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염원하는 두 번 째 청원은 예수의 가르침의 요체인 산상수훈과 주기도문에서도 그 고갱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예수가 염원한 "당신의 나라(hei basileia sou)가 현실화 됨"이 내포하는 존재적 긴장(tensity)은 우리의 기도속에서 거의 무시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기 예수 공동체에게 있어 "나라"의 문제는 추상적 정치토론이나 스트레스를 푸는 잡담거리의 단골메뉴가 아니었다. 로마 제국의 식민지 통치나 이에 저항하는 유대민족주의자들에게 있어 "예수 공동체"는 공히 '공공의 적'이었기에 예수공동체에게 있어 "나라"의 문제는 하루의 안녕한 삶과 직결된 긴급하며 절박한 문제였다.
예수의 생애를 전후로 로마제국은 치밀한 법률과 강력한 군사력, 그리고 세련된 문화를 바탕으로 여러 민족들을 정복하고 착취하여 로마적 번영과 평화(pax Romanna)를 추구하였다. 반면 유대민족은 유대교의 선민사상과 메시아주의를 근거로 창조주 야훼의 통치가 유대민족의 정치적 해방과 흩어진 디아스포라가 집결됨을 통해 실현될 것을 신앙하고, 제국의 이데올로기와 황제숭배를 기반한 무력적 식민지 통치에 대항하여 격렬하게 투쟁하였다. 이 두 나라의 힘의 충돌 사이에 십자가가 서 있다. 이스라엘의 해방을 염원하던 유대 민족주의자들은 예수가 보여준 놀라운 기적과 이사를 팍스 로마나(pax Romanna)를 전복시키고 이스라엘을 살롬의 중심(Jerusalem)으로 회복하는 메시아적 힘으로 오해하였다. 반면 식민지의 치안을 제국 번영의 기초로 보았던 로마군인들은 스스로 왕임을 주장하는 예수와 골치아픈 유대지도자들 사이의 분쟁이 정치적 소요로 번지지 않도록 사전에 제압하려 하였다. 따라서 로마군인들은 예수에게 시저의 황금 면류관 대신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찌어다"라며 모욕하고 폭행하였고, 유대인들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스스로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소하였다. 자력으로 번영과 구원을 획득하려는 아담적 실존은 자기를 비움으로 생명을 얻는 그리스도의 실존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터였다. 십자가와 부활로 시위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당시 제자들의 "나라"의 이해, 즉 로마적 힘과 번영을 추구함과 이스라엘의 신적 존재에 힘입은 자기 실현, 에 근본적 교정을 요구한 것이었다.
로마적 힘의 추구와 유다적 메시아주의 공통적 뿌리가 스스로 주인되려 하는 "자기 중심성"이 라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청원은 이러한 "자기 중심성"의 뿌리를 찍어내는 강력한 도끼이다. 자기 스스로의 판단, 경험, 자원, 지혜, 힘, 인맥을 의존하여 자기의 왕국을 건설하고 안녕을 보장받으며 번영을 추구하려는 자기 중심성은 예수 공동체 안에서도 그 맹위를 떨쳐 부활한 예수에게 조차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를 질문하게 하였다. 그러나 스스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유혹의 정체를 직시하고 거부하며 하나님을 힘입어 그분의 언명대로 살아가기를 선포한 예수의 사람들은 지금 이 세상에 만연한 개인적, 사회적, 민족적, 국가세계적 문제의 근원이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려하는 죄성"임을 비분강개하고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신 둘 째 아담의 못다한 절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를 영혼에 담아 "나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가 내 삶의 구석 구석에 임하시기를 간절히 염원해야 한다. 이 염원을 예수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요약한다.
결국 하나님 나라의 현실화를 위한 청원은 실천적으로 자기 부정을 위한 기도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하지 않는 자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요원하다면, 자신의 자원과 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적대적이고 위협적이다. 스스로 절망하여 자기를 부인할 수 밖에 없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열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에 대한 절망은 하나님 신앙의 자궁이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절망은 자연스럽게 되지 않는다. 인간의 죄성은 스스로 살기 위해 자신과 이웃의 생명을 해할 만큼 뿌리가 깊고 강력하다. 따라서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음 조차 스스로 할 수 없다는 실존앞에 자아가 해체되는 것 (이러한 자기 부정을 자연인중 누가 감히 원한단 말인가?)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나라이 임하옵시며"는 자기 부정을 위해 초월적 은혜를 요청하는 기도로 발전한다.
이 기도를 바탕으로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통치속에 자기 한계를 초월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음습한 지하동굴에 숨어서도 로마의 제국주의와 배타적 유대주의를 뛰어넘어 노예와 주인이, 귀족과 하층민이, 부자와 거지가, 고매한 학자와 불학무식한 자가, 여자와 남자가, 유대인과 헬라인이, 도덕적으로 불량한 자들과 인격적으로 훈련된 자들이, 언어와 인종과 빈부와 학식과 정치적 이념과 삶의 방식과 문화를 뛰어 넘는 우주적 "하나님 나라" 예수 공동체를 경험할 수 있었다.
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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