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s

5.02.2009

유앙겔리온Euangelion

"복음"을 깊이 이해를 하려면 로마제국을 이해해야 한다. 원래 "Euangelion복음"이라는 단어는 로마제국의 통합을 위해 로마가 추구하던 정치, 군사, 문화의 저변에 깔려있는 가치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이 추구하던 힘의 "유앙겔리온"을 차용해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의 "유앙겔리온"(막 1:1)을 선포하였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나사렛에서 살다가 처형당한 예수가 다시 부활하고 하늘로 올라갔으며 이 세상을 완전하게 회복하기 위해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러한 주장, 즉 한 인간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 살다가 죽고 하늘로 올라갔다가 다시 올 것이라는 이야기들은 1세기를 살았던 로마제국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신화적 이야기가 아니라도 로마의 황제들은 스스로를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죽은 후 다시 하늘로 올라가 세상을 다스리는 쿠리오스, 즉 주Lord 라고 선언했다. 사람들은 시장agora에서 만날 때 마다, "시저가 주님이시다"라고 인사를 나누어야 했다. 정복지의 피식민지들은 역시 시저가 세상의 유일한 주님이심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 주님을 예배해야만 했다. 시저 이외에 다른 대상을 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위험천만한 행동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예수의 부활과 재림에 대한 경험과 믿음은 강력한 로마제국의 체제와 정신문화를 뒤집어 놓았다. 소수의 변두리 사람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이 아름다운 세상의 고통과 절망, 깊은 아픔을 온 몸으로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가난하고 소외당하고 억압당하고 배고프며 상처받아 고통당하는 자들은 예수에게 소망을 걸었다. 예수의 생전에 그들이 가지고 있던 소망은 로마 문화에 바탕을 둔 소망이었다. 강력한 군사력, 정교한 법률을 바탕으로 한 고도의 정치력, 높은 교육과 세련된 문화 예술의 힘으로 로마는 영국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활한 세상을 정복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가 보여준 기적과 이사, 지혜와 용기를 경험하면서 만약 이스라엘이 예수를 중심으로 뭉치기만 한다면 로마의 힘에 대항해 볼 만 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으로 모든 기대와 소망은 산산조각났다. 로마와 대항할 수 있다고 믿었던 "로마적 힘"을 예수가 스스로 거부하고 허무하게 스러진 것이었다. "십자가에서 너를 구원하고 내려와라"고 소리질렀던 사람들의 외침은 "더 강력한 로마적 힘"에 대한 갈망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절규였던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다. 군중은 흩어졌고 예수의 제자들 마저 뿔뿔이 귀향한 터였다.

끝내 예수를 잊지 못했던 것은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진정으로 예수를 사랑했다. "힘"의 그림자 조차 사라저 버린 싸늘한 시체라도 쓰다듬지 않고 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그들은 예수를 사랑했다. 안식일이 지난 첫 새벽 미명에 그 여자들은 전혀 새로운 예수를 만났다. 새로운 예수는 이전의 예수가 아니었다. 그는 더이상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여전히 먹고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만질 수 있었지만 그는 감각의 세계를 초월하여 존재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증거한 모든 증거가 참된 진리임이 드러났으며 따라서 그가 진정한 인간이며 동시에 진정한 "신"이라는 사실이 확증되었다.
도대체 전능한 하나님이 연약한 인간들에게 무슨 볼일이 있단 말인가! 여전히 이스라엘의 "나라"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 (행1:3). 예수는 이 온 우주가 하나님의 나라이며 이미 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회복되기 시작되었음을 경험적으로 증거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선포하였다. 전혀 새로운 나라,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 하나님의 영이 주도하는 나라, 그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 우리에게 시작되었다! 이것이아니면 무엇이 "유앙겔리온"이겠는가?

예수를 경험한 증인들은 이 세상의 회복이 정치권력이나 군사적 힘, 조직화된 법률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온 몸으로, 삶으로 증언하였다. 로마인들은 조간 신문이나 텔레비젼에서 들려오는 로마의 번영, 이를 테면 영토의 확장이나 군사력의 증강, 또는 피식민자들이 제공하는 특산물의 유입등을 "유앙겔리온" 좋은 소식으로 생각하고 환영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증인들은 그로마식 유앙겔리온에 대항해 전혀 다른 차원의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당신을 위해 나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나셔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주린 자들에게 기름진 잔치가 배설되었다. 수치로 그늘진 자들에게 긍지와 자부심이 생겼다. 노예에게는 해방이 선포되었으며 감옥에 수감되었던 자들에게는 사면선언이 내려졌다. 공동체에서 따돌림을 당했던 외톨이들에게는 저명한 친구들이 생겼다. 죄책감과 열등감에 괴로워 하던 사람들에게 인정과 격려의 박수와 환호가 주어졌다. 안정감과 자신감이 솟아 올랐다. 비난과 정죄로 오염된 언어에 칭찬과 감사의 샘이 터졌다. 가난한 자들과 부요한 자들이 한 상에서 즐겁게 애찬을 나눴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후투와 투치가, 영국인과 프랑스인이, 일본인과 한국인이, 북미인디안과 백인이, 미국인과 이라크인이, 독일인과 폴란드인이, 세르비아인들과 알바니아인들이, 인도네시아 인들과 동티모르인이, 수십년, 수백년을 미움과 혐오로 원수가 되어버린 도저히 상종할 수 없는 사람들이 서로 형제와 자매가 되었다.
로마인들은 이러한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들의 대답은 "유앙겔리온"이었다. 로마인들은 노예와 주인이, 귀족과 하층민이, 부자와 거지가, 고매한 학자와 불학무식한 자가, 여자와 남자가, 유대인과 헬라인이 도덕적으로 불량한 자들과 인격적으로 훈련된 자들이 언어와 인종과 빈부와 학식과 정치적 이념과 삶의 방식과 문화를 뛰어 넘어 한 공동체를 이루어 유앙겔리온을 증거하는 이 특수한 집단의 사람들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혼동스러웠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할 수 없이 새로운 "유앙겔리온"을 증거하는 이 사람들을 "크리스티아노스Kristianos-그리스도인들" 이라고 불렀다 (행 11:27).

상처받고, 외면당하고, 죄 짓고, 더럽고, 교활하며, 폭력적이고, 사기치며, 거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신 예수는 나를 변화시켜 이 복음의 경험자로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나눌 것을 명령하신다. 나누면 나눌 수록, 경험하면 경험할 수록 더 풍성하게 채워질 것이다. 복음을 예수 믿고 교회 출석하고 죽어 천당가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해변 유양지에서 유람선을 타고 즐기는 휴가를 생각하며 "놀러 가자"라고 말 한 아버지의 "놀이"를 골목에서 코흘리게들과 딱지치기 하는 수준의 놀이로 심각하게 오해한 아이들의 생각과 같을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 아버지의 것이며 이 사실위에 (안에, 통해) 살아간다는 것이 유앙겔리온이다.
bk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