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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2009

무위

是以聖人處無爲之事,行不言之敎
시이성인처무위지사,행불언지교'

그러기에, 성인은 일을 함에 있어서 꾸미지 아니하며, 말없이 행동으로 가르친다.

노자-도덕경 2장 중

노자에게 있어 "위"는 자연의 부정이다. 자연스러움, 있는 그대로를 거부하는 것이다. 모든 거짓과 꾸밈은 진실을 구렁텅이에 처 넣고 실체를 납치해 버린다. "위"가 판 치는 곳에서 진리는 실종되고 자유는 무저갱 속에 같혀 버린다. 자기의식의 거울마저 뿌옇게 바래버린 차가운 양심은 찬란한 진리의 빛을 피해 어두움의 거리를 헤매이게 된다.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추함을 위장하고 나면 추함이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아름다움을 상실해 버린다. 선하게 보이기 위해 악함을 덮어 버리면 정작 드러나는 것은 선이 아니라 악함을 위장하는 더 깊은 수준의 악이다. 자연스러운 나, 진정한 나를 거부할 때 나는 나를 잊어 버린다. 진정한 나를 인정할 수 없을 때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자유를 상실하게 된다. 선한 척, 좋은 척, 잘 난 척, 예쁜 척, 똑똑한 척, 진실한 척, 척할 줄 모르는 척...
"위"가 부가된 모든 실체는 공동묘지를 떠다니는 혼령처럼 불안과 혼동과 망각과 냉담한 무관심으로 서서히 스스로의 영혼을 파괴한다. 마스크속에 감춰진 영혼은 텅 비어있고 철장에 갖혀진 양심은 바위처럼 단단해 졌으며 뜨거웠던 열정은 축축한 잿더미가 되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출 수가 없고 곡을 해도 슬퍼할 수가 없다. 무엇이 슬픈지, 무엇이 기쁜지를 잊었기 때문이다.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 저주받은 영혼! 화 있을 진저!
아이들의 특징은 꾸밈이 없다는 것이다. "무위" 그것이 아이들의 위대함이다. "내 동생이 없어졌으면 좋겠어!" 라고 소리치는 꼬마의 언어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한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으면 좋겠다던 동생과 진정으로 행복하게 놀 수 있다.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웃고 조금만 힘들어도 울음을 터뜨린다. 누구와도 친구가 되고 또 금방 원수도 되지만 다시 친구가 되는데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아이들은 만들어진 말, 꾸며지고 포장되고 숨겨진 말을 하지 않는다. 아,니 아직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아이들의 행동을 보면 마음도 알 수 있다.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을 살아갈 수 없다는 예수의 말씀은 노자의 깨달음과도 통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무위," 그저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이 선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어린아이와 같음에는 "순수함"과 함께 "의존성"이라는 중요한 가치가 동시에 요구된다. 자연스러움 그 자체는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 자체가 선한 것이 아니며 더더군다나 목적이 될 수도 없다. 무위는 선을 위한 전제이지 선 그 자체가 아니다. 무위는 위장된 악을 폭로하여 선으로 향하게 하는 문을 열 뿐, 선이 아니라는 점에서 노자는 무위를 선으로 동일시함으로 필요한 수단과 과정을 목적 그 자체와 혼동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이기심, 질투, 분노, 빈곤, 조급함, 어리석음, 약함이 자연 스럽게 드러난다고 해서 "선"이 될 수는 없다. 아무리 자연스러워도 악은 악이며 악은 선의 부정이지 선의 전제가 아니다. 노자의 한계의 중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린아이와 같음"은 보호자의 보호와 인도를 겸허히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의존성에서 완성된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처럼 어린아이는 부모의 사랑과 보호와 인도를 통해 성장하고 성숙해 간다. 자신의 본능적 욕구나 환경에 종속되어 악의 부패성과 은폐성을 "무위"라는 허울에 감추려는 강력한 위의 죄성을 용기있게 폭로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되지 않는다. 오직 수치와 모욕으로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의 고통의 이유와 목적을 이해하고 부활의 새벽 미명에 죽음을 이기시고 사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 그의 사랑앞에 존재를 맡기는 결단과 선포가 있을 때에야 가능하다.
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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