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정말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바다보다 깊고 우주만큼 넓은 내 죄를 완전히 덮으셨으니까요. 그리고 그 사랑을 알면 알수록 내 죄는 더욱 커져만 가고, 그래서 그분의 사랑은 더 넓고 깊어만 갑니다. 영원히… 하나님은 "사랑하심"입니다. 사랑의 한 부분을 질투라 표현한다면 삼위일체 하나님도 서로 질투 하실 테고(신명기 4:24), 질투가 자기사랑의 변질된 사랑이라면 당연 해당이 안되겠지요. 자매의 사랑을 위해서라면 삼위 하나님은 서로 질투하실 거에요. ㅎㅎㅎ
이러한 진리를 배워갈 수 있도록 공동체를 허락하신 주님의 사랑 또한 꼭 언급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혼자사랑은 있을 수 없으니까요. 하다못해 짝사랑도 대상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하심처럼,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비결입니다. 공동체가 없다면 "서로 사랑함"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심한 좌절과 갈등을 경험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입장, 다른 관점, 다른 경험, 다른 나이, 다른 성장과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서로 갈등하고 아파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원하는 것이 다르고, 기대가 다르고, 이해하는 바가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고, 처해진 상황이 다르니까요. 게다가 나도 내가 이해가 안 갈 때가 많은데 어떻게 남이 이해가 가겠습니까? 나도 내가 싫을 때가 많은데 어떻게 남이 마냥 좋겠습니까?
세상 공동체 같으면 좀 간단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는 관계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그러니 목적을 위해 관계가 희생당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관계는 당연히 이해타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일을 위한 수단이 됩니다. 겉으로는 너무나 효율적이고, 너무나 조직적이고, 너무나 생산적일 수 있지만, 오히려 모든 도덕적 비극이 여기서(인격의 소외) 발생한다는 것을 철저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정 반대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의 핵심이고 교회의 힘입니다. 교회공동체는 관계 자체가 목적입니다. 그리고 관계를 통해 일이 성취됩니다. 신앙이라는 목적을 이룰 수단으로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 관계 속에서 신앙을 배워가는 것이 교회입니다. 예배를 위해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사랑으로 관계가 성립되기 때문에 모일 때 마다 예배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선교라는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관계는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선교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관계가 없이는 예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이 너희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내가 함께 있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것은 두 세 사람이 모인 장소에 예수님께서 같이 계신다는 뜻이기 보다는, 두 세 사람이 모인 그 관계 속에서 예수님이 드러나시고 경험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나와 여러분 속에 거하십니다. 그러니 모여서 공동체를 이룰 때 좀더 분명한 그리스도의 모습이 만들어 지지 않겠습니까? 내가 알고 느끼고 믿는 예수가 다라면 그렇게 부분적인 예수가 어떻게 진정한 예수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죠. 그래서 다른 이들에게 역사하시고 나타나시는 예수가 필요한 것이며 우리의 관계를 통해 역사하시는 예수가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공동체 안에서만 더 풍성하고 더 깊고, 더 심오한 예수, 깊은 예수가 경험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내 주변에 있는 형제 자매들이 얼마나 귀한 사람들입니까? 나에게 예수를 풍성하게 경험하게 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사랑을 전달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나의 죄를 깨닫게 해주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나로 하여금 기도의 자리를 펴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나의 연약함과 오만과 독선과 아집과 상처를 발견하게 해 주는 영혼의 거울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모습 그대로를 용납해 주며, 내 안에 있는 가능성을 드러나게 하고, 나의 무너진 자아를 곧추켜 세워주고, 깨어진 자아를 다시 재구성해 주는 치유자들입니다. 이런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을 때에야만, 우리는 사랑, 기쁨,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온유, 절제, 충성과 같은 성령의 열매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맺어지는 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공동체는 신비입니다. 연약한 공동체일 수록 그 신비가 더 뚜렸하게 나타납니다. 조용하고 느린 공동체일 수록 그 신비가 더 분명해 집니다. 오죽하면 하버드와 예일의 교수였던 헨리 나우웬은 정신 장애인 공동체인 라르슈에 들어갔을 때 진정한 "공동체"를 배우고 상처를 치유 받았다고 했겠습니까? 공동체는 행사나 집회, 강의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공동체는 서로의 연약함 때문에 서로 아파하면서도 예수의 사랑으로 함께 인내하고 보듬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을 통해서만 만들어 집니다. 그래서 순이 중요합니다.
쓰다 보니 직업병이 도지네요… 이 메일 길게 쓰는 것도 전염되는 모양입니다. 조심해야지…ㅎㅎ
오는 토요일에는 예수님이 세상을 향해 도전하셨던 공동체를 세우는 리더십에 대해 나눌 것입니다. 말씀 구절들을 성경에서 찾고 자신의 생각을 적어 오시기 바랍니다. 7시 30분부터 간단한 아침을 나누고 8시부터 찬양으로 시작해서 10시에 마치도록 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으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2.19.08 "삼위 하나님이 질투하시는가"를 묻는 자매에게 bk