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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3.2009

신학과 과학이 만나다

많은 인문과학들과는 달리 신학은 주로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있는가" 하는 것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다. 신학적으로 건전하다고 할 수 있는 대상들이 "어떻게 믿게 되는가"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믿는가"에 관한 질문들에 대한 대부분의 답변들은 교묘하게 "무엇"에 관한 답변으로 바뀌어지든지, 성령에 관한 대답으로 어느새 둔갑해 버리고 마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성령에 관한 문제야말로 기독교의 중심적인 여러 교리들 가운데서 가장 잘못 정의되고있고, 가장 신비에 싸인 채로 모호하게 설명되고 있으며, 혼돈상태에 빠져 있는 교리 중의 하나이다.

인문과학의 방법론은 특수화시키고, 구체화시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인문과학은 신비한 체험들이 가지는 함축적인 의미들을 과정적인 관점에서 관찰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인문과학은 그러한 관찰이 가능하게 된 궁극적인 근거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거나 "잊고있다." 인문과학은 그러한 근본적인 실체에 대한 체험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반면, 신학적인 방법론은 이와 같은 체험의 중요성, 이러한 체험을 가능하게 한 궁극적인 근거 및 이러한 체험의 내용에 특별히 초점을 맞추게 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신학의 방법론에서는 구체성이라든지 특수성이 무시된다. 다시 말해서 신학은 그러한 변화의 체험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성격을 해석하는 데 필요한 충분한 근거를 마련해 주지 못하며, 그 체험들의 각 과정에서 찾아 볼 수 있는 특수한 성격들을 제대로 분석해 내지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도 못하고 있다. 우리들이 그러한 체험을 통해서 신학에서 주장하고 있는 궁극적인 원인들에 어떻게 참여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신학은 설명해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James E. Loder, The Transforming Moment,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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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교부 터툴리안은 "아덴이 예루살렘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Quid ergo Athenis et Hierosolymis)"라고 도전하면서 신앙과 이성에 있어 신앙의 우위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를 구원의 전제로 보는 개혁주의적 입장에서는 예루살렘과 아덴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해하는 양 날개와 같다. 일반은총와 특별은총의 우위를 논쟁하려면 언제나 승리는 극단적 칼빈주의자의 것으로 남겨질 테지만, 궁극적인 진리는 하나님만이 아실 일이라는 칼빈의 뻔한 권고는 여전히 유효하며, 따라서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포함한 모든 과학적 접근을 구속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일은 더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특정한 전통, 경험, 문화, 그리고 시대정신 속에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임을 겸손히 수용한다면 맹목적 신앙의 파시즘과 이미 파산해 버린 이성주의의 허상을 뛰어 넘어 신학과 과학의 진지한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실천들은 신학과 과학의 진지한 상호성찰 위에 세워 져야 하며 이는 모든 공동체원의 주체적 참여를 요청한다.

로더는 T. Parsons의 복합적 사회시스템을 기반으로 개인의 정신, 문화, 조직, 그리고 사회가 각각 어떻게 상호관련을 맺는지 분석하려 했다. 특히 성령의 역동적 역사가 이 네 시스템 속에서 어떻게 일어나며 또한 이 네 시스템 속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탐구하려 했다.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하는가? 인간은 어떻게 변화되는가?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 자연적 발달단계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인간의 종교경험과 뇌세포의 화학작용은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가?

피상적 경험의 주관성에 함몰된 설교와 가르침이 신학적 타당성과 함께 실제 삶에서의 적합성을 확보하려면 자의적 해석으로 가득찬 자기신학의 한계를 정직하게 고백하고 보편인간에게 부어주신 일반은총의 도구들을 긍정하여 겸손과 부지런함으로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고 창조세계에 대해 진지하게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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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만일 그대가 원한다면
나 그대에게 드리렵니다
아침, 그토록 상쾌한 아침과
당신이 좋아하는
빛나는 내 머리칼과
푸르고 금빛나는 내 눈을.

만일 그대가 원한다면
나 그대에게 드리렵니다
따스한 햇살 비치는 곳에서
눈뜰 때 들려오는 온갖 소리와
분수에서 들리는
흐르는 물줄기의 아름다운 소리를.

마침내 찾아들 석양 노을과
쓸쓸한 내 마음으로 얼룩진 저녁,
조그만 내 손과
당신 가까이에
놓아두고 싶은
나의 마음을.

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
(painting; Muse Inspiring the Poet. Portrait of Apollinaire and Marie Laurencin, by Henri Rousseau,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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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아폴리네르는 이탈리아의 시인이며 예술 평론가였다. 피카소 등과 입체파 미학을 확립하고 20세기 초반의 전위적 예술 활동에 참가하면서 모더니즘을 이끌어 갔다.

"당신 가까이 놓아두고 싶은 마음"보다 더 큰 선물이 있을까? 나를 다 주도록 사랑하는 그 사랑은 계속 되어야 할 일이다. 그렇게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 가까이 놓아두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해준 그 상대가 더 큰 선물이리라. 그건 그렇고 이장희씨는 아폴리네르를 알았을까?

예배와 기도는 마음과 태도의 문제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다시 한번 나의 마음을 그분 가까이 놓아 드리기로 결심한다. 비록 빛나는 머리칼이나 푸르고 금빛나는 눈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 모나고 거친 마음에 실수 투성이인 허물 많은 나라도 목숨을 다해 사랑하시는 그분에게 내 마음과 정성을 모아 드릴 일이다. 애쓰고 힘쓰기 전에, 그분을 향한 그 애틋한 마음이 왜 덤덤해 졌는 가를 점검하고 평가해 볼 일이다. 그분의 깊고도 깊은 사랑에 충만히 졌도록 나를 그 거룩한 지성소 안으로 들일 일이다. 그래서 그분의 신실하신 사랑에 고요히 나를 잠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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