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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2009

하나님

"이스라엘아 들으라, 야훼 하나님은 하나이신 하나님이시니.." 신명기 6:4

하나님은 "하나"이시다. 하나님은 산술적 개념으로서 "하나"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모든 것의 궁극, "수로써 표시할 수 없는 절대absolute"라는 의미에서의 하나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무한하고 영원한 "한"님이시며 절대적 권위와 권능의 "하늘"님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해 계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시는 분"이시다. 엡 4:6

그래서 유한한 인간은 무한의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크시고 또한 동시에 너무도 작으시다. 하나님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공동체를 통해서이다. 모든 것 위에, 모든 것을 통해, 그리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인식하려면 "모든 것"을 통합하는 것이 필요하다. 누구도 하나님을 온전하게 알 수 없다는 기본적인 전제를 수용하여 겸손과 배움의 자세를 가지고 서로를 존중하며 서로를 이해하려는 열린 마음, 너른 관점을 견지하여야 한다.

장님들이 코끼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신뢰하며 비평적으로 수용해야만 할 뿐 아니라, 나의 지식과 이해를 다른 사람들의 지식과 이해에 연관시켜 수정 보완하는 변증법적 접근이 필요한 것 처럼, 하나님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의 선이해를 객관화 시키고 나의 생각이 정초해 있는 전제와 가정에 질문을 던져 좀더 보편화된 기반을 확보하고 그 위에 논리적이며 통합적인 구조를 확립해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무한한 존재라는 믿음은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것을 요청한다. 하나님은 무한자이시기에 하나님 밖에서는 존재를 찾을 수 없다. 하나님 만이 스스로 존재하신다. 또한 하나님 만이 존재를 가능하게 하신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하나님께 의존적이다. 그렇다면 비존재는 어떤가? 비존재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음은 존재할 수 있는가? 실체reality가 없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더 긍국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빛은 존재한다. 어두움은 존재하는가?

우주적 그리스도

장공 김재준(金在俊, 1901~1987)

"크리스챤이 역사에 대하는 태도란 언제든지 구속사적 입장과 성격 안에서 이 현실의 역사를 비판해야 하며, 동시에 그 역사로 하여금 구원의 목표를 지향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 이 비판과 지향에서 크리스찬은 십자가를 각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기독교 사상 제2권 3호-

장공의 사상은 변혁적이며 문화적이고 창조적이다. 무엇보다 역사참여의식이 강한 선지자적 '얼'을 담고 있다. 바르트와 니버의 신정통주의를 수용하는데 있어 민족적 주체성이라는 자기의식을 잃지 않는다. 장공은 주체적 한국 신학을 정립하고 그 정신을 역사속에 구현하려 몸부림쳤던 선지자였다. 그에게 있어 복음의 핵심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였기 때문이다. 초월적 하나님이 강조된 신정통주의를 수용하며 한국의 근대상황에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을 강조함으로 주체적 신학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의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강조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초월성보다 내재적 그리스도를 더욱 강조하는 진보신학의 토대가 되면서 토착화 신학, 민중신학등의 원류를 제공한다.

장공은 시대의 사상적 조류를 꿰뚤어 보는 넓은 안목을 지닌 학자였다. 자신을 공격하는 수구 보수세력의 신학적 정체성과 그 뚜렸한 한계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의 장로교가 19세기 말부터 사멸의 길을 걷는 구프린스턴 중심의 근본주의에 과도히 영향을 받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성경 연구에 과학적 방법을 수용하면서도 사도적 신앙을 타협하지 않는 자율적 신학과 역사참여적 신앙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주체적으로 신학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세상을 변혁하는 창조적인 소수를 양성하고자 애썼다. 강원용, 문익환, 문동환, 안병무, 서남동 등은 그가 배출한 인물들이었다.

그의 선교의식 역시 선지자적이다. 교회의 선교란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전도로 축소될 수 없다. 역사속에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세상의 역사를 변혁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하나님의 뜻인 자유와 사랑과 정의의 평화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도록 하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다.

장공의 신학과 사상은 주체적이면서도 동시에 우주적이었다. 그에게 우주는 "하느님의 집," "아버지의 집"이었고 삶의 목표는 "범세계적, 더 넓게는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실현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카인의 문명과 아벨의 구속사가 하나로 통합이 되는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그것을 실현하는 주체가 교회이며,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선교였다.

함석헌, 김교신, 이용도와 함께 1901년 생인 그는 구한말 "역사의 어둠이 짙었을 때에" 태어나 질곡의 한국 근대사를 걸었다. 그러나 암울하고 폭압적인 역사앞에 좌절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계명성 동쪽에 밝아 이 나라의 여명"이 왔음을 선포했고, 은둔과 자적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인류의 횃불이 될 것"을 노래했다 (새찬582). 20세기를 살며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역사를 변혁하려 했던 그의 정신과 자취는 강렬한 빛이 되어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에게도 여전히 밝고 따습게 비췬다.
bk

2.21.2009

나의 사명

"나는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다. 그리고 내 일생은 나의 이 의무들을 얼마나 잘 감당하느냐에 따라서 성패가 결정될 것이다. 내 사명이란 곧 나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과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다."
좌옹 윤치호(1864-1945)
일기, 1권 410쪽, 1889년 12월 14일

윤치호는 조선 최초의 미국 유학생 신학도였다. 신사유람단의 일행으로 김옥균, 박영효등의 개화인사들에게 영향을 받은 윤치호는 1884년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허망하게 끝나자 삶을 회의하고 좌절하였으나 '그리스도 신앙'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1888년 부터 Vandervilt 신학부에서 3년 Emory대학에서 2년 도합 5년간 수학하였으며 신학 외에도 정치와 경제, 그리고 심리학등을 배웠다.

인간의 개혁과 사회적 혁신이라는 실용주의적 관심이 지대했던 윤치호는 조선말기의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관리들의 악과 그들의 사상적 뿌리인 유교에 실랄한 비판을 가한다. 스스로 도덕적 타락을 경험했던 윤치호는 "자기 부정"을 통한 인간갱신은 바른 종교만으로 가능하며 종교를 통한 "이기심의 극복"만이 도덕적 사회를 건설하는 기초라고 보았다.

귀국 후 정치를 통해 민족의 갱신을 도모하였으나 이미 기울어진 국운을 돌이킬 수는 없자 교육운동에 전념하였다. 한미서원(1906년, 후일 송도 고등보통학교로 개편)과 황성기독청년회 (조선YMCA, 1903)를 중심으로 민족의식과 민족성 개혁운동을 벌였던 그는 백성을 근대화하는 실업교육을 중요하게 여겼다.

윤치호는 하나님 사랑과 나라사랑을 하나로 보담았던 시인이기도 하였다. 그가 만든 찬송시 중 이런 낮익은 것이 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찬미가 14장 1절-

1900년의 마지막 날 일기에 "시간이 지나면 조선도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문명한 나라가 될 것이다...그렇다. 이 모든 꿈은 꼭 실현될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아, 300년 후 이 달라진 모습을 보기 위해 이 조선에 다시 돌아고 싶구나" 라고 소망하였던 윤치호가 100년이 조금 지난 오늘 천국에서 한국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못 궁금하다.
bk

2.20.2009

앎과 노출

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

"The truth is a snare: you cannot have it, without being caught. You cannot have the truth in such a way that you catch it, but only in such a way that it catches you."

진리는 인격이다. 진리는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에게 우리가 노출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진리에 의해 점령당하는 것이다. 진리는 살아있는 인격이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알아간다는 것은 그에 의해 영향을 받는 다는 뜻이다. 그래서 진정한 앎은 내 자유를 댓가로 지불할 때에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하신 말씀은 이런 점에서 역설이다. 내 자유를 그분에게 내려 놓는 믿음이 선행되어야 진리를 알 수 있게 된다. 내 자유를 포기할 때에라야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된다. 키에르케가르는 말할 것이다. 내가 누리려는 자유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누리는 자유에는 극명한 질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말이다.

"무엇이 삶이냐"고 묻지 말고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라고 물어라. 내가 존재하는 방식이 내 삶을 규정하는 것이지 삶을 정의내리자고 내가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어차피 삶은 누구에 의해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방황하지 말아라. 대신 의미있다고 믿는 바를 행하며 오늘을 살아라. 그것이 의미있는 삶이며 삶의 의미이다.

2.13.2009

종교 교육의 목적

사랑하는 당신에게,

William Ellery Channing이라는 미국 교육자가 쓰신 글을 읽다가 감동받은 내용을 나누고 싶습니다. Channing은 1780년에 태어나신 분이니까 한국으로 따지면 조선시대 정조때 사람이에요. 이 분이 1830년에 선데이스쿨 연합회에서 설교를 하셨는데 그 내용중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어요.

"진정한 종교교육의 목적은, 그것이 주일학교에서건, 아니면 가정에서건 간에, 우리의 생각을 아이들의 마음에 도장 찍듯 새겨 넣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 자신의 생각을 불러 일으키도록 돕는 것이며; 아이들이 우리들의 시각으로 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탐구하면서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며; 정해진 양의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열정적 사랑을 고취시키는 것이며; 외적 규범들을 형성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적 동기를 자극하는 것이며; 암기의 짐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사고하는 능력을 강화시키고 촉진시키는 것이며; 편협하고 좁은 특정한 그룹의 뿌리깊은 편견으로 아이들을 얽매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어떤 주제이든 공정하고 양심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며; 진정한 기반 없이 그저 어른들의 전통과 규칙들로 종교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양심을 일깨우고 도덕적 분별력을 함양하게 함으로 아이들이 자신과 세계를 위해 궁극적으로 선하고 옳은 것을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안과 밖에서 선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느끼고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적 눈을 열어 그리스도의 아름답고 광대하신 성품을 보게 하여 그를 흠모하며 닮아가고 싶은 열정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William E. Channing, The Sunday School: A Discourse Pronounced Before the Sunday School Society (Boston: James Munroe, 1838), 9-10.

너무나 옳기에 차라리 아름답기까지 한 진술이지요? 그런데 이분은 삼위일체를 믿지 않고 예수님을 그저 위대한 선생님으로 보는 유니테리안주의자였다고 해요. 하지만 그가 무슨 주의의 사람이었건 간에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을깊이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 많큼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말로 설명해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게 해 주셨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되 한번도 강요하신 적이 없으세요. 다만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자라도록 꿈의 씨앗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그분은 한번도 자기처럼 생각하라고 강요하신 적이 없으셨어요. 대신 늘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도전하셨고, 정형화된 교리와 도덕주의에 안주하며 사람들을 정죄하고 스스로 분리되려고 했던 종교지도자들을 무섭게 비판하시고는 말씀과 율법에서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의 정신을 재해석하고 현실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방법을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무시당하던 절대 약자인 아이들을 "천국의 주인"으로 표준화 하시는 혁명적인 선언을 하시고는 꼬질꼬질 더럽고 냄새나고 천방지축인 가난한 아이들을 사랑으로 끌어 안아 주셨습니다. 가장 위대한 교사이셨던 그분의 가르침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니..."

어디 아이들 뿐 이겠습니까?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직장에서나, 사업장에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죽는 그날 까지 배워가는 평생 학습자들입니다. 진정한 개인과 사회의 변화는 뿌리 깊은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상대를 존중하고, 공동체를 가치있게 여기며, 서로 다름을 소중하게 받아들이고, 함께 배우고 자라가려는 겸손한 마음의 태도 속에서, 그리고 각자가 처해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너른 상상력과 공교한 실천적 지혜로 대안을 만들고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공동의 노력을 통해서, 무엇보다 우리 안에서 일을 이루어 가시는 삼위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 진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이러한 믿음을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실천하려고 몸부림치는 부모의 모습을 통해서 선한 영향력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180년 전에 선포된 Channing의 교육에 대한 메세지를 대하면서 내가 받았던 교육과 내가 하고 있는 교육을 생각해 보니 한편으로는 부럽고 한편으로는 너무나 부끄러운 복잡한 심정입니다. 그래서 부러 "사람으로는 할 수 없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되뇌어 보며, 아이들과 우리 자신을 위한 특별한 기도의 시간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면서 무릎꿇기를 고대해 봅니다.

오늘도 힘내시고 많이 행복하세요.

bk

2.10.2009

배움이란

배움이란 의미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느끼는 현재의 경험들을 의미화하는 것이다.
우리의 경험들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 통일성을 부여하고, 일관된 설명이 가능하게 하는 것, 즉 해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배움이란 끊임없는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 즉 경험의 해석과정이다.

Jack Mezirow, Transformative Dimensions of Adult Learning, 1991. p. 11

사람들은 저마다의 "습관화된 기대의 틀sets of habitual expectation" 또는 "의미관점meaning perspective"을 통해 감각된 자료들을 이해하고 수용하며 기억한다. 의미관점은 Albert Wolters가 설명한 세계관일 수도 있고, Thomas Kuhn의 패러다임일 수도 있고, Sara Little의 신념체계일 수도 있다. 여기서 매저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점은 사람들이 외부의 정보들을 수용할 때 주체적으로 이미 스스로 가지고 있는 의미를 부여하는 어떤 구조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사과를 본다고 할 때, 그 사과가 주는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에게는 단순한 과일로, 다른 사람에게는 누가 남기고 간 쓰레기로, 또 다른 사람에게는 그리고 싶은 대상물로 수용된다. 이렇게 같은 사물을 놓고도 다른 의미가 만들어 질 수 있는 원인은 그 대상물 자체의 속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실체를 수용하는 수용자의 "의미관점"의 차이 때문이다. "의미를 느낀다", "의미를 부여한다", "의미를 창출한다", 또는 "의미를 깨닫는다"는 것은 모두 외부의 자료를 수용하는 데 있어 "의미관점"을 활발하게 사용하여 외부의 자료들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은 사실상 언어라는 시스템을 통해 구체화된다. 사과를 인식할 때 이미 거기에는 "사과"라는 언어로 제한된 의미가 부여된 또는 분류categorized된"사과"의 개념을 수용하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비트겐쉬타인을 좀 공부해 놓을 것을 그랬다. 소쉬르로 부터 시작되는 언어사회학/기호학의 기본 개념을 배워둘 필요가 있다. 랑그와 빠롤, 그리고 기표와 기의를 구분하고자 했던가? 랑그는 빠롤이 가능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기의와 기표의 관계는 사물과 단어가 아니라 개념과 청각이미지와의 관계이다.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언어가 역사와 사회를 통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의미관점은 사회의 산물이며 문화적 상황에 항상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상인과 현대의 비즈니스맨은 언어만 다른 것이 아니다. 의미는 선언어적으로는 prelingustically 상황과 상징적 모델들을 통해, 그리고 (직접적으로는) 언어를 통해 구성된다.

의미관점은 새로운 자료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데 일정한 구조를 따르게 하며 수용된 경험은 다시 의미관점을 재형성하고 확장시킨다. 배움이라는 것은 이러한 과정들 속에서 기존의 의미관점에 커다란 변화가 올때 일어난다. 이미 구성화된 의미관점들, 선입관, 가정, 전제,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입장, 사회적 상태와 교육된 이해들의 복잡한 의미관점들에 변화가 생기는 것이다. 매저로는 이를 관점의 변화perspective transformation라고 지칭한다.

배움은 해석의 변증법적 과정이다. 이미 가지고 있는 의미관점을 통해 대상들이나 사건들과 상호작용을 하는 변증법적 과정이다. 보통은 이미 형성된 의미관점을 가지고 현재 사건이나 대상을 해석한다. 그러나 변화학습은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지나간 과거의 경험을 재해석하여 결국 과거 경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관점을 창조해 낸다.

배움은 현재 경험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재구성함으로 장래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강화하는 과정이다.

2.05.2009

Bloom's Taxonomy


시대가 지남에 따라 앎의 내용과 과정은 변화한다. 디지탈시대에 앎이란 컴퓨터와 인터넷에 상호 의존적이 될 수 밖에 없다. 구글링과 블로깅은 인식의 내용과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친다. 모든 것이 그렇듯 긍정적것과 부정적인 것이 혼재한다.

지식의 진정한 기반이 유동적이며 가변적일 때 그것은 더이상 기반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한다. 끊임없는 해체와 재구성, 창조적 발달을 지향하면서도 그것이 바른 방향성을 상실하지 않으려면 거대한 외부, 또는 절대 타자에 의존적이어야 한다는 가정을 믿음으로 수용하여야 한다. 우리에게 그것은 곧 신앙공동체의 신학하는 삶을 통해 확증되고 구현된다고 믿는다.

b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