌신은 나의 자유를 빼앗고 나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셋째, 나는 내가 자연스럽게 이끌리는 내 욕구에 헌신하지 않는다. 욕구에 대한 헌신은 나의 영혼을 눈멀게 하여 가치에 혼돈을 가져오며 판단을 흐리게 하여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게 하기 때문이다.
bk
첫째, 나는 하나님께 헌신한다.
둘째,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사람들에 대해 헌신한다.
셋째,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삶의 방식에 대해 헌신한다.
나는 무엇에 대해 헌신하지 않는가?
첫째, 나는 내가 하고자 원하는 일이나 그 일을 이루는 방식 자체에 헌신하지 않는다. 일은 내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둘째, 나는 내가 소유하고자 하는 것에 헌신하지 않는다. 소유에 대한 헌신은 나의 자유를 빼앗고 나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셋째, 나는 내가 자연스럽게 이끌리는 내 욕구에 헌신하지 않는다. 욕구에 대한 헌신은 나의 영혼을 눈멀게 하여 가치에 혼돈을 가져오며 판단을 흐리게 하여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게 하기 때문이다.
bk
10.17.2011
공동체 개그
목장은 닭의 밥이야.
왜?
모이지!
왜?
모이지!
목장은 돈(money) 이야.
왜?
모이면 행복하지!
목장은 머리카락이야.
왜?
빠지면 곤란하지!
ㅋㅋㅋ
God Isn't Fair!
A: 완전 불공평해! 이건 내꺼라구. 내가 벌은 거야. 내 피와 땀으로 모은 내 것을 왜 나와 상관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나눠야 하지? 이건 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B: 맞아. 정말 불공평해.
그렇게 세상에 아픈 사람이 많은데도 네가 건강한 것은 불공평해.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80%가 최저 생활비 미만으로 살아가는데도 네가 적지않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불공평해.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는 사람들이 세상에 95% 이상인데 그 나머지 5%에 네가 속해 있다는 것은 정말 불공평해.
이 세상에는 대학근처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 99%인데 네가 대학원까지 공부할 수 있는 행운을 가졌다는 것은 불공평해.
능력있고 정직하며 성실한 수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고도 그 정당한 댓가를 얻지 못하고 묵묵히 이웃과 함게 더불어 살아가려 애쓰는데, 너처럼 이기적이고 자기 배 밖에 채울 줄 모르면서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떠벌이는데 하나님이 너를 벌주시지 않는 다는 건 정말 불공평해.
아니 너 같은 인간멸종을 사랑하신 나머지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희생시키셨다니! 이건 정말 말도 안되는 불공평이야. 하나님은 정말이지 완전 불공평해! 그렇지 않니?
B: 맞아. 정말 불공평해.
그렇게 세상에 아픈 사람이 많은데도 네가 건강한 것은 불공평해.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80%가 최저 생활비 미만으로 살아가는데도 네가 적지않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불공평해.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는 사람들이 세상에 95% 이상인데 그 나머지 5%에 네가 속해 있다는 것은 정말 불공평해.
이 세상에는 대학근처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 99%인데 네가 대학원까지 공부할 수 있는 행운을 가졌다는 것은 불공평해.
능력있고 정직하며 성실한 수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고도 그 정당한 댓가를 얻지 못하고 묵묵히 이웃과 함게 더불어 살아가려 애쓰는데, 너처럼 이기적이고 자기 배 밖에 채울 줄 모르면서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떠벌이는데 하나님이 너를 벌주시지 않는 다는 건 정말 불공평해.
아니 너 같은 인간멸종을 사랑하신 나머지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희생시키셨다니! 이건 정말 말도 안되는 불공평이야. 하나님은 정말이지 완전 불공평해! 그렇지 않니?
소망을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는 것이 현재나의 믿음을 지탱하는 최대의 힘이며, 언제나 눈을 그분에게 고정하고 결코 그분의 옷소매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그러면서 항시 기도하기를 '하느님은 저를 사랑하시는 것을 제가 믿습니다. 저의 현재의 환경도 주님이 주신 것이며, 주님이 보실 때 이것이 저를 위하여 최선이 아니면 허락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제가 주님의 뜻하심과 앞으로의 계획하심을 알 수는 없으나 오직 주님의 사랑만을 믿고 순종하며 찬양하겠습니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감정이 어떠하든, 외부적 환경이 얼마나 가혹하건, 내일의 운명이 어떻게 되건,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시며, 나를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는 소망으로 일관할 결심입니다."
김대중, 옥중서신, 제1신 23
김대중, 옥중서신, 제1신 23
10.16.2011
허무한 삶의 원칙들
번영신학의 메카인 수정교회가 파산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연말이면 다시 들춰 보는 책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스티븐 코비의 책이다.
삶의 의미와 보람을 느끼며 영혼 깊은 만족을 느끼는 대신, 쫓기듯 열심히 살지만 늘 공허와 허무를 느끼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삶의 습관이 있단다. 말하자면 허무한 삶에도 일종의 원칙이 지배한다는 것이다.
1. 늘 상황에 끌려 다니면서 자신을 비하하고 상황을 탓하며 이웃을 원망한다.
2. 뚜렷한 목표 없이 그저 해야 하는 일을 해치운다.
3. 중요한 일보다 급한 일을 먼저 한다.
4. 누가 이기냐 지냐, 비교와 경쟁의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5. 상대를 깊이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내 주장을 관철시키기 급급하다.
6. 스스로 잘하고 있다는 생각에 상대를 신뢰하여 상호 협력할 의지와 능력이 없다.
7. 변화를 두려워 하며 자기 개발에 소극적이다.
탁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지는 7가지 습관들을 뒤집어 놓은 것이긴 하지만 생각할 수록 무릎을 치게 만든다. 상황적인 제약을 극복하고 자기 한계를 뛰어 넘으려면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부분에 시선을 고정하고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 바로 내 자신의 마음가짐과 태도만이 내가 의지적으로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근원적인 영역이다 (잠 4:23).
그러나 바로 인간의 마음이 죄로 오염되어 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것이 모든 자기 개발서들이 가지고 있는 전제의 오류이다. 즉 "내가 내 마음을 원하는 대로 컨트롤 할 수 있다"는 가정이다. 그러나 진정한 자기 개발은 영혼 깊이 물들어 있는 죄와 함께 자아가 죽어버리고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창조의 영에 힘입어 다시 살아나는 끊임없는 회개와 회심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 진다. 이러한 회개와 회심은 "긍정의 힘"과 같은 자기능력에 대한 신뢰를 중단하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선취하시고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시혜하시는 긍휼과 자비에 온 존재를 의탁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 성서의 증언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 진정한 자기 개발은 삼위 하나님을 신뢰하고 신앙하는 믿음을 통한 영적인 재탄생에서 출발한다.
믿음을 통한 회심으로 본격적이고 근원적인 수준에서의 자기 개발이 시작되었더라도 인격과 성품, 그리고 능력의 차원에서 "인간개발"에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일반은총의 법칙들이 여전히 적용된다. 인간 존재의 모든 수준에서 발현되는 끊임없는 창조적 발전은 타락 이전에 이미 인간의 본성으로 심겨진 하나님의 형상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코비가 기여하는 바는 바로 이 부분이다.
일반은총의 인간개발과 성령의 변혁하시는 역동적 활동이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에 대한 관찰이 그래서 중요하다. 나는 로더리안!
bk
연말이면 다시 들춰 보는 책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스티븐 코비의 책이다.
삶의 의미와 보람을 느끼며 영혼 깊은 만족을 느끼는 대신, 쫓기듯 열심히 살지만 늘 공허와 허무를 느끼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삶의 습관이 있단다. 말하자면 허무한 삶에도 일종의 원칙이 지배한다는 것이다.
1. 늘 상황에 끌려 다니면서 자신을 비하하고 상황을 탓하며 이웃을 원망한다.
2. 뚜렷한 목표 없이 그저 해야 하는 일을 해치운다.
3. 중요한 일보다 급한 일을 먼저 한다.
4. 누가 이기냐 지냐, 비교와 경쟁의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5. 상대를 깊이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내 주장을 관철시키기 급급하다.
6. 스스로 잘하고 있다는 생각에 상대를 신뢰하여 상호 협력할 의지와 능력이 없다.
7. 변화를 두려워 하며 자기 개발에 소극적이다.
탁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지는 7가지 습관들을 뒤집어 놓은 것이긴 하지만 생각할 수록 무릎을 치게 만든다. 상황적인 제약을 극복하고 자기 한계를 뛰어 넘으려면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부분에 시선을 고정하고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 바로 내 자신의 마음가짐과 태도만이 내가 의지적으로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근원적인 영역이다 (잠 4:23).
그러나 바로 인간의 마음이 죄로 오염되어 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것이 모든 자기 개발서들이 가지고 있는 전제의 오류이다. 즉 "내가 내 마음을 원하는 대로 컨트롤 할 수 있다"는 가정이다. 그러나 진정한 자기 개발은 영혼 깊이 물들어 있는 죄와 함께 자아가 죽어버리고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창조의 영에 힘입어 다시 살아나는 끊임없는 회개와 회심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 진다. 이러한 회개와 회심은 "긍정의 힘"과 같은 자기능력에 대한 신뢰를 중단하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선취하시고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시혜하시는 긍휼과 자비에 온 존재를 의탁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 성서의 증언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 진정한 자기 개발은 삼위 하나님을 신뢰하고 신앙하는 믿음을 통한 영적인 재탄생에서 출발한다.
믿음을 통한 회심으로 본격적이고 근원적인 수준에서의 자기 개발이 시작되었더라도 인격과 성품, 그리고 능력의 차원에서 "인간개발"에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일반은총의 법칙들이 여전히 적용된다. 인간 존재의 모든 수준에서 발현되는 끊임없는 창조적 발전은 타락 이전에 이미 인간의 본성으로 심겨진 하나님의 형상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코비가 기여하는 바는 바로 이 부분이다.
일반은총의 인간개발과 성령의 변혁하시는 역동적 활동이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에 대한 관찰이 그래서 중요하다. 나는 로더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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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2011
참을 수 없는 개인 비전의 변덕스러움
"When there is genuine vision (as opposed to the all-too-familiar “vision statement”), people excel and learn, not because they are told to, but because they want to. But many leaders have personal visions that never get translated into shared visions that galvanize an organization”
Senge, Peter. 2006. The Fifth Discipline.
-------------------
"국가와 민족은 가치 공동체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익성만 남으면 온갖 이론을 끌어들이는 싸움을 하게 됩니다. 다양한 이익을 하나로 묶기 위해 모든 사람이 합의할 수 있는 시대의 가치를 제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치를 제도화, 정책화 해야 합니다" 박세일 교수
얼마전 보수세력의 재집권을 위해 한 정치 전문가가 내놓은 충고는 교회 공동체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시대를 초월하는 진리를 선포한다고 하면서도 보편가치가 아닌 개인의 감상적인 꿈을 단편적 프로젝트나 프로그램으로 이루려는 조급함과 산만함은 가뜩이나 이질적인 교인들의 종교적 소비성을 부추겨 진정한 예수공동체의 비전을 빛바랜 허울로 전락시키고 교회를 배타적인 종교적 이익집단으로 변질시킨다.
개인에게 의존된 비전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천박한 변덕스러움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공동체성의 핵심인 상호적 신뢰관계를 위협해 진정한 의미에서의 연합과 성장을 의도적으로 훼방한다는 것이다. 목적의 달성을 위해, 상황과 필요에 의해 관계가 희생당하는 조직은 더이상 공동체가 아니다.
예수 공동체의 비전은 절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예수만이 모든 시대를 초월한 영원하고 절대적이며 근원적인 가치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수를 통해서만이 죄인된 인간사이에 희생적 사랑과 섬김의 신뢰관계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며, 이를 바탕으로 진정한 공동체가 가능해 지기 때문이다. 예수 공동체의 비전이 "서로 사랑하여 하나됨" (요17)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 공동체에 주어진 예수의 비전이 사명으로 받아들여지는 대신, 개인의 몽상적 이상이 비전으로 오해되고 관계가 목적이 아닌 도구로 대치된 공동체가 보여주는 특징은 바로 변덕스러움이다. 출렁이는 파도처럼 가변적인 개인들의 욕구와 필요가 "하나님의 꿈"이니 "교회의 마지막 사명"이니 하는 구호로 포장되어 선동되는 것을 하나님은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실까?
공동체의 비전이 참되고 진정한 비전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가지 요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첫째, 공동체의 비전은 공동체원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것을 넘어서 인류의 보편가치에 기반해야 한다. 둘째, 공동체의 비전은 반드시 개인의 비전이 아닌 "공동의 비전"으로 공동체 구성원들이 소유하고 내면화하는 과정을 거처야 한다. 셋째, 공동체의 비전은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체계를 반영하여 공동체의 문화와 구조를 통해 구체적이고 지속적으로 실천, 평가, 재수정의 과정을 거쳐 발전되어야 한다.
정치인을 비판하는 사람들 조차 "가치공동체"를 운운하는 시대에 살아가는데도 정작 교회 공동체는 자신의 변덕스러움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성찰 없이 따듯한 공동체가 되자고, 소그룹에 열심히 참여하자고 캠페인을 벌이며 우스꽝스러운 영상광고를 만드는데에 힘쓰는 것을 보자니 본말전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고 안쓰럽기까지 하다.
bk
3.22.2011
눈먼 최선은 최악을 낳는다.
눈먼 최선은 최악을 낳는다
-박해조
소와 사자가 있었습니다.
둘은 죽도록 사랑합니다.
둘은 혼인해 살게 됩니다.
둘은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합니다.
소가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풀을 날마다
사자에게 대접했습니다.
사자는 싫었지만 참습니다.
사자도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살코기를 날마다
소에게 대접했습니다.
소도 괴로웠지만 참았습니다.
참을성은 한계가 있습니다.
둘은 마주 앉아 얘기합니다.
문제를 잘못 풀어 놓으면
큰 사건이 되고 맙니다.
소와 사자는 다툽니다.
끝내 헤어지고 맙니다.
헤어지며 서로에게 한 말,
"난 최선을 다했어"였습니다.
소가 소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사자가 사자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면
그들의 세상은 혼자 사는 무인도입니다.
소의 세상, 사자의 세상일 뿐입니다.
나 위주로 생각하는 최선-
상대를 못보는 최선-
그 최선은 최선일수록
최악을 낳고 맙니다.
-박해조
소와 사자가 있었습니다.
둘은 죽도록 사랑합니다.
둘은 혼인해 살게 됩니다.
둘은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합니다.
소가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풀을 날마다
사자에게 대접했습니다.
사자는 싫었지만 참습니다.
사자도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살코기를 날마다
소에게 대접했습니다.
소도 괴로웠지만 참았습니다.
참을성은 한계가 있습니다.
둘은 마주 앉아 얘기합니다.
문제를 잘못 풀어 놓으면
큰 사건이 되고 맙니다.
소와 사자는 다툽니다.
끝내 헤어지고 맙니다.
헤어지며 서로에게 한 말,
"난 최선을 다했어"였습니다.
소가 소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사자가 사자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면
그들의 세상은 혼자 사는 무인도입니다.
소의 세상, 사자의 세상일 뿐입니다.
나 위주로 생각하는 최선-
상대를 못보는 최선-
그 최선은 최선일수록
최악을 낳고 맙니다.
---------------------------
관점을 이루는 가정을 비평적으로 평가하여 자신의 관점을 교정하는 일련의 사고방식을 "비평적 사고critical thinking"라 한다. 중요한 점은 공동체, 즉 갈등과 그 너머를 수용할 수 있는 관계가 없이는 비평적 사고는 일어날 수도 그리고 교정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bk
2.19.2011
예수의 운명에 합류함
"그러면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의 사업과 운명에 합류하는 것이라 합니다. 예수와 같이 남을 위해 살고 하느님의 사랑과 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뒤를 따르는 것이라 합니다. 새로운 맹약으로 예수의 제자기 되어 예수의 생활양식을 추종하는 삶 말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십자가의 구원의 참 뜻을 알고 자유와 평화와 사랑과 기쁨과 참 인간성을 맛보게 된다 합니다. 이것이 십가가의 구원입니다."
김대중, 옥중서신 중 21신,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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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과 제자도의 핵심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삶의 한 가운데서 실현해 내는 것이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전 존재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함에 녹아 있으며 이러한 삶을 통해 죄에 뿌리박은 세속적 삶의 방식에 저항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조해 내는 것이다. 바로 그 삶의 방식에 천착할 때에야 인류보편의 궁극적 지향인 샬롬을 경험한다. "예수의 사업과 운명에의 합류"라는 표현이 아득하며 새롭다.
bk
김대중, 옥중서신 중 21신,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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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과 제자도의 핵심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삶의 한 가운데서 실현해 내는 것이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전 존재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함에 녹아 있으며 이러한 삶을 통해 죄에 뿌리박은 세속적 삶의 방식에 저항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조해 내는 것이다. 바로 그 삶의 방식에 천착할 때에야 인류보편의 궁극적 지향인 샬롬을 경험한다. "예수의 사업과 운명에의 합류"라는 표현이 아득하며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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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2011
익숙한 갈등과 낮선 해결책 사이에서
"사람들은 보통 새로운 해결책보다 익숙한 갈등을 더 선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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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2011
성화와 인간발달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신 것은 참으로 창조 당시의 인간의 목적에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함이다. 구원받은 인간은 여전히 잔존하는 죄의 영향을 받는다. 그는 끊임없는 성화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쇄신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참된 신자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신자가 되고자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함이다."
John Owen's Works, The Death of Death in The Death of Christ, 1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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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의 대부인 존 오웬의 인간론은 신학적 또는 창조적 발달주의를 반영한다. 중생과 성화는 하나님의 창조의도를 회복하는 것이며 이것은 순환적 발달주의의한계를 극복하고 목적 지향적인 발달을 가능하게 한다. 하나님의 세계창조의 목적은 인간됨의 최대 발현을 통해 전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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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Owen's Works, The Death of Death in The Death of Christ, 1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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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의 대부인 존 오웬의 인간론은 신학적 또는 창조적 발달주의를 반영한다. 중생과 성화는 하나님의 창조의도를 회복하는 것이며 이것은 순환적 발달주의의한계를 극복하고 목적 지향적인 발달을 가능하게 한다. 하나님의 세계창조의 목적은 인간됨의 최대 발현을 통해 전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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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2011
Evangelical Theology
McDermott, Gerald. 2010. The Oxford Handbook of Evangelical Theology. Oxford University Press.
Part I. Evangelical Theology
1. What is evangelical? / Mark Noll
2. Scripture and hermeneutics / Kevin J. Vanhoozer
3. Faith and reason / W. Jay Wood
4. Faith and experience / Oliver D. Crisp
5. Faith and tradition / Alister E. McGrath
Part II. Theology of Trinity
6. The triune God / Robert Letham
7. Creation / Loren Wilkinson
8. Sin / Henri A.G. Blocher
9. Jesus Christ / John G. Stackhouse, Jr.
10. Holy Spirit / Craig Keener
Part III. Theology of Salvation
11. Israel and salvation / Rikk Watts
12. The gospel / Scot McKnight
13. Conversion and redemption / Gordon T. Smith
14. Justification and atonement / Donald G. Bloesch
15. Discipleship / Dallas Willard
16. Spiritual practices / Simon Chan
17. Eschatology / Trevor Hart
Part IV. Theology of Church
18. Church and sacraments / Ephraim Radner
19. Church and churches : ecumenism / William J. Abraham
20. Worship / John D. Witvliet -- Spiritual gifts / Howard Snyder
21. Mission and evangelism / Michael J. McClymond
Part V. Theology of Mission
22. Other religions / Sung Wook Chung
23. The Bible and ethics / M. Daniel Carroll R. ; Darrell L. Bock
Part VI. Theological Approaches to Contemporary Life
24. Politics / Eric Gregory
25. Economics / John Lunn
26. The arts / Roger Lundin
27. Science / Alister E. McGrath
28. Sexuality / Robert A.J. Gagnon
29. Race / Timothy Tseng
30. The vulnerable : abortion and disability / C. Ben Mitchell --
31. Gender / Cherith Fee Nordling.
1.08.2011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오늘 새벽 답답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갔다.
내 마음에 가득찬 죄의 비열함과 부패의 역겨움
입을 여는 것 조차 두려운 절망
그러나 주님은 찬양을 주셨고, 내 마음을 위로해 주신다.
나의 죄악에 고통하시는 하늘 아빠의 가슴아픔
죄악된 나와 일그러진 세상을 회복하시려는 창조주의 열정
그 말씀하신 바를 결단코 이루시는 전능자의 결심
내 마음은 녹아내렸으며 새로운 책임감과 삶에 대한 의욕이 솟아난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나를 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니
단순한 기쁨이나 만족보다 더 깊은 차원의 갈망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카도쉬!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보소서 주님 나의 마음을 선한 것 하나 없습니다 그러나 내 모든 것 주께 드립니다
사랑으로 안으시고 날 새롭게 하소서 보소서 주님 나의 마음을 선한 것 하나 없습니다
그러나 내 모든 것 주께 드립니다
사랑으로 안으시고 날 새롭게 하소서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내 아버지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내게 사랑을 가르치소서
당신의 마음으로 용서하게 하소서
주의 성령 내게 채우사 주의 길 가게 하소서 주님 당신 마음 주소서
주의 성령 내게 채우사 주의 길 가게 하소서 주님 당신 마음 주소서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내 아버지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님 마음 내게주소서 (x2)
내 마음에 가득찬 죄의 비열함과 부패의 역겨움
입을 여는 것 조차 두려운 절망
그러나 주님은 찬양을 주셨고, 내 마음을 위로해 주신다.
나의 죄악에 고통하시는 하늘 아빠의 가슴아픔
죄악된 나와 일그러진 세상을 회복하시려는 창조주의 열정
그 말씀하신 바를 결단코 이루시는 전능자의 결심
내 마음은 녹아내렸으며 새로운 책임감과 삶에 대한 의욕이 솟아난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나를 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니
단순한 기쁨이나 만족보다 더 깊은 차원의 갈망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카도쉬!
보소서 주님 나의 마음을 선한 것 하나 없습니다
사랑으로 안으시고 날 새롭게 하소서
그러나 내 모든 것 주께 드립니다
사랑으로 안으시고 날 새롭게 하소서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당신의 마음으로 용서하게 하소서
주의 성령 내게 채우사 주의 길 가게 하소서 주님 당신 마음 주소서
주의 성령 내게 채우사 주의 길 가게 하소서 주님 당신 마음 주소서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님 마음 내게주소서 (x2)
1.06.2011
Best Christmas present Ever!
Dear dad,
Merry Christmas!!!
I am very sorry that I don't have much to give you as a gift.
Please forgive me for the things I did.
I love you very much.
I keep doing bad stuff, like hitting your butt, but I am really sorry.
But you kept forgiving me.
Thank you for comforting me when I am sad and blue.
Thank you for helping and cheering me up when I am sick.
It made me feel much better.
I am sad when you are sad.
When you are sick, I am sad.
I pray for you when there is trouble.
You are so caring, nice, kind, funny, silly, handsome, comforting, loving and helpful.
You buy me food, cloths, shelter, and watch after me.
You pray for me when I am in trouble.
I had great time reading the Bible with you.
When I missed the bus you dropped me off.
You changed my blankets and pillows.
You moved me to my bed.
You say good night and give time to read.
You play with us. You are joking and laughing.
You clean after me.
you tell great stories.
I learn from you.
You help me wash.
You check on us in the night.
I don't know a better dad then you.
You are the best dad I know of.
I wouldn't want any other dad but you.
I don't like it when you fight...
You are the best dad ever.
You always encourage me.
You remind me not to give up.
You make me feel brave.
You tell me to be strong and courageous.
I am sorry that I don't have much, but please take this I want to thank you for all of it.
I love you.
Your loving child, C.K.
December 24, 2010
P.S. You taught me a lot. You are a true dad.
Merry Christmas!!!
I am very sorry that I don't have much to give you as a gift.
Please forgive me for the things I did.
I love you very much.
I keep doing bad stuff, like hitting your butt, but I am really sorry.
But you kept forgiving me.
Thank you for comforting me when I am sad and blue.
Thank you for helping and cheering me up when I am sick.
It made me feel much better.
I am sad when you are sad.
When you are sick, I am sad.
I pray for you when there is trouble.
You are so caring, nice, kind, funny, silly, handsome, comforting, loving and helpful.
You buy me food, cloths, shelter, and watch after me.
You pray for me when I am in trouble.
I had great time reading the Bible with you.
When I missed the bus you dropped me off.
You changed my blankets and pillows.
You moved me to my bed.
You say good night and give time to read.
You play with us. You are joking and laughing.
You clean after me.
you tell great stories.
I learn from you.
You help me wash.
You check on us in the night.
I don't know a better dad then you.
You are the best dad I know of.
I wouldn't want any other dad but you.
I don't like it when you fight...
You are the best dad ever.
You always encourage me.
You remind me not to give up.
You make me feel brave.
You tell me to be strong and courageous.
I am sorry that I don't have much, but please take this I want to thank you for all of it.
I love you.
Your loving child, C.K.
December 24, 2010
P.S. You taught me a lot. You are a true dad.
1.04.2011
사람에 대한 신뢰와 발달주의의 한계
They talk about the people, but they do not trust them; and trusting the people is the indispensable precondition for revolutionary change. A real humanist can be identified more by his trust in the people, which engages him in their struggle, than by a thousand actions in their favor without that trust."
Paulo Freire, Pedagogy of the Oppressed, 30th Anniversary Edition, p. 60
의식화(Conscientization) 교육의 창시자인 프레리는 주입적 암기와 반복rote memory을 통해 이루어 지는 은행예금식 학습(Banking education)은 학습자들의 주체적이며 비판적 사고를 근본적으로 제한하고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사고와 표현을 구속함으로서 개인의 인격과 독특성을 파괴하고 기득권이 만들어 놓은 사고체계에 순응하는 종속적이며 타율적인 인간을 양성한다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또한 학습의 실천적이며 공동체적인 특성을 현격히 제한하여 다른 사람들과의 함께 하는 대화와 활동를 거부하여 배움을 고립된 개인의 수행으로서의 "공부"로 축소시켰음을 지적하였다. 그에게 있어서의 교육은 학습자 자신이 문제를 제기하고 (Problem-posing education) 비평적 의식을 스스로 일깨우도록 도움으로 환경과 상황의 압제로 부터 스스로를 해방하고 변혁과 갱신의 주체자로 개발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그의 "빨간책"은 독재자들의 금서목록 1호였으며 동시에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사회 운동가들의 사회과학 필독서 1위였다.
거지에게 많은 돈을 적선하기 보다, 왜 거지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가를 묻고 거지생활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비교할 수 없는 용기와 자기희생, 그리고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이타적 자기 희생의 사랑은 의식화 교육이나 주체화 교육으로 절대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을 남미의 사회적 상황과 공산체제의 붕괴는 여실히 가르쳐 준다.
일반적인 발달주의자들이 갖는 한계는 프레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가장 근본적으로는 인간됨의 이해, 더 구체적으로 인간의 죄성에 대한 이해가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순진하다. 인간은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라는 성서의 가르침은 인간의 궁극적인 개발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필요로 할 만큼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발달주의자들이 갖는 또 다른 한계는 목적과 수단의 혼동을 보인다는 것이다. 궁극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적 목적(또는 이차적 목적)이 궁극적 목적(일차적 목적)을 대치하게 되면 마치 외발자전거를 타는 것 같은 멈출 수 없는 순환논리에 빠져들게 된다. 타르타로스의 언덕에서 끝임없이 굴러 떨어지는 돌을 계속해서 올려대야 했던 시지프스처럼, 성취될 수 없기에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면 그것은 허무의 형벌에 해당하는 것이지 결코 진보와 발전일 수 없다. 사회 구조의 변혁과 갱신은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다. 왜냐햐면 인간의 유한성과 죄성으로 인해, 하나의 변혁과 갱신은 반드시 또 다른 변혁과 갱신을 긴급하게 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치와 존엄, 그리고 인간됨의 최고의 발현으로서의 개발은 "인간됨"이라는 유한하고 상대적 가치에 묶여 있을 때 가장 크게 왜곡되고 제한된다. 모든 발달주의자들이 부르짖는 "인간 개발"은 누구에 의한, 어떤 목적을 가진, 어떤 방식의 개발이냐에 대한 질문에 일관된 원칙과 기준을 제시하기 어렵다. 오히려 인간 존재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궁극적인 지향점을 인간에서 옮겨 무한한 초월적 존재에 위치 시킬 때에라야 가변적이고 순환적인 상대적 가치가 영원하고 절대적 가치로 승화 될 수 있으며 비로서 구조와 방향을 갖춘 진정한 의미로서의 개발이 현실화될 수 있다. 따라서 인간 개발에 있어서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됨의 최고의 발현이 아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어야 하며 이 두가지는 분리되어있지 않고 상호적으로 맞물려 있다.
고독과 허무, 존재적 절망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은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식과 한계때문에 인간의 내적 가능성에서도 찾을 수 없고, 사회 구조적인 변혁과 개혁으로 실현될 수도 없다. 오직 인간의 실존을 뚫고 침입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역동적 역사와 이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실천적 신앙을 통해 부분적으로 경험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모든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창조주의 구원의 완성을 통해 실현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프레리가 주장한 인간 신뢰의 필요성은 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교회 안에서는 인도주의자들 만큼의 사람사랑이 이루어 지기는 커녕, 권위주의적이고 폭압적인 맹신과 맹종의 교육이 다반사로 일어난다는 점에서 그의 해방적 교육은 신앙교육을 평가하고 교정하는데 큰 공헌을 한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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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o Freire, Pedagogy of the Oppressed, 30th Anniversary Edition, p. 60
의식화(Conscientization) 교육의 창시자인 프레리는 주입적 암기와 반복rote memory을 통해 이루어 지는 은행예금식 학습(Banking education)은 학습자들의 주체적이며 비판적 사고를 근본적으로 제한하고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사고와 표현을 구속함으로서 개인의 인격과 독특성을 파괴하고 기득권이 만들어 놓은 사고체계에 순응하는 종속적이며 타율적인 인간을 양성한다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또한 학습의 실천적이며 공동체적인 특성을 현격히 제한하여 다른 사람들과의 함께 하는 대화와 활동를 거부하여 배움을 고립된 개인의 수행으로서의 "공부"로 축소시켰음을 지적하였다. 그에게 있어서의 교육은 학습자 자신이 문제를 제기하고 (Problem-posing education) 비평적 의식을 스스로 일깨우도록 도움으로 환경과 상황의 압제로 부터 스스로를 해방하고 변혁과 갱신의 주체자로 개발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그의 "빨간책"은 독재자들의 금서목록 1호였으며 동시에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사회 운동가들의 사회과학 필독서 1위였다.
거지에게 많은 돈을 적선하기 보다, 왜 거지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가를 묻고 거지생활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비교할 수 없는 용기와 자기희생, 그리고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이타적 자기 희생의 사랑은 의식화 교육이나 주체화 교육으로 절대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을 남미의 사회적 상황과 공산체제의 붕괴는 여실히 가르쳐 준다.
일반적인 발달주의자들이 갖는 한계는 프레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가장 근본적으로는 인간됨의 이해, 더 구체적으로 인간의 죄성에 대한 이해가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순진하다. 인간은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라는 성서의 가르침은 인간의 궁극적인 개발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필요로 할 만큼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발달주의자들이 갖는 또 다른 한계는 목적과 수단의 혼동을 보인다는 것이다. 궁극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적 목적(또는 이차적 목적)이 궁극적 목적(일차적 목적)을 대치하게 되면 마치 외발자전거를 타는 것 같은 멈출 수 없는 순환논리에 빠져들게 된다. 타르타로스의 언덕에서 끝임없이 굴러 떨어지는 돌을 계속해서 올려대야 했던 시지프스처럼, 성취될 수 없기에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면 그것은 허무의 형벌에 해당하는 것이지 결코 진보와 발전일 수 없다. 사회 구조의 변혁과 갱신은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다. 왜냐햐면 인간의 유한성과 죄성으로 인해, 하나의 변혁과 갱신은 반드시 또 다른 변혁과 갱신을 긴급하게 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치와 존엄, 그리고 인간됨의 최고의 발현으로서의 개발은 "인간됨"이라는 유한하고 상대적 가치에 묶여 있을 때 가장 크게 왜곡되고 제한된다. 모든 발달주의자들이 부르짖는 "인간 개발"은 누구에 의한, 어떤 목적을 가진, 어떤 방식의 개발이냐에 대한 질문에 일관된 원칙과 기준을 제시하기 어렵다. 오히려 인간 존재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궁극적인 지향점을 인간에서 옮겨 무한한 초월적 존재에 위치 시킬 때에라야 가변적이고 순환적인 상대적 가치가 영원하고 절대적 가치로 승화 될 수 있으며 비로서 구조와 방향을 갖춘 진정한 의미로서의 개발이 현실화될 수 있다. 따라서 인간 개발에 있어서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됨의 최고의 발현이 아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어야 하며 이 두가지는 분리되어있지 않고 상호적으로 맞물려 있다.
고독과 허무, 존재적 절망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은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식과 한계때문에 인간의 내적 가능성에서도 찾을 수 없고, 사회 구조적인 변혁과 개혁으로 실현될 수도 없다. 오직 인간의 실존을 뚫고 침입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역동적 역사와 이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실천적 신앙을 통해 부분적으로 경험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모든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창조주의 구원의 완성을 통해 실현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프레리가 주장한 인간 신뢰의 필요성은 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교회 안에서는 인도주의자들 만큼의 사람사랑이 이루어 지기는 커녕, 권위주의적이고 폭압적인 맹신과 맹종의 교육이 다반사로 일어난다는 점에서 그의 해방적 교육은 신앙교육을 평가하고 교정하는데 큰 공헌을 한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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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011
진정한 장벽
1947년 10월 14일, 조종사 척 예거 (Chuck Yeager, 1923-)는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알려져 온 음속의 한계를 돌파함으로써 마침내 초음속 비행의 시대를 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저명한 과학자들 중에는 음속의 한계는 결코 깨뜨릴 수 없다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다른 과학자들 역시 마하 1의 속도에서는 조종사와 비행기 모두가 산산 조각날 것이라느니, 혹은 조종사는 목소리를 잃고 나이를 거꾸로 먹으며 또 극심한 충격을 받을 것이라는 등 섬뜩한 예견들을 하던 터였다. 그러나 예거는 그 역사적인 날 조금도 당황함이 없이 벨 항공(Bell-Aviation)의 X-1기에 탑승하여 시속 700마일 (마하 1.06)로 비행하는 데 성공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3주후 마하 1.35로 비행했고, 6년 후에는 다시 시속 1,612마일(마하 2.44)이라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하늘을 날았다. 깨뜨릴 수 없는 장벽에 대한 신화가 무너져 내리는 순간들이었다.
예거는 자서전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비행은 오히려 더 편안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마하를 가리키는 바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늘은 마하 0.965에 도달했고, 곧 속도계의 오른쪽 끝이 기울었다. 나는 마치 환각을 경험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 순간 초음속을 날고 있었다. 하지만 그 느낌은 어린아기의 엉덩이만큼이나 부드러웠다. 그 편안함이라면 나이 든 할머니라도 거기 않아서 레모네이드를 즐길 수 있으리라! 나는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토록 염려하고 그토록 기대했건만, 막상 음속을 돌파하고 나니 오히려 실망스럽게 느껴졌다. 미지의 것이었던 음속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실은 포크로 젤리를 가르는 것처럼, 마치 잘 포장되 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쉬웠다. 그러나 나는 훗날 그때의 임무가 왜 그렇게 실망스럽게 끝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깨달았다. 그건 진정한 장벽은 하늘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초음속 비행에 관한 우리 인간의 지식과 경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티븐 코비, 원칙 중심의 리덥십, 김영사,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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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이웃과 세계를 아름답게 만드는 진보와 개혁을 가로막는 장벽은 외부의 환경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장벽은 인간의 지식과 경험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절대 진리인양 확신해 버리는 내적 교만과 아집, 그리고 두려움이며, 초월적 힘을 간과하고 부러 잊으려 하는 영적 완고함과 둔감함입니다.
내 안에 있는 거대한 장벽을 뛰어 넘으려면 절대 타자에 대한 절대적 의존과 순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훈련함으로 성취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한계와 두려움을 극복하는 힘은 보이지 않는 절대진리에 대한 감정적 확신으로서의 믿음, 하나님 신앙을 기반으로 한 풍부하고 건강한 상상력의 발현으로서의 소망,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시위된 희생적 섬김의 사랑을 연습하고 경험함으로 길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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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거는 자서전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비행은 오히려 더 편안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마하를 가리키는 바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늘은 마하 0.965에 도달했고, 곧 속도계의 오른쪽 끝이 기울었다. 나는 마치 환각을 경험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 순간 초음속을 날고 있었다. 하지만 그 느낌은 어린아기의 엉덩이만큼이나 부드러웠다. 그 편안함이라면 나이 든 할머니라도 거기 않아서 레모네이드를 즐길 수 있으리라! 나는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토록 염려하고 그토록 기대했건만, 막상 음속을 돌파하고 나니 오히려 실망스럽게 느껴졌다. 미지의 것이었던 음속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실은 포크로 젤리를 가르는 것처럼, 마치 잘 포장되 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쉬웠다. 그러나 나는 훗날 그때의 임무가 왜 그렇게 실망스럽게 끝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깨달았다. 그건 진정한 장벽은 하늘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초음속 비행에 관한 우리 인간의 지식과 경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티븐 코비, 원칙 중심의 리덥십, 김영사,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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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이웃과 세계를 아름답게 만드는 진보와 개혁을 가로막는 장벽은 외부의 환경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장벽은 인간의 지식과 경험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절대 진리인양 확신해 버리는 내적 교만과 아집, 그리고 두려움이며, 초월적 힘을 간과하고 부러 잊으려 하는 영적 완고함과 둔감함입니다.
내 안에 있는 거대한 장벽을 뛰어 넘으려면 절대 타자에 대한 절대적 의존과 순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훈련함으로 성취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한계와 두려움을 극복하는 힘은 보이지 않는 절대진리에 대한 감정적 확신으로서의 믿음, 하나님 신앙을 기반으로 한 풍부하고 건강한 상상력의 발현으로서의 소망,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시위된 희생적 섬김의 사랑을 연습하고 경험함으로 길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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