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을 춤추게 하라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해 보면서 상상력을 춤추게 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정신신체의학자들은 심리적 원인에서 시작된 질병은 거의 항상 상징기능의 장애와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상징기능의 장애란 자신의 인생을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는 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상징기능의 장애는 현실을 변화시키거나 그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 꿈을 이용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 기 코르노의《마음의 치유》 중에서 -
* 사람이 현실을 떠나 살 수 없습니다.그러나 현실에만 묻히거나 갇혀 있으면 안됩니다.현실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며 새로운 상상력을 춤추게 하고, 그 상상력이 현실이 되는 경험을 자꾸자꾸 해야 합니다.상상력은 영혼이 살아있음을 드러내는 증표입니다.나이가 젊을수록 상상력이 춤을 추어야 영혼이 아름답게 자라납니다.
-고도원 편지중-
5.29.2009
5.23.2009
앎은 사건이다
"Knowing-generally and convictionally-is first, foremost, and fundamentally an event."
James E. Loder, Transforming Moment, p.33
앎은 사건이다. 존재와 존재가 만나는 존재가 변화되는 사건이다.
James E. Loder, Transforming Moment, p.33
앎은 사건이다. 존재와 존재가 만나는 존재가 변화되는 사건이다.
5.19.2009
저주를 통해 도달하는 직업
"Theologians are not made by reading and studying books but by living and dying and being damned."
Martin Luther
신학자들은 서적을 읽고 연구하는 것을 통해 만들어 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살고 또 죽으며 저주받음을 통해 만들어 집니다.
-마틴 루터-
십자가의 신학을 주창한 마틴루터 다운 말이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 그분의 진리에 노출되는 것은 추상적 관념의 사색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삶의 한 복판에서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게 되는" 역설을 온 몸으로 체득하고,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나를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를 쫓아 순교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그러니 이것이 어떻게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하단 말인가? Sola Gracia는 그렇게 죽음과 저주를 기쁨으로 수용하는 자들을 가능하게 하고 또한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만 확증된다. 그러니 신학자라고 함부로 말할 일이 아니다.
bk
Martin Luther
신학자들은 서적을 읽고 연구하는 것을 통해 만들어 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살고 또 죽으며 저주받음을 통해 만들어 집니다.
-마틴 루터-
십자가의 신학을 주창한 마틴루터 다운 말이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 그분의 진리에 노출되는 것은 추상적 관념의 사색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삶의 한 복판에서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게 되는" 역설을 온 몸으로 체득하고,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나를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를 쫓아 순교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그러니 이것이 어떻게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하단 말인가? Sola Gracia는 그렇게 죽음과 저주를 기쁨으로 수용하는 자들을 가능하게 하고 또한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만 확증된다. 그러니 신학자라고 함부로 말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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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2009
진리는 사랑이다
"참 사랑은 리얼리즘realism이다...인간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한계성을 두려워하지 말고 똑바르게 정직하게 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만 된다...참된 진리를 찾아가는 자가 노력해야 될 것은 자기중심적인 거짓 자기를 부수고 진정한 참자기를 발견해 내는 일이다...진실은 항상 사랑과 함께 있어야 하고 사랑은 항상 진실과 함께 있어야 한다."
강원용 (1917-2006), 중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19.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1b-32) 이 말씀은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진리를 아는 것"은 어차피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진리를 알 수 있는 능력과 의도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성은 참된 진리를 거부하는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 진리를 혐오한다. 참된 진리는 인간의 부패와 죄악을 밝히 드러 내기 때문이다. 성경은 "변하지 않는 영원하며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절대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며 성령을 통해 알려지는 하나님" 이심을 증거한다. 이 전제를 수용하려면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이 믿음을 거부하고 진리의 타자성을 무시하며 진리의 인격성을 멸시한다. 그래서 근대적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절대화 하여 유한하며 제한적인 이성의 두레박으로 망망한 진리의 바다를 재려는 우매함에 빠져 버렸다. 그래서 이러한 과학적 인간들은 진리를 자신의 사고와 이해의 한계라는 철장에 가두어 놓음으로서 고독과 소외, 허무라는 진창속에 스스로를 투신하고 말았다.
또 다른 극단의 부류들은 과학적 인간들의 이성주의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고 신앙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과학제일주의의 맹주인 절대이성을 타도하기 위해 신앙제일주의자들이 선택한 주인은 바로 도그마였다. 그러나 건강한 이성의 사용과 자기반성을 거부한 맹목적이며 자기 중심적인 신앙주의는 절대이성의 왕좌위에 도그마적 신앙을 올려 놓아 경배의 대상을 바꾸었을 뿐, 절대 진리의 무한성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따듯한 인격으로서의 진리를 삶속에 실천하기를 거부하며 자신의 한계와 유한성을 철저히 부인한다는 점에서는 그토록 적대시했던 과학주의와 한 패였다.
참된 "진리를 앎"은 절대타자, 절대진리, 절대자의 존재를 긍정하고 믿음으로 수용하며 이성적 이해의 한계를 알면서도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하려는 신앙을 요구한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를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으로 불렀다. 신앙은 참된 진리에 자신의 이성과 경험과 의지를 내려놓는 겸손한 삶의 태도이며 세상의 모든 것을 진실로 사랑하는 용기있는 행동이다. 그래서 모든 진리는 이러한 삶을 명징하게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에게 귀착된다. 예수는 진리이고 예수는 사랑이다. 그래서 진리는 사랑이며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진리를 아는 유일한 길이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하며 사랑은 리얼리즘이라는 강원용 목사님의 말씀은 이런 점에서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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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용 (1917-2006), 중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19.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1b-32) 이 말씀은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진리를 아는 것"은 어차피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진리를 알 수 있는 능력과 의도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성은 참된 진리를 거부하는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 진리를 혐오한다. 참된 진리는 인간의 부패와 죄악을 밝히 드러 내기 때문이다. 성경은 "변하지 않는 영원하며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절대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며 성령을 통해 알려지는 하나님" 이심을 증거한다. 이 전제를 수용하려면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이 믿음을 거부하고 진리의 타자성을 무시하며 진리의 인격성을 멸시한다. 그래서 근대적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절대화 하여 유한하며 제한적인 이성의 두레박으로 망망한 진리의 바다를 재려는 우매함에 빠져 버렸다. 그래서 이러한 과학적 인간들은 진리를 자신의 사고와 이해의 한계라는 철장에 가두어 놓음으로서 고독과 소외, 허무라는 진창속에 스스로를 투신하고 말았다.
또 다른 극단의 부류들은 과학적 인간들의 이성주의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고 신앙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과학제일주의의 맹주인 절대이성을 타도하기 위해 신앙제일주의자들이 선택한 주인은 바로 도그마였다. 그러나 건강한 이성의 사용과 자기반성을 거부한 맹목적이며 자기 중심적인 신앙주의는 절대이성의 왕좌위에 도그마적 신앙을 올려 놓아 경배의 대상을 바꾸었을 뿐, 절대 진리의 무한성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따듯한 인격으로서의 진리를 삶속에 실천하기를 거부하며 자신의 한계와 유한성을 철저히 부인한다는 점에서는 그토록 적대시했던 과학주의와 한 패였다.
참된 "진리를 앎"은 절대타자, 절대진리, 절대자의 존재를 긍정하고 믿음으로 수용하며 이성적 이해의 한계를 알면서도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하려는 신앙을 요구한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를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으로 불렀다. 신앙은 참된 진리에 자신의 이성과 경험과 의지를 내려놓는 겸손한 삶의 태도이며 세상의 모든 것을 진실로 사랑하는 용기있는 행동이다. 그래서 모든 진리는 이러한 삶을 명징하게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에게 귀착된다. 예수는 진리이고 예수는 사랑이다. 그래서 진리는 사랑이며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진리를 아는 유일한 길이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하며 사랑은 리얼리즘이라는 강원용 목사님의 말씀은 이런 점에서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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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2009
마음이 가난한 자
오늘 다시 최춘선 할아버지를 찾아 뵈었다. "마음이 가난한 자"로 산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정말 천국을 소유하는 행복한 삶일까를 묻고 싶어서였다.
할아버지께서 환한 얼굴로 대답해 주셨다.
"내가 스물 두살 부터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여기까지 살았어요. 그동안 얼마나 불충성, 불순종을 많이 했는지...진짜 죄인중의 괴수인데 하나님의 자비가 한량이 없어서 붙들어 주시니까 날마다 감사와 기쁨으로 승리합니다."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예수가 누구인지 아직도 잘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절대 자비가 필요하다.
할아버지께서 환한 얼굴로 대답해 주셨다.
"내가 스물 두살 부터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여기까지 살았어요. 그동안 얼마나 불충성, 불순종을 많이 했는지...진짜 죄인중의 괴수인데 하나님의 자비가 한량이 없어서 붙들어 주시니까 날마다 감사와 기쁨으로 승리합니다."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예수가 누구인지 아직도 잘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절대 자비가 필요하다.
5.06.2009
무위
是以聖人處無爲之事,行不言之敎
시이성인처무위지사,행불언지교'
그러기에, 성인은 일을 함에 있어서 꾸미지 아니하며, 말없이 행동으로 가르친다.
노자-도덕경 2장 중
시이성인처무위지사,행불언지교'
그러기에, 성인은 일을 함에 있어서 꾸미지 아니하며, 말없이 행동으로 가르친다.
노자-도덕경 2장 중
노자에게 있어 "위"는 자연의 부정이다. 자연스러움, 있는 그대로를 거부하는 것이다. 모든 거짓과 꾸밈은 진실을 구렁텅이에 처 넣고 실체를 납치해 버린다. "위"가 판 치는 곳에서 진리는 실종되고 자유는 무저갱 속에 같혀 버린다. 자기의식의 거울마저 뿌옇게 바래버린 차가운 양심은 찬란한 진리의 빛을 피해 어두움의 거리를 헤매이게 된다.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추함을 위장하고 나면 추함이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아름다움을 상실해 버린다. 선하게 보이기 위해 악함을 덮어 버리면 정작 드러나는 것은 선이 아니라 악함을 위장하는 더 깊은 수준의 악이다. 자연스러운 나, 진정한 나를 거부할 때 나는 나를 잊어 버린다. 진정한 나를 인정할 수 없을 때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자유를 상실하게 된다. 선한 척, 좋은 척, 잘 난 척, 예쁜 척, 똑똑한 척, 진실한 척, 척할 줄 모르는 척...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추함을 위장하고 나면 추함이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아름다움을 상실해 버린다. 선하게 보이기 위해 악함을 덮어 버리면 정작 드러나는 것은 선이 아니라 악함을 위장하는 더 깊은 수준의 악이다. 자연스러운 나, 진정한 나를 거부할 때 나는 나를 잊어 버린다. 진정한 나를 인정할 수 없을 때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자유를 상실하게 된다. 선한 척, 좋은 척, 잘 난 척, 예쁜 척, 똑똑한 척, 진실한 척, 척할 줄 모르는 척...
"위"가 부가된 모든 실체는 공동묘지를 떠다니는 혼령처럼 불안과 혼동과 망각과 냉담한 무관심으로 서서히 스스로의 영혼을 파괴한다. 마스크속에 감춰진 영혼은 텅 비어있고 철장에 갖혀진 양심은 바위처럼 단단해 졌으며 뜨거웠던 열정은 축축한 잿더미가 되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출 수가 없고 곡을 해도 슬퍼할 수가 없다. 무엇이 슬픈지, 무엇이 기쁜지를 잊었기 때문이다.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 저주받은 영혼! 화 있을 진저!
아이들의 특징은 꾸밈이 없다는 것이다. "무위" 그것이 아이들의 위대함이다. "내 동생이 없어졌으면 좋겠어!" 라고 소리치는 꼬마의 언어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한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으면 좋겠다던 동생과 진정으로 행복하게 놀 수 있다.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웃고 조금만 힘들어도 울음을 터뜨린다. 누구와도 친구가 되고 또 금방 원수도 되지만 다시 친구가 되는데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아이들은 만들어진 말, 꾸며지고 포장되고 숨겨진 말을 하지 않는다. 아,니 아직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아이들의 행동을 보면 마음도 알 수 있다.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을 살아갈 수 없다는 예수의 말씀은 노자의 깨달음과도 통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무위," 그저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이 선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어린아이와 같음에는 "순수함"과 함께 "의존성"이라는 중요한 가치가 동시에 요구된다. 자연스러움 그 자체는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 자체가 선한 것이 아니며 더더군다나 목적이 될 수도 없다. 무위는 선을 위한 전제이지 선 그 자체가 아니다. 무위는 위장된 악을 폭로하여 선으로 향하게 하는 문을 열 뿐, 선이 아니라는 점에서 노자는 무위를 선으로 동일시함으로 필요한 수단과 과정을 목적 그 자체와 혼동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이기심, 질투, 분노, 빈곤, 조급함, 어리석음, 약함이 자연 스럽게 드러난다고 해서 "선"이 될 수는 없다. 아무리 자연스러워도 악은 악이며 악은 선의 부정이지 선의 전제가 아니다. 노자의 한계의 중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린아이와 같음"은 보호자의 보호와 인도를 겸허히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의존성에서 완성된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처럼 어린아이는 부모의 사랑과 보호와 인도를 통해 성장하고 성숙해 간다. 자신의 본능적 욕구나 환경에 종속되어 악의 부패성과 은폐성을 "무위"라는 허울에 감추려는 강력한 위의 죄성을 용기있게 폭로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되지 않는다. 오직 수치와 모욕으로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의 고통의 이유와 목적을 이해하고 부활의 새벽 미명에 죽음을 이기시고 사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 그의 사랑앞에 존재를 맡기는 결단과 선포가 있을 때에야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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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2.2009
유앙겔리온Euangelion
"복음"을 깊이 이해를 하려면 로마제국을 이해해야 한다. 원래 "Euangelion복음"이라는 단어는 로마제국의 통합을 위해 로마가 추구하던 정치, 군사, 문화의 저변에 깔려있는 가치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이 추구하던 힘의 "유앙겔리온"을 차용해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의 "유앙겔리온"(막 1:1)을 선포하였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나사렛에서 살다가 처형당한 예수가 다시 부활하고 하늘로 올라갔으며 이 세상을 완전하게 회복하기 위해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러한 주장, 즉 한 인간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 살다가 죽고 하늘로 올라갔다가 다시 올 것이라는 이야기들은 1세기를 살았던 로마제국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신화적 이야기가 아니라도 로마의 황제들은 스스로를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죽은 후 다시 하늘로 올라가 세상을 다스리는 쿠리오스, 즉 주Lord 라고 선언했다. 사람들은 시장agora에서 만날 때 마다, "시저가 주님이시다"라고 인사를 나누어야 했다. 정복지의 피식민지들은 역시 시저가 세상의 유일한 주님이심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 주님을 예배해야만 했다. 시저 이외에 다른 대상을 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위험천만한 행동일 수 밖에 없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나사렛에서 살다가 처형당한 예수가 다시 부활하고 하늘로 올라갔으며 이 세상을 완전하게 회복하기 위해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러한 주장, 즉 한 인간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 살다가 죽고 하늘로 올라갔다가 다시 올 것이라는 이야기들은 1세기를 살았던 로마제국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신화적 이야기가 아니라도 로마의 황제들은 스스로를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죽은 후 다시 하늘로 올라가 세상을 다스리는 쿠리오스, 즉 주Lord 라고 선언했다. 사람들은 시장agora에서 만날 때 마다, "시저가 주님이시다"라고 인사를 나누어야 했다. 정복지의 피식민지들은 역시 시저가 세상의 유일한 주님이심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 주님을 예배해야만 했다. 시저 이외에 다른 대상을 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위험천만한 행동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예수의 부활과 재림에 대한 경험과 믿음은 강력한 로마제국의 체제와 정신문화를 뒤집어 놓았다. 소수의 변두리 사람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이 아름다운 세상의 고통과 절망, 깊은 아픔을 온 몸으로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가난하고 소외당하고 억압당하고 배고프며 상처받아 고통당하는 자들은 예수에게 소망을 걸었다. 예수의 생전에 그들이 가지고 있던 소망은 로마 문화에 바탕을 둔 소망이었다. 강력한 군사력, 정교한 법률을 바탕으로 한 고도의 정치력, 높은 교육과 세련된 문화 예술의 힘으로 로마는 영국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활한 세상을 정복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가 보여준 기적과 이사, 지혜와 용기를 경험하면서 만약 이스라엘이 예수를 중심으로 뭉치기만 한다면 로마의 힘에 대항해 볼 만 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으로 모든 기대와 소망은 산산조각났다. 로마와 대항할 수 있다고 믿었던 "로마적 힘"을 예수가 스스로 거부하고 허무하게 스러진 것이었다. "십자가에서 너를 구원하고 내려와라"고 소리질렀던 사람들의 외침은 "더 강력한 로마적 힘"에 대한 갈망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절규였던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다. 군중은 흩어졌고 예수의 제자들 마저 뿔뿔이 귀향한 터였다.
끝내 예수를 잊지 못했던 것은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진정으로 예수를 사랑했다. "힘"의 그림자 조차 사라저 버린 싸늘한 시체라도 쓰다듬지 않고 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그들은 예수를 사랑했다. 안식일이 지난 첫 새벽 미명에 그 여자들은 전혀 새로운 예수를 만났다. 새로운 예수는 이전의 예수가 아니었다. 그는 더이상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여전히 먹고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만질 수 있었지만 그는 감각의 세계를 초월하여 존재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증거한 모든 증거가 참된 진리임이 드러났으며 따라서 그가 진정한 인간이며 동시에 진정한 "신"이라는 사실이 확증되었다.
도대체 전능한 하나님이 연약한 인간들에게 무슨 볼일이 있단 말인가! 여전히 이스라엘의 "나라"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 (행1:3). 예수는 이 온 우주가 하나님의 나라이며 이미 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회복되기 시작되었음을 경험적으로 증거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선포하였다. 전혀 새로운 나라,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 하나님의 영이 주도하는 나라, 그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 우리에게 시작되었다! 이것이아니면 무엇이 "유앙겔리온"이겠는가?
예수를 경험한 증인들은 이 세상의 회복이 정치권력이나 군사적 힘, 조직화된 법률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온 몸으로, 삶으로 증언하였다. 로마인들은 조간 신문이나 텔레비젼에서 들려오는 로마의 번영, 이를 테면 영토의 확장이나 군사력의 증강, 또는 피식민자들이 제공하는 특산물의 유입등을 "유앙겔리온" 좋은 소식으로 생각하고 환영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증인들은 그로마식 유앙겔리온에 대항해 전혀 다른 차원의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당신을 위해 나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나셔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주린 자들에게 기름진 잔치가 배설되었다. 수치로 그늘진 자들에게 긍지와 자부심이 생겼다. 노예에게는 해방이 선포되었으며 감옥에 수감되었던 자들에게는 사면선언이 내려졌다. 공동체에서 따돌림을 당했던 외톨이들에게는 저명한 친구들이 생겼다. 죄책감과 열등감에 괴로워 하던 사람들에게 인정과 격려의 박수와 환호가 주어졌다. 안정감과 자신감이 솟아 올랐다. 비난과 정죄로 오염된 언어에 칭찬과 감사의 샘이 터졌다. 가난한 자들과 부요한 자들이 한 상에서 즐겁게 애찬을 나눴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후투와 투치가, 영국인과 프랑스인이, 일본인과 한국인이, 북미인디안과 백인이, 미국인과 이라크인이, 독일인과 폴란드인이, 세르비아인들과 알바니아인들이, 인도네시아 인들과 동티모르인이, 수십년, 수백년을 미움과 혐오로 원수가 되어버린 도저히 상종할 수 없는 사람들이 서로 형제와 자매가 되었다.
예수를 경험한 증인들은 이 세상의 회복이 정치권력이나 군사적 힘, 조직화된 법률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온 몸으로, 삶으로 증언하였다. 로마인들은 조간 신문이나 텔레비젼에서 들려오는 로마의 번영, 이를 테면 영토의 확장이나 군사력의 증강, 또는 피식민자들이 제공하는 특산물의 유입등을 "유앙겔리온" 좋은 소식으로 생각하고 환영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증인들은 그로마식 유앙겔리온에 대항해 전혀 다른 차원의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당신을 위해 나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나셔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주린 자들에게 기름진 잔치가 배설되었다. 수치로 그늘진 자들에게 긍지와 자부심이 생겼다. 노예에게는 해방이 선포되었으며 감옥에 수감되었던 자들에게는 사면선언이 내려졌다. 공동체에서 따돌림을 당했던 외톨이들에게는 저명한 친구들이 생겼다. 죄책감과 열등감에 괴로워 하던 사람들에게 인정과 격려의 박수와 환호가 주어졌다. 안정감과 자신감이 솟아 올랐다. 비난과 정죄로 오염된 언어에 칭찬과 감사의 샘이 터졌다. 가난한 자들과 부요한 자들이 한 상에서 즐겁게 애찬을 나눴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후투와 투치가, 영국인과 프랑스인이, 일본인과 한국인이, 북미인디안과 백인이, 미국인과 이라크인이, 독일인과 폴란드인이, 세르비아인들과 알바니아인들이, 인도네시아 인들과 동티모르인이, 수십년, 수백년을 미움과 혐오로 원수가 되어버린 도저히 상종할 수 없는 사람들이 서로 형제와 자매가 되었다.
로마인들은 이러한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들의 대답은 "유앙겔리온"이었다. 로마인들은 노예와 주인이, 귀족과 하층민이, 부자와 거지가, 고매한 학자와 불학무식한 자가, 여자와 남자가, 유대인과 헬라인이 도덕적으로 불량한 자들과 인격적으로 훈련된 자들이 언어와 인종과 빈부와 학식과 정치적 이념과 삶의 방식과 문화를 뛰어 넘어 한 공동체를 이루어 유앙겔리온을 증거하는 이 특수한 집단의 사람들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혼동스러웠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할 수 없이 새로운 "유앙겔리온"을 증거하는 이 사람들을 "크리스티아노스Kristianos-그리스도인들" 이라고 불렀다 (행 11:27).
상처받고, 외면당하고, 죄 짓고, 더럽고, 교활하며, 폭력적이고, 사기치며, 거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신 예수는 나를 변화시켜 이 복음의 경험자로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나눌 것을 명령하신다. 나누면 나눌 수록, 경험하면 경험할 수록 더 풍성하게 채워질 것이다. 복음을 예수 믿고 교회 출석하고 죽어 천당가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해변 유양지에서 유람선을 타고 즐기는 휴가를 생각하며 "놀러 가자"라고 말 한 아버지의 "놀이"를 골목에서 코흘리게들과 딱지치기 하는 수준의 놀이로 심각하게 오해한 아이들의 생각과 같을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 아버지의 것이며 이 사실위에 (안에, 통해) 살아간다는 것이 유앙겔리온이다.
상처받고, 외면당하고, 죄 짓고, 더럽고, 교활하며, 폭력적이고, 사기치며, 거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신 예수는 나를 변화시켜 이 복음의 경험자로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나눌 것을 명령하신다. 나누면 나눌 수록, 경험하면 경험할 수록 더 풍성하게 채워질 것이다. 복음을 예수 믿고 교회 출석하고 죽어 천당가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해변 유양지에서 유람선을 타고 즐기는 휴가를 생각하며 "놀러 가자"라고 말 한 아버지의 "놀이"를 골목에서 코흘리게들과 딱지치기 하는 수준의 놀이로 심각하게 오해한 아이들의 생각과 같을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 아버지의 것이며 이 사실위에 (안에, 통해) 살아간다는 것이 유앙겔리온이다.
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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