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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2009

자기 중심성과 하나님 나라 (1/6)

'하늘에 계신' 이라고 말하지 말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말하지 말라,
너 혼자만을 생각하며 살아 가면서...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
하나님의 아들, 딸로서 살아가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말하지 말라,
실제론, 자기 이름을 빛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하지 말라,
물질 만능의 이 세상을 좋아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라고 하지 말라,
내 뜻대로 되기를 원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라고 말하지 말라,
속으로는 평생토록 먹을 양식을 쌓아두려 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저희를 용서해 주옵시고' 라고 말하지 말라,
누구에겐가 지금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며'라고 말하지 말라,
죄 지을 기회를 은밀히 찾아 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옵시며'라고 말하지 말라,
악을 보고도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으면서...
'아멘'하지 말라,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조금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우루과이의 어느 성당에 써 있다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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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자기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문(엄격하게 말한다면, 주께서 가르치신 또는 명령하신 기도모범)은 그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핵심 메세지를 담지하고 있다. 특히 마태판에서의 주기도문은 산상수훈의 정 가운데 위치함으로 '하나님 나라'공동체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에 절정부분을 차지한다. 여섯 가지의 요청/청원으로 되어 있는 주기도문은 그당시 다양한 유대공동체에서 회람되던 생활 기도문들과 비교하여 볼 때, 문학적 형식과 일상에서의 사용방식을 공유하지만, 그 내용은 현격히 다르다. 특별히 인간의 근원적 죄성인 자기 중심성에 기반한 기도를 우주적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염원으로 교정하고, 실제 삶 속에서의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한 의도적 실천(orthopraxis)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점이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
마태판에서 등장하는 '하늘에 계신'의 수식은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다. 하늘(uranos)은 초월과 궁극을 상징하는 메타포임과 동시에 '늘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전능성과 무소부재의 속성을 내포한다.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 안에 계시고, 만물을 통해 계시는 무한한 창조주가 '우리 아빠'가 되셨다는 선포는 그래서 혁명적이다. 무한한 하나님이 한낱 먼지와 같은 피조물과 생명 세계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친밀하고 깊은 관계를 맺으셨다! '아버지와 자녀들'의 관계는 영원한 신뢰와 사랑, 자비와 긍휼, 용서와 수용, 보호와 공급의 언약관계가 공동체적으로 주어졌음을 천명하며 창조주의 피조물을 향한 기이한 사랑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기도는 비인격적인 주문이나 부적일 수 없고, 왕에게 고하는 신하의 상소도 아니다. 기도는 어린 자녀가 아빠와 갖는 친밀한 관계의 속삭임이며 전 존재의 의지적 의존과 하나됨이다. "아빠"를 부르는 순간은 창조의 영과 인간 영의 교통이 시작되고 왜곡된 자아와 뒤틀린 세계를 강압하는 존재의 허무를 부수고 무한한 생명의 파장으로 침투하시는 성령의 사건이 발생한다.

일인칭 복수 소유격인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창조주와 언약공동체인 자녀들과의 공동체적 관계를 통해 구현됨을 암시한다. '우리 아빠'는 개체적이며 자기 중심적인 수직관계를 형제와 자매된 공동체원들과의 관계 보다 우선시 하려는 시도가 가지는 불합리성을 지적한다. 초월적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만 도달하는 것이며 따라서 실존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우리"가 없이는 "아빠"도 존재할 수 없다는 명제가 가능해 진다. 세종대왕이 예수를 경험적으로 알리 만무하며 이순신 장군이 "하나님 나라"를 상상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다른 이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초월적 하늘 아빠와 피조물이 관계 맺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분의 은혜를 믿음으로 수용하여 아버지와 자녀들의 "공동체적 언약관계"가 성립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 뿐이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한 까닭은 동료가 없을 때 경험하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함이 아니며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었다는 점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존재양식 자체가 세분의 하나님이 한 하나님이 되시는 완전한 공동체이심을 상기한다면 기도는 공동체의 공동체에 의한 공동체를 위한 것임이 자명해 진다. 따라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는 나의 나에의한 나를 위한 기도가 가지는 중요성과 한계를 동시에 인식하게 하고 기도주체는 언약 공동체임을, 하나님의 나라는 언약 공동체에 기초함을 각인시킨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기도하는 이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는 청원의 주체와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실존적 차이와 이를 뛰어 넘는 하늘아버지의 사랑을 인식하며, 깊은 신뢰와 함께 두렵고 떨림의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간구할 것을 요청한다. 따라서 이러한 실존적 차이를 극복하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인식은 자연스럽게 하늘 아버지의 속성들이 찬양되고 인정되기를 바라는 첫번 째 청원으로 연결된다.

거룩의 일차적 개념은 윤리적이기 보다 관계적이다. 영원한 타자로서의 하나님은 유한한 피조물과 극명히 대조되는 초월적 존재이시다. 하나님의 존재선포인 그분의 이름에 외경심을 느끼고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카도쉬)이 돌려지기를 사모하는 마음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아버지와 자녀들이 갖는 '관계의 진실성'을 반증한다. 즉 하나님의 이름에 두려움도, 떨림도, 흠모함도, 깊은 신뢰나 사랑도 느낄 수 없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마땅히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는 간절한 염원이 없다면, 스스로 하늘아빠와 맺고 있는 언약관계를 점검해야 한다.

이러한 초월적 절대 타자와의 특별한 관계맺음에서 거룩의 이차적 개념인 윤리성이 도출된다. 하나님의 거룩은 그와 관계맺는 인간의 속성과 존재가치를 무한히 끌어 올려 상대적이며 주관적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도덕과 윤리를 지고한 보편과 궁극의 굳건한 반석 위에 올려 놓는다. 하나님을 경외함과 성스러움에 대한 갈망은 인간의 충만한 삶을 보장하는 샬롬의 기반이며 자유와 평등, 정의와 인권, 평화와 행복의 가치들을 인간됨, 또는 인간관계의 "기본"조건으로 승격시킨다.

따라서 하나님 이름의 거룩함을 부르짖는 기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에 대한 광대하고 우주적인 선포이며 인간의 거대한 절망과 한계를 미세한 분진으로 축소시키는 강력한 인식의 전환이다. 동시에 거룩에의 청원은 찬양과 경배의 대상에 인간 자신을 위치시키려는 죄의 본질을 근원적으로 부정하게 함으로 지독하게 뿌리깊은 자기 우상화를 경계하고 동료인간과 전 피조세계에 샬롬을 천착시키려는 갈망과 의지를 독려한다. 말과 행동과 의지와 생각과 태도에서 하나님의 성스러움을 힘입어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 드리려는 마음과 결단의 표현은 경배와 예배를 배타적 집단이 갖는 자기 만족의 사적 종교의식에서 벗어나 전 인류의 발전과 피조세계의 중흥을 신의 주권에 맡기고 의탁하는 웅혼한 축제로 승화하게 한다.

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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