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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0.2010

기억과 망각

내셔널 지오그래픽

글 : 조슈아 포어____사진 : 매기 스티버


무엇이든 줄줄 외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의 뇌는 어떻게 기억하고 망각하는가?

사무원으로 일하는 41세 여성이 있다. 의학 연구 자료에서 'AJ'로 언급되는 이 여성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 출신으로 11세 이후 삶의 하루하루를 거의 빠짐없이 기억한다. 한편 실험실 연구원으로 일하다 은퇴한 85세 남성인 'EP'는 방금 전 일만 기억한다. AJ의 기억력을 세계 최고로, EP의 기억력을 최악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내게 과거는 상영 중인 영화 같아요. 멈출 수도, 통제할 수도 없어요." AJ는 말한다. 그녀는 1986년 8월 3일 일요일 오후 12시 34분, 짝사랑하던 청년에게 전화가 왔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1988년 12월 12일 방영된 TV 쇼 '머피 브라운'의 내용도 기억한다. 1992년 3월 28일 베벌리힐스호텔에서 아버지와 점심을 먹었던 것도 기억한다.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사건들, 장보러 간 일, 날씨, 그날그날 기분도 기억한다. 매일매일이 훤하다. 어떤 걸 물어봐도 거침없이 대답한다.
손으로 꼽을 정도긴 하지만 비범한 기억력의 소유자들은 종종 있었다. 영화 '레인맨'의 실제 모델인 천재 킴 픽(56)은 1만 2000권에 달하는 책을 외운다고 한다(한 쪽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은 8~10초). 러시아 신경심리학자 알렉산더 루리아가 30년 동안 연구했던 러시아 저널리스트 'S'는 엄청나게 긴 단어나 숫자, 의미 없는 음절들을 한 번 들으면 몇 년이 지난 뒤에도 기억해냈다. 하지만 AJ는 특이하다. 그녀의 비상한 기억력은 사실이나 숫자가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외우고 있다. 이처럼 고갈되지 않는 기억력으로 자신이 겪은 일을 세세한 것까지 기억하는 일은 유례가 없는 데다 학계에서 규명된 것도 거의 없다. AJ를 7년 동안 연구해온 캘리포니아대학교 어바인캠퍼스의 신경과학자 제임스 맥거프, 엘리자베스 파커, 래리 케이힐은 AJ의 상태를 설명하는 새로운 의학 용어를 만들어야 했다. 바로 '과잉기억 증후군'이다.

 키 180cm인 EP는 단정하게 가르마 탄 백발에 귀가 유난히 길다. 다정다감하고 정중하며 잘 웃는다. 첫인상은 마음씨 좋은 옆집 할아버지 같다. 그러나 15년 전, 단순포진 바이러스가 벌레가 사과를 갉아먹듯 뇌 중앙까지 파먹어 들어갔다. 바이러스가 활동을 마치자 양쪽 내측두엽에 호두알만 한 구멍이 생겼고 EP의 기억도 대부분 사라졌다. 공교롭게도 바이러스는 결정적인 부위를 정확히 공격했다. 뇌 양쪽에 있는 내측두엽엔 지각을 장기기억으로 변환시키는 '해마'라는 고부라진 기관과 주변 영역이 자리하고 있다. 사실 기억이 저장되는 곳은 해마가 아니다. 기억은 쭈글쭈글한 뇌 외피층인 신피질에 저장된다. 하지만 해마는 기억을 붙잡아놓는 역할을 담당하는 뇌조직 중 하나다. 해마가 손상된 EP의 뇌는 마치 헤드가 고장난 캠코더와 비슷하다. 보기는 하되 기록할 수 없는 것이다.

EP는 순행성과 역행성, 두 종류 기억상실증을 동시에 앓고 있다. 순행성 기억상실증은 새로 습득한 정보를 기억으로 전환시키지 못하며 역행성 기억상실증은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따라서 EP는 새로운 기억을 만들 수 없을 뿐 아니라 1960년 이후의 과거 역시 기억하지 못한다. EP는 어린시절과 상선선원 시절, 제2차 세계대전은 모두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서 휘발유 가격은 아직도 리터당 25센트며 달 착륙은 일어난 적이 없다.

AJ와 EP는 기억력의 양 극단을 보여준다. 또한 두 사람의 사례는 기억력이 그 사람의 정체성까지 좌우할 수 있음을 어떤 뇌 영상보다 더 생생하게 보여준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양 극단 사이에서 왔다갔다한다. 유난히 기억이 잘 날 때는 내가 AJ처럼 천재가 아닐까 착각하거나, 혹시 EP처럼 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본 경험이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척추 꼭대기에 달랑 얹혀 있는 약 1.3kg의 주름 투성이 살덩이는 어린시절의 사소한 일도 평생 저장하는가 하면 아주 중요한 전화번호를 2분도 안 돼 잊어버리기도 한다. 기억이란 이처럼 묘한 것이다.
기억의 정체는 뭘까? 현재 신경과학자들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정의는 뉴런 사이의 일정한 연결 패턴이 저장된 것이 기억이다. 뇌에는 약 1000억 개의 뉴런이 있고, 각각의 뉴런은 5000~1만 개의 시냅스를 형성할 수 있다. 따라서 보통 성인의 뇌에는 총 500~1000조의 시냅스가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미국 의회도서관 장서에 있는 정보를 다 모아도 약 32조 바이트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양이다. 우리가 어떤 기분을 떠올리거나 어떤 걸 생각할 때마다 이 방대한 네트워크의 연결 패턴에 변화가 일어난다. 시냅스는 더 공고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하며 새로 형성되기도 한다. 우리 몸의 조직은 변하고 있다. 항상, 매 순간, 심지어 잠든 사이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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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 그 때가 지금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1.7.12) 어거스틴의 고백록

기억이 나지 않으면, 잊혀지면 현재의 나와는 상관 없는 것이 되는 것일까? 지나간 과거들이 나는 빨리 잊혀진다. 좋은 기억들 뿐 아니라 나쁜 기억들도, 그리고 내가 애쓰고 힘써 배웠던 것들도, 심지어는 잊지 말자고 다짐했던 것들조차 다 망각의 방으로 자취를 감춰 버린다. 기억할 수 없다면 현재에 통합할 자료를 잊어 버린다. 기억이 없다면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면 적용할 수 없으며, 적용이 안되면 분석도 평가도 그리고 새로운 창조도 가능하지 않다.

정말 무서운 것은 기억이 정체성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롱텀메모리에 남겨진 것들만이 나의 자아를 형성하고 내 가치관을 세운다.그런데 나는 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 숫자를 기억하는 것 뿐 아니라 있었던 일 들과 그 의미까지 쉽게 잊는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했갈리나 보다.

한편, 왜곡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은 기억을 잘 못하는 것 보다 더욱 위험하다. 메멘토의 레너드는 10분 이상 기억을 지속하지 못하는 휘발성 메모리를 가졌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문제는 짧은 기억력이 아니라 왜곡된 기억이었다.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은 두뇌학에서는 무엇이라고 할까? 기억력과 뇌의 기능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어떻게 기억력을 향상시킬 수 있을까? 기억력은 향상되는 것일까? 기억과 신앙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기억과 인간의 성숙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데이빗 수사의 책을 좀 살펴 보아야 겠다.
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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